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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0년 전에도 존 레논의 벽은 존재했지만 그때는 잘 몰랐다.

(제목과의 호응을 고려해 첫 사진으로 넣음. 주요 내용은 나중에.)

 

다시 프라하 성으로 돌아간다.

 

 

 

오후의 햇살이 프라하 성의 돌바닥을 지글지글 달굴 무렵, 프라하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성 조지 성당 St George's Cathedral 로 들어갔다.

 

세인트 조지 St. George 는 잘 알려진대로 용을 죽인 용사이며 성인이고,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물론 잉글랜드에서만 추앙받는 것은 아니고, 유럽 전역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어떤 미술 작품을 볼 때 긴 창을 들고 용과 싸우고 있는 캐릭터가 있다면 성 조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거.

 

당연히 성 조지는 영어 이름. 체코에서는 이르지 Jiri 라고 불린다. 역시 저렇게 쓰고 이르지라고 읽는다고 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다. 체코 출신인 유명 발레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 Jiri Kylian 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리 킬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현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데 따져 봐야 아무 소용은 없다.

 

 

가장 오래된 건물답게 살짝 기운 느낌도 있는데 돌 건물의 특징상 내부는 무척 시원하다. 프라하의 태양에 지친 사람들은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활용할만한 성당이다.

 

 

 

천장에는 성 조지의 활약에 대한 그림이 지워져가고 있고,

 

 

거의 매일 콘서트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울림은 기가 막힐 듯.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열리는 콘서트도 관람 후보로 고려했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 성 관광이 대략 끝났다. 이제 나가는 길. 왼쪽 끝의 1번 위치가 바로 성의 정문인데, 들어갈 때 4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가는 건 정문 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나가면서 정문을 봐야 하기 때문.

 

 

 

안쪽에서 정문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다. 성 밖을 나서자마자 바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밖에서 보면 이런 모습. 누차 강조하지만 성벽이 없기 때문에 성문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정문의 이 두 거인상. 둘 다 승자가 패자를 몽둥이로 내리치거나 칼로 찍는 모습인데, 이 역시 체코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굴욕적인 모습을 정문에 남겨놓는다니...

 

...아무래도 체코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자나 성을 나와 강 쪽을 바라보면 이런 붉은 지붕의 물결을 보게 된다.

 

프라하를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

 

 

 

이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스타벅스가 너무 붐비는 것 같아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내리막. 프라하 성에서 카를교로 가는 길이다.

 

 

(프라하 성에서 존 레논의 벽을 거쳐 카를교까지 가는 길을 빨간 선으로 표시했다. 확대해서 보면 잘 보임)

 

프라하 성을 나와 바로 보이는 빨간 기와지붕 속으로 걸어 내려가는 길. 일단 한번 꺾으면 바로 유명한 네루도바 거리가 나온다. 각국 대사관, 유서깊은 상점 등이 몰려 있는 역사의 거리다.

 

 

 

 

시인 얀 네루다가 살았던 집이라고 함.

 

기울어진 햇살이 따가운 길을 걸어내려가면,

 

 

강 서쪽의 성 니콜라스교회(프라하에는 두 군데의 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다. 또 하나는 구시가 광장 귀퉁이에).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성당과 교회가 각각 많이 있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심지어 다음날 간 곳은 동방정교회 성당이다.)

 

니콜라스 교회에서 다시 내려가는 모스테츠카 거리는 유명한 술집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골목을 지나고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컬러풀한 장벽.

 

 

 

꽤 길다. 거대한 낙서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유명한 존 레논의 벽 Lennon Wall 인데, 사실 레논은 살아서 여기에 온 적도 없고, 이 벽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사실 존 레논과 비틀즈의 노래가 가진 정서를 표현하는 낙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나, 굳이 왜 존 레논 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1980년대, 구 소련 위성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권위주의적 통치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던 무렵 서구로부터 불어온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 불만이 표출된 공간인 것은 분명하다.

 

 

'Imagine'같은 레논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좌파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는 의견을 듣는데,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레논의 노래가 반항 내지는 반정부 의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참 얄궂다.

 

물론 20세기 후반 동유럽 사회주의가 진짜 사회주의냐...를 따지자면 그건 또 다른 얘기. 

 

 

 

낙서판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그 누구도 이 벽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낙서를 덧쓰고, 덧그리기 때문이다.

 

물론 굉장히 후진 낙서를 한다면 누군가 바로 와서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듯.

 

 

그리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가이드의 말이 있었다. 뭘?

 

...누군가 지금도 열심히 낙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벽에 바짝 붙을 것이라면 반드시 벽 위의 낙서가 굳은 다음인지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그럴 듯 한데?

 

(잘못 고르면 등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수가 있다.)

 

 

 

그래서 후방에 혹시 덜 굳은 물감이 있는지 꽤 세심하게 확인한 뒤 fly.

 

땀은 엄청 흘렸지만 상쾌함.

 

 

 

그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카를교가 나온다.

 

 

 

언제나 인산인해.

 

잡상인, 버스킹, 관광객, 소매치기가 많다고 소문난 곳이기도.

 

 

 

이렇게 다리 난간마다 간격을 맞춰 옛 성현들의 조각상이 서 있다. 아시다시피.

 

별 흥미는 없다.

 

 

...만 그 혀가 잘린 네포무츠키 성인은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니 한번 참아 본다.

 

 

그래도 다리니까 일단 강을 한번 봐 주고

 

 

 

다리를 다 건너서야 프라하 성 쪽을 바라볼 정신이 든다.

 

진짜 덥다. 쨍 하는 햇살.

 

 

카를교의 성루.

 

이 아치를 지나서 구시가 광장까지는 다시 도보 가능 거리다.

 

 

 

 

이중 저 위의 맥주집/레스토랑 코슬로브나 Koslovna 를 가 봤으나 손님의 2/3가 한국인...

 

 

암튼 그렇게 한 10분 걸어서 구시가 광장의 주인공인 틴 성당의 예쁜 자태를 다시 보고,

 

 

 

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천문시계탑을 보는 것으로 이날의 일정 끝.

 

아침 8시에 집합해 물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중간 중간 쉬기도 했지만, 아무튼 오후 7시까지 11시간을 걸어다녔다.

 

서울에선 돈 준대도 안 할 일을 여기선 돈 내가 가면서 한다.

 

아무튼 천문시계는 주변 보수중이라 어수선하다. 인형극 봐 봐야 뭐 대단히 신기할 것도 없고.

 

일단 서있기도 힘들 지경으로 구시가 광장에서 약 10분 거리인 호텔로 후퇴.

 

 

가는 길에 화약탑(좌)과 시민회관(우)이 있다.

 

시민회관 내부의 스메타나 홀에서 이날 저녁 '프라하의 봄' 음악제 마지막 날 공연이 잡혀 있었다.

 

펜데레츠키가 저자직강 아니고 자신의 교향곡 7번을 직접 연주하는 스케줄.

 

볼까말까 망설이는 사이 매진돼 버렸다.

 

 

 

화약탑을 지나면 바로 숙소.

 

아침 8시에 바츨라프 광장에서 집합해 저녁 7시 구시가 광장에서 해산.

 

중간중간 쉬기도 했지만 근 12시간에 걸쳐 초강행군을 한 셈이다.

 

저질체력 중년부부 실신.

 

 

 

그래도 잠시 쉬었다가 뭘 좀 먹고 자자며 기어나왔다.

 

 

 

틴 성당 야경은 여전하고,

 

 

 

골목 하나만 들어오면 바로 딴 세상 느낌.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식당에서 굴라쉬를 주문했다. 용기가 빵이다.

 

그럴듯 한데 짜다.

 

엄청 짜다.

 

짜서 빵이랑 먹어야겠다고 빵을 허물어뜨려 같이 먹었다.

 

더 짜다.

 

나중에 보니 그릇(빵)이 굴라쉬보다 더 짜다.

 

제길.

 

 

분노를 달래기 위해 명성 높은 굴뚝빵 뜨레들로로 입가심 시도.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맛이다.

 

빈 빵만 먹으면 60코루나, 아이스크림을 가득 채우면 120코루나.

 

맛있다. 매우 맛있다.

 

 

밤의 화약탑과 시민회관.

 

1층 레스토랑 앞에 보디가드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고, 정장과 드레스 차림 남녀들의 만찬이 한창이다.

 

프라하의 봄 음악제 폐막 관련 행사가 아닐까 싶다.

 

 

 

카를교 야경 관람을 잠시 생각했으나 체력저하로 일단 후퇴. 호텔로 돌아오는 길 상점 창에는 다양한 상표의 압상트 병이 녹색 빛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압상트도 이 동네가 본고장이었나...

 

 

 

그리고 다음날, 언젠가 한번 가 보리라 생각했던 곳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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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다들 좋다고 할 때는 역시 다 이유가 있다. 프라하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다니는 곳은 카를교프라하 성, 그리고 구시가 광장 이다. 그리고 볼거리로 따지자면 역시 프라하 성이다. 그런데 프라하 성에 가면 프라하 성이 보이지 않는다(볼 수가 없다).

 

위 사진 같은 모습을 보려면 프라하 성을 내려와 강을 건너야 한다. 강 건너, 혹은 카를교를 비릇한 여러 다리 위에서 보는 프라하 성이 제일 아름답다. 간혹 프라하 성의 야경을 보기 위해 밤에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바보 짓이다.

 

가까이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게 프라하 성의 비밀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 나온다.

 

 

 

프라하의 핵심 지역. 왼쪽 붉은 원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프라하 성이다. 동서로 살짝 긴 고구마같이 생겼다.

 

블타바강은 프라하 시내를 구불구불 관통하기 때문에 딱 뭐라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대략 남에서 북으로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울처럼 강남과 강북이 아니라, 대략 강동과 강서로 도시를 가르는 셈이다.

 

프라하 성은 블타바 강을 기준으로 강서 지역의 고지대에 다소 비스듬하게 위치해 있다. 따라서 위 지도에 Charles Bridge 라고 나와 있는 카를교에서 볼 때 정면을 마주할 수 있다.

 

프라하 주변의 고지를 찾자면 오전에 갔던 비셰흐라드와 이 프라하 성(체코말로는 프라쥐스키 흐라드 Prazsky Hrad 라고 한다고 한다) 정도인데 특히 이 프라하 성의 위치는 프라하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이므로, 프라하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수없이 성을 지었다 개축했다 했던 곳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항공사진. 성이라고는 하지만 프라하 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성이나 옹성의 느낌이 아니다. 즉 성벽이 없다. 성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과 창들이 죽 자리잡고 있으니 막상 안에 들어와서는 건물은 많이 봤는데 저게 성이었어? 하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그나마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북쪽 면은 대다수 관광객들의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비교 대상을 알함브라 궁으로 삼는다면, 이게 주변에 일단 성벽과 해자로 민간 세계(?)와 성을 딱 구분해 놓고 시작한데다 알카자르 같은 요새의 흔적도 있으니까 아 여기가 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프라하 성은 그런게 전혀 없다. 그냥 촘촘하게 붙어 있는 빌딩들이 성처럼(!) 빙 에둘러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앞서 말했듯 처음에는 성곽도 있고 요새도 있고 했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불필효한 요소는 치워 버리고, 그냥 건물들로 둘러싸인 성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위 항공사진과 이 지도를 같이 보면 이해가 쉽다. 이 지도의 굵은 선들이 모두 성벽이 아니고 건물이다. 물론 비상시에는 성벽 역할을 하겠지만, 이미 화약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 이후에도 계속 이 성이 증축되고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성벽과 해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이 성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누가 봐도 성당같이 생긴 저 큰 건물 말이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이 정도밖에 안 보인다.

 

 

 

 

그러다 회랑을 통과하면 갑자기 큰 건물이 훅 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대단히 인상적.

 

 

 

 

이렇게 불쑥 등장한다. 알고 보면 건물의 서쪽면인데, 큰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인다.

 

 

 

이 성당 역시 이 성과 역사를 같이 해서 수백년간 건설되고 수십번 개축됐다.

 

저 디멘터같이 생긴 가고일은 언제부터 있었을지.

 

 

 

 

사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한바퀴 돌다 보면(돌기 싫어도 입장 줄이 길어서 한바퀴 돌지 않을 수 없다) 성당의 주인공이 저 가고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고일이 유독 눈에 띈다.

 

 

 

큰 성당 좀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고일은 본래 높은 곳에 괸 빗물을 흘려보내는 배수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래전에 본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콰지모도가 저 구멍으로 끓는 물을 부어 침입자들을 물리치기도 하는 모습이 나온 듯.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불확실할수도 있음. 미리 발뺌.)

 

아무튼 몸을 한껏 뒤로 젖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바라보니 뭔가 아찔하면서 멋지다.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볼 수 있는 3개 사면을 같이 보는 것을 권장한다.

