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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이 압도적인 호쿠사이 미술관.

그런데 사실 이게 다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호쿠사이의 고향 스미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까진 좋은데, 정작 호쿠사이의 그림을 그리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못했다. 

전시실은 3층의 두개가 전부. 2층은 특별 전시 때만 사용한다고 한다. 

전시실 하나만 보면 400엔, 두개 다 보면 700엔. 그런데 표를 사려고 서 있으면 옆에서 친절하게 얘기를 해준다. 400엔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부 레플리카라고. 

뭐요 레플리카? 호쿠사이 미술관이라고 이름을 걸어놓고 레플리카?

뭐 기본적으로 우키요에는 전부 판화다. 그 판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느 것인지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건 좋았다. 

그 유명한.... 그런데 물론 레플리카.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요시와라의 새해' 그림. 

요시와라는 에도 시대의 유명한 유곽 지역. 새해를 맞아 요시와라의 여인들이 몸 단장을 하고 손님맞이 준비를 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요란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풀 스케일 하이 데피니션 레플리카'라고 쓰여 있다. 

가나가와의 혼모쿠 해안 그림. 그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 그림의 자매편 쯤 되는데, 역시 레플리카. 

조개줍기 그림. 언뜻 봐도 몇군데 벗겨진 것이 오래된 느낌이 든다. 혹시 이건...?

진품이네. 그 유일하게 하나 있는 진품에는 '사진찍지 말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아. 미안해. 벌써 찍었네. 이거 하나는 봐줘. 

이런 식의 삽화들, 

그러니까 이 두 그림은 모두 후가쿠 36경이라는 시리즈의 일부다. 후가쿠( 富嶽)는 후지산의 별칭. 

당연히 후가쿠 36경에 담긴 그림에서는 모두 후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판화집에는 모두 46장의 그림이 실렸다는데(36경이라더니?) 당시에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과연 몇부나 찍었을지?

(물론 이 그림들도 모두 레플리카...)

사실 호쿠사이의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맘에 드는 건 이런 식의 귀신 요괴 그림들.

결국 현장에서 이런 우키요에로 그린 귀신 그림 모음집을 샀다.

그리고 우키요에 미술관을 따로 찾은 보람은,

호쿠사이의 아틀리에(?)를 재현해 놓은 공간.

제자 츠유키 릿츠가 그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대로 방을 재현해 놓았다. 

방이 좀 추웠던 듯? 옆에 앉은 여인은 당연히 아내겠거니 했는데 위의 설명을 다시 읽어 보니 딸이라고.

아니 딸이 왜 나이가 더 들어 보여...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기야 당시의 우키요에는 포스터, 포장지, 책 표지로 마구 뿌려졌다고 하니 뭐 그럴수밖에. 대신 후손들에게는 꽤 좋은 일을 한 편이다. 호쿠사이의 이름만 내건 이 허접한 미술관도 꽤 많은 방문객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공로 중 하나는 만화를 발명(?) 했다는 것인데, 

그의 작품집 중에는 호쿠사이만화(北斎漫画)라는 이름인 '그림 그리는 법 교본' 풍의 책이 여러 가지 있다. 

대략 이런 식으로 된 책인데, 인물 표정의 단순화, 동작, 표정을 통한 의미 전달 등이 현대 만화의 기본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호쿠사이 만화가 줄거리와 대사가 있는 현대 만화와 바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cartoon의 한자 번역어가 '만화'가 된 것은 바로 이런 호쿠사이의 공헌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현재 모든 일본의 만화가/애니메이터의 조상은 호쿠사이라는 말이 자주 통용된다. 

물론 이 미술관에 전시된 호쿠사이 만화는 진품인지.... 역시 촬영 금지. 

그리 크지도 않은 전시실 2개 뿐인 호쿠사이 레플리카 뮤지엄은 30분 정도면 다 볼 수 있다. 더 있고 싶어도 더 볼게 없다. 

기념품점에서 도록이나 카드를 사는 정도로 끝. 

건물만 멋진 호쿠사이 미술관 안녕. 

기운이 빠져 호텔로 후퇴하기로 했다. 

오는 길에 다이몬 역 앞에 있는 도쿄 유수의 붕어빵집을 들렀다.

한국에서는 '붕어빵' 이지만, 아무래도 그 원조일 일본에서는 '타이야키'라고 부른다. 타이는 돔. 

돔과 붕어의 몸값 차이가 있으니, 한국의 붕어빵과 일본의 타이야키는 몸값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팥, 고구마, 크림이 든 타이야키는 300엔. 계절 한정 상품인 사과가 든 것은 330엔. 

한국에서 붕어빵이 이제 천원이라고 개탄을 했는데 여기선 이미....

그 이름도 거룩한 나루토 타이야키 본점. 나루토는 물결이 거세기로 유명한 세토나이카이의 해협 이름이다(닌자와 무관). 거기서 잡은 도미가 맛있다고 해서 타이야키 이름에 나루토를 붙이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센스.... 

(하긴 영덕 게빵이 있는 한국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안 될지도.)

잘 보니 토카치(홋카이도의 지명이다)의 명산 팥, 나루토의 고구마를 썼다는 것 같다.

근데 한국 붕어빵도 이렇게 번듯한 가게에서 위생복 입은 직원이 만들면 한개 3000원쯤 하려나?

3000원짜리 단팥빵이 있는 걸 보면 그리 놀라운 가격이 아닐수도. 

돈 날아가지 말라고 누르는 역할의 도미도 있다. 천엔 내고 3개. 

사과에는 애플파이 같은 사과 프리저브가 들었고, 

팥에는 팥이 가득 들었다.

껍질이 한국 붕어빵보다 훨씬 얇은데다 팥도 연양갱 수준으로 달다.

양갱에 껍질을 살짝 붙인 느낌. 어우 달어. 난 인제 됐네. 

이렇게 해서 레플리카 미술관을 다녀온 느낌으로 똑같이 퐁퐁 찍어내는 붕어빵으로 마무리.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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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인가 도쿄를 처음 갔을 때, 혼자였다. 날은 꽤 쌀쌀했고,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일본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마디도 못한다. 여행안내서에서 우에노라는 지명을 처음 봤다. 숙소가 신주쿠 주변이라, 녹색 야마노테센을 타고 한참을 갔다.

우에노공원이라는 이름 안에 동물원, 미술관,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적한 공원. 차가운 비가 스물스물 내리는 길을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진입로에 뜬금없이 군고구마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군고구마 냄새는 위협적이었는데 가격이 400엔. 당시 한국 기준으로 고구마 하나에 4천원은 너무 비쌌는데 심지어 웬만한 무 만큼 고구마가 컸다. 

"하프?"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 외국인이 딱해서 그랬는지 아저씨가 절반을 뚝 잘라 주고 200엔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에노는 내 기억 속에 군고구마로 남았다. 

어 하고 들어가보니 여기는 아시아관. 우에노 일본 국립박물관에는 3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한국, 중국, 태국 등의 유물을 전시한 아시아관, 일본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본관, 그리고 표경관이라는 건물이다. 건물은 표경관이 제일 예쁜데... 뭔가 헬로 키티 전시회를 하고 있다. 

다 돌아보기엔 기운도 딸리고, 아무래도 관심있는 건 일본 유물. 본관으로. (사진은 재팬가이드. 건물 정면 사진을 못 찍음)

1938년에 지어진 건물. 고색창연한 1층 로비와 계단. 

눈길을 확 사로잡는게 화려한 기모노. 

뭐 제대로 기모노를 보자면 복식박물관 같은 것이 따로 있겠으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물건인 만큼 하나 하나 수로 놓인 장식이 어마어마한 공력이 들었음을 바로 알수 있게 한다. 

사실 기모노에서부터 느껴지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시의 규모가 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처럼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고, 주제별로 일본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보여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는 느낌? 

이를테면 죠몬시대, 아스카 문명, 무로마치 시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게 아니라 유키요에, 기모노, 그림, 칼, 요로이와 구조쿠(갑옷), 도자기, 불상 등 주제에 따라 유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 주제에 대해 전시된 유물이 그리 많지도 않다. '보셨죠? 이렇게 대단한 유물이 많아요' 라는 태도가 아니라, '뭐 이런 겁니다' 정도랄까. 대신 동선이 훨씬 여유롭고,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이를테면 영상)의 활용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유물의 설명이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여름에 도쿄 민예관을 다녀온 뒤로 도자기에 요즘은 눈길이 간다. 이런 19세기식의 화려한 스타일.  

이건 17~18세기 에도 스타일. 에도 시대에도 '교야키(京燒)'라고 부른 것은 교토 도자기였다니. 바닥에도 '미조로가이케'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는 것은 이때 이미 도공들의 브랜드가 진행되었다는 얘기겠지. 철화, 청화, 백토가 모두 동원된 표현 기법도 세련되어 보인다. 

이것이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모여 살았던 큐슈 이마리(伊万里) 도자기. 아직까지는 독자적인 스타일 보다는 중국 경덕진 도자기 스타일의 작품들을 만들 시절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그 이전 것들인,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도 꽤 많았다.

'겐토'라는 이름까지 붙여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명품으로 꼽히던 작품.

우리 눈으로 보기엔 그냥 흔한 밥공기 같은 이런 물건들이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이라 불리며 엄청난 귀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건 이런 정교한 완구류,

한국 유물 중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이런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 소풍 세트라니.

주문 생산일지, 공산품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렸다는 것은 취향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수준의 도시 문명이 통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우타가와 히로시게(이때까지는 우타가와도 한 사람인줄 알았다. 알고보니 우타가와는 우키요에 화가 패밀리의 이름. 스승이 우타가와면 제자도 데뷔 후 우타카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의 우키요에를 보다가, '내친김에' 스미다에 있는 호쿠사이 미술관을 가기로 맘 먹었다. 

