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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 여기저기서 '힐링 드라마' '힐링 예능'이 등장한지 오랩니다. 하지만 진짜 '힐링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바로 JTBC 새 주말드라마 '맏이'. 어떤 드라마일까요?

 

타이틀 사진을 보면 어떤 내용일지 대략 짐작하실 만 합니다. 어린 다섯 남매가 부모를 잃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죠. 제목이 '맏이'인 것은 그 성장을 위해 맏언니가 엄마 노릇을 하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한다는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것이구요.

 

그 '맏이'가 14일 처음 방송됐습니다. 그리고 방송 첫날부터 반응이 호평 일색입니다. 한마디로 무공해 청정 드라마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일단 누가 누군지 구별을 해야 드라마 보는 데 도움이 될 듯. 드라마의 중심인 오남매부터 시작합니다.

 

아역 캐스팅은 단연 최강입니다. 얼굴만 봐도 캐릭터가 절로 느껴집니다.

 

 

다섯 남매의 성격까지 뚜렷합니다. 드라마의 핵심인 맏이답게 똑똑하면서도 심지가 굳고 갖은 고생 속에서도 밝고 바른 마음씨를 간직하는 맏딸 영선. 아역 유해정, 어른 역은 윤정희가 연기합니다.

 

둘째 영란은 집안 살림이야 어쨌든 예쁜게 좋고 비싼게 좋은 허영 덩어리. 어느 집안에나 희한하게 둘째 중에 이런 성격이 많은 듯 합니다. 예쁘게 자라지만 그 예쁜 얼굴 때문에 결국 문제를 만듭니다. 아역 박하영, 어른은 조이진.

 

 

 

'난 공부가 제일 싫어요'라고 말하는 세째 영두. 아들이지만 똑똑한 구석도 없고, 야무진 구석도 없는 그런 아이. 아역은 김윤섭, 어른은 강의식. 그저 착한 것 하나 외에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네째 영숙은 말 없이 소심하고, 부모를 잃은 충격 때문에 몽유병까지 생기는 약한 아이입니다. 언니의 도움이 유난히 필요한 동생이죠. 아역 한서진. 어른은 미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막내는 아직 아기 상태에서 못 벗어난 영재. 김예찬 군이 연기합니다. 10여년 뒤라고 해도 아직 아역 상태일 듯.

 

 

 

 

이 다섯 아이들이 아빠(윤동환)와 엄마(문정희) 밑에서 가난하지만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고 어쩔 수 없이 고모를 찾아가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모도 소실 살이에 눈치 보며 사는 처지라는 것. 그 고모네 환경입니다.

 

 

 

고모 은순(진희경)은 동네 갑부 이상남(김병세)의 첩 살이를 하면서, 둘 사이에 아들 종복이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이상남의 본처가 이실(장미희). 둘 사이에는 인호(아역 박재무, 어른 미정)와 지숙(아역 노정의, 어른 오윤아) 남매가 있지만 이실은 누구에게나 냉랭하기만 합니다. 워낙 상남과의 결혼이 원치 않은 결혼이었던데다 결핵이 깊어지며 누구 하나 곁에 가까이 두려 하지 않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실을 어려서부터 짝사랑했던 창래아재(이종원)만이 마음을 기울여 이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정도. 딸인 지숙까지도 '차라리 돌아가시는게 낫겠다'는 속내를 비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 은순의 조카 오남매가 들이닥치면 반가워 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겠죠. 은순 역시 떠맡을 처지가 아니지만 여기 말고는 기댈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사이가 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영선이 친자식들조차 열지 못한 이실의 차가운 마음을 열게 되는 스토리.

 

 

 

 

그리고 한 동네에서 성장하는 영선의 소울메이트 순택네가 있습니다.

 

순택이네는 그래도 양반 끄트머리를 자처하는 집안. 어머니 반촌댁은 일자무식에 떡장수지만 그래도 아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전형적인 어머니입니다.

 

그 아들인 순택(아역 채상우, 어른 재희)은 도내 1등을 차지하는 수재. 부잣집 아들인 인호와 학교에서는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입니다. 당연히 부모의 온갖 기대를 품에 안은 '개천에서 난 용' 캐릭터죠.

 

그 동생인 순금(아역 박지원, 어른 미정)은 오빠와는 달리 공부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마음만은 하늘만큼 넓은 소녀. 눈치도 없고 남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공해 캐릭터입니다. 특히나 아역 박지원 양의 캐스팅은 정말 신의 한수. 단 1회만 봤을 뿐인데도 웃음이 빵빵 터집니다.

 

 

 

'맏이'의 초반은 이 아역들의 눈부신 활약이 신화를 만들어 낼 것 같은 예감.

 

부모 없이 오남매만 남아 갖은 고생 끝에 천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어른이 되어서도 돌봐줄 사람 없어 또 고생하고, 그중에 또 철없이 맏언니 속 썩이는 캐릭터도 있고...

 

이렇게 이야기만 들으면 참 불쌍하고 눈물나고 답답한 이야기일 듯 하지만, 대한민국 원로 작가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김정수 작가는 그리 뻔한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분입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듯 한 구석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어른들을 웃깁니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찡하게 와 닿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전체적인 드라마의 색채는 밝은 녹색입니다.

 

 

 

 

저 또한 농촌 생활 한번 해 본적 없지만, 오가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 정겨울 수가 없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그래, 저 시절엔 다들 저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할 드라마죠. 반면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저 시절엔 저랬나' 싶은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피가 조금 다를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람살이의 모습은 똑같다고나 할까요.

 

또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듣다 보면 이건 금세 우리 삼촌, 우리 고모, 우리 누이의 모습이라고 공감할 만한 디테일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요 인물들만 20여명이 되는 대형 드라마인데도 인물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그냥 흘려 보낼 수 없다는 데서 대 작가의 관록이 느껴집니다.

 

저 불쌍한 아이들이 언제 다 자라서 사람 구실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드라마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눈길을 떼기 힘들게 하는 드라마. 이런 드라마는 참 오랜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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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많이 타시죠?

 

색다른 택시 한번 타 보시는게 어떨까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택시,

 

요금 대신 노래를 하면 목적지까지 가는 택시가 있습니다.

 

바로 JTBC에서 운영하는 '히든 택시'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히든 택시는 10월12일부터 JTBC에서 방송되는 '히든싱어2'를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물론 이 택시의 운영 목적은 '히든싱어2'의 출연자 모집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어디 예심 보러 나가기도 귀찮은 분들, 택시 탈 때 하시는 콜 전화 한통 하시면 이 히든택시가 달려갑니다. 그럼 차 안에 설치된 노래방 기계로 노래 한 곡 하시면 됩니다.

 

 

 

타신 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선팅이 잘 되어 있습니다만,

 

 

 

차 안에는 이렇게 카메라가 설치돼 있습니다.

 

 

 

앞에도 카메라가 있죠.

 

여러분은 뒷좌석에서 노래만 하시면 됩니다.

 

아, 물론 여러분이 노래하시는 모습은 영상으로 촬영됩니다. 재미있는 분들은 이걸로 바로 방송에 출연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노래로 차비를 내시면 서울 시내 원하시는 곳에 모셔다 드리는 진짜 택시 역할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서울만 됩니다. 수원 양양 광주 부산 가시는 분들은 KTX나 고속버스를...

 

그리고 택시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길에서 손 들고 타시기는 힘들 듯 합니다. 히든 택시는 히든 콜, 1688-5530으로만 운영됩니다. 전날 전화 주시면 예약 가능합니다.

 

 

 

 

뭐 간판은 출연자 모집이지만 사실 다 즐겁자고 하는 거죠. 노래 잘 하는 분, 이승철 모창 똑같이 하는 분, 이런 분들 아니라도 아무나 전화하시면 됩니다. 그냥 택시 타고, 노래 한 곡 하고, 잘 하면 상품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품?

 

물론이죠. 이런 행사를 하면서 상품이 없다면 누가 참가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차량 MC가 "기본적으로 모창자의 자질이 있다"고 판단하는 분들께 디자인도 예쁜 닥터 드레 헤드폰을 드립니다.

 

하루에 몇명?

 

모창능력자로 인정만 받으면 100분 다 드립니다.

 

(네. 회사 털어먹으려고 작정했습니다.)

 

물론 노래 실력이 좀 아쉬워도 재미있는 분이면 그냥 드릴 수도 있습니다.

 

노래 실력은 몰라도 끼가 가수 급인 분들, 대환영입니다.

 

평소에 저 무시하셨던 분들, 저도 이 정도 힘은 있습니다.(으쓱) 아, 이도 저도 아닌 분들께도 기본 상품은 드립니다. 뭐 그것도 꽤 쏠쏠할겁니다.

 

 

 

 

지금 즉시 전화하십쇼. 히든콜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히든콜 1688-5530!

 

 

P.S. JTBC 홈페이지에 오시면 이 말고도 수많은 참가자 모집 이벤트가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출연하지 않아도 주변의 친구가 추천하면 상금이 30만원(아, 물론 그 친구가 출연자로 선택될 경우에 드립니다). 아직도 저희는 배고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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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를 달려온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립니다.

 

조선 인조 시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이라는 대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욕의 역사라는 점 때문에 이 시대를 그린 드라마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특히나 병자호란 이후 인조 말년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음을 맞는 과정은 사극 소재로 인기있는 내용은 아니었죠.

 

'꽃들의 전쟁'은 그 시대를 주도했던 악녀 소용 조씨(드라마가 끝날 무렵엔 귀인 조씨)와 간신 김자점을 조명하는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숙종 시대의 장희빈과 인현왕후 이야기가 남인과 서인의 정국 변화에 따른 부침으로 오르락 내리락이 있는 이야기인 반면, 귀인 조씨는 너무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 드라마로는 흥미가 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숨가쁘게 달려온 50회는 여느 사극에 비해 정하연 작가 특유의 현실적 역사관이 반영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갔습니다. 여기에 젊은 노종찬 PD의 속도감 있는 연출도 새로운 사극의 개척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꽃들의 전쟁'은 인조(이덕화), 김자점(정성모), 귀인 조씨-얌전이(김현주)의 죽음으로 한 시대의 끝을 맺고, 새로운 임금 효종(김주영)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태어나 형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시대.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효종 이호(孝宗 李淏, 1619~1659)

 

TV에서 효종(봉림대군)의 일대기를 그린 최초의 드라마는 1981 KBS 사극 대명이다. 한국 방송이 본격적인 컬러TV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린 대하 사극 대명은 효종이 병자호란의 비극을 딛고 야침차게 북벌을 준비하는 내용을 그렸다. 효종 역을 맡은 배우 김흥기의 열연도 화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효종=북벌이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와 관련해 효종이 이완 대장과 함께 기해년 단옷날 대군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지만, 왕이 단오 전날인 음력 54일 급사하는 바람에 대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때문에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북벌의 성패 여부를 떠나 효종의 치세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1649년 왕위에 오른 효종은 두 가지의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아버지 인조를 왕위에 올려 놓은 반정 공신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 둘째는 형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우선 효종은 아버지의 총희인 희빈 조씨와 김자점의 연합 세력부터 손을 댔다. 권신 김자점은 잇단 탄핵으로 귀양을 간 뒤 아들과 손자가 모반을 계획했다는 고변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하지만 이것이 두번째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김자점을 역적으로 처단했으면 아버지 인조의 노염을 사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빈 강씨는 복권을 시켜야 하는 것이 순리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빈의 죽음은 김자점의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강빈에 대해 말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못을 박았다. 눈치 없이 강빈의 복권을 주장했던 황해감사 김홍욱은 장살(杖殺)을 면치 못했다.

 

이런 기록은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강빈을 살려내기 위해 왕위를 던질 각오까지 하는 의로운 봉림대군(김주영)의 모습과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효종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자신이 조카가 올라야 할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김홍욱의 죄에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효종과 강빈의 관계는 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효종의 대의가 '간신 김자점' 등 난신적자를 처단하는 데 있었다면, 당연히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강씨의 원을 풀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자신의 정통성이 흔들립니다. 게다가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막내 석견은 살아있는 상황. 만약 강빈이 복권되면 왕위의 정통성은 석견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미 왕위에 오른 자신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아들(뒷날의 현종)은 어찌 될지 모르는 국면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현종의 안전을 위해 불쌍한 석견을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죽은 어머니의 신원 때문에 살아있는 아들을 해쳐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대의명분이 뭐건 냉정하게 생각할 때 이거야말로 부질없는 짓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홍욱의 죽음을 놓고도 당시 그 많은 사대부들이 임금을 탓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효종이 실제로 강빈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근거도 있습니다. 아래 글에 1659년 3월11일 효종과 송시열의 대화 내용을 인용했는데 이날의 대화 속에는 강빈과 김홍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열이 아뢰기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지금까지 인심이 평정되지 않고 있는데 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경과 함께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틈이 없어 하지 못했다. 강빈의 악행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일단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금수라도 있게 마련이다. 소현(昭顯, 즉 소현세자)의 상을 당했을 때 대조(大朝, 인조를 말함)께서 애통해 하면서 그를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이다.’ 하셨는데, 강빈이 발악하기를 ‘아무 달 이후에는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 후 자식을 낳고서는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고자 즉시 스스로 죽여서 감추었다. 그 성질이 이와 같으니 역모한 것이 괴이할 게 뭐 있는가. 또 역모한 형상은 안에서나 알 뿐이지 밖의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그 일이 낭자하여 완전히 의심이 없는데 밖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억울하다고 여기니, 내가 실로 마음이 아프다.”
하자, 시열이 대답하기를,
“그 역모한 자취를 밖에서는 참으로 모릅니다. (하략).”
하였다. 상이 가만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과연 경의 말과 같겠다. 그러나 역모는 참으로 의심이 없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설령 이 참으로 역모를 했다고 하더라도, 김홍욱(金弘郁)이 어찌 역모한 사실을 알고서 구원할 리가 있겠습니까. 소견이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너무 갑자기 죽였으므로 인심이 더욱 안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법령을 정하기를 만일 감히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강과 같은 죄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 법을 무시하고 말을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내가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19금 스토리가 등장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이상의 내용을 보면 효종이 강빈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자신이 이렇게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야 뒷날 석견을 두고 다른 말이 없을 것이라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무튼 효종의 북벌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정통성을 확보했으니 그 다음엔 국론을 하나로 묶을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북벌론. 국력을 길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명분에 감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 핵심에는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어영대장 이완이 있었다.

