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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다른 수많은 유명한 고전 문학 작품들이 그렇듯, [위대한 개츠비]는 실제로 읽은 사람에게나 읽지 않은 사람에게나, 어느 정도 일정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하얀 색 랄프 로렌 풍 수트로 대표되는 1920년대 풍 패션을 떠올립니다. 이건 당연히 레드포드가 주연한 1974년작 영화의 영향이겠죠.

 

그리고 참 의외였던 것은 많은 남자들이(그리고 심지어 많은 여성들도) 제이 개츠비를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이상적인 남자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소설은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려낸 이 유명한 인물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집요한 집착(^^)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단면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즈 루어만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놀랍도록 완벽하게 원작의 정서를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원작과 원작자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에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줄거리.

 

1922년 뉴욕. 중서부 명문가 출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뉴욕에서 성공하겠다고 결심한 예일대 출신의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는 8촌 여동생 데이지(캐리 멀리건)와 그 남편이며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대부호 가문의 후계자인 톰(조엘 에저튼)을 방문합니다. 거기서 여성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엘리자베스 드비키)로부터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남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닉이 알게 된 옆집 남자 개츠비는 '엄청난 저택의 주인이며 뭘로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말마다 수백명을 불러다 파티를 여는' 신비한 남자. 어느날 닉에게 개츠비의 파티 초대장이 전달됩니다. 파티장에서 닉은 조던과 재회하고, 신비의 인물 개츠비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놀랍니다.

 

그리고 닉에게 계속 호의를 베풀던 개츠비는 어느날 예기치 못한 부탁을 해 옵니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데이지를 향한 사랑에 일평생을 바친 제이 개츠비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입니다. 일단은 조금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개츠비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1920년대라는 시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9년 내려진 금주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술을 사고 팔지 못하게 된 시대. 그렇다고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술을 마시지 않을 리는 없으니 엄청난 밀주 조직과 비밀 클럽, 사설 파티가 유행하게 됩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선을 강요하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도덕이 몰락하고, 경로가 확실치 않은 자금이 투기에 사용되며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풍요로운 시대가 됩니다.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는 재즈가 대중의 음악으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의 시대, 즉 뒷날 재즈 에이지 Jazz Age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인 것이죠. 아울러 플래퍼 Flapper의 등장과 함께 여권 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대에 등장한 개츠비는 전통적인 '미국의 질서'에 대한 도전입니다. 전통적인 세습 명문가 출신이 아닌 갑부. 그런 개츠비에게 데이지를 빼앗길 수 없다는 톰의 분노는 기존 주류 사회의 집단적 반발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은근히 개츠비를 응원하는 닉의 시선 역시 우연의 소산은 아니죠. 도덕적 리더십을 잃은 세습 부유층의 이기적인 행태를 바라보는 피츠제럴드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물론 피츠제럴드 본인의 경험이 깔려 있죠.)

 

 

 

 

사실 개츠비며 데이지는 모두 그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개츠비는 20세기 이후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교육/문화의 측면에서 상류층과 격차를 좁힌 젊은 세대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격차를 극복하는 것은 그와 전혀 다른 차원의 장벽이라는 것이죠. 이런 시각에서 보면 데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성공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의 상징인 셈입니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스토커 적인 집착(^^)을 단순히 '일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낭만적인 이야기'로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그 당시의 시점에서 자신이 데이지를 행복하게 해 줄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도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이건 순전히 '개츠비 혼자의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산업 사회에서 많은 젊은 개츠비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는데, 이때 어떤 여자들은 개츠비(부자가 되기 전의 가난한)를, 어떤 여자들은 톰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개츠비들은 여자에게 선택을 요구하기 이전, 스스로 '지금의 내 상태론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가슴아프지만 지금은 내가 더 커야 해.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뒤 돌아와 말하겠어. 이제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자기 혼자의 생각인데 개츠비는 '당연히 데이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후 수많은 개츠비들의 비극이 뒤를 따르는 것이죠.

 

(물론 '많은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능력이 없더라도 젊은 개츠비를 선택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개츠비의 판단은 실제로 정확했을 겁니다. 돈이 없으면 개츠비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참하게 제외되고, 데이지는 어딘가에 있을 재력가 톰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결과적으로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순전히 '개츠비의 시선에서 내려진 판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단 지금은 내가 더 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개츠비에게 '미래의 어느 시점에 데이지를 되찾을' 기회가 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살아 보시면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아시게 됩니다.

 

(네. 이렇게 해서 많은 개츠비들이 과거의 데이지들을 '건축학 개론'의 수지로 만드는 겁니다. 바로 '쌍년'으로 말이죠.)

 

그런데 스콧 피츠제럴드의 개츠비는 그 희박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나로부터 그녀를 앗아간' 그 남자보다 훨씬 더 큰 재산과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 남자. 그럼 상황은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그 '절대적인 사랑'이 과연 얼마나 진짜 사랑이냐는 데 있습니다.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는 사랑하는 여자의 수준을 넘은 '전 인생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라도 톰을 사랑한 적이 있어선 안 되는', 그러니까 '완벽하게 나만의 것'인 존재여야 하는 거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려 가며 주말마다 초대형 파티를 여는' 광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건 돈만 많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바즈 루어만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갖고 있는 그런 함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루어만의 특기인 비현실적인 과장의 미학이 바로 이런 개츠비의 허세와 아주 좋은 궁합을 보이고 있다고 할까요.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호오가 엇갈린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건 루어만의 원작에 대한 애정과 원작자에 대한 존경에 대해 관객이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에 달린 거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이 리뷰의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원작과 원작자이기 때문에, 저는 그 의도를 잘 살렸다고 보여지는 이 루어만의 영화에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반드시 그렇게 느낄 거란 보장은 없겠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강추. 놓쳐서는 안 될 영화입니다. (그런데 3D로 봐야 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S.1. 울프심 역을 맡은 아미타브 바흐찬은 인도 영화계의 절대적인 스타. 한때 '세계 최고의 미녀'로 불렸던 인도 여신 아이슈와라 라이의 시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사실 원작에 개츠비가 미남이란 얘기는 없죠.

 

그래도 레드포드가 낫냐, 디카프리오가 낫냐 하는 얘기는 무의미한 듯.

(답이 너무 뻔한 거 아닌가요.)

 

 

 

 

P.S.2. 패션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1920년대, 재즈 에이지라 불리는 시대의 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물론 빼놓을 수 없겠죠.

 

 

 

 

 

P.S.3.  많은 분들이 화려한 음악 - 감독이 바즈 루어만이니 이건 너무나 당연 - 을 얘기합니다. 그 중에서 한 곡, 위의 파티 장면에서 화려하게 편곡되어 등장하는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가 이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인 건 맞는데, 사실 이 곡의 발표 시점은 1924년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 설정이 1922년이니 역사 왜곡인 셈이죠. (아, 물론 비욘세의 Crazy in love도 나오지만 그건 그냥 패스.^^)

 

P.S.4. 원작에서든 영화에서든, 개츠비와 닉이 처음 대화를 트게 되는 계기는 군대 얘기였는데, 원작과 영화에서 표현되는 소속 부대가 다릅니다. 루어만은 왜 부대를 바꿨을까요?

 

P.S.5. 많은 분들이 "대사를 글자로 화면에 띄우는 건 너무 오바 아니냐"는 지적을 하시더군요. 이건 아무래도 '자, 재미있지? 원작 읽어보고 싶지? 원작 사서 읽어'라는 루어만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만치 루어만이 원작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크다는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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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도시]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 잘 모르실 겁니다. 방송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JTBC 드라마고, 오는 27일 오후 9시 50분에 첫 방송이 나갑니다. 주인공은 정경호-남규리, 한국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지 못한 본격 느와르 드라마입니다. 아무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상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김남길 손예진. 박찬홍(연출)-김지우(극본) 콤비의 작품입니다(JTBC 개국작인 '발효가족' 팀이죠). 같은 27일 밤 10시에 시작합니다. 드라마의 지명도나 방송사의 힘에서 영 딸립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드라마를 알리기 위해 한 이벤트 중에서는 아마 가장 규모가 큰 '이상한 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5월13일. 명동에 이상한 아저씨들이 우글우글 모였습니다. 장소는 명동의 한 중심인 명동예술극장 사거리. 명동예술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메이지좌(明治座)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던 고급 문화 공간으로 한때 국립극장으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이후 다른 용도로 쓰인 적도 있었으나 2009년 과거의 모습을 되찾고 극장으로 복원된 유서깊은 공간입니다.

 

(네. 명동예술극장에서 도와주신 게 많아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명동예술극장 앞 작은 사거리에 한 패는 명동성당 쪽에서, 다른 패는 명동 전철역 쪽에서, 또 다른 패는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서 진입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매우 불량해 보이는 패거리인데다 검정 양복 차림이라 한 눈에도 뭐하는 사람들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사거리 앞에 모이더니 대뜸 대거리를 시작합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듯 합니다.

 

 

 

 

 

 

시비가 몇번 오가더니,

 

가장 인상이 나쁜 빨간 띠 편에서 먼저 외칩니다. "안되겠다, 얘들아! 쳐라!"

 

똘마니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돌진합니다. 그런데 무기가 좀...

 

 

 

 

네. 총천연색 물총입니다.

 

 

 

 

 

 

 

 

현장 영상입니다.

 

 

 

 

구경하던 관광객들만 신났습니다.

 

 

 

물총 싸움이 한참 벌어지다 사이렌이 울리고, 명동예술극장 벽면에서 현수막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고 깜짝 등장한 남자.

 

바로 이재윤입니다.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야왕'에서 수애의 오빠 역으로 지명도를 높였죠.

 

실물로 보니 엄청 건장합니다.

 

 

 

 

"'무정도시'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는 이재윤의 인삿말로 이벤트는 끝.

 

그런데 뜻밖에 이재윤의 팬들이 엄청 많습니다. 이벤트가 끝나고도 이재윤은 한동안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건 일본에서 온 관광객 아주머니들. 대체 언제 이재윤을 보셨는지, 반가워서 펄쩍펄쩍 뜁니다.

 

모처럼 명동 나들이에 팬들의 반응이 좋아 이재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관광객들도 즐거워 하시고, 구경하는 사람 모두 좋아했던 한 폭의 이벤트였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취재해 주신 덕분에 검색어 순위에도 죽죽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편집한 영상이 나왔습니다.

 

 

 

 

이건 이재윤씨 팬들을 위한 보너스.

 

 

 

 

3분 정도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더랬습니다. 기획서를 썼다 찢기를 수십번. 마침내 이벤트의 틀이 마련됐고 수많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국 명동예술극장 앞 사거리가 선택됐습니다.

 

 

 

 

일단 명동예술극장에 현수막을 드리운다는 게 정상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더군요.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은 배우들. 제작비 절감을 위해 사전 리허설은 하지 못하고(ㅠㅠ), 대신 당일 새벽부터 여의도 공원에서 치열한 연습이 이뤄졌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솔로대첩'이 이뤄졌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듯 웃던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조직의 일원이 되어 갔습니다. '우리 형님'이 '저쪽 형님'에게 학대를 당하자 나중에는 진심으로(?) 흥분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아무튼 행사가 무사히 끝나 다행. 그리고 이제 드라마가 잘 되는 게 남았습니다.

 

 

 

 

 

http://drama.jtbc.co.kr/moojeong/?cloc=jtbc|header|drama

 

현재 '무정도시' 홈페이지에서는 4개의 이벤트가 동시 진행중입니다.

 

입맛대로 골라잡으시면 푸짐한 상품이 쏟아집니다. 관심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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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은 '문화어 사전'이라는 새로운 칼럼을 모아두는 곳입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여기 있는 글도 '매거진M'에 들어가는 정기 연재물입니다.

 

아니 왜 헷갈리게 이거 썼다 저거 썼다 하는거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사실 처음에는 한달에 한번 쓰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실(응?) '10만원으로 즐기는 이달의 문화생활'을 쓰는게 당초의 목적이었는데 이 책이 격주간이 되더니 끝내 매주 나오는 주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0만원으로 즐기는 이달의 문화생활'을 매주 쓸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이달의 문화인물'이 나오고, 그 사이에 '문화어 사전'까지 나온 겁니다.

 

아무튼 취지는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어'라는 것은 예전에 배웠던 '북한의 표준어'라는 뜻이 아니고, '그때 그때 시점에서 대중문화를 즐기기 위해 이해해야 할 말의 정확한 의미'라는 뜻입니다.

 

 

 

 

 

그럼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간단합니다. '문화어 사전'만 꿰고 계시만 굳이 취미도 없는데 TV 열심히 보면서 트렌드 따라잡으려고 노력하실 필요 없습니다. 개콘 봐도 재미도 못 느끼는데 일부러 애써 보실 필요 없습니다. 드라마, 일부러 세상과 호흡하는 척 하려고 인내를 시험해 가며 보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화제에 뒤떨어질까봐 억지로 참고 영화 보실 필요 없습니다.

 

문화어 사전이 앞으론 다 해결해드립니다. 만사 OK.

 

(단, 이 칼럼의 마감이 좀 빨라서 - 책으로 나오기 2주 전 - 조금은 OUT OF DATE 한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힘으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라서. ㅜㅜ 대신 다른 쪽으로 그런 약점을 커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쪽이라면 뭘 말하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아시잖습니까. 그걸로 최대한 얘깃거리를 뽑아낼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거.^^ 그러니까 1970년대풍으로 광고 카피를 뽑자면

 

"문화어 사전만 있으면 당신은 대화가 두렵지 않다! 이것만 있으면 화제의 왕!"

 

그럼 시작합니다. (제목의 날짜는 작성 날짜입니다.)

 

 

문화어사전 0408

 

반인반수(半人半獸) [명사]

동물과 사람이 결합해 태어난 상상 속의 존재. 염색체 수가 다른 동물 사이에서는 교배가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가 알아내기 전의 존재들. 또 나쁜 시력에서 기원한 것이란 설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말 반, 사람 반인 명사수 켄타우로스는 페르시아 기병에 대한 공포심과 착시현상이 낳은 괴물이라는 것. 서양 전설 속 인어(人魚) 역시 해양 포유류인 듀공을 멀리서 잘못 본 사람들이 지어낸 것라고도 한다.

 

      (이게 정설이긴 한데 듀공의 생김새로 봐선 대체 뭘 보고 인어...;;)

 

최근 MBC 드라마 '구가의서'에서 이승기가 연기하는 최강치의 캐릭터가 반인반수로 설정되어 있어 자주 거론. 하지만 최강치는 다른 반인반수와 달리 외견상 동물적인 특징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다, 포니테일형 헤어스타일 등이 일본 만화 주인공 이누야샤(犬夜叉)와 너무 닮았대서 논란이 인다. 참고로 이누야샤의 설정은 반인반수가 아니라 반인반요(半人半妖: 인간과 요괴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 아버지인 요괴의 영향으로 개 꼬리와 뾰족한 귀가 달려 있다.