전철역에 내리면 보이는 엄청 큰 간판. 전철역에 '스미다'가 살짝 가렸다.

어쨌든 호쿠사이가 살았다는 동네라 '스미다'를 강조한다.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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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후쿠오카 맛집이라는 키와미야. 도쿄역 1층 식당가에 도쿄점이 있다.

소싯적부터 함박스텍이 진정한 소울푸드라고 생각하며 자라온 터라 맛있다는 함박스텍이라면 닥치는대로 먹어왔다. 키와미야는 極味라는 이름 그대로 궁극의 맛을 지향한다는 집. 거의 순 살코기 덩어리인 함바그를 손님이 직접 숯불에 구워 먹는 컨셉이라니. 어찌 당기지 않을손가. 

그러나 첫날은 보기좋게 실패하고, 둘쨋날은 오픈런으로 맞섰다. 11시 오픈이라니, 10시 반에 가면 충분하겠지.

물론 줄은 좀 서 있는데,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가겠다 싶었다.

줄서기가 어찌나 요란한지, 대표로 줄서기 금지가 난리. 하지만 곧 이것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꺾어져서도 몇명 더 서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픈런 성공이다 싶었는데... 바로 앞의 키작은 여자가 문제. 

이윽고 셔터가 올라가고, 입장 준비 시작. 4인석 같은 것은 없고, 이런 식으로 빙둘러 카운터에 앉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열기 5분 전쯤 앞에 줄을 선 여자 옆에 어디선가 4명의 일행이 날아와 붙는다. 다들 여행가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메 열차에서 내렸거나, 열차를 타러 차비를 하고 나온 느낌. 줄세우기 담당 직원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길래 '미리 대표로 줄서기 없기'를 금지하고 있는 매장인 만큼 제지를 하겠거니 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 오픈런 줄이 딱 끊길 줄이야. 

왜 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줄에 서 있던 여자가 일행이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는 손님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라나(번역기를 돌려서 알려줌). 이런 젠장. 

다행히 회전은 꽤 빠른 편이어서 약 20분 뒤에 자리가 났다.

아무튼 이렇게 꽉 찬 카운터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20분 대기. 

여러가지 조합이 있는데, 대략 괜찮아 보이는 스테이크+함바그 세트를 주문했다. 

요만한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역시 요만한 함바그 한 덩이를 준다. 

그리고 다양한 소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앞에서 직원이 직접 함바그를 동그랗게 빚고,

밥, 국(콩소메 수프), 양배추 샐러드를 준다. 이 세가지는 무한 리필. 

그리고는 철판 위에 이렇게 살짝 레어 상태로 준다. 앞은 구운 마늘편. 

이게 아마 스테이크 100g + 함바그 120g의 2480엔 짜리였던 듯. 

여기에 400엔을 추가하면 밥, 수프, 양배추는 무제한 리필이다. 내 기준으로 딱 기분좋은 점심 사이즈. 

그리고는 자기 앞의 철판에 알아서 더 익혀 먹는 구조. 

레어 상태로 그냥 먹든, 더 익혀 먹든 그건 손님 마음이다. 

각종 소스를 부어 놓는 틀. 

일단 레어로 한점 맛을 본다. 

워낙 마블링 천지의 고기라 역시 더 익히는 게 좋아 보인다. 

치지지직 

아 좋다. 육질도 양념도 A급. 흰 쌀밥과 아주 궁합이 좋다. 

그리고 역시 우유맛이 진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줄서기 파동만 없었으면 참 괜찮은 맛집으로 기억에 남았을텐데, 유감이다. 그래도 그냥 가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생각. 먹어보길 잘 했군. 그런데 솔직히 줄이 너무 긴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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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서울역과 형제간인 듯한 느낌이 있는 도쿄역. 도쿄역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로 가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내린 뒤, 부산역엑서 경성역과 평양역, 신의주역을 거쳐 만주 심양 신경 합이빈 흑하까지 달리는 것이 소위 대일본제국의 꿈이었으려나. 오늘날 생각하면 참 물거품같은 꿈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역은 앞쪽은 고색창연한 모습이지만 뒤쪽과 지하로 확장 확장을 거듭해 어마어마한 규모. 1층 한켠에는 거대한 식당가가 있어 주변 빌딩군에서 손님이 쏟아져 들어온다. 

당초의 목적은 여기서 소문난 함바그 맛집 키와니야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으나.... 줄이 대략 100미터. 오후 1시쯤 되면 좀 한산할 거라는 안이한 예상을 비웃는 손님의 규모였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기력이 딸려 일단 점심은 다른데서 때우는 걸로.

해서 그 옆집을 들어갔는데(여기도 5~6명 정도 줄을 서 있었다), 

이런 일식 정식과 

이런 닭 전골 주문. 

닭고기와 당근, 호박 등 채소가 같이 들어 있는데 기대했던 맛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비추. 

역시 기다려서라도 먹겠다고 작정한 걸 먹었어야 하는데. 

식후 천천히 긴자로 이동. 그러고보니 대체 긴자를 와본게 얼마만인지. 제대로 긴자 구경을 해본 적이 없네. 

동행인이 볼일이 있다는 긴자 식스로 직행.

그런데 백화점 상공에 떠있는 기이한 형상. 아니 저게 대체 뭐야. 

큰 고양이 작은 고양이 요란하다. 

잘 보면 수백마리 고양이들의 표정이며 포즈가 다 제각각이다. 

고양이 손오공인거냐 

알고 보니 야노베 겐지라는 작가의 설치 미술 작품. 고양이가 이 양반의 주요 테마인 모양이다.

그렇게 저렇게 긴자를 헤매다 저녁을 먹으러 예약해 둔 신바시의 야키토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신바시의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들 사이에 쏙 들어가야 있는 야키토리야 히라노.

아마도 주인 성이 히라노? 평야라는 뜻일텐데 왜 들 야짜만 한자로 쓰여 있는거냐. 

요만한 실내고 4인 정도 들어갈만한 작은 방이 있다. 그래도 예약 시간 정각에 자리가 꽉 찬다. 

그런데 그동안 가본 야키토리야중에 젊은 손님들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것 같다. 

웰컴 드링크를 일본식 납작한 잔에 준다. 깔끔한 니혼슈. 

딱 한잔은 아니 할 수 없는 분위기라 역시 깔끔한 쇼추 하이볼 주문. 녹진한 수프로 시작한다. 

이어 잔 멸치와 닭가슴살을 들깨 드레싱에 무친 전채. 실패 없는 조합. 근데 솜씨가 좋다. 

부지런히 구워 내는 화덕.

세세리(목살)부터 준다. 특이하네.  

그렇지. 야키토리 집이면 다이콩 오로시가 나와야. (왜 나는 일본어는 명사밖에 모르는 것인가)

살짝 기름진데 토마토 맛. 어느 부위인지 까먹었다. 기름기로 보아 허벅지? 등? 

스나기모(모래집). 딴딴하다. 레바(간)도 나왔는데 아 이건 별로. 

꼭꼭 붙은 허벅지살인듯. 

진득한 땅콩소스와 두부, 살짝 생강. 

언어 소통이 잘 안 되니 부위 모형(?)을 앞에 가져다 놓는다. 

대략 읽을 줄만 안다는 걸 눈치챈 듯. 

날개! 

다른 가게에선 츠바사? 하고 물으면 하하하 웃던데 이 집은 심각하게 예스! 하고 대답한다. 

맨가슴살? ㅎㅎ

퍽퍽하지 말라고 유자고쇼를 살짝. 

은행이 나오고, 오 테바사키. 

그러고보니 사진을 몇개 빼먹은 듯도 한데, 아무튼 배가 불러 온다. 

사실 좀 미안한건 이 친구들이 짜놓은 순서가 있을텐데 너무 천천히 주는 바람에 하야이, 하야이 했더니 다른 테이블에 갈 것까지 먼저 막 가져다 주더라. 그래서 순서는 엉망일듯. 

어쨌든 마무리 1번, 미니 오야코동과 

미니 시오라멘 중에서 선택. 

진한 닭 육수의 시오라멘 맛도 그럴듯했다.

녹진한 푸딩, 차, 딸기 반쪽. 계란껍질을 식기로 쓰는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무튼 이 집 전통인듯. 

어쨌든 꼬치 10개에 등등 해서 인당 9800엔. 이만하면 야키토리 전문점 치고는 가성비가 괜찮다는 생각. 쵸친이나 뭐 등등도 있는데 배가 불러서 굳이 추가 요금을 내고 먹을 이유가 없다 싶었다. 

Yakitori restaurant in Ginza │ YAKITORI HIRANO

 

Yakitori restaurant in Ginza │ YAKITORI HIRANO

For our Customers’ enjoyment of “the taste of birds”, we value the mutual understanding between the griller and the recipient, whereas we try our best to provide our warm hospitality to them. We hope customer could enjoy the stylish fusion of traditi

www.yakitori-hirano.tokyo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첫날 끝. 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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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역에서 아 저기인가보다 하고 빌딩 숲 속으로 쑥 들어왔는데 별세계였다.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예쁜 공간.

지도상으로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은 황거라고 불리는 천황의 거처와 도쿄역 사이에 있다. 말하자면 도쿄의 구 도심에서 심장부에 위치한 곳이다. 요즘은 옛날같지 않겠지만 미쓰비시라는 이름은 과거 제국을 꿈꾸던 시절부터 일본을 상징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종합상사였고, 성룡은 모든 출연작에서 미쓰비시 자동차를 타고 나왔다. 