 

북벌을 전제로 실시한 부국강병책은 효과적이었다. 광해군 때부터 추진되어 온 대동법은 효종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무기 개량 사업의 성공으로 1654년과 58년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 조선의 조총 부대가 러시아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하는 성과도 있었다.

 

나선정벌에 참여한 조선군의 병력은 1 150, 2 270명 수준이었지만 그 실력의 우수성은 효종을 매우 고무시킨 듯 하다. 1659311, 40세의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10만 포수(조총수를 의미)을 길러 요동으로 쳐들어가면 명의 유민들과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들이 내응할 테니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느냐고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석달 뒤, 종기가 덧난 왕은 돌연 숨을 거뒀다.

 

 

 

 

그 뒤에도 북벌론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다. 숙종 때인 1673, 윤휴는 오삼계 등 삼번(三藩)의 난으로 청이 혼란에 빠지자 이때야말로 북진해 심양을 함락시킬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1년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내정에 힘쓴 뒤로는 국력의 차이가 현격해졌다.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시대에 청은 이미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본보기였다.허생전에서 허생이 효종의 심복 이완을 꾸짖는 장면은 박지원이 얼마나 북벌론을 허황된 것으로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어쨌든 북벌 정책을 통해 확고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 효종은 형 소현세자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656,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석견을 귀양지 제주에서 불러 올려 경안군에 봉한 것이다.

 

효종이 귀인 조씨를 죽일 때 그 소생인 숭선군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지만, 효종은 어린 아이가 무슨 수로 역모를 꾀했단 말이냐며 어린 이복동생을 지켰다. 권력 앞에 형제고 조카고 없었던 조선의 군왕 치고는 칭찬받아 마땅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효종이 강화시킨 왕권은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을 거치며 영,정조 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이쯤 되면 효종을 역사의 승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끝>

 

 

 

 

허생전의 마지막 대목은 다들 읽어보셨을테니 여기서는 생략.

 

 

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숙종은 뒷날의 영조나 정조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입니다. 남인과 서인을 자유자재로 조종한 정치젹 역량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 근거에는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는 탄탄한 정통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종의 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세 왕이 모두 임금의 정궁(정비)으로부터 태어난 대군으로 이어진 순도 높은 왕들이라는 것이죠. 그게 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이렇게 3대를 잇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북벌사업이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는지, 그 주도 세력은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떠나 효종의 치세는 왕조를 이어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뿌리를 내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는 매우 성공적인 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P.S. 강빈이 신원된 것은 숙종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영조 때, 소현세자의 증손이며 석견(경안군)의 손자인 밀풍군 이탄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합니다. 만약 강빈이 더 일찍 신원됐다면 소현세자의 자손들에게는 더 일찍 비극이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효종을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악녀 얌전이와는 이별입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의 소득 중 하나는 김주영이란 새로운 배우를 발굴한 것.

 

'꽃들의 전쟁'은 이렇게 끝나고, 다음주부터는 새 주말드라마 '맏이'가 방송됩니다. '그대 그리고 나'의 원로 김정수 작가가 집필하는, 가족애 넘치는 시대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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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9월이 된걸 몰랐다구요~~~~!!!"

(아래 사진의 피터 핀치 같은 심정...)

 

 

 

 

10만원으로 즐기는 9월의 문화 가이드

 

9월이라고 갑자기 시원해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 웬만큼 살았으면 다들 알았을 거야. 하지만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찬바람이 불고 나면 파카 찾아 입기 바쁠테지. 요즘 점점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아쉽기도 하고 겁나기도 해.

 

8월의 대한민국은 대형 록 페스티발의 도가니였지. 그만한 대형 행사는 아니지만 쏠쏠한 행사가 있네. 예술의 전당에서 9 7일과 8일 열리는 예술의 전당 재즈 페스타. 자라섬에서 서재페까지 다양한 재즈 페스티발이 있지만 라인업이나 가격, 위치로 볼 때 특이한 공연이야.

 

 

 

 

출연진은 재즈파크 빅밴드 with 정엽, 빛과 소금, 박성연&말로(7), 웅산 with MC스나이퍼, JK 김동욱, 전제덕, 서영도&이순용&구본암(8) 등이야. 이 정도에 1일권 55천원이면 가격대 성능비가 훌륭하다고 봐. 물론 장소 특성상 이런 페스티발의 특전인 아무데나 주저앉아 먹고 마시기는 좀 힘들 지도 모르겠어.

 

 

 

전시 중에는 세종미술관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버트 카파 100주년 사진전을 우선 꼽지 않을 수가 없네. 카파는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을 비롯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종군 사진기자야. 카파가 누군지 몰라도 막상 사진을 보면 대개 , 이 사진할 사람이지. 그의 사진을 보다 보면 종군 사진기자란 누구보다 자신들이 실업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이 실감날거야. 1028일 까지. 12천원.

 

 

 

 

 

요즘 ‘mobile’이란 철자를 보고 모바일이라고 읽지 않으면 촌사람 취급을 받기 딱 좋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 전시장에선 모빌이라고 당당하게 읽을 수 있을 거야. 리움 미술관의 움직이는 조각 알렉산더 칼더전이지.

 

,,고 미술시간을 경험한 사람에게 모빌이 뭔지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번 전시를 방문한 사람은 아마 칼더(미술시간엔 콜더라고 배운 사람도 있겠지)의 작품 중엔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과 안 움직이는 조각인 스태빌(stabile)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1020일까지. 8천원.

 

 

 

 

테드 창의 이름을 안다면 장르 문학에 꽤 관심이 있는 사람일거야. 국내에서 그리 지명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단 읽어 본 사람들에겐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지.

최근 아주 오랜만에 테드 창의 신작이 번역되어 나왔어.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라는 제목이야. IT 쪽 전공이 아닌 사람은 한글 제목을 보나 영어 원제 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 를 보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걱정은 금물. 테드 창의 특기가 굉장히 과학적으로 보이는 설정을 전혀 전문적인 이해 없이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책도 좋겠지만 먼저 테드 창 걸작선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라고 권하고 싶어. ‘바빌론의 탑’, ‘네 인생의 이야기’, ‘지옥은 신의 부재등 그의 대표작들이 거의 다 수록돼 있어. 그리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 대략 1만원 정도.

 

마지막으로 최근 영화 설국열차더 테러 라이브가 흥행 대박이 나는 걸 보고 느낀 바가 많았어. 그래서 생각나는 작품들을 추천할게.

 

먼저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36년 전에 더 신랄하게 짚어낸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  1977년 아카데미 각본상, 남우주연상(피터 핀치), 여우주연상(페이 더너웨이), 여우조연상(베아트리스 스트레이트) 4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이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이 벌어지던 어느날, 스타 앵커가 생방송 중 자신의 자살을 공언하면서 벌어지는 얘기야. 물론 기술적인 면에선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상황의 박력이나 기상천외의 전개는 지금 봐도 놀라울거야. 인터넷 쇼핑몰에서 아직 1만원 이내에 구할 수 있어.

 

 

 

다음은 책. ‘설국열차팬들은 프랑스제 원작 만화를 사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떠올린 책은 배명훈의 연작소설집 타워. ‘설국열차가 기차 안에 온 세상을 쑤셔넣었다면 타워 674, 인구 50만의 거대 빌딩에 한 나라를 밀어 넣었어. 여기저기서 수시로 작렬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A, 유머는 S급이야. 수록작품 중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는 언제 봐도 감동적이지. 2009년작이라 책값도 7000원 정도.

 

그럼 10월에 보자고.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

 

 

예술의전당 재즈페스타             55천원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         12천원

움직이는 조각 알렉산더 칼더 전       8천원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1만원

배명훈, 타워                          7천원

영화 네트워크’ DVD                   1만원

 

합계                              102천원

 

 

 

음. 참 골라 놓고 보니 정말 주옥같군요.^^

 

배명훈 작가는 최근 '청혼'을 내놨군요. 아직 못 읽어 봤습니다. 그 사이 '신의 궤도', '은닉' 등을 내놨는데 지금까지 개인적인 선호로는 역시 '타워' > '신의 궤도' > '은닉' 입니다. '신의 궤도'는 장난기와 서정성의 조화가 가슴이 아린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만, '은닉'은 왠지 어딘가 너무 먼 곳으로 가 버린 듯 한 느낌.

 

지인 중 한 사람은 '타워'를 읽고 "언젠가 먼 훗날의 국어 교과서에 들어갈 작가"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어로 된 클래식을 남길 작가'라는 의미로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반면 다른 유명 작가의, 아마도 제목이 '112'가 될 작품은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역시 예상대로 멋진 작품입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신다면 이 책도 보지 않을 수 없을 듯.^^ 물론 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그의 최고작은 아닙니다.

 

음악 소개를 안 했더니 영상으로 마무리할 게 없었는데 적절한 영상 발견.

 

알렉산더 칼더가 지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철사 모형들을 갖고 진지하게 서커스 공연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습니다.

 

(PART1의 6분대에는 우리나라 '구구단 송'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멜로디가 들려옵니다. 아랍 쪽 노래인 듯 한데, 이 곡은 대체 뭘까요. 아는 분 계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물들은 1961년 제작된 것입니다. 칼더는 이런 공연을 수시로 펼쳤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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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올라갑니다. 이 글이 나가고 한참 뒤(그러니까 최근) 크레용팝의 '일베돌' 논란이 있었죠.

 

뭐 결론부터 얘기하면 뜻도 모르고 남들이 쓰니까 뭐 원래 있는 말인가보다 하고 쓴 사람들이 잘못인데, 그걸 갖고 응원을 하네 이제 정이 떨어졌네 하는 게 좀 우습게 보입니다. 애당초 이상한 표현을 만들어 낸 사람들에게 뭐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 말을 따라 쓰는 어린 친구들에게 그 말의 책임을 다 지라는 건 지나쳐 보입니다.

 

그 말이 잘못된 것이니 쓰지 말라고 타이르면 충분할 일 아닐까요.

 

 

 

문화어사전, 일단 '갑을관계'부터 시작합니다.

 

갑을관계[명사]

: 지시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 혹은 돈을 내고 일을 시키는 자()와 돈을 받고 일을 해 주는 자()의 관계

 

흔히 갑을관계라고 표현되는 말. 여기서의 갑과 을이란 대개 계약서상으로 돈을 대는 자와 돈을 받고 용역을 집행하는 자 정도로 요약되지만, 실상은 주도권을 쥔 자와 끌려가는 자정도의 의미가 된다. 당연히 을은 갑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갑은 수틀리면 판을 뒤집어 을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갑을이라는 말에 이런 의미는 들어 있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삼한갑족(三韓甲族, 아주 오래 전부터 명문거족인 유서 깊은 집안)이란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역시 갑이 좋은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갑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을은 그 다음으로 좋은 것으로 통했다.

 

추사 김정희의 서독(書牘)을 보면 이곳의 샘물 맛은 관악산에서 흘러내려온 것인데, 두륜산과 비해 갑을을 가리기 어렵다(此中泉味是冠岳一脉之流出者未知於頭輪甲乙何如)’라는 용례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쓰인 갑을이란 ‘1,2등을 가리다, 비슷하게 좋은 것들 사이에서 순위를 매긴다는 정도의 뜻이다.

 

갑을 관계이란 말이 지금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현대적 계약서의 등장 이후다. 통상 모든 계약서에는 긴 회사 이름을 생략하기 위해 이란 대명사가 쓰인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 돈을 내는 쪽이나 정부 기관, 언론사, 대기업 등이 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힘있는 쪽이란 등식이 성립했다.

 

이후 갑이 을에 대해 저지르는 강자의 횡포를 흔히 갑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갑이 그렇게 말할 리는 없고, 힘없는 을들이 뒤에서 흉을 볼 때 쓰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갑을 관계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늘 로 살아가는 데 지쳐 자녀들에겐 항상 수입 브랜드 GAP을 입혔다는 농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혹자는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 교육열도 자식 세대만큼은 갑의 위치에서 살기를 바라는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0134월 이후 포스코 상무 사건, 제과회사 회장 장지갑 구타 사건, 남양유업 욕설 통화 사건 등이 잇달아 이슈가 되면서 갑의 도덕적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하청 업체와 대기업 사이의 관계를 풍자했던 KBS 2TV ‘개그콘서트갑을 컴패니코너가 한 달만 더 버텼더라면 화제를 선도하는 인기 코너가 될 수 있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갑을 컴패니 2012년 연말 방송을 시작했으나 2013 3월 종방, 간발의 차이로 대목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썽많은 '일베 용어' 차례.

