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밀회'가 방송되기 전, 방송을 예고하는 기사에는 허튼 악플들이 많이 달렸습니다. 이모와 조카 같다느니, 저질스러운 불륜 드라마는 공해라느니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딱 첫주 방송이 나간 뒤부터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싹 사라졌습니다.

 

한국 방송시장에서는 매주 20여편의 드라마가 방송됩니다. 개중에는 훌륭한 것도 쓰레기 같은 것도 다 있습니다. 하지만 '밀회'를 단 한 회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물건이든 직접 써 보면 대개 품질이 드러납니다. 흔한 두루마리 휴지가 같은 길이라도 처음부터 세 겹인 휴지가 있고, 가격은 싸지만 홑겹이라 몇번을 겹쳐 써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밀도가 다르죠. '밀회'도 그렇습니다. 압축도가 다른 드라마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밀회'를 본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시간이 짧게 느껴지냐" "앞부분 한 20분 못봤는데 흐름을 못 따라갈 것 같다. 왜 이리 진행이 빠르냐"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허투루 버리는 시간, 잡담으로 시간만 늘려 놓은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도 있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사에 군더더기 설명이 없고,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하듯 '피차간에 다 아는 얘기는 생략하고'라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면서' 보지 않으면 안되고, 그래서 똑같은 70분 드라마라도 훨씬 짧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감독의 자존심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냥 삽화처럼 지나가는 장면도 나중에 보면 아, 그래서 저 장면이 들어갔고, 저 대목에서 저 사람이 그 말을 했구나 하는 것이 깔려 있는 드라마입니다. 제작비가 더 비싼 드라마 중에는 조연급까지도 시청자들이 알만한 배우들로 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만, 안판석표 드라마에는 허투루 나오는 조연들 중에도 어색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시청자들이 몰라서 그렇지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역할로 나오는 분들도 대개는 연극 경력이 20년 이상 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눈썰미가 좋은 분들은 '아내의 자격'이나 '하얀 거탑' 때 지나가는 역으로 보였던 배우들이 계속 눈에 띄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검증된 배우들은 계속 쓴다...는 것 역시 안판석 표 드라마의 특징이죠. 예를 들어 '아내의 자격'에 연변 아줌마로 나왔던 연극배우 길해연이 '밀회'에는 역술가 겸 투자전문가로 나오고, '아내의 자격'에서 김희애 동생 역이었던 장소연은 이번에도 김희애의 부하 직원으로 나옵니다.)

 

 

 

 

 

드라마 구조가 보여주는 세계는 무섭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고액연봉의 기획실장이지만 혜원(김희애)의 삶은 칼날을 밟고 산다, 혹은 담장 위를 걷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나날입니다. 4부에서 김희애가 스스로를 지칭한 '3중 첩자'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김희애는 최종 보스인 서회장(김용건), 회장의 딸 영우(김혜은), 회장의 후처 성숙(심혜진)의 딱 중간에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능했다면 애저녁에 눈밖에 나 버려졌을 겁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에 붙었다면 그 역시 세 사람이 벌이는 신경전 속에서 녹아 버렸겠죠.

 

세 사람 모두 혜원에게는 은근히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다른 사람의 상황을 묻습니다. 말이 '3중 첩자'지 여기서 만약 다른 쪽의 기밀을 누설해 준다면 그날로 역시 버려지는 몸이 될 겁니다. 세 사람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저쪽 얘기를 한다는 것은 저쪽에서도 여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테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4회에 나온 서회장과 혜원의 대화는 그야말로 백전노장, 산전수전 다 겪은 여우와 여우의 대결입니다.

 

 

 

 

서회장: 뭣보다 성숙이가 널 안 내놓겠지.

혜원: (웃음)

서회장: 한 잔 해라.

혜원: 운전 땜에.

서회장: 그 밑에 있으믄 평생 실장일텐데.

혜원: 평생이믄 고맙죠. 직함이야 어찌됐든.

서회장: 한성숙이는 젖두 크구, 다 좋은데 딴주머니가 너무 커져버렸어.

혜원: (민망하지만 미소 지우지 않고,시선도 돌리지 않는다)

서회장: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앉혀 놨다.

혜원: 어떡하죠, 회장님? 제 원칙대루라면, 지금 그 말씀 이사장님께 보고 해야 하는데,

서회장: 허허 참, 이거, 니가 진짜 큰 여우다, 나한테 협박을 다 하구.

혜원: 죄송합니다.

 

 

이런 세계에서 버티는 혜원도 대단하지만, 어쨌든 힘을 가진 사람들은 혜원이 아니라 이들 셋입니다. 셋 중 어느 하나라도 거스르는 날이 혜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버티기 힘든 상황이 시작되는 날인 거죠. 이런 상황에서 지혜를 발휘해 살아남고, 회장을 위해 설렁탕 집의 음식 나르는 아줌마까지 섭외하는 혜원. 영우에게는 입만 열면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것이 어쩌 보면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유명 음대를 나와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왕년의 피아노 수재, 선재(유아인)의 눈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호화 스펙에다 다른 세상에 살 것 같은 혜원이지만 실제로는 적잖은 대가를 치르고 있습다. 잔혹하고 무서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앨리스가 전사로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모욕과 굴욕을 다 참고, 본래 갖고 있던 도덕적 원칙을 다 숙여 입시 비리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본래 도덕이라곤 모르는 듯한 재벌가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남은 혜원. 그 대가로 누리고 있는 것은 유명 음대 교수 부인이며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 만약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위협하는 일이 닥치면 혜원은 가차없이 그 싹을 잘라 버릴 인물입니다.

 

 

 

 

그런 혜원이 과연, 가진 것을 모두 내려 놓으면서 스무살 어린,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선재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려 할까요. 아직까지는 자신의 애정을 다른 감정, 즉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묻혀 버릴 선재의 재능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애써 속이며 행동하고 있지만, 드라마가 드라마가 되려면 그 감정이 곧 드러나고야 말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드러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정성주 작가의 거침없는 필로를 생각하면 지레 겁이 납니다. 혜원이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혜원을 여신으로 생각하는 선재가 혜원의 삶의 참 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혜원의 껍데기 남편 준형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엇을 기대하든, 아마도 시청자들은 그 기대보다 훨씬 적나라한 현실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부터 은근히 두려움이 앞서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일 선물로 받은 16개의 초콜릿 가운데 벌써 네개나 포장지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물론 기획 단게에서 20부로 끝낼 수도 있다는 검토가 있었으니 기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라흐마니노프. 보컬리제. 유자 왕의 연주입니다. ('밀회'에 나올 곡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728x90

[밀회]에는 드라마 성격상 수많은 피아노 곡들이 등장합니다.

 

클래식의 세계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아무리 좋은 곡도 어떤 상황에서 듣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아침에 들어 좋은 곡이 있고, 전날 밤에 그렇게 좋았던 곡이 다음날 눈 뜨고 들으면 대체 내가 왜 이런 곡을 좋다고 했는지 이상할 때도 있죠.

 

아무래도 영상과 결합된 곡들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온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나 '쇼생크 탈출'에 나온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2중창'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분들이 '밀회'에 나온 주옥같은 피아노 곡들을 기억하실 듯 합니다.

 

 

 

전체적으로 선재의 천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템포가 빠르고 높은 수준의 기교가 필요한 곡들이 많이 선곡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들린듯 건반 위를 달리는 번개같은 손'이 확실히 더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겠죠.

 

가장 먼저 알려진 곡은 이미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저 곡 제목이 뭐냐"는 말을 들었던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아(여기서 네 손은 four hands 입니다. your hands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두 명의 호흡이 잘 맞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 더 매력적인 곡입니다. 이 곡은 앞으로도 '밀회'의 주된 테마처럼 자주 쓰일 예정입니다. 선재와 혜원이 함께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많은 것을 예고해 준다고 봐야겠죠.

 

 

 

의외로 남녀가 함께 연주한 버전은 많지 않아서 파울 바두라-스코다와 요르그 데무스 듀오.

 

그 전. '밀회' 1회에서 준형(박혁권)이 '나천재'라는 아이디로 선재(유아인)가 올린 영상을 보는 장면에 나온 곡은 바르톡의 피아노 모음곡(Op.14) 중 3번입니다. 준형이 "미친놈. 피아노로 개그하나"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장면에 나오는 곡이죠.

 

 

 

 

2부에선 꽤 여러 곡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혜원(김희애)이 선재에게 "너 왜 평균율 칠때 페달 안 써?"라고 묻는 곡은 유명한 J.S.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아곡집 중 1번 전주곡(BWV 846) 입니다.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도 사색에 잠길 수 있게 한다는 곡이죠.

 

이 분야에서 신화적인 존재인 글렌 굴드 버전입니다.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할 때에는 이 굴드의 연주처럼 대개 페달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혜원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선재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이유인지를 물은 것이죠. 선재는 "왠지 악보에 그렇게 하라고 써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역시 혜원이 선재의 천재성을 파악하는 대목입니다. 선재가 '배우지 않고도' 작곡자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 차리는 것이죠.