 

 

방금 전에 본 모습이 서쪽 정문, 즉 두개의 첨탑과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면이었고,

 

 

 

이게 남쪽 면이다. 중앙 탑 양쪽으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주르르 도열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대쪽인 북쪽 면은 첨탑이 없고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쪽이 성당의 동쪽 면. 즉 주 제단 High Altar 가 있는 쪽이다. 곧 날아오를 것 같은 용의 형상이다.

 

유럽지역의 대성당들을 볼 때마다 어딘가 dragon의 느낌을 건물에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약 20년 전 프라하에 처음 왔을 때, 이 비투스 대성당의 동쪽 면이야말로 사악한 용의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더랬다. 경외감을 넘어 다소 공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아무튼 이런 모습의 성당이다. 안으로 들어감.

 

 

 

서쪽 입구로 들어가 동쪽 주 제단 High Altar 쪽을 바라본다. 역시 용의 등뼈같은 저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세비야나 밀라노의 대성당을 보고 온 사람들에겐 그리 큰 감흥은 없다. 대성당들의 구조는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 하지만 이 성 비투스 대성당에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바로 아르누보 시대에 대폭 교체된 스테인드글라스.

 

다른 거대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해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한 맛이 있다.

 

 

외경에서도 볼 수 있듯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스타 중의 스타가 있는데,

 

 

 

바로 이 분.

 

 

 

 

그림체를 보면 딱 아실 수 있는 알폰소 무하 님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모자이크를 기본 표현 수단으로 삼는데 이건 그림이다. 20세기 초의 작품이라 그런지 아직도 매우 선명하고 아름답다.

 

 

 

 

흥미로운 것은 하단의 이 요상한 표시. 많은 사람들이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대체 방카 슬라비아가 뭐야?"하는 궁금증을 갖는다. 답은 PPL이다. 상업미술의 대가인 무하 님의 작품을 여기에 설치하기 위해 자금을 댄 후원사가 바로 BANKA SLAVIE 라는 은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하 님은 저렇게 대문짝만하게 후원 마크를 박아 주셨다. 기업광고의 효시... 정도 될 것 같다.

 

(이 슬라비아 은행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거나, 이름이 바뀐 것 같다.)

 

 

 

건물 북쪽으로 2층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구조가 다소 특이했다.

 

 

 

바깥 사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방문자가 서쪽으로 들어와 동쪽의 주 제단 High Altar 을 바라보면 이런 뷰가 나온다. 새벽 미사 때면 저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 것이고,

 

 

 

채광창으로 이렇게 빛이 들어와 실내를 더욱 신비롭게 하고 있었을 거다.

 

 

 

프라하 여행을 가면 꼭 듣게 되는 '성인 네포묵'과 관련된 그림. 14세기 말 프라하 대주교였던 얀 네포무츠키 Jan Nepomucky 는 왕비의 고해 내용을 알려달라는 국왕의 부탁을 거절한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결국 혀를 잘린 채 카를교에서 강물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았다(당연히 죽었다). 그런데 그 뒤로 카톨릭 사제의 의무(고해성사의 비밀 준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체코말로는 얀 네포무츠키, 독일식으로는 요하네스 폰 네츠무크라고 불리는 분의 일대기다.

 

그림 좌하단에 왕비의 고해를 듣고 있는 네포무츠키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엔 국왕으로부터 직접 신문당하고 있는 네포무츠키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왼쪽 아래 모습은 자료화면인 셈이다.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그 그림 바로 옆에 이렇게 네포무츠키 성인의 화려한 관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물론 시신은 없다). 은 2톤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묵으로 신의를 지킨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저렇게 맨 꼭대기에 잘린 혀를 강조해놓고 있다. 맨 위, 천사 옆의 방패에 새겨진 명란젓같은 형상이 바로...혀다.

 

 

그리고 성당 남쪽 면에는 아마도 근대에 만들어 넣은 듯한 체코의 국가 문장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유럽을 다니다 여러 나라의 문장을 보다 보면 세상에 동물이 사자와 독수리밖에 없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자와 독수리는 인기있는 동물이다. 체코 역시 국가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잘 보면 꼬리가 두개라는 점이 특이하다. 잉글랜드의 국가 상징인 일어선 사자 lion rampant와 유사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역시 꼬리다.

 

꼬리가 두개인 사자는 '브룬츠빅(Bruncvik)의 사자' 라고 부르는데, 브룬츠빅은 바츨라프 성인과 함께 체코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흔히 '체코의 오딧세우스'라고 불린다는 그는 마법의 칼을 가진 전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머리 아홉 달린 사자와 싸우는 신령한 사자(꼬리가 두개였다)를 도와 싸움에 이긴 뒤, 그 사자와 함께 온 세상을 누비며 모험을 한 양반이다. 브룬츠빅이 늙어 죽자 사자도 먹이를 먹지 않고 무덤 곁을 지키다 따라 죽었다(사람보다 오래 살았다니 역시 보통 사자가 아니다).

 

아무튼 체코가 위기에 빠지면 민족 영웅 바츨라프 Wenceclaus 가 브룬츠빅의 마법의 칼을 들고 달려와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게 체코의 흔한 민간 신앙이라고 한다. (이상 '동유럽 신화/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참조)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4644987

 

 

아래 문구인 Pravda Vitezi 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뜻.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말에서 따 온 것이다. 저 문장 하나에 체코라는 나라의 요체가 다 들어 있는 셈이다.

 

 

 

남쪽으로 나와서 성 비투스 성당 구경을 마무리.

 

비투스 성당을 빼고 나면 사실 프라하 성 안에서 구경할 거리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왕궁 미술관이 있는데 작품 수도 꽤 된다고 하나 프라하 성에서 미술관 구경을 했다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그 다음이 성의 남사면을 구성하는 '구 왕궁'인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별로 찍을 것도 없다.

 

 

 

창밖으로 내다보면 이런 풍경. 저 멀리 블타바강이 보인다.

 

 

찍지 말라고는 하는데 대체 왜 찍지 말라는지 알 수 없어 한장 찍었다. 구 왕궁 내부의 메인 홀이다. 지금도 체코 국가 정상이 주최하는 연회가 가끔 열린다고 한다. 유럽의 실내 홀 중에서는 가장 크다던가 뭐 그렇다. 특별히 감동적인 면은 없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연회장 옆의 한 방(구 국회였나, 궁정 평의회였나 뭐 그런 이름이었다)에 합스부르크 가 황제와 황족들의 초상화를 그대로 걸어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체코는 17세기부터 약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독립을 쟁취한 지금까지도 당시 황제들의 그림을 걸어 놓고 있는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광화문 뒤에 아직도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에 여전히 천황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상상해 보자. 가당키나 한 일일지.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어쨌든 그것도 우리의 역사'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국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인데, 아무튼 그렇다고.

 

 

구왕궁을 지나 발길은 황금소로로 간다.

 

 

황금소로란 프라하 성의 북쪽 성벽 안쪽에 다닥다닥 붙어 지은 작은 집들의 거리를 말한다. 가이드북들은 주로 '동화 속 마을처럼 색색깔로 아름다운 작은 집들이 잇달아...'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직접 가 보면 대체 조만한 집 속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가서 살았다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좁고 궁벽하다. 사람 한두명이 들어가 그냥 눕기도 힘들 정도의 공간들이다.

 

그리고 황금소로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사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는 건 딱 하나다. 바로 저 22번 집 오른쪽에 붙어 있는 검은 줄 같은 표시.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집'이라는 표지 하나다. 카프카가 이 집에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고, 아무튼 황금소로의 이 집에 산 적이 있다는 얘기다. 카프카가 이 집에서 글을 썼을까. 글쎄. 안에는 타자기 하나 올려 놓을 책상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어 보인다. 침대나 하나 겨우 들어갈까 말까.

 

 

 

아무튼 천재 소설가가 살았다는 인연 덕분에 궁정에는 카프카의 동상이 서 있다. 왜 알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몸인 탓에 동상의 한 부분만 금빛으로 빛난다. 아아...;;;

 

청동상은 본래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은 부분은 저렇게 된다.

 

스타 작가가 수십년간 받았을 성추행의 환난에 잠시 묵념.

 

 

 

일단 프라하 성 이야기는 이정도. 빨간 지붕을 보며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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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일단 걷고 시작하는 도시다.

 

몇해 전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뒤 처음 만나는 도시와의 인사는 유로자전거를 통해 하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서울생활에서 도보와 멀어진 몸을 어떻게서든 여행 모드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번 죽을 만큼 걸어 보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 그리고 그 도시를 가장 빨리 이해하는 길은 대중교통과 다리를 이용해 직접 길을 찾아 다녀 보는 것이라는 말에 절대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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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밤늦게 도착해 여장을 푼 K+K CENTRAL PRAGUE 호텔.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공항에 떨어진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라 미리 호텔에 ride를 요청했다. 가격은 700코루나/27유로. 코루나 대 유로 환율은 대략 25~26 대 1 정도다. 곳곳의 환전소에서는 다양한 환율을 제시하는데 아무래도 이 공정환율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있을 것 다 있고 깔끔한 호텔인데 아쉽다면 슬리퍼가 없다. 밖에서 신던 신발을 방 안에서 신고 있으면 피로가 가중되는 체질이라 뭔가 맨발에 신을 것이 필요한데, 혹시 이 호텔을 이용하실 분은 비행기에서 적당히 하나 얻어 오시길 당부드린다.

 

그 외에는 다 OK. 욕조도 있고, 물도 하루에 1L(2병)씩 준다.  

 

 

이런 방...

 

 

아담하고 귀여운 조식당. 보시다시피 규모가 작고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척 보면 알 수 있듯 음식들이 나름 공력이 들어가 있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오렌지주스도 직접 간 것이 나왔다. 그리고 나름 낙농국이라 그런지 유제품의 수준이 매우 높다. 특히 치즈 종류.

 

뭐 계란은 스크램블과 삶은 계란 두 종류 뿐인데, 조금만 용기를 내서 얘기하면 먹고 싶은 형태로 해 준다. 괜히 위축되시는 분들 있는데, 이건 여기 뿐만이 아니고 웬만한 호텔이면 다 해 준다. 계란 후라이가 먹고 싶으면 주저없이 요청하시기 바란다. (까짓거 안 해주면 그만이지)

 

 

 

우상단이 신선한 치즈에 찍어 먹는 생 햄. 이런 거 좋아시는 분들에겐 천국이다.

 

 

 

다른 각도에서 찍어 본 조식당. 예쁘다.

 

사실 호텔이 정면에서 보면 굉장히 작아 보이는데 앞뒤로 긴 방이다. 그래서 전망이나 이런 건 별 기대할 게 없지만 어지간한 특급호텔에서 기대할 만한 것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쨍하니 맑은 다음날 아침. 유로자전거 도보 투어 집합 시간인 오전 8시 바츨라프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프라하에 왔다는 표시로 일단 바츨라프 광장의 상징인 바츨라프 동상 앞에서 기념샷.

 

 

(여전히 바츨라프라는 발음과 Wenceclaus 라는 철자의 괴리는 참 낯설다..)

 

시크한 유로자전거 가이드는 일행이 모이자 바로 이동 선언. 처음으로 체코 전철을 타 본다.

 

프라하 교통 1일권은 110코루나. 1코루나가 2017년 6월 기준 대략 50원이니 5500원 쯤 된다. 이걸로 하룻동안 버스와 전철, 트램을 계속 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철역에 자판기 외에는 매표창구가 따로 없다 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역무원도 본 기억이 없다)

 

잘 보면 전철역마다 매점이 있다. 이 매점에서 ONE DAY PASS를 달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매점이 주말에는 아예 문을 안 열든가 늦게 연다는 것. 그런데 자판기는 동전만 받는다. "그럼 주말에 전철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함?"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나가서 문을 연 가게를 찾아 동전을 바꿔 오든가, 체포를 각오하고 무임승차를 해야 한다. 아찔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결론: 주말에 전철/버스를 타려면 1) 미리 1일권을 사 놓든가 2) 미리 동전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날이 금요일이었고, 다음날인 토요일 내가 직접 겪어 봐서 안다.  

 

 

프라하의 전철은 이렇게 3개의 색으로 구분된다. 바츨라프 광장의 바츨라프 동상/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역은 눈치로 때려잡아도 빨간선과 녹색선이 교차하는 무제움 Muzeum 역. 여기서 빨간 선으로 두 정거장을 가 비셰흐라드 Vysehrad 역에서 내린다.

 

역에 내려 5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성곽의 형태.

 

 

 

눈치로 때려잡는다 체코어로 따져 보면 Narodni 는 대략 영어의 National에 해당하는 것 같다. Kulturni 는 누가 봐도 culture와 관계 있는 단어겠지. 그럼 뭔가 국가문화유산 혹은 주요 사적에 해당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눈치 아닌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Hrad는 체코어로 성. 그러니까 비셰 성이다. 비셰는 '높다'는 뜻으로 합하면 '높은 성'이 된다. 고지가 흔치 않은 프라하 근교에서 이 정도의 고지면 상당히 전략적인 요충지로 보일 법 하다.

