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민했다. 열편의 영화를 꼽을 수 있을까. 올해 그렇게 괜찮은 영화를 많이 봤나? 영화 자체를 많이 보지 못했다. 대신 드라마 시리즈는 평소보다 더 본 것 같기도 한데, 극장에 간 횟수가 매우 줄어들었고, 솔직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많이 보지 못했다. 특히 한국 영화는, 만드시는 분들께 죄송하지만... 좀 그랬다.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 Perfect Days
대체 왜 저 남자는 아무 불만 없다는 표정으로 도시의 변기를 닦고 있을까. 평온하고 소박한, 아무 욕심도 없어 보이는 한 남자의 일상 속에 얼마나 큰 폭풍우가 감춰져 있는지 보여준 걸작. 야쿠쇼 코지라는 훌륭한 배우의 힘으로 이야기는 절로 설득력을 얻었다. 속죄, 욕망, 번뇌 같은 단어들이 햇살처럼 마음에 박힌다.
퍼펙트 데이즈, 속죄와 구원의 우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추락의 해부(쥐스틴 트리에) Anatomie d'une chute
눈 덮인 산 속, 추락한 남자의 시체. 과연 범인은 아내인가, 아닌가. 미스터리가 형성될 수 없을 것 같은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미스터리. 여자가 무죄라면, 과연 왜 무죄인가. 죄의 유무는 범행 여부에 따라서만 결정되어야 하는가. 도저히 공이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페널리 에리어 안에서 절묘하게 슈팅을 뽑아내는 쥐스틴 트리에의 솜씨가 놀랍다.
추락의 해부,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퓨리오사 (조지 밀러) Furiosa: A Mad Max Saga
전작 <매드맥스4>로 사령관 퓨리오사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조지 밀러 옹의 노익장이 빛나는 또 한편의 걸작. <매드맥스4>가 워낙 기대치를 높여 놓은 탓에 좀 더 박한 평을 얻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퓨리오사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빨간 내복 사가>도 혹시 볼 수 있으면 어떨까.
퓨리오사, 남신들의 성전을 박살내는 여신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듄2 (드니 빌뇌브) Dune: Part Two
이 시대의 완벽주의자 드니 빌뇌브의 야망이 빚어낸 결정체. 물론 1편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OTT 시대의 관객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알려주기엔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원작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부디 이 듄 시리즈도 조금만 더 21세기의 관객들도 만족할 수 있도록 서사에 좀 더 신경을 써 주길. 1편도 그랬지만 2편의 주인공은 확실히 '벌레'.
듄2, 장대한 빛과 소리의 걸작, 그러나 아쉬운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선 글레이저) The Zone of Interest
아우슈비츠의 담벼락 밖.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인간이기를 선택한 자들은 떠나고, 일신의 안위를 선택한 자들은 남아서 즐긴 곳. 누군가는 이런 고발에 왜 은유가 필요하냐고 비판했지만,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은 다큐멘터리가 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는 거울을 볼 줄 몰랐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챌린저스 (루카 구아다니노) Challengers
가장 중요한 것은 승부였나, 사랑이었나, 혹은 그 둘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나. 두 명의 하이틴 테니스 유망주가 어느날 여신같은 주니어 테니스 스타를 만났고, 둘 다 사랑에 빠졌다. 여신은 두 남자에게 이기는 자를 사랑하겠다고 선언했고, 그 뒤로 대략 15년에 걸쳐 두 남자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치열한 대결을 펼친다. 나의 가장 치명적인 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고전적인 승부 속의 은유. 이걸 청춘과 패션으로 녹여낸 구아다니노의 솜씨가 놀랍다.
이소룡들 (데이빗 그레고리) Enter the Clones of Bruce
한글 제목은 직관적이지만 영어 제목은 여러가지 주변 정보를 알아야 웃을 수 있다. 그만큼 이 영화가 이 리스트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제목의 '개취'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영어 제목의 브루스 리란 우리 모두가 아는 Bruce Lee. 그리고 출연자 리스트에는 Bruce Le, Bruce Li, Bruce Lau가 총출동한다. 홍콩 영화의 주류를 쇼 브라더스에서 골든 하베스트로 바꿔놓은 영웅. 우리가 아는 이소룡의 영화는 <당산대형>에서 <사망유희>까지 억지로 늘려도 5편 뿐이지만, 당시 서구에서는 수십편의 영화가 브루스 리의 영화로 공개됐다. 왜? "동양인 얼굴은 구별하기 힘들어서." 이런 얘기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재미있을 영화.
아 개취라니까요.
위키드 (존 추) Wicked
무대극 원작에 대해서도 한동안 사람들은 "어떤 영화화도 원작을 능가할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피터 셰퍼의 위대한 대본을 밀로스 포먼이 영화화한 <아마데우스> 이후, 그런 시비는 사라졌다. 특히 뮤지컬 분야에서는 물리적인 제약이 큰 무대를 벗어날 때 더 놀라운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위키드>는 3시간 내외의 무대 뮤지컬을 두 편의 영화로 나누다 보니 앞부분의 진행이 더뎌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이 뮤지컬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는 <Defying Gravity> 시퀀스에서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압도적인 연출을 보여줬다. 누군가가 왜 아직도 극장에 가야 하냐고 묻는다면, 손가락을 들어 <위키드> 포스터를 가리키라고 말하고 싶다.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넷플릭스 오리지널, 바오 응우옌) The Greatest Night in Pop
2024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날로서 3시간 이하의 단편 영상물 중에서 볼만한 게 있느냐는 질문에, 거의 유일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던 작품. 물론 '그 세대'가 아니라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당대의 제왕과 제왕의 형님, 모든 것을 기획한 사람, 그 핵심이 되고 싶었지만 겉돌았던 사람, 이 자리에 선 것이 정말 일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를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쉬움과 분노를 느낀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날의 이벤트를 조명한 바오 응우옌의 솜씨도 탁월했다.
파묘(장재현)
이 영화가 없었다면 과연 2024년의 한국 메이저 영화 중에 뭘 이 리스트에 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물론 일본 귀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국 영화의 신기원이라고 할 정도로 몰입감이 엄청난 걸작이었고, 그 뒤로는 앞부분의 성취를 조금씩 깎아먹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다음번에도 장재현 감독의 영화를 꼭 보겠다는 믿음은 분명하다. 차 번호판이니 포스터니 하는 것들이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 없이도 충분히 훌륭했던 작품.
페르시아어 수업 (바딤 페럴먼) The Persian Lessons
2차대전 독일 수용소. 한 독일 장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 수감자가 살기 위해 "나는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압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결국 한 남자는 자기가 만들어 낸 가공의 세계로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설정인데... 좀 늦게 봤지만 '이런 소재로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구나'에서 충격을 받았던 작품. 사기꾼의 사기가 들통나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도 긴장감이지만, 정말 저런 식으로 세계 하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2022년작이라 맨 뒤로 밀렸지만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길.
...뭐 이렇습니다. 예전에 기운 뻗치고 뭘 모를 때에는 추천 영화와 망작을 같이 꼽기도 했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뭔가 콘텐트들을 만드는 데 관여해 보니 그런거 저런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만드는 사람들은 피똥 싸면서 만드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새해에도 이 글 읽는 분들 다들 건승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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