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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짓을 포함해 7시간(시계상으로는 5시간. 한국보다 2시간 늦다)을 날아 씨엠립에 도착해 보니 오후 5시.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 정도 규모의 공항이 막 풀어놓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복작복작한다. '자리만 비즈니스석'에 앉은 덕분에 일찍 나왔는데도 앞 비행기가 풀어놓은 손님들이 많은지 입국장은 빽빽하다.

 

입국장이 혼잡한 가장 큰 이유는 캄보디아가가 입국 비자 형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자들은 도착후 미화 20달러와 사진을 제출하고 비자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비행기 안에서 비자 서류를 작성하게 되어 있는데, 이 처리가 시간을 잡아먹는다.하지만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팁!일단 배운대로 실행을 했다. 시장통같은 입국장에서 일단 제복 입은 사람을 발견, "V.I.P"라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한번 쳐다본다. 다시 한번, 또박 또박, "V.I.P"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에 약간 난처하다는 듯도 하고,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도 한 미소가 떠오른다.몇명이냐고 묻고, 사진과 여권을 받아 가는 그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1인당 1불"이란다. 그렇다. 이게 바로 캄보디아판 급행료다. 이 급행료의 가격은 공항 직원 개개인의 성벽에 따라 1불부터 5불까지 다양한데 아직 5불을 넘는 거액(?)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비자 처리 테이블을 보니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20불씩 내고 비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선 줄은 수백미터가 될 지경인데 이 줄을 처리하는 직원이 단 두명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V.I.P들(!)을 처리하거나 뭔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아무튼 1불씩을 더 낸 덕에 공항의 인파를 멀리 하고 얼른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가는 빗발이 뿌리는 가운데 택시 스탠드가 보인다. 시내 5불, 하루 임대는 25불. 뭔가 공인 가격인듯한 냄새가 풍기기에 주저하지 않고 호텔까지 5불을 내고 가기로 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소르(Sor) 시르니르낫(Sirnirnath). 소르는 성에 해당하고, 아는 사람들은 그저 니르낫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밝은 성격에, 흔히 볼 수 있는 동남아식의 '어쨌든 통하긴 통하는 영어'를 구사한다. 피차 짧은데 잘 됐다. 오히려 이런 쪽이 더 잘 통한다.  아무튼 우리의 니르낫 군은 자기가 내일부터 태우고 다닐테니 임대를 하란다. 대부분의 관광 책자에 20불이라고 돼 있긴 하지만 사실 하루 종일에 25불이라는 것은 한국적인 정서로는 대단히 싼 가격이다. 그리고 인상도 멀쩡해서 이 정도 기사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 그러마고 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됐길래 명성이 자자한 평양랭면에 들렀다 가자고 했더니 OK.

 

식사를 마치고 보니 호텔은 바로 평양랭면 길 건너 골목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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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들의 미모는 상당한 수준. 노래와 춤도 수준급.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간드러진 평양말씨의 애교 넘치는 서비스 솜씨는 그야말로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합니다. 손님들이 식사를 끝낼 때쯤 가까이 와서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옆에 서서 말벗이 되어 줍니다. 물론 음식 맛도 훌륭합니다만, 누가 교육을 시켰는지 몰라도 사근사근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평양이 일찌기 조선 500년을 관통한 색향으로 군림했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군무(?)입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 혼자 춤추던 북한 처자의 모습. 화면 시작하고 10초만 있으면 환상적인 대회전 묘기를 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렇게 춤을 추고 바로 홀로 나가서 서빙을 시작한다는 것이죠.



아무튼 좀 안된 것은 철저하게 폐쇄 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사원 가 봤습니까?"하니 "저희는 쉬는날이 별로 없어서 못가봤습니다" 하는 겁니다. 아니, 씨엠립에서 앙코르 와트를 못 가보다니.

이들의 말에 따르면 휴일은 한달에 꼭 하루. 그날은 아예 가게 문을 닫고 미니버스 같은 차량으로 같이 가게를 나서 쇼핑을 하건 돌아다니건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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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냉면 맛은 기본.^^



첫날 밤을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현지 레스토랑 쿨렌2(KULEN 2)에서의 압사라 공연을 예약했다. 뷔페를 포함하면 1인당 11불, 공연만은 6불이었다. 호텔에서 나갔다 들어오는 차편이 왕복 10불. 물론 돈을 더 절약하고 싶으면 오토바이 택시인 툭툭으로 왕복 6불 이내에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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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분위기가 동남아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장식당 분위기라 약간 실망도 했지만 공연의 수준은 상당했다. 한국도 오래 전에는 국악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 관광객을 위한 식당에서 부채춤을 추는 것으로 연명해야 했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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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계속 오는 가운데 씨엠립의 나이트 라이프 중심지라는 올드 마켓 에리어의 펍 스트리트(Pub Street)를 가 봤지만 진창 속에 인적이 드물다. 파타야나 푸껫의 유흥가는 여기에 비하면 타임즈 스퀘어로 보일 지경이다. 지나가는 툭툭을 타고 그냥 호텔로 귀환해 새 날의 일정에 대비하기로 했다. 자, 드디어 본격적인 사원 관광 시작이다.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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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앙코르 와트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십니까? 아니면 씨엠립이라는 도시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아니면 캄보디아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시는 편입니까?

 

블로그를 옮기면서 옛날 글들을 조금씩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글은 옛날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진이 전부 깨졌더군요. 옛날 블로그에서 손을 볼까 하다가 아예 옮기는 김에 새로 만지기로 했습니다.

요즘 부쩍 씨엠립과 앙코르 와트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적극 권장입니다. 특히 건기에 가실 수 있는 분들은 대단한 행운아라고 해야겠죠. 이 글들은 제가 무작정 다녀온 씨엠립 여행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벌써 2년전 얘기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보로 쓸만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소년중앙>류의 책에서 '밀림 속의 신비, 앙코르 와트' 류의 글을 읽은 뒤부터 앙코르 와트에 한번 가 보는 것은 저의 변함없는 꿈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크메르라는 나라는 캄보디아로 이름을 바꿨고, 어느새 '절대 갈 수 없는 나라'에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제대로라면 건기인 10월에서 12월 사이에 갔어야 했지만 그래도 갈 짬이 났다는 게 너무나 기뻤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아쉬웠지만 아직도 다녀왔다는 게 꿈만 같을 정도로 앙코르 와트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혹시나 가실 분이 있을까봐 지난 6월말부터 7월초까지 다녀온 경험을 기준으로 준비 과정을 상세히 적어 봅니다.

다른 곳에 써 있는 글을 퍼온 탓에 갑자기 반말을 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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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막연히 '직항기인 아시아나를 타고 씨엠립(앙코르 와트를 구경하기 위해 가야 할 도시)적당한 호텔에서 자면 되겠지' 정도로만 구상하고 있었다. S씨의 친척이 현지에 있다니 적당히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항공료. 씨엠립 직항 아시아나는 1년중 가장 싼 가격이 64만원이었다. 유류부담금(그런게 있다)을 합하면 73만원 정도 되고 두 사람이면 약 150만원이 항공료로 소요된다.

뭐 싸다면 싸다(아시아나의 7월 가격은 유류부담금을 합해 80만원쯤 된다). 하지만 이거보다는 더 싼게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베트남 항공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훨씬 불편하다. 그러나 원동항공이라는 대안이 있다.

 

원동항공은 6월말 가격이 30만원(+유류 39만원)이었다. 거의 절반 가격이다. 물론 직항이 5~6시간 정도 걸리는 반면 원동은 갈아타는데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 7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기내식은 나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경험해본 결과 이 악평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내식 한번에 30만원을 걸 사람이 아니라면, 아시아나를 타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원동항공을 개별적으로 탑승하면 흔히 로열 이코노미라고 불리는 '좌석만 비즈니스석'에 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같이 타는 승객의 90%가 패키지 여행객이다 보니, 이들 중에서는 누구 하나를 빼서 좌석 승급을 시켜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행사가 장사를 잘 해서 객석이 만석이 되면 개별 여행객들이 그 과실을 따먹게 된다.

불행히도 원동항공은 2008년 현재 서울-씨엠립 구간을 운행하지 않습니다(회사가 부도 났다는 설도 있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현재로서는 이만치 싸게 날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떠나는 아시아나 직항의 여름 요금은 여전히 60만원대(유류할증료 포함). 방콕-씨엠립 구간의 항공편은 16만원 정도지만(http://www.bangkokair.com/en/index.php) 서울-방콕 요금을 생각하면 이쪽이 쌀 리는 없습니다. 방콕 구경을 겸할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가격만 생각한다면 개별적으로 가는 것이 역시 훨씬 비싸다. 우리 부부의 경우 항공권이 원동항공으로 2인 합계 78만원, 호텔비가 9만*4박 해서 36만원 들었다. 반면 적당한 패키지를 이용했다면 1인당 39만원+유류 9만원 해서 48만원, 곱하기 2하면 96만원 정도가 든다. 여기에 교통비, 식대, 가이드비(만약 쓴다면) 등을 감안하면 패키지는 개별 여행의 60% 가격 수준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취향에 따른 선택이다. 만약 당신이 (1) 일단 관광지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싶고 (2) 호텔의 레벨이 좀 낮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고(사실 패키지로 여행을 가 보면 호텔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란 거의 자는 시간 뿐이다. 따라서 호텔 시설은 어쨌거나 상관이 없다) (3) 가이드가 가자는 대로 악어농장에서 사파이어 가게까지 온갖 쇼핑센터를 가도 참을 수 있고 (4) 피곤해도 절대 먼저 호텔에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모두 웃어 넘길 수 있다면, 패키지 여행은 대단히 좋은 선택이다.