 

이승기가 연기하는 최강치는 저 위 사진, 이누야샤는 이렇게 생긴 녀석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누야샤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이누야샤의 이복형인 셋쇼마루. 진정한 차도남 스타일...

 

 

 

나쁜사람 [명사]

잘못이 없는 사람을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핍박하는 사람’. 본래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비양심적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KBS 2TV ‘개그 콘서트나쁜 사람이후 한정된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나쁜 사람은 경범죄로 체포된 범인(이상구)를 반장(유민상)을 비롯한 형사들이 엄하게 취조하지만 캐면 캘수록 범인의 안타까운 사연이 드러나 결국 부하들이 울먹이며 반장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항의하고, 반장 역시 얘 빨리 풀어줘!”라고 절규하며 끝맺는 내용. 최근에는 직장에서 사소한 착각으로 부서장이 부서원을 야단치고, 야단 친 이유가 오해로 드러나면 나머지 부서원들이 부서장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브라더 [명사]

범죄단체 조직원들이 친근한 동년배나 아랫사람을 부르는 호칭. 실제 나이 차이보다는 서열에 준한 호칭이다. 촌스러운 발음으로 친근감을 강조하는 것이 포인트이므로 어이(으이)’라는 감탄사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자들은 은근히 마음에 둔 한두살 연하 남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발음. ‘브롸더까지는 괜찮으나 ər]로 발음하면 뭔 개수작이냐는 소리 듣기 딱 좋다. 가장 좋은 용례와 발음은 영화 신세계의 황정민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의 어원을 기타노 다케시의 2000년작 영화 ‘Brother’에서 찾기도 하나, 이 영화에서는 자기보다 윗 서열의 조직원, 즉 일본어 아니키(형님)’의 동의어로 쓰였으므로 전혀 의미가 다르다. [주의사항: 이 일본 영화 제목을 너무 정확하게 부라자(ブラザ)’라고 읽으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

 

 

'브라더'의 한 장면. 일본에서 사고치고 미국으로 쫓겨 간 조직의 '형님'이 미국의 아주 찌질한 뒷골목 양아치들에게 '조직의 법도'를 가르치면서 큰형님 역할을 한다는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인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기타노 다케시 영화 답지 않게 플롯이나 촬영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하우스'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흑인 배우 오마 엡스가 '아니키!' 하면서 울먹이는 장면은 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파견직 [명사]

일은 A회사에서 하되 B회사의 소속으로 되어 있는 사람의 총칭. 월급은 대개 A회사에서 B회사에 지불하고, B회사가 소정의 수수료를 공제한 뒤 당사자에게 지급한다. 일본에서는 평생고용의 신화가 무너진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IMF 이후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도 실제 인력은 줄이지 않으면서 정규직을 줄이는 방안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전에 올라온 이유는 김혜수 주연 드라마 직장의 신때문. 현실에서 파견직의 99.9%는 참을성과 붙임성이 최고의 미덕이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는 미스김은 복사기 수리에서 외국어 문서 작성, 중장비 운전에서 바리스타까지 못하는 게 없는 슈퍼 능력자다. 심지어 일본 드라마 원작인 파견의 품격(국내 방송 제목은 만능 사원 오오마에)’의 시노하라 료코는 헬리콥터까지 조종한다.

 

 

이 정도 능력자라면 1년에 6개월만 일하고 나머지 6개월은 스페인에서 휴식해도 뭐랄 사람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드라마. 2년 지나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하고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하는 대다수 파견직의 한숨 앞에 자칫 이 드라마가 그거 봐, 스펙만 좋으면 저렇게 살 수 있잖아라는 어처구니없는 핀잔 거리로 쓰이지 않길 바람.

 

 

 

상남자 [명사]

한마디로 남자 중의 남자라는 뜻. 그러니까 천생 남자라는 뜻인데 흔히 천생천상으로 잘못 쓰다 보니 천상 남자에서 이 떨어져 나간 모양. 혹자는 ,,하 중에서 ()남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별 설득력은 없음.

 

 

 

사용의 범위는 매우 넓다. 하정우나 엄태웅처럼 실제로 남자다움이 뚝뚝 떨어지는 인물들은 물론, 김범 장근석 같은 전형적인 꽃미남도 앳된 복근을 자랑하며 스스로 상남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심지어 아빠 어디가에 나오는 성준(성동일 주니어)도 그 또래에서는 대표적인 상남자로 통한다.

 

아무튼 여자들에게 대체 어떤 남자가 상남자냐고 물어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다. 왜냐하면 그네들에게 상남자란 특정한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조지 클루니에서 조셉 고든 래빗까지, 그냥 내 마음에 드는 남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 용례로 느끼남이란 명사가 있음. 이건 그냥 내 마음에 안 드는 남자라는 뜻.) <끝>

 

그러니까 여자분들은 그 시대에 인기 있는 남자의 타입을 가리키는 말(예를 들어 위버섹슈얼, 꽃미남, 상남자 등등)의 원래 의미가 뭐건, 자기 눈에 멋져 보이는 사람은 무조건 그 카테고리에 든다고 주장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그 자신만 모를 뿐입니다.

 

(예를 들자면 '상남자' 항목에 장근석이나 김현중을 넣거나, '꽃미남' 항목에 에드워드 노튼을 넣거나 하면서 그 자신은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남자들과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면 흔히 이런 상황이 발생합니다.

 

남: 여자들은 느끼한 타입을 좋아하지?

여: 누가 그래? 느끼한 남자 다 싫어해.

남: 좋아하더만.

여: 예를 들면 누구?

남: 조지 클루니도 그렇고...

여: 조지 클루니가 뭐가 느끼해!

 

결론: 그러니 여자분들과 대화를 하는 남자분들은 '대체 니가 생각하는 상남자의 정의가 뭐야?' 따위의 질문을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것만 잘 기억해 두시면 됩니다.

 

첫회는 여기까지. 역시 써놓고 한달 지나니 좀 시대에 뒤지는 느낌도 있군요. 다음번엔 좀 더 앞당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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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신곡 '젠틀맨'이 하루가 다르게 전세계적인 인기곡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강남스타일'에 이은 2연속 히트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미 온라인은 해외의 형제자매(?)들이 만든 패러디로 가득합니다.

 

특이한 건 '강남스타일' 때와는 달리, 멜로디와 비디오를 살려 두고 가사는 자국어로 변환한 패러디들이 '젠틀맨' 발표 직후부터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남스타일' 때에는 한참 뒤에 등장했던 현상이죠. 이미 '강남스타일'을 통해 '어떻게 싸이의 뮤직비디오를 갖고 놀지'에 대한 학습이 끝났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싸이의 노래가 세계적인 인기곡, 싸이가 세계적인 팝스타로 거듭나기 위해 또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싸이의 악마설', 그리고 '싸이의 노래에 악마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주장들입니다.

 

 

 

 

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악마적 메시지(Satanic Message)가 들어있다는 주장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목의 '젠틀맨' 자체가 영어권에서 악마를 상징하는 호칭 중 하나이며, 초반에 등장하는 네 명의 노신사가 이른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4기사를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심판이 어떻게 내려지는가에 대한 내용이고, 그 종말의 과정에서 네 명의 기사가 지상에 등장합니다. 네 기사는 백,적,흑,청의 4색을 갖고 있으며 각각 정복, 전쟁, 기근, 죽음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활당무계하기 짝이 없지만, 뭐 그렇게 주장하시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20세기도 아닌 21세기에 '문화제국주의 첨병'이라는(이게 대체 언제적에 써먹던 얘기야...) 유령같은 논리로 싸이를 욕하는 무슨 교수님도 계신데 이 정도로 뭐랄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는 또 이 노래의 후렴구인 '알랑가몰라'에 대해서도 해괴한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이를테면 alangamola를 쪼개서 alang(=a band), gamo(=coupling), la(=ah! 같은 감탄사) 이기 때문에 이 말이 '음란한 결합에 대한 찬사' 혹은 '동성애에 대한 옹호'를 뜻한다는 겁니다.

 

참 생각도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사실 근거는 전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일단 monogamy같은 현대어에서 보듯 gamo가 결혼이나 성적인 결합을 뜻하는 어근인 것은 맞고, la라는 단어도 실제로 있지만 alang이 a band(띠)를 상징한다는 것은 어디서 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저 부분들이 모두 저 뜻이라 해도 저런 해석은 견강부회일 뿐입니다.

 

사실 싸이에 대한 이런 기괴한 해석은 '강남스타일' 때 이미 시작됐습니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각종 악마의 행위들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유튜브 동영상.

 

 

 

 

싸이와 말의 관계... 등은 참 상상력이 흥미롭기도 하군요.

 

뭐 비슷한 게 많습니다. 싸이가 비밀결사 일루미나티의 악마적인 상징들을 뮤직비디오에 끼워넣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놀랄 게 없습니다. 웬만한 영화에 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런 식의 주장을 하는 분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들끓었습니다.

 

 

 

 

왜 이런 주장이 자주 등장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들이 심심하기 때문  이런 분들은 이미 할리우드와 미국 대중문화계가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수시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내보내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경계를 무디게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도 한때 널리 퍼졌던 레이디가가 사탄설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 뿔이 진짜 뿔이라는 주장부터... '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역사'라는 괴서를 한번 읽어 보시면, 사람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이런 류의 주장은 끝이 없습니다. 폴 매카트니는 이미 60년대에 죽었는데 비틀즈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음모 때문에 지금까지 누군가가 대역을 맡고 있다는 주장.

 

 

 

반면 이미 죽은 엘비스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목격되고 있다는 주장. 일각에서는 노인이 된 엘비스를 목격했다고도 하지만 또다른 일각에선 그가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영원이 젊은 모습이라고도 하죠. 그런 얘기가 싸구려 신문에 버젓이 실리기도 합니다.

 

 

 

싸이에 대한 음모설, 혹은 싸이의 악마설 등은 싸이 이전에도 수많은 팝스타들이 이미 딛고 지나간 자리일 뿐입니다. '***의 노래에 사탄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말에서 ***의 자리에는 우리가 아는 어떤 뮤지션을 넣어도 그 증거들이 인터넷에 넘쳐납니다. 비틀즈, 마이클 잭슨, 저스틴 비버까지 말 그대로 아무나 넣어도 됩니다. (심지어 사이먼 앤 가펑클을 넣어도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싸이의 노래에 악마의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 싸이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팝스타가 된 거구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참 성장이 빠른 편이죠.

 

그리고 그런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분이 있다면, 현재의 상황은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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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문화가이드] 이달부터는 가능한 한 빨리 안내를 제공합니다. 일단 책과 조율해서, 책에 이 칼럼이 매달 마지막 주, 그러니까 '5월 가이드'는 4월 마지막 주에 실리도록 조정했습니다.

 

매년 5월은 엄청난 행사의 폭풍이 밀어닥치는 때입니다. 미처 이 지면에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소/대형 공연이 쌓이는 시절이죠. 특히 올해는 지난번, 지지난번에도 소개드렸듯 베르디와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이라 관련 공연/콘서트/행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지난 4월26일에는 서울시향이 콘체르탄테 형식(이게 뭔지는 아래 칼럼 참고)으로 베르디의 마지막 걸작으로 불리는 '오텔로'를 공연했습니다. 같은 시기, 오페라극장에서는 역시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공연하고 있었죠.

 

정명훈의 '오텔로'는 유감없이 훌륭했습니다. 오텔로 역을 맡은 테너 그레고리 쿤드의 연기력은 정말 발군이더군요. 물론 오텔로가 갖고 있는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은 위대한 장군'의 모습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해 비탄에 빠진 남편'이라는 두 모습 중 앞쪽의 표현에는 좀 아쉬움이 있었지만(특히 처음 등장하는 Esultate! 신에서 박력이 좀..), 후자 쪽의 연기는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가장 빛을 발한 사람은 아무래도 이아고 역의 베이스 사무엘 윤(바로 위 사진)이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 원작 '오셀로'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역할인 이아고 역인 만큼 '오텔로' 역시 이아고의 연기력에 성패가 달린 작품이죠. 사무엘 윤은 그 역할을 넘치게 해 냈습니다. 왜 주변에도 있잖습니까.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는데, 워낙 마음이 꼬여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그런 사람. 캐릭터 해석이 눈부셨습니다. 탄탄한 목소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레고리 쿤드, 사무엘 윤 등 26일 '오텔로'의 주요 출연진은 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베르디의 '레퀴엠' 공연에도 그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건 아래 칼럼에선 소개하지 않았는데 올해의 추천 공연 중 하나죠. 별도 추천이라고 생각하고 시간 되시는 분들은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도 갑니다.)

 

그럼 이달의 추천, 시작합니다.

 

 

 

 

 

 

5월의 주제는 바그너.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2013년은 동갑내기 베르디와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이야. 시간과 돈만 해결된다면 올 여름 바이로이트로 날아가 한국인 베이스 전승현(Attila Jun)이 하겐 역으로 등장하는 니벨룽의 반지를 보고 싶지만 그건 이 칼럼의 영역은 아니지. 일단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두 개의 공연부터 살펴보자고.

 

첫째는 5 7일 열리는 서울시향의 바그너 특집 그레이트 시리즈 I(지휘 정명훈)’, 둘째는 522일 열리는 KBS교향악단의 바그너 콘체르탄테(지휘 카이 뢰리히)’. 전자는 지난 2월 예정됐던 공연인데 지휘자 정명훈의 허리 부상으로 연기된 거지.

 

공연 제목의 콘체르탄테(concertante)오페라 콘체르탄테를 줄여 쓴 것인데,  무대나 조명은 생략하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가수들이 나와 노래로만 공연하는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이야. 특히나 바그너 오페라는 무대를 구현하는 데 워낙 큰 돈이 들기 때문에,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공연하는 경우가 꽤 흔한 편이야. 서울시향도 지난해 역시 바그너 오페라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공연한 적이 있어.

 

아무튼 두 공연 모두 바그너의 대표적 기악곡으로 꼽히는 탄호이저서곡이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그프리트의 죽음등을 빼놓지 않고 들을 수 있어. 그렇다면 가격을 비교해 보자고.

 

같은 공연장이니 A석끼리 비교하자면 KBS 교향악단은 5만원, 시향은 6만원. KBS 싸 보이지만 좌석배치도를 보면 또 다르지. KBS 쪽은 반드시 A석이라야 2층 사이드를 살 수 있고 B석은 모두 3층이지만 시향은 한 등급 아래인 B(3만원)을 사도 2층 사이드에 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정확한 비교는 KBS(A 5만원)와 시향(B 3만원) 사이에서 이뤄져야 할 것 같은데, 이 가격 차이가 바로 오페라 콘체르탄테의 가격이라고 해야겠지. ‘발퀴레의 줄거리를 이 짧은 지면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날 공연되는 발퀴레1막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통틀어 가장 로맨틱한 대목이라고 해도 좋아. 특히 지그문트의 아리아 겨울 바람은 우아한 달빛에 길을 열어 주고(Wintersturme wichen dem Wonnemond)’를 듣고 나면 바그너도 이런 서정적인 곡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거야. 어렵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사라질 수도 있고.

