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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란 영화가 개봉하니 링컨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조명해 보자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달의 문화인물'이라는 제목의 아티클을 '매거진 M'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이 '문화인물'이긴 합니다만, 정작 내용은 '문화 속에 비쳐 그려진 유명인물의 실상' 쪽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쓰려니 너무 길어서 아마도 편집 측에서 그냥 '문화 인물'이라고 뭉뚱그려 묘사한 듯 합니다.^

 

아무튼 책에 나온 순서와는 달리 블로그에는 '링컨' 편부터 소개합니다. 앞선 사람들이 약간 타이밍이 안 맞기 때문이죠. 물론 그 사람들도 이쪽으로 모셔올 계획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1865 1,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느 전장에서 말단 병사들과 격의 없이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병사의 입에서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가 흘러 나오자 병사들은 앞다퉈 다음 문장을 줄줄 외운다. 소집 나팔이 울리고, 부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흑인 병사도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의 첫 장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게티스버그 연설은 1863 11월의 일이니 시간적으론 가능했겠지만 역사가들은 고개를 흔든다. 거의 모든 미국인이 이 연설문을 줄줄 외우게 된 건 링컨이 죽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니까 ’.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2.12~1865.4.15)은 가장 유명한 지구인 중 한 사람이다. 그 지명도에 걸맞게 대중 문화 속에서도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수많은 전기 영화가 일찌감치 만들어졌고(결정판은 존 포드의 1939년작 젊은 링컨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류의 영화에선 미국을 대표하는 위인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최근엔 뱀파이어(‘링컨:뱀파이어 헌터’)나 좀비(‘링컨 VS 좀비’)와 싸우는 히어로로 변신하기도 했다.

 

대중의 속성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삼국지의 영웅 관우는 사후 관성대제라는 이름의 신으로 승격됐고, 천년 넘게 악귀 퇴치와 재복 기원은 물론 무좀 치료까지 담당하고 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친근감이 전쟁의 승리나 노예 해방 같은 거대한 업적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통나무집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의 가난, 독학으로 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에 이른 입지전, 비극적인 최후 까지 성공 신화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 여기에 유머 감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패션에 둔감한 촌사람의 이미지를 스스로 비웃는 자학 개그의 달인이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그의 유머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날 국무장관 에드먼드 스탠튼이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전선에서 늘 술에 취해 있다고 험담을 했다. 링컨의 대답. “그 양반이 마시는 위스키 상표를 좀 알아 오게.” “왜요?” “다른 장군들에게도 돌리려고.”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술 좀 마시는게 대수냐는 식이다.

 

고지식한 스탠튼은 이런 그가 못마땅했다. “각하, 왜 늘 농담만 하십니까.” 대답은 그것도 안 하면 난 당장 죽네.” 링컨의 가족을 살펴보면 이런 심정도 이해가 간다. 네 아이 중 셋이 미성년일 때 죽었고 장남 로버트만 성인이 됐다(영화에서 조셉 고든 래빗이 연기한 로버트는 뒷날 미국 육군 장관을 지냈다). 아내 메리 토드는 평생 강한 집착과 낭비벽으로 링컨을 괴롭혔고, 링컨 사후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링컨 본인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영화 속 링컨은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미국 영토 내에서 모든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수정헌법 13조의 의회 통과를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다. 역사가들로부터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대목이다. ‘노예 해방은 영화 링컨의 시점 보다 2년 전(1863 1)에 링컨 자신에 의해 이미 실현됐고, 수정헌법 13조의 통과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영화는 영화다. 그리고 스필버그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링컨 같은 인물 조차도 목적 달성을 위해선 다소 치사해 보이는 정치적 행위를 불사해야 했다는 점이다. 측근을 이용해 은밀하게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의원들에게 남부 연합의 평화 사절단의 방문 여부에 대해 공식적인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뇌물까지 사용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면서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아마도 구체적인 정책의 실현 과정에 무관심한 이상주의자들, 타이핑만 하면 저절로 멋진 나라가 만들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교육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P.S. 많은 한국인들은 링컨이 아주 먼 옛날, 아무 상관 없는 먼 나라에서 위대한 일을 하다가 비명에 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시대에 이미 우리는 미국과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링컨이 사망하고 16개월 뒤인 1866 8, 대동강 입구에 제너럴 셔먼 호라는 미국 상선이 나타난다. 이 배는 조선 관민과의 시비 끝에 불태워지는 운명을 맞는다.

 

배 이름의 셔먼 장군은 바로 링컨을 도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윌리엄 T 셔먼 장군이다. 미국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1871년 강화도로 함대를 보낸다. 이것이 신미양요. 만약 링컨이 암살당하지 않고 3선에 성공했다면, 위대한 대통령 링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을 침략한 대통령으로 기록됐을 수도 있었다. 참고로 신미양요를 일으킨 대통령은 위에도 나오는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였다. (끝)

 

 

 

 

 

역사가 길지 않은 미국에서 링컨은 세종대왕이고, 태종무열왕이고, 광개토대왕입니다.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의 게티스버스 연설은 미국 초등학생들도 외우는 고전이고, 링컨 메모리얼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대표하는 조형물 중 하나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실 그렇게 옛날 사람도 아닙니다. 링컨에게 "여자들은 턱수염 기른 남자를 좋아하는데 아저씨도 길러보면 어때요?"라는 편지를 보내 턱수염을 기르게 한 전설의 소녀 그레이스 베델(Grace Bedell)은 1936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생생한 인물일 수 밖에요.