내가 패키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1) 앙코르 지역의 사원들을 데리고 다니는대로 다 돌기에는 체력에 자신이 없었고 (2) 날도 더운데 좀 좋은 호텔에서 좋은 수영장의 혜택을 누리며 탱자탱자하고 싶었고 (3) 새벽에 나가서 저녁식사 후에 호텔로 기어들어와 기진맥진 잠이 드는 여행은 이젠 하고 싶지 않았고 (4)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만 골라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건 부수적인 거지만, 아무래도 개별 여행을 하게 되면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게 되고,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뭐라도 더 남게 된다. 게다가 '이런 건 나만의 여행에서만 할 수 있다'는 경험도 몇가지 가질 수 있다. 지난 2004년 베이징에 갔을 때, 나는 북경짜장면도 먹어 보고 싶었고, 북한 식당의 평양냉면도 먹어 보고 싶었고, 명십삼릉 중에서 영락제의 장릉도 보고 싶었고, 북경 동물원의 팬더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실크 이불이며 싸구려 진주 공장을 돌아봐야 했다.

Angkor Palace Resort & Spa는 분류에 따라 4성 또는 5성으로 의견이 갈리지만 아무튼 최고급의 호텔이었다. S씨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호텔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겠지만, 특히 그녀의 오라버니가 경영한다는 S사는 인터넷 가격 120~150불인 이 호텔을 90불에 예약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과정은 이렇다.

인터넷으로 이 호텔의 가격을 알아보다가 최저가로 85불을 발견했다. 이걸로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해 봤다. 전화를 안 받는다. 다시 걸어봤다.

현지인이 전화를 받아 쏼라쏼라한다.

S사에 전화했다.

S사: 식비는 끼니당 5불 정도, 호텔비는 40불 정도면 좋은 데서 주무실수 있습니다.
나: 저어, 호텔은 APR&S로 하려고 하는데...
S: 네? 거긴 좀 비싼데요.
나: 비싸다면 어느 정도...?
S: 우리가 예약해도 150불 정도 됩니다. 할인을 잘 안 해줘서 패키지가 잘 못 들어가죠.
나: 좀전에 인터넷에서 85불짜리를 봤는데요?
S: 그럴리가요. 그럼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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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S: 확인해봤는데 우리가 해도 90불 정도까지밖에 안 된답니다.
나: 그래요? 생각보다 좀 비싸네요.
S: 네. 이제 저희가 90불보다 더 받을 수는 없고... 그 가격에 하려면 하세요.

전화를 끊고 생각해봤다. 어딘지도 모르는 호텔 예약 사이트에다 카드를 오픈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5불 정도 더 내고 믿을만한 국내 회사에 하는게 훨씬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아무튼 이런 절차는 호텔 예약을 할 때 초보자들이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호텔비와 항공권에는 정가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호텔비 50% 할인'같은 문구야말로 사기 중의 사기다. 세상에 정가도 없는데 어디서 뭘 어떻게 할인을 한단 말인가? 국내 호텔들도 어떤 때에는 10만원, 어떤 때에는 30만원씩 하는게 보통이다. 따라서 적당한 가격을 골라 내는 데에는 제법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제법'이라고 해 봐야 구글을 이용해 약 1시간 정도만 웹서핑을 하면 충분하다.

이렇게 해서 항공권과 호텔을 잡았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된다. (계속)

p.s. 현지 여행사와 잘 얘기하면 7월초까지는 70불 정도에 잘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역시 저는 웹서핑 시간이 좀 짧았던 것 같습니다.





2편으로 넘어가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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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순탄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에나 밀러의 결혼이 결국 없던 일이 된데 이어 유부남과의 열애설이 한창입니다. 게다가 누드 사진까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다는군요.

그 유부남은 바로 발타자 게티. '게티'라는 이름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 제대로 보신 겁니다. 배우이기도 하지만 석유 재벌의 후손이라는군요. '알리아스' 등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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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올해 역대 최강의 미녀와 야수 커플이 탄생할 거라던 뉴스는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미녀와 야수인지 밀러와 결혼할 뻔 했던 리스 이밴스의 얼굴을 보시면 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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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팅 힐'에서 휴 그랜트와 함께 살던 괴짜 친구,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Rhys Ifans. 예전부터 리스 이판, 리스 아이판스 등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게 하는 희한한 이름이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Reese Eevans', 즉 '리스 이밴스' 라고 읽는 것이 정확한 발음이라고 합니다.

1968년생이라 1981년생인 밀러와는 무려 13년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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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노팅 힐'에서 줄리아 로버츠를 기다리던 파파라치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포즈를 취하는 장면, 그리고 왼쪽은 실생활에서 그가 파파라치에게 포착된 장면입니다.


자, 이 대목에서 시에나 밀러의 옛날 애인과 한번 비교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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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최고의 미남 스타 중 하나인 주드 로를 만나다가 리스 이밴스를 만난다는 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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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와 시에나 밀러가 데이트를 하던 시절부터 주위에선 '미녀와 야수' 운운하는 이야기가 적잖이 오갔는데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군요. 그런데 반드시 '노팅 힐'에서의 모습만을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밴스에게는 또 다른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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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

그러니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니발 라이징'에서 한니발의 숙적인 악당 그루타스도 리스 이밴스가 연기했습니다. '노팅 힐'을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죠. 이런 팔색조같은 면모가 시에나 밀러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커플을 계기로 역대 할리우드의 미녀와 야수 커플들을 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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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화제를 모았던 가수 제임스 블런트와 슈퍼모델 페트라 넴코바.

네. 아무리 잘 봐줘도 블런트는 잘생긴 얼굴은 아닙니다. 물론 가수로는 톱스타죠.

한국에서도 CF로 잘 알려진 'You're Beautiful'이 그의 노랩니다. 하지만 노래의 마력이 시들었는지 지금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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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로페즈와 마크 앤서니는 잉꼬부부로 잘 살고 있습니다.

사실 벤 애플렉과 비교해 마크 앤서니의 인물을 '웃기게 생겼다'고 비웃는 사람이 많지만 앤서니는 라틴 음악계에서 최고의 스타입니다. 리키 마틴이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를 능가하는 인기남이죠.



가수들은 목소리로 어필한다면 남들도 뭔가 어필하는 점이 있어야겠죠.

이 경우엔 유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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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톰 그린과 드루 배리모어. '미녀삼총사' 커플인 셈이죠.

그가 출연한 영화를 틀어놓기만 해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IQ가 10포인트씩 떨어진다는 톰 그린의 유머감각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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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그의 마케터(우리나라로 치면 매니저?) 조던 브래트먼.

뭐 야수..라기 보단 좀 졸립게 생겼습니다. 심심찮게 구설에 오르지만 잘 삽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역대 최강은 이 커플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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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벌써 옛날 얘기가 돼 버렸지만, 일찌기 줄리아 로버츠가 라일 로빗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을 의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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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녀와 야수'류의 커플들은 윈윈 커플입니다. 남자의 경우엔 본래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미녀와 맺어지는 순간 지금까지보다 두 배 이상 높은 평가를 누리게 됩니다. 일반인이고 평소에 별볼일 없는 친구로 통했더라도 미녀 여친이 드러나는 순간 '뭔가 있는 친구' 혹은 '대단한 친구' 로 불리게 되죠. 우스개로는 이런 커플이 다니면 그냥 '남자가 돈이 많은가봐'하고 만다지만, 그게 어딥니까.^^

여자 쪽에서도 이점이 있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서도 '인물만 밝히는' 여자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죠. 하지만 용모가 떨어지는 남자를 사귀는 여자들에겐 '겉모습보다 내면을 볼 줄 아는 생각이 깊은 여자' 라는 호평이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죠. '리스 이밴스 정도가 해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라고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군요.

아무튼 간혹 주위에서 속 없는 사람들이 '네가 손해보는 느낌'이라고 부추길 수도 있겠지만, 누가 뭐라면 어떻습니까. 사실 자기만 좋으면 그만 아닙니까. 남의 얘기에야 신경 쓸 필요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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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자나 시에나 밀러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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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말에 볼 영화들을 고르다 보면 왠지 심각해지고 피곤해질 것 같은 영화들은 저절로 피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고민할 것 많은 세상, 극장에서 들어가서까지 힘들어 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이건 그래도 봐야 할 것 같다는 작품들이 나옵니다. 지난해 본 영화 중에는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이 그랬죠. 질식할 것 같은 압제 사회에서 한 지식인과 그를 감시하는 남자 사이의 묘한 유대에 대한 영화...라는 설명만 듣고는 별로 볼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보고 나서는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되뇌게 되는 작품이었죠.

'크로싱'을 보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런 현실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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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두루두루] 한국 영화 속의 새로운 북한, '크로싱'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막을 연 '쉬리' 이후 한국 영화에 나온 북한 또는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민식이 연기한 '쉬리'의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 박무영이나 송강호가 연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 중사가 대표적이다. 남한이 상징하는 물질적 풍요에는 전혀 굴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인물들로 그려졌다.
 