그 미쓰비시 그룹의 1호관, 그러니까 첫번째 사옥이 있던 자리라는 얘기. 물론 그 1호관은 지금으로 봐선 아주 조그만 3층짜리 건물이지만, 미쓰비시 그룹의 후예들은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주변을 으리으리한 수십층짜리 오피스 건물들로 둘러쌌다. 미술관을 나와서 알았지만, 도쿄 역까지 가는 동안 큰길 따라 '미쓰비시'라는 이름을 단 빌딩들이 죽 이어진다. 저 블록 하나가 전부 미쓰비시 타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 시계가 보이는 곳이 말하자면 미쓰비시 타운의 입구,

그 입구로 들어가 몇미터 이동하면 이런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게 바로 미쓰비시 1호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건물 한 켠에 내력이 적혀 있는데, 대강 1894년에 빅토리아 시대 양식을 살린 건물로 지어졌고, '한 블록의 런던'을 도쿄 시내에 재현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얘기. 처음부터 줄곧 보존된 것은 아니고, 한번 허물었다가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 안으로. 먼저 로트렉 전을 본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역과 찍을 수 없는 구역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 유명한 로트렉의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1870년대 파리에서 유명했던 카페/레스토랑/공연장을 겸한 공간의 이름인데, 거기서 펼쳐지는 공연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스터의 형태로 그려냈다. 가운데 앉아 검은 옷을 입고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이 로트렉 그림에 늘 등장하는 캉캉 댄서 제인 아브릴(깃털 모자가 포인트), 무대에 있는 것이 가수 겸 댄서 이베트 길베르라고.

그리고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작품. 제목은 <독일의 바빌론>인데 빅토로 조즈(Victor Joze)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용 포스터다. 당시 베를린 사교계의 타락과 혼란스러운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너무 노골적인 내용이라 당시 독일 대사관에서 판매 금지를 요청할 정도의 작품이었다고. 그래도 로트렉이 "그러면 안되지!"하고 직접 포스터를 그리는 등 출판의 자유(?)를 위해 애썼다는 전설이 있다. 

작품 사이로 이동하다 찍은 정원. 밤에 가보면 야경이 그리도 아름답다고 한다. 아무튼 마음에 쏙 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소피 칼의 작품은 전면 촬영 금지. 이 전시의 제목은 '부재 absense'인데, 칼이 자주 사용했던 주제인 듯 하다. 현장의 설명 등을 읽어보면, 프랑스의 한 미술관에서 유명 작품들이 도난을 당하고, 미술품 도난이라는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해당 미술관에서는 그림이 있던 자리에 텅 빈 액자만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칼은 거기서 영감을 얻었던지, 제목만 있고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시를 시도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을 가려 놓고 제목만 보여준 뒤, 가린 커튼을 열어 작품을 보게 하는 전시를 시도했다. 

(....근데 이런 것들을 굳이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심지어 전시의 설명 문구도 찍지 못하게 해서 과연 무슨 소득이 있을지 모르겠다.)

촬영이 허락된 소피 칼을 몇몇 작품들. 소피 칼은 유난히 작품에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한데, 문제는 그 텍스트가 전부 프랑스어라는 것. ㅠㅠ 무슨 말인지. 

단순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이 <시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관 모양의 시계. 너무나 직관적인. 

이어서 <그의 시선>, <누구세요>, <눈 주위의 멍>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坂本繁二郎とフランス 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1세대 유럽 유학파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사카모토 한지로(1882-1969)의 작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략 누가 봐도 당대 인상파의 영향이 짙은 그림들을 비슷한 시기의 밀레나 모네의 그림 등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전시. 그 시기에 일본은 벌써...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시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보니 은행잎이 한껏. 12월인데. 

미쓰비시 1호관의 명물은 갤러리와 레스토랑이라는데,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와 보니 엄청난 장사진. 

이 공간에서 식사를 할까도 했으나 역시 너무 줄이 길어 포기. 당초 계획(앞글 참조) 대로 도쿄역 지하의 표적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보행 인구가 별로 없어서인지, 12월 중순인데 아직도 가을 같은 느낌. 은행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있는 길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5분쯤 걸어가자 도쿄역이 보이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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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스카이액세스 탑승장

인천공항에서 나리타로 가는 항공편은 여러가지 있지만, 직장인들은 일단 출근했다가 저녁에 떠나 늦은 밤에 나리타에 내리는 경우가 꽤 있다. 이 경우,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도쿄 시내로 가는 것은 꽤 피곤한 일정일 수 있다. 이때 문득, '그렇다면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봤다. 나리타 주변에는 비슷한 생각을 한 여행자들 때문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다. 인천공항에도 구내에 호텔이 있는데, 나리타에는 구내에는 적당한 호텔이 없었지만 셔틀로 5분 거리에 다양한 호텔들이 있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잔 뒤, 아침에 나리타 공항으로 다시 가서 스카이액세스 편으로 도쿄 시내로 들어가면 매우 효율적인 이동이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검색해 본 뒤 '나리타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이라는 이름의 나리타 토부 호텔 예약. 호텔비도 다음날 아침 조식 부페 포함 10만원대 초반. 

그러나... 광고는 역시 광고일 뿐. 호텔 방은 꽤 크기는 했지만 정말로 침대와 TV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썰렁하기만 한 방이었다. 침대도 별로. 베개도 별로. 심지어 공항 라운지가 무색하다(고 어떤 블로거가 그랬다)는 조식 부페는 정말이지 부페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 딱히 길게 언급하고 싶지 않다. 국내에서 가격으로 치자면 1만5천원? 2만원 짜리 정도?

그리고 오전 10시에도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하는 스카이액세스는 만석을 넘어 만원 전철에 가까운 수준. 아니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오길래 이 새벽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는 것인가....라고 생각을 해 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만치 공항 주변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시내로 들어가자는, 바로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결론은: 나리타 1박후 오전에 도쿄 시내 이동은 딱히 그리 권하고 싶지 않고, 나도 다시 시도하고 싶지 않다. 그냥 늦게라도 어떻게든 시내로 이동을 하고, 체크인을 한 뒤 늦잠을 자라, 그게 컨디션 조절에는 더 낫다. 괜히 다음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시내로 이동하고, 호텔에 짐을 맡기고 다시 나오고 하는게 더 피곤하다. 

나리타 토부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공항이 조만치에 보인다.

....그런 상태로 아무튼 다이몬 역에 내려 오전에 리치몬드 호텔에 도착했고(앞글 참조), 체크인을 하고, 방 키를 받은 뒤 짐을 프런트에 보관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는 미츠비시 1호관 미술관. 이름이 왜 이 모양인지는 전혀 몰랐고, 일본어로 된 어떤 사이트에서 올 겨울 도쿄에서 봐야 할 중요한 미술 전시 중 하나로 꼽혔던 툴루즈 로트렉 X 소피 칼(Sophie Calle)의 전시를 보러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름다운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호텔에서 북쪽으로 이동, 히비야 역에서 내려 히비야 공원을 살짝 구경하고, 다시 길을 건너 미츠비시 1호관으로 이동해 이 전시를 본 뒤, 도쿄역으로 이동해 역 구내의 식당가에서 이름난 키와미야 도쿄역점의 함바그로 점심을 먹고, 동남쪽 긴자로 이동, 동네 구경과 약간의 쇼핑을 한 뒤 긴자의 빵가게들도 좀 구경하고, 어찌 어찌 시간을 보내다가 신바시 한 구석의 예약해둔 야키토리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귀환해 푹 자자. 

그러나 이 계획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호텔을 나서 5분 정도 걸어 오나리몬 역에서 미타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바로 히비야 역. 일단 오나리몬 역으로 걸어갈 때까지만 해도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도쿄의 12월은 영상 5~10도 정도. 서울의 쾌적인 늦가을 날씨 같았고, 길 건너로 시바공원과 조죠지(増上寺), 그리고 도쿄타워가 보이는 길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히비야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갑자기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서쪽으로 황거가 있는 히비야 공원 앞은 아무 바람막이가 없는 지형 탓인지 엄청 독한 강풍이 불어 전철을 타기 전 느꼈던 온화한 날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현상을 느끼게 했다. 가능한 한 빨리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 

그렇게 미츠비시 1호관을 찾아 들어가는데, 오호 이건 또 새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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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많이 가는 편은 아니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사실 또 아예 안 간 편도 아니다. 굳이 휴가로 일본을 갈 바엔 도쿄보다는 다른 곳이 더 좋았을 뿐이다. 

문제는 도쿄를 여러번 갔다고 해도, 매번 비슷한 곳을 맴도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도쿄를 몇번 나갔는데, 대부분 한류와 관련된 이벤트 출장이었다. 다만 패턴이 늘 비슷했다. 아카사카 미츠케 역 부근에 초대측이 주선한 숙소를 잡고(아카사카 엑셀 도큐 호텔을 몇번 갔다. 가성비가 좋아서 개인적으로 갈 때도 사용했다.

이랬던 호텔. 현재는 예약불가로 뜬다.

지금은 영업 중지 상태인데, 리뉴얼 공사중일지. 리뉴얼 되면 시설은 좋아지겠지만 예전의 가성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쉽다), 낮에 일정을 소화한 뒤 저녁에는 아카사카 뒷골목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패턴이었다. 간혹 시간이 나도 아카사카 미츠케 역에서 전철로 10여분이면 가는 신주쿠나 시부야를 갈 뿐, 다른 지역은 어쩌다 한번 가는 정도. 

