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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 창작, 스토리텔링, 미감, 인간의 자의식, 한국 근대사... 근래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튼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출판 연도와 무관. 그냥 제가 2023년에 읽은 책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추린 리스트입니다. 신간 위주로 읽는 분들께는 조금 죄송합니다.

아무튼 나름 다 좋은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서는 무순. 

내가 된다는 것 (아닐 세스)

분명히 경고한다. 잘 쓰여진 책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 내가 자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뇌가 나 대신 생각하는 것인가, 내 뇌가 바로 나인가. 신중한 답변이 필요할 때 인용할 수 있는 책.

예를 들어 이런 설명들: 내 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밀실 안에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몇가지 정보에 의존해 바깥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빛, 소리, 색깔, 냄새, 형상, 이런 것들은 뇌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 감각기관들이 보내오는 전기 신호들 뿐. 뇌는 이 신호들을 어떻게 해서든 해석해서 '세계'라는 것을 조립하려고 애쓴다. 즉... 내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에릭 캔델)

환원주의라는 키워드. 인간의 시각은 어떤 대상을 볼 때 시각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미술 또한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과거의 미학. 일찍이 세잔이 자연을 원기둥, , 원뿔 등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하고 터너가 갑자기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스코, 칸딘스키가 새롭게 보이는 책.

 

기억전달자 (로이스 라우리)

소설을 몇가지 읽지 않았는데, 그 소설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류 문명의 전달에 대한 은유. 그리고 문명을 계승한다는 것의 대가. 과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소수의 희생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리화되는가.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감동.

그리고 무엇보다 짧다. 쉽게 읽을 수 있다.

 

 

창의성을 지휘하라 (에드 캣멀)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장을 지낸 캣멀이 풀어낸, 한 조직을 크리에이티비티가 넘쳐 나는 조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어떤 조직도 샘솟듯 아이디어가 뿜어나오는 사람들만을 데리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잠언과 같은 명언이 넘쳐나는 책. ‘스토리가 왕이다’ ‘프로세스를 신뢰하라(신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하라)’, 그리고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들이 우리가 안 볼 때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한다면?’이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같은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조지 루카스의 한마디.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스토리텔링 애니멀 +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나단 갓셜)

사실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는 걸 읽고 나서 알았다). 하지만 둘 다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동시에 아주 흥미로운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짧은 결론 중에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보이는 것들 사이에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을 한다'는 것이 있다.

무표정한 표정의 여자, 수프 한 접시, 관에 든 시체의 사진을 제시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연결해 내는 것이 인간. '한번 각인된 이야기는 수없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검증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요즘 세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1884년 갑신정변 현장에서 (F.H. 뫼르셀)

일본 정부의 밀정인 혼마 규스케가 갑신정변 9년 뒤, 갑오경장 1년 전인 1893년 조선에 들어와 견문하고 정탐한 내용. 전 세계를 볼 때 가장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던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당시의 한국은 처참한 후진국이었다. 과연 어떤 부분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식민지 개화의 자신감을 얻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참담하다.

<1884 갑신정변 현장에서>의 원제는 ‘Events Leading to the Emeute of 1884’. 민영익의 호의로 한국 지방 탐사 여행을 떠났던 독일 상인 뫼르셀은 남도를 여행하던 도중 서울에서 변란이 일어나 민영익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반란에 휩싸인 뫼르셀의 불안감이 생생하게 살았는 여행기. 모세을(牟世乙)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일 상인인 뫼르셀 F.H.Morsel 은 독립신문에 1호 광고를 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라제니 (아다치 켄/ 모리타카 유우지)

야구만화를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과연 이렇게 시속 150km를 던지는 광속구의 대투수도, 40홈런을 때려내는 강타자도, 열혈 고교 에이스도 나오지 않는 야구만화가 있었던가. 죽을 힘을 다해 던져야 140km가 나올까 말까 한 중간계투 요원인 주인공은 그라운드에는 돈(제니)이 묻혀 있다는 말에 따라 성실하게 연봉을 챙겨가는 생계형 프로 야구 선수. 매년 신인들이 들어오고 고참들이 쓸려 나가는 치열한 경쟁 현장에서 펼쳐지는 그의 생존기가 매력 만점.

미 가장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 (낸시 에트코프)

대체 왜 인간은 예쁜 것을 좋아할까. ‘Beauty is in the eyes of the beholder’라는,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말은 미감이란 인류 각 개체의 독립적인 감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최신 뇌과학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문제의 개인차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다. 심지어 갓난 아이도 성인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예쁜 것에 대한 반응은 본능인가? 하버드 대 교수 낸시 에트코프의 기발한 분석. [그런데 안타깝게도 절판. 중고는 많이 팔립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오구라 기조)

서울대에서 한국 정치사상을 연구한 일본인 저자의 눈으로 본 성리학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혹은 한국인이 성리학을 내면화하면서 생긴 일에 대한 정리서. ‘남이 본 우리 이야기인 만큼 시사점은 넘쳐 흐른다. 과연 이 책은 한국을 미화하는 책인가, 폄하하는 책인가. 직접 판단하시면 좋을 듯.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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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건축기행 (유현준)

지난해 읽은 가장 강력한 여행 뽐뿌질 책. 당장 짐을 꾸리고 싶어진다.

인문 건축 기행, 무작정 가보고 싶어지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인문 건축 기행, 무작정 가보고 싶어지는

여행을 좋아한다. 당연히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도 좋아한다. 유현준의 . 지금까지 나온 유현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생각하면 왜 이 아닌지도 궁금하지만(아마도 게으른 서점을 위해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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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시선 -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 (김정운)

엄청난 노작. 대체 그로피우스의 이상에서 아이폰으로 연결되는 이 문명의 선이란. 

창조적 시선, 바우하우스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창조적 시선, 바우하우스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볼륨. 등장인물만 대충 꼽아 봐도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 스티브 잡스, 오스카 코코슈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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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10권 같은 13권. 그리고 2023년, 반드시 거론해야 할 책들은 다음과 같다.  

90년대, 깊고도 가벼웠던 10년간의 질주 (척 클로스터만)

이런 식의 역사를 써 보고 싶다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바츨라프 스밀)

스밀은 왜 분노하나. 왜 사람들은 스밀에게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나. <팩트풀니스>를 감명깊게 보신 분이 보셔야 할 책.