북한의 '자존심', 혹은 '자주성'은 종종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진다. 사사건건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듯한 한국 정부가 주로 비굴해 보이는 반면, '우리를 건드리면 핵전쟁이 터진다'며 고개를 빳빳이 처드는 북한 정권의 모습이 시원스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권 아래서 일반 국민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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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를 다룬 영화도 꽤 있었지만 '크로싱'과는 달랐다. '국경의 남쪽'의 차승원은 할아버지와의 편지 왕래가 없었다면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인물이었다. '태풍'의 장동건의 주된 분노의 표적은 그들 가족을 받아주지 않은 남한 정부였다. 그의 가족이 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면 '크로싱'의 김용수는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중국 국경을 넘어 벌목장에서 일하게 된 인물이다. 군사정권 시절 반공영화 이후로 이런 인물과 이런 북한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암시장을 방황하며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는 어린 꽃제비들의 모습, 월경에 실패한 사람들이 끌려간 수용소의 참상 또한 다른 영화에서 본 기억이 없다.

'크로싱'이 보여주고 있는 비참한 북한의 현실에 대해 탈북자들은 "햇볕정책으로 가려졌던 북한의 진실을 보여준 것은 고맙지만 실상은 영화보다 훨씬 참혹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관객의 충격을 고려해 많이 수위를 낮춘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현재 '크로싱'에 대한 대중의 낮은 관심은 북한의 인권과 굶주림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화려한 휴가'에 열광했던 정치권도 애써 이 영화를 외면하고 있다. 장년층에게 이 영화가 지겹게 받았던 반공교육을 연상시킨다면, 젊은 층에게는 '먼 나라 일'로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크로싱'의 주인공을 차인표가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수년간 세계를 누비며 기아 아동을 돕고 입양아 문제에 직접 몸을 던진 그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나선 5만톤의 옥수수를 북한이 수령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평소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기사에 눈길이 간 건 아마도 '크로싱'을 보고 난지 며칠 안 됐기 때문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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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선수 출신인 북한의 탄광 노동자 김용수(차인표)는 아내, 아들을 둔 가장입니다. 어느날 김용수는 자꾸 쓰러지는 아내가 임신중인데 영양실조와 결핵이 겹쳐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중국을 통해 약을 구해 보려던 김용수는 결국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죠. 하지만 불법으로 일하던 벌목 공사장을 공안이 덮치면서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은 점점 멀어집니다.

사실 영화적으로만 볼 때 '크로싱'의 완성도는 아주 높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덜 영악한 영화라고 할까요, 얼마든지 더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영화입니다. 좀 더 상업영화의 논리에 맞추려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몇배 더 눈물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연이나 에피소드가 좀 더 정교하게 추가될 수 있었고, 미선의 운명도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게 그려졌죠. 미선에게 생기는 일로 인해 준이에게 생기는 변화도 영화상으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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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용수의 캐릭터 구축에는 상당히 공이 들어간 반면 준이는 그저 북한 사회의 참상을 알리는 카메라의 눈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런 부분이 영화의 결말에서 폭발력을 떨어뜨렸다는 '냉정한' 분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준이의 눈이 담담하게 북한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좀 더 관객이 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이 영화가 어린이를 앞세운 최루성 상업영화로 보이는 걸 일부러 기피했던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입장이 있을 겁니다. 또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몇몇 부분, 종교적인 문제가 언급된다는 점은 역시 흥행용 상품으로서의 이 영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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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진정성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만든 사람들이나 출연한 사람들이 이 영화의 대의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죠. 특히 차인표가 중국의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흐르는 이 장면을 보고 '저건 연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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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얼굴없는 가수'였던 브라운아이즈, 란(위 사진입니다), 지아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얼굴없는 밴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캐나다 출신의 클라투(Klaatu)도 2년만에 정체가 드러났죠. 정말 드러나지 않는 얼굴없는 가수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조성모나 스카이(최진영)으로 대표되는 얼굴없는 가수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됐을까요. 놀랍게도 70년이 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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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가수'의 역사

얼굴없는 가수의 원조격인 조성모가 곧 가요계로 복귀한다. 입대 직전 만난 조성모는 "어차피 공익(근무요원)인데요"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만 2년간 사회와의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운 듯 했다(그런데 벌써 2년이 지났다니!). 그런 조성모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왜 얼굴없는 가수가 됐는지 아세요?"

<투 헤븐>이 한동안 인기를 얻을 때까지 조성모는 매스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방송사 PD의 말 한마디 때문. 당시 연예계의 실력자로 불렸던 이 PD는 조성모와 소속사 사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송(TV)은 하지 마. 노래 실력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얼굴로 방송 나가면 음반이고 뭐고 다 망해"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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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속사는 이병헌 김하늘 정웅인 등이 등장했던 <투 헤븐>의 뮤직비디오를 앞세운 홍보전을 폈다는 얘기. 요즘은 '왕년의 꽃미남 가수'로 분류되는 조성모가 이런 수모(?)를 겪었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인 듯 싶지만 본인이 털어놓은 얘기인 바에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투 헤븐>이 공전의 인기를 끈 덕분에 조성모는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성공사례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원조와 거리가 멀다. 진짜 원조를 찾자면 19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요 연구서인 장유정의 <오빠는 풍각쟁이야>에 따르면 지난 34년 경성에서는 '미스 코리아'라는 이름의 가수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가수는 앨범 재킷에까지 눈을 검게 가린 사진을 넣어야 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가수 활동이 용납되지 않는 신분의 인물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성모 이후 가장 큰 주목을 끈 얼굴없는 가수로는 SKY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한 최진영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이름과 얼굴을 감추고 <영원>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킬 무렵, 방송가에서는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모 방송사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새로 맡게 된 PD A씨는 SKY의 정체가 최진영이라는 사실을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 흥분은 살짝 '뒷북'이었다. 일반인들은 몰랐지만 방송가에서는 처음부터 SKY가 최진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베일에 가려진 가수 SKY…"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지만 이를 몰랐던 A PD는 촬영팀을 앞세워 최진영이 있던 기획사 사무실을 덮쳤다.

갑자기 나타난 ENG 카메라에 당황한 기획사 측은 즉시 문을 걸어 잠궜다.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핵심은 '언제 얼굴을 공개하느냐'하는 것. 아직 공개의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기획사 사장에게 있어 분위기를 모르고 특종을 요구하는 A PD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이들 얼굴없는 가수군단의 공통점은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정체를 밝힌다'는 것. 그러나 아직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팀도 있다. 지난 90년대 초, 헤비스라는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김원준의 히트곡 <모두 잠든 후에>를 코믹한 가사로 편곡한 <모두 출근 후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을 패러디한 <어떤이의 땅> 등을 히트시키며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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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비스의 핵심 멤버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으로 롱런하고 있는 포크 그룹 나무자전거의 강인봉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당시 제일기획 광고음악 프로듀서로 일하던 강인봉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모아 헤비스라는 얼굴없는 그룹을 조직, 패러디 음반을 발표한 것이다. 헤비스는 예상외의 반향을 얻으며 2집까지 발매하는 호황을 누렸다.

가요계에는 요즘도 얼굴없는 가수들이 나오고 있고, 이런 얼굴없는 가수들은 재활용 가수들(아, 걔가 그때 걔었어?)의 새로운 포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없는 가수라는 것이 전혀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이고 보면, 가요계는 뭔가 좀 더 새로운 홍보 기법을 개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끝)



사실 이런 가수까지 나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걸 짜내라는 것도 무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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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솔로. 저는 브라운관을 수놓았던 그 헤아릴 수 없는 첩보원과 액션 영웅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멋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2:8의 정교한 가르마가 인상적인 이 멋장이 첩보원은 일리야 쿠리야킨이라는 소련 출신의 스파이와 한 조를 이뤄 많은 사건을 해결했습니다.<첩보원 0011>, The Man from U.N.C.L.E 이라는 외화에 대해 쓰기 전에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쓸데 없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습성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방송될 때에는 너무나 어렸습니다.그렇다 보니 나폴레옹 솔로와 일리야의 멋진 모습은 기억이 나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아무래도 드라마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주변에 대한 것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시리즈 오프닝입니다.




아다시피 나폴레옹이 속해 있는 기구 U.N.C.L.E은 the United Network Command for Law Enforcement의 약자로, THRUSH(Technological Hierarchy for the Removal of Undesirables and the Subjugation of Humanity)라는 악의 단체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선 가장 궁금한 것은 0011이라는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대체 왜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는 '첩보원 0011'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드라마에는 0011이라는 숫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의 구성에 이언 플레밍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의 동료들인 살인번호 소유자들은 001부터 009까지의 코드를 사용합니다. 0011이 등장했던 유일한 시리즈는 일본 만화영화인 <달려라 009>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린이날이면 단골로 재탕해서 보여줬던 <달려라 009>의 극장판에서 0011은 쌍둥이 0010와 함께 001-009까지의 주인공들을 공격하던 전자 사이보그였습니다.  막강한 미녀 사이보그 0012와 함께 악의 편이었죠.(또 삼천포로 빠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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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0011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직역하면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을 이 시리즈를 놓고 일본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을 겁니다. '첩보물 하면 007'이던 시절, 처음부터 '나폴레옹 솔로'라고 해 봐야 통할 리가 없고,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고 직역해 봐야 '삼촌에서 오긴 뭘 와?'라는 반응밖에 없었을테니, 뭔가 첩보 드라마의 냄새를 풍기게 하려면 역시 00넘버를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럼 왜 하필 0011일까요? 글쎄요, 001에서 009까지는 이미 007시리즈에서 다 써 먹었고, 0010은 뭔가 이진수같고 보기에 나쁘니 모양새가 그럴듯한 0011이 된 게 아닐까...했는데 사실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고편 동영상을 보시죠.




자, 동영상을 보시면 본부 출입을 위해 가슴에 인식표를 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0011의 비밀이 있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 내용의 번역입니다.