 

민주화 [명사]

 

: (일베 사이트에서 쓰이는 의미) 뭔가를 억눌러 획일화시키다

사전에선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란 뜻. 19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한국 사회 운동의 지상 과제였다.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2013년 네티즌 세계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인터넷 사이트 일베저장소(www.ilbe.com)는 한국 온라인 이념지도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곳으로 통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숭상하고, 5.18 사망자 사진에 ‘홍어 말리는 중’이라는 사진설명을 붙이는 포스팅이 재미로 올라오는 곳이다. 이 사이트에 올라오는 포스팅에는 두 개의 버튼이 붙어 있다. 다른 사이트의 ‘찬성’이 있는 위치에는 ‘일베로’라는 버튼, ‘반대’ 위치에는 ‘민주화’라는 버튼이 있다. 이 사이트에서 ‘민주화’란 곧 ‘싫다’ 혹은 ‘억누르다’ ‘반대하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반대로 ‘산업화’는 ‘좋다’ ‘추천한다’는 의미다.

 

514일 인기 걸그룹 시크릿 멤버 전효성이 라디오 생방 도중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소수 의견이라고 무시하거나 억누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민주화’라는 말을 사용한, 너무도 ‘일베적’인 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6시간만에 전효성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했다”며 공개 사과로 진화에 나섰지만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일베 사이트에서는 “우리가 전효성을 보호해야 한다”며 음원 단체 구매 운동이 벌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일베식 표현' 때문에 혼이 난 사람 중에는 가수 김진표도 있습니다. 김진표는 한 방송에서 헬기 추락 장면을 보고 '운지하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큰 항의를 받은 것이죠.

 

그 문화를 모르시는 분들은 '대체 왜 운지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 있는 단어냐'고 의아해 하시기 마련입니다. 그 내용에는 최민식이 나왔던 운지천 광고와 관련된 몇 단계의 파생 과정이 있습니다만, 굳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시간 낭비죠). 아무튼 그 결과 어디선가 떨어지는 것을 '운지하다'라고 쓰는 표현이 나돌고 있는데, 그 표현의 출발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비하하는 것이라는 점만 알아 두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김진표 본인은 '전혀 그런 의미인지 몰랐다'고 곧 사과했습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운지'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떨어진다'는 뜻으로 알아들을만한 여지가 충분합니다. 한자로도 隕地 라고 써 놓으면 그럴 듯 하기 때문입니다. 저 隕자는 '떨어질 운', 즉 '운석'의 운입니다. 앞뒤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본래 그런 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멤버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트윗의 '노무노무'라는 말도 일베 사이트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라는 게 크레용팝을 '고발'한 네티즌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의 음상을 생각하면 '너무너무'를 '노무노무'로 쓰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뭐 크레용팝 소속사 대표라는 이 분은 확실히 그쪽과 친하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일베 회원들이 크레용팝이 인기를 얻는데 큰 기대를 했다면, 이쪽 소속사에서는 이 사이트에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 아닐까요.^

아무튼 사과든 해명이든 그리 깔끔하진 않았지만 거의 봉합되어 가는 느낌.

 

 

 

 

마마돌 [명사]

 

: 아이돌 출신으로 자녀를 둔 뒤 현역으로 복귀한 연예인

일본의 가수 겸 배우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 때문에 생긴 단어다. 198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아이돌이었던 마츠다는 1986, 24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하며 무대를 떠났으나 87년 출산 후 곧바로 컴백, 미디어로부터 마마돌(Mama+Idol)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2013 116일 결혼한 원더걸스의 선예가 임신 발표를 하면서 국내에서도 마마돌 시대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팬들의 기대가 한창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룹 업타운 출신인 윤미래가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JK와 결혼해 2008년 이미 아들 조단을 출산했으므로 마마돌 1호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지만 일단 업타운이 아이돌 그룹이냐는 데 약간의 논란이 있고, 윤미래도 결혼 뒤에는 아이돌이라기보다는 힙합 아티스트의 이미지로 활동했으므로 마마돌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순혈 아이돌 출신으로는 S.E.S 출신의 슈가 지난 2010년 결혼해 이미 아기엄마가 됐지만 결혼 시기가 전성기를 지난 뒤였고, 출산 후 사실상 활동이 없기 때문에 나이나 인기로 볼 때 국내 마마돌 1에 대한 기대는 선예 쪽으로 몰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예가 출산후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입장이라 원더걸스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것... 소속사에선 일단 전혀 검토된 바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731 [명사]

 

뜻: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만주군 휘하에 있었던 특수부대의 이름.

피점령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다. 2차대전 종전 후에도 한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1980년대 이후 발견된 기밀 문서를 통해 그 실체가 공개됐으나 이 시설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포로가 희생됐는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얼빈 교외에 있었던 유적은 현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 부대의 만행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말이 마루타라는 단어다. 이 부대에서는 실험용 포로를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라고 불렀다. 지난 2009년 국회 질의응답 중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는 마루타라는 말을 아느냐는 질문에 전쟁 포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731부대가 뭔지 아느냐는 질문에는 , 항일 독립군이라고 대답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정 총리는 나중에 알고 있었으나 질문자가 너무 다그쳐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2013, 무뇌아적인 역사인식으로 줄곧 극우파적인 행동을 일삼아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513 ‘731’이라는 숫자가 붙은 항공자위대 훈련기에 탑승한 사진을 공개해 다시 말썽을 빚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독일 총리가 나치 문양이 새겨진 전투기에 탑승한 것과 같다고 강도높게 비판했고 미국에서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P. S. 음모설 하나. 지난 2006 721, 일본 민방 TBS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 시사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방송의 한 장면에 아무 맥락 없이 당시 내각 관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아베의 사진이 등장해 화제가 됐다. 자민당이 발칵 뒤집혔고 원인 조사가 이뤄졌으나 제작진의 단순 실수로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자민당 총재를 노리던 아베는 "고의라면 내 정치생명을 노린 음모"라며 격분했지만 그 이상의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위의 전투기 사진은 많이 보셨겠지만 마지막에 언급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러니까 2006년 7월21일, TBS의 '이브닝 파이브'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731부대 관련 내용이 등장했고, 그 보도 과정에서 별 맥락 없는 아베 당시 장관의 선거 포스터가 노출됐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반응은 '대체 아베와 731이 무슨 관계?' 라는 식이었을 것이 분명하고, 아베 본인은 당연히 펄쩍 뛰었죠. TBS 측은 사과.

 

 

흥미로운 것은 일본 우익 사이에서는 TBS가 "재일교포들의 지배를 받는 반일 방송"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2006년의 이 사건이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워낙에 별 맥락 없는 사건들의 연속인데다, 시간이 좀 경과한 것들이라 더 어수선하게 보이는군요.^^ 아무튼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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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영화 '월드워 Z'의 반향이 꽤 컸던 듯 합니다. 인터넷 서점에 들러 보니 아직도 맥스 브룩스의 원작 소설 '세계대전 Z'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가 아직도 장르소설 부문 차트에 올라 있더군요. 최근에는 김봉석 평론가의 '좀비 사전'이라는 새 책도 나왔습니다.

 

아래의 정의는 그냥 아주 압축된 내용이라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물론 진짜 좀비가 어디선가 나타나 여러분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진 않지만, 왜 갑자기 첨단 과학이 검색자 마음까지 읽어주는 21세기에 걸어다니는 시체 이야기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문화어 사전 (6)


좀비[명사]

뜻: 살아 있는 시체


좀비(zombie)는 카리브해 연안 지역에서 사용되는 크레올(Creole)어로 ‘움직이는 시체’라는 뜻이다. 부두교 주술사가 시체에 마법을 걸어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을 말한다. 서구 전설 속의 언데드(undead)와 사실상 같다.


미국 대중문화 시장에 좀비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전설적인 호러 전문배우 벨라 루고시 주연의 1932년작 ‘화이트 좀비’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좀비 영화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성공으로 상업적인 폭발력을 과시하며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거듭났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는 ‘좀비’라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지만, 로메로가 정립한 세 가지 원칙, ▲사람의 살을 먹이로 하고 ▲뇌를 파괴해야만 동작을 멈추며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는 설정(1954년 나온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은 이후 거의 모든 좀비 영화의 기초가 된다. 이후 ‘좀비의 정의’에 가장 심취했던 사람은 영화 ‘월드워Z’의 원작자인 맥스 브룩스다.

 

 

 

 

소설(가상 논픽션) ‘세계대전Z’와 ‘세계대전Z 외전’을 쓴 맥스 브룩스는 저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통해 좀비의 유래와 발생 근거, 신체적 특징과 퇴치법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규정했다. 그러나 정작 브룩스의 작품을 기초로 한 영화 ‘월드워Z’는 브룩스의 설정을 여러 곳에서 무시하고 있다. 브룩스가 묘사한 좀비는 인간의 절반 정도 속도로 움직여야 하지만 영화 ‘월드워Z’의 좀비는 표범처럼 날쌔고, 심지어 점프력도 뛰어나다. 그래서 영화 ‘월드워Z’는 원작 팬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인기 미드 '워킹 데드'는 좀비 역을 연기하는 엑스트라를 공모하는데 경쟁률이 수백대 1까지 올라가는 초 인기라고 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 좀비 되기를 갈망하는지...^^

 

 

심지어 이런 좀비 분장 도구까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파는 곳은 여기.

http://www.funshop.co.kr/goods/detail/25055?t=s 

 

뭐 재미있을 거 같긴 합니다만...^^

 

 

 

1970년대 이후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부르는 이름은 ‘좀비’로 통일되어 가는 분위기지만, 아직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이름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강시(殭屍)다.


전승에 따르면 강시는 본래 변방에서 군역을 살다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시체를 말한다. 이 시체들을 남쪽 고향으로 운반하기 위해 도사의 법력을 이용,  한줄로 세워 멀리 이동하게 했다 는 것이다. 죽어서 굳은 시체이므로 무릎을 굽히지 못하고, 양발로 콩콩 뛰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강시(殭屍)가 등장하는 문헌으로는 청나라 때 기효람(紀曉嵐)의 소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무공이 뛰어난 의원 호궁산(胡宮山)이 젊어서 강시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이 강시는 눈에서 붉은 빛이 나고 송곳니와 손톱이 길었는데 온몸이 통나무처럼 단단해 때리고 차도 끄덕없었고, 간신히 나무 위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이 강시의 모습은 1980년대 홍콩에서 대유행한 강시 영화에 그대로 적용됐다. 그 대표작인 임정영 주연 ‘강시선생(1985)’은 중국어권을 비롯한 동남아권에서 크게 히트했고, 서구에도 ‘Mr.Vampire’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다만 본래 산 사람의 양기를 빨아들이는 강시가 송곳니로 사람을 깨무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명백히 뱀파이어 영화의 영향이다.

 

 

 

라고 쓰긴 했습니다만, 사실 홍콩 영화계에서도 강시 영화의 원조를 찾자면 아무래도 홍금보 주연 '귀타귀(1980)'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 합니다. 이 영화에서 이미 강시, 시체 조종, 귀신 쫓는 마법 등에 대해 나올 것은 다 나왔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강시선생' 시리즈의 최대 수혜자가 되는 배우 임정영도 이 '귀타귀'에 출연했죠.

 

최근 들어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존의 설정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괴물들에게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느리고 사고력이 없는 기존의 좀비들과 달리 21세기의 좀비들은 빠르고(‘28일 후’),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며(‘월드워Z’), 심지어 연애까지 할 수 있는(‘웜 바디스’) 존재로 급격히 진화하고 있다.

 

 

 

 


유명세(有名稅) [명사]

 

뜻: 명성을 얻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

많은 사람들이 ‘유명해짐으로서 얻는 기세, 혹은 지위, 혹은 특전’ 등의 뜻이라고 오용하는 말. 이 때문에 ‘아빠 어디가’에 출연하는 어린이들도 유명세를 ‘타고’, 벚꽃 철을 맞으면 관광 명소들이 유명세를 ‘누리고’, 아이돌 스타들은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떨친다’는 표현이 난무한다.

그렇지만 ‘유명세’는 한자로 有名稅라고 쓴다. 잘 보면 ‘세’가 ‘권세 勢’가 아니고 세금 稅’다. 즉 ‘유명세’란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야 하는 세금’, 즉 ‘명성의 대가로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불이익’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명세를 얻다’나 ‘유명세를 누리다’, 심지어 ‘유명세를 타다’ 등은 써서는 안 되는 잘못된 표현이다. 어디까지나 유명세는 ‘치르는’ 것이다. 한류스타가 된 연예인이 마음대로 시장 떡볶이집에 갈 수 없는 경우나, 어린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싸이월드에 쓴 글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것 등이 ‘유명세를 치르는’ 좋은 예.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틀리게 쓰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유명세를 탄다'고 쓰면 안 됩니다. '유명세를 치르다' 만이 맞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이 마구 쓴다고 해도, 배운 사람은 이렇게 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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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는 날선 면돗날 같은 영화입니다.