에디톨로지 (김정운)

창조란 없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일 뿐. 

신통기 (헤로도투스)

나온지 너무 오래된 책. 하지만 이 책이 있어야 할 이유를 100가지는 댈 수 있다. 

기묘한 중국사 (왕레이)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책. 무송은 어떻게 술 한말을 마시고도 호랑이가 나오는 고개를 넘을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을 다 믿어도 좋을지는...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미즈키 시게루)

개인과 역사는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가.

축제만세! (타카기 나오코)

일본에는 왜 이렇게 축제다운 축제가 많은 걸까. 이 사람처럼 놀러 다니고 싶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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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파리를 방문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 알아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연말로 예정된 공연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손꼽히는 대도시 파리에서 꼭 가 보고 싶은 공연장은 뭐니뭐니해도 '오페라'라는 지명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영화든 뮤지컬이든, <오페라의 유령>을 보신 분이라면 '아 거기?'하실 바로 거기다), 그리고 라 빌레트에 새로 지어진 파리 필하모닉 홀이었다. 

대부분의 공연 일정이 정해지는 것은 대략 6개월 전.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안에 중요한 공연들은 매진이 되어 버린다. 베를린 필하모닉 때도 그랬지만, 현장에 간 상태에서 '아, 베를린에 온 김에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라도 한번 보러 갈까?'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다. 아주 운이 좋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다. 다만 일찍 표가 열린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기도 좀 불안한 것이, 한번 사고 나면 환불은 불가능(정말이다). 산 사람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티켓을 파는게 최선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사야 한다.

2023년 12월,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은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었는데, 이건 본 순간 이미 매진이었다. 실제로 티켓을 팔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오페라 가르니에 후원회원을 위한 특별 공연 같은 형식으로 관객들을 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 꼽은 공연이 바로 이지 킬리앙 Jiri Kylian의 안무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공연하는 <Jiri Kylian Evening> 공연. 흔히 지리 킬리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체코어로 Jiri라는 남자 이름은 '이지'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아무튼 네덜란드 발레 시어터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연단체로 끌어올린 킬리안은 '현대 발레의 나침반'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은 안무가(집에 그의 DVD를 두개 갖고 있다). 특히 강한 인상을 받은 <Petit Mort> 도 이번 공연 리스트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이건 꼭 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연장이 바로 오페라 가르니에. 사실 이름이 오페라지만 이미 오페라를 위한 공간으로선 수명을 다했다. 지금은 공연 프로그램의 90%가 발레. 오페라는 새로 지은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거의 모두 소화된다. 혹자는 예쁘기만 한 공연장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발레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였는데, 며칠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공연이 매진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가. 다행히 대기 모드를 띄워 놓고 기다린 결과, 약 한달 뒤에 빈 자리가 나왔다(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늦게 푸는 좌석이 있는 것인지). 바로 낚았는데, 사실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19세기형 극장의 박스석이 어떤 분위기인지 맛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어쨌든 공연 당일. 토요일 밤의 파리 오페라 주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 날씨인데도 사람이 막 흘러다니는 분위기였다. 보수중이라 건물 앞부분은 차폐막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차폐막까지도 명품 광고... 그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시면 느낌이 오실 듯.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극장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에 맡긴다. 2층과 3층의 회랑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기둥의 장식들이 너무나 멋지다. 아마도 같은 유럽이라도 러시아나 발칸 제국 같은 변방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파리와 다른 도시들을 구별하는 기준처럼 보였을 것 같다. 내게도 '알겠나? 이게 바로 문명이야'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아마 21세기의 사람들이라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건축물에서 느꼈을 그런. 

각각 다른 안내원에게 몇 차례 티켓을 보여주고 간신히 찾아간 곳은 무대 바로 앞의 2층 박스석. 묘한 구조라 1층과 2층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박스석 중에는 가장 낮은 위치, 그러니까 무대와 거의 수평 위치에 있다.

바로 건너편에 유명한 '유령의 박스'가 있다. 실제와는 무관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이후 저 자리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은 팬텀 아닌 일반 관객들이 그 자리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들면 <오페라의 유령> 도입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가 있고, 그 뒤에는 그 유명한... 샤갈이 그린 천정화가 있다. 사실 전날 퐁피두 센터에서 샤갈이 이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했던 스케치들을 보고 온 다음이라 감동이 더했다. 

 

그리고 공연.

맛보기로 하자면 이런 거다.

https://youtu.be/MKOqRvcLknE?feature=shared

뭐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Gods and Dogs>, <Stepping Stones>, <Petit Mort>, <Sechs Tanze>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고개를 너무 내밀고 보느라 목이 좀 아팠지만(무대에서 너무 가까운 박스석은 비추. 절대 비추. 더 가까운 박스석의 관객들은 대체 어떻게 공연을 봤는지 궁금하다), 무용수들의 안무 소화는 완벽했다. 드문드문 동양인 무용수가 보여 혹시 박세은...? 일까 했는데 그 뒤를 이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합류했다는 강호현이었다. 매우 훌륭했다.

물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공연을 마친 뒤 76세의 이지 킬리앙이 직접 무대에 오른 것. 20세기의 문화 영웅들이 하나씩 하나씩 흘러간 별들이 되고 있는 지금, 현대 발레의 이정표를 세운 거인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절로 발길이 둥둥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구경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공연장, 좌석, 무대, 그 밖에 극장에서 펼쳐질 수 있는 파티를 위한 공간, 지금도 바로 쓰이고 있는 회랑 공간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파리 시민이냐, 관광객이냐의 차이는 이런 곳을 일상 공간처럼 향유하고, 저 자리에 여유있게 서서 칵테일이나 와인을 나누며 대화의 꽃을 피우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

물론 뭐니뭐니해도 극장의 완성은 무대.

낮시간에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의 내부 투어를 하는 가격이 15유로. 블로그들을 보다 보면 내부 광경에 감탄해 '언젠가는 이 안에서 직접 공연을 보리라'는 평을 남긴 분들이 많은데 그런 언젠가는 절대 오지 않는다. 다음에 파리에 가기로 되어 있는 분들, 방문 기간 중의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 정보를 꼭 살펴 보시길. 그리고 반드시 공연을 보시길. 거기서 공연을 보고 그 안을 둘러본 느낌은 그동안 파리에서 했던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인상적이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턱시도를 입고,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가신다면 더 기막힌 경험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그 안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그대로 하실 당신, 누구든 후회 없을 거라고 믿는다. 