 

 

그 다음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Appassionata)' 3악장.

 

"열정 3악장 다시 해봐. 아니다. 코다부터."

"저, 틀렸나요?"

"아니. 다시 듣고 싶어서."

 

혜원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다리 위에서 미친듯이 난간을 건반 삼아 두드리는 선재의 모습. 바로 그 부분입니다.

 

 

 

 

코다(Coda)는 소나타 형식의 종결부를 뜻합니다.

 

요즘 상한가인 랑랑이 연주하는 '열정' 3악장. 선재의 코다 부분은 위 영상에서 7분10초 정도 되는 부분에서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열정 3악장의 메인 테마가 계속 변주되다가, 한 순간에 새로운 주제가 제시되면서 폭풍처럼 몰아치는(물론 앞부분도 강렬합니다만, 거기서 한번 더 '강렬함'이 추가됩니다)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물론 '열정'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고뇌에 가득 찬 1악장 부터 순서대로 듣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합니다. 이제는 지휘자로 더 유명하지만 다니엘 바렌보임의 손은 아직 녹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제목만 나온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Wanderer Fantasie'. 입시 곡으로 뭘 치겠느냐는 준형과 혜원의 질문에 선재가 선택한 곡입니다.

 

일세를 풍미한 천재 예프게니 키신의 연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선재가 꿈을 이뤘을 때 가질 수 있을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한 영상.

 

김선욱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협연은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입니다.

 

 

제목이 그래서가 아니고, 그야말로 모든 피아노 곡들 가운데 황제의 자리라고 봐도 좋을 듯한 곡이죠.

 

만석을 이룬 대형 콘서트 홀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함께 '황제'를 연주하는 모습은 모든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꿈이기도 할 겁니다. '밀회'에서는 1회 음악제 장면에서 조인서(박종훈) 교수가 직접 지휘를 겸해 연주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다양한 곡들의 연주 연기를 위해 연기자들은 악보를 외우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준의 연주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손가락과 연주가 거의 일치하는 수준의 숙달된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내 드라마나 영화 속 연주 장면 중에서는 비교할 만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일단 대략 3부까지 등장하는 중요한 곡들을 훑어봤습니다. 뒤로 갈수록 더 다양한 곡들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밀회'를 즐기는 좋은 방법, 음악과 함께 즐기는 법입니다.

 

 

728x90

[밀회]

 

소문이 무성했던 화제의 [밀회] 1회가 방송됐습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얘기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은 없습니다. 대본을 아무리 읽어보고 잘 아는 배우들이 나와도, 편집을 마치고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기 전엔 그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가 될 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던 '밀회'. 순산이었습니다.

 

 

 

 

'밀회' 첫회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설명에 소요됐습니다. 일단 인물관계도는 이렇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본질적으로 혜원(김희애)-선재(유아인)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가 한복판에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1회를 제대로 보신 분이라면, 그 주위를 둘러싼 인물들이 아직 살짝 감춰놓고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 금세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장 흥미로운 관계는 혜원을 중심으로 한 성숙(심혜진)과 영우(김혜은)의 관계입니다. 혜원은 예고 동창인 영우와 명목상 친구로 되어 있지만 재벌 회장의 딸이자 자신의 고용주 뻘인 영우의 시녀 역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혜원은 연봉 1억인 '서한예술재단 기획실장' 자리에 그 시녀 역할까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회장의 후처인 성숙이 있습니다. 교양미넘치는 포장에도 불구하고 고급 룸살롱의 마담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영우로부터 절대 계모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속을 차리려는 야심과 계략이 가슴에 가득하고, 총명하고 성실한 혜원을 자기 사람으로 곁에 두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성숙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건 자신을 '한마담'이라고 부르는 영우의 목소리. 그 한마디에 성숙은 애써 지켜 온 교양미의 허울을 벗고 영우의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암늑대가 되어 버립니다. (1회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화장실 격투 신;;)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혜원의 '뺨 맞는 신'은 바로 이런 갈등이 표출된 결과입니다.

 

 

 

             

 

 

새파랗게 어린 남자 모델을 데리고 오피스텔에서 잠든 영우를 깨우러 간 혜원. 그 혜원이 "하려면 진짜 사랑을 하든가"라고 쓴소리를 하자 영우는 다짜고짜 뺨을 갈기며 쏟아붓습니다. "기집애야, 너는 진짜야? 너 정말 강준형 사랑해서 바람 안 펴? 니 남편 허당인거 누가 몰라?"

 

그리고 드라마는 서한예술재단이 운영하는 서한음대의 민학장(김창완)과 혜원의 남편인 교수 준형(박혁권)을 보여줍니다. 이 사회의 맨 꼭대기에서 여러 혜택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그리 향기롭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음을, 그리고 이 드라마가 그 군상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를 보여줄 것이라는 예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한때 기획 단계에서 이 드라마는 '음악판 하얀 거탑' 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얀 거탑'이 한국 의학계의 후진성과 어두운 단면을 보여줬다면 '밀회'는 한국 고전음악계의 병폐와 환부를 백일하게 드러낼 겁니다.

 

 

 

제법 긴 1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우연히 서한재단 아트센터의 공연 날, 택배 물건을 갖고 현장에 도착한 선재가 무대 뒤에서 커튼 너머로 혜원 일행을 바라보는 지점입니다. 협연을 앞둔 조인서 교수(박종훈)와 민우(신지호)가 피아노를 조율하며 혜원과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선재에게는 감히 꿈꿀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이 장면을 트친 하나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재능이 있어도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청년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며 촉촉하고 몽환적이다.

근데 심지어 그게 유아인이란 거지." (@hsjeong)

 

더 이상 적절할 수 없습니다.

 

 

 

숨가쁘게 달린 1회는 사전 공개 영상에서 드러났던 장면, 즉 혜원이 선재를 불러 피아노 실력을 테스트 해 보는 장면 바로 앞에서 끝났습니다.

 

이 예고에 대한 내용은 이쪽: 밀회, 보는 이를 압도하는 20분 http://fivecard.joins.com/1240

 

그러니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 두 주인공이 만난 것이 1회 끝나기 3분 전인 걸 보면 - 사실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머잖아 두 사람의 관계에선 불꽃이 튈 겁니다.

 

드라마가 나오기도 전에 설정만으로 이 드라마를 싸구려 불륜 드라마 취급했던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1회를 보라'는 것 뿐입니다.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수준으로 이 드라마와 견줄 만한 작품은 올해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게 바로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있게.

 

혹시 1회를 보실 기회를 놓친 분들, 여기서 1회를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 가장 다행인 건, '이제 겨우 1회가 방송됐을 뿐'이란 겁니다.

아직도 15회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만치 더 즐기실 수 있단 얘기죠.

 

P.S. '베토벤 바이러스' 까지만 해도 연주자의 손이 흘러나오는 음악과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누가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느냐'는 게 일반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밀회'는 다릅니다. 진짜 피아니스트들인 박종훈, 신지호는 물론이고 김희애와 유아인도 정확하게 건반을 짚습니다.

사실 이 정도는 '밀회'가 얼마나 공들여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작은 예일 뿐입니다.

두고 보시면 더 놀랄 일이 많습니다.^^

 

 

 

728x90

2014년 3월12일. JTBC 드라마 '밀회' 제작발표회가 열렸습니다.

 

김희애-유아인 주연, '아내의 자격'의 안판석 감독, 정성주 작가의 재회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화제가 된 드라마였습니다만, 사실 어떤 드라마가 나올 지는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습니다. 물론 일찌감치 대본을 읽어 보고 '이건 아마도 올해 최고의 드라마가 될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만, 대본과 정작 만들어진 드라마는 또 다른 법이거든요.

 

그리고 제작발표회. 본래 JTBC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는 1회를 모두 보여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20분 가량의 부분만이 먼저 공개됐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당초 제작진은 '하이라이트'를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만, 만들어진 영상을 보니 하이라이트가 아니더군요. 일반적으로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여기저기서 뽑은, 시청자들이 보기에 극적인 장면들을 편집한 영상을 말하는데, 이날 공개된 영상은 드라마 한 중간의 20분 정도를 통으로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이 드라마 앞부분의 하이라이트가 되기는 합니다. 일단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선재(유아인)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피아노 천재입니다. 어려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제대로 배운 적도, 누가 지도해 준 적도 없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피아노를 '가지고 놀아서' 기적적인 성취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택배 아르바이트.

