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더 많이 봤고, 물론 드라마라는 장르 특징상 1,2회 보다가 때려 친 것도 많고, 일단 완주한 것 위주로 꼽아 봤습니다. 영화나 마찬가지로 순서는 무의미. 맨 위에 있다고 1등이라는 뜻 아닙니다.
물론, 제목에도 있지만 기준은 개취입니다. 생각해보면 좋은 작품이 꽤 많았네요.
졸업
대치동. 학원에서 장학금까지 줘 가며 성공 사례로 잘 키운 우수한 학생이 어느날 대기업을 때려치고 대치동 일타강사가 꿈이라며 돌아온다. 대체 왜? 제일 반대한 건 그 학생을 키워 오늘날 일타강사가 되어 있는 여선생. 그리고 그 둘은... 뭐 그 뒤는 안 봐도 알 것 같겠지만, 이 시대의 드라마 장인 중 하나인 안판석은 어찌 보면 뻔한 연하남-연상녀의 러브 스토리 속에 학교, 청소년, 수업, 장래, 꿈, 교육, 이 시대의 가장 무겁다 싶은 키워드들이 생생하게 뛰어놀게 했다. 지금이라도 찾아 보시길. 려원의 재발견도 놀랍다. (tvN - 티빙)
졸업, 당신의 염치는 안녕하신지 묻는 드라마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좋거나 나쁜 동재
'이런 드라마가 있었다고?' 하실 분이 적지 않을 듯. 이 재미있는 드라마를 모르는 건 고사하고, 심지어 동재가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지만 서글프기도 하다. 하긴 사람에 따라서는 <비밀의 숲>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마이너 드라마 취급을 받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좋거나 나쁜 동재>는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좋지도, 딱히 나쁘지도 않은 성정의 주인공이 끝까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실상 최초의 드라마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미드에 비교하자면 한국판 <Better Call Saul>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지금 바라는 건 동재2건 비숲3이건, 이 유니버스가 계속 이어지는 것 뿐. (티빙 오리지날)
지배종
역시 이런 드라마는 처음 들어 보시는 분이 많을 듯. 디즈니 플러스가 반성해야 할 이유 중 하나.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한국의 신기술기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고, 그 회사의 존재가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이수연 작가의 본격 SF로는 두번째 시도라 할 수 있겠는데, 여러가지로 아쉬웠던 <그리드>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매끄러워졌다. 한효주-주지훈의 호흡도 제대로다. 그런데, 이수연 월드에서 이 정도의 주인공 커플은 사실상 처음 아닌가? (디즈니)
지배종, 새로운 한국 드라마의 또 다른 시작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쇼군
올해 가장 할 얘기가 많았던 드라마. 임진왜란 2년 뒤인 서기 1600년, 일본의 미래를 건 다이묘들간의 최종전이 펼쳐진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휘하에는 영국 항해사 출신의 사무라이가 있었다는 것 까진 실제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고, 이걸 제임스 클라벨이라는 아시아 덕후 작가가 소설로 쓰고(일본의 역사적 인물들은 모두 이름을 고쳤다), 그걸 미국 제작자들이 1980년에 만들어 히트하고, 2024년에 다시 만들어 또 히트시켰다. 디즈니 플러스 사상 최고 히트작이라나.
백인들이 쓴 얘기다 보니 영국인 주인공의 눈으로 센고쿠시대의 끝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1980년과 2024년은 비교할 수 없는 시대인 것 같지만 내용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은 거의 차이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 드라마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워낙 스토리 자체가 흥미롭고, 당대에 할 수 없었던 화려한 미술과 특수효과가 놀라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아무래도 1980년판의 배우들보다 못한 느낌이. 물론 개취. (디즈니)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에미상을 휩쓴 쇼군, 1980 vs 2024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에서 <리플리>까지, 이미 두 차례의 굵직한 영화로 친숙해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이번엔 흑백 드라마로 만들었다. 왜 하필 흑백인가, 왜 하필 이번 주인공은 왜 이렇게 늙고 못생겼나 싶기도 하지만 단 한회만 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사기에는 별 소질 없는 리플리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서사. 1950 혹은 60년대 이탈리아 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도 일품. 2024년의 드라마로 단 한편을 찍으라면 여기에 투표할 것 같다. (넷플릭스)
리플리, 흑백 영상이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극악여왕
한국에도 여자 레슬링이란 종목이 있기는 했지만, 일본만큼 뭔가 제대로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 드라마는 1980년대 초, 일세를 풍미했던 악역 전문 레슬러에 초점을 맞춘다. <극악여왕>을 먼저 보고 <정년이>를 보게 되니 어찌나 그 정서가 비슷한지. '그리 팬시하지 않았던 과거의 유행을 오늘날의 시선에 맞춰 팬시하게 바꿔놓은 무대'라는게 2024년의 트렌드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나 공들여 찍은 액션 신이 일품인 반면, 그렇게 공들여 찍은 장면을 차마 편집할 수 없어 너무 길어진 액션신이 단점이기도 한 묘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강추. 개인적으론 오랜만에 보게 된 카라타 에리카도 반갑기 그지없네. (넷플릭스)
극악여왕, 과거를 살려내되 오늘날의 감각으로.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외교관2
1편을 추천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히려 2편에서 이야기가 더 진화했다. 워싱턴의 정치 구도 속에서, 직업 외교관이면서 영국 전문가인 남편을 제치고 주영 미국 대사가 된 주인공.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이라는 '영원한 같은 편'이면서 '어딘가 그래도 낯선' 나라를 맡아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일품이다. 물론 드라마인 만큼 이 안에서 벌어지는 내용을 실제라고 오해해선 안되겠지만, 충분히 몰입할 만한 전문성이 담긴 대본과, 그걸 소화해 내는 배우들에 대한 존경이 앞선다. 특히 주인공 케리 러셀의 캐릭터 창조가 압권이고, 루퍼스 시웰을 비롯한 영국 배우들이 탄탄하다. (넷플릭스)
와이어트 어프와 카우보이 전쟁
미국 서부의 전설 와이어트 어프는 유명한 'OK목장의 결투' 사건으로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총잡이가 되는데, 사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이 결투로 악을 물리친 보안관은 오히려 공권력으로 시민을 압박한 악당으로 몰리고, 그 정서의 배경에는 남북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지역감정이 있고, 대륙을 철도로 관통하려는 자본가들의 동기가 있다.