 

P.S. 파리 여행의 기록을 여기다 남기긴 남길 것인데, 한번에 다 숙제하듯 쓸 것도 아니고,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마음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파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전에도 그랬듯, 여행기는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곶감 뽑아 먹듯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한번씩 들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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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번을 단 포인트가드 중 유명한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피닉스의 전설 케빈 존슨이 송태섭의 모델로 꼽혔던 것은 그리 크지 않은 키와 함께 7번이라는 번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2. 1m68이라는 설정신장때문에 먹시 보거스나 스퍼드 웹이 모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송태섭의 작화상 신체 비율은 이 미니 가드들의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왕년의 찰스 바클리마저도 길들일수 있었던 불같은 리더십을 보면 역시 케빈 존슨... 

2. 발군의 스피드, 넓은 시야, 패싱 감각, 호승심, 리더십, 그리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슈팅력이 특징인 송태섭. 하지만 팀의 주축인 센터와 3점 슈터가 졸업하는 이상 새 팀에서는 주장으로서 득점원으로도 잠재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선수. 그 송태섭의 시각으로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다는데, 가슴이 뛰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 가문 섭자 항렬의 3대 인물이 송태섭과 막걸리 장인 송명섭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북산 5인방이 하나씩 스케치에서 인물로 바뀌며 걸어나오는 인트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애니메이션 상의 경기 묘사에서 선수들의 동작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괜찮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4. 팬들 사이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피어스>라는 단편이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영화 <퍼스트 슬램덩크>는 처음엔 마치 <피어스>를 따라갈 듯 하다가... 결국은 전혀 다른 길로 간다. 



5. 하지만 문제는 송태섭이 주인공(?) 인데도 불구하고, 배경으로 계속 삽입되는 개인사(송태섭의 성장기)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뒤로 갈수록 그 성장기가 경기의 긴박감을 심하게 떨어뜨린다. 이 부분 매우 아쉽다. 

6. 어쨌든 북산이 이긴다(...스포일러인가?). 당신이 듣고 싶어 했던 그 주옥같은 명대사들도 상당수 나온다. 그리고 강백호의 클라이막스는 정말... 와... 멋지다. 역시 주인공은 강백호. 눈물이 괸다. 



7. 이러니 저러니 했지만, <퍼스트 슬램덩크> 소식을 듣자마자 '어 이건 봐야지' 생각한 사람은 무조건 달려가 볼 것. 이건 '잘 모르는데 요즘 핫하다니까' 볼 작품은 아니다. 이 극장판은 어디까지나 <슬램덩크>의 짤 한장만 봐도 그 장면의 대사가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그 밖의 사람들은... 모르겠다. 보든지 말든지. 

8. 자막으로 봤는데 더빙은 어떨지 궁금. 자막의 이름 표기는 모두 한국식이라 위화감은 없다. 단지 강백호 역의 일본 성우가 좀 심하게 아저씨 목소리... (참. 극장이 아저씨 판일줄 알았는데, 80% 이상이 10~20대라서 놀랐다) 

9. 아쉬움: 변덕규 안 나옴(무 깎는 신 매니아로서 매우 안타까웠음). 

10. 기왕 <퍼스트 슬램덩크>로 시작했으니 텐스, 트웬티스까지 극장판 오리지날로 계속 이어주십쇼. 

이노우에 사마. 오래 오래 사세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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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명량>과 <한산>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량>은 지나치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한 전개가 좀 부담스러웠고, <한산>은 '전투'라는 사건을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흐릿해져버린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노량>은 달랐다.

<노량>은 1598년 12월16일 밤부터 그 다음날까지 벌어진 해상 전투,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혈투를 글자 그대로 입체적으로 조명한 영화다. 이전의 두 작품에서 다소 평면적인 시야가 아쉬웠다면, <노량>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각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특히 외모 면에서) 생각이 들었던 김윤석의 존재감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압도적인 절제미'라고 부르고 싶다.

그 밖에도 해전의 스케일, 전투의 박진감 모두 전작들에 비해 진일보했다. '전투 한복판의 정적' 신, 전장의 북소리 신 역시 그 섬세함을 모두 칭찬하고 싶다. 특히  '정적' 신은 전투에 참가한 3국 병사들의 시선과 이순신의 시선, 이순신의 마음 속을 한 흐름에 담아낸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 

혹시라도 세 편 다 보는게 뭔가 좀 부담스러워서, 혹은 <서울의 봄>을 보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또 극장에 가는게 부담스러워서 관람을 꺼린 분들이라면 어서 극장으로 가시길 권한다. 

1. 노량해전은 어떤 전투일까. 한산해전이 희망 없는 전쟁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영웅의 대업을, 명량해전이 궤멸지경이었던 조선 수군을 기적처럼 되살린 영웅의 재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노량해전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전이자 영웅의 최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영화 <노량>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다른 두 전투와는 사뭇 다른 이 전투의 의미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량해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영화 속 진린의 대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가 그리 무리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1598년 12월. 이미 조선과 명, 그리고 토요토미 사후의 일본 조정은 일본군의 철병을 전제로 한 종전에 합의한 상태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적에겐 항자불살 降者不殺의 아량을 베푸는 것이 고전적인 동양 무인의 대의. 게다가 승리가 담보되지 않은 출전 명령을 거부하다가 졸병으로 강등된 적도 있는 장군 이순신이, 그동안 치열한 전투에 시달렸던 휘하 장병들을 불필요한 전투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설사 전투를 벌인다 해도, 적을 적당히 도망치게 내버려 둔 뒤 추격하며 전과를 올리는 것이 병가의 상식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순신은 왜군과의 화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그 결과 정면 대결이 펼쳐지고, 엄청난 전과를 거두기는 하나 자신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여기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만약 이 질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노량해전이라는 이상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영화 <노량>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대체 왜'에 충실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2. 영화에선 몇가지 소재로 설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아산에서 가족들을 돌보던 세째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인데, 이건 영화 속에서도 진린의 추정일 뿐, 이런 개인적인 동기로 수많은 장병들을 죽음의 전투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충무공의 캐릭터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는 두번째, 7년 동안 죽어간 동지들과 희생당한 백성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훨씬 와 닿는다. 물론 이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세번째,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일 때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송희립에게 다시 한번 잘라 말한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수는 없다. 열도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확실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제대로 끝냈다고 할 수 없다"고. (어쩐지 이 말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루쉰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 <노량>에서 이 말의 의미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이순신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결국 이 전쟁을 그대로 끝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은 임진왜란(1592)와 정유재란(1597)이라는 이중의 전쟁이다. 전쟁 초기. 일본 수뇌부,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이 조선에 출병한 이상 이 전쟁을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주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되며 왜군들은 1596년까지 서서히 철군을 진행했지만, 이 화의 조건의 구체적 내용이 상당부분 사기로 밝혀지며 히데요시는 격분하고, 1597년 다시 대규모의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한다. 이것이 정유재란. 