<뉴욕의 유엔 본부 가까이의 빌딩가운데에 있다.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최신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멤버가 본부에 들어가려면 , 빌딩의 큰길에 접한 세탁소 지하의 비밀 출입구를 사용한다.안에 들어오면 우선 게이트의 여성 오퍼레이터로부터 역삼각형의 인식 플레이트를 받아, 가슴에 댄다.플레이트는 부문 마다 색이 달라 각 멤버의 인식 번호가 쓰여져 있다(솔로는 11, 이리야는 2).이 플레이트는, 출입마다 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도포되어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미처리 플레이트를 댄 것만으로 침입하려고 하면 경보가 울린다. >

네, 이것이 0011의 정체였습니다. 이 작은 단서로부터 일본인들은 0011이라는 스파이의 번호를 만들어낸 거였군요. 이런 소심쟁이들같으니.

아무튼 이 인상적인 주인공 나폴레옹 솔로의 얼굴을 잘 보다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꽤 있습니다. 물론 이 나폴레옹 솔로 시리즈가 무려 9편의 극장용 영화로 재편집되어 상영되기도 했지만(정말 이런 면은 007 못지 않습니다), 이 나폴레옹 솔로 역을 맡았던 로버트 본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바로 <황야의 7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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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율 브리너, 제임스 코번, 스티브 매퀸, 찰스 브론슨이 나온 그 <황야의 7인> 에 이 사람이 나온단 말이야?"하고 하시는 분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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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또 어딘가에서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 릭 윤...'어쩌고 하는 얘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얘기가 안 나올때가 됐는데 싶었지만 뭐든 한번 잘못 알려지면 끝이 없더군요.얼마전 2006년 개봉된 '강적'의 리뷰를 이쪽 글로 옮겨왔는데, 거기에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작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사람은?


 영화 퀴즈. 한국인 중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누구일까?

온 세상이 월드컵 판(주=이 글이 처음 쓰여진게 2006년이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인데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잠시 머리를 써 보시기 바란다. 물론 <다이 어나더 데이>의 릭 윤이나 윌 윤 리를 꼽았다면 실격이다. 그렇게 쉬운 문제면 내지도 않았다. 만약 이 문제에 오순택이라는 답을 댔다면 당신의 잡학도도 만만치 않다.
오순택은 지난 1974년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제임스 본드를 돕는 홍콩의 영국 정보요원 입 경위 역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본드는 로저 무어였고, 악당 역할은 전문 드라큘라 배우로 유명한(이제는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이라는 쪽이 더 알기 쉬운) 크리스토퍼 리가 맡았다.

필자는 이번 주초 영화 <강적>의 시사회에서 깜짝 놀랐다. 악의 거두인 황회장 역으로 오씨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70세인 오씨는 지난 59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도미한 뒤 100편에 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한국 영화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강적> 촬영장에서도 오씨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민호 감독과 박중훈 정도였던 것 같다. 조민호 감독은 "첫 작품인 <정글주스>에 출연했던 재미 배우 김만(79년작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올드 팬들에겐 친숙한 이름이다)씨의 소개로 오씨에게 출연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노역 배우 풀이 제한된 한국 영화계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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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뮬란>에서 아버지 목소리를 맡았던 오씨는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아아'하고 알아볼 만한 얼굴.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 야마모토 제독 역할로 출연한 일본계 배우 마코와 함께 할리우드에서는 대표적인 동양인 배우로 꼽힌다. TV에서도 <미녀삼총사> <에어울프> <맥가이버> 등 추억의 외화들에 골고루 등장했고, 필자에게는 지난 82년작인 TV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항하는 남송의 재상 양저 역을 맡은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 서울예대 연극과 석좌교수로 재직중인 오씨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한국 영화의 제작 현장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출연하게 됐다"며 "출연 조건이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생각같지 않더라"며 웃었다.

박중훈과 오순택, 한국이 낳은 할리우드 배우 두 명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 <강적>이 22일, 월드컵 열풍과 정면으로 대결에 나서지만 이를 홍보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도 오씨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에서 41년간 현역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차치하고라도, 모처럼 고국 영화에 출연한 노배우에 대한 예우가 이 정도라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산 경험이야말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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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은 자신을 가리켜 '할리우드에 진출한 두번째 한국계 배우'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첫번째 배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필립 안이라는 것이죠. 필립 안은 <킬 빌>에서 빌 역할을 맡아 요즘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데이비드 캐러딘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리즈 <쿵후>에서 캐러딘이 연기한 케인의 사부 역을 포함해 거의 20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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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의 출연작 중에는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이상기류에 휘말려 진주만 기습 직전의 북태평양으로 시간이동을 하는 내용이었죠. 여기서 오씨는 니미츠호 함재기에 맞서다 포로가 되는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 역으로 출연합니다. 오씨는 "한국 사람 역할로는 출연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잘 살게 됐으니 괜찮은 역할도 생길 텐데..."라며 허허 웃더군요.

오씨는 자신의 대표작을 <미저리>의 캐시 베이츠와 공연한 독립 영화 <Home of our own>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는 홍콩-태국 등 동남아를 무대로 한 영화라서 친숙한 배경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의 근거지는 태국의 유명한 휴양지 푸껫의 팡아만에 있는 실제 지형으로, 지금은 '제임스 본드 섬'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력을 가진 배우의 한국 영화 데뷔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웠습니다.  한동안 잊혀졌던 정창화 감독에 대한 재발견도 이뤄지는 시대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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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김주성 하석주 고정운 홍명보 등 왕년의 스타들이 보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한국축구사 요약 족보 2탄. 좀 길어도 그냥 한방에 끝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축구 100년사 (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축구협회는 또다시 대표팀 이원화론을 들고나왔다. 이번에는 화랑과 충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이디어는 청룡-백호와 똑같았다. 아무튼 이 해 화랑팀의 일원으로 제6회 박스컵에 출전한 차범근은 첫 경기인 말레이시아전에서 1 대 4로 뒤지던 후반 38분부터 순식간에 3골을 넣으며 4 대 4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날 이후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남북 축구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록한 해였다. 청소년 대표팀은 1976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북한과 만나 0 대 1로 진 적이 있지만 성인 대표팀의 만남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북한을 두려워해 맞상대를 꺼렸던 한국은 1978년 메르데카컵과 박스컵의 우승으로 자신감을 갖고 북한과 격돌했다.

12월 20일 방콕 국립경기장. 결승에서 만난 양팀은 연장전까지 격돌했으나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골은 터지지 않았고 결과는 공동우승이었다. 경기 후 열린 시상식에서 “기진맥진했고, 비기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는 남한팀 주장 김호곤은 북한팀 주장 김종민에게 “우리, 손 잡읍시다”라고 제안하며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사진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선수가 어깨동무를 한 이 사진은 지금껏 남북화해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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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대결 당시 김호곤의 축구화.

차범근은 아시안게임 직후 서독 분데스리가 테스트를 받았고 이듬해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유럽 무대 진출의 막을 열었다. 1980년에는 허정무도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고 이후 김진국 박상인 박종원 등이 앞다퉈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이 해 12월에는 국내에서도 국가대표 이영무를 주축으로 한 1호 프로구단 할렐루야가 창단, 프로화를 재촉했다.

1981년 5공화국의 스포츠 드라이브는 축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됐고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개막됐다. 한편으론 멕시코 세계 청소년대회 출전권을 따냈던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주심 폭행사건으로 2년간 각종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면서 한국은 대타로 멕시코행 티켓을 따내는 행운을 차지했다.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대회를 앞두고 개최지가 고지대라는 점을 감안, 선수들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는 등 가혹할 정도의 체력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졌다. 마침내 그 해 6월. 한국은 스코틀랜드에 첫 경기를 0 대 2로 내주며 한숨을 자아냈지만 홈팀 멕시코와 호주를 각각 2 대 1로 연파하며 예선을 통과, 8강에 진출했다.

김종부 신연호 이문영을 주축으로 한 한국이 6월 11일 우루과이를 연장전 끝에 2 대 1로 꺾고 4강에 오르자 전국은 축구 붐으로 불타올랐고 외신은 연일 한국의 선전에 찬사를 날렸다. ‘붉은 악마’라는 호칭은 바로 이때 등장했다. 비록 6월 15일 브라질에 1 대 2로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첫 ‘세계 4강 진출’에 쏟아지는 갈채는 끊일 줄을 몰랐다.