내가 도쿄에서 대해 아는 것은 대개 아카사카보다 서쪽의 것들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24년에는 도쿄의 동쪽을 한번 가보자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고, 일단 6월에 도쿄를 가려고 보니 호텔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 있었다. 특히 록퐁기, 아자부, 시부야, 신주쿠, 오모테산도 지역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그렇게 서칭을 하다 보니 시나가와-신바시로 이어지는 도쿄 동쪽 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비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유는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6월에는 신바시로, 12월에는 다이몬으로 갔다. 

이것이 바로 다이몬, 대문.

다이몬이라는 지역을 특별히 잘 알거나 관심을 가진 것은 전혀 아니다. 한자로 大門이기 때문에 무슨 문이 하나 있겠구나 하는 정도. 사실 항공 루트가 나리타 공항 입출국이 아니었으면 다이몬에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리타에서 도쿄 도심으로 향하는  스카이액세스 전철은 우에노 행과 하네다 공항 행으로 크게 나뉘는데(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어쨌든 도심 동쪽으로 가는 노선은 이렇다고 볼 수 있다), 하네다 공항 행은 신바시-다이몬-시나가와를 지난다. 이 노선을 이용하면 70km가 넘는 거리를 70분 정도에 주파할 수 있어 도심에서 먼 나리타 공항의 불리함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나리타-다이몬, 스카이액세스로 75분.

 

게이세이전철 스카이액세스가 지나가는 도쿄 서부 도심의 역들. 나리타에서는 70~80분, 하네다에서는 30~40분 정도에 닿을 수 있는 접근성을 자랑한다.

 

그런 시각으로 접근하니 다이몬은 이점이 많았다. 시내 한복판이긴 하지만 지바 공원 부근이라 다소 한적하기도 하고, '큰 역'인 야마노테센의 하마마츠초 역에서 멀지 않아(도보10분) 술집이며 식당도 즐비했다. 나이가 든 뒤로, 대도시 여행을 할 때에는 도심에서 먼 신축 호텔을 숙소로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이제는 오전에 나가 대도시 명소를 구경하고, 저녁 식사 전까지 한번은 쉬어 주는 것이 좋다.  아침밥 숟가락을 놓자 마자 뛰어나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거리를 쏘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은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초로의 저질 체력 부부는 도심에 숙소를 잡고, 오후에 방에 들러 휴식을 취해야 다시 저녁식사를 하러 나갈 수 있었다(물론 아예 안 나갈 수도...).

골목으로 바로 도쿄타워가 보인다. 좋았다.

도심이라 여기저기 목적지까지 거리가 짧고, 공항 가기도 편하고, 식당이며 편의시설도 충분하고, 그러면서도 북적대지 않고 적당히 한적한.... 매우 이상적인 지역인데 아쉬운 것은 호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깔끔한 호텔이 없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방이다.

도쿄에서 3성 수준의 비즈니스 호텔은 대개 더블베드 사이즈가 폭 140cm에 맞춰져 있다. 방 넓이도 딱 그 침대가 들어갈 정도(13~15 제곱미터 정도). 침대도 침대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 답답하다.

이에 비해 트윈룸은 침대 2개가 들어가야 하니 최소 18~20 제곱미터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 조금 가격이 올라도 트윈룸을 잡으면 대략 해결되는 문제긴 한데, 이런 호텔들은 트윈룸도 있다고 표시는 되지만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공실이 없다. 눈 씻고 찾아도, 비슷한 등급의 호텔 중에는 트윈룸으로 3박 이상을 해결할 수 있는 호텔이 뜨지 않는다.

그러니까 트윈룸을 이용하려면 4성급 이상의 호텔을 선택해야 하는데, 12월 중 도쿄 도심의 4성급 호텔은 동쪽이고 서쪽이고 1박에 최하 45~50만원대.

코로나 전을 생각하면 미친 가격이다.

결국 리치몬드 호텔을 이용했는데, 아무래도 방 넓이와 침대 넓이에는 불만이 있었다. 프런트 직원에게 대체 왜 트윈룸은 예약할 수가 없느냐고 물었는데, 답을 듣고 놀랐다. "사실 저희 호텔에는 트윈룸이 3개밖에 없습니다."

12층짜리 호텔에 트윈룸이 3개밖에 없다니. 충격. 아무튼 그래서 비교적 괜찮은 가격에 적당한 2인용 호텔 방을 찾는 사람 - 계량적 기준으로 말하면 도쿄 도심권의 트윈베드룸 1박을 그나마 20~25만원 정도에 해결하려는 여행자 - 의 고민은 앞으로도 더욱 깊어질 것 같다. 코로나 전이라면 10만원대 초반에 구할 수 있었던 방인데 말이다. 140cm 폭의 침대에서 둘이 잘 수 없는 사이라면 아예 3성급 호텔의 각방을 쓰는게 4성급의 트윈룸보다 쌀 수도 있다. 

딱히 팁은 없다. 각자 알아서 잘 찾아보는 수밖에. 반대로 이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여행자들이라면, 다이몬 역과 지바공원 사이에 있는 리치몬드 호텔은 꽤 괜찮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1층에 스타벅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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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첫 완주 드라마는 <재칼의 날>. Peacock 오리지널인데 한국에서는 웨이브를 통해 공개됐다. 

The Day of the Jackal. 한때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했던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었다. 소설이 나온 것이 1971년, 첫 영화가 나온 것이 1973년. 원작을 한 줄로 요약하면 '특정 정치 단체가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 킬러를 고용하고, 어찌 어찌 해서 이 정보에 접하게 된 유럽 각국의 수사기관이 총력을 기울여 음모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다.

1962년 실제로 있었던 음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드골이 저격수에 의해 암살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진정한 걸작 스릴러. 특히 오늘날의 시선으로 본다면 핸드폰도 위성 감시도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재칼 한 마리를 지목하고 포획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재칼(암살자의 암호다)이 한 수를 두면, 수사관들도 한 수를 둔다. 바보짓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쪽 모두 최선을 다 한다. 어지간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생각하듯, 멀리 건물에 진을 치고 총 한방 쏘면 되는 저격은 없다. 포사이스의 작품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람 하나 죽이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디테일이 어마어마하다. 

총 한자루도 그냥 총이어선 안되고, 총알도 그냥 총알이어선 안된다. 뭣보다 총이 총의 형상을 갖고 있다면 아예 그 총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해야 하고, 접근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자살 테러라면 죽이는데까지만 생각해도 되겠지만, 돈을 받는 프로 킬러는 살아남아서 그 돈을 써야 한다. 당연히 현장에서 어떻게 도망칠지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뭐 비슷한 상황이 쫓는 쪽에서도 펼쳐진다. 

1973년작인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영화 <재칼의 날> 역시 스릴러의 역사에서 걸작으로 꼽기에 아쉬움이 없는 작품이다. 뭣보다 소설의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다큐멘터리 같은 건조한 연출이 빛난다. 재칼 역을 맡은 에드워드 폭스의 무표정한 연기도 일품.  (그러나 두번째 영화화라고 일컬어지는, 브루스 윌리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재칼>이 있는데, 솔직히 이 영화는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아깝다. 거론하지 않는다.)

세번째 작품인 드라마 <재칼의 날>은 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저 원작의 한줄 요약 내용을 '드골 대통령'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한방에 바꿔 놓을 IT계의 거물'로 바꿔 놓고 시작한다. 인터넷도, CT 검색대도, 프로파일러도 있는 시대다. 

이 '현대성'의 적용은 일단 성공적이다. 원작과 워낙 시대 차이가 크다 보니 그냥 가져다 쓸 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셈인데, 거의 1:1 대응처럼 원작의 흐름을 현대에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대 시청자들에게도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방어하는 쪽도 첨단 기술을 쓰다 보니 그걸 뚫고 들어가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이 드라마가 '킬러'라는 존재에 대한 포사이스의 시각을 상당히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사이스의 건조한 문체를 따라가 본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재칼의 날>에서 포사이스는 킬러를 일종의 자연재해, 질병, 혹은 사람들을 호환의 제물로 만드는 사나운 동물처럼 묘사한다. 이 존재에게는 인간의 윤리나 정의가 적용될 수 없다.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대자연의 일부인데 인간에게는 때로 해로울 수 있는 것들일 뿐이다. 요약하면, 재앙은 인간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며,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식이다. 

특히 그런 부분에서, 재칼이라기 보다는 한마리 표범 같은 에디 레드메인의 캐스팅은 탁월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킬러는 사실 판타지지만, 레드메인이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순간 설득력이 발생한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훌륭한 각색이지만 레드메인의 연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장점들이 있고, 그것만 잘 살렸더라도 <재칼의 날>은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문제는 가족. 2024년 판 <재칼의 날> 제작진은 아마도 자신들의 버전만에 있는 요소를 추가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건조한 킬러 이야기만으로 에피소드 10개의 드라마를 만드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킬러에게도 아내와 처가 식구들을 주었고, 추적의 핵심인 MI6 수사관에게도 가족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상상력의 빈곤이 시작된다. 수사관의 가족은 너무나 뻔한, 클리셰의 덩어리다. 너무 바빠서 아이를 돌봐주지 못하는 엄마, 알고보니 사람도 죽이는 아내... 여자 특공대원이나 경찰 가족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백번쯤 본 상황이 이어진다. 

킬러의 가족 쪽은 더 심한데, 일단 어떻게 해도 추적할 수 없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킬러가 고정된 거주지와 맨얼굴을 본 가족, 동네사람을 수십명 만들어 놓는다는 것부터 너무나 말이 안 되지만, '아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을 강요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상당 부분의 개연성을 포기했다. 아예 코미디를 하자는 거라면 그렇다고 이해를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드라마는 코미디가 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킬러를 인간이 아닌 재앙처럼 그리는 것이 포사이스의 놀라운 장점인데, 가족을 붙여 놓은 장면에서는 이 장점이 사라져버린다. 안타깝다.

