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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은행털이범들이 맨하탄 한복판의 은행을 점거합니다. 경찰이 출동해 인질극이 벌어지고, 엄청난 대치상태가 계속되다가 갑작스레 상황이 끝나지만 범인은 사라지고 은행의 피해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인사이드 맨>은 처음부터 묘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관객에게 만만찮은 도전장을 내밉니다. '자, 네가 그렇게 영화 보는 눈이 까다롭다면 이 영화에 맞서 봐라.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겠어?'라는 식입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을 알면 호승심이 일어날 만도 합니다.스파이크 리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지는 NBA 뉴욕 닉스의 홈경기에는 빠지지 않고 예의 수건 패션으로 열렬한 응원을 퍼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옳은 일을 해라> 이후로 백인 주도의 미국 사회에 대한 치열한 비판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스파이크 리가 수천만원대의 가격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지정석에 앉아 있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묘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아무튼 흑인 사회에서도 '성공한 흑인의 모범 사례'로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법 관대한 것 같습니다.

그 성공의 덕분인지 마냥 거칠기만 하던 스파이크 리의 영화들은 점점 세련된 양식미를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그 성공의 이른 예는 2002년작 <25시>였습니다. 게오르규의 원작,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작품이지만 리의 <25시>는 9.11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가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 중 하나라는 평을 얻으며 스파이크 리의 '후기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그런 그가 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그의 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피카소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전향한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언제나 줄거리보다는 메시지가 앞서 있던 그가 굳이 새로운 장르에 손을 대는 것은 결국 "내가 못해서 안 하는 건줄 알아, 별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하는 거지"라는 식의 투정(?)일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이런 식의 의도된 변신은 성공하기 쉽지 않지만, 스파이크 리는 멋지게 해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 <인사이드 맨>은 스파이크 리의 영화 중 유례가 없는 흥행 성과(약 8800만달러)를 거뒀습니다. 본전이 4500만달러라니 거의 두배 장사를 한 셈이죠.과연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요. 일단 줄거리부터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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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이 열리면 달튼 러셀(클라이브 오웬)의 독백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패거리를 이끌고 뉴욕의 한 은행을 점거합니다.  독직 혐의를 받고 있는 프레지어 형사(덴젤 워싱턴)는 니고셰이터 역할을 맡아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이어 현장에는 해당 은행의 실질적 소유주인 아서 케이스(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등장해 유난히 저자세를 보이고, 케이스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은 매들린 화이트(조디 포스터)가 시장을 등에 업은 자세로 범인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사무엘 잭슨과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가 빛났던 <니고셰이터> 이후로 니고셰이터와 인질범의 두뇌 싸움에 대한 영화는 제법 많이 나왔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대결을 벌이는 맞수들은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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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전제 중 하나는 이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면을 쓰면 비슷해 보인다. 그 사람이 백인이건 흑인이건, 또는 인도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미국인이건 알바니아인이건 그게 그거라는 얘깁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악의일 뿐, 그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겁니다.일단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한 출연진입니다. 덴젤 워싱턴과 조디 포스터, 클라이브 오웬은 물론이고 윌렘 데포가 별다른 역할이 없는 관할 서장 역할로 우정출연(?)을 할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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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데이>를 통해 부패 경찰로 이미지 변신을 노렸던 워싱턴은 이번엔 뇌물 수수 혐의로 궁지에 몰린 - 이건 뭔가 누명인 듯 하지만 왠지 그 밖에도 켕기는 게 있는 듯 한 - 프레이저 형사 역으로 멋진 새출발을 선언합니다. <클로저>에서도 제목대로 클로즈업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던 클라이브 오웬 역시 차세대 제임스 본드 제1 후보의 명성에 걸맞게 냉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디 포스터가 자기 몫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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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수많은 배우들의 명연보다 빛나는 것은 역시 대본의 힘입니다.  이 영화의 대본 크레딧에는 러셀 거위츠라는 사람의 이름만이 올라와 있습니다. 게다가 영화 데뷔작이군요.거위츠와 리 콤비는 사건 발발 이후 거의 40분에 이르는 동안 '대체 저 놈들이 뭘 하려는 걸까' 하는 궁금증으로 관객들의 눈을 스크린에서 잠시도 떼놓지 못하게 합니다. 한 40분이 지나야 비로소 그들의 음모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힙니다.

그 동안 리와 거위츠의 호흡으로 이뤄지는 화면은 그야말로 명인의 칼춤을 연상시키듯 매끄러우면서도 아찔합니다....여기서 잠깐 한마디 곁길로 새자면, 만약 <출발 비디오 여행> 등으로 이 영화의 진행 방향을 미리 알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이 시간은 더럽게 느린 진행때문에 지루함에 떨 수밖에 없을 그런 시간입니다. 부디 양식있는 관객, 그리고 영화의 제 맛을 보고 싶은 관객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이 방송될 때 잠시 채널을 끄고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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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은행가인 한 노인의 과거. 그 과거를 이용해 돈을 벌려 하는 남자. 아주 조금은 부패했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양심을 갖고 있는 남자. 이 세가지 요소의 결합은 멋진 오락물을 만들어 냅니다. 신나게 총 빵빵 쏘는 장면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영화가 주는 스릴은 제법 긴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합니다.물론 눈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스파이크 리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전달됩니다.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미국의 지도층,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세력들이 과연 과거사를 캐 볼때 떳떳하기만 하느냐는 스파이크 리의 당돌한 질문입니다.

아울러 미국을 이끌고 있다는 엘리트들이 과연 미국의 평범한 시골 사람들 앞에서 9.11을 팔고, 애국심을 팔 만큼 도덕적으로 온전하냐는 비판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미국의 파워 엘리트를 상징하는 매들린 화이트조차도 '빈 라덴의 사촌이 미국 내에서 살 집'을 대신 알아봐 주고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메시지들이 숨어 있긴 하지만 <인사이드 맨>은 결코 메시지 과잉의 정치색 짙은 영화는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스파이크 리는 과거와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죠. 이 영화로 '스릴러도 만들 줄 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한 스파이크 리가 과연 다음번에는 어떤  재주를 보여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200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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