박종환 감독은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됐고 축구협회는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88팀’을 맡겨 육성하게 했다. 이 88팀을 모체로 해 ‘올림픽 대표팀’이 마련됐고 성인 대표팀인 ‘월드컵 대표팀’은 문정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올림픽 축구 출전 선수는 23세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 규정이 나온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의 일이었으므로 굳이 올림픽 대표팀의 나이가 어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은 1984년 LA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월드컵 대표팀 역시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예선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감독직을 사퇴한 문정식 감독 대신 김정남 감독을 내세워 대표팀을 일원화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 나선 한국은 승승장구 끝에 최종 예선에서 일본을 2 대 1, 1 대 0으로 연파하고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비원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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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독일에서 뛰고 있던 차범근까지 가세한 한국 대표팀의 기세는 충천해 있었으나 국제대회에서 매번 한국을 괴롭혔던 대진의 불운은 여전했다. 첫 상대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0 대 3으로 뒤졌던 한국은 후반 28분 박창선의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사상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어 한국은 불가리아전에서 후반 26분 김종부의 동점골로 1 대 1 무승부를 기록, 첫 승점을 올렸다.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도 3 대 2까지 추격해 접전을 벌인 것은 그리 실망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1무2패, 예선 탈락이었지만 국민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월드컵 대표팀 멤버들은 홈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사실상 첫 월드컵 진출’이라는 점을 감안해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던 국민은 이회택 감독이 이끈 1990년 이탈리아 대회의 3전 전패, 김호 사단이 출전한 1994년 미국 대회의 2무1패,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해임된 1998년 프랑스 대회의 1무2패 등 거듭되는 월드컵 본선의 실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아시아 예선 통과는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최대 과제는 ‘월드컵 16강 진출’이었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정몽준 의원이 47대 축구협회장에 당선되면서 한국 축구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바로 2002년 월드컵 개최 추진 발표. 10월 카타르에서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득실차로 제치고 출전권을 따내는 ‘도하의 기적’(일본에서는 ‘도하의 참변’)을 이룬 직후, 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월드컵 유치전 참가를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5년 전인 1988년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천명해 놓은 상태. 결국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96년 5월 31일, 공동개최에 사인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개최를 천명했던 일본에 비하면 공동개최는 뒤늦게 뛰어든 한국의 승리인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한국 팀의 성적. 허정무 사단이 1998년 아시안게임 부진(8강)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성론이 축구계를 강타했다. 2002년에도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총체적 위기감으로 각성한 축구협회는 2000년 11월 14일,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에 0 대 5의 치욕을 안긴 네덜란드 감독 거스 히딩크를 사령탑으로 초빙한다.

물론 히딩크도 처음부터 신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히딩크 사단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002년 초 유럽 원정에서 각각 프랑스와 체코에 0 대 5로 무너지는 등 신통찮은 모습을 보이며 극렬한 비난 여론에 부딪혔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 이전의 모든 경기는 연습경기”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6월 4일, 한국은 부산에서 강호 폴란드를 2 대 0으로 가볍게 누르며 월드컵 진출사에 마침내 첫승을 신고했다. 이때 이미 대다수 국민은 ‘목표 달성’의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국은 6월 10일 미국과 1 대 1로 비긴 뒤 6월 14일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누르고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붉은 물결로 뒤덮였지만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히딩크 감독은 6월 18일 이탈리아와 16강전을 앞두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I’m still hungry)”는 명언을 남기며 선수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린 한국의 2 대 1 승리. 6월 22일 한국은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세계 4강에 올랐다. 1966년 북한이 영국 월드컵에서 이뤄낸 8강 신화를 넘어선 것이다.

비록 4강전에서 독일에 0 대 1로 패했고 3·4위전에서도 터키에 2 대 3으로 져 종합성적은 4위에 그쳤지만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히딩크는 한국인의 영웅이 됐다. 대표팀 서포터인 ‘붉은 악마’와 100만 인파를 동원한 거리 응원의 장관도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다.

3년 뒤인 2005년,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 6회 연속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으나 국민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미 신화가 된 ‘불패의 명장’ 히딩크의 그림자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만 보였던 두 후임자, 코엘류와 본프레레를 낙마시켰다. 과연 2006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나서는 한국 축구는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끝)



그 뒤의 일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아드보카트는 1승을 거뒀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은 핌 베어벡을 사령탑으로 내세웠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모두 4강에 그치며 국민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허정무 사단은 2010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천적 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두 장의 티켓을 다퉈야하는 위기를 맞았죠. 과연 허감독의 '옛날축구'가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월드컵 본선 연속진출 회수를 6에서 마감해버릴까요?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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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변명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산'의 방송이 끝난 주, 이병훈 감독님을 금주의 인물로 소개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축하 인사도 드릴 겸,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미 '이산'팀과 함께 종영 자축 여행을 떠나신 뒤더군요. 어쩔수 없이, 새로운 장을 보지 못하고 그냥 냉장고(?)를 열어서 쓴 글입니다. 물론 박은혜씨가 약간의 도움을 줬죠(그 얘기는 맨 마지막에.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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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돈·음식 등 일상사로 승부
‘이산’ 종영한 정통 사극 연출가 이병훈
송원섭 기자
| 제67호 | 20080622 입력  

최근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이산’의 방송을 마친 이병훈 PD의 전설 중에는 그의 놀라운 설득력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1990년대까지 미스코리아 대회는 반드시 MBC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각종 여성단체로부터 왜 공영방송에서 그런 외모지상주의를 전파하는 행사를 중계하느냐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여성단체 대표들은 사회적 지위가 남다른 사람이 많아 MBC에서도 그런 항의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 구사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병훈 당시 MBC 드라마국 PD였다는 것이다. 사장실로 호출받아 올라간 이 PD가 중재에 나서면 어느새 분위기는 봄눈 녹듯 풀어지고, 웃음이 넘치는 자리가 되면서 항의는 유야무야되곤 했다는 얘기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이 일화가 결코 전설만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사실 그의 전설은 현재진행형이다. 44년생이니 올해 64세. 현역 드라마 PD 가운데 최고참이지만 촬영장에서도 젊은 연기자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돌아서선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받는 참신한 감각을 유지한다. ‘대장금’ 때만 해도 현장 스태프는 “산 위에서 촬영할 때도 감독님(이병훈 PD)보다 앞서 올라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며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스태프·출연진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호걸형 PD가 아니면서도(그는 30년째 금주 중이다), 현장을 휘어잡는 힘이 정평 나 있다.

많은 배우가 “옛 말투 대사가 어려워서 사극을 못한다”고 할 때 과감하게 현대어 대사를 도입해 사극의 새 바람을 일으켰고, 그런 가운데서도 발성이 만족스럽지 않은 배우는 주인공이라도 일대일 과외를 하는 열정을 보여 왔다. ‘이산’의 주인공 이서진도 이 ‘과외’를 피해 가지 못했다.

지금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극의 대가지만 그라고 해서 MBC 입사 이후 사극만 연출해 온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청소년 드라마 ‘제3교실’이나 ‘수사반장’의 연출자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82년 이정길이 어사, 임현식이 시종 갑봉이, 무술인 안호해가 호위무사로 나온 ‘암행어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어 ‘조선왕조 500년’은 그에게 ‘사극의 대가’라는 칭호를 줬다. 특히 ‘임진왜란’ 편에서는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당시 코믹 연기자로 인기 높던 김무생을 이순신 역에 기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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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 역에 정진이라는 새 인물이 돌풍을 일으켰던 바로 그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90년대, 그가 드라마국장일 때 MBC는 ‘드라마 왕국’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이 시기 MBC에서는 ‘질투’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마지막 승부’ 등 시대를 리드하는 트렌디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97년에서야 일일연속극 ‘세 번째 남자’로 연출에 복귀한 그는 98년부터 ‘대왕의 길’ ‘허준’ ‘상도’ ‘대장금’ ‘서동요’, 그리고 ‘이산’까지 여섯 편의 대작 사극을 연출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사극에 열광했을까. ‘허준’을 연출하던 당시 이 PD는 왜 허준을 주인공으로 했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누가 왕이 됐느냐 말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건강·돈·음식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과연 그는 의원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허준’을 히트시킨 뒤 거상 임상옥을 주역으로 한 ‘상도’를, 또 수라간 음식 이야기인 ‘대장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인호 원작 소설 제목을 그대로 쓴 ‘상도’ 외에는 ‘허준’ 이후 네 편의 작품 제목에 모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건 ‘이병훈 사극’의 중심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재갑 전 MBC 드라마국장은 “영웅 아닌 인간의 내면을 밀도 있게 보여 주는 데서 감히 누가 따를 수 없는 깊이가 있다”고 평했다. 그의 주인공들이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성공에 이르는 이야기들은 보는 이에게 롤 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키는 스릴을 선사했다.

이병훈 PD는 ‘이산’의 종영과 함께 “딱 한 작품만 더 하고 이제 연출은 그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지일 전 MBC 드라마국장은 “아마 실록을 뒤져 가며 작품을 만드는 정통 사극 연출가로는 그가 마지막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특히 ‘사극 1인자’ 자리를 다퉜던 김재형 PD가 최근 SBS-TV ‘왕과 나’를 연출하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한 터라 이 PD의 은퇴설이 더욱 안타깝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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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을 방송계에서는 흔히 '왕PD'라는 칭호로 부르곤 합니다. PD중의 왕이기도 하고, 수많은 사극을 통해 왕 역할의 배우들을 수도 없이 다뤘다는 얘기기도 하죠.

어린시절 이분의 사극인 '암행어사'나 '조선왕조 500년'을 보고 자란 세대에겐 이분의 명성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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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는 암행어사 이정길. 그리고 오른쪽의 '갑봉이' 임현식은 이후 이병훈 감독의 사극에 빼놓지 않고 출연하는 핵심 인물로 성장합니다. 뭐 이때부터 아무 재료 없이 몸만 있어도 시청자들을 웃음 속으로 몰아넣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죠.

하지만, 정작 어렸을 때 저를 감동시킨 것은 왼쪽에 서 있는 호위무사인 상도 안호해의 포스였습니다. 정규 연기자가 아니어서 대사는 한회에 한두마디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런 말없음이 믿음직스럽게 여겨졌죠. 특히 입을 열어 어사에게 말을 건넬 때면 '나이리(이상하게도 이 분은 '나으리'라는 말을 그렇게 발음했습니다)!'라는 남자다운 저음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 뭘 하시는지 참 궁금합니다.

이 '암행어사'의 인기를 잡기 위해 KBS 2TV에서는 백일섭 주연의 '포도대장'이라는 드라마까지 만들었지만 원조 '암행어사'를 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바람에 당시 사극에선 칼잡이들이 수시로 등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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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장 역임으로 현역을 떠나 있던 이 분이 사극연출가로 다시 주목받게 된 건 아무래도 '허준'의 공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허준'에서 함께 작업을 했던 최완규 작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죠.