포사이스의 원작은 물론이고 진네만의 영화도 가장 놀라운 점은, 보는 이에게 "...저럴 때 왜 저 방법을 쓰지 않아?" 라고 할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이 최선의 수들로 연결되어 있고, 만약에 등장인물이 언뜻 보이는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다. 드라마 <재칼의 날>은 이 부분에서 70% 정도는 성공하지만 30% 정도는 그냥 포기해버리는데, 포기해 버리는 부분 중 거의 모두에는 이 '가족'이 연결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 일단 따르기로 한 원작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현대에 맞춰 잘 구현해 냈다는 장점이 크기 때문에 여전히 볼만한 드라마가 됐다. 시즌2가 확정이라는데, 부디 제작진이 시즌2에서는 킬러를 가지고 홈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이상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두줄 요약: 냉혹하고 건조한 킬러의 하드보일드 걸작이 될 수 있었으나 부적절한 가족 코미디의 시도에 다소간 희생당한 억울한 작품. 그래도 재미있다. 

P.S. 이 드라마는 유럽 각국 사람들에 대한 클리셰가 꽤 등장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영국인 중심이라는 게 웃음의 포인트다. 이 작품에 따르면 프랑스인은 감정의 통제를 하지 못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독일인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인종주의자들이고, 스페인인은 프랑스인보다 더 감정 통제를 못 하고 특히 사랑에 눈이 머는데 스스로는 스마트하다고 착각하고, 헝가리인들은 야만적이고 무지한데 탐욕스럽다. 유럽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은... 진정한 돈에 환장한 것들이고, 자만심 때문에 스스로를 해친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우리' 영국인들이 이들을 이끌어 주지 않으면 큰일날 것들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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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를 꽤 기다렸다. 2023년 연말,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예고편을 보고 와 정말 할리우드는 다이내믹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미국 개봉도 4월로 늦어지고(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미국 대선과 정치적 상황이 편집 과정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12월31일에야 개봉이 이뤄졌다. 

미국은 대략 160년 전에 내전(civil war)을 겪은 나라다. 여러가지 이유로 연방을 박차고 나간 남부 연합을 상대로 대통령은 탈퇴 불가를 선언했고, 결국 전쟁이 터졌고, 연방의 승리로 미국은 다시 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를 지켜낸 대통령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워싱턴엔 미국의 신전같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영화 <시빌 워> 속 미국은 좀 다르다. 적극적으로 분열을 부추기고 독재에 나선 대통령에 맞서 나라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고,  그중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힘을 합친(사실 영화 속이니 가능한 조합이다) 서부군이 워싱턴을 위협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시작 부분. 뉴욕에 머물던 베테랑 저널리스트 리(커스틴 던스트)는 서부군의 우세 속에 워싱턴에 고립된 대통령을 인터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전쟁의 끝을 보기 전, 벙커에 숨은 독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할지가 가장 세상이 궁금해 하는 뉴스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가능만 하다면야 누군들 1945년 8월의 히틀러를 인터뷰하고 싶지 않았을까). 

 

역시 베테랑인 동료 조엘과 둘이만 갈 계획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은퇴를 앞둔 노장 새미, 그리고 종군기자를 꿈꾸는 스무살 안팎의 제시가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 

리와 제시

보고 난 느낌: 저널리스트를 앞세운 것은 탁월한 판단. 미국의 내전을 '미국인 종군기자'의 눈으로 지켜보게 한다는 시선이 좋았다. 내전을 누가 일으켰는가, 내전의 대의명분은 어느 쪽에 있는가, 누가 어떻게 전쟁 후의 세계를 건설하는가는 영화 밖에 있다. 전쟁이 일어난 뒤 벌어질 일들과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알랙스 갈랜드는 냉철하고 차분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2025년이 방금 시작했지만 올해 연말에 꼭 넣고 말 수작. 강추한다. 

(아울러 마지막 30분 정도에 걸쳐 벌어지는 시가전 장면은 지금껏 본 수많은 영화 속 교전 장면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훌륭하다. 실제 전쟁 속에 들어가 아드레날린에 중독되는 제시의 마음 속을 이해할 수 있는 명장면이 이어진다. 대강 엑스트라들에게 자동화기만 쥐어 주면 저절로 총격 액션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몇몇 영화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 영화가 시작될 때, 전쟁중인 미국은 어떤 형국인가?

미국 개봉때 만들어진 자료 중 하나가 가장 정확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략 4개 정도의 큰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고,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서부군(Western Forces)과 충성파(Loyalist States)사이의 전쟁이다. 충성파는 현 대통령과 그를 중심으로 한 미 합중국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이고, 서부군은 대통령의 독주와 헌정파괴에 대한 항의로 독립을 선언한 세력을 말한다. 

 

2. 서부군의 주력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로 되어 있는데 이건 무슨 얘긴가. 

영화 막판에 공개되는 서부군의 깃발. 미국 국기에서 50개의 별이 있어야 하는 위치에 두개의 별이 있다. 두 별은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를 의미하고, 이 깃발에 13개의 붉고 흰 줄이 있는 것은 이 깃발을 지지하는 자들이야말로 미국 독립 당시 13주의 정신, 즉 미국의 헌법과 수정헌법을 진정으로 지지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두 주의 깃발에 모두 별이 하나씩 들어 있기는 하다. 

사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하나로 힘을 합친다는 것 자체가 농담이다. 캘리포니아는 가장 확실한 민주당 지지 주고 텍사스는 공화당, 특히 트럼프 지지의 중심 거점이기 때문이다(특히 이민 문제에 있어, 멕시코 접경인 텍사스가 가장 강경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런 두 주가 힘을 합쳐 괴물 같은 독재자 대통령에게 대항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특정 정파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감독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알렉스 갈랜드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 속 대통령이 트럼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물론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3. 그럼 영화 시작 시점의 뉴욕은 어느 파벌의 소속인가?

지역적으로 동부 끝인 뉴욕은 당연히 충성파 지역이어야 하겠지만 영화 속 설정은 뉴욕의 특수성(UN 본부가 있는 국제 도시)을 감안한 중립 지역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수시로 정전되고 길에서 물 배급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영화 속에서 기자들이 머무는 호텔과 로비(기자 클럽?)는 교전지역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에서 베이루트나 사이공의 외신기자들이 머무는 호텔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런 느낌을 주려는 것이 연출 의도였을 것이다. 여기서 서로 정보 교환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속으로는 특종 경쟁을 하는 기자 집단의 아지트 같은. 

4. 뉴욕에서 워싱턴을 가는데 며칠이 걸린다고?

영화 속에서 '고속도로는 파괴되고, 교전지역을 피해 에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뉴욕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거리는 233마일(약 375km) 정도라 대략 네 시간이면 차로 주파 가능한 거리지만, 영화 속 이동 거리는 857마일, 약 1379km 정도다. 워싱턴을 포위하고 있는 최전선을 우회해 펜실베이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를 거쳐 둘러둘러 갔다는 얘기. 

서부군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다는 샬러츠빌 Charlottesville 이 워싱턴 DC 전의 최종 목적지로 되어 있는데(새미와 제시를 내려놓겠다고 리가 마음먹었던 곳), 이 샬러츠빌도 워싱턴 DC 보다 훨씬 남서쪽 아래에 있다. 

 

 

[스포일러 경고. 여기서부터는 영화를 일단 보시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사람 따라 취향도 각각이라, 일단 난 다 알아도 상관없어 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나라면 나머지는 영화 보고 와서 읽어볼 듯.]

 

5. 그래서 어느 쪽이 좋은 쪽인가 

영화 속에서 어느 편이 어떤 이념으로 누구를 죽이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두고 있지는 않다. 영화 속 리와 노엘의 집단도 어떤 지역에서는 군복 입은 쪽과, 어떤 지역에서는 군복 입은 쪽을 상대로 싸우는 민병대 같은 복장의 집단과 주로 소통한다. 그나마 이들에게 다행인 것은, 양쪽 집단 모두 저널리스트 혹은 프레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세력이건 자신들의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와 명분 쌓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일 듯. 아울러 '후세에 물려줄 자신들의 모습'을 저널리스트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은 누가 정의인지는 제작진이 구분할 의사가 없다는 쪽. 저널리스트들과 소통하는 민병대 세력이 유색인을 다소 포함하고 있고, 백악관 진입 세력을 흑인 여지휘관이 이끌고 있지만 대통령 경호실을 대표해 나온 경호원도 흑인이다. 

6. 인종차별이 영화 속 이슈인가?

노엘의 아시아인 동료들을 사살하는 백인 병사(아이러니컬하게도 커스틴 던스트의 진짜 남편인 제시 플레먼스)를 보면 인종주의는 이 전쟁의 이슈 중 하나지만, 드러난 이슈는 아닐 것 같다. 만약 이게 그렇게 부각되는 이슈였다면, 아무리 목숨 걸고 막 나가는 두 동양인 저널리스트들이라 해도, 교전지역으로 그렇게 대책없이 들어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혹은 그런 명시적인 경고도 무시할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병사가 말하는 '리얼 아메리카'는 최소한 아시아계 이민을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인종주의가 전쟁의 원인이었다기 보다는, 영화 앞부분에서 린치가 자행되는 시골 주유소의 모습처럼, 헌법이 무시되고 질서와 공권력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개개인의 편견과 본성, 총 든 자가 정의라는 원시적 폭력성이 무한대로 제약 없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삽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7. 대통령의 죽음과 조엘의 질문이 뜻하는 것은.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 관용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국민을 분열시킨 내란의 주범이며, 더 이상의 발언권을 보장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만, 조엘은 저널리스트로서, 이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의 한 주역인 대통령에게 마지막 코멘트를 요청한다. (사실 이들의 목적이 바로 전쟁의 막판에 몰린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한 진영을 이끌던 수장 치고는 참으로 비겁한 한마디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나 죽이지 말라고 해줘. Don't let them kill me." 그동안 온갖 수사로 강한 모습을 보였던 권력자가, 끝까지 측근들을 앞세워 목숨을 구걸하고 결국 이렇게 비루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다니.... 라는 갈랜드 감독의 조소가 담겨 있다. 

