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