두 사람의 공로는 한국 사극에 '경합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걸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자, '허준', '대장금', '이산', '주몽'의 공통점은 뭘까요. 바로 '경합'입니다. 어떤 단체든 왕좌든 뭔가의 후계권을 놓고 주인공들이 대결을 펼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팀을 이뤄 격돌합니다.

게다가 이 '경합'이란 실력본위의 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과 집안을 등에 진 경쟁자와 맞선 주인공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영웅이 되는 것, 시청자들에겐 이보다 재미있는게 없겠죠.

이런 일련의 정형화된 구도를 처음 설정한 것이 바로 이병훈-최완규 콤비의 '허준'입니다. '허준'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는데에도 전광렬과 김병세가 벌인 닭에다 침놓기 대결이 지대한 공로를 했죠. (아 물론 그 말고도 수많은 경쟁이 펼쳐졌죠.^^) 그 뒤로 이 두 분이 관계한 수많은 드라마들이 '경합'으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사극은 아니지만 이 경합 구도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드라마 '식객'의 크레딧 자막에도 '크리에이터 최완규'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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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병훈 감독님을 볼때마다 느끼는 건 참 젊다는 겁니다. 뭣보다 마음이 젊으시죠.우연히 이 글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산' 출연을 마친 박은혜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물었습니다.

나: 감독님이 문자를 자주 보내신다면서요.
박: 네. 전화보다 문자를 더 자주 하세요.

나: 어떤 때 보내시던가요?
박: 야단칠 때, 칭찬할 때, 말로 할 걸 거의 문자로 하세요. 그리고 굉장히 특이해요.

나: 어떻게요?
박: 문자 자판도 그 연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치시구요, 10대처럼 보내요.

...

나: 10대 처럼이라니?
박: 구어체 말투에 이모티콘까지 엄청나게 섞어서 보내세요. 처음 받아보는 사람은 감독님이 보낸거라고 믿지 못할 정도에요.




흐음. 상상이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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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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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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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교수대로 가는 해적 용의자들의 긴 줄이 보입니다. 그중에는 올가미에 아예 키가 닿지 않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정도 연령의 어린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우연의 손길이 닥치든, 주인공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든 어린이는 구해 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산 공포영화 '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어 버빈스키는 그따위 오랜 관습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애라고 봐주는게 어디 있어! 라는 초강경의 입장입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할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임전 태세를 보여주고 시작한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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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왔던 시대의 괴작,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기록 하나를 세웠죠. 바로 시사회 없이 극장 개봉을 해버린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들 가운데 언론(은 물론이고 배급 창구를 열어줄 극장주들을 위한) 시사회를 갖지 않고 바로 스크린에 오를 수 있는 영화는 1년에 한편 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극장주들에게든, 언론에게든 마찬가집니다. 극장들에게는 '우리 이번에 캐리비안3 갖고 왔는데 스크린 좀 내 주지? 영화를 먼저 보자고? 그럼 안 걸어도 좋고', 미디어에게는 '기사? 안 써도 돼. 어차피 사람들 다 보러 오게 돼 있어'라는 식의 자세인 겁니다. 물론 직접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자신있는 영화가 대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실 '캐리비안...' 시리즈는 정말 웃기는 작품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히트작은 있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짜임새가 엉망인 영화가 히트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짜임새는 없는데도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정말 드물죠.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 때문에, 영화가 엄청난 대박을 내거나 망하기 전에는 미디어를 통해 기사가 나오기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캐리비안의 해적 3'는 전작들 못잖게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돈 쳐 들이고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 라고 말하시는 분들, 그런 영화도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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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단, 이 영화는 1편과 2편을 보신 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3편으로 처음 이 시리즈에 뛰어드신 분들은 지독하게 불친절한 - 지나간 시절의 요약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쇼 - 대접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되살리는 데 의기투합한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 그리고 티아 달마(나오미 해리스)는 배와 선원을 구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대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갑니다. 한바탕 예의 엎치락 뒤치락을 거친 뒤, 이들은 배를 타고 이 세상의 끝의 바깥 세상에서 잭을 구해 이승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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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결코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잭을 구해내지 못한다면 영화 3편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또 아무튼 영화를 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현존하는 해적의 영주(Lord) 9명을 모아 문어대가리 해적 데비 존스(빌 나이)와 악당 베켓(톰 홀랜더)의 연합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이 시리즈 특유의 배신과 음모가 여러 차례 스치고 지나갑니다. 물론 대부분은 음모라고 하기에도 짜증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수준입니다.

1편과 2편을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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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전쟁놀이 게임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라면 무슨 게임을 하건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겠지만, 어린이들의 게임은 순식간에 룰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로운 규정이 등장합니다.

빨간 비행기는 노란 탱크와 싸우면 이기지만 노란 탱크 중에서도 꼬리에 미사일이 달린 탱크는 비행기에게 이기고, 비행기 중에서도 헬리콥터는 모든 탱크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새로 등장하는 장난감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아주 당연한 듯 인정됩니다.

'캐리비안...'의 우주도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긴 1편과 2편에 걸쳐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아홉명의 해적 영주들이 갑자기 등장하고, 데비 존스가 몰고 다니는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바뀌는 규칙(매우 중요합니다)도 어느 한 순간 등장해버립니다.

세상의 끝에서 죽은 사람을 데려오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까지 가서 데려와야 하고(예를 들면 잭 스패로우) 어떤 사람은 말만 하면 다시 살려낼 수 있는(예를 들면 바르보사) 지도 순식간에 그냥 뚝딱 설명 한마디로 정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드래곤볼로 살려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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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 3편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1편과 2편의 힘이 매우 큽니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친숙할 대로 친숙해진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죠. 즉 3편은 그 자체로서는 큰 힘을 갖고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동안 흐트려 놓았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느라 안 그래도 엉망인 플롯은 더욱 허점 투성이가 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따지는 건 정말 예의없는 행동이 되겠죠. 애당초 한번이라도 말이 되는 스토리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3편이 어느 정도 완결편의 흉내를 내느라, 그동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잭 스패로우의 등장 신을 엄청나게 줄여버렸다는 점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이 영화가 아무리 엉망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더라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조니 뎁이라는 천재 배우가 만들어낸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힘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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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쨌든 3탄에서는 이야기를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잭 스패로우까지도 평소의 말도 안 되는 행동양식을 버리고 비교적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상당히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입니다.

대신 주변 인물들의 재롱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제프리 러시는 1편에서의 악의 화신에서 벗어나 상당히 정감있고 노련한데다 어느 정도 의리까지 있는 해적 영웅으로 거듭납니다. 티아 달마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됩니다. (물론 그 역할이 영화의 줄거리에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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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 달마의 멀쩡한; 모습입니다.)

유령상태(?)의 해적인 핀텔(리 아렌버그)과 라게티(매켄지 크룩) 콤비의 유머도 일취월장했고, 여기에 배역명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영국 수병까지 제2의 코믹 콤비로 빛을 발합니다. 눈 밝은 분들은 이 두 사람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세요.

무려 2시간 40분을 뒤척댄 끝에 영화는 3부작에 걸쳐 펼쳐낸 대 로망의 끝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쉽습니다. 과연 4편이 나올까요? 현재로서는 나올 가능성이 매우 짙습니다. 각본가 테리 로시오는 "4편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니 뎁은 '대본만 좋다면 또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고, 뎁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들이야 불감증이언만 고소영이겠지요.

주인공들 중 하나인 키라 나이틀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17세부터 21세까지 이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이젠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며 속편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나이틀리가 나오고 안 나오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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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완이 없는 '캐리비안 4'는 얼마든지 구상할 수 있지만, 잭 스패로우가 없는 '캐리비안' 시리즈를 과연 '캐리비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얘기죠. 아마도 나온다면, 4편은 잭 스패로우의 또 다른 모험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와 올란도 블룸은 얼른 다른 영화를 알아보라고 하고요.

아, 물론 4편이 나온다면 또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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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고어 버빈스키가 될지, 다른 감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헛된 노력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장담을 받아야 할 겁니다. 말이 되는 잭 스패로우의 모험담은 논리정연한 오스틴 파워스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




p.s. 3편의 보너스 인물은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티그 선장입니다. 배우는 너무도 당연히, 조니 뎁이 '잭 스패로우의 모델은 이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밝혔던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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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티그 선장의 극중 모습은 없군요. ^^;

왕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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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이 영화를 케이블TV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마도 여름 시즌이라 그런 모양이죠.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다 보니 새로운 걸 느끼게 되더군요.

대체 왜 처음 이 영화를 볼때 그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이상하게도 두번째 보니 처음 볼 때에는 그냥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어설픈 플롯이며 말도 안 되는 줄거리가 자꾸만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체 처음엔 왜 이런 단점들을 쉽게 넘길 수 있었는지(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해지더군요.

처음 그때의 느낌입니다.

 


1편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세 주인공은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Pirates of the Caribbean: Dead Man's Chest)>의 도입부부터 다시 고초를 겪습니다.

