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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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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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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교수대로 가는 해적 용의자들의 긴 줄이 보입니다. 그중에는 올가미에 아예 키가 닿지 않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정도 연령의 어린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우연의 손길이 닥치든, 주인공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든 어린이는 구해 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산 공포영화 '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어 버빈스키는 그따위 오랜 관습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애라고 봐주는게 어디 있어! 라는 초강경의 입장입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할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임전 태세를 보여주고 시작한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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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왔던 시대의 괴작,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기록 하나를 세웠죠. 바로 시사회 없이 극장 개봉을 해버린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들 가운데 언론(은 물론이고 배급 창구를 열어줄 극장주들을 위한) 시사회를 갖지 않고 바로 스크린에 오를 수 있는 영화는 1년에 한편 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극장주들에게든, 언론에게든 마찬가집니다. 극장들에게는 '우리 이번에 캐리비안3 갖고 왔는데 스크린 좀 내 주지? 영화를 먼저 보자고? 그럼 안 걸어도 좋고', 미디어에게는 '기사? 안 써도 돼. 어차피 사람들 다 보러 오게 돼 있어'라는 식의 자세인 겁니다. 물론 직접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자신있는 영화가 대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실 '캐리비안...' 시리즈는 정말 웃기는 작품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히트작은 있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짜임새가 엉망인 영화가 히트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짜임새는 없는데도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정말 드물죠.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 때문에, 영화가 엄청난 대박을 내거나 망하기 전에는 미디어를 통해 기사가 나오기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캐리비안의 해적 3'는 전작들 못잖게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돈 쳐 들이고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 라고 말하시는 분들, 그런 영화도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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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단, 이 영화는 1편과 2편을 보신 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3편으로 처음 이 시리즈에 뛰어드신 분들은 지독하게 불친절한 - 지나간 시절의 요약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쇼 - 대접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되살리는 데 의기투합한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 그리고 티아 달마(나오미 해리스)는 배와 선원을 구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대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갑니다. 한바탕 예의 엎치락 뒤치락을 거친 뒤, 이들은 배를 타고 이 세상의 끝의 바깥 세상에서 잭을 구해 이승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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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결코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잭을 구해내지 못한다면 영화 3편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또 아무튼 영화를 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현존하는 해적의 영주(Lord) 9명을 모아 문어대가리 해적 데비 존스(빌 나이)와 악당 베켓(톰 홀랜더)의 연합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이 시리즈 특유의 배신과 음모가 여러 차례 스치고 지나갑니다. 물론 대부분은 음모라고 하기에도 짜증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수준입니다.

1편과 2편을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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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전쟁놀이 게임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라면 무슨 게임을 하건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겠지만, 어린이들의 게임은 순식간에 룰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로운 규정이 등장합니다.

빨간 비행기는 노란 탱크와 싸우면 이기지만 노란 탱크 중에서도 꼬리에 미사일이 달린 탱크는 비행기에게 이기고, 비행기 중에서도 헬리콥터는 모든 탱크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새로 등장하는 장난감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아주 당연한 듯 인정됩니다.

'캐리비안...'의 우주도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긴 1편과 2편에 걸쳐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아홉명의 해적 영주들이 갑자기 등장하고, 데비 존스가 몰고 다니는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바뀌는 규칙(매우 중요합니다)도 어느 한 순간 등장해버립니다.

세상의 끝에서 죽은 사람을 데려오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까지 가서 데려와야 하고(예를 들면 잭 스패로우) 어떤 사람은 말만 하면 다시 살려낼 수 있는(예를 들면 바르보사) 지도 순식간에 그냥 뚝딱 설명 한마디로 정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드래곤볼로 살려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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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 3편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1편과 2편의 힘이 매우 큽니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친숙할 대로 친숙해진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죠. 즉 3편은 그 자체로서는 큰 힘을 갖고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동안 흐트려 놓았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느라 안 그래도 엉망인 플롯은 더욱 허점 투성이가 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따지는 건 정말 예의없는 행동이 되겠죠. 애당초 한번이라도 말이 되는 스토리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3편이 어느 정도 완결편의 흉내를 내느라, 그동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잭 스패로우의 등장 신을 엄청나게 줄여버렸다는 점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이 영화가 아무리 엉망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더라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조니 뎁이라는 천재 배우가 만들어낸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힘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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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쨌든 3탄에서는 이야기를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잭 스패로우까지도 평소의 말도 안 되는 행동양식을 버리고 비교적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상당히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입니다.

대신 주변 인물들의 재롱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제프리 러시는 1편에서의 악의 화신에서 벗어나 상당히 정감있고 노련한데다 어느 정도 의리까지 있는 해적 영웅으로 거듭납니다. 티아 달마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됩니다. (물론 그 역할이 영화의 줄거리에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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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 달마의 멀쩡한; 모습입니다.)

유령상태(?)의 해적인 핀텔(리 아렌버그)과 라게티(매켄지 크룩) 콤비의 유머도 일취월장했고, 여기에 배역명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영국 수병까지 제2의 코믹 콤비로 빛을 발합니다. 눈 밝은 분들은 이 두 사람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세요.

무려 2시간 40분을 뒤척댄 끝에 영화는 3부작에 걸쳐 펼쳐낸 대 로망의 끝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쉽습니다. 과연 4편이 나올까요? 현재로서는 나올 가능성이 매우 짙습니다. 각본가 테리 로시오는 "4편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니 뎁은 '대본만 좋다면 또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고, 뎁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들이야 불감증이언만 고소영이겠지요.

주인공들 중 하나인 키라 나이틀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17세부터 21세까지 이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이젠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며 속편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나이틀리가 나오고 안 나오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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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완이 없는 '캐리비안 4'는 얼마든지 구상할 수 있지만, 잭 스패로우가 없는 '캐리비안' 시리즈를 과연 '캐리비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얘기죠. 아마도 나온다면, 4편은 잭 스패로우의 또 다른 모험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와 올란도 블룸은 얼른 다른 영화를 알아보라고 하고요.

아, 물론 4편이 나온다면 또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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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고어 버빈스키가 될지, 다른 감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헛된 노력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장담을 받아야 할 겁니다. 말이 되는 잭 스패로우의 모험담은 논리정연한 오스틴 파워스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




p.s. 3편의 보너스 인물은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티그 선장입니다. 배우는 너무도 당연히, 조니 뎁이 '잭 스패로우의 모델은 이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밝혔던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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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티그 선장의 극중 모습은 없군요. ^^;

왕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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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이 영화를 케이블TV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마도 여름 시즌이라 그런 모양이죠.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다 보니 새로운 걸 느끼게 되더군요.

대체 왜 처음 이 영화를 볼때 그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이상하게도 두번째 보니 처음 볼 때에는 그냥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어설픈 플롯이며 말도 안 되는 줄거리가 자꾸만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체 처음엔 왜 이런 단점들을 쉽게 넘길 수 있었는지(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해지더군요.

처음 그때의 느낌입니다.

 


1편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세 주인공은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Pirates of the Caribbean: Dead Man's Chest)>의 도입부부터 다시 고초를 겪습니다.

윌 터너(올란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은 결혼식을 올리려는 아침, 동인도 회사에서 파견된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에게 체포됩니다. 베켓은 터너에게 잭 스패로우(조니 뎁)가 갖고 있는 망자의 나침반을 엘리자베스와 교환하자고 제의합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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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낙천적인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불분명한 잭 스패로우는 바다의 제왕 데비 존스(빌 나이)에게 진 빚 때문에 언제 괴물 오징어 크라켄의 공격을 받을 지 몰라 도망치느라 엘리자베스고 뭐고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결국 스패로우는 자신을 찾아 나선 터너를 존스에게 넘겨 버리고 도망치는데 그 덕분에 터너는 존스에게 봉사하고 있는 아버지 '부트스트랩' 빌 터너(스텔란 스칼스가드)를 만나게 되고 새로운 모험이 시작됩니다.

고어 버빈스키는 정말이지 스토리의 논리적 정합성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링>이야 원래 만들어져 있던 영화를 옮기는 것 뿐이었지만, 브래드 피트-줄리아 로버츠라는 황금 캐스팅에 제법 괜찮은 유머를 갖추고도 참패한 <멕시칸>으로도 버빈스키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 못잖게 스토리의 개연성은 형편없는 <캐리비안의 해적>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이젠 잔소리를 할 사람이 아예 사라졌겠죠.

<망자의 함> 역시 플롯을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참담할 정도입니다. 개연성은 뮤지컬 영화 수준이죠. 이 영화에서 지켜지는 설정이나 전제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적인 잭 스패로우, 해적 마니아인 살짝 맛간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스완은 그렇다 치고 그나마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윌 터너까지도 정신없는 윤무 속으로 뛰어듭니다.

터너와 스패로우, 그리고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제임스 노링턴(잭 데이븐포트) 전직 영국 해군 준장이 펼치는 3자간의 칼싸움은 그 극치를 이룹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얏!" 하고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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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엘리자베스의 배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크라켄이 노리는 것이 잭 스패로우라면 잭 스패로우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날 때 화를 낼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반대로 크라켄이 잭 스패로우가 배에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다면 같이 도망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의 함>이 재미있는 영화로 느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배우와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조니 뎁이라는 당대의 에이스가 탁월하게 해석해 낸 잭 스패로우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모든 플롯 상의 허점을 덮어 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영화 <슈퍼맨>이나 드라마 <원더우먼>을 보면서 "아니 쟤들은 저 안경 하나 썼다고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본단 말이야?"하고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캐리비안의 해적> 1편을 본 관객들은 잭 스패로우의 행동에서 논리적인 이유나 합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의 예측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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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관객들은 "대체 저게 말이 되는 소리야?" 라고 말하는 대신 잭 스패로우가 양팔을 헐랭이처럼 휘저으면서 도망칠 때 그냥 폭소를 터뜨려 버립니다. 그 편이 훨씬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밖에도 캐스팅은 여전히 성공적입니다.