거의 정석적인 선과 악 대결 스토리로만 알려졌던 이야기에서 이런 중층적인 분석이 나오다니.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오가는 형식이 너무나 적절했던 걸작. (넷플릭스)
와이어트 어프, OK 목장은 시작이었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슬로 호시스
영국 MI5에는 007만 있는게 아니다. 거기서 일 못하는 걸로 찍힌 요원들은 시내 슬럼가의 허술한 사무실에서, 도저히 '본사'가 처리할 수 없는 허드렛일들을 수행하게 된다(설마 실제로 이런 건 아니겠지). 그 부서로 가 있는 루저들을 '본사'에서는 슬로 호시스, 즉 느린 말이라고 부른다.
그 느린 말들의 보스가 게리 올드먼. 물론 이게 드라마다 보니 너무나 당연히, 그 느린 말들이 수트를 빼입은 본사 요원들이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결해 낸다. 왜? 리더가 너무나 유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느린 말들이 정말로 무능하다기 보다는 너무나 개성이 강하다 보니 본사의 딱딱한 관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거였기 때문에. 긴 말이 필요 없다. 문제는 한번 발을 들이면 시즌5까지 도저히 발을 뺄수 없다는 것. 역시 만두는 중국에서, 소프라노는 발트해 연안에서, 그리고 스파이 드라마는 영국에서 찾아야 제대로다. (애플티비)
가족계획
지난해의 <소년시대>에 이어 쿠팡도 연말에 한칼을 보여줬다. 김곡/김선 콤비의 새 작품.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두 10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인데 - 사실 진짜 가족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 각 개인의 개인기가 어지간한 나라 하나는 말아먹을만큼 무시무시하다. 당연히 조용히 살고 싶은 가족인데, 하필 정착한 지역에도 만만찮은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다. 정의구현 같은 걸 하고 싶은게 아닌데 강제로 정의구현을 하게 되는 이야기야말로 이 시대의 정서.
작품 특성상 잔혹한 장면이 적잖게 등장하지만, 그만치 웃긴다. 올해 가장 시원한 드라마. 탄산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 (쿠팡)
그리고 그밖에 꼭 언급해야 할 드라마들
중간에 흐름이 좀 요상했다는 느낌이 있지만 역시 <정년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아직 안 끝나 뭐라 할 수 없지만 <옥씨부인전>도 그 줄에 충분히 들어설만 한 작품.
넷플릭스 드라마로는 위에 든 세 편 외에는 사실 취향인 작품이 없었고, <삼체>가 볼만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추천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시즌2는 없을테니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으시는게 좋을지도.
넷플릭스가 양으로 민다면 애플티비는 질로 앞선다는 세평이 있는데, 물론 개인적인 취향으로 애플티비는 너무 무거운 작품이 많다는 게 약점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테드 라소 3>(이 얘기를 이제 하는 걸 보면 애플티비를 한동안 외면했다는 걸 눈치채실듯)는 역시 걸작이었고, 원제가 <Shrink> 인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가 딱 취향이었다. 물론 케이트 블랜칫의 <디스클레이머>도 딱 취향은 아니었지만 볼만했다.
(아마존 프라임은 2025년쯤에나 한번 다시 살려 볼 생각)
그리고 드라마 아닌 시리즈들도 한번 언급하자면,
더 커뮤니티
이런 소재로 이런 신선한 리얼리티 쇼를 만들 수 있다니. 이 쇼를 아직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길게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주 시민의 자격이 없다. 벤자민 화이팅.
곽튜브의 기사식당
왜 그렇게 여행 프로그램이 많은데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적을까. 역시 이 시대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정성'을 설명해주는 교과서.
흑백요리사
설명이 필요 없는 2024년의 빅 콘텐트. 물론 이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외식업계나 고급 레스토랑업계가 살아날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좀 과했지만,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던 프로그램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흑백요리사, 콜로세움을 허물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내려 고민하시는 분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1년 동안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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