 

그냥 성은 아니고 체코 건국신화가 내재된 땅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 성지 역할을 한다. 체코의 단군할아버지 격인 체흐 Chech 가 나라를 세운 뒤, 그의 아들 크록 Krok 이 이 비셰흐라드를 도읍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딸이자 예언자인 리부셰 Libuse 가 나라를 통치했다.

 

리부셰는 체코 민족의 앞날에 엄청난 전란과 살상, 피와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체코 민족은 영원할 것"이라는 희망의 말도 남겼다. 유난히 많은 국난을 겪었던 이 나라 사람들에게 리부셰는 희망의 상징으로 추앙된다고 한다.

 

 

걷기 좋은 돌길.

 

 

 

날씨도 좋고 어느새 내성 문.

 

 

 

멀리 저렇게 교회 종탑이 보인다.

 

비셰흐라드 안에는 국가적 성지가 있어 유명하다. 체코의 건국에 기여한 위인들만을 위한 묘지다.

 

 

 

 

 

 

들어서자마자 스메타나의 묘비가 사람들을 맞는다. 아시다시피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그 분.

 

뒤에 나올 드브로작과 함께 보헤미아 음악의 대명사인 그 분이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있는 대형 위령탑.

 

 

여기에 이름이 오른 분들은 모두 체코의 위인전에 오를 만한 영예의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왼쪽 두번째 칸을 보면 위쪽에 알폰스 무하가 있고, 그 아래로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과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 부자가 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이름이 올라갈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아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보후밀 카프카 는 유명한 조각가로, 우리가 잘 아는 프란츠 카프카 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체코에서 카프카는 그리 드문 성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각양각색의 묘비들로 가득한 공간.

 

 

이렇게 비석 사이를 걷다 보면

 

 

안톤 드보르작 님의 묘소에 도달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은 드보르작 교향곡 9번이 바로 라파엘 쿠벨릭의 지휘로 녹음된 버전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곡도 드보르작 교향곡 9번. 뭔가 다 연결된 느낌이다. (뿌듯)

 

 

묘지 바로 옆에는 두개의 첨탑이 돋보이는 베드로와 바울 성당 이 있다.

 

 

그런데 성당 문짝이 예사롭지 않다.

 

 

아이구 이뻐라.

 

 

 

다른 쪽 문은 또 다른 쪽 문 대로. 나름 유럽 좀 다녀 봤지만 이렇게 핑크색으로 예쁘게 꾸며진 문은 또 첨일세. 하지만 오전 10시가 성당 개장 시간이라 안을 둘러볼 수는 없었다.

 

 

 

비셰흐라드는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몰다우) 강의 남쪽에 위치한 요새다. 그닥 고지대가 없는 프라하 일대에서 이렇게 강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는 충분히 전략적인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뷰가 나온다.

 

아무튼 좋은 날씨와 수풀 길, 체코의 역사를 잠시 되새겨볼 수 있는 비셰흐라드는 산책을 겸한 여행길의 방문지로 매우 추천하고 싶다. 마음이 한가롭지 않은 분이라면 비추.

 

 

 

아무튼 그렇게 비셰흐라드 구경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와

 

 

트램을 타고 프라하 시내로 향한다. 비셰흐라드는 굳이 서울과 비교하자면, 대략 강서구 정도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해서 블타바 강 남쪽의 올림픽도로 아니고 강변 도로를 타고 시내 쪽으로 슝슝

 

 

 

 

그렇게 해서 트램/버스 환승을 위해 내린 곳이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여기서도 공연을 볼 참이었는데 6월 초에는 뭔가 일정이 맞지 않았다. 매우 아쉽.

 

 

위 건물의 위쪽 조각상. 밤에 보면 참 멋질 광경이다.

 

 

그렇게 해서 시내로 진입해 도착한 곳은 프라하의 명소 중 하나인 무하 박물관.

 

 

 

아르누보 시대 최고의 수혜자(?)로 꼽히는 알폰소 무하의 작품이 전시된 무하 박물관이다. 입장료는 240코루나. 약 1만2000원 정도인데 이 가격이 싼거냐 비싼거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실 작품 수를 생각하면 그리 싸지는 않다. 우리의 경우 유로자전거 투어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어 가이드 설명을 듣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일반 관람객이 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30분도 길 수 있다. 그 정도로 작품 수가 적다.

 

 

무하를 혹시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들어갈 필요는 없을 듯. 어쨌든 그림체를 보면 자다가 깨어나도 아 저게 무하 그림이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아마도 무하 그림이 찍힌 연습장 한 두 권 안 써본 사람 없을 듯. 그리고 무하가 전 세계 순정만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지대하다.

 

 

게다가 무하의 작품 대부분이 포스터 내지는 석판화라서 '이 미술관만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느낌은 사실 별로 없다. 아마도 이 미술관이 갖고 있는 무하의 대표작이라면 이 '별 Star'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굳이 하고 싶은 말은 - 무하의 그림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미술관은 패스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걸로 맛난 거 사 드시라.

 

 

이걸로 오전 일정 끝. 런치 타임~

 

 

바츨라프 광장 끝자락의 가장 목 좋은 곳이라 아마도 시내에서 가장 비싼 집일텐데 파스타 종류는 200~300 코루나, 고기 종류는 300~500 코루나 정도 한다. 그래도 체코에서의 첫 식사라 어쨌든 먹어봐야 한다는 꼴레뇨 Koleno 를 시켰다.

 

꼴레뇨는 체코어로 무릎이라는 뜻. 말 그대로 돼지 무릎을 그냥 통으로 양념해 삶아 낸 요리다. 집집마다 방식이 조금 다르겠지만 이건 삶은 것만은 아니고 껍질을 살짝 튀겨 바삭한 맛을 살렸다. 어떤 집에 가면 짜다는 평도 있었는데 관광객 입맛에 맞춘 탓인지 전혀 짜지 않고 맛있다. 머스타드 소스와 함께 먹으면 아주 궁합이 좋다.

 

족발도 거의 먹지 않고 돼지고기 냄새를 싫어하는 동행인도 매우 만족했다.

 

 

자, 대망의 프라하 성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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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의 효용은 떠날 상상을 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주 막연히 시작합니다. 언제쯤 어디를 갔으면 좋겠다. 물론 한날 하루도 회사를 비울 수 없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고, 휴가라는 것이 그저 수험생 자녀들의 학원이 문을 열지 않는 기간에 불과한 분들에겐 너무나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서 최성수기 제주도에 하루 100만원 가까운 호텔/체제비를 들여 며칠 간신히 다녀오는 것으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는 분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뭐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 그런 가격이 가능하겠죠.)

 

이런 분들 정도는 아니더라도 휴가는 쉬러 가는 건데 대체 왜 쉬러 가는 것까지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계획을 하고 머리를 짜야 하는 건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여행을 디자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즐거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찬찬히 한번 생각해 보시면, 세상 어떤 일에서도 저절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쇼핑, 식사, 데이트... 다 그렇죠. 내가 직접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신경써줄 사람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일찍부터 계획을 짭니다. 특히 항공사 마일리지를 활용해 비행기표를 얻어내려는 경우에는 꽤 일찍 일정을 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저라고 돌발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두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티켓 반납에도 수수료가 꽤 듭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순탄하게 진행돼 '6월 독일행'이 가능했습니다.

 

 

 

 

 

 

 

프라하는 지난 2000년 다녀온 적이 있지만 단 하루를 구경했을 뿐이고, 언젠가는 한번 다시 가 볼 생각이었으므로 여정을 프라하-베를린으로 짜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직행 노선은 기차로 4시간 30분. 버스로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기차는 미리 예매하면 2등석이 20유로대, 1등석은 50유로대로 가능합니다. 버스는 시간대에 따라 10유로대도 가능합니다. 물론 기차가 버스보다는 쾌적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당초에는 두 도시의 거의 중간지점인 드레스덴 경유를 생각했더랬습니다. 독일 최고로 꼽히는 드레스덴 슈타츠오퍼(오페라 홀)에서 공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찌 어찌 하다 보니 드레스덴에서 마땅히 볼 작품이 있는 날짜에 일정을 맞추기 힘들어졌고, 자연스럽게 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 혹은 베를린-드레스덴-프라하가 연결되지 않게 되어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사실 같은 이동이라도 한번에 4시간30분은 2시간/2시간30분으로 나눠 하는 이동보다 좀 버겁죠. 어쨌든 항상 원한대로 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오페라를 빼고 나면 굳이 드레스덴에서 1박을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계산 일정은 프라하에서 3박, 베를린에서 5박으로 총 8박10일이 됐습니다. 프라하 도착 시간이 늦어 첫날 하루는 그냥 이동일로 소모하는게 아쉬웠지만 뭐 직장인으로 이 정도 날짜를 빼기는 쉽지 않습니다. 베를린에서 5박이 좀 길게 느껴져 다른 도시로의 이동도 고려했지만 일단 그건 현지 사정을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본 뒤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6월초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와 기간이 겹쳐 그런지 프라하 호텔비가 평소보다 30% 정도는 비싼 듯 했습니다. 물론 프라하는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비용이 더 들더라도 숙소는 관광 포인트가 몰려 있는 구도심에 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포인트는 걸어서 이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후보들을 고민한 끝에 K+K센트럴 프라하 (https://www.kkhotels.com/en/prague/hotel-central) 를 선택했습니다.

 

방의 청결도, 위치, 조식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호텔이었습니다. 한 3분만 걸어가면 관광 포인트인 화약탑이 나오고, 술집과 식당, 카페가 즐비한데 골목 하나 바뀌면 바로 조용해진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방이 약간 좁다는 느낌은 가격 대비 감수하기로.

 

 

 

 

베를린에서도 5박이면 숙소를 한번 정도 옮기는게 좋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울 사는 사람의 기준으로 베를린은 결코 큰 도시가 아닙니다 - 물론 전체 도시 면적으로 보면 베를린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관광객의 입장에서 볼 때 베를린은 오히려 볼거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시입니다. 일반 관광객이 가는 서쪽 끝은 초 역(동물원 역), 동쪽 끝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 정도라고 할 때 그 둘 사이의 이동 시간이 3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절대 호텔을 옮길 필요 없습니다.

 

물론 가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지만, 아무튼 수많은 베를린 호텔들을 검색해보다 풀먼 베를린 Pullman Berlin Schweizerhof (http://www.pullmanhotels.com/gb/hotel-5347-pullman-berlin-schweizerhof/index.shtml) 로 목적지를 결정했습니다. 공원 바로 앞이라는 아늑함과 쾌적함, 그리고 바로 앞에 베를린의 젖줄인 두 개의 버스(100번과 200번) 중 200번 정류장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객실 넓이도 기대 이상이었고, 욕조는 없지만 욕실도 넓고 깔끔했습니다.

 

무엇보다 조식은 이제껏 가 본 수많은 호텔들 중 거의 수위권. 사용해 볼 일은 없었지만 지하에는 수영장도 있었습니다. 최대 백화점이라는 카데베가 걸어서 10분 이내, 동물원은 걸어서 5분. 아쉬운 점은 주변에 편의점이나 미니마켓이 없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사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유흥가에서 늦게까지 어울리다 바로 방으로 올라가 잔다는 느낌을 원하는 분들에겐 권하지 않을 호텔입니다. 하지만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깔끔한 느낌을 원하는 분들에겐 가격 대비 매우 훌륭한 호텔입니다. 아울러 베를린 곳곳을 헤집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를린을 굳이 목적지로 삼은 것은 공연 관람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사실 이 부분을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여행 계획을 미리 짜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베를린이 베를린인 만큼, 클래식 공연에 있어선 DVD 타이틀 급의 아티스트들이 나서는 공연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그런 공연들은 대략 60일 전이면 매진돼 버립니다. "자, 우리가 베를린에 왔으니까 큰 맘 먹고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 한번 봐 줘야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표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약 3개월에 걸쳐 공연 티켓도 사고, 기차 표도 사고, 호텔도 예약하고, 그렇게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바쁜 일상이지만 가끔씩 베를린 시내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패키지 여행의 장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싸고, 알아서 밥 주고, 알아서 재워 주고, 알아서 차 태워 주고, '휴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문득 문득 베를린 지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기대와 흥분을 생각하면, 직접 디자인하는 여행의 재미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훨씬 더 비싸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재미를 오래 오래 되씹기 위해서 천천히 여행기를 쓰겠습니다. 대략 1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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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철 감독의 영화 '대립군'을 봤습니다. 130분 동안 화면 속의 인간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세자 광해(여진구) 또한 왕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고, 가토 기요마사의 명을 받아 세자 일행을 뒤쫓는 왜군 장수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면 가토의 질책으로 할복을 피할 길이 없으니 피차 물러설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아수라장 속에서 영화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다소 시대에 뒤진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같은 말이지만 만약 아무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어떤 덕목이, 어떤 기준과 시선이 그 아무개를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약 10개월 간의 진통 끝에 새 대통령이 나와 구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순서대로 하자면 일단 영화의 배경을 소개해야 합니다. 조선 선조 때, 1592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숫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산을 통해 조선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거듭합니다. 중간 피난지 영변에서 선조는 "나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가 직접 구원병을 청할 뜻을 밝힙니다(1592년 6월13일).