매켄지 크룩과 리 아렌버그가 연기하는 라게티-핀텔 듀오의 호흡은 오히려 훨씬 좋아졌고, <러브 액추얼리>의 능청맞은 늙은 가수 아저씨 빌 나이는 문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웃음을 터뜨리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텔란 스칼스가드가 올란도 블룸의 아버지 역으로-1편에서 잭 스패로우는 "네가 빌 터너의 아들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어. 너는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거든"이라고 말하죠-나온다는 건 <망자의 함>의 가장 큰 실수라고 부를 만 합니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재능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있습니다. 조니 뎁이 모델로 삼았다고 고백한 키스 리처드도 <망자의 함>에 우정출연, 스패로우 부자의 코믹 신이 연출될 뻔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공연 문제가 겹쳐 안타깝게도 이 장면은 뒤로 미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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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함>을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 미리 드리는 팁 하나라면, 이 영화는 2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허탈해 하지 마시길. 물론, 그렇게 대강 마무리하듯 끝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단, 당신이 잭 스패로우의 팬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말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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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촬영이 진행된 시리즈 3탄에는 우리의 영원한 따꺼 주윤발 형이 해적 두목 사오 펭 역으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감독이 버빈스키라면 윤발이형이 해적들을 상대로 멋진 쌍권총 묘기를 보여준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편에서 부활하는 바르보싸(제프리 러시), 잠수 해군을 거느린 데비 존스와 함께 사오 펭이 펼칠 해적 선장 3파전이야말로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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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데비 존스의 부하들이 한 해산물 분장(?)은 너무 실감나게 징그러워서 약간 비위가 상합니다. 특히 부트스트랩의 뺨에 붙은 홍합이며 불가사리, 작은 조개껍질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얼굴 피부가 근질근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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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본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본 영화들이 좀 나빴어야 나중에 보는 영화가 득을 보기 마련인데, 왠지 <비열한 거리>에 비해 좋게 보기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초반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어린 아들을 보살피는 하형사(박중훈)는 이미 무능하고 부패한 형사로 낙인이 찍혀 있는 인물입니다. 어느날 술집 주인에게 보호비를 뜯으러 간 사이 파트너가 괴물같은 킬러 철민(김준배)에게 살해당하자 하형사는 상부의 문책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한때 잘 나가던 칼잡이였던 수현(천정명)은 손을 씻고 미래(유인영)와 함께 버스형 스낵코너를 운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그 앞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재필(최창민)이 나타나 누군가를 손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겹치며 수현은 경찰에 체포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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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현에게는 저지른 것의 몇 배나 되는 혐의가 씌이고, 수현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합니다. 공교롭게도 하형사가 수현의 인질이 되고 이때부터 두 남자의 치고받는 버디 드라이브가 시작됩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느낌은 대단히 낯설다는 것입니다. 조민호 감독에 따르면 영화 환경의 80%는 종로구 일원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는 지역들을 골라 찍은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더구나 조직에서 손을 씻고 라면을 끓이며 사는 미남 조폭이라는 설정과 한국의 조폭들이라기보다는 마피아를 연상시키는 암흑가 인물들의 모습이 사뭇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답을 내렸습니다. 아, 이 영화는 판타지다.

하지만 얼마 뒤, 형사들의 사실감 넘치는 대화가 등장하고, 하형사의 파트너 장례식장이 나오고, 몸을 던져 범인과 격투를 벌이는 형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리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새 영화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형사 드라마가 되어 있습니다.

한 영화에서 두 개 이상의 장르가 충돌하는 경우는 적지 않고, 그게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강적>에서 이 두 장르의 결합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현실적인 악당들과 싸우다 보니 현실적인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그리 쉽지 않게 돼 버렸습니다.

출발이 판타지(또는 동화)였던 덕분에 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럽 여가수(문정희)-하형사-수현의 한강 신이나 수의사 공선생(염혜란)이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와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에서 바로 칼날과 주먹이 부딪는 리얼한 장면으로 넘어갈 때마다 영화는 무척이나 덜컥거립니다. 주인공들의 현실적인 고민이 다시 수현과 미래의 러브스토리로 넘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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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악역인 킬러 철민 역의 연극배우 김준배는 인상적인 호연을 펼쳤지만 영화 내내 겉돌고 있습니다. 철민이 상징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폭력의 위협이 이 영화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완성된 영화에서 철민이 등장하는 장면은 초반에 강조된 느낌에 비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 감독도 고심 끝에 철민의 신들을 최소화할수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마지막 신에서 조민호 감독은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신에 저 멀리 보이는 도시가 실재하는 서울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현실적이지 않은 악당들과 형사들이 나오는 동화, 땀냄새를 풍기는 거친 사나이들이 치고 받는 하드보일드 수사물, 아무래도 <강적>은 둘 중 하나의 노선에 보다 충실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흥행 성적이 그리 폭발적이지 않았던 것은 월드컵의 영향도 있었지만, 관객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p.s.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오순택씨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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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들에는 다양한 상표의 상품들을 비교해서 소비자들이 순위를 매기는 코너가 여기저기 실립니다. 최근 그중 하나로 각 패스트푸드점의 빙수맛을 비교한 코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어지간해서 빙수를 먹지 않습니다. 먹고 나서 더 불쾌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빙수를 먹는 이유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시원함에 있는데, 끈적끈적한 단맛만 입에 남아 갈증이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순위를 매겨봐야 거기서 거기죠. 사실 3천원 내외의 빙수에 뭘 기대하기도 그렇습니다.

물론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다 형편없는 빙수만 있는 건 아닙니다. 프레쉬니스버거라는 패스트푸드점의 빙수(위 사진)는 웬만한 빙수 맛있다는 집들의 맛을 능가합니다.
 무엇보다 팥이 통조림 팥이 아니더군요. 팥알의 씹히는 맛이 살아 있고 당도도 적당했습니다. 거기에 흔해빠진 언 찰떡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넣어주는데 그만이었습니다.

요즘 강남의 카페 언저리를 가면 '명품 빙수'라면서 1만원 언저리의 맛있는 빙수라는 것들이 유행하는데 이 집 빙수는 그 절반 정도 가격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겨울에는 빙수를 안 판다는 정도. 겨울에는 아쉬운 대로 현대백화점 밀탑으로 가기도 하죠.

이렇게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빙수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고 환장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제 입맛에 맞는 빙수는 매우 고전적인 형태라서, 길거리에 널린 대다수 빙수들도 그냥 참고 먹지만 아쉬움을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어디다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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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빙수론(氷水論)


내 삶에 차가운 음식이 세가지 있으니 그것이 냉면이고, 빙수고, 차가운 맥주다.

일찌기 한방에 밝은 지인이 "당신 체질에는 찬 음식이 안 어울린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음식은 맨 찬 음식인 것을 어쩌랴. 항상 냉면집에 가면 사리를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빙수 한 사발'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가며, 무한정 마시는 주당은 아니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에는 그저 무릎을 꿇고 만다. 특히 하이네켄, 후갸든, 사무엘 아담스, 칭따오, 그리고 삿포로 生이라면 그냥 넘어갈 뿐이다.

빙수의 마수에 처음 걸려든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쯤 된다. 집 바로 골목 건너에 반 가건물 형태의 떡볶이 집이 생겼다. 처음 생긴건 이른 봄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이 되자 그 집 벽에는 '팥빙수 개시'라는 벽보가 붙었다. 30원.

누나 손에 이끌려 빙수를 시켰다. 에펠탑 비스무레한 기계에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얼음이 얹혔고, 재봉틀처럼 큰 바퀴가 돌았다. 맘씨좋은(?) 아줌마는 한번 갈아서 수북히 쌓인 얼음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한번 얼음을 갈아 얹었다. 그 위에 단팥이 세 술, 잘게 썬 젤리가 세 술, 서울우유 깡통에 담긴 연유가 휘휘 뿌려졌다. 아줌마는 빨간 병에 든 빨간 물을 찔끔, 녹색 병에 든 녹색 물을 찔끔 하더니 그릇에 숟갈 두개를 꽂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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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이 추억을 그대로 되살린 듯한 이미지가 있더군요. 사진 출처에 양해를 구해보려 했습니다만 저 사이트는 이미 없어졌길래 그냥 퍼 왔습니다.^)


오오.

오뎅을 처음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온몸을 휩쓸었다. 입안 가득 퍼졌다 사라지는 이 냉엄하고도 달콤한 맛이라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팥알 몇개가 뜬 그릇 바닥을 아쉬움 가득한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가정용 빙수기 따위는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잔돈만 생기면 떡볶이집으로 달려갔다. 몇번인가 설사도 하고 배탈도 났지만, 감히 그것이 빙수 때문이라고는 의심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내가 만약 건강한 편이었다면 빙수 같은 건 당장에 못 먹게 됐을 거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아줌마는 2단으로 담던 얼음을 3단으로(두번 꾹꾹 눌러서) 담아 주기도 했고, 가끔 "이렇게 빙수에 환장한 놈 첨 봤다. 원없이 먹어 봐라"라며 냉면 사발에 얼음을 갈아 특제 빙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마법의 빨간 병과 녹색 병에 맛을 내는 비장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것 좀 많이 넣어 달라"는 말에 히죽 웃으며 "이거 많이 넣으면 써서 못 먹어"라고 못을 박았다. 알고 보니 그건 그냥 색소였다.