윌 터너(올란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은 결혼식을 올리려는 아침, 동인도 회사에서 파견된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에게 체포됩니다. 베켓은 터너에게 잭 스패로우(조니 뎁)가 갖고 있는 망자의 나침반을 엘리자베스와 교환하자고 제의합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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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낙천적인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불분명한 잭 스패로우는 바다의 제왕 데비 존스(빌 나이)에게 진 빚 때문에 언제 괴물 오징어 크라켄의 공격을 받을 지 몰라 도망치느라 엘리자베스고 뭐고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결국 스패로우는 자신을 찾아 나선 터너를 존스에게 넘겨 버리고 도망치는데 그 덕분에 터너는 존스에게 봉사하고 있는 아버지 '부트스트랩' 빌 터너(스텔란 스칼스가드)를 만나게 되고 새로운 모험이 시작됩니다.

고어 버빈스키는 정말이지 스토리의 논리적 정합성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링>이야 원래 만들어져 있던 영화를 옮기는 것 뿐이었지만, 브래드 피트-줄리아 로버츠라는 황금 캐스팅에 제법 괜찮은 유머를 갖추고도 참패한 <멕시칸>으로도 버빈스키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 못잖게 스토리의 개연성은 형편없는 <캐리비안의 해적>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이젠 잔소리를 할 사람이 아예 사라졌겠죠.

<망자의 함> 역시 플롯을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참담할 정도입니다. 개연성은 뮤지컬 영화 수준이죠. 이 영화에서 지켜지는 설정이나 전제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적인 잭 스패로우, 해적 마니아인 살짝 맛간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스완은 그렇다 치고 그나마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윌 터너까지도 정신없는 윤무 속으로 뛰어듭니다.

터너와 스패로우, 그리고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제임스 노링턴(잭 데이븐포트) 전직 영국 해군 준장이 펼치는 3자간의 칼싸움은 그 극치를 이룹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얏!" 하고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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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엘리자베스의 배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크라켄이 노리는 것이 잭 스패로우라면 잭 스패로우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날 때 화를 낼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반대로 크라켄이 잭 스패로우가 배에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다면 같이 도망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의 함>이 재미있는 영화로 느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배우와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조니 뎁이라는 당대의 에이스가 탁월하게 해석해 낸 잭 스패로우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모든 플롯 상의 허점을 덮어 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영화 <슈퍼맨>이나 드라마 <원더우먼>을 보면서 "아니 쟤들은 저 안경 하나 썼다고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본단 말이야?"하고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캐리비안의 해적> 1편을 본 관객들은 잭 스패로우의 행동에서 논리적인 이유나 합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의 예측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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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관객들은 "대체 저게 말이 되는 소리야?" 라고 말하는 대신 잭 스패로우가 양팔을 헐랭이처럼 휘저으면서 도망칠 때 그냥 폭소를 터뜨려 버립니다. 그 편이 훨씬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밖에도 캐스팅은 여전히 성공적입니다.

매켄지 크룩과 리 아렌버그가 연기하는 라게티-핀텔 듀오의 호흡은 오히려 훨씬 좋아졌고, <러브 액추얼리>의 능청맞은 늙은 가수 아저씨 빌 나이는 문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웃음을 터뜨리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텔란 스칼스가드가 올란도 블룸의 아버지 역으로-1편에서 잭 스패로우는 "네가 빌 터너의 아들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어. 너는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거든"이라고 말하죠-나온다는 건 <망자의 함>의 가장 큰 실수라고 부를 만 합니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재능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있습니다. 조니 뎁이 모델로 삼았다고 고백한 키스 리처드도 <망자의 함>에 우정출연, 스패로우 부자의 코믹 신이 연출될 뻔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공연 문제가 겹쳐 안타깝게도 이 장면은 뒤로 미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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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함>을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 미리 드리는 팁 하나라면, 이 영화는 2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허탈해 하지 마시길. 물론, 그렇게 대강 마무리하듯 끝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단, 당신이 잭 스패로우의 팬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말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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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촬영이 진행된 시리즈 3탄에는 우리의 영원한 따꺼 주윤발 형이 해적 두목 사오 펭 역으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감독이 버빈스키라면 윤발이형이 해적들을 상대로 멋진 쌍권총 묘기를 보여준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편에서 부활하는 바르보싸(제프리 러시), 잠수 해군을 거느린 데비 존스와 함께 사오 펭이 펼칠 해적 선장 3파전이야말로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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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데비 존스의 부하들이 한 해산물 분장(?)은 너무 실감나게 징그러워서 약간 비위가 상합니다. 특히 부트스트랩의 뺨에 붙은 홍합이며 불가사리, 작은 조개껍질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얼굴 피부가 근질근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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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본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본 영화들이 좀 나빴어야 나중에 보는 영화가 득을 보기 마련인데, 왠지 <비열한 거리>에 비해 좋게 보기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초반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어린 아들을 보살피는 하형사(박중훈)는 이미 무능하고 부패한 형사로 낙인이 찍혀 있는 인물입니다. 어느날 술집 주인에게 보호비를 뜯으러 간 사이 파트너가 괴물같은 킬러 철민(김준배)에게 살해당하자 하형사는 상부의 문책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한때 잘 나가던 칼잡이였던 수현(천정명)은 손을 씻고 미래(유인영)와 함께 버스형 스낵코너를 운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그 앞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재필(최창민)이 나타나 누군가를 손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겹치며 수현은 경찰에 체포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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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현에게는 저지른 것의 몇 배나 되는 혐의가 씌이고, 수현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합니다. 공교롭게도 하형사가 수현의 인질이 되고 이때부터 두 남자의 치고받는 버디 드라이브가 시작됩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느낌은 대단히 낯설다는 것입니다. 조민호 감독에 따르면 영화 환경의 80%는 종로구 일원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는 지역들을 골라 찍은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더구나 조직에서 손을 씻고 라면을 끓이며 사는 미남 조폭이라는 설정과 한국의 조폭들이라기보다는 마피아를 연상시키는 암흑가 인물들의 모습이 사뭇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답을 내렸습니다. 아, 이 영화는 판타지다.

하지만 얼마 뒤, 형사들의 사실감 넘치는 대화가 등장하고, 하형사의 파트너 장례식장이 나오고, 몸을 던져 범인과 격투를 벌이는 형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리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새 영화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형사 드라마가 되어 있습니다.

한 영화에서 두 개 이상의 장르가 충돌하는 경우는 적지 않고, 그게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강적>에서 이 두 장르의 결합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현실적인 악당들과 싸우다 보니 현실적인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그리 쉽지 않게 돼 버렸습니다.

출발이 판타지(또는 동화)였던 덕분에 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럽 여가수(문정희)-하형사-수현의 한강 신이나 수의사 공선생(염혜란)이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와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에서 바로 칼날과 주먹이 부딪는 리얼한 장면으로 넘어갈 때마다 영화는 무척이나 덜컥거립니다. 주인공들의 현실적인 고민이 다시 수현과 미래의 러브스토리로 넘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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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악역인 킬러 철민 역의 연극배우 김준배는 인상적인 호연을 펼쳤지만 영화 내내 겉돌고 있습니다. 철민이 상징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폭력의 위협이 이 영화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완성된 영화에서 철민이 등장하는 장면은 초반에 강조된 느낌에 비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 감독도 고심 끝에 철민의 신들을 최소화할수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마지막 신에서 조민호 감독은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신에 저 멀리 보이는 도시가 실재하는 서울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현실적이지 않은 악당들과 형사들이 나오는 동화, 땀냄새를 풍기는 거친 사나이들이 치고 받는 하드보일드 수사물, 아무래도 <강적>은 둘 중 하나의 노선에 보다 충실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흥행 성적이 그리 폭발적이지 않았던 것은 월드컵의 영향도 있었지만, 관객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p.s.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오순택씨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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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들에는 다양한 상표의 상품들을 비교해서 소비자들이 순위를 매기는 코너가 여기저기 실립니다. 최근 그중 하나로 각 패스트푸드점의 빙수맛을 비교한 코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어지간해서 빙수를 먹지 않습니다. 먹고 나서 더 불쾌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빙수를 먹는 이유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시원함에 있는데, 끈적끈적한 단맛만 입에 남아 갈증이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순위를 매겨봐야 거기서 거기죠. 사실 3천원 내외의 빙수에 뭘 기대하기도 그렇습니다.

물론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다 형편없는 빙수만 있는 건 아닙니다. 프레쉬니스버거라는 패스트푸드점의 빙수(위 사진)는 웬만한 빙수 맛있다는 집들의 맛을 능가합니다.
 무엇보다 팥이 통조림 팥이 아니더군요. 팥알의 씹히는 맛이 살아 있고 당도도 적당했습니다. 거기에 흔해빠진 언 찰떡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넣어주는데 그만이었습니다.

요즘 강남의 카페 언저리를 가면 '명품 빙수'라면서 1만원 언저리의 맛있는 빙수라는 것들이 유행하는데 이 집 빙수는 그 절반 정도 가격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겨울에는 빙수를 안 판다는 정도. 겨울에는 아쉬운 대로 현대백화점 밀탑으로 가기도 하죠.

이렇게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빙수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고 환장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제 입맛에 맞는 빙수는 매우 고전적인 형태라서, 길거리에 널린 대다수 빙수들도 그냥 참고 먹지만 아쉬움을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어디다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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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빙수론(氷水論)


내 삶에 차가운 음식이 세가지 있으니 그것이 냉면이고, 빙수고, 차가운 맥주다.

일찌기 한방에 밝은 지인이 "당신 체질에는 찬 음식이 안 어울린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음식은 맨 찬 음식인 것을 어쩌랴. 항상 냉면집에 가면 사리를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빙수 한 사발'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가며, 무한정 마시는 주당은 아니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에는 그저 무릎을 꿇고 만다. 특히 하이네켄, 후갸든, 사무엘 아담스, 칭따오, 그리고 삿포로 生이라면 그냥 넘어갈 뿐이다.