 

8. 리는 왜 그렇게 최후를 맞나.

몇 차례의 사건을 거치며 제시는 변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인 만큼, 아드레날린 분비로 겁도 없어진다. 리가 보기에는 '그 일'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다. 목숨도 아깝지 않다. 반면, 이런 과정을 모두 겪었을 리는 새미의 죽음을 겪은 뒤 모든 것에 염증을 느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워싱턴 진입 후에는 사진을 거의 찍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 희생은 '제발 너도 나처럼 되지 마. 무감각하게 스릴에 중독되어 판단 없이 뛰어들지마' 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설명된다. 물론 리가 쓰러진 뒤에도 제시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총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들어간다. 리의 메시지는 전해진 것일까, 아닐까. 그건 한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연 저널리즘이란 뭘까. 저널리스트란 뭘까. 전쟁터에서 누구의 편도 아닌 채, 총든 사람들의 꽁무니를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본질인가. 네 편도 내 편도 아니라는 것이 이제 의미가 있는 시대인가. 쓰러진 리의 모습이 던지는 질문들. 

(사실 쓰러진 리는 방탄조끼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어쩌면 살아남았을 수도 있겠다. 이 또한 분명치는 않다.)

9.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대체 뭘까.

누가 봐도 알 수 있듯,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는 이 꼴 날 수도 있다'는 경고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이민의 나라'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는 현실, 다양성에 대한 거부, 대놓고 지지세력에게 폭력을 선동하는 대통령, 과연 이런 불확실성이 문명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설정에 대한 해설을 의도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것도 의미가 깊다고 본다. 적의 수괴를 사살하고 만세를 부르는 서부군 병사들. 과연 이 사건 이후의 미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10년 뒤, 30년 뒤에 그 장면을 찍은 제시의 사진들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까. 폭군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승리의 상징으로 남을 지, 아니면 이유야 어쨌든 야만의 도래와 문명의 후퇴를 알리는 신호로 여겨질지. 

워싱턴에 진입한 서부군이 첫 시가전을 벌이는 장소가 하필 링컨 기념관이다. 링컨 기념관 기둥 뒤에 숨어 저항하는 수비대나, 거기에 화력을 퍼붓는 서부군이나. 링컨,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렇게..."

 

 

 P.S. '내전'은 좀 민감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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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더 많이 봤고, 물론 드라마라는 장르 특징상 1,2회 보다가 때려 친 것도 많고, 일단 완주한 것 위주로 꼽아 봤습니다. 영화나 마찬가지로 순서는 무의미. 맨 위에 있다고 1등이라는 뜻 아닙니다. 

물론, 제목에도 있지만 기준은 개취입니다. 생각해보면 좋은 작품이 꽤 많았네요. 

졸업

대치동. 학원에서 장학금까지 줘 가며 성공 사례로 잘 키운 우수한 학생이 어느날 대기업을 때려치고 대치동 일타강사가 꿈이라며 돌아온다. 대체 왜? 제일 반대한 건 그 학생을 키워 오늘날 일타강사가 되어 있는 여선생. 그리고 그 둘은... 뭐 그 뒤는 안 봐도 알 것 같겠지만, 이 시대의 드라마 장인 중 하나인 안판석은 어찌 보면 뻔한 연하남-연상녀의 러브 스토리 속에 학교, 청소년, 수업, 장래, 꿈, 교육, 이 시대의 가장 무겁다 싶은 키워드들이 생생하게 뛰어놀게 했다. 지금이라도 찾아 보시길. 려원의 재발견도 놀랍다. (tvN - 티빙)

졸업, 당신의 염치는 안녕하신지 묻는 드라마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졸업, 당신의 염치는 안녕하신지 묻는 드라마

많은 사람들이 '봉테일'을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디테일의 제왕은 단연 '안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안판석의 드라마는 10억 픽셀의 해상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 지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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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거나 나쁜 동재

'이런 드라마가 있었다고?' 하실 분이 적지 않을 듯. 이 재미있는 드라마를 모르는 건 고사하고, 심지어 동재가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지만 서글프기도 하다. 하긴 사람에 따라서는 <비밀의 숲>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마이너 드라마 취급을 받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좋거나 나쁜 동재>는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좋지도, 딱히 나쁘지도 않은 성정의 주인공이 끝까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실상 최초의 드라마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미드에 비교하자면 한국판 <Better Call Saul>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지금 바라는 건 동재2건 비숲3이건, 이 유니버스가 계속 이어지는 것 뿐. (티빙 오리지날)

 

지배종 

역시 이런 드라마는 처음 들어 보시는 분이 많을 듯. 디즈니 플러스가 반성해야 할 이유 중 하나.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한국의 신기술기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고, 그 회사의 존재가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이수연 작가의 본격 SF로는 두번째 시도라 할 수 있겠는데, 여러가지로 아쉬웠던 <그리드>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매끄러워졌다. 한효주-주지훈의 호흡도 제대로다. 그런데, 이수연 월드에서 이 정도의 주인공 커플은 사실상 처음 아닌가? (디즈니)

지배종, 새로운 한국 드라마의 또 다른 시작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지배종, 새로운 한국 드라마의 또 다른 시작

이라는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한효주 주지훈이 주인공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이 한방에 다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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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올해 가장 할 얘기가 많았던 드라마. 임진왜란 2년 뒤인 서기 1600년, 일본의 미래를 건 다이묘들간의 최종전이 펼쳐진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휘하에는 영국 항해사 출신의 사무라이가 있었다는 것 까진 실제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고, 이걸 제임스 클라벨이라는 아시아 덕후 작가가 소설로 쓰고(일본의 역사적 인물들은 모두 이름을 고쳤다), 그걸 미국 제작자들이 1980년에 만들어 히트하고, 2024년에 다시 만들어 또 히트시켰다. 디즈니 플러스 사상 최고 히트작이라나. 

백인들이 쓴 얘기다 보니 영국인 주인공의 눈으로 센고쿠시대의 끝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1980년과 2024년은 비교할 수 없는 시대인 것 같지만 내용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은 거의 차이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 드라마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워낙 스토리 자체가 흥미롭고, 당대에 할 수 없었던 화려한 미술과 특수효과가 놀라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아무래도 1980년판의 배우들보다 못한 느낌이. 물론 개취. (디즈니)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디즈니 플러스의 10부작 . 드라마 한편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 작품도 정말 오랜만이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배경은 서기 1600년의 일본. 타이코(태합) 나카야마는 1598년 사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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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상을 휩쓴 쇼군, 1980 vs 2024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에미상을 휩쓴 쇼군, 1980 vs 2024

에미상 18개 부문 수상. 디즈니 플러스 이 엄청난 기록으로 미국 TV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쇼군 이야기는 지난번에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나오자마자 보지는 않았다. 이 드라마를 늦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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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태양은 가득히>에서 <리플리>까지, 이미 두 차례의 굵직한 영화로 친숙해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이번엔 흑백 드라마로 만들었다. 왜 하필 흑백인가, 왜 하필 이번 주인공은 왜 이렇게 늙고 못생겼나 싶기도 하지만 단 한회만 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사기에는 별 소질 없는 리플리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서사. 1950 혹은 60년대 이탈리아 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도 일품. 2024년의 드라마로 단 한편을 찍으라면 여기에 투표할 것 같다. (넷플릭스)

리플리, 흑백 영상이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리플리, 흑백 영상이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처음 공개됐을 무렵 페이스북에 쓴 글을 옮겨왔습니다.] 를 보다가 에 눈길이 갔다. 이미 세계적인 스타를 써서 두번이나 영화화된 작품. 그걸 심지어 드라마로? 결과 다 아는 얘기로 8부작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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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여왕

한국에도 여자 레슬링이란 종목이 있기는 했지만, 일본만큼 뭔가 제대로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 드라마는 1980년대 초, 일세를 풍미했던 악역 전문 레슬러에 초점을 맞춘다. <극악여왕>을 먼저 보고 <정년이>를 보게 되니 어찌나 그 정서가 비슷한지. '그리 팬시하지 않았던 과거의 유행을 오늘날의 시선에 맞춰 팬시하게 바꿔놓은 무대'라는게 2024년의 트렌드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나 공들여 찍은 액션 신이 일품인 반면, 그렇게 공들여 찍은 장면을 차마 편집할 수 없어 너무 길어진 액션신이 단점이기도 한 묘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강추. 개인적으론 오랜만에 보게 된 카라타 에리카도 반갑기 그지없네.  (넷플릭스)

극악여왕, 과거를 살려내되 오늘날의 감각으로.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극악여왕, 과거를 살려내되 오늘날의 감각으로.