그 뒤로 근 30년 동안 빙수를 먹어 왔지만, 빙수는 뭐니 뭐니 해도 팥빙수가 제격이다. 대체 과일 빙수라는 음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맨숭맨숭하고 밋밋한 것은 빙수라는 이름을 달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제대로 된 빙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잘 갈린 얼음이다. 어떤게 잘 갈린 얼음이냐고? '맛의 달인'을 보면 일본 화과자의 이상은 바로 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빙수에 들어가는 얼음의 이상은 함박눈이다. 눈이 되기 직전의 상태로 곱게 갈린 얼음이 바로 빙수의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 지방에서 빙수를 부를 때 빙설(氷雪)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빙수의 원형에 충실한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파는 빙수들은 저 먼 아랫길을 면치 못한다. 거칠대로 거친 빙질 때문이다. 패스투푸드점의 빙수기들은 얼음을 깎아 눈을 만드는 삭빙(削氷) 의 형태가 아니라, 얼음을 부숴 가루로 만드는 쇄빙(碎氷) 의 형태다. 이렇게 만든 빙수는 사시미에 비교하자면 언 고기를 그대로 썰어 회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팥이 중요한 재료라 해도 얼음 반 팥 반인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요즘은 어느 집이나 공장에서 나온 빙수용 팥 잼을 쓰기 때문에 팥 맛의 차별성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팥의 단 맛이 부족할 때 연유로 보강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냥 우유를 넣는 것이 보통이다. 우유는 초반 얼음이 녹기 전, 윤활제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낸다.

그러나 빙수가 발달하며 아이스커피가 최고의 윤활제로 각광받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빙수는 이렇다. 잡다한 과일 칵테일이며 콘 플레이크 등은 일단 제해 둔다. 잘 갈린 얼음에 팥을 올리고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슬쩍슬쩍 붓는다. 팥 위에 아이스크림(반드시 바닐라라야 한다)을 작게 얹고, 작은 찰떡을 좀 뿌려 준다. 그 밖에 과일 등을 얹는 것은 맛 보다는 색깔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칵테일 통조림보다는 생과일이 좋다.

커피와 얼음의 조화 때문에 커피 빙수라는 것도 등장했다. 그러나 팥이 들어간 상태에서 커피를 추가하는 것은 훌륭한 맛을 내지만, 오직 커피와 과일, 흑설탕 등속으로만 맛을 낸 것은 역시 맛의 불균형이 두드러져 별 매력이 없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최근 먹어본 한 커피 빙수는 얼음을 갈아 어찌어찌 한 것이 아니라, 아이스커피를 얼려 통 얼음을 만든 다음, 그걸 갈아서 빙수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초코 시럽과 소프트 아이스크림(우유는 이미 아이스커피에 충분히 들어간 상태였다), 콘 플레이크를 얹은 빙수 맛은 제법 일품이라 부를 만 했다. 역시 맛의 길에는 정도가 없다. 大道無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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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재래식 삭빙기를 아직도 생산해서 파는 곳들이 있더군요. 가격은 한 20만원 하는 모양입니다. 아직도 이런 맛을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기계가 팔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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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전, 일련의 고수들이 천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살수단(암살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천년 동안 역사 뒤에서 암약하며 세상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조직의 핵심이었던 한 암살자가 그들의 독선에 의심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중원은 혈겁에 휩싸이게 된다....-

네. 아주 무협지적인 구상이죠. 그리고 실제로, 영화 '원티드'는 너무도 전형적인 무협지입니다. 단지 칼이나 주먹 대신 총을 주로(칼을 안 쓰는 건 아닙니다) 쓴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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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의 주인공 웨슬리(제임스 매커보이)는 직장에서 뚱뚱한 여자 상사에게 아무리 '갈굼'을 당해도, 여자친구가 직장 동료와 바람을 피워도 아뭇소리 하지 못하는 천하의 찌질남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여신같은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그의 일상은 전쟁터가 되어 버립니다.

어찌어찌하다 자신에게 천하제일살수(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보니...)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웨슬리는 그때부터 무공을 익혀 정의 실현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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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쓰는 무협지적 영상의 역사는 아마도 허관걸 주연의 '루안살성'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마크 다카스코스의 '크라잉 프리맨'은 이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으로 두 작품 모두 일본 만화 '크라잉 프리맨'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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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영화 이후 사라진 것 같았던 총 쓰는 무협영화는 총과 무공을 조화시키지는 않았던 '매트릭스'를 슬쩍 비껴가 '이퀼리브리엄'에서 꽃을 피웁니다. 심지어 건 카타(Gun Kata)라는 마니아적인 용어도 남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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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에서 총을 사용한 무공은 '이퀼리브리엄'을 넘어섭니다. '뻥 중의 개뻥'으로 꼽힐 만한 총알 곡선으로 쏘아 보내기를 비롯해 수 킬로 밖에서 저격하기, 달리는 전철에서 쏘기 등 만화 '크라잉 프리맨'이나 '고르고 13'에서나 보여졌던 놀라운 비기들이 속속 드러나 관객을 신나게 합니다.

여기에 그가 최강의 킬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쌓는 수련, 찌질이에서 진짜 남자로 거듭나는 설정, 그를 단련시키는 다양한 고수들의 등장 등 너무도 무협지적인 도구들이 매우 완성도 높게 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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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시도를 무협의 확장으로 생각하며 유쾌하게 받아들일 관객들에겐 '원티드'는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관객들에겐 허튼 소리와 뻥으로 점철된 황당무계한 영화로 보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는 일단 '남는 것(혹은 교훈)이 있어야 한다'는 상당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이런 영화를 받아들일 공간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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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무거워지려면 얼마든지 무거워질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른바 운명의 베틀(운명의 여신들이 짜는 베에 의해 인류와 개인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신화는 그리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습니다)이 결정하는 사람을 리더가 지목하면 휘하의 킬러들이 그 사람을 척살한다는 것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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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영화에서는 직설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베틀이 짠 베 위에서 2진수로 암호화 된 한 사람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넓은 베 위에서 올 수를 세어 특정인의 이름이 나타난 부분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건 애당초, 처음부터 그 베를 해석하는 사람이 죽일 사람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가 사적인 정의 구현에 나선다는 스토리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주인공도 웨슬리처럼 "내가 죽이려는 사람이 진짜 죄인인지 어떻게 알아?"라는 고민을 단 3분만에 해치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 그따위 고민으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겠다'는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스타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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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7세. 세계 문화의 변방 중 변방인 카자흐스탄 출신의 감독이, 그것도 중앙 아시아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티무르'라는 이름의 감독이 이렇게 할리우드의 메인스트림에 뛰어들어 세계 액션 영화의 조류에 몸을 싣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 감독은 러시아 영화인 2004년작 '나이트 워치'와 2006년작 '데이 워치'를 성공시킨 결과 '원티드'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만화적인 상상력에서는 기존의 할리우드 감독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두번째 할리우드 영화가 은근히 기대됩니다.


p.s. 물론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오래 오래 여운이 남는' 영화를 원하는 분들은 절대 보시면 안되는 영화입니다. '이퀼리브리엄'이나 '콘스탄틴'에 열광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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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어느 포스터를 봐도 안젤리나 졸리의 사진이 더 크게 나온다는 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졸리가 이제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매력적으로 나오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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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에 오신걸 축하드립니다. 뭐 대단한 이벤트는 아닙니다만, 이번엔 퀴즈도 풀고 상품도 있는 진짜 행삽니다. 그동안 맞추는 데 의의가 있었던 그런 퀴즈는 아닙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PIXAR)가 7월2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는다고 합니다(홈페이지는 여기 http://www.pixar2008.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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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쓰면 픽사가 무엇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겠군요. 그냥 '토이 스토리' 1편과 2편,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스', '카즈', '라따뚜이' 등등을 만든 회사입니다. 한마디로 '쿵푸팬더', '슈렉' 등을 만든 드림웍스와 함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죠.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 걸작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사용됐던 원화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쓰였던 3D 프로토타입, 그리고 어린이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작과정 등이 마련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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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를 주최하는 회사에서 제 블로그의 이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고맙게도 티켓 협찬을 해 주셨습니다. 이걸 어떻게 나눠드리나 고민을 하다가, 평소 하던대로 퀴즈를 내겠습니다.

물론 옛날에 스핑크스가 냈던 것보다는 어렵습니다. 정답을 모두 맞춘 분으로 한해 선착순 10분에게 'PIXAR IN SEOUL' 전시회 티켓을 2장씩, 나머지 5분께는 아차상(뭘까요?)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문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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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이 스토리 2'의 영화 음악 중에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에도 사용돼 주목을 끈 관현악곡이 있습니다. 극장판 '심슨스', '매그놀리아', '찰리와 초콜렛 공장'에도 나오는 이 곡은 무엇일까요?

(힌트: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입니다.)

네, 정답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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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마이크의 목소리를 맡은 빌리 크리스탈은 사실 '토이 스토리'에도 출연할 뻔 했습니다. 그럼 크리스탈이 '토이 스토리'에서 제의받은 역할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요? (크리스탈은 영화를 본 뒤 '이 역할을 하지 않은 건 내 경력의 오점'이라고 한탄까지 했다는군요. 아, 빌 머레이도 이 역할을 제의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힌트: 우디는 아닙니다.^^)

정답: 우디가 아니면 당연히 버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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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크레더블'에서 슈퍼 영웅들의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 에드나는 실제 존재하는 이 사람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할리우드의 의상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이 사람은 누굴까요?

(힌트: 아카데미 의상상을 8개나 받은 분이죠.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등등...)

정답은 에디스 헤드(Edith Head)입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인지 아셨나요?
참고로 안나 수이, 안나 윈투어라는 오답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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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헐크' 에릭 바나는 '니모를 찾아서'에 단역 목소리를 맡아 출연했습니다. 에릭 바나가 연기한 '앵커'라는 캐릭터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일까요?