 

그리고는 대신들이 일제히 요동행에 반대하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 또한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6월14일 자신은 요동으로 떠날테니 세자는 평안도 땅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결사 항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른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눠 국난에 대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200년, 말하자면 안일했던 나라에 국권이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고, 선조로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지나치게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난을 극복할 만한 슬기로운 군주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죠.

 

 

 

 

이때 광해군의 나이 만 17세.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다 큰 장정의 나이지만 그래봐야 스무살도 안 되는 앳된 청년일 뿐입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엔 어림도 없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보다는 뭘 봐도 낫다는 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들 사이에 부자간의 살가운 정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광해는 임진왜란 중의 활약으로 백성들과 대신들의 신망을 샀고, 그 이후 선조는 오히려 광해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대립군'은 이런 역사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과연 무엇이 궁중의 금지옥엽이었던 17세의 광해군을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선 강인한 왕자로 바꿔 놓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대체 이 왕자는 전쟁중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미리 경험해보지도 못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을까요.

 

 

 

 

영화의 시작. 임진왜란 발발 직전 토우(이정재)를 비롯한 대립군들은 여진족과 맞서고 있는 북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만, 후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 병역을 살고 있는 대립군들이라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수를 받고 약조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병역을 살게 된다는 현실만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런 토우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남쪽에서 왜란이 발발했으니 국왕을 호종하러 평양까지 남하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다가 피란차 북상하는 왕의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조정이 둘로 나뉘었으니 세자 광해(여진구)를 호위하고 강계까지 이동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한달만 있으면 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립군들이지만 세자 호위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전쟁중의 특별 무과 시험을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바람으로 여럿은 선뜻 세자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철도 없고 숫기도 없는 소년 세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왜군의 추격, 왜군보다 더 무섭게 압박해오는 정체 모를 자객들, 턱없이 부족한 식량이며 무장, 추격을 피햐려 들어선 가파른 산길 등 이들 앞의 난관은 첩첩 산중. 그러는 가운데 토우는 자신이 호위하고 있는 왕세자의 민낯을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생깁니다.

 

과연 그를 살려 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가 왕이 되면 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도 대립군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토우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나와 우리 무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영화 '대립군'은 다들 아다시피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영화입니다. 본래 역사에 쓰여 있는대로 선조는 암군이요, 광해는 현명한 군주라고 딸딸 외우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소년이 민초들과의 만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민초의 눈높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희생과 헌신이라는 영웅적 행위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이 영화의 카피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그날,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두 배우, 여진구와 이정재는 아낌없는 호연으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여진구의 연기도 대단히 칭찬받을만 했지만, 특히 이정재는 2017년 이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이 영화, '대립군'을 통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정재라는 배우는 긴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네. 20년 가량의 시간 차이를 둔 모습이지만 거의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만치 이정재는 어찌 보면 불멸의 젊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지금껏 자리매김해 왔죠.

 

 

 

 

아무튼 그의 젊은 모습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동년배인 정우성과 함께 찬란한 빛을 뿜었습니다.

 

 

물론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젊음에 연륜이 깃든 뒤부터의 일인 듯.

 

 

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열연이 새삼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립군'이라는 작품,

 

 

문득 이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불멸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사무라이라는 특권 신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무훈을 칭찬받는 것은 불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소명을 깨닫고, 한 촌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캐릭터입니다)는 본래 백성의 아들이면서 전쟁통에 사무라이를 가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깨질 위기가 등장했을 때, 그는 백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의미를 사무라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성의 한 사람이기에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 수 있었던 남자.

 

이 영화, '대립군'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비로소 이정재를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만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란 본래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정재가 보여줄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대립군'은 매우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 한척]과 [배 한척에 목숨을 건 민초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오른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겠지만, 그 [배 한척]이 주는 느낌은 매우 산산하더군요. 백성이 탄 배의 중요성이 이미 몇몇 지도자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나라라서 말입니다.

 

P.S.2. 제작진으로부터 'NO CG, NO SET'라는 말을 듣고 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제작진과 배우들이 겪었을 고생의 강도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관객들도 아마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감동 두배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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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한마디 정리하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뵙고 인사를 드린 적도 몇번 있지만 특별히 긴 대화를 나눴다거나 내세울 만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전혀 아닙니다. 그저 오랜 시간 그분의 모습을 본 시청자로서, 관객으로서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70년대 한국에서 TV 드라마는 지금보다 훨씬 영향이 큰, 온 국민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흑백이었지만 TV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TBC, MBC, KBS라는 세 채널에서 방송해 주는 드라마야말로 경쟁 대상이 없는 대중의 관심사였죠.

 

 

 

 

그 시절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트로이카'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이라는 세 이름이었죠. 사실 이 세 스타가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가장 빛난 스타였던 것은 맞지만 이 셋은 바로 'TBC의 트로이카'였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탤런트(TV 배우와 영화배우가 이런 이름으로 구별되고 있었습니다)나 코미디언들에게도 전속 방송사가 있었습니다. TBC에는 TBC 배우들만 나오고, MBC에서는 MBC 배우들만 나오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TBC의 위상은 워낙 강력해서 저 트로이카 외에도 홍세미 김창숙 김형자 같은 당대 최고 여배우들과 원미경 같은 최고의 기대주들이 모두 TBC에만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배우로도 한진희 노주현 김세윤 같은 배우들이 모두 TBC 전속이었죠.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거듭나는 것은 5공의 방송 통폐합 이후이지만, 물론 이 시절에도 MBC 드라마는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남자로는 이정길 박근형 현석, 그리고 여자로는 김영애 이효춘 같은 배우들이 MBC의 얼굴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KBS의 얼굴이라면 한혜숙 김자옥 정도의 배우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남아 있는 제 기억으로는 방송 통폐합 이전 KBS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시절의 그 드라마 가운데서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김수현의 1978년작 '청춘의 덫'입니다. 이미 리메이크 작인 1999년판 '청춘의 덫'이 '전설의 드라마' 대접을 받는 분위기에서 78년작을 얘기하자니 뭔가 엄청난 옛날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매회 빠뜨리지 않고 '청춘의 덫'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최소한 배우들의 연기 만큼은 1999년작이 1978년작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GQ 아티클 '서울, 1978년 겨울'에서 퍼 왔습니다. 위 5장의 사진들이 모두 '청춘의 덫' 마지막회 장면들입니다.

(http://www.gqkorea.co.kr/2010/12/14/%EC%84%9C%EC%9A%B8-1978%EB%85%84-%EA%B2%A8%EC%9A%B8/)

 

78년작과 99년작은 인물의 이름부터 이야기의 구조가 일단 똑같습니다. *(  )안에 78년작의 배우를 앞에, 99년작의 배우를 뒤에 써서 구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하지만 유능한 회사원 동우(이정길/이종원)는 윤희(이효춘/심은하)와 딸 하나를 두고 동거중인 사이. 형편상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장래를 약속한지 오래인 관계입니다. 하지만 동우는 어느날 오너 가문 상속녀 영주(김영애/유호정)의 관심을 받게 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돈 뿐만 아니라, 착하지만 순종적이기만 한 윤희에 비해 활달하고 자존심 강한 영주의 매력이 강렬하게 어필하기도 합니다.

 

결국 동우는 윤희를 버리고 영주와 결혼하려 하고, 그러는 사이 동우와 윤희 사이의 딸이 사고로 죽음을 당합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동우가 영주와 있었다는 사실을 안 윤희는 180도 돌변합니다. 팜므 파탈로 변신한 윤희는 영주의 오빠이며 소문난 한량인 영국(박근형/전광렬)에게 접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너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본래 기업 경영이나 가업 승계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던 영국은 윤희 때문에 감춰져 있던 능력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방송되던 당시의 제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스토리에 사로잡혔다는 게 좀 이상하실 수도 있겠지만 뭐 굳이 그걸 따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나 약간 이상한 애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 )

 

 

 

아무튼 이 드라마는, 당시 굉장히 중요한 드라마 저널의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방송주평'에 따르면, 초반에는 "때가 어느 땐데 1950년대 얘기같은 혼전관계 순정녀 이야기냐"는 말을 듣다가 윤희의 각성 이후에는 장안의 화제작이 됐고, 하지만 "미혼모가 변심한 애아빠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니, 이렇게 부도덕한 내용을 온 국민이 보는 드라마로 방송하다니 제정신이냐"는 높은 분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조기종영이 결정되는 비운의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굳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기로 한 데에는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배경 설명은 이 정도. 아무튼 당시 김영애라는 배우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위에서 나열한 수많은 당대의 톱 여배우들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날카로운 콧날과 함께 '원조 얼음공주'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도시적인 미모를 갖춘 배우는 달리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목소리에서도 지적이고 냉정한 면모와 함께 뭔가 감춰진 열정을 느끼게 하는 배우였죠(물론 이런걸 다 당시에 느꼈다는 건 아닙니다. ^^;; ).

 

 

아무튼 요즘도 한국 드라마에는 '도도하고 섹시하면서 평민(?)들을 벌레 보듯 하는' 재벌가 따님 캐릭터가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만, 근 40년 전에 그 원형을 연기한 배우로 이 배우만한 사람이 있었을까, 여기에는 반박하실 분이 별로 없을 듯 합니다. 특히 저 오리지널 '청춘의 덫'에서는 윤희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내는 사람이 영주인데, 그걸 안 뒤에도 오빠가 윤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비밀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연기하는 김영애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두번째 작품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작품, '모래시계'입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공간의 낭비이기도 하고, 다들 기억도 선명하실테니 넘어갑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의 1회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캐릭터는 바로 태수(최민수, 아역은 김정현) 어머니 역으로 등장했던 김영애입니다.

 

김영애는 젊은 날 좌익 운동을 하다 빨치산이 된 남편을 떠나 보내고, 혼자 아들을 키워 온 어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수재였던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인 아들은 어머니에겐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요릿집을 운영하다 보니 여자로서 적잖은 수모를 겪어야 했고, (명시적이진 않지만) 알콜 중독이 됐어도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집착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잘생긴 아들이 공부하는 것만 봐도 흐뭇해서, 아들의 공부방 웃목에 소반을 들여 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앉아 있는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빨치산 아버지 때문에 출세길이 막혔다는 현실을 마주한 어머니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술취한 몸으로, 바람에 날아간 목도리를 줍다가 기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는 1회의 마지막 시퀀스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때 대통령을 꿈꿨던 패기만만하고 똑똑한 젊은이가 어떻게 해서 좌절과 분노로 가득한, 태수라는 이름의 야수로 성장하게 되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였죠. 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가 김영애가 아니었다면, '모래시계'의 신화도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론 최근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당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이 많은 어머니 역할의 모습을 볼 때에도 이 '모래시계'의 잔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랬던 분들이 꽤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고인의 업적과 공헌을 얘기하자면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듯 하고, 감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다만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조의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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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주목을 받는 것은 배우들입니다. 아무래도 최고의 수혜자들은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드라마의 진짜 주역은 작가연출가입니다. 아무래도 그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제가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을 꼽자면, 백미경 작가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14년 여름, 유병술 몽작소 대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명 제작자였던 유병술 대표가 건네준 대본 표지에는 사랑하는 은동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유병술 대표도 지금은 '사랑하는 은동아'와 '오 마이 비너스'를 거쳐 잘나가는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목만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슬금슬금 온몸이 빠져들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아시다시피 아주 새롭지는 않은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고교생 현수와 초등학생 은동이는 운명처럼 만나 짧고 강렬한 애정을 느끼지만, 그걸로 인연은 끝이 나고 맙니다. 성인이 된 현수는 은호로 이름을 바꿔 톱스타가 되고(사실 유명해지고자 한 것도 은동이를 쉽게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동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자전적 일기를 출판합니다. 현수가 구술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줄 작가로 정은이 발탁되죠.