한국에도 여자 레슬링이 있었다. TV에서 김일 천규덕의 레슬링을 중계방송하던 시절, 오프닝으로 여자 경기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선 여자 경기가 오프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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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2

1편을 추천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히려 2편에서 이야기가 더 진화했다. 워싱턴의 정치 구도 속에서, 직업 외교관이면서 영국 전문가인 남편을 제치고 주영 미국 대사가 된 주인공.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이라는 '영원한 같은 편'이면서 '어딘가 그래도 낯선' 나라를 맡아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일품이다. 물론 드라마인 만큼 이 안에서 벌어지는 내용을 실제라고 오해해선 안되겠지만, 충분히 몰입할 만한 전문성이 담긴 대본과, 그걸 소화해 내는 배우들에 대한 존경이 앞선다.  특히 주인공 케리 러셀의 캐릭터 창조가 압권이고, 루퍼스 시웰을 비롯한 영국 배우들이 탄탄하다. (넷플릭스)

와이어트 어프와 카우보이 전쟁

미국 서부의 전설 와이어트 어프는 유명한 'OK목장의 결투' 사건으로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총잡이가 되는데, 사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이 결투로 악을 물리친 보안관은 오히려 공권력으로 시민을 압박한 악당으로 몰리고, 그 정서의 배경에는 남북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지역감정이 있고, 대륙을 철도로 관통하려는 자본가들의 동기가 있다. 

거의 정석적인 선과 악 대결 스토리로만 알려졌던 이야기에서 이런 중층적인 분석이 나오다니.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오가는 형식이 너무나 적절했던 걸작. (넷플릭스)

와이어트 어프, OK 목장은 시작이었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와이어트 어프, OK 목장은 시작이었다.

'OK목장'이란 이름은 어린 시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 우스꽝스런 이름의 목장이 실제로 미국 아리조나주 툼스톤에 있었고, 와이어트 어프라는 유명한 보안관이 전설을 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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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영국 MI5에는 007만 있는게 아니다. 거기서 일 못하는 걸로 찍힌 요원들은 시내 슬럼가의 허술한 사무실에서, 도저히 '본사'가 처리할 수 없는 허드렛일들을 수행하게 된다(설마 실제로 이런 건 아니겠지). 그 부서로 가 있는 루저들을 '본사'에서는 슬로 호시스, 즉 느린 말이라고 부른다. 

그 느린 말들의 보스가 게리 올드먼. 물론 이게 드라마다 보니 너무나 당연히, 그 느린 말들이 수트를 빼입은 본사 요원들이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결해 낸다. 왜? 리더가 너무나 유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느린 말들이 정말로 무능하다기 보다는 너무나 개성이 강하다 보니 본사의 딱딱한 관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거였기 때문에. 긴 말이 필요 없다. 문제는 한번 발을 들이면 시즌5까지 도저히 발을 뺄수 없다는 것. 역시 만두는 중국에서, 소프라노는 발트해 연안에서, 그리고 스파이 드라마는 영국에서 찾아야 제대로다. (애플티비)

가족계획

지난해의 <소년시대>에 이어 쿠팡도 연말에 한칼을 보여줬다. 김곡/김선 콤비의 새 작품.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두 10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인데 - 사실 진짜 가족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 각 개인의 개인기가 어지간한 나라 하나는 말아먹을만큼 무시무시하다. 당연히 조용히 살고 싶은 가족인데, 하필 정착한 지역에도 만만찮은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다. 정의구현 같은 걸 하고 싶은게 아닌데 강제로 정의구현을 하게 되는 이야기야말로 이 시대의 정서.

작품 특성상 잔혹한 장면이 적잖게 등장하지만, 그만치 웃긴다. 올해 가장 시원한 드라마. 탄산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 (쿠팡)

 

그리고 그밖에 꼭 언급해야 할 드라마들

중간에 흐름이 좀 요상했다는 느낌이 있지만 역시 <정년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아직 안 끝나 뭐라 할 수 없지만 <옥씨부인전>도 그 줄에 충분히 들어설만 한 작품. 

넷플릭스 드라마로는 위에 든 세 편 외에는 사실 취향인 작품이 없었고, <삼체>가 볼만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추천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시즌2는 없을테니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으시는게 좋을지도. 

넷플릭스가 양으로 민다면 애플티비는 질로 앞선다는 세평이 있는데, 물론 개인적인 취향으로 애플티비는 너무 무거운 작품이 많다는 게 약점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테드 라소 3>(이 얘기를 이제 하는 걸 보면 애플티비를 한동안 외면했다는 걸 눈치채실듯)는 역시 걸작이었고, 원제가 <Shrink> 인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가 딱 취향이었다. 물론 케이트 블랜칫의 <디스클레이머>도 딱 취향은 아니었지만 볼만했다. 

(아마존 프라임은 2025년쯤에나 한번 다시 살려 볼 생각)

 

그리고 드라마 아닌 시리즈들도 한번 언급하자면,

더 커뮤니티

이런 소재로 이런 신선한 리얼리티 쇼를 만들 수 있다니. 이 쇼를 아직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길게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주 시민의 자격이 없다. 벤자민 화이팅. 

곽튜브의 기사식당

왜 그렇게 여행 프로그램이 많은데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적을까. 역시 이 시대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정성'을 설명해주는 교과서. 

흑백요리사

설명이 필요 없는 2024년의 빅 콘텐트. 물론 이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외식업계나 고급 레스토랑업계가 살아날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좀 과했지만,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던 프로그램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흑백요리사, 콜로세움을 허물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흑백요리사, 콜로세움을 허물다

수만개의 품평이 올라오고 있는 . 굳이 말을 보태기보다 개인 기록용으로 남김.[주: 지난 9월28일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늦었지만 옮겨 봅니다. 당시의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 사실 드라마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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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려 고민하시는 분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1년 동안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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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공개됐을 무렵 페이스북에 쓴 글을 옮겨왔습니다.]
 
<삼체>를 보다가 <리플리>에 눈길이 갔다. 이미 세계적인 스타를 써서 두번이나 영화화된 작품. 그걸 심지어 드라마로? 결과 다 아는 얘기로 8부작이나 할 얘기가 있겠어?
 
하지만 감독과 각본을 겸한 스티븐 제일런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오스카 각본상/각색상 후보에 5회나 올랐던(1회 수상, 쉰들러 리스트) 대가의 말씀인데 누가 감히 토를 달았을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8회를 넋놓고 정주행했다.
 
 
앤드루 스코트는 개인적으로 <셜록>의 모리어티 교수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은 배우. 그가 리플리 역을 하기에는 너무 늙고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한데, 사실 리플리 역을 했던 배우들 중에는 존 말코비치도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셨으면.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알랭 들롱의 그림자가 워낙 커서 그렇지, 솔직히 맷 데이먼도 그닥 꽃미남 계열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제작진도 18년 차이 나는 다코타 패닝과의 로맨스는 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이번 작품에서 이 부분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마지라는 캐릭터가 리플리가 디키에게 갖는 동경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부분은 좀 아쉬운데, 그 밖에도 앤드루 스코트의 리플리는 보여줄 것이 많았다.
 
전작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이 작품의 리플리는 사기꾼의 재능이 매우 떨어진다. 능력보다는 동기가 앞서고, 충동적인 시도가 겹쳐지다 보니 스스로도 내릴 기회를 놓친 비극의 주인공이다. 일단 사고를 쳐 놓고 고민하는 리플리가 신선했다.
 
옆엣분은 이탈리아의 멋진 풍광이 흑백 영상에 갇힌 게 매우 유감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개인적으로는 펠리니와 데 시카의 이탈리아가 다시 살아오는 듯한 느낌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뭣보다 계속 인용되는 카라밧지오. 화면의 미학적으로도 근래 보기힘든 걸작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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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목장'이란 이름은 어린 시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 우스꽝스런 이름의 목장이 실제로 미국 아리조나주 툼스톤에 있었고, 와이어트 어프라는 유명한 보안관이 전설을 남긴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란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결투라고 썼지만, 사실 진짜 결투는 아니었다. 카우보이와 보안관이 등을 지고 열 걸음을 걸어가 총을 쏘거나 하는 사건은 OK목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영화 수입업자들은 Gunfight 라는 말을 '총격전'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손님을 쫓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정말 볼게 하나도 없는 넷플릭스에서 <와이어트 어프와 카우보이 전쟁>을 근 한달에 걸쳐 봤다. 1881년 10월26일, 툼스톤의 보안관보로 일하던 어프 3형제와 와이어트의 친구 닥 할리데이는 카우보이 갱 두목인 아이크 클린턴과 그 무리들에게 추방 명령을 집행하러 OK목장으로 향했다.
 
반대로 아이크 패거리는 명령에 따르긴커녕 어프 형제를 손보러 시내로 향하던 길. 양쪽 모두 무장중이었으로 마주치자 바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프 쪽이 4:6으로 불리했지만, 30초만에 아이크 쪽 3명이 사살됐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어프 쪽은 두명이 총에 맞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완승.
 
이것이 잘 알려진 'OK목장의 결투'의 내용인데, 알고 보니 이 사건은 넷플릭스 6부작 다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 유명한 총격전 이후, 와이어트 어프는 도박을 좋아하는 보안관에서 자경단(posse) 리더로 변신하는 기구한 운명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엔 남북전쟁의 상처인 '남북감정', JP모건의 사업 확장, 무능한 대통령의 대처 같은 복합적인 상황이 있었다. 흥미진진.
 
드라마와 사학자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다큐드라마 형식. 한때 서부극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라면 중간에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와이어트 어프 역을 맡은 팀 펠링햄은 어쩌면 차세대 비고 모텐슨이 될 수도 있을듯.
 
 
이건 실제 와이어트 어프.

 

그리고 이게 바로 전설의 영화 <OK목장의 결투>.