이미 정유재란을 겪어 본 이순신과 조선의 일선 지휘관들이 과연 1598년 12월의 후퇴를 영구적인 후퇴라고 믿었을까.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 과연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부분이 핵심인데, 영화 <노량>은 이런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는 하나, 아쉽게도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4.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를 통해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 전국 다이묘들이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느라 조선 재침공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유성룡이나 윤두수 같은 정치인들이라면 다양한 정보를 조합해 재침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당시의 이순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입장이라면,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산산조각을 내고 감히 재침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피해를 주는 것만이 확실히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군사들과 백성들, 그 가족들이 다시 전쟁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비록 그 마지막 전투에서 휘하 장병들이 죽고 상하고,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5. <노량>은 여기에 보태, 그렇다면 일본 측 장수들은 어째서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순천 왜성에 갇힌 고니시야 탈출하지 못하면 바로 끝장이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구조에 어째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좀 궁금하다. 

<노량>이 내놓은 답은 자존심.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은 일본 전국시대에도 용명을 떨친 강병을 갖고 있었고,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바로 그 사람이자(영화 속에도 소개된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최대 승리라 할 수 있는 사천왜성 공방전에서 명군에 거의 1만 가까운 사상자를 낸 명장이었다.

시마즈가 노량해전에 목숨을 건 실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영화 <노량>에서는 고니시가 시마즈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공까지 세운다면 일본으로 돌아가도 감히 누가 당신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시마즈의 자존심과 자신감이라면, 충분히 물만한 떡밥이다.

사실 이순신이 왜군의 재침을 우려했다면, 반대로 고니시는 이순신을 앞세운 조명 연합군의 열도 보복 침공을 걱정했을 수도 있다(이것 역시 실제 역사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지만, 당시 왜군 다이묘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일본군 최강의 카드인 시마즈 군을 동원해 이순신을 공격하고 자신이 살 길도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량>은 이순신, 고니시, 시마즈에게 목숨을 걸고 노량 바다에 뛰어들 동기를 마련해준다. 지금까지의 <한산> <명량>은 물론, 거의 모든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입체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런 잘 설계된 대립이 대다수 관객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부분의 대사에 좀 아쉬움이 있다.

 

6. 또 하나의 아쉬움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순신 관련 드라마나 영화에서 진린과 이순신은 거의 버디 무비의 두 주인공처럼 묘사되곤 했다. 이것은 실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인데(진린은 일찌기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충절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다), <노량> 제작진은 이런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서였을까. 진린/등자룡과 이순신의 매력적인 티키타카를 기대했던 관객으로서 좀 아쉽다.

물론 이 글 시작 때 말했듯, 이런 사소한 아쉬움에 비해 <노량>은 매우 세련된, 멋진 영화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뭘 하고 있나. 빨리 예매를. 

 

이후는 다소 뜬금없는,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들. 

P.S. 1. 고니시의 사신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리마(이규형)의 갑주가 임진왜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지 않았던 스페인풍의 남만동구족 갑옷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포르투갈과의 교류가 많았던 고니시의 군대이니 고위 장교인 아리마는 포르투갈 수입 갑주를 입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긴 하다.

P.S.2. 이순신의 조총 피격 장면은 어쩐지 어린시절 본 김진규 주연 <난중일기(1978)>의 같은 장면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한민 감독도 이 영화를 기억할까. 

P.S.3. 이면은 사망 당시 20세 추정. 그런데 굳이 여진구에게 덕지덕지 수염을 붙일 이유가...?

P.S.4. 여담이지만 노량해전에 대한 일본 측 해석 중에는  '일본군이 꽤 큰 피해를 입었다 해도 어쨌든 고니시의 일본 귀환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했고, 조선 최고 사령관 이순신을 전사하게 하는 전과까지 세웠으니 이것은 승리한 전투'라는 시각이 있다. 

P.S.5. 패전하고 후퇴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분하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같은 대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약 300년 뒤 시마즈의 후예인 사츠마의 유신지사들은 정한론과 한일합방의 주역이 된다. 이순신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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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쉬업 라이프의 세 주역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원작 웹소설 이후로 요즘 '인생 2회차' 서사가 넘쳐나지만 사실 이 장르에서 아 그거 걸작이었지 싶은 작품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1986)>, 해롤드 래미스의 <사랑의 블랙홀(1993)> 이후로는 <어바웃 타임(2013)> 정도? 일본 만화 <리라이프>?
그러니까 내가 과거로 가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빙의되어 다시 태어나는 경우는 흔한데 '내 인생'을 동시대에 다시 살 기회가 생기는 서사는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아마도 2023년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는 이 전통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듯 하다.
 
일본 어느 지방도시 공무원으로 아주아주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던 아사미. 어느날 교통사고로 급사해 저승의 흰 공간에 떨어지고, 생전의 자기와 너무나 하는 짓이 비슷한 저승 공무원("규정때문에 안됩니다")에게서 지금 환생하면 쌓은 덕의 포인트가 부족해 다음 삶은 과테말라의 개미햝기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단, 그게 싫으면 인생을 다시 살아서 만회할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살아야지. 인생 2회차 도전!
이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인생을 두번 살면 얼마나 삶이 달라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삶은 어느새 훅 지나가 버린다. 더구나 덕을 쌓지 않으면 미물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니. 대체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덕'이란건 정체가 뭐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포텐셜인가, 노력인가. 과연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란 존재하나. (단, 장르는 코미디)
...라는 식의 이야기는 인생이 2회차면 다 될것 같으냐는 진지한 접근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계란 후라이처럼 가장 돋보이게 덮인 것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일본적으로 변형된 <섹스 앤 더 시티>.
 