 

혜원(김희애)은 재벌그룹에서 운영하는 예술재단의 기획실장. 재단 일은 물론이고 회장 사모님인 재단 이사장(심혜진)의 비서에서부터 재단 이사이자 동갑내기인 회장 딸(김혜은)의 뒤치닥거리까지 1인3역을 완벽하게 해 내는 슈퍼 우먼이지만 한때는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주자의 꿈을 접었지만, 지금도 음악인의 재능을 판별하는 '귀'는 국내 1인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 영상 바로 앞에 있었던 일: 혜원의 재단에서 주관하는 연주회 날. 우연히 그 공연장에 택배 일로 갔던 선재는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의 유혹에 빠져 놓여 있던 악보를 연주해 버립니다. 당연히 예정돼 있던 연주자가 리허설을 하는 걸로 알았던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자 경악합니다.

 

CCTV를 통해 택배 옷을 입은 청년이 피아노를 치는 걸 발견한 혜원은 선재를 찾아내 재능을 테스트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보신 영상 내용의 전개가 이어집니다.

 

 

 

 

 

사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두 사람이 피아노를 치는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간간이 나오는 대사를 통해 두 사람의 캐릭터가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정말 정성주 작가의 내공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쌀쌀맞음을 가장한 혜원의 관심과 놀라움, 처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선재의 순수함과 진지함.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대사보다 뜨거운 교감이 시청자에게 전달됩니다. 대본의 완벽성이 전혀 손상 없이 보는 이에게 이어지는 안판석 감독의 연출력이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 영상을 본 어떤 사람은 '어지간한 베드신보다 에로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의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짧은 연주를 통해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의 대화보다 더 깊은 교감을 나누고, 혜원은 선재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연주 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보는 이들이 새삼 느끼게 됩니다. 뭐랄까요, 영상과 음악과 두 배우의 연기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마술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밀회'는 남편이 있는 40대 커리어 우먼과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스무살 청년의 사랑이란 충격적인 설정 때문에 알려졌지만 드라마의 도입부에선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재의 발견되지 못한 재능, 혜원의 불행한 결혼생활, 예술계의 권력인 후원자와 음악대학, 예술재단을 둘러싼 상류층의 부덕함과 부조리가 시청자의 눈길을 잡는 드라마입니다. 처음 선재를 발견한 혜원의 눈은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기쁨과 자기 표현에 능하지 못한 소년 선재를 향한 귀여움으로 가득합니다.

 

아무튼 20분 가량의 드라마 발췌본을 보고 난 부작용은 '밀회' 본편이 너무 기다려진다는 겁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하루빨리 3월17일이 오길 바랍니다.

 

 

 

 

P.S.1.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곡은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입니다. 남녀가 같이 연주하는 버전을 찾다가 마르타 아르게리히와 에두아르도 델가도의 버전을 골랐습니다. 이 곡도 이제 유명해질 듯.

 

)

 

 

 

P.S. 2. 위 영상을 보시다 보면 특이하게 생긴 스피커가 화면 한켠에 등장합니다. 바로 저 왼쪽 끝 아래 있는 물건.

 

 

저것이 바로 유명한 쿠르베 스피커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http://www.courbeaudio.com/

 

 

 

728x90

[우리가 사랑할수 있을까]라는 제목은 누가 들어도 너무 깁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우사수]라고 불릴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2012년 연말부터 2013년 초까지 JTBC에서는 '우리가 결혼할수 있을까' 라는 드라마가 방송됐습니다(당연히 '우결수'라는 제목으로 불렸죠). 이 드라마는 김윤철 PD와 하명희 작가가 호흡을 맞췄고, 결혼을 앞둔 두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결혼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안과 기대, 좌절과 화해를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성준과 정소민이 사랑스런 젊은 커플로 등장했고, 정소민의 '세상 물정을 다 아는' 닳고 닳은 엄마로 이미숙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약 1년만에 김윤철 PD는 '우리가 사랑할수 있을까'라는 또 한편의 여자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우사수'는 MBC TV의 '기황후', KBS 2TV '총리와 나', SBS TV '따뜻한 말한마디' 와 같은 시간에 방송되는 월화드라마입니다. 묘하게도 '우사수'의 전작이라 할 수 있는 '우결수'를 집필했던 하명희 작가가 '따뜻한 말한마디'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게 참 묘한 운명을 느끼게 합니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응답하라 1994' 와 같은 궤도에서 출발합니다. 드라마 한 편을 구상하고 만드는 데 빨라도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니, '응답하라 1994'가 종영하고 바로 이 드라마가 시작되는 건 사실 우연입니다(제작발표회에서도 관련 질문이 나왔는데 김윤철 PD는 안타깝게도 '우사수'의 준비 때문에 '응사'를 한 회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1995년, 다같이 지긋지긋한 고3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세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잠시 삽화로 보이는 2002년. 정완(유진)은 만삭의 임산부, 선미(김유미)는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 그리고 지현(최정윤)은 원숙한 주부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20대인 세 친구는 열심히 '대~한민국'을 외치며 한국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재. 서른 아홉 동갑내기엔 세 친구의 위치는 무척이나 달라져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던 정완은 남편과 헤어져 홀어머니와 함께 아들 태극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하는 선미는 잘 나가는 골드미스. 지현은 준재벌급의 남편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셋 모두 그늘이 있습니다. 정완은 생활고 때문에 마트에서 알바를 해야 하는 처지. 선미는 어느새 동년배 남자들에게 자신이 '늙은 여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현은 결혼생활 10년이 넘었는데도 어려운 형편의 친정 때문에 여전히 시모에게 가정부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찍 낳은 딸 세라는 어느새 무서운 사춘기를 겪고 있습니다.

 

 

('빵꾸똥꾸' 진지희가 어느새 성장해 10대 역으로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사수' 1회는 1995년에서부터 이들 세 단짝 친구의 현주소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세 여자 주변에 포진된 남자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완은 영화사 대표 도영(김성수)와 젊은 나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 경수(엄태웅)을 만납니다. 동시에 도영은 지현의 첫사랑이기도 하고, 선미 역시 경수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선미에겐 진심을 고백하는 한참 연하의 부하 직원 윤석(박민우)이 있지만, 선미가 보기엔 정말 철딱서니 없는 사내아이일 뿐.

 

과연 이 남자들이 서른 아홉이란 나이의 여주인공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의 도입부에서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입시의 중압감에서 해방된 열 아홉 나이의 세 친구가 일제히 미장원으로 달려가 한껏 헤어스타일을 고치고, 귀를 뚫습니다. 이걸 통해 '어른이 됐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죠. 성년식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나란히 귀를 뚫은 세 친구가 20년 동안 우여곡절을 - 대학 졸업반이 될 무렵 IMF를 겪고, 취업난으로 고민의 나날을 보내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해외 연수가 보편화되기도 하고(물론 졸업 연도를 늦추려는 시도와 함께), 대학 운동권이 총학생회에서 배제되기도 하고,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를 경험해 보기도 하고, 2002년의 대축제로 20대의 끝자락을 장식해 보기도 하고, 그리고서 이제 중년의 문턱에 와 있는 세 친구.

 

그런 그들의 시작을 '귀를 뚫는다'는 행위로 표현한 것. 매우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실 세 배우 모두 서른 아홉이란 나이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3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나이.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실제 나이보다 위인 배역은 거의 맡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캐스팅이지만 선공개된 '우사수' 1회를 봐선 이들 중 누구도 연기의 깊이가 부족해 애를 먹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1회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누가 뭐래도 '여자를 가장 잘 아는 연출'로 불리는 김윤철 PD의 늘어지지 않는 속도감. 따발총같이 쏟아지는 대사가 아닌데도 지루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빠른 전개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합니다.

 

 

 

39라는 숫자를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노래는 퀸의 '39'입니다. 물론 나이로 서른 아홉이 아니라 1939년을 담고 있는 노래지만, 그래도 흘러간 좋았던 날들을 돌이켜보는 데서 이 드라마, '우사수'와도 만나는 부분이 느껴집니다.

 

'우사수'와 관련해선 서른 아홉이라는 나이가 여자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해 '39 드림 프로젝트'라는 이벤트가 진행중입니다. 이쪽도 들러 보셔도 좋습니다.

 

여자 나이 서른 아홉, 공돈 1000만원이 생기면 뭘 하지? http://fivecard.joins.com/1209

 

 

 

 

P.S. '우결수'도 '우결수'지만 '우리가 사랑할수 있을까'의 시놉시스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났던 드라마는 2004년 방송됐던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극본 김인영 연출 권석장)'였습니다. 당시엔 명세빈 이태란 변정수가 사회생활과 연애 사이에서 고민하는 30대 초반의 세 친구로 나와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샀던 작품이었죠.

 

'우사수'는 '응답하라 1994' 세대의 현재 이야기인 동시에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10년 뒤 이야기라면 딱 맞을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 보실만 하지 않을까요.  

 

 

 

728x90

여자 나이 서른 아홉. 만약 누가 '너 자신만을 위해서 쓰라'며 돈 1000만원을 준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는 1월6일부터 방송되는 드라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준비와 함께 '39 드림 프로젝트'라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39'라는 숫자는 서른 아홉이라는 나이를 뜻합니다. 이 나이는 드라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핵심입니다.