 

이쯤 되면 드라마 좀 보신 분들은 정은이 바로 어린 시절의 은동이고, 뭔가 사연이 있어서 현수가 은호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거다라는 건 충분히 짐작하실 만 할 겁니다. . 누구든 지금껏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 보거나 지켜봤을 법한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은동아는 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줄거리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냥 박제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원초적이고, 때로는 적나라하면서 어느새 은동이가 현수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가슴이 벅차 오르고, 엉뚱하고 고집불통이면서도 순수한 어른 은호의 모습에 웃음보가 터져나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시 드라마 편성을 위한 회의 때 제가 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전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는데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미친게 아니었습니다. 빨리 어떻게 해 보자는 결론이 났고, 그때부터 대체 이 작가는 누구냐고 알아 보는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신인이라는데, 도저히 신인의 솜씨는 아니라는게 공통된 의견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구 출신. 영어 학원 경영 경력. SBS 극본공모에서 단막극 강구이야기가 당선돼 제작된 바 있고, 현재 한 방송사 극본공모의 최종 결선에 작품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작품의 제목을 물어보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작품은 JTBC 극본공모에서도 수상 내정작으로 뽑혔는데...?” (아직 비공개작이라 여기서 제목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방송사들끼리 비슷한 시기에 극본 공모를 하면 응모하는 작가들은 누구나 양쪽 공모전에 모두 출품을 합니다. 수천개의 응모작 중에 수상작은 몇 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입상만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양쪽 모두로부터 입상하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워낙 심사하는 작품 수도 많고, 심사위원들의 취향도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드물게도 양쪽 모두 수상권에 들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저희보다 그쪽 방송사의 최종 발표가 빨랐으므로, 백미경 작가님의 대본은 그쪽 방송사의 수상작이 됐습니다. (방송국끼리의 관례상, 다른 방송사에서 먼저 수상작으로 뽑은 작품은 나중 수상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복 시상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딜레마가 생겼습니다. 그쪽 방송사에서 당선 즉시 그 작품을 미니시리즈로 제작하자고 제안해 온 겁니다. 저희 쪽은 저희 쪽대로 이태곤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하고 사랑하는 은동아의 제작을 진행하고 있던 터라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백미경 작가님의 의리를 경험해보게 됩니다. “미안하지만 JTBC와 이미 이야기되고 있는 작품이 있다. 그걸 먼저 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선이 취소되더라도 감수하겠다.” 이게 신인작가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단인지, 업계에 계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결국 약속 엄수와 극본공모 당선을 맞바꾼 셈이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은동아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시청률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화제성은 상당했습니다. 일반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에게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이 보통이고, 작가나 연출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업계에서는 대체 이 작가가 누구냐는 소문이 폭풍처럼 지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인 작가로서는 특급 대우의 재계약이 이뤄졌습니다. “성적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JTBC에서 데뷔했다는 걸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 갚을 날이 올 거에요.” 작가님의 멘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첫번째 글에서 언급했듯, 2016년 초 백작가님은 다시 한 편의 대본을 건네주셨습니다(통상 이럴 때에는 시놉시스와 대본 1,2부가 같이 있습니다). 한국형 원더우먼이 등장하는 바로 이 대본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주 종목이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스릴러, 성인용 멜로, 휴먼, 판타지…. 대개 한 장르에 능한 분들은 다른 장르에서는 약점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힘쎈여자 도봉순을 보면서 가장 놀란 건 바로 장르를 넘나드는 힘이었습니다. 한 드라마 안에 로코와 스릴러, 판타지가 위화감 없이 공존하고 있었던 겁니다. 셋 중 두 가지는 몰라도 세 장르가 이렇게 사이 좋게 들어 차 있기는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사실 공개된 것이 이 정도일 뿐 실제로는 더 있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스릴러 부분은 시그널풍의 본격 수사물이라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는 미드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키는 시니컬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게다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홈 코미디와 판타지의 조화가 돋보였습니다. 당대의 수많은 대작가들 가운데서도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여러 장르에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분이라는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되겠으나, 아무리 이 블로그가 사적인 공간이라 해도 다 털어놓기에는 좀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난 1, ‘힘쎈여자 도봉순의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머리를 식혀 가며 품위있는 그녀’ 20회를 탈고한(때로 천재들은 두어 가지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이 뇌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집필력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 두 작품으로 이렇게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솔직히 이 두 작품이 이 분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면 나 아이템(소재) 무한대인 거 알죠?” 하고 씩 웃을 분이기 때문입니다.

힘쎈여자 도봉순대본은 거의 끝나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대본이 끝날 때에는 무척 서운하면서도 설렐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엔 대체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대본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요.

 

P.S.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님의 스타일상 사진은 싣지 못했습니다. 아마 머잖은 미래에 어느 시상식장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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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쎈여자 도봉순'이 시작하기 전에, 만약 누군가 "야, 이 드라마 잘 될 것 같아. 한 4회 쯤에 8%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라고 했다면, 아마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감히 기대하기엔 너무 높은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회만에 '힘쎈여자 도봉순'은 전국 8.3%, 수도권 8.7%라는, 저희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성적을 냈습니다. 막연히 '잘 될 거'라는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밀려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감사드릴 곳이 너무 많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무적 삼각편대, 박보영-박형식-지수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참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

솔직히 말하면 박형식을 남자 주인공으로 하려고 했던 JTBC 드라마는 '힘쎈여자 도봉순'이 처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상류사회'의 박형식을 본 뒤로 푹 빠져들었습니다.

'상류사회'의 유창수는 참 독특했습니다. 신분(?)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인 알바 지이(임지연)를 사랑하게 됐지만 그녀와 결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과 결혼을 해야 하는 상대는 비슷한 재벌 집 딸인 윤하(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창수는 알아차립니다. 자신은 그 '마음'을 무시하고 머리가 가리키는 대로 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물론 하명희 작가님의 캐릭터부터 독특했죠. 한국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그 수없이 많은 남자 재벌 2세들 가운데 가장 싱싱한 재벌 2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없던 젊은 남자. 그런데 처음으로 마음과 생각이 따로 노는 상황을 맞닥뜨린 남자.

만약 박형식이 아닌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연기했더라면 절대 '왜 내 마음이 내 머리를 배신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라는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리한 배우가 아니라면 절대 그렇게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뒤로 수차에 걸쳐 - 남자 주인공이 필요할 때마다 - 제1후보로 박형식의 현재 상황을 체크했지만 그럴 때마다 스케줄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때에도 일단 박형식을 떠올렸지만 - 매우 길고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사전제작드라마 '화랑' 의 촬영이 진행중이었던 겁니다. 제작기간도 길고, 방송기간도 매우 긴.... (물론 박형식을 캐스팅하고 싶은 저희 심정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뭐 지금도 '도봉순 촬영 왜 이렇게 안 끝나냐'고 애태우고 있을 다른 제작진들도 있겠죠.^^)

어쨌든 정말 아슬아슬하게, 박형식의 출연이 결정됐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죠. 그리고 결과를 보면 박형식에게나 '힘쎈여자 도봉순'에게나 모두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안민혁은 엉뚱함과 따스함이 교차하는 쉽지 않은 남자입니다. 게다가 뭐든 다 해줄 수 있는 재력까지 갖추고 있는, 그야말로 꿈의 남자친구죠. 태연하면서도 의뭉스럽게 "뭘 그러고 서 있어? 짝사랑하는 남자 여자친구라도 본 사람처럼?", 이런 대사를 하는 박형식을 볼 때 우리는 그 안민혁의 현신을 보고 있습니다. 멍뭉커플 화이팅.

삼총사 중에서 마지막 빈 자리, 국두 역도 간단치는 않았습니다. 이 캐릭터에 대한 백미경 작가님의 애정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국두는 원리원칙에 죽고 사는 엘리트 경찰이라는 기본 캐릭터 외에, 결국 봉순이와의 멜러에서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추억 속 첫사랑의 느낌을 살려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 대목에서 후보로 급부상한 배우가 바로 지수. 군인이나 경찰관의 느낌으로 잘 어울릴 배우이기도 했지만 사실 지수군은 JTBC에 약간의 빚(?)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방송된 '판타스틱'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죠.

당시 지수는 극중 박시연의 탈출구가 되는 연하남 검사 역으로 발탁됐습니다. 연기 경력으로 볼 때 다소 무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막상 연기를 해 보니 순진하면서도 저돌적인 연하남의 이미지가 잘 어울렸고 박시연과의 케미스트리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멜로드라마가 펼쳐질 대목에서 지수군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급성 골수염 진단으로,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판타스틱'은 다급한 대본 수정이 이뤄졌고, 김현주-주상욱 커플 못지 않게 주목받던 지수-박시연 커플은 갑자기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겉도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한창 시청률이 오르고 있던 '판타스틱'에 제동이 걸린 것과 지수의 부상이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당시 '판타스틱' CP를 맡고 있던 터라,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다리로 서지도 못하는 환자를 어찌 할 수도 없고... 병원에 찾아갔을 때,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데 거기다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랬던 상황이라 '의리'를 앞세워 국두 역할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판타스틱'의 아쉬움을 씻어 보자. 다시 한번 JTBC와 함께 해 보는게 어떠냐?" 물론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런 정도의 설득이 먹혀들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의리의 사나이 지수는 다시 한번 한 배를 타는데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 자신에게도 '판타스틱' 때 못다 이룬 아쉬움이 못내 컸던 거죠.

 

초반 국두를 대표하는 대사들은 "아저씨,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에서 "남자는 다 개야!"에 이르는 순도 100%의 순정 마초 대사들이지만 뒤로 갈수록 국두도 마음 속 로맨스가 살아나는 역할을 연기하게 됩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국두의 변신, 기대하실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힘쎈여자 도봉순'이 자랑하는 무적의 삼각편대가 완성됐습니다.

 

박형식이 91년생, 지수가 93년생으로 두 살 차이면 사회에 나가서는 사실 친구도 될 수 있는 나이지만 지수군은 어찌나 형을 좋아하는지(평소에도 뭐하냐고 물으면 '형들과 뭐 한다'는 대답) 바로 '형식이형'이 '우리 형'이 돼 버렸습니다. 보기에도 훈훈한 두 남자가 서로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촬영장 분위기가 나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아무튼 현재 두 배우 모두 자신들의 기대치를 100% 이상 달성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뭐든지 다 해주는 남자' 박형식에게 좀 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지만, 지수 또한 언젠가 국두의 과거 - '국두는 왜 하늘하늘한 여자가 좋다고 했을까' - 가 소개되면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캐릭터가 한 단계 올라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뭔가 달달한 브로맨스도... 아쉽지 않게 준비돼 있으니 기대하시길.^^

 

P.S. 노파심에서 한마디 -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어설프나마 제가 이 드라마의 초기 세팅 과정을 잘 알고 있고, 나름 이 드라마 제작진을 대표하는 입장에서입니다. 글 내용에 나오는 것들을 모두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거나, 내가 없었으면 이 드라마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드라마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명 넘는 스태프와 연기자, 그리고 작가와 연출가가 피와 땀을 쏟습니다. 그 분들의 공로를 대변해서,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중 흥미로울 부분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드라마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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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쎈여자 도봉순] 1회가 성원에 힘입어 JTBC 드라마 사상 첫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수도권 4.04, 전국 3.8이라는 저희로서는 꿈의 숫자가 나왔습니다. 진정 작가님, 감독님, 스태프, 제작사, 그리고 모든 출연진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예고대로 드림 트리오의 결성 계기로 돌아갑니다. 박보영-박형식-지수를 저희는 무적 트리오라고 부릅니다. 그냥 단지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축이라서가 아니라, 본래 드라마의 구성이 '도봉순의 힘, 안민혁의 돈과 기발함, 인국두의 수사력과 활동력'이 삼각편대를 이뤄 악의 무리들을 물리쳐 간다는 흐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셋이 모여야 '정의의 편'이 완성되는 구조였던 것이죠.

물론 삼총사라고는 하지만 뭣보다 우선, 당연히 타이틀 롤인 도봉순 역에 누구를 기용하느냐가 최대 관건이었습니다.

일단 이 드라마의 어머니인 백미경 작가님과 처음 대본을 놓고 마주했을 때부터, '일단 육체적으로 강건해 보이는 늘씬한 건강미녀 스타일은 배제하자'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JTBC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외형적으로 연약해 보이고, 전혀 힘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스타일'이 필요하다는 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도봉순은 단지 슈퍼히어로일 뿐만 아니라 한국 88만원 세대, 구직자 젊은이, 그 중에서도 여성 구직자를 대변하는 캐릭터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 귀여움이 필수. 당연히 체격도 크면 안 됨.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나가다 보니 거의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적인 도봉순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보영이었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봉순 역으로 박보영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가 당시의 염원이었습니다. 검증된 연기력. 천부적인 귀여움. 아담한 체격.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폭넓은 인기. 어디 하나 부정적인 요소가 없었습니다. 다만 작품 보는 눈이 까다롭고, 워낙 찾는 곳이 많아 모시고 오기가 어렵다는 것 뿐.

그런데 다행히도, 이미 박보영이 이 작품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공동제작사 JS픽처스의 이경식 이사님이 일단 박보영 측과 교감이 있었고, 작품에 대한 호감도 형성시켜놓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게 곧 '최종 결심'은 아닌 상황이었죠. 아무튼 그 뒤로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캐스팅을 하다 보면 늘 그렇지만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정말 이 배우가 우리 대본을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좋아한다면 대체 얼마만큼이나 좋아하는 걸까.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어느날, 박보영과 친분이 두터운 어떤 인물과 우연히 통화를 했습니다.

그: 보영이가 요새 꽂혀 있는 대본이 있다던데요?

나: (헉) 그, 그게 뭔데요?

그: 제목은 모르겠고... 뭐 슈퍼우먼 이야기라던가? 여주인공이 힘이 엄청 세대요. 아무튼 재미있대요.