 

 

골랐으면 그 다음엔 525,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완창 판소리, 임현빈의 강도근제 수궁가를 꼭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아니 이제 판소리까지?’ 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토요일 오후, 한 네 시간 만 투자해 봐. 판소리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나 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거야.

 

단 공연장 앞에서 파는 가사집(2천원)은 꼭 사서 들어가라고 권하고 싶어. 아무래도 판소리 가사를 귀로만 듣고 이해하는 건 어려울 거야. 오페라 공연 처럼 무대 옆으로 자막을 넣어 주면 더 좋겠지만, 3월까지는 그런 서비스가 없었어. 그러니 가사집을 보면서 감상하는게 현명할 거라고 봐. 아무튼 재미있어. 믿어 봐.

 

 

오랜만에 전시. 리움 미술관에서 금은보화 미장센 전을 동시에 기획해 전시하고 있어. 전자는 삼한시대 이후 대한제국까지 우리 조상들이 금, 은과 옥, 수정, 호박 등 보석들을 이용해 만든 공예품의 정수를 보여줘. 글자 그대로 금은보화지. 저게 대체 시가로 따지면 얼마쯤 될까 생각하면서 보면 꽤 흥미로울 거야.

 

미장센 전은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사건들 속에서 한 장면에 집중해 연출 기법을 가미한 미술 작품들에 대한 전시야. 말로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리움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읽으면 느낌이 올 거야. 아무튼 기획 전시 2개에다 상설 전시까지 모두 볼 수 있는 데이 패스(Day Pass) 13천원. 다 돌고 나면 퍽퍽한 다리와 함께 , 뭔가 문화적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냈구나하는 포만감에 절대 본전 생각은 나지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이달의 책 한 권.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가 쓴 심야치유식당이라는 책이 있어. 제목만 보고 이건 또 뭐야, 일본 만화 심야식당의 아류작인가?”하고 휙 던져 버릴 분도 있겠지만 한 챕터라도 읽어 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거야. 이미 꽤 알려져 시리즈 2권까지 나온 책이지만, 인생이 퍽퍽하고 고달프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겐 자못 실질적인 위안을 주는 책이야.

 

전직 정신과 의사인 철주가 노 사이드라는 바를 차리고, 병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갖고 있는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지. 읽다 보면 골치아픈 문제들이 서서히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저자인 하지현 박사가 술집을 내면 꼭 찾아가 보고 싶어져.

 

그럼 구경 잘 하고. 내달 말에 또 보자고.

 

 

서울시향, ‘그레이트 시리즈 I’(A 6만원, B 3만원)

KBS 교향악단, ‘바그너 콘체르탄테’(A 5만원)           1, 3만원~6만원

임현빈, ‘강도근제 수궁가완창                         2만원

리움 금은보화 전’ + ‘미장센 전                         13천원

하지현, ‘심야치유식당                                 13천원

 

합계                                                76천원~106천원 (끝)

 

 

이달은 참 풍성하고 가격대 성능비도 매우 높은 물건들이 많아 개인적으로 흐뭇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개의 바그너 공연, 그리고 5월2일의 베르디 '레퀴엠' 공연을 한데 묶어서 고려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겨울바람...'은 바그너의 가장 강력한 발라드 중 하나입니다. 혹자는 '바그너와 이런 달달한 사랑 노래는 어울리지 않아!'라고 하기도 하지만 '탄호이저'에 나오는 '저녁별의 노래'와 함께 '바그너도 발라드(?)를 작곡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이는 곡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비커스 풍의 다소 명징한 목소리가 이 노래의 이상에 더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위에 소개한 요나스 카우프만의 노래도 일품이죠.

 

그리고 처음에 소개한 전승현, 사무엘 윤 같은 베이스-바리톤 가수들은 서울대 연광철 교수를 비롯해 요즘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그너 가수들입니다.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상식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한국인 베이스가 없으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치를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산 베이스의 성가가 높습니다.

 

요즘 '명 테너의 산지'는 전 세계로 흩어져 있지만 '발트해 연안 출신의 소프라노'와 '한국산 베이스'는 그야말로 믿고 쓰는 브랜드라고나 할까요.

 

연광철이 '파르지팔'의 구르네만츠 왕 역을 맡은 2012 바이로이트 실황입니다. 워낙 긴 영상인데 약 12분 쯤에 연교수님이 날개를 달고 첫 등장합니다.

 

 

 

(여담이지만 '파르지팔'의 메인 테마인 '성 금요일의 음악'은 아주 아주 오래 전 - 흑백 TV 시절 - MBC TV 뉴스 시그널로 쓰인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다음은 슈타츠호퍼의 '라인의 황금'에 거인(?) 파졸트 역으로 출연한 영상.

 

 

유명한 연교수님은 이쯤 해 두고, 베이스 전승현(Attila Jun)이 슈트트가르트에서 '발퀴레'에 출연한 영상입니다. 훈딩 역을 맡아 지글린데를 열심히 학대하고 있군요.

 

무대가 너무 미니멀해서 약간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만.^

 

 

 

이 전승현이 올해는 바이로이트에서 '신들의 황혼'의 하겐 역을 맡게 됐다고 합니다.

 

강렬한 카리스마의 하겐(어쩌면 '신들의 황혼'에서는 지그프리트보다 중요한 역으로 보이기도 하는) 역은 전 세계의 베이스 가수들에겐 꿈의 역할입니다. 물론 훌륭한 선배들이 이미 길을 닦아 놓은 역할이기도 하죠.

 

역시 한국인 베이스 강병운(Phillip Kang)이 하겐 역을 맡은 1992년 바이로이트 실황. 개인적으로 이 오페라에서 가장 좋아하는 Hoi Ho 신입니다.

 

 

 

사무엘 윤은 직접 눈으로 보시도록 하고^^.

 

좋은 공연이 넘쳐나지만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바로 완창 판소리 공연입니다.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비싸지도 않습니다. 2만원인데다 심지어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회원 가입만 해도 20% 할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연의 만족도는 최강입니다.

 

2천원짜리 가사집(심청가,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 사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만 사시면 대비는 끝. 이걸 무시하고 자신의 귀만 믿으면 그건 판소리를 절반만 즐기겠다는 뜻이 됩니다. 분명히 한국어 공연이지만, 고사성어와 약간의 고어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귀만으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저는 지난달에 성창순 명창과 제자들의 공연으로 '심청가'를 봤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여태 모르고 있었나 매우 아쉬웠습니다. 특히나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을 맞으신 성창순 명창의 관록과 재미는 명불허전. 이런 양반들이 나이드시는 게 진정으로 안타깝더군요.

 

마지막으로 '심야치유식당'. 어렵거나 시간 걸려 읽을 책이 아닙니다. 요즘 저자 하지현 박사는 민음사에서 나온 주력상품 '예능력' 홍보에 여념이 없지만 그래도 아직 대표작은 '심야치유식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특히나 정말 바쁘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느낌.

 

'심야치유식당'이 마음에 드시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 되시면 '예능력'에도 관심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5월의 추천은 여기까지. 혹시라도 이 란의 추천때문에 보시고 만족하신 공연이나 볼거리가 있으면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그런게 글 쓰는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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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3], 개인적으로 가장 기다렸던 슈퍼히어로 무비입니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극장판을 전제로 생각할 때 제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영웅은 아이언 맨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존 파브로의 유머러스한 연출이 큰 역할을 했던 듯 합니다.

 

이번 '아이언맨3'는 처음으로 존 파브로가 감독하지 않은 시리즈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불안감도 갖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속편입니다. 히트작의 속편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툭툭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3편 이상 상승세를 이어가는 시리즈가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세 편도 쉽지 않죠.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합니다. 지금까지 '아이언맨' 시리즈를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강추.

 

그런 면에서 '아이언맨3'는 '믿고 쓰는 아이언맨 표'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대다수 기존 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에선 반발도 있더군요. 한 쪽은 '어벤저스'의 지나친 개입이 기존 아이언맨 시리즈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 또 한 쪽은 어설픈 배트맨 흉내가 아이언맨의 정체성을 해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간단한 줄거리.

 

스토리는 '어벤저스'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뉴욕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의 저변에는, '과연 아이언 맨 수트를 입지 않은 나는 대체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악당 만다린(벤 킹슬리)이 등장해 전 세계를 위협하고, 미국 정부는 로드 대령에게 아이언맨 개량 수트를 입힌 뒤 새로운 슈퍼히어로 '아이언 패트리어트'라고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한편으론 새로운 싱크탱크의 주역 킬리언(가이 피어스)이 뇌의 특정 구역에 화학물질을 투입해 인간의 형질을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를 가져와 스타크 컴패니와의 협업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스타크 사의 경영자인 페퍼 포츠(기네스 팰트로)는 자칫 인간을 무기화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협조를 거절합니다.

 

 

 

 

'아이언맨3'는 여러 가지로 시리즈의 전환점이 되는 영화입니다. 우선 아이언맨이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등 다양한 주인공들과 공조해서 액션의 규모가 전 우주적으로 확대된 '어벤저스' 이후 처음 나오는 시리즈입니다. '우주의 괴물들'과 싸우다 온 수준의 아이언맨이 다시 지구 수준의 악당들과 싸워야 한다면, 왠지 갑자기 적이 왜소해 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드래곤볼로 치자면 셀과 싸우다 갑자기 다시 피콜로와 싸워야 한다는 수준으로 설정이 축소된다면 누가 봐도 어색하겠죠.

 

하지만 슈퍼맨도 아닌 아이언맨이 갑자기 범 우주적인 적들을 맞아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니 제작진은 머리를 쥐어 짤 수 밖에.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 집필진도 싹 바뀌고, 감독도 셰인 블랙으로 교체됩니다. 1,2편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번엔 그냥 해피 역으로 연기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감독 겸 연출을 맡던 배우가 같은 시리즈에서 감독을 그만두고 배우로만 남게 되는 것 역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일단 악당들이 엄청나게 강력해졌습니다. 약물을 이용해 인간을 강화하는 익스트리미스를 사용하면 인간 개개인이 별다른 장비 없이도 아이언맨을 맞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집니다.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킬 정도죠.

 

(솔직히 아무리 인체를 강화한다 해도, 맨주먹으로 강철 인간을 상대한다는 건 일단 피부가 배겨내지 못할 일이지만 '아이언맨3'는 그런 건 간단히 무시해버립니다. 하긴 뭐 맨손으로 탱크를 때려부수는 헐크도 있다고 하면 그만인가요... 아무튼 '아이언맨3'의 세계에서 아이언맨은 별다른 슈퍼히어로도 아닙니다. 익스트리미스 강화 인간과 1:1로 싸우는 것도 힘겨워 보일 정도.)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평소 고민 안 하기로 유명한 토니 스타크가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벤저스'의 연장선에서라면 논리상으론 충분히 그럴 법 합니다. 다른 슈퍼히어로들은 어쨌든 자신들에게 내재된 능력을 통해 자신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다르죠. 수트가 그의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민이 중요하다보니 '아이언맨3'는 전작들에 비해 토니 스타크의 맨손 활약이 훨씬 많은 작품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이언맨3'인 동시에 '토니 스타크1'인 셈이죠.

 

 

 

 

 

과연 이게 관객들에겐 어떻게 여겨질까요. 1,2편의 팬들에게라면 3편은 위에 든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이단적입니다. 고민이라는 걸 할 이유가 없는 캐릭터인 토니 스타크가 심각한 표정이라니. 이건 팬들에 대한 배신이죠.

 

물론 원작 팬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얘기하는 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통해 구현된 스크린 상의 '아이언 맨' 시리즈를 말하는 겁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은 '관객을 걱정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대의명분에 집착하는 슈퍼맨이나, 안 그래도 심각한데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 더 심각해진 배트맨과는 다른 면이죠. '마스크 속에 있는 나와 마스크를 통해 표현되는 나'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건 배트맨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아이언 맨'을 보러 와서까지 그런 찌질궁상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아이언 맨' 시리즈가 '순수하게 시작했던 과학자들의 타락'이나 '새로운 인지 영역의 개발에는 그만한 책임과 도덕성이 따라야 함' 같은 교훈을 심는 도구로 변질되는 것 또한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일촉즉발의 시한폭탄 같은, 하지만 동기는 순수하고 판단은 나름 합리적인 그런 존재일 때가 매력적이지 인상을 쓰면서 윤리 강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언 맨3'는 약간 위태로운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만 전체적인 톤에서는 아직 '아이언 맨' 시리즈의 전통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토니 스타크의 수다도 여전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함축적인 개그도 전과 같습니다. '어린이라고 봐 줄줄 아냐' 야말로 토니 스타크 스타일이죠.

 

결론적으로: '아이언 맨3'는 '어벤저' 이후 마블 코믹스의 각 시리즈들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그 이후 첫 결과를 보여줬다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사실 위에서 든 점들 처럼 약간 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 합니다. 특히 지하에 잠자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아이언맨 수트들이 총동원되는 모습도 좋았구요.

 

다만 '좀 더 깊이 있어 보이기 위해' 자꾸만 아이언 맨을 배트맨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절대 사양입니다. 이런 시도는 시리즈의 성격을 아예 바꿔 버릴 여지가 있기 때문에 매우 우려됩니다. 원작 코믹스에는 아이언맨도 이런 고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극장판 아이언 맨 시리즈'의 팬들은 자신들의 히어로가 같잖은 철학을 깔고 나오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아이언 맨이니까 鐵學일까요.^^)

 

 

 

 

 

P.S.1. 아무튼 마블 코믹스의 앞으로 나올 시리즈들은 '어벤저스'를 중심으로 모두 한 타임라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유기적 관계를 보다 강화할 조짐입니다. '아이언맨 3'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다른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심지어 브루스 배너(헐크, 마크 러팔로)는 쿠키 영상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쿠키 영상들에 비하면 굳이 볼 이유가 없을 정도입니다. 영화 끝나면 바로 극장을 뜨셔도 좋습니다.

 

 

 

P.S.2. 토니 스타크가 대머리 악당에게 한방을 먹인 뒤 'Did you like it'인가 'Did you get it'이라고 말한 뒤 이 악당을 'Westwolrd?'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의 초기작인 영화 'Westworld'를 말하는 겁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 성인들이 즐길 수 있도록 과거 서부를 재현한 로봇 공원 'Westworld'가 개관되는데 갑자기 기계 이상으로 로봇들이 관광객들을 살육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왕년의 대머리 스타 율 브리너가 무표정한 총잡이 로봇으로 등장하죠(바로 위 사진). '아이언맨3'의 악역들은 이 웨스트월드나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배지 데일이 약간 율 브리너와 닮은 듯도 하군요.