 

세상을 향한 냉소가 넘쳐나는 시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좌절이 바뀐 것이 냉소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주변을 돌아 보면 비뚤어진 비아냥만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아직 분노 위에 서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할 말을 다 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약간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히 누가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들 정도로 대중이 느끼는 분노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장점은, 아무래도 촘촘한 플롯이라고 해야 할 듯.

 

 

 

 

어느날 오전 9시를 넘긴 시간.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윤영화(하정우)는 얼마 전 모종의 비리 사건으로 인해 마감 뉴스 앵커 자리에서 밀려난 충격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청취자와의 전화 연결 코너에 엉뚱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 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폭탄을 갖고 있는데, 자꾸 이러면 터뜨리겠다"고 말합니다.

 

짜증스럽게 구는 남자의 태도에 "그래, 터뜨리려면 터뜨려봐"라고 욕설로 맞받아 친 윤영화. 하지만 얼마 뒤, 방송국에서 뻔히 보이는 마포대교가 폭발로 끊어집니다. 그리고 윤영화는 이 사건이, 구겨진 자신의 입지를 다시 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테러범이 다시 전화를 걸어 올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이를 빌미로 차대은 국장(이경영)에게 자신이 이 상황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펼칩니다.

 

 

 

영화는 두어 시간 동안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긴박감 넘치게 보여주지만, 실제로 영화가 드나드는 공간은 좁은 라디오 스튜디오와 그 조정실 뿐입니다. 이른바 밀실 서스펜스죠.

 

'더 테러 라이브'를 본 많은 사람들이 흑백영화의 고전인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을 떠올립니다. 배심원 회의실이라는 고정된 공간 안에서 12명의 사람들이 처음 보기엔 너무나 뻔했던 한 사건에 대한 의견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죠. 이 작품이 세대를 넘어 수작으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거대한 액션 없이도, 총격전이나 자동차 추격전 없이 사람들 사이의 대화 만으로도 '관객이 손에 땀을 쥘 수 있는' 스릴감을 충분히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의 가장 큰 강점은 이 '대화가 주는 긴박감'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사건을 보는 각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에서 서로의 수 싸움이 제대로 느껴지고, 대화를 통해 실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그리고 있는 '제7광구'나 '타워'같은 영화의 대본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부지런히 폭발음과 화염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지만, 막상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배우들에게 주어진 대사가 극중 캐릭터의 눈으로 사건을 보고 있지 않고, 그저 뻔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영화 가운데 '더 테러 라이브' 수준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 주는 '현장의 대사'가 살아 있었던 작품을 꼽기가 쉽지 않습니다. 있다면 좀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는 '분노'에 대한 영화입니다. '내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누가 과연 나의 편을 들어 줄까'하는 질문은 아마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고 있을 겁니다. 날이 갈수록 사회 안에서 '위쪽과 아래쪽'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 세상 사람들의 공분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점 또한 대단한 강점입니다.

 

 

 

물론 '더 테러 라이브'가 완벽한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도 분명 있습니다. 실제 방송국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싶은 부분이 꽤 있죠. (무전 너머로 들리는 "반드시 사살하세요"같은 장면도... 이건 좀 오버.)

 

그리고 또 한가지, 반드시 빠뜨리면 안 될 부분은 '테러범과의 생중계' 자체가 과연 해도 좋은 일인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마포대교 투신 사건 때에도 현장에서 이 장면을 촬영한 방송사 카메라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 적이 있습니다.

 

극중 윤영화는 테러범과의 전화통화를 생중계하기 직전, 리드 멘트로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테러범과의 대화를 내보낸다고 얘기합니다. 스페인 영화 '떼시스'에서 방송 앵커가 스너프 필름을 방송하는 이유를 댈 때에도 '국민의 알 권리'를 앞세우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그냥 간과하지만, 김병우 감독이 꼬집고 싶었던 방송의 행태에 대한 비판은 이 부분에 담겨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한국에서도 분신 자살이라는 용어가 미디어에 등장할 때, 어느 매체 사진 기자가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외신을 탄 적이 있습니다. 분신해 떨어진 사람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구급차를 부르는 대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현장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수단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전란으로 죽어가던 시절, 유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녀가 죽으면 곧바로 먹이로 삼으려는 듯한 독수리의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이 유명한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아이를 구할 생각은 없고 사진으로 유명해지겠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냐"는 극심한 비난에 시달립니다. 그는 '20여분 동안 새와 아이를 한 프레임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는 얘기했지만, '그 뒤에 아이가 어떻게 됐느냐'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라면 그 20여분 사이에 새가 아이를 덮쳤어도 그는 그냥 사진을 찍고 있었을지도 몰랐고, 또 사진을 찍은 뒤에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되겠죠. 결국 그는 1994년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이 사진으로 인한 죄책감이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항상 변명거리처럼 등장하는 것이 '대중의 알 권리'입니다. 기자라면 대중의 알 권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잊혀지기도 합니다. 독수리의 먹이가 될 위기에 있는 소녀를 촬영하는 것이나, 테러범과의 대화를 그대로 생방송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례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유사한 사안입니다. 둘 다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그보다 상위에 놓여야 할 다른 가치들을 무시한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방송은 테러범과의 통화 내용을 그대로 내보내도 좋을까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대다수 관객들은 테러범에게 감정이입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테러범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게 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이 테러범이 이런 테러범이 아니라 진짜 테러리스트라면, 절대 생방송에 출연시켜서는 안됩니다. 정말 위험한 메시지를 일반에게 퍼뜨리려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라면, 이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걸러지지 않고 방송을 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어쨌든 인질들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정부는 협상에 나서고 양보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 영화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졌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태도 자체에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테러 라이브'를 잘못 읽으면, 이런 문제점은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언론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 편만 드는 방송'을 욕하지만, 이 시점에서 진짜 걱정해야 할 대상은 바로 '시청률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하려는' 미디어입니다.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고 '대중의 공분'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영화를 봐도 봤다고 할 수 없겠죠.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배우는 말하자면 다섯명. 대테러대책반 반장 역을 맡은 전혜진과 이지수 기자 역을 맡은 김소진, 그리고 테러범 역을 맡은.... (스포일러)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사실 하정우는 전형적인 앵커라기엔 너무 다혈질이지만, 그래도 그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성립하기 힘들었을지도.

 

어쨌든 '더 테러 라이브'는 마땅히 '올해의 영화'로 꼽힐만한 수작입니다. 젊은 김병우 감독이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P.S. 아래는 그냥 웃자는 이야기입니다.

 

 

마포대교 폭파 장면. 왼쪽에 63빌딩이 보이는 걸로 보아 마포 쪽에서 여의도 방향을 보고 찍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63빌딩 옆에 국회의사당이 있고, 마포대교 바로 옆에 있어야 할 쌍둥이 빌딩은 어디로 갔는지 없습니다.^^

 

 

하정우가 보는 각도는 이렇습니다. 오른족으로 쌍둥이 빌딩의 일부가 보이는.... 곳에는 방송사가 없습니다. 위치상 가장 가까운 곳은 MBC지만 그 건물에서 마포대교를 보는 건 불가능합니다. IFC 정도의 위치라고 보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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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15일

슈퍼소닉 라이브 조용필 공연(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

22시10분부터 약 100분간 진행

 

보컬 조용필

기타 최희선

베이스 이태윤

드럼 김선중

키보드 최태완 이종욱

 

오프닝: DJ KOO

1. 미지의 세계

2. 단발머리

3. 자존심

4. 못찾겠다 꾀꼬리

5. 그대여

 

6. 조용필 기타 솔로 + 남겨진 자의 고독

7. 꿈

8. 장미꽃 불을 켜요

9. 판도라의 상자

10. 밴드 소개

 

11. 바운스

12. 모나리자

13. 헬로

 

(앵콜)

14. 해바라기

15.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16. 나는 너 좋아

17. 다 아는 그 노래.

 

록 페스티발에 맞게 선발된 송리스트.

슬로 곡은 '남겨진 자의 고독'과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단 2곡.

위대한 탄생의 연주력과 '달리는' 힘에 초점이 맞춰진 공연.

 

진정한 세대간의 화해가 펼쳐진 공연. 생각보다 젊은 관객의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음.

 

P.S. 제발 락페에서 강제로 티머니 쓰게 하는 풍조는 없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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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은 그동안 사극 드라마든 영화든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물론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동안 임해군 역을 맡은 배우들만 해도 정성모(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임정하(조선왕조 오백년, 회천문), 임혁주(서궁), 김유석(왕의 여자), 그리고 이번 '불의 여신 정이'의 이광수까지 꽤 많습니다. 한마디로 영화 '광해'를 제외하고 광해군이 나오는 작품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임해군의 역할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광해군만 해도 1980~90년대 이후에야 '똑똑했는데 제대로 안 풀린 비운의 군주'로 관심의 대상이 됐던 만큼, '광해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형'에게까지 돌아갈 관심이 예전에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조금 공부를 해 보니, 물론 '광해군이라는 똑똑한 동생'의 존재가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겠지만 임해군에게는 왕이 될 수 없었던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임해군 (1574-1609) 1

 

선조의 장남이며 광해군의 형 임해군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괴롭혀 조선 백성들의 손으로 왜군에게 포로로 넘겨졌다는 것, 또 하나는 광해군 때 명나라에서 왜 장남을 두고 차남이 왕이 되었는가 대한 엄격한 추궁이 있었다는 것 정도다.

 

두 가지 모두 를 묻는다면 한국사에서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임금이 되기에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역시 왕의 장남이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소현세자나 사도세자의 경우에도 공식 기록은 임금 감이 아니었다는 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가 아닌 다른 사서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능력도 있고 뭔가 바꿔 보려는 의욕을 갖고 있던 왕자들이, 권신들의 음모에 휘말린 것이란 의심이 뭉클뭉클 일어난다. 

 

반면 임해군은 거의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정사든 야사든 성품이 못되고 포악해서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서술이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 얄미운 행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임해군(이광수)은 실제 기록에 비하면 많이 점잖은 편이다.

 

선조는 아들만 14형제를 두었는데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서 장남 임해군(1572년생), 차남 광해군(1575년생)을 얻었다. 14형제 중 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1606년생인 막내 영창대군 뿐이었다.

 

물론 영창대군이 왕위 계승의 경쟁자로 고려되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이야기고, 일단 임해-광해 형제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배다른 형제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들을 낳은 공빈이 일찍 죽고, 그 뒤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인빈이 의안군(1577년생)부터 내리 4형제를 낳았기에 더욱 그랬다.

(요즘 '불의 여신 정이'에 나오는 신성군은 의안군의 동생. 인빈의 둘째 아들.)

  

 

그런 가운데서도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15일만인 428, 대신들의 뜻에 따라 17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혹시 왕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후사를 미리 정해야 다소나마 민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피난길을 떠나기 직전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대신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없었다. 그만치 광해군은 임해군에 비해, 그리고 다른 왕자들에 비해 선조의 총애나 왕으로서의 자질 면에서 돋보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공사견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선조)이 여러 왕자에게 묻기를, ‘반찬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 하니, 광해군이 소금이라 했다. 이유를 물으니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임금이 또 묻기를,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니 광해가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했다. 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평안도로, 임해군은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향하게 되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모아 적에게 대항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임해군은 이런 의도에 적임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북상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에 쫓긴 임해군 일행은 함경북도 회령으로 달아나지만 여기서도 백성을 함부로 대하다 오히려 반란을 맞이한다. 난의 주역인 국경인 등은 두 왕자를 묶어 왜군에게 넘겼다. 의병장 정경운은 임진왜란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임해군의 체포를 출이반이(出爾反爾)’라며 한탄하고 있다. 이는 자업자득이라는 뜻.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겠느냐는 얘기다.

 

(함경도를 장악한 가토의 병력은 평안도로 넘어가 선조가 행재소를 차려 놓고 있던 의주를 공격해야 했겠지만 뜻하지 않게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여진족. 조선의 견제에서 벗어난 북동지방의 여진족들은 두만강 일대를 장악하려는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이 함흥 언저리에서 머물게 만듭니다.

이어 정문부 - 아래 영정의 주인공 - 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 등의 모반자들을 잡아 죽이고 가토 군을 무찔러(북관대첩) 함경도 일대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임해군 일행은 가토 군에 의해 이미 남쪽으로 옮겨진 뒤.

뒷날 임해군은 무사히 석방되긴 합니다만, 이후 평화회담이 오가던 시절 가토는 자기 명의로 임해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포로로 있던 임해군과 가토는 비교적 관계가 원만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정에선 '누가 대충 예의만 갖추고 알아서 회신해라' 정도의 반응.)

 

 

 

반면 광해군은 선조 일행과 갈라선 뒤 영변, 정주 일대를 돌며 백성과 군사들을 위로했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고, 심지어 신하들 중에는 대놓고 선조에게 아예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권고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자책감에 빠진 선조는 실제로 양위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하지만 1593, 명나라는 장남을 두고 둘째를 세자로 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며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이견을 제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그렇다고 심병(心病, 마음의 병, 즉 정신병)이 있는 임해군을 세자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답답해 했다. 광해군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임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임해군에 대한 사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런 반응은 당연해 보인다. 포악하다, 탐욕스럽다,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갈취했다, 왜군이 한양으로 몰려왔을 때 백성들이 궁성을 노략질할 때에도 임해군의 집에 재물이 많다 하여 표적이 됐다(유성룡의 서애집에는 반면 광해군의 집에는 아무도 불을 지르지 않아 민심이 광해군에게 있음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등등이다.