(힌트: 눈 사이가 굉장히 넓죠. 망치 끝 같이...)

정답은 귀상어, 혹은 망치상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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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픽사의 역사를 되새기면 1986년 제작한 '룩소 주니어(Luxo Jr.)'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단편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무엇일까요?

(힌트: 픽사의 상징)

네. 바로 탁상용 스탠드(전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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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픽사가 월트 디즈니의 브랜드를 달고 내놓은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토이 스토리'입니다. 그럼 1991년, 최초로 픽사가 크레딧에 이름을 올려 놓은 월트 디즈니의 히트작 애니메이션은 무엇일까요?

(힌트: 주요 출연진 중에 촛불과 주전자가 있죠.)

힌트를 보시고도 못 맞추신다면 그건 좀... 당연히 '미녀와 야수'.





아무튼 이렇게 해서 PIXAR 관람권 받으실 분 10명과 아차상(?) 5분이 모두 정해졌습니다.

이벤트에 참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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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뉴스 사진입니다.)

올해들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양준혁이 요즘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프로야구 최고참 자리를 다투고 있는 이 노장의 분전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옛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95년 여름의 어느 날입니다. 당시 삼성은 어정쩡한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방망이는 괜찮았습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주역이던 방망이는 비록 김성래가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지만 양준혁을 중심으로 신인 이승엽, 무명 중고신인 이동수(결국 95년 신인왕이 됩니다), 그리고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의 후광을 받은 신동주와 최익성 등이 수혈되면서 만만찮은 기세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투수력. 김태한과 박충식을 제외하곤 믿을 선수가 없었습니다. 오봉옥이 잠시 구원투수로 반짝했지만 불펜의 양과 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롯데전 전담요원 성준이 아직 건재했지만 일단 선발이 무너지면 대책이 없는 게 당시 삼성의 팀 사정이었습니다.

아무튼 팀 성적이 썩 좋진 않았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대구구장에 인조잔디를 깔고 관중석을 정비한 이후 대구구장은 연일 매진 행진을 벌입니다. 뭣보다 양준혁-이동수-이승엽의 클린업이 인기의 중심 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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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차에 팀의 중심이 된(물론 데뷔 시즌에도 중심이었지만) 양준혁은 영 삐딱한 성격이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친해지고 나면 의리도 두터운 친구였지만 아무튼 대구인 특유의 뻣뻣함이 돋보이는 인물이라 기자들에게는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타플레이어이니 멀리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김성근 백인천 같은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습니다. "3할을 치잖습니까"라면 "양준혁 정도면 3할3푼에 홈런 30개 정도는 기본으로 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더군요. '스윙이 나빠 체격에 비해 홈런이 적게 나온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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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코치'가 1루에 나가 있을 때도 있었군요. 뒤는 더구나 신경식...^^
참, 대부분의 사진은 http://www.yangjunhyuk.com 에서 퍼 온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당시 1994년에 이어 95년에도 삼성을 맡았고, 동봉철 김태한 양준혁 등 88학번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준이나 류중일 같은 선수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고참 선수들은 대개 기자들에게도 '틱틱거리는' 걸로 유명했죠.

강기웅 김용국 이종두 같은 선수들은 팀 성적에 비해 스타의식이 지나친 선수들로 불렸습니다. 그걸 보고 기자들은 "아직도 삼성이 최강팀인줄 안다"고 말하곤 했죠. 결국 이들 선수들은 96년 백인천 감독에 의해 대거 정리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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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 길었는데, 양준혁은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사고를 한번 칩니다. 95년의 어느 여름날, 삼성과 LG가 대구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중반, 양준혁이 친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쭉 뻗어나갔는데, 어기적 어기적 하던 LG 중견수 최훈재의 글러브에 맞고 공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이때 전광판에는 E자 아래 불이 들어왔습니다. 안타가 아니라 최훈재의 실책이란 판정이 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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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외야로 공이 나간 경우, 에러보다는 안타 판정이 나는 게 대부분이긴 했기에 약간 의외다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에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기자실과 같은 층에 있는 기록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러 판정에 격분한 양준혁이 기록실로 뛰어올라와 문을 발로 걷어 차며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분명 어느 쪽으로도 판정이 날 수 있었습니다. 에러로 판정을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경기후 이 소식을 들은 최훈재는 "아니 그건 내가 실수한게 맞는데 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공식 기록원의 판정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선수가 그것도 경기중에 기록실 문을 발로 차면서 안타-실책 판정에 항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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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는 양준혁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우루루 떴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양준혁은 무척 분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욕할 수가 있느냐는 항의를 해왔습니다.

다음날 낮, 경기장에서 양준혁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욕을 먹을 상황이다. 어떻게 선수가,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스타플레이어가 기록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했죠. 그는 이런 부분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관례상 외야수가 포구를 못 했을 때 실책으로 판정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럼 선수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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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말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프로 선수는 안타 하나를 치는데 정말 목숨을 건다. 선수에게서 안타 하나를 빼앗는 것은 선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죠. 그럼 저도 "기자도 기사 하나 쓰는데 목숨을 건다"고 맞섰어야 하는데, 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제가 '기자계의 양준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훌륭한 기자 중에는아마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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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월이 흘러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2000개의 안타를 친 타자가 됐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날 그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 한개 한개의 안타에 대한 '목숨을 걸고 친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영광도 없었겠죠.

일본과 미국에서는 대 선수의 기준이 3000안타입니다. 경기 수도 많고, 병역 의무도 없는 나라와 비교하자니 한국에서의 기준은 낮춰질 수밖에 없죠. 양준혁이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서 활약했다면 지금쯤 3000안타를 넘어섰거나 넘보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앞으로 누가 나오건 당분간 2000안타를 넘볼 선수도 쉽지 않습니다. 과연 양준혁이 스스로 목표라고 밝힌 3000안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얘기 하나.

지금은 오히려 그런 얘기를 덜 듣지만, 신인 시절 그는 '머리가 크다'는 말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습니다. 삼성의 김상엽, 롯데의 주형광 임수혁과 함께 4대 거두로 불리기도 했죠. 94년인가 95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야구장에 나가 그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나: 어이 양군, 머리가 크면 정말 야구를 잘 하나?

늘 그냥 씩 웃고 말던 그가 한마디 하더군요.

양: 내가 요즘 눈여겨 봤는데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
나: 에이, 설마 자네랑 비교가 될까?
양: 아니, 말로 할 거 없이 내 모자 한번 써 봐요.

설마 하는 생각에 그가 벗어서 내미는 헬멧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려는 순간, 이.럴.수.가.... 헬멧이 안 들어가는 겁니다. 허걱.;

그 다음부터 선수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저를 잘 알아보더군요. 대신 닉네임은 좀 길었습니다. '준혁이 모자도 안 들어가는 기자'라구요. 정말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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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LG 시절의 모습. 역시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은 양준혁은 왠지 가짜같습니다.

마지막으로 2006 까지의 통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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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꿈의 성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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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모두 고개를 흔들던 이 타법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만세! 타법.^^

아무튼 부상 없이 무사히 선수생활을 마치고, 이미 대구상고 재학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삼성라이온스 감독'이 되어 무궁무진 활약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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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인 21은 두 가지 숫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블랙잭을 상징하는 카드의 합계, 또 하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입니다.

영화 '21'이 흥미로운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딱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플롯에 있습니다. 'MIT에 다니는 수학 천재들이 라스베가스 카지노의 블랙잭에 도전, 수백만달러를 딴 이야기'라는 부분이죠.

특히 'MIT 수학천재들의 라스베가스 무너뜨리기(Bring down the house)'라는 논픽션 원작의 존재는 더욱 흥미를 끕니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존재하는 MIT 블랙잭 팀 소속 멤버들을 살짝 변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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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졸업반의 가난한 수재 벤(짐 스터지스)은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 합격하고도 총 30만달러에 달하는 학비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미키 로사 교수(케빈 스페이시)가 놀라운 제안을 해 옵니다.

뛰어난 머리를 이용한 카드 카운팅으로 라스베가스에서 돈을 긁는 팀이 존재하고, 그 팀에 결원이 생겼으니 들어오라는 거죠. 심지어 짝사랑하던 여학생 질(케이트 보스워스)이 그 팀의 멤버이기도 합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벤은 결국 "딱 학비만 따자"는 생각으로 팀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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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성공적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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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도박으로 딴 돈에 그리 관대하지 않습니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의 장학금이 장애인에게 유리하듯, 도박으로 딴 돈을 가져갈 수 있는 주인공은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 형제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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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는 할리우드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이른바 '수재 영화'와 TV 시리즈 '라스베가스' 사이에서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일단 수재 영화 쪽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수재들의 세계를 그리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 몬티 홀 문제. 처음 강의실에서 미키 교수는 벤에게 3개의 문을 가진 퀴즈 진행자 문제를 내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는 설정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연자가 A, B, C라는 세 문 중 하나를 선택해 자동차가 나오면 그 자동차를 선물로 주는 퀴즈 쇼가 있다. 3개의 문중 하나에는 자동차가 있지만 나머지 두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출연자가 문 A를 열자 진행자는 선택되지 않은 문 두 개(B, C) 중 하나를 열어 염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혹시 본래의 선택을 바꾸겠느냐"고 물어본다. 이때 출연자에게는 선택을 바꾸는 것이 유리할까, 본래의 선택을 그냥 유지하는게 유리할까?'