 

P.S.3. 담요(판초 대신^)로 몸을 감고 눈밭에서 아이언맨 수트를 끌고 가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은 어딘가 관을 끌고 가는 오리지널 '장고'의 모습을 연상시키더군요. 타란티노의 '장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장면이.

 

P.S.4. 영화 내내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건 아마도 이 영화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되었어야 할 작품이라는 걸 강하게 암시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개봉이 5개월이나 늦어진 걸까요.

 

 

 

 

P.S.5. 알록달록한 아이앤 패트리어트. 어느 나라나 공무원들이 하는 짓은 다 비슷하더라는 고급 유머.

 

P.S.6. 이 글 제목은 당연히 황석영 선생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패러디입니다. 거기선 좋은 제목이었지만, '아이언 맨' 시리즈에까지 이런 식의 식상한 접근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미로 써 봤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타이타닉'의 마지막 시퀀스가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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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이 올 거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날'이란 싸이와 조용필이 신곡을 발표해 각종 음원 차트에서 경쟁을 펼치는 날을 말하는 겁니다. 빌보드 차트 히트곡인 싸이의 '젠틀맨'과 조용필이 내놓은 '바운스', '헬로' 세 곡이 차트 상위권에서 다투는 중입니다.

 

싸이가 글로벌 스타가 된 것도 놀랍지만, 노장의 신곡이 이렇게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을 지, 그리고 그 노래가 이렇게 대중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을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2003년 발표했던 18집에도 기존 팬들은 열광했지만 이렇듯 전 사회적인 화제가 될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며칠전 있었던 조용필 19집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는 자우림, 박정현 등 후배들이 한 무대에 서면서 더욱 무대가 풍성해졌습니다. 가왕의 권위라면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문득 싸이와 조용필, 그리고 수많은 다른 가수들이 한 자리에 있었던 그 언젠가의 저녁이 생각납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참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날의 기억입니다. 2006년 1월4일, 가요계의 '대통령' 조용필이 후배 가수들과 신년 하례를 했습니다.

 

 

 

 

사실 이 모임은 2005년 연말에 이뤄졌어야 했습니다. 그 전의 모임이 2004년 연말에 있었으므로, 이때 '1년 뒤에 만나자'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2005년 연말에 송년회를 했어야 하는 거였죠. 하지만 "한번 해 보니 연말보다는 연초가 좀 더 모이기 쉬운 것 같더라"는 의견 때문에 송년회 대신 신년회를 하게 된 거였습니다.

 

2004년 모임에 가지 못한 게 좀 안타깝긴 했지만 2006년 모임은 좀 더 기대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모이는 장소가 라이브 클럽이었기 때문이죠. 2004년엔 식사 후에 흩어졌던 톱가수들이 올해는 '한잔' 씩을 걸친 뒤 노래를 뽑아낼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이런 무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글을 읽다 보니 감흥이 되살아나 가슴이 콩당거립니다. 사실 옛날 블로그에 있던 글이지만, 이럴때 재활용하지 않으면 언제 재활용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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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원섭의 through*2 조용필-이적-김종서의 3중창을 들어 보셨나요?

 

 

4일 오후(2006년 1월4일입니다), "조용필씨가 가수 후배들을 불러 모아 신년 하례식을 하려고 한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선약이 있었지만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요계의 대통령과 3부 요인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후 8시, 약속 장소인 서울 청담동 클럽 스타즈 앞에는 보디가드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날 연락을 맡았다는 이현우가 홍경민과 함께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더군요. 대개 이런 행사 때에는 주최자가 가장 긴장하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김정민을 필두로 가수들이 속속 도착했고, 60여석의 자리는 금세 꽉 찼습니다.

 

이문세,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 이은미, 김종서, 신승훈, 조성모, 김현철, 김정민, 김민종, 패닉(이적 김진표), 김경호, 홍경민, 드렁큰타이거, 윤미래, 부가킹즈, 싸이, 빅마마, 린, 박효신, god(김태우 박준형), 자우림(김진만), 적우 등과 '위대한 탄생' 출신의 뮤지션인 송홍섭, 최희선, 최태완 등 30여 명이 모였으니 그야말로 한국 가요계의 중추가 움직였다고 할 수 있겠죠.

 

8시30분 쯤 '각하'가 도착하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 맞았습니다. 조용필은 간단하게 "새해에 얼굴들을 좀 보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연말에 모여볼까 했는데 다들 콘서트 준비로 바쁜 것 같아서 아예 신년회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모처럼 모이니 정말 반갑다"는 덕담으로 '공식 개회'를 알렸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약간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가요계의 선후배들로 서로 얼굴이야 익은 사이였지만 연령차나 음악적 배경이 워낙 다양한 터라 쉽사리 섞이기는 쉽지 않더군요. 특히 어린 후배들은 조용필을 스스럼없이 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싸이의 활약이 시작됐습니다.

 

싸이는 테이블을 돌며 '파도타기'를 외쳤고, 금세 술병이 비어갔습니다. 대신 급속도로 대화량이 늘어나고 분위기가 살아나더군요. 이날 조용필에게 "너 앞으로 공연 잘 하겠더라"라는 칭찬을 들은 터라 신이 날대로 난 싸이는 여기저기서 "브라질! 상파울로!"라는 특유의 환성을 올리며 흥을 돋궜습니다.

 

이때부터 현장에 있던 몇몇 기자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드림 스테이지가 펼쳐졌습니다. 만난 장소가 라이브 클럽이고, 모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는 톱가수들인데 술이 한잔 들어가면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회자로 나선 이현우는 첫 가수로 박효신을 지목한 뒤, 노래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명하는 규정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구름같은 선배들 앞에서 노래를 하려니 내성적인 박효신은 무척 떨렸던 모양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박효신은 결국 스팅의 Shape of My Heart 를 골랐습니다. 노래 실력이야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나중에 물어보니 "한번도 안 해본 노래"라던데 아무리 박효신이지만 좀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2번타자는 린. "이런 자리니 제 노래보단 신나는 노래가 나을 것 같다"던 린은 장윤정의 짠짜라 를 멋지게 불러 숨겨놓은 트로트 실력을 뽐냈습니다. "가수 되기 전에 노래방 알바 출신이냐"는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였죠.

 

이때 갑자기 지명도 받지 않은 김민종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선후배 사이에 의리가 두텁기로 소문난 김민종은 "막내들이 먼저 나설 게 아니라 중간급들이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며 평소 애창곡이었던 조용필의 <꿈> 을 불렀습니다. 이때부터 이날의 진짜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꿈> 이 2절로 접어들자 신승훈과 김종서가 무대에 올라 3중창이 됐습니다. 김민종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신승훈의 미성, 그리고 위편으로 '질러주는' 김종서가 한데 어우러진 이 무대는 그야말로 좌중을 압도했습니다. 이때부터 여기저기서 "조용필 트리뷰트 콘서트가 될 것 같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죠.

 

다음 순서로 나선 신승훈은 자신의 노래가 아닌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를 부르다가 중간에 '깜짝 모창'을 보여줬습니다. 김민종, 김종서, 이문세의 목소리로 한 소절씩을 부른 것이죠. 김종서는 자신의 모창이 나올 때는 앞에서 '립싱크'를 하는 재치도 보여줬죠.

 

이어진 싸이의 무대. <여행을 떠나요> 를 부르겠다고 고집하던 싸이에게 신승훈은 "그래도 <챔피언>을 일단 들어 보자"고 설득했습니다. 싸이의 신들린 <챔피언>으로 한껏 분위기가 고조됐고, 싸이는 앵콜 곡으로 여행을 떠나요 를 불렀습니다. 이때 김태우와 박효신이 코러스로 등장했다가 결국은 코러스가 메인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한 구석에 설치된 드럼 세트에선 '드러머 김종서'의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입대를 앞둔 김태우는 "다섯명 몫을 혼자 다 하겠다"며 <촛불 하나>를 부른 뒤 이은미를 지명하고 내려가며 "JYP 선배님, 사랑해요!"라고 외쳐 사람들은 배를 잡고 뒹굴었습니다. 여기서의 JYP는 김태우의 소속사가 아니라 조용필을 가리키는 것이었죠. "나도 좀 여자로 봐 달라"고 애교섞인 코멘트를 던진 이은미는 "조용필 선배님과 왕년에 이 노래를 부를 때 정말 행복했다"며 <모나리자>를 선곡했습니다. 오히려 조용필 본인보다 훨씬 묵직한 <모나리자>더군요.

 

다음으로 지명된 이문세는 후배들의 환호 속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문세가 무슨 노래를 부를까 생각하기도 전에 후배들은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를 불러제꼈고, 결국 이문세는 <붉은 노을>을 불렀습니다. 이문세는 마이크를 신승훈에게 맡긴 뒤 "난 이제 댄스가수"라며 멋진 안무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용필이형, 문세형 머리 쓰다듬는 장면 한번만 보여주세요"라는 신승훈의 코멘트도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이문세는 현장에 와 있던 3명의 빅마마 멤버들을 불러올리며 "3명이니 3곡은 해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거부>로 포문을 연 빅마마는 <밤이면 밤마다>와 <남행열차>로 조용필을 비롯한 온갖 참석자들을 모두 무대 앞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마이크는 로커 김종서에게 넘어갔습니다. 라디오헤드의 'Creep'으로 문을 연 김종서는 열광의 박수가 이어지자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으로 열창을 이어갔습니다. 김종서는 "사실 목소리가 가늘다는게 컴플렉스였는데, 어딘가에서 '조용필은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는 골초'라는 기사를 읽고 이거다 싶었다. 담배를 피우면 조용필 선배의 멋진 탁성을 낼 수 있을 줄 알고 나도 담배를 세 갑씩 피웠다"는 사연을 얘기해 웃음바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종서의 마이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중간에 이현우가 등장, 자신의 <꿈>을 불렀지만 김종서는 잠시 후 다시 등장, "용필이형의 모창이라면 내가 최고일 것"이라며 <창밖의 여자>를 뽑아냈습니다. 이 노래가 신호탄이 된 듯 이때부터 가수들은 일제히 '조용필, 조용필'을 연창했습니다. 드디어 조용필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조용필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나도 90년대 초, 방송활동을 중단했을 땐 콘서트에 사람이 들지 않았다. 그때는 좌절했지만 이내 그래선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대중을 두려워하면 안되고, 대중 앞에서 노래하기를 멈추지 마라. 왜냐하면 우리는 노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이끌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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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시각이 밤 12시. 그때까지 귀가를 포기하고 심야의 '드림 콘서트'를 바라보고 있던 기자들의 눈이 번쩍 뜨인 것도 바로 이 순간입니다. "한류가 드라마와 영화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 가수들은 뭘 하나. 이래선 안된다. 수십만의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코리아 록 페스티발'을 한국 가수들의 힘으로 열자. 내가 추진하겠다."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 "방송사와 정부, 시민단체들의 힘을 빌테니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참여해달라. 물론 소속사 관계자 여러분의 협조도 필요하다.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우리 가수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조용필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때 김태우가 "R&B나 힙합도 끼워 주셔야죠"라고 크게 외쳤고, 김종진이 "'록 페스티발'도 좋지만 이름은 '코리아 뮤직 페스티발'이 좋을 것 같다"고 거들어 조용필은 이름을 정정, 다시 "'코리아 뮤직 페스티발'을 개최하자"고 선언했습니다.

 

또 "결국은 라이브의 힘이 가수의 힘이다. 방송사에서 요구하더라도 립싱크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가수가 필요하다"는 등의 당부를 마친 조용필이 그냥 무대를 내려가려 하자 후배들은 길을 가로막고 일제히 '노래, 노래'를 연호했습니다. 사방에서 신청곡이 난무하는데 정말 히트곡이 많긴 많더군요. 결국 첫곡으로는 <비련>이 채택됐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다음의 가사가 '꺄아악'인 바로 그 비련 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꺄아악'이 연출됐고, 조용필은 여기서 노래를 끊었습니다. 역시 거의 강요에 못 이겨 <여행을 떠나요>를 부르게 된 조용필 옆에 이적과 김종서가 나란히 섰습니다. 흔히 보기 힘든 3중창. 이어진 <모나리자>에선 조성모, <단발머리>에선 갑자기 나타난 김경호가 화음을 이뤘습니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서 조용필은 다시 한번 '코리아 뮤직 페스티발'을 강조하며 위대한 탄생 출신의 건반 주자 최태완씨를 불러올렸습니다. <친구여>를 피아노로 반주해달라는 얘기였죠.

 

조용필이 가운데 서고, 20여명의 가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는 <친구여>를 듣고 있으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디서 이런 무대가 다시 열리겠으며, 그런 광경을 이런 근거리에서 볼 기회가 언제 있겠습니까. 끝없이 이어질 듯 하던 친구여 가 끝났고, 조용필도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용필이형 노래 좀 듣자"며 무대로 올라가는 후배들을 뜯어 말리던 신승훈에게서도, 노래 한 곡 하지 않으면서도 온갖 퍼포먼스로 가수들의 노래에 양념 역할을 하던 홍경민의 표정에도 흡족한 빛이 가득했습니다. 아마도 곧 추진될 '코리아 뮤직 페스티발'의 피날레에서도 이런 장면이 연출되겠죠. 반드시 올해 안에 이 행사가 이뤄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후에도 드렁큰타이거와 JK김동욱 등의 무대가 이어졌지만 사실 이날의 볼거리는 여기서 끝났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조용필 나오는 것 봤냐'는 속담도 있는 마당에, 조용필의 스테이지가 끝난 다음에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기자들 사이에선 "이 공연을 녹화하면 대박일텐데..." "진짜 드림콘서트보다 캐스팅이 낫잖아"라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아무튼 이날 하례식에 참석한 소감을 딱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이럴 겁니다. "음. 기자 되길 잘 한 것 같아." (끝)

 

 

 

 

 

 

윗글엔 쓰지 않았지만 이날 싸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때도 워낙 붙임성이 좋아 기자들의 테이블에 온 싸이는 "'너 공연 좋아하지? 그래. 공연 계속 해. 공연 자주 하는게 가수야' 하시더라"며 연신 싱글벙글했습니다.

 

이날의 분위기로 봐선 이 신년하례식이 매년 열릴 정례행사가 될 것 같았는데 어찌 하다 보니 현재까지는 이게 마지막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 또 열리게 될지, 만약 열리게 되면 그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한 구석에서 행사를 지켜볼 수 있을지. 앞날이야 누가 알겠습니까.^

 

 

 

 

P.S. 조용필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예수 풍의 남자주인공 제임스 리 맥쿤(에 대해 트위터에 쓴 적이 있는데 여주인공은 메이메이 렌프로(Maemae Renfrow)라는 미국 모델이군요. 본명은 메건 리 렌프로(Megan Leigh Renfrow). 이미 우리나라 남성 중심 사이트에서는 '매매(Mae는 '메이'라고 읽습니다^^) 렌프로'라는 이름으로 지명도를 얻고 있습니다.