 

과연 서른 아홉이라는 나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정말 마흔이 되면, 그때부터의 인생은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할까요? 서른 아홉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그 이후의 인생을 크게 좌우할까요? 예전만큼 '40'이란 숫자의 의미가 크지는 않을 듯 합니다만, 여전히 그 나이를 맞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듯 합니다.

 

그 나이를 맞기 전, '앞으로의 인생을 위한 준비 비용이야'라면서 누군가 1000만원을 준다면, 그리고 가족이나 남편이나 애인이나 아이들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다면, 그 돈은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1. '우결수'에서 '우사수'까지. JTBC 미니시리즈의 진화

 

'우사수'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준말, 줄인 제목입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이 '우사수'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지난 연초 JTBC에서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줄여서 '우결수')라는 드라마를 방송해 꽤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미숙이 극성스런 엄마로, 이미숙의 딸로 정소민이, 정소민과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로 성준이 출연했던 드라마입니다.

 

여교사에 예쁜 얼굴로 경쟁력을 갖춘 신붓감인 정소민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남친 성준과 결혼하려 하지만, '인생에 한번 하는 결혼,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면 안된다'는 친정 엄마의 소신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이 서슬에 보자 보자 하던 성준의 엄마 선우은숙이 발끈, 결혼은 산으로 가고 두 사람은 거의 헤어질 위기에 놓이죠.

 

결혼을 앞둔 커플의 심리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위 '결혼 한탕주의', 그리고 이들 커플을 둘러싼 다른 세 커플의 각기 다른 사랑만들기가 꽤나 인기를 끌었습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윤철 PD가 연출을 맡았고 당시 무명에 가깝던 하명희 작가는 현재 방송중인 SBS TV 월화드라마 '따뜻한 말한마디'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 김윤철 PD가 새롭게 만드는 드라마가 1월6일부터 JTBC에서 방송됩니다. 제목은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와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로 붙였습니다.

 

 

 

 

 

2. '우사수'는 어떤 드라마?

 

'우결수'가 남녀간의 연애 못잖게 여자들끼리의 우정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라는 걸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우사수'는 그렇게 사이 좋게 지내던 세 여자친구가 서른 아홉 나이를 맞아 각각 이혼녀, 유부녀, 노처녀로 '상태'가 갈린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셋 다 그리 형편이 좋지 못합니다. 애 딸린 이혼녀는 본래 시나리오 작가지만 생활을 위해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전남편이 재결합하자는 줄 착각했다가 김칫국을 마시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유부녀는 씀씀이에 모자람이 없지만 엄한 시어머니와 다소 마마보이인 남편 때문에 남몰래 폭음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처녀. 브리짓 존스처럼 뚱뚱하지도 않고, 스타일도 좋고 수입도 좋은 소위 골드미스지만,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은 달랠 길이 없습니다.

 

서른 아홉인 세 여자의 "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꼬인 걸까..."라는 넊두리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까지가 이 드라마의 주제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요.

 

유진 최정윤 김유미가 각각 이혼녀, 유부녀, 골드미스로 나오고 엄태웅 김성수 박민우가 여자들의 서른아홉을 흔들어 놓을 남자들로 등장합니다.

 

 

 

 

 

3. 39 드림 프로젝트

 

서른 아홉. 남자든 여자든 마흔이 넘으면 대개 중년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젊어 보이고, 아무리 건강해도 마흔이 넘으면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진을 할 것을 권해 옵니다. 특히 암 검사나 위/대장의 내시경 검사가 권장됩니다.

 

이런 나이를 앞두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을, 그리고 '내가 가지 않은 길'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과연 그때 그 판단을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앞으로도 내 인생은 지금과 거의 차이 없이 흘러가게 될까.

 

'우사수' 방송에 즈음해 JTBC는 여자들의 인생에서 서른 아홉이란 나이가 갖는 별스러운 의미에 주목해 한가지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바로 '39 드림 프로젝트' 라는 이벤트입니다.

 

참가자는 대한민국 모든 여성 입니다. 딱 서른 아홉인 분도 있고, 넘은 분, 아직 이 나이를 맞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딱 서른 아홉인 분은, 직관적으로 '지금 내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는 이야기를 써 주시면 됩니다. 이미 서른 아홉을 지나 온 분들은, '그때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런 걸 했어야 했는데'라는 내용을 적어 주십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때 못한 그 일'을 다시 저질러 보시는 겁니다. 아직 서른 아홉을 맞지 않은, 상대적으로 행운아인 분들은 '내가 지금 서른 아홉'이라고 가정하고, 그 전에 꼭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은 일을 적어 주십쇼.

 

 

 

 

단 저희가 선정되신 한 분에게 지원해 드릴 수 있는 돈은 1000만원 입니다. 상당히 큰 돈이지만 아주 많은 돈은 아닙니다. 이 돈으로 저희는 참가하신 여러분께 카페를 차려 드리거나, 좋은 별장을 사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달 정도 인도 전역을 여행하거나, 아프리카에 가서 멀리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바라 보며 아침 커피를 드시게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스키 강습을 받게 해 드릴 수도, 옥스포드에서 영어 연수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상태 괜찮은 중고차나 사람들이 쳐다보는 자전거를 살 수도 있고,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볼 수도 있습니다. 크게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신 성형을 통해 새로운 운명에 도전하시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드실 수 있지만 '버킷 리스트'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위안이라면 이 '39 드림 프로젝트'는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의 재충전 기회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즉시 아래 링크를 눌러 JTBC 홈페이지를 노크하시면 됩니다.

 

http://home.jtbc.co.kr/Event/Event.aspx?prog_id=PR10010275&menu_id=PM10021612&cloc=jtbc|top|top

 

그리고 '우사수'에 나오는 세 여자의 운명에도 계속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P.S. 물론 그 1000만원을 지원받은 분이 그 돈을 어떻게 쓰셨는지는 많은 분들의 관심사가 될 듯 합니다. 어떻게 그 돈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돈을 쓴 뒤로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저희가 어떻게든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728x90

[네 이웃의 아내]

'네 이웃의 아내'는 금기 중의 금기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성경의 10계명 중 아홉번째가 바로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죠.

 

JTBC에서 새로 시작한 월화드라마의 제목이 '네 이웃의 아내'라는 건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른바 '남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이 드라마에서 특이한 점은 그 '남의 아내'가 곧 '나의 아내'라는 점입니다. 아파트에서 한 복도와 안 엘리베이터를 쓰고 있는 앞집. 그 앞집에 마주 보고 사는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남편과 아내를 탐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뭔 막장 불륜 스토리냐 싶기도 하고, 스티븐 킹의 스와핑 단편 같기도 한 얘기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드라마라는 것의 존재 이유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단초를 짚어간다'는 것, 혹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의 단면을 보여주자'는 것이라면, '네 이웃의 아내'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습니다.

 

 

 

 

송하(염정아)는 광고회사의 꽤 유능한 팀장. 종합병원 의사인 남편 선규(김유석)와 겉으로 보기에는 주위의 부러음을 살 만한 전문직 부부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은 그냥 꾸역꾸역 살고 있는 커플. 신선한 자극도 이미 부부생활에선 사라진지 오래. 아직 어린 아들과 딸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대기업 부장인 상식(정준호)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철두철미하고 책임 추궁에 강한 남편.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고 살아온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상식에게 늘 반쯤 기가 죽어 사는 아내 경주(신은경). 남편 앞에선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정도로 순종적이지만 사실은 남편의 밥그릇에 침을 뱉는(위 사진) 비틀린 면을 보여주는 여자입니다.

 

주위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부부들의 모습이지만 이들 사이에선 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일에서의 성공을 향해 악착같이 버티던 송하에게도 어느새 직장이 시들해지고, 병원의 수익 창출에 영 비협조적인 선규는 경영진의 눈밖에 나 위기를 맞습니다.

 

 

 

 

상식 역시 어느 남자에게나 찾아오는 중년의 위기를 슬슬 느끼고 있고, 경주는 과연 두 딸에게 자신이 제대로 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아무튼 별 일 없던 것 같은 안온한 부부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계기는 평범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망 사건. 그것도 남편이 가정불화 끝에 아내를 폭행하고, 달아나던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는 사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살인이라고 부르기엔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 모든 사람이 살인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건 이후 송하는 "인생이란, 부부란 뭘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 사건으로 앞집이 비면서 상식과 경주가 앞집으로 이사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아울러 이 사건을 통해 경주는 상식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더 낮춰 잡게 되죠.