아니,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일까? 네 친구의 너무나도 끈끈하고 치열한 우정이 사뭇 감동적인데 심지어 거기엔 남자의 그림자가 없다.
 
남성 캐릭터 중 가장 비중이 큰 후쿠짱은 그야말로 커다란 곰 인형 수준. 사랑이며 연애며 하는 것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정말정말 사소한, 지나가는 얘깃거리일 뿐이다. 정정하면 <노 섹스 앤 더 시티>. "Trends come and go, but friendships never go out of style." 그런데 정작 작가는 75년생 남자(바카리즈무).
소꼽친구 여자들 이야기에서 연애라는 강력한 재료를 아예 들어내고도 10부작 드라마가 이토록 흥미로울수 있다니. 사뭇 놀라울 뿐이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사회교육방송적인 색채도 최대한 억누른(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연출도 새롭고, 말 실수 하나도 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초세심 대본도 빛을 발한다.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는 말할것도 없고.
물론 <펜트하우스>나 <아씨두리안>이 인생드라마였던 분들에겐 비추. 왓차/웨이브/티빙에서 시청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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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빙> 때문에 디즈니 아이디 살렸는데 어 어벤저스밖에 없네 인제 뭐보지 하는 분들을 위한 추천. <만달로리안>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를 보시고, 물론 <카지노>도 볼만한데 <드롭아웃>도 한번 보시라고.
우리에게 황우석이 있지만 바이오 벤처의 역사에는 그 정도는 우스울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즈. 피 한방울만으로 200가지 질병을 진단할수 있다는 신기술로 엄청난 투자를 모아 초거대 성공신화를 쓴 늘씬한 금발 미녀가, 실제론 모든게 구라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한때 수조원이었던 기업가치를 0원으로 만들고 실형을 살고 있다는 실화.
 
<드롭아웃>은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사기의 원칙이 살아 있다. 사기를 치려면 가능한 한 상상의 범주를 넘어 크게 쳐야 한다. 그래야 '설마 저게 사기겠어?'라는, 대중의 사각에 위치하게 된다.
극중 사기의 패턴은 너무 간단해서 놀라울 정도. 우리를 검증하겠다고? 미안.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검증은 불가하다. 특허는 현재 검토중이며, 곧 모든게 선명해진다. 얼마나 많은 유명인사들이 우리를 지지하는지 알고 있나? 그 사람들은 뭐 다 바보라서 그러고 있을 것 같은가.
 
우리 실험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꼭 투자하라는 얘기는 않겠다. 다른 투자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엘리자베스 홈즈는 실제로 금발, 외모, 언변이라는 자신의 자산을 최대로 이용한 인물인 듯(드라마 한 회차의 제목이 '백인 중년 남성'이다). 테라노스 사건 이후로 한 여성 벤처기업인은 "홈즈를 연상시킬수 있으니 금발을 다른 색으로 염색하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암튼 보고 있으면 선악의 자리바꿈이 현란하다. 홈즈의 피해자(투자자)들은 그야말로 탐욕의 화신들. 홈즈의 변호인은 너무나 '정의'를 자주 들먹인다. 한편 유일하게 진실을 파헤친 사람은 모두가 싫어하는 극 비호감 인물이란 점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해석에 따르면 홈즈는 소시오패스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역을 맡은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를 보는 것이 큰 재미. '감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보고 학습해서 그걸 연기로 써먹는' 연기가 진정 압권이다. 아무튼 참 실화라기엔 실감이 안 나는 놀라운 이야기. 재미있다. #드롭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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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오징어게임>이 처음 나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썼던 글입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봤는데 별로 틀린 말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때 온갖 호들갑이 쏟아져 나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나올 때 썼던 글이라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아무튼 그 뒤로 K-콘텐트의 물결이 세계를 휩쓰는 걸 보게 된 지금, 다시 읽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1970년대 초 쯤이라고 치자. 서양인 서넛이 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길을 잃어 인적이 드문 변두리로 빠졌다. 어두컴컴해서 겁도 슬슬 나고 배도 고픈데 저 앞에 영자로 된 레스토랑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다. 잘 닦아진 커틀러리 하며, 리모주 자기 그릇들이 예사롭지 않더니, 거북이 알 수프에서 브랜디에 담근 메추라기, 농어 구이까지 제대로 된 프렌치 정찬 코스가 나오는 거다. 다들 놀라는 가운데 어디서 좀 먹어봤다는 친구가 말한다.
“수프와 메인은 좋았어. 하지만 제빵기술은 아직 부족해. 치즈도 두가지밖에 나오지 않고, 이렇게 쿰쿰하지 않은 까망베르는 어린이용이지. 뭣보다 와인리스트는 손을 봐야 할 거 같아.”
그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뉴욕이나 파리에서 이 가격에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우리는 내일부터는 이 식당에 다시는 예약을 못 하게 될거야. 그리고 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 음식이 어떻게 나온 건지나 알아? 이 도시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아? 여기가 홍콩이나 도쿄라도 되는 줄 알아?”
 
 
 
 
2. <오징어게임>에 대해 입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요즘. 굉장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오징어게임>에 열광하는데 왜 한국 사람들만 여기저기서 재미없다, 잘 못 만들었다 말이 많은 건가요?”
한때는 <기생충>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매국노로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일 기세더니(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살려주세요), 이젠 <오징어게임>이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콘텐트에 토를 다는 행위는 마치 여동생이 선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얘 눈이랑 코랑 다 성형한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이 적지 않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전 세계 넷플릭스 1위’까지, 국위선양, 환호, 좋다. 다만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일단 이 콘텐트가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고, 이방인 평자들은 이 콘텐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붐은 여기저기서 징후가 보인지 오래지만 이렇게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은 신기하고 낯설다는 뜻이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순간, 드디어 외국에서도 ‘비평’이 시작되고 있다. 알리 캐릭터가 엉클톰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부터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3. 가장 답답한 것은 ‘<오징어게임>의 분석을 통해 K-콘텐트의 성공 원인을 분석’ 하려는 시도다. 이건 전봉준이나 나폴레옹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동학혁명의 실패 원인이나 19세기 초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비슷해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 K-드라마는 이미 충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상품을 내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노출의 기회, 즉 쇼윈도의 존재였다. 이 경쟁력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어 온 창작의 자유가 있었다. 일부 제한된 분야, 즉 섹스와 폭력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의 금기가 작용했지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그런 제약을 일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천, 지 인으로 나눠 서술하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이 정도만.)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레스토랑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K-콘텐트는 훌륭한 디저트다. 디저트만으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지만 메인디시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가 진정한 성공의 시작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그럼 앞으로는? 당연히 잘 되겠죠. 이웃 나라 중에 K-콘텐트를 온 국력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나라도 있는데, 당연히 잘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건 <펜트하우스>가 넷플릭스에 올라가면 어떤 반응을 얻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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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은 사골칼국수의 고향이다. 대학로에서 내려오면 혜화동 로타리에 떡 보이는 혜화동칼국수집이 있고, 그 뒤에는 전직 대통령 단골집이었다는 국시집이 있고, 반대쪽으론 골목 안 가정집에 숨어 있는 손국수집이 있다.
 