 

만년의 와이어트 어프. 초기 할리우드 서부극에서 '기술고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림사 고승이 무술영화의 무술감독을 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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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봉테일'을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디테일의 제왕은 단연 '안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안판석의 드라마는 10억 픽셀의 해상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졸업>. 지나가는 버스의 불빛, 차창에 비친 그림자, 밤거리 편의점 창을 통해 보이는 삼각 김밥 하나도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미경으로 보던 세상이 어느 한 순간, 드론에서 보는 지형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안판석의 드라마다.
 
이제 4회인 <졸업>은 '대치동 학원가를 무대로 한 러브스토리'로 곱게 포장됐지만, 이미 공교육과 사교육의 자리 싸움으로 논란을 겪고 있다. 물론 또 그렇게 삭막한 이야기만은 절대 아닌 것이, 위하준의 오랜 동경이 필터가 되어 정려원을 바라보는 장면, '작가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는 국어교육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같은 문제제기에선 은근히 가슴이 뛴다.
 
단지 이 치열한 세계, '고1 국어 문제 하나의 답이 한개냐 두개냐'가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처럼 여겨지는 세계. 이 세계를 소파에 기대 편안히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육아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스친다. 혹시 저 현장 당사자들에겐 이 드라마가 지옥도로 보이는 것은 아닐지. 아무튼 강추. #졸업
 
P.S. 정려원과 위하준이 소속된 학원 원장 이름이 '현탁'인 것은 혹시 <스카이캐슬>에 대한 오마주인 것인가 잠시 생각해보기도. (조현탁/안판석 감독은 절친한 선후배 사이)
P.S.2. 제목이 <졸업>인데, 어, 이 노래는 사이먼 앤 가펑클인가...? 응 아니야. 신곡이야. ㅎㅎ

[그리고 <졸업>에 대해서는 끝나고 한번 더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했습니다.]

 

홍콩 누아르 전성기에 중국어 영화들을 보다 보면 수시로 등장하는 욕 중에 "왕빠다!"가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일까 궁금해 했는데, 한자로 忘八蛋, 즉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여덟가지 핵심도덕(예의염치 효제충신)을 모두 까먹은 버러지같은 놈이란 뜻이었다. 제 발음은 '왕바단'.
 
간밤에 끝난 안판석의 <졸업>은 바로 염치와 망각에 대한 드라마였다. 우리는 얼마나 저열해질수 있고, 얼마나 염치 없는 삶에 뻔뻔해질수 있는가. 얼마나 어른의 삶이란 핑계로, 내 몸의 편안함을 위해 내 마음 따위는 가볍게 쓰레기통에 쳐박을수 있는가. 위선도 가식도 귀찮다며 다 떨궈 낸 욕심 가득한 얼굴로 너는 세상을 모른다고 말할 셈인가.
 
<졸업> 속 주요 인물들은 서로 염치를 깨닫게 해주고,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아차린다. 비록 드라마지만 매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라서 다행'이 아니라서 더 다행이란 생각. 두달 내내 정주행하면서 행복했다.
 
 

 
P.S.수많은 명배우들. 정려원과 김정영 배우의 재발견. 진짜 선생님 같은 김송일 배우를 보면서 자꾸 페친 한분이 떠올라 내내 혼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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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여자 레슬링이 있었다. TV에서 김일 천규덕의 레슬링을 중계방송하던 시절, 오프닝으로 여자 경기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선 여자 경기가 오프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희귀취향의 왕국 일본에선 여자 프로레슬링이 자립 가능한 규모의 영역으로 꽤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렸다는걸 이번에 알았다. 5부작 <극악여왕>은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들의 치열한 라이벌 시기를 그린 드라마다.
 
1980년대 일본 여성 프로레슬링에는 정도를 걷는 '크래쉬걸스'와 닥치는대로 반칙을 일삼는 악역 '극악동맹'이 있었는데 크래쉬 걸스의 리더격인 나가요 치구사는 숏헤어가 어울리는 미소년스러운 외모로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의 인기를 자랑했다.
 
드라마 속 말고 실제의 크래쉬걸스. 왼쪽이 아마조네스 아스카, 오른쪽이 나가요 치구사.
나가요 치구사가 역경을 딛고 챔피언에도 오르고, 여자 레슬러들을 규합해 경기단체도 만들고 업계의 큰언니로 성공하는 이야기(실화다) 였다면 그걸로 한폭의 드라마가 나왔겠는데, 뜻밖에도 이 <극악여왕>은 제목 그대로 극악동맹의 리더, 90kg대에 가부끼 분장을 즐기던 덤프 마츠모토가 주인공이다.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그런데도(혹은 그래서) 드라마는 재미있다. 핵심 질문은 "덤프 마츠모토는 왜 악역 여왕이 될수밖에 없었나'. 이 사연을 꽤 그럴듯하게 풀어낸다. 덤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크러쉬 걸스의 나가요 치구사가 아닌, 흉악무도한 덤프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엔딩도 자못 감동적.
(물론 드라마상의 '사건'들은 거의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 위주로 진행되지만, 내용은 거의 허구라고. 예를들어 무대에서 덤프가 치구사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원인이나 동기는..)
 
카라타 에리카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최근의 나가요 치구사.
이 드라마의 강점 중엔 나가요 치구사 역을 맡은 배우가 카라타 에리카라는 점을 빼놓을수 없다.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한다면, 맞다. 몇해전 LG폰 광고에 나와서 세상을 술렁이게 했던 바로 그 배우다. 레슬러 연기를 위해 10KG를 불렸다는데도 여전히 가냘프고, 여전히 예쁘다.
사실 <극악여왕>도 일본 드라마 특유의 느린 전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특히 유혈낭자한 레슬링 경기 장면이 너무 자주 나오고 너무 긴데, 보다 보면 약간은 면죄부를 줄만하단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여배우들이 수없이 잔부상을 겪어가며(안 봐도 느껴진다) 애써 촬영한 레슬링 장면(심지어 퀄리티도 높다)을 그냥 편집해버리기는 너무나 힘들었을 것 같다. 저런 장면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상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 근데 아무래도 취향을 꽤 탈 거같다.
 
[여자 프로레슬링은 일본에서는 지금도 꽤 인기를 얻고 있다고. 이 드라마를 보시면 어쩐지 '정년이'가 생각날수도...]
 
당시의 실제 경기 장면. 드라마와 비교해보시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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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개의 품평이 올라오고 있는 <흑백요리사>. 굳이 말을 보태기보다 개인 기록용으로 남김.
[주: 지난 9월28일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늦었지만 옮겨 봅니다. 당시의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 사실 드라마가 아닌데 딱히 이런 종류의 글을 올려 놓을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기도 애매한 것 같아 이 페이지로.]
 
 
1. 요리를 주제로 한 서바이벌 게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심사위원의 날카롭고 정리된 평가가 처음도 아니고, 처음인 건 압도적인 규모. <피지컬100>과 <더 인플루언서>를 넘어 이제 예능은 실내체육관급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시대로.
 
2. 흑과 백. 1층과 2층. 이보다 시대정신에 맞는 구도는 없을 듯. 스튜디오 슬램은 정말 대단하다. 이미 <슈가맨> 시리즈와 <싱어게인>으로 얻은 언더독 스토리텔링과 일반인 판정의 노하우가 요리에 덧씌워졌다.
 
3. 1층에서 흑셰프들이 싸울 때 스튜디오는 콜로세움 같았다. 검투사들이 거친 운동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울때 객석의 로마 귀족들은 흰 토가를 나부끼며, 꿀과 포도를 맛보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여기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관객들은 화면 밖에 있었고, 이들은 우아하게 관전하던 귀족들의 흰 토가가 피와 먼지로 더럽혀지는 모습을 보며 열광한다.
 
4. 사실 공정한 심사란 환상이다. 특히 미각의 공정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자기 미각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권위(ex. 미슐랭)에 기대고, 남의 눈치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맛을 상찬하는 일은 너무 흔하다. 어쨌든 <흑백요리사>는 그 안에서 성공적인 권위와 승복을 만들어냈다. 일부 시청자들은 불만일수도 있겠으나, 저 100명의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백종원/안성재라는 이름을, 그 심사를 받아들이고 출연을 결심한 상태에서 이미 <흑백요리사>는 성공한 셈이다.
 
5. 누가 이익인가. 쉽게 생각하면 잃을게 많은 백셰프들이 손해일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예능에서 이들을 '한번 대결해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존경의 대상으로 예우해 줄 것인가. 그 업장들의 예약 리스트만 봐도 모두 위너.
 
6. 서울의 파인 다이닝 시장이 이 프로그램으로 살아날까 하는 건 너무 지나친 기대. 한국인에게 파인 다이닝은 아직 '정말 맛있는 걸 먹으러'가는 곳이 아니라 '특별한 자리'를 위해 가는 곳이다. 이게 바뀌려면 서울이 더 글로벌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비교의 기준이 도쿄, 홍콩, 싱가포르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파인 다이닝 신이 빈약해 보이는 것은 한국의 특급 호텔 라인업이 빈약해 보이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은 서울에 진정한 5성급 호텔이 몇이나 되는지, 왜 그런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물론,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도 아니고, 이게 잘못됐다는 말도 아니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7. 어찌됐건 예능은 예능. 아무리 재미있어도 <흑백요리사>가 보여주는 맛에 과몰입은 금물이다. 실제 가보니 실망했다면 그건 당신 책임. 리조또가 알덴테건 죽이건, 가장 소중한건 내 취향과 기준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은 최현석 셰프의 명언. "주방에서 셰프보다 높은게 딱 하나 있죠. 재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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