 

 

 

 

그러는 사이 송하와 상식이 광고회사와 광고주 관계로 만나게 되고, 상식과 경주는 앞집 사람으로 얼굴을 마주칩니다. 그러면서 슬슬 이들의 잠들어 있던 과거가 눈을 뜨고, 비밀스러운 관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주변에선 또 다양한 인물들의 인생이 그려집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를 말하고 있는 건 주인공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특히 아파트의 두 주부들입니다. 이름은 따로 없고, 주부1, 주부2라고 표현해야 할 듯한 캐릭터들이지만 비중은 제법 큽니다. 바로 서이숙-김부선 콤비죠.

 

 

 

 

영자 역의 김부선은 왕년의 아매부인으로 잘 알려진 분이지만 서이숙은 많은 분들께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대표적인 배우일 겁니다. 많은 드라마에 상궁이나 동네 아줌마 역 등으로 나오셨죠. 아무튼 이 드라마에서는 최고의 적역을 맡았습니다.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밖에선 아무도 몰라!" 라는 소름끼치는 대사를 말하는.

 

 

 

 

또 김부선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이세창 역시 할 얘깃거리가 많아 보입니다. 한참 연상인 아내와 조용히 잘 살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물밑에 숨은 바람의 제왕.

 

그밖에 송하의 직장 동료인 섹시한 유부녀 지영(윤지민)과 직장 내 넘버1 킹카인 정이사(양진우) 등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 궁금한 캐릭터들이죠.

 

 

 

 

어쨌든 '네 이웃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출발했으니,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속시원히 꿰뚫는 이야기가 나올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해 '아내의 자격'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또 불륜 드라마냐'고 보지도 않고 입방아를 찧었지만, 정작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몸서리치게 리얼한 묘사에 눈길을 빼앗겼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는 '아내의 자격' 처럼 현실보다 더 리얼한 드라마를 표방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대신 이 드라마에는 미스테리가 있고, 코미디가 있습니다. 10년 넘게 산 부부들, 더 이상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없는 부부들의 속내가 여지없이 파헤쳐집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늘 보는 드라마의 늘 보는 그런 결론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드라마가 30여편씩 방송되는 드라마 공화국, 하지만 결말이 궁금해지는 드라마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과연 이들은 어떤 '부부의 진실'에 도달할까요?

 

 

 

 

P.S. '네 이웃의 아내' 홈페이지에서는 현재 드라마 리뷰 이벤트가 진행중입니다.

 

자신의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 리뷰 하나 잘 쓰면 상품이 후두둑. 상품 중에는 명품 프라다 백도 들어 있습니다. 이 기회에 드라마 보고, 한 살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http://home.jtbc.co.kr/Board/Bbs.aspx?prog_id=PR10010260&menu_id=PM10020468&bbs_code=BB10010434

 

 

728x90

[맏이] 여기저기서 '힐링 드라마' '힐링 예능'이 등장한지 오랩니다. 하지만 진짜 '힐링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바로 JTBC 새 주말드라마 '맏이'. 어떤 드라마일까요?

 

타이틀 사진을 보면 어떤 내용일지 대략 짐작하실 만 합니다. 어린 다섯 남매가 부모를 잃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죠. 제목이 '맏이'인 것은 그 성장을 위해 맏언니가 엄마 노릇을 하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한다는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것이구요.

 

그 '맏이'가 14일 처음 방송됐습니다. 그리고 방송 첫날부터 반응이 호평 일색입니다. 한마디로 무공해 청정 드라마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일단 누가 누군지 구별을 해야 드라마 보는 데 도움이 될 듯. 드라마의 중심인 오남매부터 시작합니다.

 

아역 캐스팅은 단연 최강입니다. 얼굴만 봐도 캐릭터가 절로 느껴집니다.

 

 

다섯 남매의 성격까지 뚜렷합니다. 드라마의 핵심인 맏이답게 똑똑하면서도 심지가 굳고 갖은 고생 속에서도 밝고 바른 마음씨를 간직하는 맏딸 영선. 아역 유해정, 어른 역은 윤정희가 연기합니다.

 

둘째 영란은 집안 살림이야 어쨌든 예쁜게 좋고 비싼게 좋은 허영 덩어리. 어느 집안에나 희한하게 둘째 중에 이런 성격이 많은 듯 합니다. 예쁘게 자라지만 그 예쁜 얼굴 때문에 결국 문제를 만듭니다. 아역 박하영, 어른은 조이진.

 

 

 

'난 공부가 제일 싫어요'라고 말하는 세째 영두. 아들이지만 똑똑한 구석도 없고, 야무진 구석도 없는 그런 아이. 아역은 김윤섭, 어른은 강의식. 그저 착한 것 하나 외에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네째 영숙은 말 없이 소심하고, 부모를 잃은 충격 때문에 몽유병까지 생기는 약한 아이입니다. 언니의 도움이 유난히 필요한 동생이죠. 아역 한서진. 어른은 미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막내는 아직 아기 상태에서 못 벗어난 영재. 김예찬 군이 연기합니다. 10여년 뒤라고 해도 아직 아역 상태일 듯.

 

 

 

 

이 다섯 아이들이 아빠(윤동환)와 엄마(문정희) 밑에서 가난하지만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고 어쩔 수 없이 고모를 찾아가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모도 소실 살이에 눈치 보며 사는 처지라는 것. 그 고모네 환경입니다.

 

 

 

고모 은순(진희경)은 동네 갑부 이상남(김병세)의 첩 살이를 하면서, 둘 사이에 아들 종복이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이상남의 본처가 이실(장미희). 둘 사이에는 인호(아역 박재무, 어른 미정)와 지숙(아역 노정의, 어른 오윤아) 남매가 있지만 이실은 누구에게나 냉랭하기만 합니다. 워낙 상남과의 결혼이 원치 않은 결혼이었던데다 결핵이 깊어지며 누구 하나 곁에 가까이 두려 하지 않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실을 어려서부터 짝사랑했던 창래아재(이종원)만이 마음을 기울여 이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정도. 딸인 지숙까지도 '차라리 돌아가시는게 낫겠다'는 속내를 비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 은순의 조카 오남매가 들이닥치면 반가워 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겠죠. 은순 역시 떠맡을 처지가 아니지만 여기 말고는 기댈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사이가 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영선이 친자식들조차 열지 못한 이실의 차가운 마음을 열게 되는 스토리.

 

 

 

 

그리고 한 동네에서 성장하는 영선의 소울메이트 순택네가 있습니다.

 

순택이네는 그래도 양반 끄트머리를 자처하는 집안. 어머니 반촌댁은 일자무식에 떡장수지만 그래도 아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전형적인 어머니입니다.

 

그 아들인 순택(아역 채상우, 어른 재희)은 도내 1등을 차지하는 수재. 부잣집 아들인 인호와 학교에서는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입니다. 당연히 부모의 온갖 기대를 품에 안은 '개천에서 난 용' 캐릭터죠.

 

그 동생인 순금(아역 박지원, 어른 미정)은 오빠와는 달리 공부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마음만은 하늘만큼 넓은 소녀. 눈치도 없고 남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공해 캐릭터입니다. 특히나 아역 박지원 양의 캐스팅은 정말 신의 한수. 단 1회만 봤을 뿐인데도 웃음이 빵빵 터집니다.

 

 

 

'맏이'의 초반은 이 아역들의 눈부신 활약이 신화를 만들어 낼 것 같은 예감.

 

부모 없이 오남매만 남아 갖은 고생 끝에 천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어른이 되어서도 돌봐줄 사람 없어 또 고생하고, 그중에 또 철없이 맏언니 속 썩이는 캐릭터도 있고...

 

이렇게 이야기만 들으면 참 불쌍하고 눈물나고 답답한 이야기일 듯 하지만, 대한민국 원로 작가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김정수 작가는 그리 뻔한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분입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듯 한 구석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어른들을 웃깁니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찡하게 와 닿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전체적인 드라마의 색채는 밝은 녹색입니다.

 

 

 

 

저 또한 농촌 생활 한번 해 본적 없지만, 오가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 정겨울 수가 없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그래, 저 시절엔 다들 저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할 드라마죠. 반면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저 시절엔 저랬나' 싶은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피가 조금 다를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람살이의 모습은 똑같다고나 할까요.

 

또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듣다 보면 이건 금세 우리 삼촌, 우리 고모, 우리 누이의 모습이라고 공감할 만한 디테일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요 인물들만 20여명이 되는 대형 드라마인데도 인물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그냥 흘려 보낼 수 없다는 데서 대 작가의 관록이 느껴집니다.

 

저 불쌍한 아이들이 언제 다 자라서 사람 구실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드라마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눈길을 떼기 힘들게 하는 드라마. 이런 드라마는 참 오랜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728x90

전 세계 대중문화 상품을 살펴보더라도 자국산 TV 드라마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국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인기 콘텐트인 나라는 더욱 적습니다.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역시 미국과 영국입니다.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나 독일의 TV 편성표를 살펴보더라도 미제 드라마, '하우스'나 'CSI'가 프라임 타임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미드'가 영 맥을 못 추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입니다. 자국산 드라마 콘텐트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셜록'이나 '왕좌의 게임' 조차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드라마 강국이 되었을까요. 1980년대 후반부터 인재들이 부단히 이 분야로 모여들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좀 더 나은 콘텐트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한 드라마'를 만든 절대 공로자 중 한 분이 어제 급서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원고 청탁이 와서 급하게 쓴 글입니다.