전부 사골 머리 양지 다 때려넣고 푹푹 삶은 뽀얀 소고기 국물 칼국수다. 이 동네에선 닭칼국수나 바지락 칼국수는 취급하지 않는다. 모두 다 맛있고,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다.
그런데 언젠가, 맛집 컬렉터인 L감독님이 한 말씀. "명륜 손칼국수 가봤어요? 혜화동 언저리를 넘어 서울에서 최고에요."
그렇다면 가봐야지, 했는데 그게 만만한 미션이 아니었다. 일단 저녁 장사가 없고, 주말에도 쉰다. 주차도 안된다(이번에 보니 가게 입구에 2대 정도 가능). 난관.
 
그래서 당초 생각보다 엄청 늦어서야 가 볼수 있었다. 설렁탕과 칼국수. 두 메인의 국물은 같다고 한다. 혹시 문배동 육칼처럼 반반 메뉴는... 없다. 그냥 미련이 남으면 공기밥을 시켜서 칼국수에 말아 먹을 것. 
수육/문어 반반 주문. 문어를 주문하니 초장이 나오고, 수육이 나오니 간장이 나오는데 송송 썬 마늘종을 반찬으로 주는게 특이하다. 물론 입에 같이 넣고 씹으면 한국인인 이상 싫을 리가 없다.
 
 
 
문어는 평범하게 그냥 맛있는데(미안하다. 포항 분들의 손을 거친 문어를 먹은 뒤로 다른 문어들은 그냥 평범하게 느껴진다), 수육에서 눈이 확 뜨인다. 꽤 두껍고 모양없이 그냥 대충 썬 고기인데 기가막히게 부드럽고 즙이 죽죽. 수육을 더 시킬걸!
대망의 메인 칼국수. 진하다. 그리고 진짜 칼로 썬 칼국수다. 후루룩이 아니라 호로록 호로록. 간이 깊이 배어 있다. 살강살강 씹히는 파와 부스러기 수육의 조화도 그만. 완벽하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간이 약간 세다. 이날만 그랬는지,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많이 가 보신 분들은 원래 그 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을 타서 먹게 되더라도 또 가고 싶은 맛. #송원섭맛집 #명륜손칼국수 #간판을못찍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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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남쪽의 하카(客家). 하카라면 북방에서 내려온 중국의 유태인. 주윤발 장국영.
 
하카는 많이 들어 봤는데 하카식 음식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고, 사실 그냥 이름에 끌려 방문. 근데 그런거 있잖아 왜. 오래된 식당 아닌데 간판만 봐도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거.
(어쨌든 이 식당은 맛있지만 하카식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는 진짜 하카식 식당들도 꽤 있다고.)
 
 
 
오이무침은 흔한 메뉴지만 살짝 고수맛이 섞인 데서부터 양념의 섞임이 상큼하기 이를데없고(물론 오이를 썰지 않고 부숴 주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공심채는 흔히 먹듯 숨을 죽인 맛이 아니라 줄기의 힘을 탱탱하게 살려 아삭아삭한 맛이 별미다. 처음 두가지 채소에서 기대 폭등.
 
 
미리 주문한 오리는 광동식이라기에 기대했는데 북경식과 사실상 다를 게 없어 살짝 실망. 하지만 맛은 대박. 오이채와 파채를 넣고 전병에 싸먹는 바로 그 맛이다. 살코기를 먹고 나면 남은 살점이 붙은 뼈를 튀겨낸 뒤 큐민 등등 양고기 양념에 굴린 느낌으로 주는데, 살짝 느끼한 오리 맛을 없애 준다. 맛있다.
사천볶음밥(중국식 햄이 들었다. 이름과 달리 맵지 않음). 버터 탕수육, 창펀 모두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는 맛. 샤오롱바오는 내 기준으로는 살짝 국물이 좀 과하게 기름진 맛이긴 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난리.
아무튼 시그니처 오리는 가성비를 넘어 아주 훌륭하고, 나머지 요리들도 뺄 것 없이 만족스러움. #송원섭맛집 #오랜만에흡족한차이니즈 #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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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단길 여수댁(혹자는 여수집이라고도 한다). 덕자찜 한번 먹자는 따거의 말씀에 우루루 모였다. 병어찜이나 덕자찜이나 대개 갈치조림이나 별 다를 것 없는 국물에 푹 졸여 국물도 떠 먹고 살점도 들어 먹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경리단길 시장의 여수댁은 하얀 덕자찜을 낸다.
왕년에 민어집으로 유명했던 팔판동 병우네(코로나 지나고 보니 어디론가 사라짐)에서 먹어 본 뒤로 하얀 덕자찜은 처음이다. 덕자 사진 옆의 전화기는 크기 비교를 위해 누군가 내민 것.
50cm는 되어 보이는 덕자병어를 홍고추 대파 썰어 넣고 담백하게 잘 쪄냈다. 두터운 흰 살을 떠내 양념 간장 뿌려 파와 함께 입 가득 넣고 씹으면 고소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일품.
물론 비싸서 아무 때나 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럿이 한입씩 먹는 재미가 있다. 메뉴판을 보면 덕자 외에도 가오리 민어 등 고춧가루 넣지 않은 생선찜이 전문. 서울에서 여수식 맛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추가로 생선구이. 서대, 좀 작은 민어, 조기가 나온다. 괜히 이름만 드높아서 여수 가는 사람들이 먹어 보고 실망하는 군평선이는 필요 없다. 앞으로도 여수 가시는 분들, 맛이 없는 것은 아니나 뼈만 많고 살은 한 숟가락인 군평선이를 그 가격에 먹느니 다른 맛난 생선들을 잔뜩 드시길. 
 