 

 

 

 

 

 

1997년생. 메가엘라풍의 짱구 앞머리가 인상적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앞날이 기대되는군요. 얼핏 보기보다 키가 크지만(5-8.5, 174cm) 모델보다는 다른 쪽으로 가는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진에서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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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의 난] '간신 김자점'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아마도 '임경업전'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이라면 이순신과 김유신을 벗어나지 못했던 소년 시절, 문득 '명장 임경업'이라는 이름을 듣게 됐습니다. 아울러 비운의 명장 임경업을 몰래 죽인 사람이 바로 간신 김자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희대의 간신이었던 김자점의 명성에 비해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의 존재감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병자호란이라는 큰 사건을 방송 화면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들인 돈에 비해서, 사람들이 과연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을 보고 싶어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 수가 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자점 역시 대중의 관심 밖으로 스물스물 사라져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방송중인 '궁중잔혹사-꽃들의전쟁'이 아니었다면 아예 얘기될 일 조차 없었을지도.

 

드라마 '꽃들의 전쟁' 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당연히 소용 조씨(얌전이, 김현주)와 인조(이덕화), 그리고 세자빈 강씨(송선미)이지만 제게 가장 관심 가는 사람은 김자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글도 '매거진 M'에 실리는 '문화인물탐구' 란에 실리는 글인데, 사실 지면의 한계라는 것이 매우 크게 작용합니다. 김자점처럼 다각도에서 조명 가능한 인물을 원고지 11~12매에 압축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아무튼 늘 하던대로, 원문을 전재하고 아쉬운 부분을 보충합니다.

 

 

 

김자점

 

조선 선조 때 전라도 낙안 땅, 천년 묵은 지네 귀신이 있어 주민들이 처녀를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관 사또가 어찌 벌레 따위를 신으로 모시냐며 군사를 풀어 지네를 잡아 토막 내 죽였다. 이때 단말마의 지네가 토한 핏방울이 사또의 미간에 튀었다. 그 직후 사또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놀랍게도 미간에 붉은 점이 있었다. 사또가 기이하게 여겨 처음에 붉은 점이라는 뜻으로 자점(紫點)이라 이름지었다가 뒷날 자점(自點)이라 고쳤다.

 

인조-효종 시대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린 김자점(1588~1651)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다. 지네의 저주로 태어난 괴물이었기에 희대의 간신이자 역적이 되어 마침내 집안을 멸문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부친인 김함이 벼슬을 산 적이 없으므로 지어낸 얘기임은 분명하지만, 500년 뒤까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당시 김자점이 얼마나 큰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김자점이 영화나 드라마의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최근에는 명종 때의 윤원형이나 연산군 때의 유자광에 비해 지명도에서도 뒤지는 분위기다. 1981년 컬러 TV 도입 기념으로 KBS가 큰 맘 먹고 제작한 대하 사극 대명에서 김순철이 김자점 역을 맡았고, 2009년 작 MBC TV ‘일지매에서 박근형이 같은 역을 맡은 정도다. 2013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은 정성모가 연기하는 김자점을 전면에 내세워 눈길을 끈다.

 

각 드라마의 캐스팅은 김자점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반영한다. 김순철은 글자 그대로 원초적인 권력욕에 매달리는 저돌적인 간신의 모습을 연기했고, 박근형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당대 최고 세도가의 면모를 보였다. 한편 정성모는 왕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정권 탈취를 노리게 된 교활한 야수를 연기하고 있다.

 

 

 

김자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조와의 인연에서 시작해야 한다.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를 왕위에 올려 놓은 반정 과정에서 김자점은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실 이 반정은 성공한 게 신기할 정도로 허술했다. 몇 차례나 음모가 새나갔지만 김자점이 광해군의 총희인 개시 김상궁에게 뇌물로 줄을 대고 있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김상궁은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김자점, 김류 따위는 그저 백면서생들인데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라며 무마했다. 실제 반정 전날인 1623 311일에도 고변이 들어왔지만 광해군은 김상궁과 술을 마시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국 김자점은 1등공신에 올랐다.

 

하지만 관료로서 김자점은 대단히 무능했다. 청의 군사적 위협 속에 도원수에 오른 김자점은 정예병을 큰 길에서 벗어난 산성에 주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로로 진격해 한양을 범했다. 심지어 김자점 본인도 황해도 토산에 정병을 주둔해 놓고 교전을 피한 죄로 죽을 위기에 몰렸다.

 

그래도 인조는 김자점을 외면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권위를 잃은 인조에겐 김자점 처럼 까라면 까는저돌적인 충복이 필요했을 거란 해석이 일반적이다. 김자점은 재빠르게 친청파로 변신해 조정 중신들을 제압했고. 그가 후원하는 소용 조씨도 인조의 안방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1645), 세자빈 강씨의 사사(1646), 임경업의 주살(1646) 등 의혹 짙은 사건이 이어자자 김자점에 대한 여론은 악화됐다. 특히 임경업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민심은 군사력을 키워 청에게 복수하자던 명장 임경업에게 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를 손자며느리로 삼으며 권력은 더 강화됐지만 백성들의 지탄도 높아갔다.

 

                                          (충민공 임경업 장군 영정)

 

결국 인조의 죽음과 함께 파국이 왔다. 소용 조씨가 낳은 숭선군에게 밀려나는게 아닐까 은인자중하던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자점에게 칼을 뽑았다. 삭탈관직에 이어 유배령이 떨어졌다. 때맞춰 효종은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고, 김자점은 청과 내통하는 매국노의 표본이 됐다.

 

마침내 효종 2. 숭선군을 앞세워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과 함께 김자점의 일족이 몰살당하는 옥사가 펼쳐졌다. 소용 조씨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불안한 임금 자리를 지키려는 인조의 속내는 누구보다 잘 읽었지만 여론의 흐름은 무시한 결과였다. 효종은 그를 잘라 냄으로써 민심을 얻는 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김자점은 정말 반란을 시도했을까. 최소한 효종이 그를 편치 않게 느낀 것은 분명하다. 인조는 죽기 두 달 전, 세자(효종) 앞에 김자점과 이시백을 불러 네가 왕이 되어도 이 두 사람은 중용하라고 당부했다. 명심하겠노라 대답했지만 효종의 속내는 달랐다. 즉위 후 김자점의 역모를 보고받은 효종은 당시 시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자점은 오만했다. 그때 자점이 나를 섬길 뜻이 없음을 알았다고 냉소했다. 자만이 재앙을 부른 셈이다.

 

P.S. 김자점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자취를 감추지만 20세기에 이르러 그 후손 가운데 불멸의 거인이 태어난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첫 문장에서 자신이 멸족을 피해 황해도로 이주한 김자점 가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끝)

 

 

 

 

인조가 가장 신임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이시백(위 초상). 기억력 좋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인 이귀의 아들이며, 고전 소설 '박씨부인전'에 나오는 박씨부인의 남편입니다. 이시백이 치명적인 전란을 극복하고 복구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박씨부인의 지혜 때문이었다는 당시의 민심을 대변해주는 것이죠.

 

(박씨부인전이라면 또 잘 모르실 분도 있겠군요. 좀 나이드신 분들은 구 TBC 연속극인 '별당아씨'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별당아씨의 남편이 바로 이시백이라는 얘깁니다.)

 

어쨌든 인조 사후에도 이시백은 살아 남은 반면, 김자점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족이 멸문당하는 대란을 겪습니다. 대체 왜 김자점은 몰락했을까요. 당연히 효종과의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비명에 죽고,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다시 세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윗글에서 보듯 소용 조씨(이 무렵 귀인이 됩니다)와 김자점의 세상이었기 때문이죠. 어린 아이이긴 했지만 소용 조씨가 낳은 숭선군이 언제 자신을 대신해 세자가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세자(봉림대군 = 뒷날의 효종)는 철저한 몸조심에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세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어떤 입장을 취할지에 대해 차곡차곡 게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살아서 왕위에 오른다면'이라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일단 형 소현세자가 심양에 머물며 청나라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다 반대 세력에게 제거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한편으론 김자점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누가 있을지를 찾아 봅니다.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선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서인 재야 세력이죠.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망 있는 집단이고, 송시열은 한때 봉림대군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부국강병을 통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고 주장하던 인물들이죠.

 

그렇게 해서 1649년 5월, 인조가 즉고 효종이 죽위하자 효종은 그 즉시 인조의 시호를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송시열 등을 불러 올립니다. 심지어 송시열은 상경한 뒤,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며 독대를 요청하고, 효종이 '몸이 불편하다'며 독대를 거절하자 그 즉시 짐을 싸서 귀향길에 오릅니다. 당황한 효종은 사람을 불러 송시열을 붙잡고 자신의 성의가 부족했음을 사과합니다. 이후에도 송시열은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이건 모두 제 덕이 부족한 탓이니 사직하겠습니다'를 되풀이하고, 그때마다 효종은 극구 만류합니다. 이런 사직 쇼(?)를 거쳐 전 조정이 송시열이야말로 효종 시대의 실세임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바로 알아차립니다. 송시열-송준길이 권력의 핵심이라면 과연 권력에서 소외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제거되어야 할 것인지. 그 다음 수순은 알아서 돌아갑니다. 효종이 직접 누구를 지목해서 아니라, 수많은 선비들이 김자점 탄핵에 나섭니다.

 

결국 김자점은 1년 뒤인 1650년, 벼슬을 내놓고 귀양가는 몸이 되는데, 마침 청의 사신들이 '조선이 요즘 (우리와 가깝던)선왕의 대신들을 왜 이유 없이 내쫓는가. 혹시 우리와 적대하려는 뜻이 있는 것인가'를 추궁할 것이란 소문이 돕니다. 이 소문의 배경은 '(청와 가까운) 김자점이 위기에 몰리자 청의 힘을 업고 조정을 압박하려 한다'는 것이었죠.

 

효종이 왕위에 오른지 두달이 채 안된 1649년 6월22일, 실록의 기록입니다. 대신들이 처음으로 영의정 김자점이 불충하고 무능하니 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을 때의 기록. 처음엔 듣기 싫은 척(?) 하던 효종도 끝내 벼슬에선 물러나게 합니다.

 

...탄핵하기를 더욱 강력히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경인년(1650년) 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도 부처(中道付處)를 명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다. 이때 서울 안에는 자점이 죄를 입은 뒤로 노중(虜中)과 은밀히 내통하여 저들의 힘을 빌어 우리 조정을 위협할 계획을 한다는 등의 말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이 조사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세 무리가 잇따라 출발하여 압록강도 건너기 전에, 장차 즉위한 처음에 구신(舊臣)을 축출한 이유를 힐문(詰問)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먼저 퍼지니, 사태가 매우 위급하여 조야(朝野)가 흉흉해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도 자점을 의심하였으나 다만 그의 두 자식 연(鍊)식(鉽)을 내쳐 외읍(外邑)에 보임해서 그 모계(謀計)를 막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는 단지 우리 나라가 성을 쌓은 일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혹자는, 자점이 스스로 계획이 실패되어 탄로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도리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미봉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름에 양사가 다시 자점의 죄를 탄핵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며 누차 아뢰어 마지않으니 곧 멀리 귀양 보내라 명하여 광양현(光陽縣)에 유배하였다.

 

 

이쯤 되면 왕의 뜻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효종 즉위 2년째를 넘기지 못하고 누군가가 "김자점과 조인형(소용 조씨의 친척 오빠)이 서로 몰래 오가며 모의를 하고 있다"는 고변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김자점의 아들 김식과 손자 김세룡(소용 조씨가 낳은 옹주의 남편)을 지목합니다.

 

여기에 김자점의 역모가 보고됐을 때 효종의 반응이 널리 퍼집니다. 윗글에 있듯 효종은 인조가 이시백과 김자점을 불러 자신에게 "이 두 사람을 중용하라"고 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죠. 김자점이 얼마나 당시의 세자(효종)을 무시했는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황. 이건 "빨리 김자점을 잡아다 죽이지 않고 뭘 하느냐"고 직접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과정을 살펴 보자면 과연 김자점이, 혹은 김식이 난을 일으키려 하기는 했을까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김자점의 권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인조가 죽기 전입니다. 김자점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세자를 폐하고 숭선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던 모양이고, 그 다음 방법은 효종이 즉위 후 일찍 죽고, 그 뒤를 이어 숭선군이 왕이 되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효종이 한발 빨랐습니다. 김자점의 예측에 비해 너무 손이 빨랐던 모양입니다. 1649년, 즉위 두달만에 벼슬을 빼앗고, 6개월만에 귀양을 보냅니다. 김자점에게 빌붙어 살던 사람들도 세상 판도를 파악하고 재빨리 등을 돌립니다. 마침내 난이 보고되고 김자점이 죽음을 맞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년6개월.

 

죽음을 맞은 김자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비자에는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을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것이 문제가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효종은 이 교훈을 확실히 지켜 왕위에 올랐습니다. 김자점이 효종을 정말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막았을테니 말입니다. 반면 김자점은 자만심에 빠져 이 교훈을 무시했던 셈이죠. 그것이 결국 김자점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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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문화 생활 가이드] 변명으로 시작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시간이 유수와 같다 보니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뭐 관심있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 '10만원으로 즐기는 문화생활 가이드'는 얼마전 창간된 주간 문화매거진 '매거진M'에 실리는 칼럼입니다.

 

이 칼럼이 실리는 시점이 3월 마지막 주였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이쪽으로 끌고 올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매달 첫호에 실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달의 경우는 4월 5일이었던 셈이죠.

 

지면에 칼럼을 쓰는 처지에, 아무리 제가 쓰는 것이긴 하지만 지면에 쓴 칼럼이 읽히기도 전에 블로그로 퍼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다가 깜빡 시점을 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추천 공연인 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공연 일정이 지나 버렸더군요. ;;; (아, 물론 제가 추천하는 공연을 제가 모두 보러 가는 건 아닙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4월의 문화생활 가이드

 

이젠 봄내음이 물씬 나지? 3월이 발레의 달이었다면 4월은 음악의 달이야.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예술의전당 개관 25주년 기념 행사로 치러지고 있는 코리언 월드 스타 시리즈. 신영옥(45), 장한나(429), 조수미(430) 등 진짜 월드스타들이 홈커밍데이 행사를 하는 셈이지. 특히 장한나는 첼로 연주자 아닌 지휘자로 황병기 교수와 협연한다니 관심이 아니 갈 수 없지.

 

문제는 가격이야. 화려한 출연진에 비하면 과히 비싸다고 할 수 없지만, 3~12만원은 약간 부담스럽기도 해. B석이라도 조수미 장한나의 무대를 놓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괜찮은 기회지만, 아무래도 이 지면이 지향하는 공연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일단 소개는 했어.