 

임진왜란 후에는 전 경기도관찰사 유희서의 첩을 빼앗기 위해 유희서를 청부 살인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선조의 적극적인 옹호로 더 이상 파헤쳐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소시오패스의 기록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

 

 

 

 

유희서 사건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계묘년(1603) 6월에 전 참판 유희서와 전 부사 황극중(黃克中)이 암살되었다.
희서는 고 정승 전(㙉)의 아들로서 본래 행검(行檢)이 없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이 유의 첩이 미색임을 듣고 비밀리 불러들인 후 도적을 시켜 살해 하였다. 《일월록》


○ 도적이 참판 유희서를 암살하였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여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이 이 옥사를 철저히 수사하던 중 죄를 얻어 귀양가고 희서의 아들도 또한 장을 맞고 귀양가니, 영의정 이덕형이 상소하여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드디어 파면 당하였다.

이항복이 그 후임 갑진 에 임명되자 사양하기를, “양걸이 귀양간 것을 신도 실상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였는데 다만 미처 말을 못했을 뿐이니, 덕형은 바로 이미 말한 신(臣)이요 신은 바로 미처 말하지 못한 덕형입니다. 죄가 비록 드러나지 않았으나 신이 어찌 차마 본 정을 숨기겠습니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더욱 심각합니다. 유희서가 죽은 뒤 선조는 "서울에서 하루 거리인 포천에서 30여명의 도둑떼가 고관을 죽였으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영을 내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캐면 캘수록 흉흉한 구석이 나타납니다. 일단 설수와 김춘배라는 용의자가 잡히지만 이들을 포함해 관련자가 잡혀 오면 잡혀 올 때마다 감옥 속에서 자백할 틈도 없어 죽어 나갑니다. 유희서의 아들 유일, 그리고 포도대장 변양걸은 이 사건과 임해군의 관계를 폭로했지만 오히려 '증거도 없이 왕자를 모함했다'며 역공을 당해 귀양 가는 몸이 됩니다.

 

진상은 유희서의 첩 애생을 임해군이 탐내면서 벌어진 치정사건. 임해군이 은근히 애생을 달라 청을 해 보지만 유희서 또한 나라 법을 어기면서 차지한 애생을 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생은 본래 관서의 관비라 유희서가 마음대로 데려올 수 없는 몸이었는데 나름 세도가인 유희서가 임의로 자기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임해군이 도적떼를 가장한 수하들을 보내 애생을 빼앗아 오게 한 것인데, 유희서가 기죽지 않고 맞서다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

 

수많은 관련자가 죽어 나가는 바람에 증인이 없는 상태가 되어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살아남은 박삼석 한 사람은 처음 체포됐을 때 임해군이 배후에 있다고 증언했으나, 막상 의금부에 와서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증언하고, 결국 이 사건은 선조 하대의 국가 기강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맙니다.

 

아무튼 왕자가 무장한 건달 패거리를 거느리고, 그 건달이 참판급 관리를 죽여도 유야무야되는 이런 사건은 조선시대의 다른 왕 때에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듭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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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설국열차'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논평이 등장해 있습니다. 영화 속 상징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해석을 한 리뷰들에서부터, 봉준호 감독 본인이 나서 '그건 이런 의도'라고 해석한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된 읽을 거리가 넘쳐납니다.

 

이 글은 이 영화의 미덕을 칭찬하기 위해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그런 글들은 이미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깨시민을 옹호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할 생각도 없습니다. 본격적인 상징 해석도 아닙니다. 요나가 성경에 나오는 그 요나를 뜻하는 거라든가, 불의 등장이 인류의 문화 발달 단계를 의미하는 거라든가 하는 얘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 껄끄러웠던 부분, 그리고 어딘가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 봤습니다. 스포일러가 닥치는 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줄거리 생략.

 

 

 

 

1. 왜 열차인가.

 

만약 별도의 연료 지원 없이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인류 문명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면, 그 수단을 열차로 선택하는 건 정말 바보같은 짓입니다.

 

당연히 정지된 상태에서 이 영구기관의 에너지를 이용해 뭔가 해 보는게 훨씬 효율적이겠죠. 기차를 쓰면 외부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웬만한 배리어만 친다면 어차피 설정이 온 세계가 다 얼어붙은 상황인데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열차다. 물론 '왜 열차인가'는 기차를 리드하는 인물 윌포드(에드 해리스)를 '기차에 미친 사람'으로 설정한 것으로 어느 정도 해명이 가능합니다.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일단 '왜 그 영구기관의 기술을 윌포드만 갖고 있느냐'는 질문 역시 그렇습니다. 미친 사람이라는데 뭘 따지겠습니까.)

 

다소 찜찜하긴 하지만 미쳤다니까 넘어갑니다.^

 

 

 

 

2. 혁명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전적인 혁명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간단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맨 뒷칸의 승객들은 고전적인 시각에서 볼때 '착취당하는 민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기차가 달리게 하는 데 어떤 노동력을 제공하지도 않고, 그냥 윌포드로부터 열차 공간과 식량을 제공받을 뿐입니다. 영화 속 논리에 따르면 어쩌다 어린이 한두명과 바이올린 연주자 정도를 얻어간 듯 한데, 역시 영화 속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들의 혁명에서 가장 큰 명분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유일한 생존 공간이 기차 안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기차 안의 자원을 동등하게 공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 안에서도 언급되듯, 맨 뒤칸 사람들은 이 기차와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로, 우연히 윌포드의 선의(?)에 의해 승차한 - 타지 않았으면 동사했을 -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일행이 원하는 것은 결국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열차 안의 자원을 모든 사람이 공유, 생활의 질이 다 같이 떨어지더라도 전체 인원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자'는 것인데, '앞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뒷칸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혁명(?)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커티스는 "앞칸에 도달하면 (윌포드를 포함해) 거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대사는 봉준호 감독에게 이들이 꿈꾸는 '체제 전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는 별로 없음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계급갈등에서 오는 혁명 이야기라기 보다는 '남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설정대로라면, 커티스 일행은 '왜 앞칸 인간들만 잘 먹고 잘 사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대체 왜 윌포드는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뒤칸 인간들을 프로틴 바를 먹여 가며 기차에 싣고 다니는가'를 궁금해 했어야 할 듯 합니다.

 

사실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라는 것도, 윌포드 일행이 최초의 소요가 일어난 순간 귀찮은 뒤칸을 아예 떼어 내 버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뭣 때문에 윌포드는 적잖은 경비 인력을 희생시켜가며 정기적으로 소요를 일으켜 온 뒷칸을 유지해 온 것일까, 거기에 대해 커티스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제게는 참 이상했습니다.)

 

 

 

 

 

3. 은유와 액션 월드 사이

 

'설국열차'에서 기차는 모든 사람이 다 아다시피 거대한 상징입니다. 이런 기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주인공 일행이 휘젓고 다니는 각 열차 칸의 의미 등등은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뭐 영화 설정상으로 1000개의 칸이 있다고 하니 꼭 필요하지만 비쳐지지 않은 칸(예를 들어 앞칸 사람들이 먹는 스테이크를 공급하기 위한 육류 육성 칸 - 또는 인조 고기 생산을 위한 공장 칸) 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커티스 일행이 지나치는 대부분의 공간, 학교나 기타 앞칸 승객들을 위한 생활공간 등은 모두 리얼리티보다는 상징을 위한 공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액션들은 필요 이상의 리얼리티를 강요합니다. 몽둥이와 칼, 살과 뼈가 마주치는 대결의 현장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리얼한 액션은 수시로 리얼리티와 단절된 상징적인 공간과 맞닥뜨립니다. 예를 들면 앞칸에서 열심히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추격하던 분노한 앞칸 승객들은 어느 순간에 증발해 버립니다. 또 뒤칸으로부터 성화를 봉송(?)해 앞칸에서의 싸움을 이끄는 장면은 그동안 통과해 온 열차의 길이나, 이들이 통과해야 할 터널의 길이를 생각할 때 도대체 얘깃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들, 어디까지를 상징의 세계로 보고 어디부터를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리얼리티의 세계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는 식구들이 식사하는 장면 가운데 딸 고아성의 유령이 나타나 식구들이 주는 밥을 먹는 장면이 갑자기 삽입됩니다. 리얼리티의 세계 안에 불쑥 등장한 은유의 세계인 것이죠. 이 장면이 별 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영화 전체가, '어쨌든 이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리얼리티의 세계였기 때문인 것이죠. 하지만 '설국열차'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가 너무 자주 교차하면서 상당 부분 설득력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불편함을 털어놓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 종교의 역할

 

이 영화에는 두 번, 사람의 머리 위에 신발을 얹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대한 비유로 사용됐습니다.

 

선종 불교의 지혜를 담은 '벽암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남전참묘南泉斬描'와 '조주대혜趙州戴鞋'라는 두 가지 화두가 나옵니다. 큰 스님인 남전이 두 법당의 승려들이 고양이 한마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광경을 보고 "누구든 이 고양이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아 스님은 고양이의 목을 쳐 버립니다. 뒤늦게 절로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제자 조주는 스승 남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발을 집어 머리 위에 얹은 채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를 본 남전은 "조주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하며 탄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난해한 화두입니다. 해설서들을 봐도 분명한 해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선불교의 화두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신발을 머리에 얹는다는 것은 가치의 전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전도된 가치를 갖고(살생금지의 계율에 대한 금지를 깨 가면서) 누구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힐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 화두가 과연 '설국열차' 속의 장면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는 생각하기 나름인 듯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대표작 '금각사'에서 이 화두를 사용했듯, 근본적인 가치의 전도를 위한 소도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 외에도 두어 장면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저 불쌍한 애욕에 물든 중생들에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기차 운영자(=부처?)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그랬고, 또 길리엄(존 허트)이 맨 뒷칸에서 행했다는 자비행의 모습이 그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살을 베어 이웃을 먹인다는 장면도 - 뭔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숙선사와 구담공의 고사를 연상시킵니다 - 종교적인 가치 없이 설명하기 참 힘든 부분입니다. 이런 자기 희생을 통한 감화와 리더십의 획득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길리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항목에서 계속)

 

아무튼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설국열차'는 종교의 허구성과 위선을 정면으로 지적하는 영화가 됩니다. 윌포드가 주장하던 초월자의 시점이나, 길리엄의 희생이나, 결국은 지배자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요.

 

 

 

 

5. 길리엄의 배신

 

길리엄은 윌포드에 의해 파견된 언더커버 요원입니다. 그의 역할은 일단 무질서가 지배하던 뒤칸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인류애를 되찾게 하고, 일정 수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윌포드와의 사전 협의에 따라 일정 수준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부여합니다.

 

즉 '언젠가는 혁명에 의해 우리도 앞칸을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윌포드는 뒷칸 승객들이 일정수 이상의 개체수를 보존하면서 소멸하지도 번성하지도 않는 수준으로 유지되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위에서 말한 어린이나 바이올리니스트의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설국열차'의 설명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리엄은 윌포드를 배신합니다. 그들에게 허용되었어야 했던 진출선을 넘어, 물 공급 칸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죠. 그리고 커티스에게 말합니다. "윌포드를 만나면 말할 기회를 주지 말고 죽여" 라고. 이 말은 곧, 윌포드가 커티스를 만나면 '나와 길리엄은 본래 같은 편'이라는 말을 하고 설득에 나설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한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길리엄은 왜 윌포드를 배신한 것일까요. 기존 사회의 질서 유지에 이바지하던 종교의 몇몇 지도자들이 체제 전복에 나섰던 전례는 적지 않습니다. 이른바 민중신학에 뛰어든 남미 카톨릭 신부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입니다.

 

 

 

 

 

6. 제3의 선택은 있나

 

윌포드의 '체제 유지를 위한 노력'에 설득되기 직전, 커티스는 그런 체제 유지가 어린이들의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대체 인류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들의 희생이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기차를 멈추고 절멸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으로'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방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즉 '인류의 소멸을 전제로한 인도주의의 실현'과 '소수의 희생을 통한 인류의 유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는 실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실제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설국열차'는 여기서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남궁민수(송강호)가 주장하는 '기차 밖에서의 삶'입니다.

 

'인도주의자'에겐 참 다행스러운 선택이지만,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도 사실 선택은 어렵습니다. 1) 어린이들을 몇 희생시키더라도 인류 문명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다 2) 어린이를 몇 희생시키느니, 인류 공멸이 더 도덕적으로 옳다 3) 둘 다 피하고 싶으니 기차를 세우고, 비록 가능성은 미지수지만, 기차 밖에서 새로운 문명을 세우는 쪽을 선택한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7. 결말은 희망?

 

이 부분은 사실 좀 실망스럽습니다. 심하게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백곰이 - 비록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단 한마리의 백곰이라 해도 - 17년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건 17년 동안,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인 백곰 한 마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했던 먹이들의 생태계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백곰의 먹이인 바다표범이 있었다면, 바다표범을 먹여살리기 위한 물고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물고기가 있으려면 플랑크톤과 얼지 않은 바다가, 그리고 플랑크톤을 위해선 광합성을 위한 햇살이 있었을 거란 얘기죠.