자,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렇습니다. '남은 문은 2개. 그럼 뭘 고르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 하지만 확률과 통계란 상식과 가끔 차이를 보여줍니다. 통계학적으로 출연자가 선택을 바꾸는 것이 본래의 선택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 2배 더 높은 당첨 확률을 갖고 있습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이해하는게 좋습니다. 당초 3개의 문이 있을 때 출연자는 1/3의 확률로 선택을 합니다. 즉 그가 고른 문 뒤에 차가 있을 확률이 1/3, 고르지 않은 두 문중 하나에 차가 있을 확률이 2/3입니다. 그런데 사회자는 나머지 두 문 중 하나를 열어주면서 2/3의 확률이 있는 쪽으로 옮겨 탈 수 있는 기회를 준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가야 하죠.

물론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실 분이 있을 거니다. 지금까지 저의 경험으로는,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분은 못 알아듣더군요. 다만 계산은 정확하고, 실제로 충분히 큰 횟수의 테스트를 해 봐도 같은 스코어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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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해 두고 싶은 이야기는 이 몬티 홀 문제(이 문제의 이름입니다)를 MIT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겁니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수학 전공 학부생들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문제기 때문이죠. 또 웬만큼 퍼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두번은 들어봤을 문젭니다.

이 문제로 미키 교수가 벤의 능력을 알아본다는 건, 대학 영문과 4학년 전공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햄릿의 결말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그걸 맞춘 학생을 "정말 대단한 녀석인걸!"이라고 감탄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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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카드 카운팅이란 가능할까요? 물론 레인맨이 아니라도 가능합니다. 블랙잭을 아는 분들이라면 당여한 얘기지만, 블랙적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받을 다음 한 장의 카드가 그림(10 또는 왕족)일까, 또는 로 넘버(특히 2, 3, 4, 5, 6)일까 하는 것이죠.

가장 고전적인 카운팅은 그림 카드에게 +1, 로 넘버에는 -1의 값을 주고 덧셈 뺄셈을 하는 겁니다. 나머지 카드는 당연히 0이죠. 카드 한 벌은 13곱히기 4로 52매. 카드가 모두 오픈되면 숫자는 0이 됩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카드 32매가 사용됐고 카운트가 +10이라면, 나머지 20장의 카드에서 -10이 나와야 합니다. 0값의 카드가 골고루 사용됐다면 이제부터 남은 카드 중에는 절대적으로 로 넘버가 많다는 뜻이 되죠.

물론 이건 카드를 단 한벌 사용할 때의 얘깁니다. 당연히 카지노 측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 4벌, 혹은 6벌(six deck)의 카드를 사용하죠. 그것도 커트를 해서 일정 부분만 사용합니다. 모두 카운팅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정교한 카드 카운팅 기법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설의 MIT 팀 멤버 중 몇 사람은 아예 blackjakinstitute.com이란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카드 카운팅을 가르치는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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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영화 '21'은 수재의 세계도, 블랙잭의 세계도, 더구나 카드 카운팅의 세계도 어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평작입니다.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초보적인 설교 또한 유치할 뿐입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건 한때 올란도 블룸의 애인으로 유명했던(그래서 그가 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케이트 보스워스가 예쁘게 나온다는 정도일까요?

거기에 관심 없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기보다는 원작을 읽거나, 블랙잭에 대한 책을 사서 보시거나, 아니면 드라마 '라스베가스' 시리즈를 구해 보시거나 하기를 권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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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한국계 배우 아론 유가 등장인물 중 '초이'라는 한국인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버드 메디컬 학장도 한국인 유학생을 거론하죠. 아이비리그에 한국 학생들이 많긴 많은가봅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프로 갬블러 중에는 또 동양인이 많죠. 사람들에 따르면 영화의 주인공 벤 캠블의 캐릭터는 한때 MIT 팀의 리더였던 제프 마(당연히 중국계겠죠)에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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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카드 카운팅은 미국 어디에서도 합법입니다. 다만 카지노 업주들은 자신들의 영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정도로 베팅이 큰 카드 카운터들은 적발해서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랍니다.

이건 무슨 규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떤 개인사업자도 사업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손님을 내쫓을 수 있다는 원칙에 준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10년 목욕 안 한 사람은 공중목욕탕에서 안 받는게 당연하다는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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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매직이 유로 2008에서 부활했죠. 네덜란드까지 이길 줄은 정말 몰랐는데, 역시 네덜란드는 뒷심이 없는 팀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전력을 보면 어느 팀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절대 우승을 못하는 팀들이 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죠.

또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납니다. 히딩크 감독이 희동구가 된 사연에 관련된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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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뜨거운 열기가 온 나라 안에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열기가 뿜어나온 것은 6월4일, 폴란드전에서 한국이 월드컵 본선 사상 첫 1승을 올린 다음부터라고 얘기해야 정확할 겁니다.

당시 다른 회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저도 한 술집에서 폴란드전의 승리에 들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 히딩크 시나리오가 뭔지 알지?"

인터넷에는 일찌감치 히딩크가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축구당을 만들어서 대통령에 출마한다, 뭐 히딩크교가 생긴다 어쩐다 하는 유머가 나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죠.

"그럼 그 속편을 빨리 우리가 발굴해야겠다."

속편 같은 건 본 적도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원작도 없는데 무슨 속편입니까.

"니가 만들어."

만들라니요. 이건 기자로서의 윤리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어차피 농담인데 뭘 그래. 그리고 니가 만들어서 유행시키면 될 거 아냐."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요즘 분위기면 그런 건 아무도 따질 사람 없으니까 걱정 말고 재미있게만 만들어라. 진짜로 유행이 되면 될거 아니냐' 는 지시였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히딩크를 영웅으로 만드는 분위기'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터이므로 다음날 뚝딱뚝딱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OK가 나서 신문에 실렸습니다.


http://www.sportschosun.com/news/news.htm?name=/news/life/200206/20020606/26f81001.htm

(옛 직장이지만 이제는 경쟁사 비슷한 처지라 그냥 퍼올수가 없어서 링크를 걸었습니다. 보실 분은 좀 불편하지만 직접 건너가서 보시길. ;)

다른 건 뭐 다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이미 인터넷에 떠돌던 이야기에 살을 입힌 것인데 두 가지는 좀 신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4강에 오를때'의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라는 이름을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결승에 오를 때'에서  '한국 국민이 되더라도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선거법 규정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후자는 선관위에 문의해서 알아본 내용이었거든요.

'희동구'라는 이름은 개화기 한국에 기여한 외국인들이 대부분 원두우(언더우드), 석호필(스코필드) 처럼 한국식 개명을 한 것을 본딴 것입니다. 굳이 '히동구'가 아니라 '희동구'라고 한 것은 '히딩크'의 '히'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라서 가능한 한 발음이 비슷한 한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한문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성은 당연히 기쁠 喜, 이름은 동방의 공이라는 뜻으로 東球 정도로 생각했고 본관인 상암은 당연히 상암 경기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동구'란 이름은 그 뒤로 엄청나게 널리 쓰였습니다. 간혹 '히동구'라는 경쟁 표기도 보였고 한자의 뜻까지 생각한 '희등구' '희동규'라는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희동구'가 대세가 되는 걸 보고 신이 났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희동구'라는 이름을 새긴 주민등록증도 인터넷에 등장하더군요. 발급일은 월드컵 개막일인 5월31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喜東丘라는 한자는 저 주민등록증을 만든 분이 붙이신 걸 겁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서 그 유명한 이규태 칼럼에도 '상암 희씨'라는 말이 나온 걸 보고 혼자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노파심에서 토를 달지만 제가 이 이름에 대해서 무슨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희동구'라는 이름은 누구도 조금만 생각하면 지을 수 있는 별명이고, 누군가는 우연히 같은 별명을 붙인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선동열 감독의 별명인 '무등산 폭격기'를 지은 것도 어느 기자일텐데 이 별명이 이렇게 히트했다고 해서 그분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가겠습니까. 그저 만만한 주위 사람들에게 '저게 어떻게 해서 나온 건줄 알아?' 하면서 흐뭇해하고 마는 거죠. )

이 전통을 잇듯 2006년 대표팀을 한때 지휘했던 조 본프레레에게는 '조봉래', 본선 대회를 이끈 아드보카트 감독에게는 어느새 '안두복'이라는 한국 이름이 붙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허정무 감독에게는 이런 이름이 필요없겠죠. 다 지나간 시절의 기억입니다.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이제 나이들어 스웨덴 대표팀은 못 맡겠다고 손을 홰홰 젓지만 그래도 한번쯤 월드컵 우승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 개인적으로는 히딩크가 지휘하는 아프리카 팀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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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히딩크는 왕년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경기를 지휘하는 스타일이나 선수를 선발하는 스타일 등은 전혀 다르지만, 약팀의 무명 선수들을 강하게 조련해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 놓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강팀에서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히딩크도 한때 바르셀로나 감독을 했고 김성근도 90-92년 삼성 감독을 했습니다. 성적은 둘다 그저 그랬죠), 우승은 시키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다 아다시피 김성근 감독도 이제는 우승을 시킬 수 있는 감독이 됐죠.^^ 히딩크도 언젠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키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p.s. 저 회사의 웹 관리에 문제가 있는지 링크가 깨지고 기사가 안 나오더군요. 사실 기사라고 하기도 유치한 장난이지만, 모두가 행복했던 그 시절엔 아무도 그런 걸 문제삼지 않더군요.^^

그냥 본문을 첨부합니다. 2002년 6월6일 기삽니다.






히딩크의 축구당 창당, 귀화설 운운했던 히딩크시나리오에 이어 2탄격인 신 히딩크시나리오가 나돌아 화제다.'히딩크 사단'이 16강을 넘어 더 좋은 성적을 낸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막힌 스토리. 인터넷과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공전절후의 사태, 즉 히딩크 가상시나리오를 공개한다. < 편집자주>


한국 4강 오르면... 히딩크 귀화...'상암 희씨' 시조

한국을 빛낸 위인에 선정
 
16강에 오를때

히딩크는 "16강은 애당초 목표도 아니었다"는 코멘트로 한국 국민들을 열광시킨다. 종래의 '히사모'(히딩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히귀모'(히딩크를 귀화시키기 위한 모임)로 변해 '히딩크 잡기'에 나선다, 히딩크의 매니지먼트사에서는 몸값 관리를 위해 광고 모델제의를 전면 거절하고, 노래방 히트곡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이 히딩크가 들어간 가사로 개사되어 나온다.