 

 

대신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건 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야. 설마 김선욱이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피겨 스케이팅에 김연아, 수영에 박태환이 있다면 피아노에는 김선욱이 있다는 괴물이야. 백건우 정명훈 이후 한국을 빛낸 수없이 많은 스타 피아니스트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김선욱은 특이해. 뭐랄까, 아이돌의 자질을 가진 클래식 스타랄까?

 

김선욱은 지난해부터 LG아트센터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에 도전 중이야. 그 다섯 번인 413일은 17번부터 21번까지 연주하는 날. 특히 첫 곡인 17템페스트’ 3악장은 영화 하녀에서 이정재가 연주한 곡으로도 유명하지. 비교될 거라고? 천만에. 연주하는 김선욱을 현장에서 보면 이정재가 오징어로 보인다는 사람도 많아. R석은 7만원이지만 3만원 짜리 A석으로 즐기는 게 바로 문화가이드 정신이지.

 

또 매년 4월은 예술의 전당에서 한달 내내 교향악축제가 열리는 달이지. 생소한 사람도 있겠지만, 매년 전국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상경해 각자 자존심을 걸고 공연을 펼치는 행사야. 평소 예술의전당 문턱이 높아 보였던 사람이라면 R3만원, S 2만원이라는 티켓 가격도 매력적이지. S석이면 충분해.

 

레퍼토리에 따라 취향 껏 찾아 보는 게 행사 취지에 맞는 감상이지만, 굳이 딱 하나만 골라 추천하라면 417일 열리는 수원 시향(지휘 김대진)과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의 협연을 보라고 하고 싶어.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생상스 교향곡 3번이면 매치도 그만이지. 이제 손열음과 김선욱의 스승으로 더 유명한 마에스트로 김대진의 지휘를 즐겨 보도록.

 

 

모처럼 연극 한편? 마침 대학로에서는 연극 광해 21일까지 공연 중이야. 영화 광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고, 광해가 연극으로 개작되어 공연 중이라는 것도 꽤 알려졌을 거야.

 

사실 같은 줄거리를 놓고 영화와 연극을 어떻게 차별화할 지가 제작진의 고민거리였을 텐데, 그 부분에선 꽤 훌륭해. 오히려 대본의 완성도는 영화보다 우수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 영화에서 구멍으로 보였던 부분들이 싹 사라졌어. 출연진의 화려함으로 치자면 이병헌-류승룡-한효주가 나온 영화에 비길 수 없겠지만, 광해/하선(배수빈, 김도현)-허균(박호산, 김대종)-중전(임화영) 라인업도 매력적이야. 특히 영화에선 상징으로 처리됐던 하선의 뒷얘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볼만한 작품이기도 하더군. S석은 35천원.

 

볼만한 공연이 많다 보니 나머지는 책 한 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4월에 추천하고 싶은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프라하의 묘지.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이번엔 19세기 음모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괴문서 유대 장로들의 의정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했어.

 

그렇다 보니 이 책은 너무나 한국인들의 정서를 꿰뚫는 느낌이야.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폐부를 찔러. 예를 들면 극중 회의주의자 게동이 하는 이런 말을 들어 봐.

 

무엇하러 책을 쓰고 감옥에 간단 말입니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원래 공화주의자이고, 문맹이라서 책을 읽지 못하는 농민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통 선거권을 얻어도 독재자를 지지하는 판에.” 물론 루이 나폴레옹이 제2공화정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제2제정 시대를 연 당시의 프랑스 정국을 비꼰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기막히게 와 닿는 얘기가 아닌가 싶어. 그런 의미에서 한번 읽어볼 만 한 책이야.

 

 

김선욱,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          3만원

연극 광해                                             35천원

교향악 페스티발 중 1                                 2만원

움베르토 에코, ‘프라하의 묘지                           12500원 내외

 

 

 

 

자칫하면 연극 '광해'의 종영도 지나쳐 버릴 참입니다. 21일까지.

지명도는 당연히 배수빈이 앞서지만 김도현-임화영 커플의 앙상블이 더 좋다는 평도 있습니다. 아무튼 보실만 합니다.

 

'프라하의 묘지'는 에코 선생의 전작들에 비해 그리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보는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솔직히 말해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등과 이 분의 작품을 비교해 보자면, 단행본 3권짜리 어린이용 삼국지와 10권짜리 박종화 삼국지(혹은 이문열 삼국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아무튼 음모설 좋아하기로는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듯한 한국인들이 꼭 봐야 할 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문득 또 위에 인용한 문장이 마음에 걸리네요. 음모설 따라다니는 분들이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고, 이런 책 읽을 사람은 이미 음모설은 그냥 음모설이라는 걸 아실 분들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습니다. 강추.

 

왠지 부실한 포스팅이 된 듯 한 느낌이라 사죄의 의미로 벚꽃 짤방.

 

 

 

 

찍어놓고 보니 천녀유혼 배경 같군요.

내년 봄까지 벚꽃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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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사실 장옥정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조선 숙종 때의 유명한 희빈 장씨의 이름이 옥정이라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이 여인은 그냥 '장희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조선 명종 때의 정난정, 연산군 때의 장녹수와 함께 '조선 3대 악녀'라는 이름으로 이 여인을 불러 왔습니다. 들으면 바로 아시겠지만 모두 TV 사극이 사랑해 온 여인들입니다. 이 뒤를 이어 광해군 때의 개시 김상궁, 인조 때의 소용 조씨 등이 '3대 악녀'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인물들이죠.

 

하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도 다 이유가 있는 법. 특히 장희빈 장옥정의 경우는 역사적 환경을 살펴보면 볼수록 그냥 '악녀'로 불리기에는 억울한 부분이 꽤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번에 시작하는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이런 역사적 환경을 훌쩍 넘어서, 아예 새로운 판타지적 해석을 해 냅니다만...

 

 

 

 

어쨌든 장옥정이라는 여인의 삶을 한번 살펴 봤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런 구도입니다.

 

 

장희빈(1659?~1701)

 

사극이 시청률을 올리는 방법 중에 사약 신이 있다. 같은 사약이라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먹고 피를 토하는 게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사약의 성분상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사약 신이라면 아무래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장희빈을 떠올리게 된다. 폐비 윤씨의 경우엔 비단 섶에 피를 토하며(물론 기록엔 그냥 피눈물이다) “내 아들이 왕이 되면 이것을 전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강렬하다. 그리고 장희빈의 경우에는 조선 왕조 최고의 독부답게 약사발을 비운 뒤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죽음을 맞는 것이 보통이다. 장희빈을 연기한 수많은 여배우 중에서도 사약 신으로는 이미숙이 첫 손에 꼽힌다. 1981 MBC TV 드라마 여인열전에서 돌계단을 구르며 신음하던 이미숙표 장희빈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문정의 수문록(隨聞錄)’ 에는 더 지독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야사에 따르면 장희빈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들(뒷날의 경종)의 얼굴을 보기를 청한다. 허락을 받은 세자가 통곡을 하며 나타나자 장희빈은 내가 너희의 후손을 이어 줄 줄 알았더냐!”하는 악담을 퍼부으며 최후의 기력을 다해 왕자의 사타구니를 강타하고(反出不忍說之惡言肆其毒手侵及下部), 세자는 혼절한다. 장희빈은 그제야 깔깔 웃으며 사약을 들이킨다. 경종의 후사가 없었던 탓에 뒷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장희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진을 구할 수 없어 '동이'에서 이소연의 사약 신으로 대체했지만 당시 이미숙의 사약 연기는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댓돌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단말마의 모습... 아무튼 '수문록'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들을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말인데, 사실이라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악의 경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경종은 병약했고,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숙빈 최씨-'동이'-가 낳은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죠.) 

 

1990년대 이전까지 장희빈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런 세평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숙하고 현명한 인현왕후 민씨와 아름다운 악녀 희빈 장씨가 숙종을 놓고 삼각관계를 펼치고, 장희빈에게 빠진 숙종이 한때 총기를 잃어 어진 아내와 충신들을 멀리 하지만, 결국엔 제 정신을 차리고 악인들을 단죄한다는 교훈담이다. 이른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나 고대 소설 인현왕후전의 충실한 재현이다. 당연히 장희빈 역은 당대의 섹시 아이콘들이 돌아가며 맡았고, 인현왕후 역에는 청순미 넘치는 전통적인 미인들이 들어섰다. 팀 장희빈의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정선경 김혜수 등과 팀 인현왕후의 이혜숙 박순애 박선영 박하선 등을 보면 그 특징이 확연하다.

 

하지만 김혜수가 타이틀 롤을 맡은 2003년작 장희빈(KBS)’ 이후 장옥정을 당쟁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희빈 이전의 여자 장옥정은 여러 모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중인 가문의 딸로 태어나 일개 궁녀에서 출발해 왕의 정실인 왕비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 비록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뒤 사약을 받아 끝내 장희빈이란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말이다.

 

 

일단 숙종 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 장옥정의 아버지인 역관 장경은 일찍 세상을 떠나지만 역시 역관 출신인 백부 장현은 당대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당시 역관들은 사신단의 일원으로 허가받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특히 장현은 소현세자와 효종이 청에 인질로 갔을 때 호종한 공로로 위세도 등등했다.

 

그런 장현이 남인 세력의 재정적 후원자였으니 장옥정 또한 남인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인현왕후 민씨는 그야말로 노론 핵심 가문의 딸이었다. 큰아버지 민정중과 아버지 민유중은 당대 서인의 영수였고, 친정 오빠들인 민진후, 진원 형제 역시 당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만만찮은 왕, 숙종이 있다. 1674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초기에는 남인이 다소 우세했지만 집권 6년째인 19세 때 경신환국(1680)으로 서인에게 권력을 넘겼고, 28세때엔 다시 기사환국(1689)으로 남인들의 세상이 왔다. 그리고 33세 때, 갑술환국(1694)으로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신하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며 송자(宋子)라고 불릴 정도로 서인들의 추앙을 받던 송시열에게까지 사약을 내리는 냉혹함을 보였다. 숙종 이후 어떤 왕도 이 정도로 강대한 권력을 갖지는 못했다. 아무리 봐도 여색에 혹해 정치적 오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숙종이었기에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옥정을 중전으로 삼은 것이나(남인의 손을 들어 줌),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옥정에게 사약을 내린 것(서인의 손을 들어 줌) 모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겐 사랑도 정치의 연장선상이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삭막한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니 김태희가 제9대 장희빈으로 나서는 SBS TV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패션에 뛰어났던 궁녀 장옥정과 청년 왕 숙종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옥정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끝)

 

** 뒤늦게 보게 된 시놉시스에 따르면 '사랑하는 여인을 권력을 위해 결국 죽음으로 밀어 넣는 비운의 왕'으로 그려진다는군요. 그럴듯합니다.^^

 

 

이렇습니다. 벙자호란 이후 조선 정치사를 살펴보면, 그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왕은 성군으로 알려진 영조나 정조가 아니라 숙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정조 시대만 해도 신하들의 세력을 무시한 왕정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던 반면 숙종은 당쟁을 이용해 어느 한 파벌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왕권을 구축하는 노련함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정치적 격변에 따라 후궁이 요동을 칩니다. 결과적으로 숙종이 서인들의 손을 들었기에 장희빈은 악역, 인현왕후는 선인 역을 맡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당시 남인에게 최종 우승기가 돌아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사극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중 일반에게 전해진 장희빈 이야기는 사실 역사의 승자였던 인현왕후의 친정 쪽, 즉 서인 쪽(그중에서도 노론)의 입장에서 다분히 강조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어쨌든 장옥정이 그렇게 악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스토리는 역사적인 배경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는 아예 시작부터 팩션이고, 판타지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무게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예 종류가 다른 이야기니까요.

 

그러니 이 드라마에서는 전통적인 사극의 인기 캐릭터인 악녀의 모습을 보기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시놉시스상으로는 한승연이 연기하는 최무수리(숙빈 최씨, 즉 '동이'의 한효주)가 오히려 악녀로 묘사될 것 같기도 한데, 어찌 될 지는 두고 볼 일.

 

아울러 김태희가 이번 작품을 통해 그동안 수없이 약점으로 지목됐던 연기력 논란을 떨쳐 버릴 수 있을지. 그 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악녀 캐릭터가 아쉬운 분은 주말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쪽을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인조 때의 요부 소용 조씨(사실 궁녀로는 귀인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만, 이상하게도 소용 조씨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역을 맡은 김현주의 연기가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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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싱어] 주말 밤의 볼거리로 서서히 위력을 드러내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최근 김종서 편이 방송된 JTBC [히든 싱어]입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6명의 목소리가 한 가수의 노래를 부릅니다. 놀랍게도 여섯 명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진짜 가수는 그중 하나뿐입니다.

 

그동안 '모창'이라는 영역은 명절 때의 특집 프로그램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못했습니다. 예능의 레드 오션 영역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히든싱어'가 그 의미를 바꿔놨습니다. 그동안 박정현, 김경호, 성시경, 조관우, 이수영, 그리고 김종서까지 여섯 명의 가수가 출연했는데, 출연한 가수 모두 출연자들의 수준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잇따랐습니다.

 

단순히 한 가수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미는 물론이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죠. 그건 바로 팬과 가수의 끈끈한 관계에서 오는 애정입니다. 특히 김종서 편에 출연한 시각장애인 이현학씨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1급 시각장애인인 이현학씨는 놀라운 노래 솜씨로 마지막 4라운드까지 진출했습니다. 여기서 이상학씨는 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미국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소박한 사연을 전했습니다.

 

 

 

 

 

사연을 들은 김종서가 "내가 떨어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

 

그리고 파이널 라운드입니다.

 

 

자, 이 셋 중 누가 진짜 김종서였을까요.^^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히든 싱어'는 그냥 모창 프로그램이 아니라 팬들이 만드는, 가수에 대한 트리뷰트 프로그램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그 가수를 사랑하고, 그 가수에 대한 애정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 부르느냐가 드러나는.

 

김종서 자신도 "조용필의 목소리가 갖고 싶어서 일부러 탁성을 내기 위해 성대를 망가뜨리려 한 적도 있다. 조용필씨가 골초라는 얘기를 듣고 그때부터 나도 닥치는대로 담배를 피웠다"고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팬들의 이런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조용필씨는 현재 금연중입니다.^^)

 

사실 '히든싱어'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실용음악과 재학생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수와 상관 없는 직업을 갖고 있고, 그리 넉넉지 않은 분들도 꽤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특정 가수, 자신이 잘 따라 부를 수 있는 가수의 노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팬으로 시작했다가, 모창이 취미이자 특기가 된 사람들인 것이죠. 그래서 재미로 하는 모창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런 진심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히든싱어' 이수영 편에 출연했던 김재선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남자 이수영'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된 김재선씨는 "내가 힘들때 위로가 되었던 이수영을 직접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고, 이제 내 노래가 이수영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털어놔 많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물론 모든 가수가 히든싱어에 출연해 이런 감동을 연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팬이라고 해서 모두 비슷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그 자신이 모창왕으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는 신승훈.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흉내내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히든싱어' 신승훈 편은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 신승훈씨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 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승철 이은미 등도 마찬가지. 하지만 세상엔 워낙 사람도 많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들도 많다 보니 찾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역시 독특한 목소리로 유명한 백지영도 흉내낼 수 있는 도전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외로 몇몇 인재들이 발견되어 백지영 편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됐습니다.