합창교향곡 4악장이 머리 속에서 울려퍼지는 느낌. 이거 되겠구나. 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기쁜 예감은 머잖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작가/감독님과 함께 CD만한 얼굴의 박보영을 처음 만난 날. 차오르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냥 된거다. 이 다음부터 뭐가 어떻게 되든, 이 박보영/도봉순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을거야. 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죠. (백미경 작가님: 어쩌면 그렇게 예뻐요. 쳐다 보고만 있어도 질리질 않네.)

그날의 만남 이후에도 우리의 보영님을 노리는 수많은 마수(?)들이 뻗어왔지만(정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제의가 쏟아졌습니다. 농담 아닙니다) 당대의 의리녀 보영님은 사악한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일편단심 도봉순을 기다려 주었고, 결국 우리는 박보영이 연기하는 최상의 도봉순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피데스스파티윰 김상유 대표님. 사랑합니다.)

촬영이 시작된 이후 우리의 보영님은 한번도 저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박보영이 모니터를 가득 채울 때, 이형민 감독님을 비롯해 촬영장의 모든 스태프는 추위도 잊고, 배고픔도 잊고(이건 아니고), 그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거든요.

네. 글자로만 쓰여져 있던 도봉순의 이상을 200% 실사로 실현시킨 것은 바로 박보영이었습니다.

이미 드라마 본편 방송 전, '한끼줍쇼'를 통해서도 확인된 이 뽀블리의 위력.

박보영의 캐스팅 확정 이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에 헤벌레 하고 있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남자 주인공이 필요했습니다. 도봉순을 둘러 싼 두 남자, 안민혁과 인국두. 잠시 프로필을 살펴봅니다.

안민혁: 재벌가 5형제의 막내지만 부모 덕 안 보고, 게임 회사를 창업해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에 성공한 능력자. 거기에 완벽한 꽃미남이지만 또 그런 만큼 오만불손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이 없음. 그리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괴상한 사고방식의 소유자. 대 저택 지하에 AV룸+게임룸+지하 방공호 개념의 던전을 짓고 남자의 꿈을 실현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존재 봉순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은 어느새...?

인국두: 완벽한 외모와 신체조건에 경찰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능력자. 성장 과정 내내 주위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던 엘리트. 피아노도 잘 치고 각종 무술에도 능함. 하지만 정의감이 지나쳐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고위층을 수사하는 똘끼를 발휘하는 바람에 좌천돼 집 근처 경찰서 수사팀으로 배치. 봉순의 초중고 동창이며 오랜 시간 봉순이 꿈꿔온 이상형. 다만 여자친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봉순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쌀쌀맞게 딱딱 끊는 철벽남. 알고 보면 츤데레...?

이 두 남자를 데려와야 환상의 트리오가 만들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특히 시장엔 정말 남자 배우 기근이 심각하고... 어떤 배우들은 1,2년 전부터 스케줄이 잡혀 있고... 더구나 영화 쪽에서는 '뭉쳐야 뜬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웬만한 주연급 배우들이 한 영화에 3,4명씩 잡혀 있기도 하고....

(정말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특히 '신과 함께' 같은 영화는 정말 생태계 파괴의 주범입니다. 영화 한편에 이정재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디오를 묶어놓고 있으면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근데 재미있긴 하겠다.)

아무튼 너무 길어져서 남자들 이야기는 다음편에 하겠습니다.

 

P.S. 힘쎈여자 도봉순은 아직 안 깐 패가 너무 많습니다. 일단 웃음의 핵심병기 임원희 김민교는 아직 등장도 안 했고, 동네를 공포에 몰아넣는 연쇄 납치범 이야기도 이제 시작. 아울러 민혁을 위협하는 협박범의 정체도 아직 기미도 안 보이죠. 게다가 뒤로 가면 오돌뼈라는 신비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이제 시작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P.S.2. 아울러 특별출연해주신 JTBC 1등신부감 아나운서 강지영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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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썼다가 오타가 많아 몇군데 수정했습니다. 낯이 뜨겁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곧 방송됩니다. 사실 [힘쎈여자 도봉순]은 태어난지 좀 되는 아기입니다. 벌써 1년 전인 2016년 어느 봄날, '사랑하는 은동아'의 백미경 작가님이 대본을 한번 읽어 보라며 주셨습니다. 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작가님의 2015년 작품인 '사랑하는 은동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일찌기 한국 드라마에 없었던 여성 슈퍼히어로 드라마가 탄생해 있었더군요.

'여성 슈퍼히어로 드라마'라고 구별해서 썼지만 사실 한국 드라마 가운데 변변한 남성 슈퍼히어로 드라마가 있었느냐 하면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 방송된 히어로 드라마다'라고 할만한 작품은 없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꼽자면 '홍길동'이나 '전우치' 같은 전통적인 영웅들의 활약을 다룬 작품 정도?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을 슈퍼히어로라고 놓기는 좀 불편합니다. 영화까지 영역을 넓혀 봐도 류승범 주연의 '아라한 장풍대작전' 정도가 떠오르는 정도입니다. 강동원 주연의 '초능력자'가 있지만 주제 면에서 일반적인 히어로 무비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대체 왜 한국에는 그런 드라마가 없었을까...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반성이 앞섰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드라마 소재란 이런 것'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확실히 우리 드라마의 소재는 좀 더 다양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청자를 놀라게 하는 막장 드라마 계열도 새로운 시도에 인색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무슨 생각을 하다가,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의 드라마'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전혀 예기치 못한 작품이 하나 툭 튀어나오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한국 드라마는 정말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은 심지어 한국 상황에 매우 적합한 슈퍼히어로 드라마였습니다. 일단 '힘쎈 남자'가 아니고 '힘쎈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이때 저는 감히 '욱씨남정기'라는 드라마의 cp를 맡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 매료된 것도 사실 '강한 여자' 라는 테마가 지금의 한국 드라마에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생각대로 '욱씨남정기'는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에서 '욱씨'역을 맡았던 이요원도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강은경-주현 작가님이 숨을 불어 넣은 캐릭터가 이형민 감독님의 손끝을 거치면서 21세기 한국 여성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낸 것이죠.

무엇에 대한 공감일지는 너무도 자명했습니다. '욱씨남정기'의 승부는 '사이다'에 있었던 것이죠. 직장에서도 약자, 그러다 집에 오면 엄마이자 주부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이 여자. 상사-남편-부모, 심지어 자식까지 포함해도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는 시청자들에게 이요원이 연기한 욱다정(옥다정)은 그야말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 자체였을 겁니다(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여기서 추정으로 바뀝니다).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그러면서도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 사실 '여자가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싸가지 없다고 욕을 먹는 현실까지 잘 반영돼 있었습니다 - 욱다정은 진정 독보적인 캐릭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또 다른 흥미로운 캐릭터를 발견하게 됐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욱다정 이요원이나 '직장의 신'의 김혜수가 '못하는 게 없이 완벽한' 직장형 슈퍼우먼이라면 도봉순은 사실 힘이 세다는 것 외에는 전혀 슈퍼우먼스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도봉순은 단란한 가정에서 쌍둥이 남매 중 누나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기대는 서울대 의대를 간 쌍둥이 남동생에게 '너무나 당연히' 쏠렸고, 공부머리가 부족한 봉순이는 그저 그런 학력으로 그저 그렇게 사회에 나왔지만 결국은 길고 긴 구직자의 대열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봉순이가 학교에서 뭘 전공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봉순이의 꿈은 게임 제작자. 자신을 닮은 캐릭터를 활용해 대박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학원도 다니고 열심히 스펙을 쌓...으려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전문용어로 구직자. 구체적으로 말하면 백수입니다.

누가 봐도 도봉순의 가장 큰 강점은 넘치는 힘 -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입니다 - 입니다. 외할머니의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때부터, 엄마에게서 딸에게 수백년에 걸쳐 대물림되어 온 신비로운 힘이죠. 하지만 봉순이는 이 힘을 장점으로 활용할 의지도, 환경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힘이 센게 왜 나빠?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만, 사실 봉순이의 힘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여자가 무식하게 힘만 세서 뭐하게!'라는 봉순이 엄마의 등짝 때리기 신공도 나오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힘을 써서 괴롭히다가 천벌을 받은 조상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위한 장치들이죠. 이 드라마에서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남자들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참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봉순이의 '넘치지만 감춰져야 했던 힘'은 바로 그 '참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능력' 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힘쎈여자 도봉순'은 원더우먼이나 엘렉트라 같은 우먼 히어로 이야기와 결별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냥 비슷한 힘쎈 여자 이야기지만, 그냥 그 힘쎈 여자가 나쁜 놈들 혼내주고 다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은 스물이 한참 넘도록, 넘치는 슈퍼 파워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 힘을 어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늘 자신감 없이,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살아온 봉순이가 어느날, 몇 차례의 만남과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쓰여야 할지를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남들보다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던(심지어 상당수는 자신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한 젊은이가 진정한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도봉순이 여자다 보니 이 '힘'은 글자 그대로 물리적인 힘으로 드라마 안에서 활용됩니다. 예를 들면 '약한 여자' 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들이 요즘 특히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밤길 함부로 다니기 무섭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택시 혼자 타기도 무섭고(얼마전 목포에서 무서운 일이 있었죠),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않는다고 막말하는 나이 헛먹은 할아버지들이 무섭고, 클럽에서 만난 남자가 막무가내로 팔목 잡고 집에 못 하게 할 때 무섭고, 여자 혼자 산다고 방범창 뜯고 들어오는 동네 미친놈이 무섭고... 그런 세상에서 봉순이의 힘은 시원한 대리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소일 겁니다. (네. 우리 드라마에서 봉순이는 이런 '놈'들을 아주 시원하게 응징해 드립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수록 '힘쎈여자 도봉순'은 반드시 드라마로 만들어야 할 대본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아, 물론 이런 대의를 갖고 있는 드라마라는 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죠. '힘쎈여자 도붕순'의 대본은 일단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봉순이를 가운데 놓고 벌이는 게임회사 사장 민혁과 엘리트 형사 국두의 일진일퇴 공방전도, 봉순이 가족들의 알콩달콩한 분위기도, 그리고 봉순이의 초반 주적(?)인 건달 백탁 일파의 황당무계한 행각도 흥미로웠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백미경 작가님은 데뷔작인 '사랑하는 은동아' 같은 심각한 멜로 드라마 때도 넘치는 유머감각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잊지 못할 코믹 명장면들을 만들어 냈던 분입니다. 그런 양반이 이번엔 맘 먹고 코믹 드라마를 쓰겠다고 내놓은 대본이니 뭐 그런 쪽으로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가 딱 맞는 표현입니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만들어 주실 분은 누구일까....는 사실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현재, 리얼 타임으로 '욱씨남정기'로 매주 시청자들을 포복절도하게 하던 이형민 감독님이 바로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네. 왕년에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만드신 거장 맞습니다. 바로 그분이 코믹 장르에도 눈을 뜨시고 만든 작품이 바로 '욱씨남정기' 입니다. 이형민 감독님도 OK를 하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도봉순은 누가 해야 할 것인가...인데, 이것 역시 사실 긴 고민이 필요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배우를 데려올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죠.

(너무 길어져서 접습니다. '무적의 트리오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에 대한 글은 다음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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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개월간 가장 열심히 본 TV 프로그램은 단연 '팬텀싱어'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뭔가 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JTBC의 히트작 '히든싱어'를 만들었던 조승욱 CP에게 언젠가 "다음엔 뭘 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고, "한국의 일 디보 같은 팀을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해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입니다. 그 뒤로는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아무 사전 정보도 들은 게 없었습니다. (방송이 끝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 역시 그냥 시청자 중 한 사람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무튼 첫 방송. 다소 싱겁게 시작했습니다. 무슨 거창한 세레모니도, 의미 부여도 없이 곧바로 출연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노래의 수준이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 왔던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들과는 한 차원 다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개인 오디션을 지나가 2인 오디션의 시기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게 됐습니다.

 

 

'퀴도베리마레루치!'로 시작하는 이 노래(알고 보니 Qui dove il mare luccica... 입니다^^)의 도입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노래 자체도 유명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예능/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로도 활용된 덕분일 겁니다. 아무튼 루치오 달라의 노래보다 파바로티가 불러 훨씬 더 유명해진 이 노래, 이 노래가 한국에서 임자를 만난 느낌입니다.

아울러 '히든싱어'의 스타였던 - 혹시 아직도 모르는 분이 있다면 김경호의 모창자로 나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 원킬 곽동현의 화려한 변신이 빛났습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곽동현은 '팬텀싱어' 최고의 흥행 카드 중 하나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물론 이 노래에서 산왕고 역할을 했던 테너 이동신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후의 '팬텀싱어'를 통해 밝혀집니다. 대하드라마 팬텀싱어의 시작을 알리는 한편이었습니다.