 

 

 

 

제목: 30년의 도전, 아쉬움 속에 끝맺다.

 

사극의 거장 이병훈PD는 후배 김종학 PD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85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의 '임진왜란' 편을 찍을 때 이야기. 당시 급박한 촬영 일정 때문에 이PD는 한 후배에게 왜군들이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신을 부탁했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엑스트라들 감기 들면 촬영이 어려워지니 신경 써서 찍으라'는 조언까지 했다. 이PD가 자기 신을 마치고 후배 PD의 촬영을 살피러 갔더니 조선 포로 엑스트라들이 맨발에 동저고리 차림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부까지 했는데. 화가 난 이 PD가 후배를 불러 따지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왜병들이 포로를 잡아갈 때 옷이며 신발을 제대로 챙겨서 끌고 갈 것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야 시청자들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라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았다는 이 PD, 당시에도 '저렇게 독하니(?) 좋은 PD가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 입사 10년차인 후배 김종학은 '조선왕조500년'의 '회천문'을 연출했다.

 

 

 



김종학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운명에 맞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문열 원작을 극화한 '영웅시대'와 '황제를 위하여' 는 그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작품이란 평을 들었다. 북한의 현실을 그린 '동토의 왕국' 에선 다큐멘터리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낯선 연극 배우들을 대거 브라운관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김홍신 원작 '인간시장'에선 무명 신인이던 박상원을 기용해 한국형 히어로 드라마의 원형을 제시했다.

 

 


물론 '연출가 김종학'을 정상으로 끌어올린 작품은 단연 1992년작 '여명의 눈동자' 였다. 김성종 원작, 송지나 각색의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 말~한국 전쟁까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대치(최재성), 여옥(채시라), 하림(박상원)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그렸다.

특히 이 시기를 다룬 한국 TV 드라마 중 최초로 이념의 벽을 넘은 작품이라 평가할 만 하다. 마지막 회, 빨치산 대장과 토벌군 장교로 만난 대치와 하림이 “우리의 자리가 언제 바뀌었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화하는 장면은 아직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여운을 남겼다.

 

 

 


이 성공으로 MBC를 떠나 프리랜서가 된 김종학은 1994년 다시 한번 송지나 작가와 호흡을 맞춰 광주 민주화운동과 범죄 조직간의 암투를 그렸다. 제목은 '모래시계'. 최민수 고현정 등 호화 캐스팅이 뒷받침 된 '모래시계'는 60%대 시청률이란 전설로 '귀가시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국 4년째였던 신생 방송사 SBS는 '모래시계'를 통해 비로소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에 들었다고 일컬어진다. 이후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2002년작 '대망' 은 팩션 사극의 새 장을 열었고 2007년, 한류스타 배용준을 앞세운 판타지 블록버스터 '태왕사신기' 는 거대한 규모와 완성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제작사 대표 김종학'은 '연출가 김종학'에 미치지 못했다. '태왕사신기'에 투입된 200억원의 제작비는 당시의 한류 드라마 시장의 매출 규모에 비해 지나친 규모였다.

 

 

 

 

작품에는 엄격했지만 스태프들에겐 너그러웠던 성품도 적자 폭을 늘리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작이 된 2012년작 '신의'는 이민호 김희선 등 한류스타들이 대거 등장한 판타지 드라마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시청률은 저조했고, 막대한 투자는 이번에도 큰 짐이 됐다.

결국 시청자들은 더 이상 '김종학표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됐다. '모래시계' 이후 김종학의 일관된 꿈은 영화 연출이었다. 그는 한동안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작 영화의 제작에 몰두했으나 스스로의 완벽주의 때문에 계획은 자주 미뤄졌다. 그 동안에도 어린이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천계영 원작 '오디션'을 아이돌을 소재로 개작하려는 기획도 진행중이었다. 일찍 정상에 섰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은 도전 정신이야말로 '연출가 김종학'이 한국 방송사에 남긴 진정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끝)

 

 

 

 

 

 

고인의 업적을 다 기술하긴 터무니없이 짧은 분량입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작품들인 만큼 특별히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많은 후배들이 그를 가리켜 '역사를 아는 PD'라고 일컫습니다. 물론 송지나 작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원작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읽어 본 사람들일수록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작의 인물 구성과 사건의 흐름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보다 균형 잡힌 역사관이 가미되면서 일종의 '반공문학'이던 원작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원작의 대치는 그냥 흉폭한 악역이지만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대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북으로 가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림 역시 이념이나 정치적 구도에 대한 고려 없이, 어찌 하다 보니 미군의 군속이 되어 남쪽 편에 서게 되죠.

 

이런 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설정입니다. 그래서 저 윗글에서 소개한 장면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것이죠. (이 드라마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 외에도 '여명의 눈동자'는 한국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수작입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대치와 여옥이 "살아있어야 해! 살아있으면 만나게 돼 있어!"하고 절규하는 장면, 또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밀림을 횡단하던 대치가 뱀을 잡아 씹어먹던 장면 등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거론하려면 날이 새도 모자랄 고인의 업적 중 하나는 탁월한 신인의 발굴입니다. 전혀 경력이 없는 신인을 발굴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신인들 중 하나'를 찍어내 일약 스타로 만들어 내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시장'의 박상원과 '모래시계'의 이정재입니다. 특히 이정재는 '모래시계' 이전에도 활동을 했고, '느낌' 등의 드라마를 통해 나름 꽤 인기를 얻은 청춘스타였습니다. 하지만 '모래시계'에서 말수 적은 보디가드 역할을 하면서 전 국민이 아는 주연급 스타로 승격됐죠.

 

오죽하면 이 역할 이후에 유망 남자 신인을 꾈 때 드라마 제작진이 단골로 하는 말 중에 "모래시계 이정재 같은 역"이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그 외에도 '백야 3.98'에서 심은하의 아역이었던 이은주, 김경아(왕희지)의 아역이던 송혜교, '모래시계'에서 최민수의 아역이었던 김정현이 김종학 감독의 손끝을 통해 발굴됐습니다.

 

 

 

 

'태왕사신기'에서도 이지아와 이필립이 스타덤에 올랐죠(배용준의 아역이던 유승호는 원래 아역 스타였으니 빼겠습니다).

 

 

 

 

아무튼 어느 때든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나면 늘 "이것만 하고 영화 하려고" 하며 웃으시던 감독님. 이제 짐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728x90

지난번 글에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잠시 비교했습니다. 본인은 비명에 가더라도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오르지 않고는 큰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소현세자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아내인 강빈까지 사약을 받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한번 왕위에서 밀려나면 언제 반역의 무리로 몰릴 지 알 수 없는 '밀려난 왕손'의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죠.

 

여기에 하나 더. 그래도 '북벌 정책(비록 실질적으론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하나)'을 시도하며 '기개 있는 왕'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효종에게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바로 형의 자손들에 대한 대접이죠.

 

일부 드라마에선 효종이 소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실상은 그럴만큼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글에 이은 소현세자 2탄입니다. 순서대로 보시려면 여기를 먼저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나     http://fivecard.joins.com/1140

 

 

 

소현세자 (2)

 

1645 218, 백성들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앞다퉈 환영했다. 국가 차원의 경사였지만 이미 심사가 틀어진 왕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공사견문은 인조의 성품에 대해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했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떤지 측량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내성적이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던 인조의 내면엔 세자에 대한 미움이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용 조씨의 역할도 컸다. 조씨 소생의 숭선군은 세자가 귀국하던 1645, 고작 만 여섯살의 어린아이였지만 어쨌든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소용 조씨, 공신 세력의 우려를 대변하는 김자점, 그리고 의심 많은 인조의 성품이 만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423, 세자는 학질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24일과 25침을 맞았다는 기록 한 줄씩만을 남긴 채 26일 사망했다. 침을 놓은 사람은 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어의 이형익이었다.

 

 

 '꽃들의 전쟁'에서 손병호가 연기하고 있는 이형익. 조선왕조실록은 꼭 집어 지목만 하지 않고 있을 뿐, 사실상 이형익의 손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거의 적시하고 있습니다.

 

 

세자의 졸곡제를 다룬 실록 기사에는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온 몸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중략)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사실상 독살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꽃들의 전쟁에서는 김자점(정성모)이 직접 이형익(손병호)에게 세자를 해치게 지시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의에서는 이형익(조덕현)이 다시 이명환(손창민)을 이용해 세자에게 독을 썼다는 설정이다.

 

 

'마의'에서는 그래서 이명환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이형익을 살해한다는 설정입니다. 직접 손을 쓴 것은 한 단계 더 거친 이명환이란 해석.