출판사 종신 모델로 고용
 
8강에 오를때
 
히딩크를 스카우트하려는 일본을 비롯한 축구 개도국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보디가드가 붙는다. 일단 히딩크는 2006년까지 대표팀을 맡게 된다. 히딩크의 캐릭터 상품 '히동크'가 등장해 인기를 끈다. 히딩크 붐으로 네덜란드에 '조기 축구 유학'을 보내려는 과열 학부모들 때문에 네덜란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 치열한 경쟁 끝에 '꼴찌가 우등생 되는 법'을 주제로 한 학습교재 출판사에서 히딩크를 종신 광고 모델로 고용한다.

4강에 오를때
 
히딩크가 밀려드는 권유와 압력에 귀화,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로 개명한다. 히딩크의 조상이 한국인이었다는 설이 재야 사학계에서 제기된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사실은 희사부였다, 향가 '찬기파랑가'가 사실은 '찬희파랑가'였다는 주장 등이 나온다. 대선주자들의 입당 제의가 쏟아져 히딩크가 '정치 중립'을 선언한다. 톱스타 A양이 "히감독의 아이를 가졌다"고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국내 모든 대학이 경쟁적으로 히딩크학과를 개설한다.

대선출마 선거법 논란 일어

결승에 오를때

'히'자가 붙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상호를 '히언대 그룹'으로 바꾼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폭등한다. 국적을 취득한 히딩크가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설수 있느냐를 놓고, 선거법 16조의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법조문의 해석에 논란이 벌어진다. 국사 교과서 표지 모델이 히딩크가 된다.

'대통령 만들기' 헌법 개정

우승할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히딩크 스토리' 제작을 발표한다. 주인공 히딩크 역을 맡기 위해 션 코너리는 가발을 새로 맞추고, 해리슨 포드가 체중을 늘려 경합을 벌인다. 네덜란드 정부가 가족과 친지들을 동원, 히딩크의 한국 국적 취득을 반대하고 나서지만 히딩크는 한국인이 되고, 대통령선거가 그의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은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포기한다.

2004년 올림픽 金 재기
 
선전하지만 16강에는 실패할때
 
전 국민이 축구를 저주하게 되고 집집마다 내다 버린 피버노바가 길에 쌓인다.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대표팀 감독 자리를 위해 일부 선수들을 사주, 고의로 16강에서 탈락하게 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이 음모의 배후인물로 지목된 지도자들이 해외로 도피한다. 히딩크는 2004년 올림픽 팀을 맡아 금메달을 따내며 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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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중이 터졌습니다. 한국 영화의 위기, 위기 할때 영화계가 "그래도 '강철중' 만큼은..."하는 기대를 걸었고, 또 반드시 터져야만 하는 영화였죠. 강우석 감독이나, 그의 제작-투자사 시네마서비스 입장에서도 그랬고 한국 영화계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설마 이건..." 했던 작품입니다. 그만큼 절박했다고 할 수 있죠. 사정을 보시면 이해가 갑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에서 제작 혹은 투자한 작품들은 이랬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궁녀' '아들', '황진이', '싸움', '신기전', '모던 보이', '뜨거운 것이 좋아',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그리고 '밀양'과 강 감독이 직접 연출하는 '강철중'이었죠.

이중 '아들', '황진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싸움',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뜨거운 것이 좋아'가 줄지어 흥행에서 쓴 맛을 봤고 '모던 보이'와 '신기전'은 이렇다할 이유 없이 개봉이 한없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결과물에 대해서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상태입니다. '밀양'과 '궁녀'가 간신히 손해를 안 본 정도라면 더 할 말이 없죠.

그러니 '강철중'이 무너졌으면 아예 시네마서비스가 문을 닫거나 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던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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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강우석 감독이 너무도 자신만만했던 '한반도'에서 '실미도'의 신화 재현에 실패한 터라 - 이 영화는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긴 했지만 누구도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초반 '밀어붙이기'를 통해 관객 동원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동시에 한국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그만큼 떨어뜨린 영화였죠 -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역시 가장 자신있는 무기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눈길이 갑니다.

뭐니뭐니해도 강우석 감독에게 사람들이 바라는 건 역시 코미디죠. 그 중에서도 역시 경찰 코미디, '투캅스' 시리즈와 '공공의 적' 시리즈가 제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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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별다른 설명도 필요없습니다. 2002년 '공공의 적'에 나온 강철중 형사와 강동경찰서 강력반이 그대로 재현되는데 단지 이번의 나쁜놈은 대 조직의 보스 이원술(정재영)입니다.

거성그룹이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회장이 된 원술은 고교생 싸움패들을 특채해 조직원으로 키우고, 겁없는 아이들을 속칭 '칼받이'로 이용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형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던지려던 강철중은 조직들의 극악한 행태에 분개해 사건 현장으로 뛰어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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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플롯이나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게 되지는 않습니다. 처음 설정 때, 대단히 치밀하고 악랄한 두목으로 설정됐던 이원술이 어찌 보면 너무 간단히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영화의 강철중은 별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칼까지 맞는데도 별 고생 아니라면 좀 미안한가요?) 아무튼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사소한 스토리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의미를 둔 게 아니라 이미 관객들의 애정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강철중이란 매력적인 캐릭터를 이용해 얼마나 많은 웃음을 만들어내느냐에 집중하고 있고,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특히 강철중의 딸, 강미미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은 관객들이 배를 쥐고 웃게 하는 동안에도 어른답게 최소한의 '할 얘기'까지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경찰보다 조폭이 더 폼난다고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이용해 폭력 도구로 사용하는 조폭 두목들에게 '누군가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아무튼 설경구는 강철중 역할을 통해 뭐가 연기고 뭐가 연기가 아닌지를 헷갈리게 하는 명연기를 다시 한번 보여줬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정재영은 '할만큼 했다' 정도가 적절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정재영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들, '아는 여자'나 '바르게 살자', '귀여워' 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것 - 예를 들자면 다양한 감정이 담긴 표정연기 - 을 요구하는 것도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죠. 진짜 건달 연기라면 '귀여워'에서 매우 훌륭하게 해 냈지만 이번 연기는 그런 원조 건달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고... 성과라면 강철중이 전화를 안 받는 장면에서 진짜 악당처럼 보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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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과거의 성공적인 조연들을 불러낸 데 대해서 자기복제니 뭐니 하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대체 시리즈 영화의 장점이 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리고 '공공의 적' 하면 강철중 다음엔 역시 치사한 조폭 연기의 달인이신 산수 이문식 선생인데, 당연히 산수를 보는 즐거움을 관객에게 줬어야 정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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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는 '공공의 적 1-1'이라는 제목으로, 강철중을 검사로 만들었던 '공공의 적 2'를 무시해버리고 다시 '공공의 적'의 공식 속편 자격을 이 영화에 부여하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탓인지, 각본을 쓴 사람이 장진 감독으로 바뀐 탓인지 강철중은 좀 변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1편의 강철중은 상당히 위험한 캐릭터였죠. 빼돌린 돈이며 훔친 마약 때문에 어지간히 고민도 하고, 교통과로 쫓겨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강철중'에서의 강철중은 거의 슈퍼 히어로 캐릭터입니다. 무슨 짓을 하건 걱정이 안 되는 수준으로 안전한 캐릭터가 되어 버렸죠. 무슨 말이냐면, 1편의 강철중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캐릭터였지만 이제 강철중 형사는 '공공의 적' 시리즈의 언저리 안에서는 절대로 죽지 않을 불사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관객을 안심시키는 캐릭터가 되어 버린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서민 영웅'의 캐릭터를 타고 태어난 터라 매편 죽도록 고생만 하고 별다른 즐거움은 누리지 못할 것 같으니 절로 혀를 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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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강철중'은 몇편이나 만들어지게 될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공공의 적 2'에서의 설경구를 볼 때 어째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켜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입니다. 이 다음의 '강철중' 영화에 대해서도 일단 설경구의 입장은 '작품이 좋으면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죠.

그렇다면 한 두가지 점만 조심하면 우리는 수시로 '강철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연구 부족으로 설경구가 하고 싶을만한 대본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는 상황,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나라가 갑자기 좋은 나라가 되어 더 이상 공공의 적이라고 볼만한 존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는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써 봤습니다.)

세번째는 이 영화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설경구가 '공공의 적'의 속성을 띄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건 이 영화의 성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적'들은 모두 사회적인 강자이면서 악한입니다. 즉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보다 편히 잘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남들을 희생시키려는 사람들이죠. 즉 '잘나고 못된 놈' 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악당들은 고급 양복과 넓은 사무실, 좋은 집과 좋은 외제 차 등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잘 살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저 놈들은 뭔가 부정한 짓을 했기 때문에 - 실제로는 별로 나보다 나을 게 없으면서도 - 저렇게 잘 나가는 것'이라는 약간 비뚤어진 시각이죠. 어찌 보면 아주 노골적으로 사회적 편가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약 설경구가 호화 별장을 산다든가, 향정신성 의약품과 관련된 시비를 일으킨다든가, 엄청난 미녀 스타와 염문설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동안 나왔던 '공공의 적'들이 갖고 있던 악덕을 보여준다면, 그는 더 이상 강철중 역을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건 어찌 보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운명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으로 봐선 이런 건 기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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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유망주 이한이 김남길(가운데)로 이름을 바꾼 모양이군요. 그럴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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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으로 오래 끌었던 600만불의 사나이-특수공작원 소머즈 시리즈를 끝맺겠습니다. 지나간 얘기들에 관심있는 분들은 왼쪽의 '추억의 외화' 폴더를 이용하시면 간편합니다.)

