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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문화의 핵심을 성리학의 기본 단위인 이(理)와 기(氣)를 통해 해석, 전통적인 한국 사회와 해방후 급격한 경제 발전, 사회의 변화, 특징적인 민주화 등이 어떤 정신적 분위기(?)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공자는 참으로 강하구나" 했던 바로 그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한국에 정통한 학자라 해도 한계는 있겠으나, 매우 독특한 해석이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부분들이 많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면.

 

 

 


1.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한국인의 사상사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명사를 통해 해석하고 가르쳤다.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이며, 단일한 원리이자 지향해야 할 선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이며,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의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기는 이 이가 현실세계에 적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이가 절대지상의 원칙이라면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흔히 이를 체(體)라 한다면 기는 용(用)이라 표현된다.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빗대 이해할 수도 있다. 


2. 오구라 기조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사회다. '주자학에 의한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라고 규정한다.
즉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 주자학 이후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리'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리'가 도덕적 정당성이 되어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나라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덕을 중시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문체에서는, 지식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며 정치의 선봉에 선 시대가 없었던 일본 역사에 대한 묘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도 시대에도 유학자들은 막부의 통치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종의 어용 학자의 역할을 했을 뿐, 유학자가 정국을 주도하거나 한 시대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정치는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전문가'들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 '공맹지학'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유학에서 맹자의 존재가 희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3. 아무튼 지식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보니, '리'에서 벗어난 물(物)은 매우 비천한 것으로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공고하고, 특히 공과 상의 귀함이 지독하게 무시당해 온 역사가 바로 이 '리'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해석이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음에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恨)이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소비는 일종의 한풀이다. 그 구매 대상이 상징하는 상위의 생활에 대한 동경이 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런거 하나 못 살까보냐', '내가 이런 것 하나 못 사줄까보냐' 같은 심성이다. 정말 일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에 대한 이런 묘사는 심히 그럴듯하다.


4. 그렇다면 왜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事大)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일까. 오구라에 따르면 그 이유는, 중국의 명조가 바로 '리'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명조에 있었고, 유학이라는 학문이 지향하는 과거의 이상, 즉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실재하는 존재가 바로 명조였던 것이다.


오구라는 여기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한중관계를 잠시 거론한다. 과거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사대를 기본 원칙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사대는 과거의 중국이 '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나 20세기 이후 중국은 그런 존재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미 20세기 이후, 한국의 '리'는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을 추종한 것 역시 오구라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이 6.25때 도와주었다거나 경제적 원조로 번영을 이끌었다거나, 혹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방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친미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과거 중화가 갖고 있던 '리'를 한국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리를 지향하고, 거기에 맞춰 국가와 국민 모두 합심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오구라 기조 교수


5. 한국의 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이 리를 숭상하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민주주의라는 리의 구현을 위해 한국 지식인들은 목숨과 지위를 아끼지 않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대부'와 '선비'로 나뉘곤 한다. 선비가 국정에 참여하면 사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재야의 사림이 된다. 항상 그 순수성은 재야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안에서 오구라의 주장은 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각이 반한적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오구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앞서도 잠시 말했듯, 일본 역사에서도 이토록 지식인(혹은 문인)이 주도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부러움이 느껴진다. 


6.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과연 오구라의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인 스스로 쓴 한국인의 정치 사상사, 혹은 한국인의 정신사에 대한 저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대한 분석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정치사상을 다룬 한국 학자의 괄목할만한 저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몇몇 권위자들께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추천할만한 책이 없다'였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은, 책 자체의 독후감보다 '없다'라는 추천의 충격이었다. 왜 없을까. 없어야만 할까. 

혹시라도 '없긴 왜 없어'라고 추천해 주실만한 분, 아울러 지금이라도 직접 써 주실 분이 궁금하다. 이 포스팅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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