 

 

한쪽에서 피를 튀기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다른 한 쪽에서는 꿀성대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리리코 테너의 모범 같은 김현수의 목소리가 손태진을 만나면서 촉촉하고 부드러운 최강의 하모니가 만들어집니다. 강렬함과 달콤함, 치열함과 섬세함 중 어느 쪽이 더 청중을 사로잡느냐. '팬텀싱어' 시즌 1의 주제(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통해 손태진은 시즌1의 베이스/바리톤 주자들 중 스타성으로는 최강임을 굳히고 갑니다. 

 

 

사실 음악적으로는 큰 임팩트가 없던 무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프레디 머큐리나 엘튼 존이 워낙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탓에, 너무나 잘 알려진 원곡에 두 사람이 별로 보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장차 한국을 대표하게 될 뮤지컬계의 두 젊은 스타, 고은성과 고훈정의 에너지 대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즌1에 등장한 여러 뮤지컬 스타들 가운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뮤지컬 배우로서 최고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확신도.

 

사실 프로그램 초반에 몇몇 출연자들은 '한글 노래'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노래의 스타일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글 가사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경우 '한글 가사'의 문제는 번역 가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뮤지컬이라는 서구 문물이 수입될 때 한글화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한때는 국내에서 공연되던 오페라들도 모두 한글 가사로 불린 적이 있었죠). 하지만 어떤 노래는 훌륭한 작사가를 만나 대단한 성원을 얻는 반면 - '지금 이 순간'의 가사는 영문 원곡 가사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노래들은 원곡의 아름다움에 오히려 폐를 끼치곤 합니다. 이 영향은 생각보다 큰 편이어서, 처음에 한국어 가사로 접했던 노래를 영어 원 가사로 들은 다음 "아, 이 노래가 이렇게 좋은 노래였어?"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팬텀싱어' 출연자 중 대부분이 추구하는 보컬의 스타일에 최적화(?)된 언어가 이탈리아어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쉬 그로번이나 일 디보가 굳이 영어로 가사가 붙어 있는 노래들에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여 부를 때에는 괜히 그러는 건 절대 아니겠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곡을 고려해 한글 가사가 붙어 있는 노래들의 경우에는 처음에 언급했던 어색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팬텀싱어'에서도 불려졌던 윤종신의 '배웅'이나 조용필의 '슬픈 베아트리체' 같은 경우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한국어 가사 노래들 중 압권은 이 노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팬텀싱어'에서 펼쳐졌던 공연들 가운데 '감동'이라는 차원에서 평하자면 이 무대를 넘어 설 공연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팬텀싱어' 시즌2가 만들어진다면,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준결승, 결승을 거치며 너무나 이탈리아어 가사에 대한 출연진의 편애(?)가 좀 거슬리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 '팬텀싱어'에서 가장 이색적인 무기는 곽동현과 이준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곽동현은 강력한 고음을 무기로 하고 있어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지간한 테너의 최고음보다 더 위의 음역에서 소름끼치는 샤우팅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제로 테너의 현역 최고봉인 후안 도밍고 플로레스나 일 디보의 멤버들 중 미국 출신 데이비드 밀러 같은 고공 플레이어들의 역할인 셈이죠. 혹자는 스티브 발사모와 비교하기도 합니다만 4인조 중창 팀이라고 가정하면 데이비드 밀러의 역할 쪽이 더 실용적입니다.

즉 다른 팀이 테너 2인을 동원해 소리를 쌓는다고 할 때 곽동현을 동원하면 베이스에서 곽동현까지 4층의 음역을 구축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상 이 무기를 쥐었을 때, 각 팀이 어떻게 활용할지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본래의 목적(?)에 맞게 활용한 것이 이 다음에 들을 'I Surrender'였다면, 이 'Halo'는 '팬텀싱어' 시즌1 전체 무대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무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역 뿐만 아니라 소리의 종류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네 명의 보컬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팬텀싱어' 시즌1이 배출해 낸 가장 유니크한 무대는 바로 이 곡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런 조합을 리드한 손태진의 능력치도 다시 보게 만든 곡입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가장 듣고 싶었던 무대는 이런 무대였습니다. 박상돈에서 시작해 백인태-유슬기라는 탄탄한 좌, 우 날개가 크로스를 올리고, 이걸 고공폭격기 곽동현이 찍어내리는 4인 체제의 무대, 바로 이런 것이 4인조 남성 보컬 팀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무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실력으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이 네 명의 조합은 상업적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나가 4인조로 음반을 내고 활동하는 데 가장 무리가 없을 것 같은 팀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은 김문정 심사위원은 "너무 쉬운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답입니다. 이 네 명의 남자들이 팀을 꾸렸을 때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I Surrender 같은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백인태-유슬기-곽동현이 3단 고음을 뿜어내며 청중의 정수리를 찍어내릴 때 헉 하지 않을 수 있는 청중은 별로 없겠죠.

그런데 어쩌면 이런 똑같은 패턴을 지나치게 끝까지 고집한 것이 이 '인기현상'팀이 2위에 머문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의 스타일 변화나 강-온을 오가는 변화구가 필요했을 지도 모를 시점에, 그냥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상대방이 납득할 때까지 정면 돌파하겠다'는, 지나치게 우직한 면모를 보인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했던 인기현상이 2위에 머문 게 심히 아쉽습니다. 일 디보가 부른 I believe in You 같은 무대를 실현할 수 있는 팀은 이번 '팬텀싱어' 시즌1의 팀들 가운데선 인기현상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본래 셀린 디온과 일 디보가 같이 부른 것이 원곡입니다만, 모든 공연에 셀린 디온이 동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 디보 멤버들 끼리만 부른 버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전혀 무리가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멤버 데이비드 밀러의 위력입니다. 아마 들어 보시면 무슨 뜻인지 바로 아실 듯.

 

네. 드디어 우승팀의 무대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인기현상 쪽이었다는 것이지, 이 팀의 퍼포먼스가 가진 아릉다움은 감히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앞서 대결을 펼쳤던 김현수와 손태진은 부드러움으로, 고훈정과 이벼리는 약간의 드라마틱한 음색으로 균형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로맨틱하면서도 장대한 원곡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시켰습니다.

좋은 팀이란 노래 실력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곡과 파트 배정, 그렇게 해서 팀을 이끌어 가는 리더의 역량이 매우 중요할 것이 당연한데, 이 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손태진과 고훈정이라는 두 명의 훌륭한 팀 플레이어가 소리나지 않게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면 마르첼로 알바레스와 이미 고인이 된 살바토레 리치트라, 21세기 초반 최고 테너를 거론하면 빠지지 않고 꼽히던 두 사람의 노래보다 포르테 디 콰트로의 무대가 완성도 면에서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런 수준의 경연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어디까지 제작진의 의욕과 추진력 덕분입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 최고의 무대가 펼쳐져야 했을 최종 생방송 무대에서 현장음을 방송으로 걸러 내는 과정이 다소 불완전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작진의 경험 부족을 탓하기 전에, 국내 방송에서 한번이라도 생방송으로 이런 무대가 펼쳐진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약간의 부실함은 첫 길을 가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시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부분적인 아쉬움이 쌓여 제2, 제3의 팬텀 싱어 때에는 누가 또 시즌1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무대들을 만들어 낼 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팬텀싱어'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시즌2가 나오긴 나오는 거겠죠? 마지막에 COMING SOON 이라는 자막이 나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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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이라는 영화가 상영중입니다. 처음 들어보시는 분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순실 게이트와 탄핵 정국 속에서 사실 다른 화제는 모두 묻혀버렸다고 봐도 좋을 2016년 겨울. 왠지 예술영화 취급을 받고 있는 이 영화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직접 출연하는 역사 탐방 다큐멘터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목의 '나의 살던 고향'은 바로 만주 벌판, 즉 오래 전 고구려를 세웠던 조상들이 살던 넓은 그 북쪽의 땅을 말합니다.

 

사실 저만 해도 연출을 맡은 류종헌 감독이 친한 형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 영화를 보러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류종헌 감독은 본래 영화인이 아니고, 보시는 분들은 단번에 알아 보시겠지만 본래 영화로 상영할 것을 염두에 두고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는 것도 금세 드러납니다. 별다른 장비의 도움 없이 찍은 영상은 남극 탐험대나 에베레스트 등반대 보도 영상 못지 않게 흔들리고, 하다 못해 요즘은 모든 분야에서 필수인 드론을 이용한 공중 샷 하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나의 살던 고향은'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데가 있습니다. 혹시 역사에 좀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소 역사를 멀리 하고 살던 분들이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지식의 다과는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별 영향이 없는 듯 합니다.

 

 

 

영화 도입부. 도올선생은 높은 비사성 자락에서 발해만과 서해를 바라봅니다. 먼 옛날. 국사 교과서 어딘가에서 들어 본 비사성이라는 이름이 뇌세포를 자극합니다.

비사성은 요동반도의 맨 끝, 한때 중국 근대사에서 격동의 현장이었던 따롄(大連) 항 부근에 있습니다. 요동반도의 끝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국 본토와 한반도를 잇는 근해 수로에서 최고의 요지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에서 거의 모든 중국 수군은 고구려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항상 비사성을 타격했습니다.

 

그 비사성을 시작으로 도올 선생은 압록강 북쪽, 환런과 지안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들을 한발 한발 짚어 갑니다. 가장 먼저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은 바로 환인의 오녀산성. 주몽이 처음으로 고구려를 세웠다는 졸본성(홀본성)의 오늘날 이름입니다.

 

저 먼 절벽 위가 바로 오래 전 졸본성이 있었던 성터입니다.

 

 

도올선생도 언급하지만 과거 유대인들이 로마에 맞서 마지막까지 싸웠떤 마사다 유적이나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유적인 바위 위의 성 시기리야를 연상시키는 그런 장대한 풍경입니다.

 

 

오녀산성을 위에서 촬영한 샷은 참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략 이런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함부로 적들이 침입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 지형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오녀산성을 보여주면서 도올선생은 말합니다. "역사라는 것도 그 땅을 밟아 보기 전까지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입니다.

 

오녀산성의 장관을, 국내성/환도산성의 돌무더기를, 장군총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발해 상경의 무너진 성벽을 직접 보기 전의 고구려는 신화와 전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대단히 막연한 그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조 주몽이 오이 마리 협부라는 세 심복과 함께 거북이와 물고기가 모여 놓아 준 다리를 건너 그 어딘가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눈앞에 펼쳐지는 오녀산성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있는 요새의 간극은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에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고증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좀 아쉽기도 한데, 어찌 보면 또 크게 따질 일도 아니긴 합니다. 어차피 90분 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 고구려 역사를 꿰뚫을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임. 즉 세상을 보는 시선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항상 먼 북쪽이라고 생각했던 만주 지도를 뒤집어 놓고, 반대로 만주에서 남쪽을 향해 한반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 하지만 수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기도 한 역사의 현장. 그 땅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한번이라도 궁금해 해 보신 분이라면 이 영상의 가치를 알아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신 도올 선생과 류종헌 감독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게 됩니다.

지금도 이 영화는 상영되고 있고, GV도 잇달아 열리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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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개국 이후 드라마 몇 편의 책임프로듀서를 맡아 봤지만 단 한번도 캐스팅이 쉬운 적은 없었습니다. 좋은 대본을 찾는 일은 물론 어려운 일이고, 좋은 기획을 대본으로 발전시키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드라마 한 편을 같이 만드는 백여명의 스태프 중 어느 한 자리 '정말 좋은 사람'을 구하는 일 중 간단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드라마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는 '캐스팅'이라고 할 겁니다.

 

어떤 프로듀서도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방송국에서 원하는 캐스팅이 안 되고 날짜는 가고 있으면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가 않다"고. 그런데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대본과 훌륭한 연출이 있어도, 좋은 배우가 붙은 상태와 붙지 않은 상태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훌륭한 대본은 아주 유명한 배우가 없어도 그 빛을 발휘합니다. 내로라하는 톱스타가 출연해도 망하는 드라마들이 많고, 반대로 무명의 신인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드라마도 살리고 자신도 몸값을 높이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죠. 하지만 만약 그 대본에 정말 지명도 있는 배우들이 붙었다면, 그건 정말 대박이 났을 겁니다.

 

유명한 배우의 힘은 일단 마케팅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요즘 TV 드라마의 경쟁자는 다른 채널 드라마가 아닙니다. 일단 채널 자체도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TV 외에도 스마트폰이나 IPTV,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엔터테인먼트들이 경쟁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반에 '어? 재미있어 뵈는데 한번 볼까'하는 생각에 들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저희는 '판타스틱'을 준비하면서 주상욱김현주라는, 믿을만 한데다 대중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기용할 수 있었습니다. 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캐스팅에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그리고 두 배우 모두 지난한 설득 끝에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됐습니다만, 주상욱이 망설인 이유 중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몇개 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발연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본으로 이 드라마를 접한 사람들은(아, 물론 무식한 저만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다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발연기가 뭐가 어려워?' 잘 하는게 어렵지 못하는게 뭐가 어려울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고 1주일 안에 드디어 그 '발연기'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바로 2부의 '대본 연습' 신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극중 드라마 작가 소혜(김현주)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던지며 대본을 자기에게 맞게 수정해 달라는 해성(주상욱)에게 짜증이 나서 '킬러의 고뇌를 눈빛으로 연기하는' 고난도 감정 신을 쓰고, 대본 연습을 요청해서 해성을 망신시키려 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나서 대본을 읽어보던 해성은 마침내 감독과 상대역 여배우 앞에서 얼어붙고, 상대역 여배우는 그 자리에서 역할에 몰입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보다가 긴장한 나머지 평소보다 더 심한 발연기를 폭발시킵니다.