 

2013년 현재 인류의 과학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백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면 인류가 절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100분1로 줄든, 1000분의 1로 줄든 절대 불가능하지 않겠죠. (위의 운행도를 보면 설날이 며칠 지난 뒤, 설국열차는 아프리카나 아랍 어딘가 정도를 지나고 있을 겁니다.^^)

 

아무튼 다 그렇다 치고, 남궁민수가 생각한대로 기차 밖에서의 삶이 가능하다 칠 때, 그 조건은 '기차 안에 있는 물자와 에너지를 동원해 밖에서 살아남는 것'일 겁니다. 영화의 결말처럼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고, 소녀 티를 못 벗은 여자 하나와 어린이 하나가 달랑 살아남아서 눈밭 위에 에덴을 건설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백곰의 한끼 식사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 높은 결말은 아닐까요.

 

문제의 백곰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 영화의 의도였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과연 이것이 희망의 표상인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생깁니다.

 

 

 

 

8. 설국열차는 성공했나.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드는 데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일단 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설국열차'는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마더' 수준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를 즐겼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나 뻔한 알레고리와 다소 무리한 결말을 가진, '또 한편'의 디스토피아 영화로 느껴졌을 듯 합니다. 반면 '괴물'을 본 절대 다수의 관객들이 기대한 가족의 승리와 시원한 결말은 이 영화에 없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제공했다는 점에선 환영할만한 영화였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설국열차'의 티켓을 사면서 그런 것을 기대할 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한 쪽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가진 미덕들 - 세계적인 명배우들의 호연, 각각의 기차 칸들이 가진 미장센의 미학, 자잘한 비유들이 가진 정답 찾기 놀이 - 를 이야기합니다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를 향해 그려진 '봉준호 기대 곡선'은 이번엔 약간 아래로 향했다고 말해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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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조금 늦었습니다.;

 

아무튼 리스트 나갑니다.

 

더울 때 멀리 가 봐야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도심에서, 조용하게.^

 

 

 

 

 

10만원으로 즐기는 8월의 문화가이드

 

아직도 7월 말~8월 초에 휴가들을 가시나? 학생들 있는 집에선 소위 학원 방학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그 시간에 가는 휴가지는 지옥과 별반 다를 게 없더군. 그러니까 학부형 아닌 사람들은 웬만하면 그 기간은 피하고,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조용해진 도심에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납량특집으로 연극 한 편. 연극 우먼 인 블랙이 서울 대학로 둥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9월까지 네번째 연장 공연중이야.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이미지 세탁을 위해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이지. 영화와는 달리 연극은 단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는데, 두 배우가 별다른 소품도 없이 수십명의 캐릭터를 종횡무진 연기하면서 극을 끌어갈 수 있다는 게 볼거리야. ‘건축학 개론건축과 교수님인 지성파 배우 김의성 주연. 33천원.

 

음악 공연 중에는 서울시향의 말러 9(830)이 눈길을 끌지만 일찌감치 매진. 추가 공연을 기다려 보고, 대신 31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 인 클래식 II’를 권하고 싶어. 이름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는 음악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야.

 

이렇게 강연과 음악이 버무려진 공연은 음악도 음악(테너 김재형, 피아노 윤홍천)이지만 해설자가 누구냐는 게 관건인데, 일단 김문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신뢰해도 좋아. 풍부한 지식과 적절한 위트의 조합이 탁월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템페스트’,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로미오의 아리아 , 태양이여 솟아라등이 연주돼. 음악당이 아니고 IBK 챔버 홀이니 33천원짜리 뒷자리면 충분.

 

 

 

 

 

 

 

7월에도 전시 두가지를 소개했지만 8월이야말로 진정한 성수기. 이 대목에서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크릿 뮤지엄을 추천하지. 한마디로 명화를 디지털 영상으로 분석해서 미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내용이야. 루브르를 가 봤더라도 가서 모나리자밀로의 비너스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는 사람이 이 전시를 보면 , 내가 보기는 했지만 본 게 없는 거구나하고 느낄 점이 있을 거야. 12천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신중-불교의 수호신들도 추천하고 싶어. 신중(神衆)이란 부처나 보살보다 위계가 낮은 불교의 들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사실 껍질을 벗겨 보면 다들 힌두교의 신들이지. 이를테면 제석천은 인드라, 범천은 브라흐마, 대자재천은 시바 신이 불교로 편입된 모습이거든. 이들이 불교 미술에서 어떻게 표현됐나를 보여주는 전시인데, 힌두 신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로울거야. 심지어 공짜. 당장 달려가.

 

일전에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이 좋은 반응을 얻은 덕분인지 이번엔 장편이 번역되어 나왔어. 제목은 가벼운 나날(Light Years)’. 사실 이 책은 추천할까 말까 조금 망설였어.

 

줄거리만 보면 꽤 단순해. 꽤 성공한 건축가 비리 벌랜드와 사람을 잘 사귀는 미녀 네드라는 뉴욕 교외에 집을 짓고 두 딸과 개 한 마리를 키우는 부부야. 아름답고 통찰력있는 아내와 다소 소심하지만 착실하고 가정적인 남편, 누가 봐도 더없이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지.

 

하지만 네드라는 애당초 결혼으로 얽맬 수 없는 여자야. 어떤 양보나 희생도 그걸 바꿔놓지는 못해. 그렇게 두 남녀가 20여년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주 담담하게 펼쳐져 있어.

 

분야는 다르지만 글 써서 한 20년 먹고 산 사람으로서, 설터의 문장은 찬탄의 대상 그 자체야. 어쩌면 이 대목에서 이런 생략을. 어쩌면 이 대목에서 이런 살떨리는 비유를. 한마디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문장가야.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데 왜 추천을 주저했냐고? 과연 이 소설이 인생의 모든 국면을 맞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감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야. 솔직히 내가 20대 때 이 소설을 읽었더라도 설터의 가공할 위력을 느낄 수 있었을 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니 혹 이 책을 읽다가 이게 뭐가 좋다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거든, 내 얘기를 기억하고 책장 구석에 처박아 뒀다가 한 20년 뒤에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그런데 이런 얘길 하고 나니 문득 오래 전에 실망해서 읽다 만 책들이 문득 궁금해지네.)

 

덥다고 찬 음식 너무 많이 먹지 말고, 9월에 만나.  [끝]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은 잘 알려진 작품이면서도 다른 오페라들에 비해 캐스팅에 좀 민감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최근 이 로미오/줄리엣 커플은 알라냐-게오르규 부부가 일단 나서고, 그 다음 알라냐-네트렙코(위 사진)에서 이번엔 남자가 바뀌어 비야존-네트렙코가 각광받습니다. 여기서 여자가 바뀌어 비야존-마차이제(아래 사진), 그리고 다시 한번 그리고로-마차이제가 현재 가장 각광받는 커플이 됐습니다. 한번은 남자, 한번은 여자가 바뀌는 순서가 매우 정례화되어 있는 듯.

 

어쨌든 유난히 출연하는 가수의 외모에 민감한 작품이다 보니 그리 많은 스타들이 이 역할을 맡지는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사실 위 사진에 나오는 분들이 오페라계에서는 나름 비주얼 담당으로 꼽히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절대적 기준(!)에 따라 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느낌으론 그리 적절치 않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R&J의 영상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듯 합니다.

 

아무튼 오페라를 소개했으니 노래 소개. 일단 줄리엣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나는 살고 싶어요(Je veux vivre)' 입니다. 1막 캐퓰릿 가의 파티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 조수미 버전.

 

 

 

 

 

 

그 다음은 로미오의 가장 대표적인 아리아. 바로 위에 소개한 '셰익스피어 인 클래식'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입니다. 니콜라이 게다가 부르는 '아, 태양이여, 떠올라라(Ah, Leve-toi Soleil)'

 

사실 위에서 한참 '캐스팅에 민감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이 영상을 보시면 왜 그런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페라가 노래 실력 우선이라고 해도, 과연 이런 로미오를 보면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르첼로 알바레스도 물론...^^

 

노래 실력이야 흠잡을 데가 없지만 이런 우렁찬 목소리가 과연 그렇게 어울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이 노래에 특히 어울리는 목소리.

 

 

 

 

이 오페라의 에이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란도 비야존과 안나 네트렙코의 '가세요,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Va! je t'ai pardonné'  

 

 

 

 

그리고 글을 맺기 전에...

'가벼운 나날'에 대한 감상은 위에서 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글을 읽고 써 왔지만, 저 감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아마도 글을 써 본 분들이라면 더욱 공감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이 어린 분들은 이 글의 느낌을 충분히 즐기기 어려우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추천은 하되, 혹 '이게 뭐야' 싶은 분들께는 책을 한 20년만 묵혀 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런 무책임한...;; )

 

그럼, 이런 글로는 9월에 뵙지요.

 

P.S. 위에 미처 적지 못한 볼거리로는 메가박스의 '라트라비아타' 베로나 원형경기장 공연 실황을 추천할 만 합니다. 아울러 짤스부르크 라이브도 있는데 이미 코엑스 M2관은 매진에 가까운 듯. 상영관이 여럿인데 평소 관객 수를 감안하면 아마도 동대문관이 가장 만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와 '돈 카를로'를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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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2]

 

사실 '레드2' 를 보러 가서도 '레드'의 핵심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3년이라면 요즘 블럭버스터의 속편 제작 주기에 비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JJ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가 4년만에 나왔고,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즈' 사이도 4년이었죠.

 

하지만 그리 전통있는 프랜차이즈라고 보기 힘든 '레드'의 경우 3년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시리즈 간의 긴밀한 연속성을 제기하기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2'는 보는 시간 내내 영화의 길이를 느끼기 힘들었던 수작이었습니다. 생명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감안하면 참 막장형 영화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면 이만큼 충족감을 주는 영화도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순도 높은 '오락만을 위한 영화' 입니다.

 

 

 

 

전작에 이어지는 이야기. 왕년의 스파이 에이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사라(메리 루이즈 파커)와 소시민으로 알콩달콩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 마빈(존 말코비치)은 곧 폭풍이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결국 프랭크와 사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마빈이 타고 있는 차가 폭발해버립니다[스포일러 아님]. 그리고 마빈의 장례식장에서 프랭크는 기관원들에 의해 연행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전 세계를 무대로 전개됩니다. 프랭크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전편에서도 활약한 이들의 동료 빅토리아(헬렌 미렌)를, 미국은 세계 최고의 킬러 배한조씨(이병헌. 이 이름에 대해선 저 밑에 자세히 정리)를 기용합니다. 이들 사이에 프랭크와 과거 사연이 있었던 러시아 스파이 카티아(캐서린 제타 존스), MI6에 의해 연금된 천재 과학자 베일리(앤서니 홉킨스) 등이 엎치락 뒤치락 연루됩니다.

 

 

 

 

사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데 뇌는 별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노장들이 실제로는 한창 팔팔한 현역들을 능가하는 기량의 소유자들이라는 스토리의 영화들은 이미 한두편이 아니죠. 최근작으로는 실베스터 스탤론 계열의 근육질 아저씨들이 대거 등장한 '익스펜더블' 시리즈가 있고, 추억의 영화로는 '지옥의 특전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던 Wild Geese(1978) 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옥의 특전대'의 주역인 리처드 버튼은 영화 개봉 당시 53세, 로저 무어는 51세, 리처드 해리스는 48세. 70년대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노장'으로 불릴 만한 나이였죠. 반면 '레드2'의 브루스 윌리스는 58세, 존 말코비치는 60세. 헬렌 미렌은 68세. 앤서니 홉킨스는 76세... 평균 수명 연장과 과학의 발달에 따른 할리우드 스타 정년 연장이 실감납니다.)

 

 

 

 

아무튼 이 '지옥의 특전대' 때 이미 베테랑들의 노익장 과시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음모에 대항한다는 주제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21세기 판인 '레드' 시리즈에서 달라진 것은 좀 더 확실해진 인명 경시 사상.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존 말코비치는 아예 브루스 윌리스에게 대놓고 "사람 죽인 지 한참 지나 인생이 지루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입니다.

 

그 강력한 힘을 갖고도 사람 하나 죽일까 말까 30분씩(물론 영화상으로. 실제 시간은 더 걸릴 수도) 고민하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이 분들은 태연히 살인을 저지릅니다. 컴퓨터 게임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플롯이 너무 단순해 비어 보일 수 있는 영화의 틈바구니는 세계적인 명배우들이 잘 알아서 메꿔 줍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배우는 '여왕 폐하' 헬렌 미렌. 아마도 이 영화에서 헬렌 미렌이 미친 척 하기 위해 읊조리는 대사는 세실 어쩌고 하는 대목으로 봐서 2005년 출연했던 BBC 사극 '엘리자베스 1세'에 나오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더 퀸'에서는 현역 여왕 역으로 오스카를 따냈죠. (사실 정통 셰익스피어 극 출신인 이 양반은 젊어선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에서 모르가나 여왕 역으로 팜므 파탈의 위용을 떨친 분입니다.)