 

성시경 편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방송된 6편 중에서, 오락 프로그램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박정현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문이 열리면서 여섯 명의 박정현이 똑같은 목소리로 같은 노래를 부르던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출연자 중 한 사람을 꼽자면 아무래도 김경호 편에 나왔던 원킬.

 

 

 

 

앞으로도 '히든 싱어'는 바비킴 장윤정 등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팬심 가득한 분들을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어떤 가수든, 주변에 똑같이 흉내낼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적극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home.jtbc.co.kr/Board/Bbs.aspx?prog_id=PR10010135&menu_id=PM10015608&bbs_code=BB10010241

 

그리고 언제쯤, 오리지널 가수를 꺾고 최종 상금을 획득하는 분이 나타날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1등은 하지 못했지만 오리지널 가수에 이어 2등을 하신 분들은 6월쯤 '히든싱어' 시즌1이 끝날 무렵에 스페셜 가요제에서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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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든 드라마든, 유난히 제목이 헷갈리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비슷한 제목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어의 조합이 자연스럽지 않아 더 자연스러운 쪽을 찾아가는 경향도 있죠.

 

어떤 쪽이든 대개는 '제목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최근 1200만 관객을 넘어 선 '7번방의 선물'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설마 없겠죠. '홍보 부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흥행 성적입니다. 그렇다고 제목이 너무 길어서 헛갈리게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제목이 헛갈리는 작품들이 대부분 흥행에서는 꽤 좋은 성적들을 냈더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어떤 영화들이 있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바로 아래 포스터에 쓰여 있는 영화 제목을 한자 한자 정확하게 읽어 보시고, 스스로 반문해 보세요.

 

당신은 정말 이 영화의 제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정확한 제목은 '내가 살인범이다'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살인범이다'라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고, 심지어 '내가 살인자다', '나는 살인자다'로 착각한 분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작품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목: ‘세상의 끝’, 아니고요, ‘세계의 끝입니다.

 

관객 천만명이 넘었는데도 제목이 헛갈리는 영화가 있다. 바로 ‘7번방의 선물이다. 아마 아직도 ? 내가 본 영화는 ‘7번방의 기적인데…”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하다. ‘7번방의 기적이란 영화는 없다.

왜 이런 착시현상이 생겼을까. 크리스마스 영화의 고전인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이후로 유사 제목이 특히 한국에서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에 참여한 1987년작 ‘Batteries not included’는 국내 개봉 때 8번가의 기적이란 제목이 붙여졌다. 임창정과 하지원이 주연한 1번가의 기적 도 흥행에선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왠지 제목만큼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QTV에서 신동엽이 진행하는 7번가의 기적 이란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7번방의 기적이 등장한 것이다.

지금이야 대박이 났으니 별 상관 없겠지만, ‘7번방의 선물관계자들은 엉뚱한 제목을 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덜컹 덜컹 내려앉았을 거다. 사실 필자도 요즘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다름아닌 새 드라마, ‘세계의 끝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얀 거탑’, ‘아내의 자격의 안판석 감독이 연출하고 윤제문이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치사율 100%의 변종 바이러스가 한국을 덮치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그린 드라마다. 316일부터 매주 주말에 방송되고 있다. 포스터에서부터 세기말적인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하며, 서울 시내가 아비규환으로 변한다는 설정 하며 세계의 끝이라는 제목은 참 잘 지은 제목이다 싶었다. 본래 배영익 작가의 원작 소설 전염병에서 비롯된 작품이니 그냥 드라마 제목도 전염병으로 했으면 좋았겠으나 2010년 보건복지부가 전염병이라는 단어를 아예 감염병이라는 말로 바꿔 버렸다. 그렇다고 감염병이란 생소한 단어를 드라마 제목으로 붙일 수도 없지 없지 않은가.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계의 끝이란 제목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소설,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世界りとハドボイルドワンダランド)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스키터 데이비스의 올드 팝 히트곡 ‘The end of the world’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절대 낯선 제목이 아니다.

그런데 제목을 확정한 바로 다음 날부터 혼란이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새 드라마 세상의 끝말인데요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7번방의 선물아니라도 비슷한 제목이 있으면 헛갈릴 수 있다. 박시후 주연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나는 살인범이다로 잘못 쓴 기사만 해도 수백건이다. 당연히 나는 가수다 의 영향일 게다. 외화의 경우도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두 영화 디 아더스디 아워스를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좀 더 코믹한 경우로는 슈퍼맨 비긴즈배트맨 리턴즈가 있다(물론 팀 버튼의 배트맨2’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 하는 순간 또 헷갈리는 분들. 네. 슈퍼맨은 '리턴즈'가 맞고 배트맨은 '비긴즈'가 맞죠. 하지만 그게 또 끝이 아니라는 거...^^ 저 아래쪽에 보충 설명 나갑니다.)

 

하지만 세상의 끝이란 제목은 어디에도 없는데 왜 혼동을 가져오는 것일까. 정정해 줘도 심각하게 “‘세계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니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봐, ‘신세계신세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잖아라고 항변했지만 그제야 알았다. 한국인에게는 세계보다세상이 훨씬 더 일상적인 단어라는 것을.

류시원 김희선이 주연한 왕년의 드라마도 세상 끝까지이고, 빔 벤더스 감독의 1991년작‘Until the end of the world’이 세상 끝까지로 번역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탓을 해도 소용 없는 것이, 역시 일본 베스트셀러인 世界中心で、をさけぶ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번역됐다. ‘그 번역만 독특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재치있는 포털 검색 담당자 덕분에 세상의 끝을 검색해도 바로 드라마 세계의 끝이 뜬다. 그리고 위에서 예로 든 작품들 대다수가 흥행 성과가 썩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기대를 모으게 한다. 부디 세상 끝까지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드라마가 되길 기대해 본다. (끝)

 

 

아시는 바와 같이 '7번방의 선물'은 1200만, '내가 살인범이다'는 300만 고지를 넘어서며 흥행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끝'도 방송을 시작한 뒤까지 여전히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비해 아직 시청률 면에서는 아직 대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놀라운 완성도와 스케일, 그리고 윤제문, 장경아 등의 탄탄한 연기가 호평받고 있습니다.

 

'슈퍼맨 비긴즈'와 '배트맨 리턴즈'는 당연히 영화 '슈퍼맨 리턴즈'와 '배트맨 비긴즈'를 혼동해서 쓴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아는 분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놀란의 3부작 중 첫 작품은 분명 '배트맨 비긴즈'지만 '배트맨 리턴즈'라는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팀 버튼이 만든 배트맨 시리즈의 두번째 영화, '배트맨 2'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영화의 부제가 바로 '배트맨 리턴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배트맨 리턴즈'라는 표기를 어디선가 보게 되면 혹시 팀 버튼의 영화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슈퍼맨 비긴즈'의 경우에도 미드 '스몰빌'을 국내에서 방송할 때 이 제목을 쓴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래 저래 확인이 필요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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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첫 주말이 지나갔습니다. '인조' '김자점' '소용 조씨'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 등 관련 검색어들이 주말 내내 포털 헤드라인을 장식(물론 가장 오래 떠 있던 검색어는 아무래도 소현세자빈 역의 '송선미' 였지만)하더군요. 물론 검색의 동기에 대해 말하자면 또 다른 얘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뭐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이 증폭됐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1,2회에서는 인조(이덕화)와 김자점(정성모)의 질긴 인연이 중요한 요소로 그려졌습니다. 1636~37년에 걸친 병자호란이 끝났을 때, 인조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도원수 김자점을 죽였어야 정상이었습니다. 도원수는 오늘날의 육군 참모총장.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항복을 하는 상황에서 도원수가 멀쩡히 병력을 유지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죽어 마땅한 죄죠.

 

하지만 인조는 김자점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캐자면 1623년,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이 될 때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드라마에서도 그 장면에 다뤄졌죠.

 

 

 

 

 

일단 인조반정의 주역들을 인명록처럼 살펴보겠습니다. 1623년 3월12일(음력)로 돌아갑니다. 그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기록입니다. 광해군의 마지막 날이죠.

 

 

왕이 대신·금부 당상·포도 대장을 부르게 하고, 또 도승지 이덕형(李德泂), 병조 판서 권진을 입직하게 하였다.【이반의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그 상소를 보았는데,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이에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어 속히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을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벌써 닫혔으므로 비변사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들도 와서 모였다.】 도감 대장 이흥립(李興立)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게 하고,【흥립은 박승종의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직임을 제수받았는데 이 때 은밀히 반정군과 합세하였다.】 천총 이확(李廓)을 보내어 창의문(彰義門) 밖을 수색하게 하였다.【이반이 문 밖에 반정군이 주둔해 있다고 고했기 때문이었다. 이확이 명령을 받고 즉시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 때 밤이 이미 자정이 지났다.】 이날 금상(今上)은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대장 김류(金瑬),【이때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집에 있었다.】 부장 이귀【이때 전 평산 부사로서 논핵을 받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은 최명길(崔鳴吉)【전 병조 좌랑.】·김자점·심기원【유생.】 등과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였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 이서(李曙)는 부하 병사를 거느리고 왔고, 이괄(李适)【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는데 떠나지 않았다.】·김경징(金慶徵)【전 찰방인데 김류의 아들이다.】·신경인(申景摠)【도총도사(都總都事).】·이중로(李重老)【이천 방어사(伊川防禦使).】·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유생인데 이귀의 아들이다.】 장유(張維)【전 한림.】·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유생.】·신경유(申景裕)【무신인데 전 부사이다.】·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송영망(宋英望)【유생.】·박유명(朴惟明)·이항(李沆)【무신.】·최내길(崔來吉)【사예.】·한교(韓嶠)【전 현감.】·원유남(元裕男)【전 병사.】·이의배(李義培)【무장.】·신경식(申景植)【전 현감.】·홍서봉(洪瑞鳳)【전 승지.】·유백증(兪伯曾)【전 좌랑.】·박정(朴茢)【승문원 정자.】·조흡(趙潝) 등이 모두 와서 모였다. 문무 장사(將士) 2백여 명이【군사는 모두 1천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으로 들어가【전날부터 바람이 불고 운애가 끼어 성안이 낮에도 어두웠었는데 반정군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걷혀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이흥립이 지팡이를 버리고 와서 맞이했고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신 및 재신(宰臣)들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역사 상식. 광해군 때의 정권 주도 세력은 북인, 특히 대북이었고 인조 반정의 주역들은 서인들이었습니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대부분 소장파였던 서인들은 벼슬이 없거나, 부사/좌랑 정도가 고작입니다. 북병사로 임명된 이괄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내쫓기던 중종반정 때에도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양다리를 걸쳤듯 인조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광해군이 반정 음모를 입수하고 궁성 경비를 맡긴 이흥립이 바로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으니 이건 뭐 성공하지 못하면 이상할 지경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인조실록의 첫번째 기사, 즉 3월13일 기록된 인조반정의 상세한 내막을 보면 참 진행 과정이 가관입니다. 어쩌면 성공한게 신기할 정도로 엉성한 반란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엉성한 음모에도 무너질 정도로 광해군 하대의 정국은 어수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해군에 대한 최근 역사가들의 우호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그리 유능한 군주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하선이 아니고 진짜 광해여서 그랬는지도.^^)

 

 

 

 

인조반정 기사입니다.

 

 

 상(=능양군, 즉 인조)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상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원종 대왕(元宗大王)【 정원군(定遠君)으로 휘는 이부(李琈)인데, 추존되어 원종이 되었다.】의 장자이다. 모후는 인헌 왕후(仁獻王后)구씨(具氏)【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다.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다.】로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만력 을미년(1595년) 11월 7일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탄생하였으니, 당시 왜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 선묘(宣廟)께서는 이것이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크게 애중하여 궁중에서 길렀고, 친히 소자(小字)와 휘(諱)를 명하고 깊이 정을 붙였으므로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굳건하여 큰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번 자급이 올라가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져서는 더욱 겸양하면서 덕을 길렀다.


(중략. 중간 내용은 광해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입니다. 반정의 정당성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죠.)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 및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전 동지(同知) 김류(金瑬)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1620년)이었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3년 된 음모. 이렇게 3년에 걸쳐 모의가 진행됐고, 참여자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음모가 소문이 아니 날 재주가 없습니다. 특히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주동자인 이귀가 입이 싸서 '음모가 자주 누설되었다'고 되어 있을 정도.)

 
임술년(1622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中軍)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김자점이 광해군의 총애를 입은 김상궁 김개시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것이 1차 위기.)

 

신경진과 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德津)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 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당시 정승 박승종(朴承宗)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都監軍)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가 흥립을 보고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회합하였다.

 

(도감군이란 바로 훈련도감의 정예병. 말하자면 광해군이 정권을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는 군사력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도감을 지휘하는 훈련대장 이흥립이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반(李而攽)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李惟聖)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金藎國)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告變)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자 곧 풀어주었다.

 

(이흥립의 평소 처신이 좋았던 것인지... 광해군 말년에 정말 인물이 없었던 것인지. 아무튼 위에서 보듯 이흥립은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반정 핵심인 장유의 아우의 장인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측근인 박승종과도 사돈 사이입니다. 내심 '어느 쪽이 이기든 내게 설마 해를 입힐까'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 인조반정 때의 실록 기사를 보면 어찌나 5.16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은지 가끔 놀라곤 합니다.

 

이렇게 양다리에 능했던 이흥립은 결국 반정에 참여한 댓가로 공신의 자리에 오르지만, 1년 뒤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하는 운명을 맞습니다. 도성으로 쳐들어 온 이괄 앞에서도 이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 한편으로 몰린 것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정작 거병 소식을 박승종에게 고발한 김신국이 인조 즉위 후에도 중용됐다는 점입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만...)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체포하러 오는 관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솔직히 '나를 잡으러 오는 놈을 베고 가려 했다'는 말은 핑계로 들립니다. 오히려 다 들통났다고 생각하고 움츠리고 앉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다른 기록에는 '포자를 죽이고 가겠다'는 호기있는 표현보다 '이렇게 된 이상 체포될 뿐'이라고 말했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정작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이괄 뿐이었는데 반정의 공로를 가를 때 이괄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결국 이것이 반정 1년 뒤, 이괄의 난의 계기가 된 것이죠. 저런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김류가 금세 장 행세를 하고, 정작 군대를 이끈 이괄에게 2등 공신 자리밖에 주지 않은 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죠.)