600만불의 사나이의 최대 강적은 역시 무적의 금성우주차였습니다. Death Probe라고 불리는 이 우주차는 본래 금성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첨단 과학을 동원해 만든 무적의 과학 장비지만 악당들의 손에 들어가 테러용 무기로 사용됩니다. 이 우주차는 상하편으로 두 번, 무려 4회에 걸쳐 스티브 오스틴을 궁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우주차는 어려서 먹던 스카치 캔디같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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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도전 때에는 금성과 지구의 기압차에 착안한 오스틴이 이 우주차를 높이 들어올려 파괴해 버립니다. 두번째는... 악당들이 머리가 좋아져서 이번엔 기압차이를 고려하고 만드는 바람에 공중들기 공격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납니다.;; 산을 이용해서 녹여버렸던 것은 기억나는데 중간 과정이 전혀 깜깜하군요.

오스틴을 위협했던 적들은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오스틴과 소머즈가 함께 싸웠던 유명한 에피소드 중에는 Kill Oscar라는 것이 있습니다. 76년 10월에 방송된 부분인데, 무려 3부에 걸쳐 두 바이오닉 용사들은 악의 무리들이 만든 펨보트-여자 얼굴을 한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보트-들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심지어 이들의 상관인 오스카 골드맨까지도 로보트와 바꿔치기를 당하죠.

이때 오스틴은 골드맨의 발자국이 카펫에 깊이 패이는 걸 보고 연필을 던져 봅니다. 골드맨이 밟은 연필은 산산조각이 나 버리죠. 오스틴은 이를 보고 '골드맨, 다이어트좀 해라'...가 아니고 그가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와 싸우는데, 싸우는 도중에 끔찍한 광경이 노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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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껍질이 떨어진 오스카의 모습입니다. 어려선 저 모습을 보고 비위가 상해서 밥을 못 먹었습니다. 지금 봐도 사뭇 징그럽군요. 괜히 올렸습니다.

펨보트군단의 모습입니다.




유난히 인기 높았던 펨보트. 심지어 펨보트 인형까지 나왔군요.




오스틴의 적수들이 대부분 무식했던 반면, 소머즈의 강적들은 좀 특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에서 어떤 분이 지적했던 슈퍼컴퓨터 알렉스도 Doomsday is tomorrow라는 상하 에피소드에서 열연했습니다. 컴퓨터 주제에 은근히 소머즈를 좋아해서 욕을 먹기도 했죠.

소머즈의 친구로 등장한 맥스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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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클럽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타 맥스)

뭐라구요? 맥스 사진이 없으니까 아무 세퍼트 사진이나 갖다 놓은 것 아니냐구요? 아니 웬 의심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아니라는 증거를 대세요, 증거를! 세퍼트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튼 소머즈의 적 중에서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적은 바로 쌍둥이 소머즈, 소머즈와 똑같은 얼굴을 했던 여성입니다. 리사 갤로웨이라는 이 악역 캐릭터는 76년 Mirror Image, 77년엔 Deadly Ringer 상하편에 출연해 소머즈를 괴롭혔습니다.

첫 등장때 갤로웨이는 소머즈와 똑같이 성형수술을 하고 골드맨에게 접근해 OSI의 기밀을 빼내려다 결국 소머즈의 바이오닉 파워에 힘도 못 써 보고 감방행을 당합니다. 두번째 등장 때에는 악당들도 똑똑해집니다. 악당 중의 무슨 박사가 아드레날린(사실 저는 이 호르몬의 이름을 이 에피소드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제제를 이용해 초인적인 힘을 내는 방법을 발견하고, 갤로웨이에게 이 약을 투입해 진짜 소머즈와 구별할 수 없게 합니다. 물론 이들은 진짜 소머즈도 바이오닉 수술이 아니라 이 약이나 또는 다른 유사한 약을 이용해 슈퍼 파워를 낸다고 생각하죠.

갤로웨이 역할은 '당연히' 린제이 와그너의 1인 2역입니다. 우리의 주인공과 주인공을 흉내내는 사회 밑바닥 출신의 여자. 극중에서 소머즈는 적들을 찾아내기 위해 갤로웨이 행세를 하는데, 이때 '좋은' 소머즈와 '나쁜' 갤로웨이를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흡연/비흡연이었던 걸 보면 미국도 70년대에는 지독하게 보수적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쓰다 보니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바로 77년에 방송된 Jaime and the King이라는 에피소드입니다. 제목부터 벌써 고전 뮤지컬 영화 <왕과 나 King and I>의 냄새가 풍기죠. 여기서의 왕은 미국과 가까운 어느 중동 국가의 왕(뭐, 사우디 아라비아 말고 있겠습니까)입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비 왕(...중동에서 이 무슨...)이 아들의 가정교사로 미국 여자를 불러들입니다. 물론 소머즈는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가정교사를 가장하고 투입되는거죠.

소머즈는 이 에피소드에서 첩보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지만, 말썽꾸러기 왕자 제자 앞에서 벽에 걸린 거대한 방패를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낸 뒤 말합니다. "제가 나쁜 뜻이 있었다면 이런 힘을 갖고 순순히 물러났겠습니까?" 그리고는... 뭐 만사 해피엔딩이죠.

이 에피소드가 왜 기억에 나느냐, 바로 이런 장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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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기억나는 걸 보면 저는 아무래도 마냥 청순가련한 초등학생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아무튼 이것으로 기나간 600만불의 사나이와 소머즈 이야기는 마감하려 합니다. 사실 이렇게 길게 가려고 하지는 않았건만 쓰다 보면 다른 얘기가 생각나고, 또 다른 얘기가 떠오르고 해서 늘어지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쓰는 저 자신에겐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정리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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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최근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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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색슨이 스티브 오스틴과 제이미 소머즈에 이어 원더우먼을 위협한 것은 1976년 11월 6일과 13일에 걸쳐 방송된 Feminium Mystique 편이었습니다.

페미니움이란 원더우먼과 아마존 일족이 살고 있는 파라다이스 섬에서만 나오는 신비의 금속-총알을 막는 원더우먼의 팔찌를 만드는 원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이 금속을 노리고 나치들이 파라다이스 섬을 기습한 내용입니다. <사관과 신사>의 데브라 윙거가 원더우먼의 동생 원더걸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죠.

원더우먼이 힘의 원천인 허리띠를 빼앗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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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처지가 되기도 했었죠. 아무튼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존 색슨은 당연히 이 에피소드에서도 페미니움을 노리는 나치 특수부대 장교 역할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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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찾았습니다.;;




3대 슈퍼 영웅과 맞짱을 뜬 색슨의 활약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는 공포영화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영화, <지옥의 카니발>에 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영어로는 Cannibal Apocalypse, 이탈리아 원어로는 Apocalypse Domani라고 불리는 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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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면 뱃속으로 존 색슨의 얼굴이 보입니다. 여기서 색슨은 세계를 휩쓴 식인 바이러스-한번 좀비에게 물리면 의식이 없는 식인 좀비가 되어 버리는 이 병은 70년대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죠-에 맞서 싸우는 파월 용사 노먼 호퍼로 등장합니다. 물론 맞서 싸운다고 해 봐야 이미 그의 몸 속에는 식인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습니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의 전편처럼 느껴지는 영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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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색슨의 공포영화 이력도 상당히 화려합니다. 이 영화는 바로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의 신화가 시작된 영화, <나이트메어 Nightmare on Elm street>의 첫편입니다. 색슨은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헤더 랑겐캠프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합니다.

...오랜만의 좋은 역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찾아봐도 <나이트메어>에 나오는 존 색슨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엉뚱한 사람의 옛 모습을 보게 된 기념으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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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연기파 배우 조니 뎁이군요. 그러나 이 영화에선 몇 번째 안에 프레디 크루거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그냥 흔한 조연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역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죠.

존 색슨은 이후에도 <비벌리힐스 캅 3>, <황혼에서 새벽까지> 등에 출연했고 지난해에는 <CSI>에 얼굴을 비치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여왔습니다. 특히 지난해에는 70세를 맞은 기념으로 <호러 마스터스>라는 특별 행사에 출연해 이런 무서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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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합니다. 아무튼 일세를 풍미한 '잘 생긴 악역' '거물 악역' 배우의 대명사 존 색슨의 일대기를 살짝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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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싱어의 <수퍼맨 리턴즈>는 여러 모로 <배트맨 비긴즈>와 비교되는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이미 만화에서 시작해 영화와 책, 드라마로 더 이상 알려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슈퍼 영웅을 소재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작품이면서 정 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슈퍼맨 리턴즈>의 특징 중 하나는 이미 존재하던 크리스토퍼 리브의 <수퍼맨> 영화들, 특히 <수퍼맨(78)>과 <수퍼맨 2(80)>의 권위를 거의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배트맨의 부모의 죽음과 조커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함에 따라 제2의 조커를 출현시킬 준비를 갖춘 <배트맨 비긴즈>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입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울려퍼지는, 올드 팬들의 심금을 흔드는 존 윌리엄스의 장중한 주제곡에서부터 이미 리처드 도너 감독의 <수퍼맨> 시리즈를 '계승하겠다'는 다짐을 과시한 브라이언 싱어는 '슈퍼맨의 아들'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들고 나옵니다.

아, 스포일러인가요?