 

아무튼 그런 관록을 스스로 희화화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 미렌은 카리스마 넘치는 코믹 연기(영화를 보시면 이게 말이 된다는 걸 납득할 수 있습니다^^)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특히 이병헌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의 액션을 보면 '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헬렌 미렌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물론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박지성이 출전하는 맨유 경기나 류현진이 던지는 다저스 경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병헌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가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되는데, 이 무시무시한 배우들 속에서 이병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움을 줍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토르'의 아사노 타다노부 등에 비해 훨씬 돋보이는 역할이라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지아이조' 시리즈에 이어 너무 자객 이미지가 강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사나다 히로유키의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아시아 출신의 남자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리자면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적지 않은 나이에 영어 연기에 도전해 이 정도의 성취를 거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과가 썩 시원치는 않아 이제 알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만약 '레드3'가 만들어진다면 이병헌의 역할은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 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해외의 이병헌 팬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어의 '좆됐다'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죠.^^)

 

나머지 배우들은 '딱 다 알만한 캐릭터'를 '딱 다 납득이 갈 만한 수준'으로 연기해 줍니다. 아쉬움도 없고, 그렇다고 큰 기대흘 할 만큼도 아닙니다. 극장에서 가치관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 영화. 인생의 의미나 구원의 메시지를 찾고 있는 분들에겐 비추. 당연히 헬렌 미렌이나 존 말코비치를 모르는 분들에게도 비추.

 

 

 

P.S. 이병헌의 극중 캐릭터 이름은 Han Cho Bai 인데 이게 한국 이름이라면 '배한조'라고 봐야겠죠^^. 뭐 한일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 제작진이 이 캐릭터의 킬러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의 전설적인 닌자 핫토리 한조의 이름에서 대강 섞어 만든 듯 합니다만... 뭐 이런 영화에 그런 디테일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겠죠.

 

IMDB에 따르면 극중 이병헌의 어린 시절 사진에 나오는 분은 실제 이병헌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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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대중문화 상품을 살펴보더라도 자국산 TV 드라마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국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인기 콘텐트인 나라는 더욱 적습니다.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역시 미국과 영국입니다.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나 독일의 TV 편성표를 살펴보더라도 미제 드라마, '하우스'나 'CSI'가 프라임 타임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미드'가 영 맥을 못 추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입니다. 자국산 드라마 콘텐트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셜록'이나 '왕좌의 게임' 조차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드라마 강국이 되었을까요. 1980년대 후반부터 인재들이 부단히 이 분야로 모여들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좀 더 나은 콘텐트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한 드라마'를 만든 절대 공로자 중 한 분이 어제 급서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원고 청탁이 와서 급하게 쓴 글입니다.

 

 

 

 

제목: 30년의 도전, 아쉬움 속에 끝맺다.

 

사극의 거장 이병훈PD는 후배 김종학 PD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85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의 '임진왜란' 편을 찍을 때 이야기. 당시 급박한 촬영 일정 때문에 이PD는 한 후배에게 왜군들이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신을 부탁했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엑스트라들 감기 들면 촬영이 어려워지니 신경 써서 찍으라'는 조언까지 했다. 이PD가 자기 신을 마치고 후배 PD의 촬영을 살피러 갔더니 조선 포로 엑스트라들이 맨발에 동저고리 차림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부까지 했는데. 화가 난 이 PD가 후배를 불러 따지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왜병들이 포로를 잡아갈 때 옷이며 신발을 제대로 챙겨서 끌고 갈 것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야 시청자들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라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았다는 이 PD, 당시에도 '저렇게 독하니(?) 좋은 PD가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 입사 10년차인 후배 김종학은 '조선왕조500년'의 '회천문'을 연출했다.

 

 

 



김종학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운명에 맞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문열 원작을 극화한 '영웅시대'와 '황제를 위하여' 는 그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작품이란 평을 들었다. 북한의 현실을 그린 '동토의 왕국' 에선 다큐멘터리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낯선 연극 배우들을 대거 브라운관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김홍신 원작 '인간시장'에선 무명 신인이던 박상원을 기용해 한국형 히어로 드라마의 원형을 제시했다.

 

 


물론 '연출가 김종학'을 정상으로 끌어올린 작품은 단연 1992년작 '여명의 눈동자' 였다. 김성종 원작, 송지나 각색의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 말~한국 전쟁까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대치(최재성), 여옥(채시라), 하림(박상원)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그렸다.

특히 이 시기를 다룬 한국 TV 드라마 중 최초로 이념의 벽을 넘은 작품이라 평가할 만 하다. 마지막 회, 빨치산 대장과 토벌군 장교로 만난 대치와 하림이 “우리의 자리가 언제 바뀌었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화하는 장면은 아직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여운을 남겼다.

 

 

 


이 성공으로 MBC를 떠나 프리랜서가 된 김종학은 1994년 다시 한번 송지나 작가와 호흡을 맞춰 광주 민주화운동과 범죄 조직간의 암투를 그렸다. 제목은 '모래시계'. 최민수 고현정 등 호화 캐스팅이 뒷받침 된 '모래시계'는 60%대 시청률이란 전설로 '귀가시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국 4년째였던 신생 방송사 SBS는 '모래시계'를 통해 비로소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에 들었다고 일컬어진다. 이후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2002년작 '대망' 은 팩션 사극의 새 장을 열었고 2007년, 한류스타 배용준을 앞세운 판타지 블록버스터 '태왕사신기' 는 거대한 규모와 완성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제작사 대표 김종학'은 '연출가 김종학'에 미치지 못했다. '태왕사신기'에 투입된 200억원의 제작비는 당시의 한류 드라마 시장의 매출 규모에 비해 지나친 규모였다.

 

 

 

 

작품에는 엄격했지만 스태프들에겐 너그러웠던 성품도 적자 폭을 늘리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작이 된 2012년작 '신의'는 이민호 김희선 등 한류스타들이 대거 등장한 판타지 드라마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시청률은 저조했고, 막대한 투자는 이번에도 큰 짐이 됐다.

결국 시청자들은 더 이상 '김종학표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됐다. '모래시계' 이후 김종학의 일관된 꿈은 영화 연출이었다. 그는 한동안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작 영화의 제작에 몰두했으나 스스로의 완벽주의 때문에 계획은 자주 미뤄졌다. 그 동안에도 어린이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천계영 원작 '오디션'을 아이돌을 소재로 개작하려는 기획도 진행중이었다. 일찍 정상에 섰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은 도전 정신이야말로 '연출가 김종학'이 한국 방송사에 남긴 진정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끝)

 

 

 

 

 

 

고인의 업적을 다 기술하긴 터무니없이 짧은 분량입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작품들인 만큼 특별히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많은 후배들이 그를 가리켜 '역사를 아는 PD'라고 일컫습니다. 물론 송지나 작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원작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읽어 본 사람들일수록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작의 인물 구성과 사건의 흐름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보다 균형 잡힌 역사관이 가미되면서 일종의 '반공문학'이던 원작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원작의 대치는 그냥 흉폭한 악역이지만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대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북으로 가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림 역시 이념이나 정치적 구도에 대한 고려 없이, 어찌 하다 보니 미군의 군속이 되어 남쪽 편에 서게 되죠.

 

이런 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설정입니다. 그래서 저 윗글에서 소개한 장면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것이죠. (이 드라마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 외에도 '여명의 눈동자'는 한국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수작입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대치와 여옥이 "살아있어야 해! 살아있으면 만나게 돼 있어!"하고 절규하는 장면, 또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밀림을 횡단하던 대치가 뱀을 잡아 씹어먹던 장면 등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거론하려면 날이 새도 모자랄 고인의 업적 중 하나는 탁월한 신인의 발굴입니다. 전혀 경력이 없는 신인을 발굴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신인들 중 하나'를 찍어내 일약 스타로 만들어 내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시장'의 박상원과 '모래시계'의 이정재입니다. 특히 이정재는 '모래시계' 이전에도 활동을 했고, '느낌' 등의 드라마를 통해 나름 꽤 인기를 얻은 청춘스타였습니다. 하지만 '모래시계'에서 말수 적은 보디가드 역할을 하면서 전 국민이 아는 주연급 스타로 승격됐죠.

 

오죽하면 이 역할 이후에 유망 남자 신인을 꾈 때 드라마 제작진이 단골로 하는 말 중에 "모래시계 이정재 같은 역"이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그 외에도 '백야 3.98'에서 심은하의 아역이었던 이은주, 김경아(왕희지)의 아역이던 송혜교, '모래시계'에서 최민수의 아역이었던 김정현이 김종학 감독의 손끝을 통해 발굴됐습니다.

 

 

 

 

'태왕사신기'에서도 이지아와 이필립이 스타덤에 올랐죠(배용준의 아역이던 유승호는 원래 아역 스타였으니 빼겠습니다).

 

 

 

 

아무튼 어느 때든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나면 늘 "이것만 하고 영화 하려고" 하며 웃으시던 감독님. 이제 짐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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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림]

 

군사 마니아들이나 시사에 밝은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국 해군이 참가하는 국제 기동훈련 가운데 림팩(RIMPAC)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풀 네임은 'Rim of the Pacific Exercise' 인데 약자로 만들지 않고 가장 중요한 pacific과 rim만 따서 그냥 림팩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Rim of Pacific 이라고 쓰거나, Pacific Rim이라고 쓰거나, 결론은 모두 '태평양 연안(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이 영화의 제목만 들었을 때 혹시 림팩 훈련과 관련 있는 해양 액션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올 여름 최대의 기대작이었던 이 영화,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엄청난 물건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단순한 정도를 넘어섭니다. 2020년 언저리의 어느날, 갑자기 바다 속에서 카이주가 나타나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합니다. 군의 출동으로 진압에 성공하지만 점점 강해지는 카이주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인류는 거대 로봇 예거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거의 20년에 걸쳐 카이주와의 전쟁을 펼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예거 '집시 데인저'를 조종하던 에이스 파일럿 롤리 베켓(찰리 허냄)은 전투의 충격으로 일선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던 도중 옛 상관 팬터코스트 장군(이드리스 엘바)의 방문을 받습니다. 뭐 이유는 너무나 뻔합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자는 사연인 것이죠.

 

(이미 잘 아시겠지만 Jaeger는 독일어서 hunter라는 뜻, 그리고 카이주는 한자로 怪獸, 바로 우리가 보통 부르는 그 괴수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아무튼 미리 말하자면, 이런 류의 '로봇 대 괴수'의 차고 때리고 부수는 대혈전을 실사로 볼 날을 꿈꿔왔던 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꿈의 실현입니다. 신의 선물이죠. 그 밖의 분들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만족.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봤습니다.

 

 

 

 

 

이 영화의 국내 예매자 가운데 40~50대 남성의 비율이 무척 높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녀들을 위한 예매'만으로 보기 힘든 요소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로봇 만화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70~80년대까지. 물론 90년대의 청춘들에겐 에반게리온이 있고, 이른바 '건담 왕조'라고 할만한 건담 시리즈는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진정한 메카물의 시대는 나가이 고의 마징가 연작과 겟타 로보가 활약하던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퍼시픽 림'은 메카물의 재현인 동시에, '울트라맨'에서 '고질라' 시리즈를 거쳐 '아이젠버그'로 이어지는 특촬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작품입니다. DNA를 보자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라기 보다는 특촬물의 고급화라고 보는 쪽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감독이면서 시나리오에도 참여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일본적인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음을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이 영화의 로봇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품으로 '철인 28호'를 꼽기도 했죠.

 

 

 

 

액션의 사이즈를 보면 확실히 '퍼시픽 림'은 '마징가'보다는 '고질라' 류의 계승입니다(사진은 고질라의 라이벌인 가메라). 마징가Z가 20m 이내, 건담 시리즈가 30~40m인데 이 영화의 예거와 카이주들은 100m 언저리의 신장을 갖췄습니다(그렇습니다. '트랜스포머'류 보다 훨씬 큽니다). 꼬리 길이를 합해 200m라는 고질라급의 체격이죠. 어쨌든 이 덩치들이 펼치는 액션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통의 계승이 충실히 이뤄지다 보니, 돈 들인 티가 좔좔 흐르는 화면 한 구석에서도 어딘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괴수물을 다시 보는 듯한 정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괴수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쿵쿵거리고 싸우는 동안 마분지로 만든 듯한 고층건물들이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70년대 특촬물의 저렴한 느낌 말입니다. 특히나 어린 마코가 파괴된 도쿄 한복판에 숨어 있는 장면은 '고질라' 시리즈 중 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목에 있는 질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강렬하게 추억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메카물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근거(혹은 현실적으로 보이기 위한 플롯)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일단 그런 초대형 로봇이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데다, 사용하는 무기나 기타 동작이 전혀 물리적인 기반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영화일 때에는 누가 뭐라 따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이걸 실사판 영화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면 엄청나게 유치하게 보일 곳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철인28호'를 비롯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영화들이 개봉하자마자 욕설의 집중포화를 맞고 나오는 족족 침몰한 것도 이런 요소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런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들 가운데 '가장 그럴싸하게 움직이는' 대형 로봇을 창조했습니다.

 

전투 장소까지 수십대의 대형 헬리콥터에 의해 이동하는 모습이나 로봇을 보관하기 위한 거대한 도크, 그리고 그런 전투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엄청난 수의 보조 인력 등은 '로봇 만화'를 그냥 실사로 바꾸는 선을 넘어서, 어떻게 해서든 그런 로봇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천톤 무게의 로봇이 펀치를 날리며 싸운다든가, 고공에서 맨땅에 떨어져도 멀쩡하다든가 하는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감독의 이런 세심한 노력 덕분에 '퍼시픽 림'을 보는 눈은 대단히 즐겁습니다.