 

 

이형익은 심지어 소용 조씨의 어머니와 사통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그에게 혐의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언관들이 당장 이형익을 조사하라고 들고 일어났지만 인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수시로 이형익을 불러들여 침과 뜸으로 치료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인조는 62, 서둘러 대신들을 모아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하겠다고 밝혔다. 원칙대로라면 왕위계승의 우선권은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자 인조는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때도 김자점이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앞장섰다.

 

흥미로운 것은 그해 113, 봉림대군의 감기가 낫지 않자 이번에도 의원 이형익이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간했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대군은 가벼운 감기라며 치료를 거절했고, 곧 회복했다. 만약 이 침을 맞았다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해가 바뀌어 1646 1, 인조는 수랏상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나왔다며 진실 규명을 지시했다. 처음부터 소현세자빈 강씨를 용의자로 놓은 수사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강빈은 궁중의 왕따 신세였고, 엄중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독을 반입해 어선에 넣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문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었고, 강빈의 하인들 가운데서 자백이 나왔다.

 

조정 대신들이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중국 조나라 무령왕의 예를 들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맞섰다. 무령왕은 장남을 폐하고 차남을 후계자로 삼았다가 후계 구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은 인물이다. 누가 봐도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인조의 광기는 이미 통제의 범위를 넘어 있었다. 강빈은 사약을 받고, 어린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폐됐다. 그중 둘은 일찍 죽고(그 죽음의 원인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막내 석견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아이가 추노의 그 아기다.

 

 

조나라 무령왕의 고사는 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령왕은 사실 당시 중국 남자의 하의(당시까지는 바지보다 치마에 가까웠던)를 개량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라!"는 개혁 조치를 한 긍정적인 고사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입니다. 당시까지 오랑캐의 옷으로 간주되던 헐렁한 바지를 '말 타고 내리기 편하다'는 이유로 도입해 전국 7웅 중 하위권이던 조나라의 국력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총기가 흐려진 탓인지, 다 자란 장남을 제쳐 놓고 후비가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양위합니다. 대개 이렇게 되면 장남이 정치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수순이지만, 갑자기 장남이 불쌍해진 무령왕은 장남의 영토를 넓혀 조나라를 두개로 쪼개 상속할 궁리까지 합니다. 하지만 후비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격분한 장남은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후비파에 유능한 장군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반란은 가볍게 실패. 장남은 아버지 무령왕의 궁으로 달아납니다. 이미 왕위를 넘겨받은 후비와 어린 아들 쪽에선 장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무령왕은 "내 아들인데 목숨만이라도 보존하게 해 달라"고 오히려 간청하죠.

 

밖에선 잔혹한 결단이 내려집니다. 장군들이 "만약 장남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무령왕을 다치게 하는 날이면 우리는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그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죠. (이건 사실 또 얘기하려면 긴 얘기가 되어 여기선 생략하겠지만 병법의 대가 오자(오기)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의 문을 밖에서 잠그고 아무도 나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한달이 지나 굶어 죽은 무령왕과 장남의 시체가 다 썩어 없어진 뒤에야 문을 열어 통곡을 하며 장사를 지낸 겁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무령왕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은 스스로 후계자를 잘못 고른 결과이니, 인조 자신이 강빈을 죽여야 하는 이유로는 매우 궁색합니다. 그리고 무령왕과 자신을 비교한 것은 소용 조씨 소생의 숭선군을 세자로 봉하겠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만, 결국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시선에선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겠지만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에겐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행여라도 소현세자의 자손이 왕위를 차지하는 날이면 그들 자신은 물론 일가친척의 생명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정함은 효종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홀로 남은 어린 조카 석견을 경안군으로 봉하고 서울로 불러 올렸지만,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회복해주는 것은 딱 잘라 거절했다. 오히려 상소를 올려 강빈의 신원을 촉구한 김홍욱을 잡아다 때려 죽이기도 했다. 아무리 조카가 가엾어도, 그들에게 '역적의 자손'이라는 죄를 씻어 주고 나면 자신의 후손들이 계승할 왕좌가 불안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경안군은 1665년 만 21세로 죽었다. 두 아들을 낳아 후사를 이었으나, 맏손자 밀풍군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했다. 소현세자와 그 후손들에게 조선은 더없이 잔혹한 나라였다. ()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뒤, 세 아들이 남았습니다. 인조가 서둘러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소현세자가 죽은 뒤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각각 1,2,3위가 될 왕손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게 된 이상 효종의 왕위 계승 경쟁자일 뿐입니다. 1647년, 이들은 처음엔 각각 흩어져 귀양을 갔다가 '서로 모여 살게 하라'는 인조의 은혜(?)로 제주도에 모입니다.

 

1648년, 석철이 13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죽고 곧이어 둘째 석린도 숨을 거둡니다. 공식적인 원인은 풍토병. 하지만 인조와 김자점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의혹은 당시에도 일었다고 합니다.

 

석철이 죽기 전 청나라 장수 용골대(병자호란 때 선봉장이었던 당대 청의 대표적인 장군입니다)가 조선 조정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고아가 되어 형편이 딱하다고 하니 내가 데려가 기르면 어떻겠는가."

 

용골대와 소현세자는 심양 시절에 꽤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실록에 남은 기록은 주로 조선을 무시하는 용골대에게 소현세자가 맞서 싸운 내용이지만, 그렇게 자주 대면을 했으니 꽤 교분이 쌓였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인조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이 말은 매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네가 아무리 둘째를 왕으로 세웠다지만, 맏손자는 우리 손에 있다. 네가 삐딱하게 나오면, 언제든지 왕이 될 수 있는 후보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더구나 그 손자가 잔혹하게 부모를 죽인 할아버지를 곱게 볼 리가 없죠. 오죽하면 석철의 죽음을 전하는 실록에 "용골대가 그런 말을 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제 석철이 온전하겠느냐고 걱정했는데 이렇게 죽었다"는 말이 다 나오겠습니까.

(先是, 龍骨大之來也, 以取養石鐵爲言, 人皆謂其必 不保全, 至是卒)

 

 

 

 

 

그 뒤로 왕위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집니다. 숙종의 친위세력은 숙종을 가리켜 '삼종의 혈맥(三宗之脈)'이라고 떠받듭니다. 그러니까 3대가 모두 국왕의 정궁(정식 왕비)으로부터 태어난 왕자들로만 이어진 혈맥이라는 것이죠. 그게 뭐 대단하냐 싶겠지만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세조-단종까지 이어진 초기 4대를 제외하면 정궁 소생의 왕자들로만 왕위가 이어진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효종은 즉위와 함께 아버지의 세력이던 인조 반정 공신들을 싹 청소하고, 북벌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통성을 확보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뒤 3대에 걸쳐 자신의 후손들이 왕 노릇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공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올 수 없도록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가의 자손은 두 가지 면에서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를 지키고 있는 쪽에서 볼 때도 잠재적인 경쟁자요,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음모가 쪽에서는 옹립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입니다.

 

사실 광해군 시절의 능양군(인조)처럼 반란군과 사전에 교감이 있던 경우도 있지만, 뒷날 김자점의 난(?)에 함께 거론된 숭선군이나 소현세자의 증손자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밀풍군의 경우엔 다들 "그들이 일방적으로 옹립하려 한 것일 뿐 직접 관련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숭선군은 살아남았고 밀풍군은 죽음을 당했죠. 이들의 생사는 정말 그때 그때 운에 달렸다고 할 정도로 달랐지만, 특히나 밀풍군의 죽음에는 '한이 많은 소현세자의 자손'이라는 면도 꽤 작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무튼 이건 먼 뒤의 이야기. 당장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운명, 이어지는 소용 조씨(김현주)의 악행은 아직 한참 더 '꽃들의 전쟁'을 통해 펼쳐질 전망입니다.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이거 꽤 중요합니다.^

 

728x90

[무정도시 정경호]

'무정도시' 라는 드라마가 월/화요일 밤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동시간대에 방송된 쟁쟁한 지상파 드라마들의 몇배나 되는 검색량이 밀어닥쳤습니다. 검색어 순위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만치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 화제의 핵심에는 '정경호'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배우. '무정도시'에서는 국내 최대 마약 거래 조직의 하부 조직을 이끄는 중간 보스 시현 역을 맡았습니다.

 

드라마에 대해서도 '영화 보는 것 같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지만,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정경호에게 저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인도 아니고, 주연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이미 수많은 출연작과 꽤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배우에게 이런 평이 나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정경호 본인과 제작진에겐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고 말이죠.

 

 

 

'무정도시'가 방송되기 전까지, '정경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활짝 웃는 미소년의 얼굴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런 모습이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런 모습.

 

 

 

 

그런데 '자명고'에서는 슬쩍 남자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무정도시'에서는 활짝 피어납니다.