모두 살짝 반건조해서 구운거라 고소한 풍미가 그만. 여기에 닭똥집 제육 같은 기본 안주들이 매우 충실하고, 일단 자리에 앉으면 나오는 기본 찬에 파김치, 돌김, 돌게장이 훅 달려든다.
 
 
돌게장(사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올 때 살짝 눈짓을 하면 양푼에 밥 비벼 먹으라고 계란후라이까지 같이 주시는 센스가 일품. 후식으로 나오는 구운 가래떡에 설탕 궁합도 매력적이다.
단 일견 허름해 보이는 가게의 분위기에 비해 비싼 집(정확하게 말하면 비싼 재료 취급 전문점. 내장이 화려했다면 더 비쌌겠지)이라는 건 각오해야 할 듯. #송원섭맛집 #경리단길 #여수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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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괴로워한다. 예민하고, 의심하고, 상실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영웅담이라더니. 과연 이런 것이 영웅인가.
<순신>엔 무용, 연극, 뮤지컬, 판소리가 모두 있다. 인물들의 감정은 대사로, 춤으로, 창으로, 노래로 전달된다. 원통형의 놀라운 무대는 때로 이순신의 배 안으로, 혹은 울돌목의 좁다란 물길로 변한다. 거북선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지만 순신 역의 형남희에게는 대사가 거의 없다. 무인 역의 이자람이 변사처럼 전체 극의 흐름을 끌어가고, 순신 본인보다 여러 내면을 대변하는 존재(또다른 순신)들이 주절주절 말이 많다.
승리가 불가능한 전쟁의 최전선에 어쩔수 없이 서게 된 순신은 무대에서 자주 쓰러진다. 바닥을 구르고, 매달리는 사람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몸부림친다. 누구보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으로 보인다. 딱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적과 맞선다. 
 
보는 내내 관객을 압도하는 건 이자람의 소름끼치는 절창. 대략 1인 5역을 왔다갔다하던 이자람에게서 "가지마시오!"가 터지는 순간 눈물이 툭 터져나온다. 이것이 순신인가. 이런 것이 성웅의 운명인가. 안타까움이 가슴을 죈다.
보다 보면 선조의 캐릭터에 굳이 이런 변명의 기회를 줄 이유가 있나, 굳이 등장인물마다 의무적으로 노래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들이 들기도 하지만, 이자람과 형남희의 주고받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시간 반이 길지 않았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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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잘 하란 말이야
 
똥오줌 못 가리는 문과출신의 OPEN AI 사태에 대한 관전기.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이며 회사의 리더인 샘 알트만을 해고시킨 것까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이사회는 주주들이 아니라 사회 공익단체 간부 같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결국 잽싸게 나선 마이크로소프트가 알트만을 채용하겠다고 하고,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선다고 하고, 결국 알트만이 OPEN AI 대표로 복귀하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지켜봤다.
1. 샘 알트만(올트먼?)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관둔다고 500명이 따라서 관두겠다고 하는 일은 엄청난 일.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한폭의 드라마. 대체 평소에 어떻게 해줬길래?
2. 일리야... (이름이 길어서 못 외움. 수츠케버)는 연구는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인간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반란의 수괴가 하루만에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3. 이게 결국은 AGI로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세상에 인공지능 연구하는 회사가 OPEN AI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 회사의 CEO를 날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4.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게 목표였다면 일단 크게 울린 셈. 하지만 무슨 수로 저 열차를 세울수 있을까.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AGI를 나쁜(놈들이 키운) AGI보다 빨리 개발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샘 알트먼과 일리야 수츠케버
문득 또 생각. 저 일리야...님이 "인간이 평생 만나는 정보량을 단어 수로 계산하면 약 10억개, 아주 넉넉잡아 20억개라고 쳐도(20억개라면 약 6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단어씩 보는 셈), 이건 AI가 학습하는 정보량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양"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최소한 초기에는 오염된 정보/ 가짜 정보/ 틀린 정보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옆에서 '편견(일부러 이 표현을 썼습니다)'을 넣어 줘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 지나 그것도 결국 일부의 의견이라는 걸 다 아신, 통계학적으로 다음 어순에 들어갈 단어 찾기를 지나, 논리적 추론도 지나, 예측과 분석을 다 하게 되고, 진짜 자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신, 정말 최고의 현자가 되신 AI님에게는 이 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댁이 보기에 '진정 인류를 위하는 길'이란 어떤 길인가요?"
이 질문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더 분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그런데 문득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XX이야?')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질문은 다른 분이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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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오타니 다큐, <오타니 쇼헤이: 비욘드 더 드림>을 봤다.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매우 실망.
 
이런 다큐를 만들 생각이라면 과연 시청자는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지구적 스타가 된 오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궁금해 한다. 대체 오타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오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시절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괴물이 나왔을까. 대체 어떤 훈련을 한거지? 야구 과외라도 했을까?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오타니도 친구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려서도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완성된 인간이었을까? 고교시절 같은 팀 동료들은? 니혼햄 시절 동료들은? 과연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첫사랑은? 
 
 
그렇다면 이 다큐에는 오타니의 초딩 동창, 고교시절 야구부 동료, 은근히 지켜본 같은 반 여학생, 이와테 지역에서 맞붙었던 다른 학교 라이벌이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 다큐에는 부모 형제는 물론, 과거 니혼햄 동료나 현재 엔젤스 동료 한명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야구계의 전설들이 나와서 오타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타니가 만나본적도 없는 마츠이 히데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와서 대체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오타니가 고1때 만들었다는 야구인생 계획표. 몸 만들기, 컨트롤, 키레('구위'라고 누군가 해석해 놨던데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시속 160km,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 8가지를 단련해서 고교 졸업때에는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는 것(일본은 여러 구단이 한 선수를 동시지명할수 있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이게 고1 소년이 세울수 있는 계획일까. 아무리 봐도 외계인.
 
(그런데 왜 타격에 대한 얘기는 없을까. 그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ㅎ)
 
 
그 밖의 멘트들은 역시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들이라 재미라곤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좀 섬뜩할 뿐. 오타니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나랑은 다른 인간이야. 나도 야구를 좀 잘 한 편이지만 나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면서 낄낄 웃은 C.C 사바시아에게 훨씬 호감이 가더라.