 

그리고 '말이 되게 하기 위해' 일반 관객들이 과거 로봇물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무한정의 기대를 희생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칭찬할 만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뇌를 공유해야 로봇이 전력을 발휘해 싸울 수 있다든가 하는 드리프트라는 독특한 설정(어쩌면 '아이젠버그'에 나오는 '영이 철이 크로스!'의 발전된 형태...?^^)은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특정한 줄거리를 펼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관객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로봇과 파일럿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싸울 수 있다는 설정은 이미 로봇이 공격당할 때 마다 파일럿이 그 공격당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일본 메카 만화의 전형적인 설정에 매우 충실한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 관객들에게 아무 무리 없이 전달됩니다.

 

(물론 왕년에 만화영화를 볼 때에는 좀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괴수 로봇이 마징가 제트의 눈을 드릴로 후벼 팔 때, 자기 눈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쇠돌이(카부토)를 보면서, 아니 그냥 조종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마징가와 쇠돌이는 신경이 연결되어 버린 거냐, 하고 당혹감을 느끼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에반게리온'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연령 때문에 본 게 에반게리온밖에 없어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사실 에반게리온에서는 수트 외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은 게 없습니다. 아마 '철인28호'와 70년대 애니메이션을 모르시기 때문에 나온 얘기일 듯.)

 

 

 

뭐 델 토로가 이 그림- 고야의 '거인' - 을 연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건 '진격의 거인'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이 그림이 갑자기 21세기 들어 각광받고 있는 듯.

 

그런데 아래 댓글 지적에 따라 찾아 보니 이 그림이 고야의 그림이 아니고 제자 아센시오 훌리오의 그림이라는 보도가 있었군요. 이 글과 직접 관련 있는 건 아니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프라도미술관의 19세기 작품 담당인 호세 루이스 디에스 씨도 캔버스 왼쪽 아랫부분을 확대해본 결과 AJ라는 서명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고야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아센시오 훌리아(Asensio Julia)의 이니셜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메나씨는 프라도미술관이 이 작품과 훌리야의 다른 작품들을 비교하고 추가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 그림이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는 최종적인 결론은 유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148492)

 

 

 

사실 배우들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할 거리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거들과 카이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진정 사랑할 관객들(!)이 원하는 것도 그런 요소들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선 사실 별 기대할 게 없습니다. 그건 배우들이 그리 이름값을 할만큼 거물들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겠지만(뭐 이 정도 그래픽에 돈을 때려 부었는데 배우까지 비싼 인물들을 쓸 여력은 절대 없었겠죠. 특히 영화에 딱 한명 나오는 '동양인 미소녀'가 기쿠치 린코라니. 이런 젠장), 그보다는 애당초 줄거리에 별다른 공이 기울여지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대략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됩니다. "자, 이런 영화 많이 보셨죠?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대략 아시죠? 그럼 재미없는 부분은 대강 넘어갑니다?" 휘리릭.

 

그러다 보니 '퍼시픽 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비주얼은 볼만한데 뭐 내용은 하나도 없고...'라는 식의 평가를 합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내용은 별 게 없기 때문이죠.^ 오히려 주인공 롤리가 '인간적인 갈등'이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하거나, 펜터코스트 장군이 전 인류의 궐기를 호소하는 명연설을 펼칠 때에도 관객들은 '왜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치 '인간 대 인간이 겪는 감정'은 그냥 구색 맞추기 수준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이봐, 이럴 시간 있으면 로보트를 1분이라도 더 보여주는게 어때?" 이런 생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마치 FSS...)

 

 

그래서 굳이 결론은 - 로봇과 괴수의 박진감 넘치는 결전 장면은 아마도 인류가 만들어 낸 영화 사상 최고의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3D 효과 또한 역대 최강권입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앞으로 모든 영화의 액션 신은 '맨 오브 스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퍼시픽 림'을 봤다면 자신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느끼고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높은 점수를 주기엔 '영화'로서의 플롯과 연기 등 '인간 캐릭터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매우 부실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가는 꽤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족도는 '이런 장면을 얼마나 실사로 보기를 꿈꿔왔는가'에 따라 퍽 많이 나뉠 듯 합니다. 아마 저처럼 "제발 속편, 아니면 프리퀄이라도 계속 만들어 줘!"라고 외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겁니다.

 

 

 

 

P.S. 1. '이런 영화는 한스 짐머'의 공식을 깨고 라민 자바디(Ramin Djawadi)가 맡은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 줍니다.

 

 

 

 

 

 

P.S.2. 미친 과학자 역으로 찰리 데이라는 배우가 나옵니다. 저는 당연히 샘 록웰인줄 알았습니다. 실수.

 

 

 

P.S.3. 관제탑 요원 역으로 나오는 텐도는 'Tendo Choi'라는 이름으로 보아 한국계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기한 배우 클리프턴 콜린스 주니어는 아시안 혈통과는 아무 상관 없는 멕시코 계 미국인.

 

P.S.4. 분명 여기저기 봐도 설정엔 일본 예거가 있는데, 일본 예거가 이 영화에 나오긴 하나요? 보신 분 계시면 어느 장면인지 제보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artgihun?Redirect=Log&logNo=20190632696

 

P.S.5. 어이, 양덕들, 이제 건담이나 FSS를 실사판으로 만드는 게 어떨까? 아무래도 일본 친구들이 실사영화 만드는 솜씨는 이제 못 믿겠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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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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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천명'은 마지막에 악인 문정왕후가 참회하고 인종이 왕으로서의 귄위를 회복하는 해피엔딩을 맞았습니다.

 

뭐 드라마야 시청자들이 행복한 결말에 만족했다면 그걸로 끝이겠습니다. 사실 사극이건 현대물이건,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때 반드시 현실 그대로 끝을 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천명'이 다루고 있는 공간은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도입부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인 듯 합니다. 드라마는 문정왕후의 뉘우침으로 마무리됐지만, 진정한 '문정왕후의 시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문정왕후 윤씨(1501.10.22~1565.4.6, 음력)

 

조선 중종의 두 번째 아내이자 명종의 어머니. 조선 왕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독부(毒婦)로 꼽힌다. 그가 죽은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으니, 바로 윤씨 같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牝雞之晨, 惟家之索, 尹氏之謂也)’라는 극언이 등장한다. 물론 생전에는 감히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중종의 첫 왕비(엄밀히 말하면 왕위에 오르기 전 진성대군일 때 혼인을 한 적이 있으니 아내로는 '두번째 아내'입니다) 장경왕후가 1515년 세자 호(, 뒷날의 인종)를 낳고 죽은지 2년 뒤, 문정왕후 윤씨는 만 16세의 나이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궁의 최강자는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경빈 박씨.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흥청(興淸, 연산군이 즐기기 위해 선발한 미녀들) 출신이라는 점, 1509년 아들 복성군을 낳았다는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윤씨보다 열 살은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인자 희빈 홍씨도 아들을 다섯이나 낳을 정도로 총애가 두터웠다.

 

중종이 연산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것이 1506년. 이때 이미 경빈 박씨는 연산군이 고른 미녀들 중 하나였으니 대략 1500~1501년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연산군의 승은을 입지는 않았으니 중종에게도 차례(?)가 돌아왔을텐데, 1517년 문정왕후가 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올 즈음 경빈 박씨는 이미 궁 생활 10년을 넘긴 마녀 중의 마녀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경빈을 지원하던 쪽은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구신들. 또 희빈 홍씨도 홍경주의 딸이었으니 아무리 문정왕후가 명문 파평윤씨가의 딸이라 해도 상대들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종은 경빈을 아예 계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해 뜻을 접었다. 세자만 없다면 복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해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었다.

 

문정왕후의 최선책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지만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1521년 의혜공주부터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살기 위해선 내가 세자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며 경빈 세력과 맞서야 했다. 이 파란의 시기를 그린 작품이 월탄 박종화 대하소설 여인천하. 2001 SBS TV에서 장장 150회에 걸쳐 방송되며 공전의 인기를 누린 사극 여인천하의 원작이다.

 

 

 

 

당시 여인천하를 열심히 본 시청자들에겐 요즘 KBS 2TV ‘천명의 문정왕후(박지영)가 영 낯설다.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는 악녀 경빈(도지원)의 세력으로부터 어린 세자를 보호하는 지혜롭고 따뜻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에서는 그 문정왕후가 인종(바로 그 세자)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좀 이상하지만 둘 다 실제 문정왕후의 모습이다.

 

1527,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으로 경빈이 몰락한다.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맞춰 불에 지진 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이다. 당연히 경빈 모자가 범인으로 지목돼 귀양길에 오른다.

 

중종은 어떻게든 복성군만은 살려 보려 했으나 윤임, 김안로 등 세자 보위 세력과 문정왕후의 동맹군은 집요했다. 6년 뒤인 1533, 사약이 내려졌다. 사실 경빈이 주범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오히려 이종익 같은 이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의 짓이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던 만큼 자작극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인천하' 방송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천재 소년 세자 역의 아역 스타 권오민. 이 친구에 대해서도 전에 뭔가 쓴 적이 있습니다. 1997년생. 한창 폭풍의 나날을 보내고 있겠군요.

 

아역스타, 그 성장의 위기   http://fivecard.joins.com/121

 

물론 권오민 군이 위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1534, 문정왕후가 마침내 아들 경원대군(뒷날의 명종)을 낳으며 동맹이 깨졌다. 세자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었다. 1543년에는 동궁 처소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세자 부부가 죽을 뻔 했으나 유야무야 됐다.

 

결국 1544,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보위에 오르지만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한다.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한 가운데 열한살의 명종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와 역사가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드라마 '천명'에선 '모든것이 정리되고 다들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식의 마무리가 있었지만, 인종이 왕위에 머문 기간은 다 합해 8개월 뿐이기 때문입니다.

 

최원(이동욱)이 "밖에서 잘 살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과연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가 잘 살 수 있었을까요.^^

 

 

 

'여인천하' 보시던 분들에겐 참 아쉬운 일이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런 현명하고 냉철한 전인화 문정왕후는 사라지고,

 

 

 

아들과 윤씨 일족, 그것도 윤원형 일족의 안녕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몸소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독한 박지영 문정왕후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당시 권력 주변엔 윤씨 외척이 너무 많았다. 세조비 정희왕후,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중종의 정궁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였기 때문이다. 대동단결했다면 조선말의 안동 김씨가 부럽지 않았겠지만 윤씨들은 내부 경쟁을 선택했다. 특히 인종의 외숙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소윤(小尹)은 마침내 명종 1(1545) 을사사화로 충돌, 수백명의 피를 흘렸다. 여기서 승리한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묵인 아래 친형인 윤원로까지 죽이고 권력을 독점했다.

 

문정왕후가 사관들에게 치열한 공격을 받은 것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윤원형의 독재를 비호한 잘못이 가장 컸다. 명종도 윤원형을 견제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네가 누구 덕에 왕이 됐는지 아느냐고 윽박지르는 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20년 세도 끝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1565) 곧바로 윤원형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쏟아졌고, 궁지에 몰린 윤원형도 자결했다. 그의 부패와 만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실록은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다가 마침내 죽으니 조야가 모두 기쁘게 여겼다. (중략) 극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을 정도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정난정(위 사진은 '여인천하' 때의 윤원형-정난정 커플)입니다. 천민 출신으로 윤원형의 소실이었던 난정은 문정왕후의 인정을 받으며 마침내 윤원형의 정실이 되어 정경부인의 칭호를 허락받습니다. 대단한 신분 상승인 셈이죠.

 

하지만 뒤를 봐 주던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만행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황해도로 귀양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예감한 정난정은 지니고 있던 독약으로 바로 목숨을 끊었고, 난정의 죽음을 안 윤원형 역시 통곡하다가 따라 자살했습니다.

 

(이런 사연을 보면 비록 악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정난정에 대한 윤원형의 마음은 참 진실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남매는 사후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다음 임금인 선조 때 사림은 심의겸의 서인과 김효원의 동인으로 갈라졌다. 동인은 심의겸이 외척(명종의 처남)이란 이유로, 서인은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날을 세웠다. 서로 상대방을 타락한 구세력의 잔재로 규정하고 명분 싸움을 벌였으니, 당쟁의 기원이 바로 문정왕후의 정치적 유산이었던 셈이다.

 

윤원형은 본래 사림의 언관 출신이라 지식인들을 어떻게 억누르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문관들의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전랑직을 관리하면서 젊은 신진 관료들이 자신 앞에 스스로 줄을 서도록 한 것이죠. 유학 하는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윤원형에게 잘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윤원형의 시대를 정리한 뒤에도 조정에 윤원형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조차도 윤원형의 세도가 시퍼렇던 시절에 벼슬을 하고 과거에 장원을 했다는 이유로 '세상에 아부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윤원형도 죽고, 명종도 죽으면서 사림의 정치가 시작됐지만 이제 사림은 그 내부에서 파가 갈리며 권력 독점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대편을 비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는 바로 '윤원형의 개' 혹은 '구시대의 잔류'라는 것이 되죠.

 

 

 

P.S. ‘여인천하천명만큼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한류 드라마의 대표작 대장금에도 문정왕후가 등장했다. 박정숙이 연기한 이 문정왕후는 장금의 후원자로 그려졌으니 당연히 좋은 이미지.

 

실존인물인 의녀 장금은 천명에도 등장하는데, 이 장금(김미경)은 궁에서 홀몸으로 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 민정호(지진희)와의 러브스토리는?

 

 

여담이지만 영화 '후궁'에서 박지영이 연기했던 대비 역시 문정왕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그 이미지 때문에 '천명'에도 이어 출연하게 된 것으로 보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후궁'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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