 
 상이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讖地)로 여겼다.

 

(바로 '꽃들의 전쟁'에 나오는 '김자점이 능양군을 찾아가 설득해서 끌어냈다'는 부분은 이 대목이라야 할텐데, 실록에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려실기술'에는 능양군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추대할까 경계해 일찌감치 가솔들을 거느리고 연서역에 나와 있었다고 전합니다.

 

아무튼 김자점은 초기 능양군을 임금 감으로 점찍어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고, 그 뒤로도 인조가 김자점을 감히 떨치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인연이 큰 역할을 합니다.) 

 

 

 

 

장단의 군사(=장단부사 이서가 거느린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상이 인정전(仁政殿)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直宿官)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왔는데, 도승지 이덕형(李德泂)과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 두 사람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명패(命牌)를 내어 이정구(李廷龜) 등을 불러들이니,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朴鼎吉)이 병조 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權縉)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宗室) 항산군(恒山君)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그러니까 박정길이 죽은 것은 혼란중의 착오에 의한 것이지만, 원래 미움 받는 사람이었다...는 정도의 의미. 항상 혁명 때에는 반혁명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요주의 대상이 됩니다. 얼른 궁으로 찾아온 것은 잘 한 것이지만 오해를 풀지 못할 정도로 혁명 주체들과 평소 관계가 엉망이었다는...)


 그리고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를 참수하였다. 김 상궁은 선묘(宣廟)의 궁인으로 광해가 총애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참형을 받았다. 홍도는 흉패함이 흉당 중에서도 특별히 심한 자라 궐내에 잡아들여 참수하였다. 광해는 상제가 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廢世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상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金自點)과 이시방(李時昉)을 보내 왕대비(王大妃)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史官)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 두 사람이 복명하여 아뢰자 상은 곧 대장 이귀(李貴)와 도승지 이덕형, 동부승지 민성징(閔聖徵) 등에게 명하여 의장을 갖추고 나아가 모셔오게 하였다. 이에 이귀 등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 사실을 진계하며 누차 모셔갈 것을 청하였으나 대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이에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유사가 연(輦)을 등대하고 위의를 베풀었으나 상은 이를 모두 거두라 명하였다. 교자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고 말만 타고 가면서 광해를 떠메어 따르게 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오늘날 다시 성세를 볼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하는 생략. 어쨌든 무력으로 궁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서열상 광해군의 모후 뻘인 인목대비의 추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나 광해군은 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것 때문에 여론의 공격을 받아왔고, 그런 의미에서 인목대비의 인정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죠. 다만 인목대비는 은근히 '누가 새 왕이 될지는 내가 결정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광해군을 죽여서 내 아들(영창대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뜻이 강해 공신들과 꽤 긴 시간 동안 옥신각신합니다. 이때 이귀가 인목대비와의 기 싸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덕분에 인조반정의 핵심 주체 사이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유지하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류, 최명길, 심기원, 원두표, 구인후, 김자점 등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14년이 지난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시점에도 정국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자점을 해칠 수 없는 것은 김류의 조언 때문입니다. 사실은 인조보다는 김류에게 김자점이 더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당시 이들 혁명 주체 세력은 같은 서인 출신이지만 뒤늦게 사림에서 정치에 나선 송준길, 송시열, 김상헌 등의 인물들에게 위협을 느낍니다. 특히나 패전에 대한 책임이나 명에 대한 의리의 선명성에서 이들은 뭔가 뒤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혁명 주체 세력의 투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 용도로 김자점이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이건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시각과는 약간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그렇게 판단을 했건 말건, 김자점은 왕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 '꽃들의 전쟁'의 출발점이니까요.

 

아무튼 김자점의 생애와 의혹(그는 정말 반란을 꿈꿨나?)에 대한 부분은 다른 글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기록을 보면 볼수록, 참 흥미로운 삶을 산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절해고도에서 인조의 배신과 옛 인연을 되새기다 광기어린 춤을 추기 시작하는 김자점 역의 정성모. 정말 대단한 에너지의 배우라는 생각입니다. 이 장면은 두고 두고 '궁중잔혹사'의 명장면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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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분노의 추격자] 퀜틴 타란티노가 만든 '장고'의 리메이크에는 '장고: 분노의 추격자'라는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원제인 Django Unchained 와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은 아닙니다만, 뭐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라고 할 것도 아니고, 영화 내용과는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많은 구세대들들은 '장고'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몇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수염이 바늘처럼 송송 자라난 프랑코 네로의 얼굴, 말을 타고 멋지게 달리는 대신 관을 끌고 다니는 괴상한 카우보이,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관 속에서 튀어나오는 *** (과연 1966년작 영화의 내용을 갖고 스포일러를 따져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가려 두겠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 '장고'는 최고의 오락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드레날린 아티스트 퀜틴 타란티노가 리메이크한다는데, 기대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죠.

 

그리고 많은 아저씨 관객들은 외쳤습니다. "젠장, 장고라니! (말년에) 관뚜껑 그림자도 못 봤는데 장고라니!"

 

 

 

가장 기대에서 어긋났던 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격자'는 1966년작 오리지날 '장고'와 사실상 아무 상관 없는 영화였다는 점입니다.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 외에는 전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로 위 사진, 스쳐 보기만 해도 '장고다!'라고 할 수 있는 저런 모습의 '오리지날 장고 비주얼'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혀.

 

 

 

 

사슬에 묶여 이동하고 있던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미국 서부 사막을 떠돌던 슐츠 박사(크리스토프 발츠: 발츠라고 읽을지 월츠라고 읽을지 늘 갈등되는 상황)의 도움으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장고에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연인 브륀힐데(케리 워싱턴)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죠.

 

일단 장고에게 킬러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슐츠는 그를 현상금 사냥의 조수로 쓰는 한변, 브륀힐데를 산 대농장주 칼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찾아내 장고와 브륀힐데를 재회할수 있게 해 주려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구세대들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습니다. "아니 대체 이 영화에 왜 장고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일단 '오리지널 장고'를 구성하는 시각적 표현물, 즉 푹 눌러 쓴 모자와 밤송이 수염, 지저분한 외양과 질질 끌고 다니는 관 같은 것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도 안 끌고 다니는 장고가 장고냐'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물론 타란티노는 당연히 할 말을 다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장고' 이후에 수십편의 영화가 '장고'라는 주인공을 이리저리 울궈먹었는데 그걸 다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도 있다는 거냐. 전혀 계승할 생각 없었다. 그런 걸로 따지지 마라. 뭐 영화 속에서 20세기 역사도 제 멋대로 바꾼 적 있는 타란티노니까 가질 수 있는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장고'라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 없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솔직히 플롯 면에서 뛰어난 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타란티노의 영화답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단순 과격의 정서입니다. 관객에게 쓸데없는 추론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 같기도 합니다.

 

각각의 사건은 꽤 매끄럽게 연결되지만, 개별적인 사건들이 대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갖고 있나를 따지는 건 매우 곤란합니다. 그건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서부극'이라는 뜻의 '웨스턴'이라고 부르는 대신 '서던(Southern: 이 영화의 무대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남부라는 뜻에서. 물론 서부극의 주 무대인 텍사스는 더 남쪽 아니냐고 하실 분도 계시지만, 당시의 텍사스는 '미국'이 된지도 얼마 안 되는 서쪽의 황무지였죠)이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너무도 뼈속까지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수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의 위치를 따지자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과 테렌스 힐의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의 딱 중간 정도?

 

 

 

사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일부 평론가/기자 양반들의 지나친 의미 부여가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독일계로 설정되어 있는 슐츠 박사라는 인물입니다. 이 역할을 연기한 크리스토프 발츠는 전작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Ingrorious Bastards)'에서 나치 장교 역을 맡았죠. 솔직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또 독일계 미국인이 오히려 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이것 역시 무슨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는 얘깁니다. 그냥 할 수 있는 얘기는, 크리스토프 발츠라는 배우가 엄청난 흡인력으로 관객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 정말 최곱니다.

 

영화의 결말을 건드리게 될까봐 살짝 위태롭기도 하지만,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악당 캔디 역시 '극악무도한 미친 놈'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약간 부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비즈니스'를 할 생각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잃는 것은 우리 편, 즉 정의의 편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정의의 편(?)은 모든 문제를 좀 더 평화롭고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감독이 타란티노이다 보니 불행히도 그런 진행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냥 즐겁게, 피의 향연을 즐기면서, 마음 편히(?) 보시면 되는 영화.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자신의 다른 영화를 볼 때보다 조금 더,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어린이가 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영화가 유치하거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유치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이 영화는 '우리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야'라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즐기는 정도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나 그 가이드를 충실히 이행했느냐에 달렸습니다. 평소의 자신은 극장 밖에 두고, '장고'를 본 뒤에 다시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어설픈 의미 부여나 심층적인 해석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마시구요.

 

어쨌든 개인적으론 매우 강추. (물론 역시 개인적으로, 관뚜껑이 안 나오는 아쉬움은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더군요.)

 

 

 

P.S. 올드 '장고'를 아쉬워하는 노친네들에 대한 배려로 프랑코 네로는 한 장면 나옵니다. 술집에서 만나는 아저씨 역으로.^ 아, 물론 '마이애미 바이스'의 돈 존슨도 한 장면 걸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물론 주제가도 가져다 씁니다. 이건 '대체 오리지날 장고라는 게 뭐야' 할 분들을 위한 오리지날 장고 주제가의 뮤직비디오(?). 친절하게 '장고' 한 편에서 장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지 카운트도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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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은 기획 초기부터 '여성 사극'을 표방했던 작품입니다. '꽃들의 전쟁-여자들의 정치 이야기'라는 캐치프레이즈부터 그랬습니다.

 

'여성 사극'이라는 말은 사극 중에서도 특정한 작품군을 떠오르게 합니다. 대개 고전이 된 '개국'에서부터 '무인시대', '연개소문'으로 이어지는 KBS 대하사극풍의 작품들을 '남성형 사극'이라고 부른다면 '여성 사극'은 오래 전 MBC를 통해 방송된 '여인 열전'에서 SBS 사극의 정점을 찍었던 '장희빈'과 '여인천하'류, 그리고 JTBC의 개국 콘텐트로 큰 역할을 했던 '인수대비'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관통하는 특징은 분명합니다. 주로 궁정이나 양반가의 규방이 주 무대가 되죠. 그리고 성격상 호쾌한 액션이나 군중을 동원한 몹 신보다는 오밀조밀한 대사를 통해 갈등과 해소가 이어집니다. 대개의 경우 주인공과 악녀의 무한대립이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꽃들의 전쟁'은 이런 전형적인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19일 선공개된 1회 영상(본 방송은 3월23일)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현재 온라인에 선공개된 1회 영상은 실제로는 1회를 조금 넘어 2회 앞부분까지 살짝 걸치는 내용입니다. 대작의 위용을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간에 영상을 교체하는 바람에 카운트가 내려갔는데, 약 18시간만에 5만명 가량이 이 영상을 보시고 호평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간략한 도입부 줄거리.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에서 겨울을 넘겨 새해를 맞은 조선 16대 왕 인조(이덕화). 정축년 초 마침내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맞습니다. 김상헌(한인수)을 비롯한 척화파 대신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인조는 대군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합니다.

 

호란의 틈바구니에서 양반가의 서녀 얌전이(김현주, 훗날의 소용 조씨)는 몰락한 양반의 자손인 남혁(전태수)와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신분 차이가 분명한 두 사람이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죠. 물론 그렇다고 얌전이가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방지축 말괄량이형입니다.

 

다시 궁정. 도원수 김자점(정성모)이 격분한 인조에게 치도곤을 당합니다. 조선의 주력군을 이끌고 임진강 언저리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죄. 하지만 영의정 김류(김종결)는 은밀히 김자점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결국 김자점은 절도유배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항복의 치욕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구차한 삶은 정작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세자(정성운)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상황. 세자빈(송선미)은 갓난 아들 석철과 눈물로 이별하고, 인조는 홀로 남겨진 손자 석철을 부여안고 비통한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인조 시대가 사극의 초점이 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찌기 80년대 초, 컬러TV 시대를 맞은 KBS가 방송사의 위용을 떨치기 위해 큰 마음 먹고 시작한 사극 '대명'에서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조명한 적은 있었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전쟁의 끝에서 바로 효종 시대로 점프하고, 전란의 마무리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조 후기의 정치사는 한국 사극의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꽃들의 전쟁'은 기존의 여성 사극류와는 규모에서 확연히 차이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간간이 보여주는 전쟁의 참화나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은 인조의 치욕 장면 등은 소위 '정통 사극'에서도 쉽게 볼 수 없던 거대한 비주얼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의 여성 사극들과 차이나는 점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작가 정하연의 내공이 빛나는 부분입니다.

 

정하연 작가의 정치 분석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일찌기 수많은 작품들에서 드러났듯, 그의 사극에는 선인과 악인의 흑백 대립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갑에게는 갑의 명분이, 을에게는 을의 명분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남한산성에서 눈물로 항복을 권하는 최명길과 군신이 다 같이 죽자는 김상헌. 기존의 사극이라면 어느 한 쪽에 좀 더 큰 정당성을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꽃들의 전쟁'에서 최명길은 세자를 청으로 보내서는 안된다는 김상헌에게 "이제 와서 좋은 말은 혼자 다 하십니다. 무슨 대안이라도 있으신지요"라고 정면으로 맞받아 칩니다. 

 

오히려 보다 큰 간신으로 그려지는 쪽은 영의정 김류와 도원수 김자점. 김자점이야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미움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 김자점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할 말'은 그렇게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던' 김자점을 인조가 다시 불러 중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중량감있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키는 '여자들의 전쟁'이기 때문이죠. 여자들의 이야기가 중심 축을 이루되, 그 근거가 되는 역사나 정치 이야기가 단순화/유치화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소용 조씨(김현주) - 소현세자빈 강씨(송선미)의 대립이 드라마의 축이지만, 그 사이에서 열다섯 나이에 입궁하는 장렬왕후 역의 고원희도 눈길을 끕니다. 최근 2AM 뮤직비디오, 아시아나 모델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드라마로 확 개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작발표회 때 보니 의외로 또박또박 말을 잘 하던데, 별명이 '애늙은이'라는군요.

 

 

 

 

 

그리고 사극에서 빠질 수 없는 깨알 재미를 책임지실 분들. 일단 침장이 역의 손병호. 가벼운 톤을 잡았는데도 존재감이 그만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이 분. 내관 역을 맡은 우현.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의 '꽃미남 부문'을 책임질 전태수. 오랜만이라 그런지 각오도 남달라 보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갖출 건 다 갖춘 '꽃들의 전쟁', 23일 '무자식 상팔자' 후속으로 공식 출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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