어쨌든 오타니 다큐는 누군가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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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2차 시기가 한번 훑고 지나간 뒤로 면역이 약화됐는지 잔병이 끊이질 않는다. 이 몸을 너무 오래 써서 그런가.
그런 사이에도 간신히 가본 캐롤스. 간판부터 닐 세다가의 오 캐롤을 연상시키니 전체적으로 아메리칸 다이너, 가까이는 한때 국내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TGIF나 베니건스를 연상시키는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압구정 코코스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성기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였던 만큼, 그 세대에 맞춘 듯한 BGM이 제격이다. Chicago의 You're the inspiration과 Peter Cetra의 Glory of Love에 맞춰 멜론 절반만한 잔에 나오는 프로즌 스트로베리 마가리타 주문. 크어. 역시 격에 맞는다.
시그니처 비프 립 바베큐, 베이비 백 립(돼지), 애피타이저 샘플러, 프라이드 치킨 샐러드가 잇달아 등장. 옛날 그 맛이기는 커녕 훨씬 발달한 첨단의 맛이다. 바베큐 소스에 푹 전 소갈비와 돼지갈비를 버터에 지진 빵 사이에 끼우고 코울슬로와 할라피뇨를 얹어 먹으면...
이건 정말 알기 쉬운 직설적인 맛. 0.01초만에 뇌에 쨍하게 전달되는 그 맛. 헤어날 수 없다. 샘플러에는 코코넛 쉬림프, 모짜렐라 튀김, 어니언 링 등이 향수를 자극하는데 찍어먹는 소스가 청양고추 마요네즈라면 이것 또한 더 바랄게 없다.
 
흥이 나서 좀 달릴까 했더니 업장 마감이 10시고 건물 조명이 꺼지는 시간이 9시50분쯤이니 참고하시라는 안내. ㅠㅠ 이게 아마도 유일한 약점일듯 싶으니 한번 추억의 안주로 달리실 분들은 좀 일찍 가셔야 할듯. 개인적으로 그저 먹고 마시는 걸 넘어서, 매장에서 좀 살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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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아론 Hank Aaron, Henry Louis Aaron (1934. 2. 5 - 2021. 1. 22)

자고 일어나니 행크 아론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1934년생이니 향년 86세(미국식). 

잘 알려진 행크 아론의 업적을 가장 짧게 정리하면, '베이브 루스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깨고 한동안 역대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하다가 배리 본즈에게 그 타이틀을 넘겨준 사람' 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23년 통산 755홈런은 역대 2위 기록이 됐지만, 2297타점은 여전히 역대 1위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몇가지 오해가 있다. 요즘처럼 메이저리그 경기를 맘대로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보니, 어마어마한 홈런 기록 때문에 엄청난 거구일 것으로 추정(?)되었던 것과는 달리, 1982년 내한 당시 보는 순간 '어 별로 안 크잖아?'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왔다. 기록상 신장도 1m83. 물론 더 작은 윌리 메이스(1m78)도 홈런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전설의 행크 아론을 본 건 아마도 1982년 방한 때가 처음이었을거다. 물론 현역 선수는 아니었지만 이해 8월 삼성-롯데의 동대문 경기(이걸 '중립경기'라고 불렀다) 직전에 팬서비스로 이만수 김용철과 홈런레이스 이벤트에 참가했다. 48세의 나이에도 15개중 5개를 넘기며 예사롭지 않은 파워를 보여준 거다. 영상이 있다.

https://youtu.be/U0OW_7ud8fw 

그리고 이 해 시즌이 끝난 뒤에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마이너리그 연합팀을 인솔, 한국 선수들과 여러 차례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다. 선발팀과도 붙고 개별 팀과도 붙었는데 MBC 청룡전에선 특이하게도 3루수 이광은이 투수로 등판했다. 물론 실업야구때까지도 알아주는 투수였지만 프로 이후엔 투수로는 은퇴상태였는데 미국팀을 상대로 등판한 것이다. 아마도 추운 날씨라 투수 보호(...) 차원에서 희생한 게 아니었을지. 

아론에 대해선 늘 '화려하지 않은 꾸준함'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 이건 아마도 비교 대상이 무려 12회나 홈런왕을 차지한 베이브 루스, 타격 못잖게 신에 가까운 수비와 주루로 '가장 완벽한 선수'로 불렸던 윌리 메이스, 혹은 7차례나 MVP를 수상한 '오만한 신' 배리 본즈 같은 선수들이라 그랬을 것 같다. 심지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겨우(?) 47개라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론은 홈런왕을 4차례나 했고 MVP도 받아 봤고, 단 한번이지만 팀 우승도 시켜 봤다. 우승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홈런을 3개나 때려내 새가슴 이미지도 아니다. 단지 비교의 기준이 너무 전설적인 선수들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흑인이 루스의 기록을 깨는게 불쾌했던 백인들이 고의로 폄하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등번호 44번으로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시즌 44홈런을 4회나 기록해 등번호를 잘못 고른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과연 55번이었으면 55홈런도 쳤을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임팩트가 약했던 것도 사실인가 싶은 것이, 일단 '등번호 44번의 강타자'를 생각하면 아론보다는 레지 잭슨이 더 먼저 떠오른다.^^) 

 

뭔가 평탄하고 꾸준한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인생이 그리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부분이 적었던 모양. 생애에 대해선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Chasing the dream과 The Hammer of Hank Aaron)가 있을 뿐, 극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사진에 등장하고, 통산 홈런 기록이 배리 본즈의 추격을 받는 동안 이런 광고에 출연한 적도 있다. 열심히 훈련하는 본즈에게 어디선가 '은퇴해... 은퇴해...' 하는 유령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알고 보니 그게 '내 기록 깨지 말고 그냥 은퇴해'였다는 코믹 광고. 은퇴자들을 겨냥한 금융사가 광고주. 

https://youtu.be/e5kLuWmw5EM 

몇해 뒤, 2007년 본즈가 자신의 기록을 깼을 때에도 축하 영상을 보냈다. 막상 기록을 깰때 현장에 오지 않았다며 대인배스럽지 못하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생각해 보라. 타이 기록이 나온 뒤 어느 경기에서 신기록이 나올줄 알고 따라다니겠나. 아무튼 루스나 루 게릭같은 말년 고생 없이 온화하고 평화롭게 잘 살다 가신 듯 하니 다행이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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