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첫 완주 드라마는 <재칼의 날>. Peacock 오리지널인데 한국에서는 웨이브를 통해 공개됐다.
The Day of the Jackal. 한때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했던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었다. 소설이 나온 것이 1971년, 첫 영화가 나온 것이 1973년. 원작을 한 줄로 요약하면 '특정 정치 단체가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 킬러를 고용하고, 어찌 어찌 해서 이 정보에 접하게 된 유럽 각국의 수사기관이 총력을 기울여 음모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다.
1962년 실제로 있었던 음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드골이 저격수에 의해 암살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진정한 걸작 스릴러. 특히 오늘날의 시선으로 본다면 핸드폰도 위성 감시도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재칼 한 마리를 지목하고 포획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재칼(암살자의 암호다)이 한 수를 두면, 수사관들도 한 수를 둔다. 바보짓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쪽 모두 최선을 다 한다. 어지간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생각하듯, 멀리 건물에 진을 치고 총 한방 쏘면 되는 저격은 없다. 포사이스의 작품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람 하나 죽이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디테일이 어마어마하다.
총 한자루도 그냥 총이어선 안되고, 총알도 그냥 총알이어선 안된다. 뭣보다 총이 총의 형상을 갖고 있다면 아예 그 총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해야 하고, 접근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자살 테러라면 죽이는데까지만 생각해도 되겠지만, 돈을 받는 프로 킬러는 살아남아서 그 돈을 써야 한다. 당연히 현장에서 어떻게 도망칠지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뭐 비슷한 상황이 쫓는 쪽에서도 펼쳐진다.
1973년작인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영화 <재칼의 날> 역시 스릴러의 역사에서 걸작으로 꼽기에 아쉬움이 없는 작품이다. 뭣보다 소설의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다큐멘터리 같은 건조한 연출이 빛난다. 재칼 역을 맡은 에드워드 폭스의 무표정한 연기도 일품. (그러나 두번째 영화화라고 일컬어지는, 브루스 윌리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재칼>이 있는데, 솔직히 이 영화는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아깝다. 거론하지 않는다.)
세번째 작품인 드라마 <재칼의 날>은 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저 원작의 한줄 요약 내용을 '드골 대통령'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한방에 바꿔 놓을 IT계의 거물'로 바꿔 놓고 시작한다. 인터넷도, CT 검색대도, 프로파일러도 있는 시대다.
이 '현대성'의 적용은 일단 성공적이다. 원작과 워낙 시대 차이가 크다 보니 그냥 가져다 쓸 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셈인데, 거의 1:1 대응처럼 원작의 흐름을 현대에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대 시청자들에게도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방어하는 쪽도 첨단 기술을 쓰다 보니 그걸 뚫고 들어가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이 드라마가 '킬러'라는 존재에 대한 포사이스의 시각을 상당히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사이스의 건조한 문체를 따라가 본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재칼의 날>에서 포사이스는 킬러를 일종의 자연재해, 질병, 혹은 사람들을 호환의 제물로 만드는 사나운 동물처럼 묘사한다. 이 존재에게는 인간의 윤리나 정의가 적용될 수 없다.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대자연의 일부인데 인간에게는 때로 해로울 수 있는 것들일 뿐이다. 요약하면, 재앙은 인간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며,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식이다.
특히 그런 부분에서, 재칼이라기 보다는 한마리 표범 같은 에디 레드메인의 캐스팅은 탁월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킬러는 사실 판타지지만, 레드메인이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순간 설득력이 발생한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훌륭한 각색이지만 레드메인의 연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장점들이 있고, 그것만 잘 살렸더라도 <재칼의 날>은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문제는 가족. 2024년 판 <재칼의 날> 제작진은 아마도 자신들의 버전만에 있는 요소를 추가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건조한 킬러 이야기만으로 에피소드 10개의 드라마를 만드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킬러에게도 아내와 처가 식구들을 주었고, 추적의 핵심인 MI6 수사관에게도 가족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상상력의 빈곤이 시작된다. 수사관의 가족은 너무나 뻔한, 클리셰의 덩어리다. 너무 바빠서 아이를 돌봐주지 못하는 엄마, 알고보니 사람도 죽이는 아내... 여자 특공대원이나 경찰 가족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백번쯤 본 상황이 이어진다.
킬러의 가족 쪽은 더 심한데, 일단 어떻게 해도 추적할 수 없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킬러가 고정된 거주지와 맨얼굴을 본 가족, 동네사람을 수십명 만들어 놓는다는 것부터 너무나 말이 안 되지만, '아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을 강요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상당 부분의 개연성을 포기했다. 아예 코미디를 하자는 거라면 그렇다고 이해를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드라마는 코미디가 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킬러를 인간이 아닌 재앙처럼 그리는 것이 포사이스의 놀라운 장점인데, 가족을 붙여 놓은 장면에서는 이 장점이 사라져버린다. 안타깝다.
포사이스의 원작은 물론이고 진네만의 영화도 가장 놀라운 점은, 보는 이에게 "...저럴 때 왜 저 방법을 쓰지 않아?" 라고 할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이 최선의 수들로 연결되어 있고, 만약에 등장인물이 언뜻 보이는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다. 드라마 <재칼의 날>은 이 부분에서 70% 정도는 성공하지만 30% 정도는 그냥 포기해버리는데, 포기해 버리는 부분 중 거의 모두에는 이 '가족'이 연결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 일단 따르기로 한 원작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현대에 맞춰 잘 구현해 냈다는 장점이 크기 때문에 여전히 볼만한 드라마가 됐다. 시즌2가 확정이라는데, 부디 제작진이 시즌2에서는 킬러를 가지고 홈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이상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두줄 요약: 냉혹하고 건조한 킬러의 하드보일드 걸작이 될 수 있었으나 부적절한 가족 코미디의 시도에 다소간 희생당한 억울한 작품. 그래도 재미있다.
P.S. 이 드라마는 유럽 각국 사람들에 대한 클리셰가 꽤 등장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영국인 중심이라는 게 웃음의 포인트다. 이 작품에 따르면 프랑스인은 감정의 통제를 하지 못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독일인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인종주의자들이고, 스페인인은 프랑스인보다 더 감정 통제를 못 하고 특히 사랑에 눈이 머는데 스스로는 스마트하다고 착각하고, 헝가리인들은 야만적이고 무지한데 탐욕스럽다. 유럽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은... 진정한 돈에 환장한 것들이고, 자만심 때문에 스스로를 해친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우리' 영국인들이 이들을 이끌어 주지 않으면 큰일날 것들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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