이 정도가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수퍼맨> 영화를 즐길 자격이 없습니다. 뿔테 안경 하나만 썼다 벗었다 한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수퍼맨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그깟 설정 하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다시 수퍼맨의 아들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수퍼맨 리턴즈>에서 수퍼맨 클라크 켄트(브랜든 라우스)는 클립톤 행성을 찾아갔다가 5년만에 불쑥 돌아옵니다. 그 사이 연인 로이스 레인(케이트 보스워스)은 다섯살 난 아들을 둔 채로 편집장의 조카이자 신문사의 중역인 리처드(제임스 매스던)와 동거하는 사이가 돼 버렸고, 평생을 감방에서 썩을 줄 알았던 렉스 루더(케빈 스페이시)는 어느새 석방되어 새로운 음모를 꾸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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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클라크에게 '당연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로이스. 비록 리처드와 살고 있지만 여전히 수퍼맨을 잊지 못하는 로이스를 보며 리처드는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수퍼맨이 연적이라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엑스맨 3>에서의 사이클롭스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여자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리처드. 나름대로 정말 괜찮은 남자 캐릭터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문제의 저 꼬마, 제이슨을 둘러싸고는 몇가지 얘깃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첫번째는 의문, '로이스는 과연 제이슨이 수퍼맨의 아들이라는 것을 언제 알아차리는가'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입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해석과, 로이스 자신도 몰랐다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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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이스는 '당연히' 알고 있다.

일단 상식선에서의 해석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녀가 리처드와 함께 살면서도 크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은 아이 아버지가 따로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렉스 루더가 아이 아버지를 물을 때 로이스는 살짝 당황해 루더의 의심을 삽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슈퍼맨 2>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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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크리스토퍼 리브와 마고 키더 콤비는 저렇게 북극의 '고독의 궁전'으로 허니문을 떠납니다. 여기서 수퍼맨의 아버지(어머니던가...)는 장중한 목소리로 "인간의 여자와 맺어지려면 너는 초인의 힘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민 끝에 수퍼맨은 힘을 포기하죠. 둘은 첫날밤을 북극에서 보낸 뒤 인간세계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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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드 장군의 침공으로 지구는 궤멸 직전에 놓이고, 결국 수퍼맨은 사랑을 포기한 채 다시 수퍼 영웅으로 돌아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슴아픈 이별. "차라리 모든 것을 다 잊게 해 달라"는 로이스의 요청에 수퍼맨은 마지막 키스로 그녀의 기억을 지워 버립니다. 그녀는 다시 클라크 켄트와 수퍼맨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리죠.

바로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두 사람이 한차례 동침을 했으므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로이스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2. 로이스도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실 이 설정도 문제가 있습니다. 똑소리나는 여기자 로이스가 아버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는다거나, 아이 아버지를 리처트로 헷갈린다든가 하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위 문단의 내용을 보면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수퍼맨이 갑자기 사라지고, 감정의 파멸 상태에 이른 로이스는 밤마다 술을 마시고 남자를 바꿔치는(...?) 문란한 삶의 자세를 보입니다. 물론 그 중 하나가 리처드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배는 불러 오고, 로이스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몰라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때 천하의 멋진 남자 리처드가 나서는 겁니다. "(내 자식인지도 모르지만) 아이 아버지가 누구든 내가 잘 키워 주겠다"고 하는 거죠. 여기에 살짝 감동한 로이스는 리처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로이스는 어떻게 아이 아버지를 알고 있느냐. 그건 당연히 '피아노 사건' 때라는 것이 이쪽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아이 아버지를 묻는 렉스 루더의 질문에 '리처드'라고 대답하는 것은 정말 로이스도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하지만 제이슨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서 애아빠를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사실 '로이스의 지워진 기억'은 두 경우 모두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제이슨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한다고 해도 수퍼맨과 동침한 기억이 없다면 저 아이가 수퍼맨의 아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아무리 좋아했다고 해도, '뭔가'를 했어야 아이가 나올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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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어느 쪽이든 '말이 되게 하려면' 상당히 설명이 궁색해집니다. 이를테면 로이스의 기억을 지울 때 '수퍼맨=켄트'라는 사실만을 지우고 '수퍼맨과 동침했다'는 사실은 지우지 않았다는 가정도 가능하지만 설사 이렇게 우긴다 해도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일 겁니다.

하기야, 위에서도 얘기했다시피 '뿔테 안경 하나만 쓰면 수퍼맨과 클라크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런 바보같은 영화에 저렇게 정교한 설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하려던 얘기는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누가 뭐래도 크리스토퍼 리브의 추억을 되살리는 아바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브랜든 라우스에게 큰 기대를 하기는 힘들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케빈 스페이시의 무게는 전작들의 진 해크만보다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워낙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의 렉스 루더 역할은 잭 니콜슨의 조커를 넘어선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포스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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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맨 리턴즈>는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추억에 기댄' 영화인 대신 새로운 해석에 대한 야망 같은 것은 살짝 자리를 비운 영화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말론 브란도를 끌어낸 것도 역시 올드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게 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만큼 영화의 성취에 대한 평가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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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수퍼맨의 아들이라는 설정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는 DC 코믹스의 시리즈 중 하나인 Son of Superman에서 빌려 온 것으러 보입니다. 이 책은 수퍼맨이 렉스 루더의 계략에 말려 크립토나이트의 힘이 지배하는 땅에 갇힌 지 15년 뒤, 클라크와 로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Jon)이 청소년기를 맞아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원더우먼이나 아쿠아 맨 등 저스티스 리그의 다른 영웅들을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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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쯤의 근미래 11월(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입니다). 남북한은 경의선 개통에 합의하고 대통령(안성기)이 김정일 위원장(백일섭)이 도라산역에서 개통 기념식을 가지려는 찰나, 권총리(문성근)에게 일본 외상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일본은 경의선 개통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일본이 근거로 제시한 것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영구 양도한다는 1907년의 대한제국 문서. 미국과 중국도 연이어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이런 대통령 앞에 "그 문서에 찍힌 대한제국 국새는 가짜다. 일본의 거짓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외치는 전직 서울대 사학과 교수 최민재(조재현)이 나타납니다.

대통령은 최민재에게 국새를 찾아 줄 것을 당부하지만 최민재의 대학 후배인 국정원 서기관 이상현(차인표)은 지금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대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느냐며 최민재를 공박합니다. 이러는 사이 한일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기만 합니다.

(이상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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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호벤 감독의 <스타십 트루퍼스>를 보다 보면 영화 중간에 우렁찬 군가와 함께 흘러나오는 지구 정부의 선전물들이 등장합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배달의 기수> - 물론 10.26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알 리가 없는 단어지만 - 였죠. <스타십 트루퍼스>를 보면서 이 선전물들의 의도를 오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구 정부의 파시스트적 성격에 대한 버호벤 감독의 유머였던 겁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보고 난 지금, 대단히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과연 이 영화는 대체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보이는 대로만 이 영화를 받아들이자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장은 국수주의라는 말도 온건하게 들릴 정도의 강경한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성, 이 두가지 가치를 저해하는 어떤 요소도 타도해야 할 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선명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해서, 차마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을 정도라는 데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만 되면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의 대화를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트들인 대통령과 각료들, 그 보좌관들이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나누고 있는 걸 보다 보면 혹시나 이 대화의 목표가, 그리고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것이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내걸고 있는  '선명한 민족주의'에 대한 비웃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 영화의 악역들인 일본과 그 하수인들의 지능이 <포켓 몬스터>의 로켓단 수준이라는 것도 진의를 의심케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머리에 태극 수건을 질끈 동인 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고귀한 이상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 중에 한마디라도 틀린 말이 있느냐고 눈에 불을 켜고 물어보실 분이 나타날 것 같아 슬슬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보던 <배달의 기수>에는 공박할만한 그릇된 가치가 담겨 있었느냐고. 그리고 그 <배달의 기수>가 당시엔 재미있었는지 궁금하다고 말입니다.

영화가 담고 있는 가치를 논하기 전에, 그리고 영화의 플롯에 어떤 구멍이 나 있는지 말하기 전에(물론 솔직하게 말하자면 '구멍이 난 플롯'이 아니라 '아예 그물인 플롯'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반도>는 지나치게 지루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50% 이상은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역시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서 수준의 대화를 진지한 표정으로 나누며 서로 공박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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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머지가 시원한 액션으로 채워진 것도 아닙니다. 유일하게 무력적인 캐릭터인 차인표는 채 탄창 한개분도 총을 쏘지 않고, 사람이 죽는 장면도 을미사변 신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살육이니 구경하는 재미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사가 재미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캐릭터는 작업반의 이한위 뿐입니다.

바로 위 사진에 나오는,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저 화려한 배우들이 이 영화의 대사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걸 걸 보면 베를린 필하모니가 <어머나>의 반주를 하고 있는 광경이(장윤정씨, 죄송합니다), 혹은 이창호와 이세돌이 상아 바둑돌로 알까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 떠오르는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이 147분 길이(내용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것도 상당 부분 과감한 커트를 거친 듯 합니다만)의 장편 영화를 통해 강우석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도 말했듯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대로 '이런 강경한 민족주의적인 담론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주장들에 염증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가 매우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담고 있는 주장이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오로지 영화적인 재미에 대해서만 얘기하겠습니다. 최근 수년간 1년에 영화를 5편 이상 보시는 분, 극장에는 가지 않더라도 집에 OCN이 나오는 분들은 이 영화를 보시면 실망하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영화의 흥행 성적은 매우 예측하기 힘듭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자진해서 이 영화를 보게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관객 대다수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분들이나, 급식 파문으로 어쩔 수 없이 오전수업을 하게 된 학생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 이현세 원작 <남벌>이 너무 난해해서 읽기 힘들었던 분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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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대 추정의 근거: 이 영화가 다루는 시대의 마지막 '전직 대통령'이 우리가 잘 아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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