 

링컨의 농담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만도 수백가지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용모에 대한 자학 개그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내가 시골 살 때 어떤 놈이 총을 들고 눈을 부라리면서 술집에 들어와 '여기 나보다 못생긴 놈이 있으면 쏴 죽여 버리겠어!'라고 소리치며 나를 딱 바라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보다 못생겼다면 차라리 내가 내 머리를 쏘겠다!' 라고."

 

네. 딱 웃기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의 개그가 링컨의 특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링컨을 목격한 사람의 기록. "코트는 흉측하게 길고, 소매는 너무 짧고, 바지 한 쪽은 괜찮은데 다른 한 쪽은 양말에서 적어도 2인치는 모자라는 위치까지밖에 내려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극악의 패션 센스입니다.

 

 

 

 

영화 '링컨'은 좀 지루하다는 점만 빼면 매우 훌륭한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를 완성도보다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숭고하고 거룩한 메시지'에 따라 평가하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는 극찬을 받아도 부족할 영화죠. 이런 영화를 따로 떼어 성화(聖畵) 정도로 구분해야 할지도.

다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예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864년 11월, 링컨은 미국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지 B 맥클렐런(McClellan)에 압승을 거두고 연임에 성공합니다(물론 우리가 흔히 링컨을 16대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재선을 감안하지 않고 사람 머릿수 대로 센 것입니다). '남부의 반란'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이었고, 모든 국민 여론은 링컨에 대한 절대 지지로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업고 어떤 정책이든 통과시킬 수 있는 상황.

 

(영화에서는) 이 시기의 링컨은 이미 노예해방 선언(1863.1)을 해 놓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남부 각 주가 법원을 앞세워 이 노예 해방 조치에 대한 위헌 심판같은 것을 냈을 때, 소위 '법적인 판단'에 의해 이미 해방된 노예들이 다시 농장주들의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예, 개헌을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수정헌법 13조'. 내용은 아주 짧고 간단합니다.

 

Section 1. Neither slavery nor involuntary servitude, except as a punishment for crime whereof the party shall have been duly convicted, shall exist within the United States, or any place subject to their jurisdiction.

Section 2. Congress shall have power to enforce this article by appropriate legislation

 

'그러니까 미국의 주권이 닿는 지역에서 모든 노예 제도와 비 자발적 노동 강요는,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닌 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헌법으로 규정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듯 보이는 훌륭한 정책에도 반발은 만만찮았고, 링컨은 이 수정헌법의 의회 통과를 위해 갖가지 꼼수를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부에서는 때마침 평화 사절을 보냅니다. 북부의 입장은 '항복'이지만 남부에서는 끝까지 '평화 협상'을 요구하고, 즉각적인 항복이 있기 위해서는 '수정헌법의 통과'를 없던 일로 해 달라는 조건이 첨부됩니다.

 

여기서 링컨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죠. 며칠이라도 전쟁을 더 빨리 끝내 무고한 병사들의 희생을 막을 것이냐, 아니면 두고 두고 역사에 남을 옳은 일을 위해 얼마간 더 희생을 감수할 것이냐.

 

(이것이 영화 '링컨'의 내용. 이런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분들은 도대체 저게 뭔 소리냐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역사가들은 영화 '링컨'의 이런 내용들이 꽤나 과장되어 있다고 주장한답니다. 의회 통과를 위한 노력은 꽤 사실적인 것 같으나 일단 수정헌법 자체가 저 시점에선 그리 심각한 얘기가 아니었고, 따라서 남부 평화협상단의 요구 같은 것도 당시로선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는 주장들.) 

 

하지만 그런 요소들만 극복하면 대단히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당연하지. 누가 만든 영환데). 그리고 연기의 신(한때 연애의 신이기도 했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소름이 쪽쪽 끼칩니다. 톰 행크스가 해내지 못한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이 루이스에게 돌아간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링컨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존 포드의 영화 '영 링컨(바로 위 사진. 헨리 폰다)' 까지만 해도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 역시 위대한 대통령을 잘 보필한 위대한 퍼스트레이디 정도로 미화됐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본래 명문가의 딸인 메리 토드는 오로지 '영부인'이 되기 위해 링컨과 결혼했고, 링컨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채찍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아이들과 남편을 잃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정신병이 발병하고, 장남 로버트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 로버트도 '링컨의 아들'이란 후광을 업고 공화당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정치인으로 손꼽힌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에 반드시 따라오는 말, '링컨 아들이 왜 저 모양이야?'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아무튼 영화 '링컨'이 주는 메시지는 자명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숭고한 이상을 관철시킬 수는 없다는 것. 일찌기 정조의 한글 서간이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반대파인 노론 대신들과 주고 받은 서신에서 때로는 욕을 하고, 때로는 어르고 협박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인간적인 풍모'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죠.

 

위대한 성군으로 불리는 정조도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늘 입으로 도학을 주장하며 높은 이념으로 아랫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죠. 제대로 된 정치란, 곁에서 보고 '이건 잘 했고, 이건 잘못 했고' 하는 식으로 훈수나 늘어놓는 평론가들에 의해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는 훌륭하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제너럴 셔먼 호의 '제네럴 셔먼'이 그 셔먼 장군이라는 건 쓴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링컨이 3선만 했다면 '조선의 침략자 링컨'이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제너럴 셔먼 호 격침 사건을 주도했다는 우상화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P.S. 마지막 사진은 신미양요 때 미군에 의해 탈취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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