빙수의 마수에 처음 걸려든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쯤 된다. 집 바로 골목 건너에 반 가건물 형태의 떡볶이 집이 생겼다. 처음 생긴건 이른 봄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이 되자 그 집 벽에는 '팥빙수 개시'라는 벽보가 붙었다. 30원.

누나 손에 이끌려 빙수를 시켰다. 에펠탑 비스무레한 기계에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얼음이 얹혔고, 재봉틀처럼 큰 바퀴가 돌았다. 맘씨좋은(?) 아줌마는 한번 갈아서 수북히 쌓인 얼음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한번 얼음을 갈아 얹었다. 그 위에 단팥이 세 술, 잘게 썬 젤리가 세 술, 서울우유 깡통에 담긴 연유가 휘휘 뿌려졌다. 아줌마는 빨간 병에 든 빨간 물을 찔끔, 녹색 병에 든 녹색 물을 찔끔 하더니 그릇에 숟갈 두개를 꽂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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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이 추억을 그대로 되살린 듯한 이미지가 있더군요. 사진 출처에 양해를 구해보려 했습니다만 저 사이트는 이미 없어졌길래 그냥 퍼 왔습니다.^)


오오.

오뎅을 처음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온몸을 휩쓸었다. 입안 가득 퍼졌다 사라지는 이 냉엄하고도 달콤한 맛이라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팥알 몇개가 뜬 그릇 바닥을 아쉬움 가득한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가정용 빙수기 따위는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잔돈만 생기면 떡볶이집으로 달려갔다. 몇번인가 설사도 하고 배탈도 났지만, 감히 그것이 빙수 때문이라고는 의심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내가 만약 건강한 편이었다면 빙수 같은 건 당장에 못 먹게 됐을 거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아줌마는 2단으로 담던 얼음을 3단으로(두번 꾹꾹 눌러서) 담아 주기도 했고, 가끔 "이렇게 빙수에 환장한 놈 첨 봤다. 원없이 먹어 봐라"라며 냉면 사발에 얼음을 갈아 특제 빙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마법의 빨간 병과 녹색 병에 맛을 내는 비장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것 좀 많이 넣어 달라"는 말에 히죽 웃으며 "이거 많이 넣으면 써서 못 먹어"라고 못을 박았다. 알고 보니 그건 그냥 색소였다.

그 뒤로 근 30년 동안 빙수를 먹어 왔지만, 빙수는 뭐니 뭐니 해도 팥빙수가 제격이다. 대체 과일 빙수라는 음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맨숭맨숭하고 밋밋한 것은 빙수라는 이름을 달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제대로 된 빙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잘 갈린 얼음이다. 어떤게 잘 갈린 얼음이냐고? '맛의 달인'을 보면 일본 화과자의 이상은 바로 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빙수에 들어가는 얼음의 이상은 함박눈이다. 눈이 되기 직전의 상태로 곱게 갈린 얼음이 바로 빙수의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 지방에서 빙수를 부를 때 빙설(氷雪)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빙수의 원형에 충실한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파는 빙수들은 저 먼 아랫길을 면치 못한다. 거칠대로 거친 빙질 때문이다. 패스투푸드점의 빙수기들은 얼음을 깎아 눈을 만드는 삭빙(削氷) 의 형태가 아니라, 얼음을 부숴 가루로 만드는 쇄빙(碎氷) 의 형태다. 이렇게 만든 빙수는 사시미에 비교하자면 언 고기를 그대로 썰어 회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팥이 중요한 재료라 해도 얼음 반 팥 반인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요즘은 어느 집이나 공장에서 나온 빙수용 팥 잼을 쓰기 때문에 팥 맛의 차별성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팥의 단 맛이 부족할 때 연유로 보강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냥 우유를 넣는 것이 보통이다. 우유는 초반 얼음이 녹기 전, 윤활제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낸다.

그러나 빙수가 발달하며 아이스커피가 최고의 윤활제로 각광받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빙수는 이렇다. 잡다한 과일 칵테일이며 콘 플레이크 등은 일단 제해 둔다. 잘 갈린 얼음에 팥을 올리고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슬쩍슬쩍 붓는다. 팥 위에 아이스크림(반드시 바닐라라야 한다)을 작게 얹고, 작은 찰떡을 좀 뿌려 준다. 그 밖에 과일 등을 얹는 것은 맛 보다는 색깔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칵테일 통조림보다는 생과일이 좋다.

커피와 얼음의 조화 때문에 커피 빙수라는 것도 등장했다. 그러나 팥이 들어간 상태에서 커피를 추가하는 것은 훌륭한 맛을 내지만, 오직 커피와 과일, 흑설탕 등속으로만 맛을 낸 것은 역시 맛의 불균형이 두드러져 별 매력이 없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최근 먹어본 한 커피 빙수는 얼음을 갈아 어찌어찌 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커피를 얼려 통 얼음을 만든 다음, 그걸 갈아서 빙수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초코 시럽과 소프트 아이스크림(우유는 이미 아이스커피에 충분히 들어간 상태였다), 콘 플레이크를 얹은 빙수 맛은 제법 일품이라 부를 만 했다. 역시 맛의 길에는 정도가 없다. 大道無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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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재래식 삭빙기를 아직도 생산해서 파는 곳들이 있더군요. 가격은 한 20만원 하는 모양입니다. 아직도 이런 맛을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기계가 팔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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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전, 일련의 고수들이 천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살수단(암살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천년 동안 역사 뒤에서 암약하며 세상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조직의 핵심이었던 한 암살자가 그들의 독선에 의심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중원은 혈겁에 휩싸이게 된다....-

네. 아주 무협지적인 구상이죠. 그리고 실제로, 영화 '원티드'는 너무도 전형적인 무협지입니다. 단지 칼이나 주먹 대신 총을 주로(칼을 안 쓰는 건 아닙니다) 쓴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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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의 주인공 웨슬리(제임스 매커보이)는 직장에서 뚱뚱한 여자 상사에게 아무리 '갈굼'을 당해도, 여자친구가 직장 동료와 바람을 피워도 아뭇소리 하지 못하는 천하의 찌질남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여신같은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그의 일상은 전쟁터가 되어 버립니다.

어찌어찌하다 자신에게 천하제일살수(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보니...)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웨슬리는 그때부터 무공을 익혀 정의 실현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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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쓰는 무협지적 영상의 역사는 아마도 허관걸 주연의 '루안살성'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마크 다카스코스의 '크라잉 프리맨'은 이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으로 두 작품 모두 일본 만화 '크라잉 프리맨'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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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영화 이후 사라진 것 같았던 총 쓰는 무협영화는 총과 무공을 조화시키지는 않았던 '매트릭스'를 슬쩍 비껴가 '이퀼리브리엄'에서 꽃을 피웁니다. 심지어 건 카타(Gun Kata)라는 마니아적인 용어도 남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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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에서 총을 사용한 무공은 '이퀼리브리엄'을 넘어섭니다. '뻥 중의 개뻥'으로 꼽힐 만한 총알 곡선으로 쏘아 보내기를 비롯해 수 킬로 밖에서 저격하기, 달리는 전철에서 쏘기 등 만화 '크라잉 프리맨'이나 '고르고 13'에서나 보여졌던 놀라운 비기들이 속속 드러나 관객을 신나게 합니다.

여기에 그가 최강의 킬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쌓는 수련, 찌질이에서 진짜 남자로 거듭나는 설정, 그를 단련시키는 다양한 고수들의 등장 등 너무도 무협지적인 도구들이 매우 완성도 높게 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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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시도를 무협의 확장으로 생각하며 유쾌하게 받아들일 관객들에겐 '원티드'는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관객들에겐 허튼 소리와 뻥으로 점철된 황당무계한 영화로 보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는 일단 '남는 것(혹은 교훈)이 있어야 한다'는 상당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이런 영화를 받아들일 공간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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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무거워지려면 얼마든지 무거워질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른바 운명의 베틀(운명의 여신들이 짜는 베에 의해 인류와 개인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신화는 그리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습니다)이 결정하는 사람을 리더가 지목하면 휘하의 킬러들이 그 사람을 척살한다는 것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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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영화에서는 직설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베틀이 짠 베 위에서 2진수로 암호화 된 한 사람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넓은 베 위에서 올 수를 세어 특정인의 이름이 나타난 부분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건 애당초, 처음부터 그 베를 해석하는 사람이 죽일 사람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가 사적인 정의 구현에 나선다는 스토리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주인공도 웨슬리처럼 "내가 죽이려는 사람이 진짜 죄인인지 어떻게 알아?"라는 고민을 단 3분만에 해치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 그따위 고민으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겠다'는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스타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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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7세. 세계 문화의 변방 중 변방인 카자흐스탄 출신의 감독이, 그것도 중앙 아시아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티무르'라는 이름의 감독이 이렇게 할리우드의 메인스트림에 뛰어들어 세계 액션 영화의 조류에 몸을 싣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 감독은 러시아 영화인 2004년작 '나이트 워치'와 2006년작 '데이 워치'를 성공시킨 결과 '원티드'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만화적인 상상력에서는 기존의 할리우드 감독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두번째 할리우드 영화가 은근히 기대됩니다.


p.s. 물론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오래 오래 여운이 남는' 영화를 원하는 분들은 절대 보시면 안되는 영화입니다. '이퀼리브리엄'이나 '콘스탄틴'에 열광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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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어느 포스터를 봐도 안젤리나 졸리의 사진이 더 크게 나온다는 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졸리가 이제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매력적으로 나오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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