 

이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보다가 아, 왜 저 장면이 어렵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상욱은 해성의 캐릭터를 분석해 보고, '한류 톱스타가 할 수 있는 선의 발연기'를 구현하려 고민했기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죠.

 

보통 사람들이 '발연기'를 생각하면 흔히 장수원의 '로봇 연기'를 떠올립니다. 이 '로봇 연기'는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아예 다른 하나의 장르로 간주해야 할 부분이지만, 아무튼 극중 해성이 로봇 연기를 보여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류해성은 아시아권의 톱스타로 군림하고 있는데, '로봇 연기'로 그런 자리에 갈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막상 주상욱의 연기를 보고 있으니 그 '한류스타의 발연기'라는 것이 오히려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적게는 2%, 많게는 5% 정도 부족한, 아주 끔찍한 연기도 아니면서 절대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그래서 뭔가 명연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딱 좋은, 절묘한 선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실로 감탄을 자아내는 연기였습니다.

 

이 장면은 아마 방송으로 익히 보셨을테니 메이킹 영상을 가져 옵니다.

 

 

 

 

 

 

이 발연기 장면은 3부에서도 선배 배우 박원상의 지도를 받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아무튼 그 뒤로 인터넷에 기사가 뜰 때마다 '발연기 장인'이라는 별호가 주상욱에게 붙는 걸 보고 역시 큰 노력은 누가 봐도 확연히 보인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 호흡은 누가 뭐래도 마에스트로급입니다. 정말 요소 요소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회 '발연기'와 '깨방정'으로 분위기를 살려 주는 주상욱이 큰 주목을 받으며 노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 관계자로서 참 흐뭇한 일입니다. 

 

 

 

 

 

 

P.S. 그런데 이 주상욱의 기막힌 발연기 연기가 중국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안타깝습니다. '한국에서 발연기로 소문난 배우가 중국에서는 우상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중국 시청자들이 발연기와 명연기를 구별할 줄 모른다고 비웃은 것 아니냐'는 느낌을 받으신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이야기입니다.

 

문득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릅니다.

 

몇해 전에 홍콩에서 방송학을 강의하시는 여교수님 한분과 우연히 저녁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에 조예가 깊었던 이 분은 저를 보더니 이런 저런 덕담을 하다가 "한국 여배우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들 예쁜 것 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잘 하느냐. 연기 못하는 배우가 없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누가 그렇게 연기를 잘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 분이 그 자리에서 줄줄이 십여명의 이름을 대는 겁니다. 이영애, 송혜교, 김태희, 김희선, 수애, 최지우, 전지현, 하지원.... 그랬더니 자리에 있던 다른 분이 웃으면서 "그러냐. 그런데 지금 말한 여배우들이 모두 얘기하시는 것만큼 명배우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중국 여배우들이 훨씬 더 연기를 잘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좌중의 많은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가 그렇게 연기를 잘 하더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장만옥, 유가령, 관지림, 서기, 이가흔, 장백지, 판빙빙..."이라고 어렵지 않게 중화권 여배우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막 웃으면서 "그런가요? 내가 보기엔 장만옥 외에는 다 별론데..." 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시각차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날의 결론은 1) 남의 떡이 커 보인다 2)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연기력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2)는 우리가 평소에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남자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조니 뎁이나 조지 클루니가 명배우로 꼽히는 반면, 키애누 리브스나 매튜 매커너히, 올란도 블룸은 수시로 관객들이나 평론가들로부터 '발연기'라고 혹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배우들은 전 세계적으로 전자의 배우들 못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죠. 특히나 비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은 저 배우들의 연기력이 혹평의 대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아 그래?' 하는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역시 언어의 장벽이란 이럴 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 시청자 여러분들이 혹시 이 글을 접하시게 된다면(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저희는 중국을 비하하려는 생각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점을 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는 높지만 발연기로 놀림 받는 배우가 중국(혹은 일본, 혹은 대만, 혹은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 배우가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다는 설정 자체가 불쾌하시다면 그건 어쩔수가 없겠지만, 요즘처럼 문화 교류가 빈번한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극중 해성이 중국에서 환대 받는 장면은 최근 중국 스타 허위주(许魏洲, 쉬웨이저우)가 내한했을 때 인천 공항에서 펼쳐졌던 대대적인 환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 만약 호가(胡歌, 후거) 같은 배우가 내한한다면 환영 인파로 정말 큰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오해는 말아 주시길. 늘 얘기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대신 그냥 재미있게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P.S. 2. 주상욱의 연기와 함께 꼭 같이 거론됐으면 하는 분은 바로 이분. 둘의 케미는 진정 환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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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무슨 시사회야... 하시던 분들. 제대로 했습니다. 서울에서도 극장가의 코어,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드라마 시사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JTBC 금토드라마 '판타스틱' 얘깁니다.

 

사실 배우들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드라마는 제때 만들어서 방송 내기 바쁩니다. 바빠서 죽을 새도 없고, 밤을 밥먹듯 새 가며 납기일 맞추는 게 제격입니다. 게다가 극장에서 시사회를 하려면 대관해야지, 조명 마이크 시설 갖춰야지, 영상이 제대로 재생되는지 영상 플레이도 체크해야지, 음향도 알아봐야지, 정말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고 제대로 작정해야 가능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렸듯, 본방 거의 1주일 전에 1회를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내놔야 한다는 짐이 제작진에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 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행사를 기획한 JTBC 홍보마케팅팀과 영상을 만들어 주신 조남국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사는 결국 아주 단순한 니즈, 즉 "어떻게 하면 드라마를 방송 전에 널리 알려 볼 수 있을까"하는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극장에서 시사회를 해 보자는 거였죠. 물론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제대로(사실은 티켓을 팔아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대형관에서 팬들과 몇몇 관계자들, 파워블로거들을 초청해서 해 보자는 생각을 한 겁니다.

 

 

 

뭐 기왕 판을 벌인 김에 이런 등신대 패널을 설치해 팬들이 사진 찍을 수 있는 플레이스를 만들었고

,

 

입장할 때 팬들이 써 넣은 사연에 따라 소원 들어 주기 이벤트도 진행했습니다.

 

 

 

 

이날 이벤트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습니다.

 

 

 

 

주상욱씨 팬 중에 "제 눈을 보고 제가 어디가 예쁜지 말해주세요"라는 사연을 쓰신 분.

 

 

 

 

다 쓰러졌습니다. ㅋ (얼마나 예쁜 분이었는지는 상상에...)

 

 

굳이 길게 말로 하는 것보다, 대체 어떤 행사였는지 직접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관객 반응도 좋더군요. (행사에 대한 반응 말고 드라마에 대한 반응^^)

 

 

 

 

 

박수갈채 속에 상영이 끝나고, 행운권 추첨 이벤트까지 이날의 행사가 끝났습니다.

 

 

아, 이미 앞에 감사 인사는 JTBC 홍보마케팅팀과 조남국 감독님에게 드렸지만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JTBC의 장남 장성규 아니운서. 이날 제작발표회에 이어 시사회까지 환상의 진행 실력을 뽐냈습니다.

 

요즘 인터넷방송 '짱티비씨'로도 인기 폭발입니다.

 

짱티비씨 보실 수 있는 곳은 페이스북의 https://www.facebook.com/JjangTBC  여기나 http://afreecatv.com/jjangtbc 

 

 

 

영상을 퍼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지금 짱티비씨는 짱티비씨고,

 

주제는 판타스틱.

 

혹시 그동안 판타스틱 예고 한번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엑기스를 드립니다.

 

옛다.

 

 

 

 

 

에... 아무튼 재미있다는 이야기고요.

 

첫 방송은 9월2일 금요일 밤 8시30분.

 

앞으로 두어달 동안 여러분을 흥분시킬 그 드라마입니다.

 

 

 

 

 

본방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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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이라는 대본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이 드라마가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그 다음은 불치병이라는 소재를 전혀 무겁지 않게 다뤘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와 톱스타라는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암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드라마 중에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자세를 유지했던 드라마는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판타스틱'의 주인공 이소혜는 인기 드라마 작가. 어렵다는 장르 드라마에서 연속 히트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게는 '갓소혜'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소혜는 드라마 속 시한부 인생 대목의 자문을 위해 암 전문의 홍준기를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던 와중에 자신이 바로 유방암 말기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소혜.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돈도 꽤 벌고 직업인으로서 기반은 굳혔지만, 버는 족족 돈은 가족들에게 들어갔습니다.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는 언니네가 들어가 살고 있고, 자신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죠. 결혼은 커녕 연애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

 

이렇게 인생을 끝낼수 없다고 결심한 소혜는 마지막 나날을 화려하게  불살라 보기로 결심합니다. 1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찾아내고, 평소 전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에 도전합니다. 그러는 사이, 오래 전 뭔가 관계가 맺어질 뻔 했던 류해성이 드러내놓고 자신에게 대시해 오고, 주치의인 홍준기도 "우리 사귀는게 어떠냐"고 제안해 옵니다. 심지어 홍준기는 현재의 삶을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암 환자입니다.

 

진작들 나타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무튼 인생이 마지막 나날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아무튼 이렇게 해서 두 남자와 썸 타랴, 자신의 유작이 될 것 같은 드라마 집필하랴, 소혜의 분주한 나날이 이어집니다.

 

어쩌면 작가 본인의 판타지로 보이는 이 내용(연출자 조남국 감독은 이성은 작가에게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연애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거냐"고 대놓고 얘기하십니다 ㅋ) 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라는 점에서 볼 때 김현주와 주상욱은 최상의 조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따질 땐 따박따박 따지고 바늘끝처럼 신경이 예민한 여자이면서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소혜 역이라면 누가 봐도 김현주가 적격입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마음 속은 어린이인 철없는 한류 스타 역할을 주상욱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죠.

 

특히나 팬들 앞에서는 허세 가득한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과시하지만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에게는 애교 덩어리. 겉으로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마음 속은 히트맨 아닌 '히타맨'인 남자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캐스팅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지만(누군가 말했습니다. "캐스팅만 안 해도 되면 드라마 프로듀서는 신의 직업"이라고), 어쨌든 두 주인공이 결정된 뒤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습니다. 왕년의 거칠 것 없는 여고 퀸에서 지금은 거대 로펌 오너의 아내로 숨 죽여 살고 있는 백설 역을 박시연이 맡게됐고, 백설로 하여금 답답한 현실을 박차고 역시 자기의 삶을 찾게 하는 연하의 남자 상욱 역에 지수가 캐스팅됐습니다.

 

사실 순서상으로 가장 먼저 캐스팅된 사람은 의사 홍준기 역의 김태훈입니다. 무시무시한 연기력 덕분(?)인지 그동안 이상성격의 인물들 역할을 자주 맡는 바람에, 저는 이 배우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동안 보여지지 않았던 엉뚱한 김태훈의 면모가 드러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캐릭터들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한 영상. 저 다섯 주인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깨알같은 "이거 너무 잘생긴거 아니야?" ㅋㅋㅋ

 

 

 

 

 

 

생각해 보면 올해만큼 사회 각계에서 '여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해도 별로 없었던 듯 합니다. 각종 혐오 범죄와 여혐 논란, '미러링'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고, 그런 가운데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한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사회 전반에서 '유리 천장'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을 예견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저희는 올해 '여성'이 뭔가 중심에 오는 이야기들에 계속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여성, 세상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여성,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여성,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욱씨남정기'의 욱다정 이요원이었고, 배경이 조선시대이기는 합니다만 '마녀보감'의 연희도 저주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줬습니다. '청춘시대'의 다섯 주인공 역시 아직 미생의 존재인 여대생들이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눈치 채셨겠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생활로부터 해방된 여자'의 이야기는 '여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성인들은 사회에 나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 볼 여유 없이 '앞으로 앞으로' 자전거 페달 밟기를 강요당합니다. 다리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가 쓰러지고 너는 낙오된다는 교훈 속에서 수십년간 훈육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시한부 진단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물론 자녀 있는 분들에게는 큰일 날 얘기죠.^^) 

 

 

아무튼 '판타스틱'은 넓게 보아 남자든 여자든 '생활로부터 벗아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작은 판타지입니다. 어떤 계기에서든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 지긋지긋한 생활의 쳇바퀴에서 살짝 내려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잠시 즐겨 보는 것이 힘든 일상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P.S. 이 드라마 1,2회를 보시고 나면 옛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 겁니다. 문득 한참 떠올리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보고, 전화번호가 011이나 016으로 되어 있어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다들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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