 

흔히 말하는 '리젠트 스타일'의 머리와 수트 차림의 색다른 모습. 단정한 듯 하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냉정함이 빛납니다.

 

 

 

대개 '리젠트 스타일'이라고 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하는데, 뭐 사실 서양에선 리젠트 스타일이란 말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폼파두르 스타일 Pompadour style 을 일본에서 '리젠트 스타일'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있군요. 그런데 누가 봐도 콩글리시같은 올빽 All-back'은 엄연히 쓰이는 표현이라니... 참 어렵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

 

아무튼 리젠트든 올빽이든, 아무나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머리 모양입니다. 일단 머리칼 외의 얼굴 각 요소들과 전체적인 윤곽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결점을 백일하에 드러내 주는 공포의 헤어 스타일.

 

 

 

 

그런데 저런 수준의 외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머리 모양으로 남성미를 극대화해서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린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바로 누아르의 제왕, 험프리 보가트 선생이십니다. 물론 머리숱이 적어서 저런 머리 모양밖에 안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저런 허무와 냉정이 깃든 눈빛은 아무한테서나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무정도시'의 정경호에게서 그런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의 대사.

 

"수야... 이 거리, 우리가 다 먹어 보자."

 

남자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거친 말투나 과장된 몸짓은 없습니다. 말투도 조용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거역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담겨 있습니다. 상복에 가까운 검은 수트는 원래 '그쪽' 남자들의 유니폼 같은 것이지만, 정경호의 스타일은 결코 그 안에서 땀을 흘리거나 칼을 휘두를 것 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20대1로 '다구리'를 뛴 뒤에도 땀방울 하나, 숨결 하나 가빠질 것 같지 않은 모습입니다.

 

물론 저 수트 안에 탄탄한 근육이 감춰져 있긴 하지만, 결코 근육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이 아닙니다. 정경호는 스스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성성을 과시하는 방법을 익힌 듯 합니다.

 

(혹은 이정효 감독의 디렉션이 정경호의 내면을 제대로 끌어낸 것인지도.)

 

 

 

지난번 리뷰에서도 얘기했지만 '무정도시'에는 유난히 등장인물들이 거리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좋게 말하면 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욕망의 표현이죠.

 

누구의 눈에서 바라본 미래가 현실이 될까요. 물론 '무정도시'는 꽤 길고 잔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의 주인공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건 지금부터 드러날 이야기들입니다.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728x90

[무정도시]. 한때 극장에 '느와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멋도 모르고 온갖 영화들이 따라 하던 표현입니다. 느와르(noir)란 검다는 뜻의 불어지만, 필름 느와르는 정작 프랑스와는 무관하고, 1950년대를 전후해 쏟아져 나오던 암흑가를 그린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더쉴 해밋을 비롯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문학의 거장들이 큰 영향을 미쳤죠.

 

이 필름 느와르가 긴 세월을 거쳐 1980년대 홍콩에서 한번 용트림을 합니다. 주윤발의 선글래스와 함께 '홍콩 느와르'가 아시아를 넘어 퀜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미국/유럽의 오다쿠들까지 사로잡은 것이죠.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홍콩 느와르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이고, 외래어 표기도 '누아르' 쪽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그러는 사이 유위강 감독이 '흑사회'와 '무간도' 시리즈로 새로운 누아르 열풍을 일으켰고, 한국에서도 '비열한 거리', '범죄와의 전쟁'에 이어 '신세계'가 나와 그 맥을 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TV에선 마침내 드라마 '무정도시'가 나왔습니다.

 

 

 

 

 

서울. 현대. 경찰 고위 간부 민홍기 국장(손창민)은 마약 조직과 조폭의 결합체인 거대 조직 저울파를 제거하기 위해 보스 저울(김병옥)에 대한 그물을 좁혀갑니다. 하지만 조직에 신분을 감추고 침투시켜 놓은 핵심 언더커버 요원이 살해되고 덫은 실패합니다.

 

경찰대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 검사를 지망했던 형민(형민)은 일선에서 마약 조직과 일전을 벌일 각오로 경찰에 돌아와 특설팀의 팀장을 맡습니다. 애인인 경미(고나은)는 그의 선택이 불만이지만 어쨌든 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경미에겐 어려서부터 친동생처럼 함께 자란 보육원 출신의 동생 수민(남규리)이 있습니다.

 

한편 저울의 약을 내다 파는 하부 조직을 거느린 시현(정경호)은 통칭 '박사 아들'이라고 불리는 암흑가의 엘리트. 하지만 이익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는 저울과 마찰이 일고, 마침내 친형제같은 현수(윤현민)와 함께 암흑가의 패권을 노리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1회를 온라인으로 미리 공개했습니다.

 

60분입니다. 한번 보시죠.

 

 

 

(선공개 영상과 실제 방송 1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부 장면이 다를 수 있습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미리 고지된대로 '무정도시'는 '무간도' 풍의 언더커버 드라마입니다. 심지어 원제가 아예 '언더커버'였는데, 많은 시청자들이 '언더커버'라는 말을 듣고 '대체 언더커버가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는 통에 새로운 제목이 붙었다고 합니다.

 

(뭐 잘 아시겠지만 undercover는 잠복, 잠행, 또는 아예 신분을 감추고 벌이는 위장 침투 등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런데 드라마 제목을 저렇게 하자니 "박명수 나오는 그 사장님 얘기 비슷한 거냐?"는 질문이.... <- 참고로 '언더커버 보스'에는 박명수가 출연하지 않습니다. 나레이션을 했을 뿐이죠.)

 

아무튼 이 드라마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막상 드라마를 본 건 20일 제작발표회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처음 읽어 본 버전의 대본에 비해 훨씬 시청자 친화적으로 바뀐 부분은 참 마음이 놓였습니다. 

 

제가 읽어봤던 시점의 대본은 막이 오르면 곧바로 조직간의 치열한 전쟁 신이 시작됩니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시현의 쿠데타죠. 하지만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 쿠데타가 시작됐다면 대다수 시청자들은 누가 누구편인지 엄청나게 헷갈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마는 수시로 시현의 뒷모습을 비춥니다. 어떤 때는 밤의 도시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고 어떤 때는 길을 걷는 시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액션 스타치고는 그리 떡 벌어진 편이 아닌 정경호의 어깨가 이 장면에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나는 밤의 도시 전경. 그리고 그 도시를 모두 차지하고 말겠다는 남자의 야망. 하지만 뭔가 야망보다는 우수가 느껴지는 남자의 뒷모습.

 

 

 

 

 

1회에서 제작진이 가장 힘을 준 부분은 아무래도 지하보도에서 벌어지는 1대10 정도의 액션 신입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의 좁은 복도 액션을 연상시키는 장면. 실제로 1대10 정도의 싸움이 가능하려면 배후를 차단할 수 있는 좁은 길이라야 가능할 겁니다. 한번에 한명씩 상대할 수 있으니까요.

 

이정효 감독이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액션을 마음껏 구현한 듯한 느낌입니다.

 

 

 

 

반가운 얼굴 중 하나는 김병옥.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보디가드 역으로 눈길을 끌었던 바로 그 배우입니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암흑가의 거물 저울 역을 맡아 마음껏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긴 드라마(20부작)다 보니 저울보다 더 지독한 최종 보스도 나중에 등장합니다만... 1회에 나오는 저울의 모습은 꽤 충격적.

 

 

 

아울러 이 드라마를 통해 더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배우는 이재윤입니다.

 

얼마전 끝난 '야왕'에서 수애 오빠 역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 신예. 아직 신인 태가 가득하지만 버들가지같은 꽃미남형이 아니라 선이 굵은 남성미를 제대로 풍길 줄 아는 배우입니다. 일단 비주얼에선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분은 바로 이 분.

 

'청담동 살아요'에서 보신 분들은 그냥 인상만 나쁜 성형외과 의사로 기억하시겠지만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그야말로 악마의 친구 역으로 적나라한 악마성을 드러냈던 인물이죠.

 

이번 드라마에서도 당연히(?) 좋은 역은 아닙니다. 공포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1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앞으로의 활약이 매우 기대됩니다.

 

무정도시. 27일 월요일 밤 10시부터 제대로 시작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JTBC 홈페이지 jtbc.co.kr 를 방문하시면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중입니다. 참고하시길.)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728x90

[무정도시]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 잘 모르실 겁니다. 방송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JTBC 드라마고, 오는 27일 오후 9시 50분에 첫 방송이 나갑니다. 주인공은 정경호-남규리, 한국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지 못한 본격 느와르 드라마입니다. 아무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상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김남길 손예진. 박찬홍(연출)-김지우(극본) 콤비의 작품입니다(JTBC 개국작인 '발효가족' 팀이죠). 같은 27일 밤 10시에 시작합니다. 드라마의 지명도나 방송사의 힘에서 영 딸립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드라마를 알리기 위해 한 이벤트 중에서는 아마 가장 규모가 큰 '이상한 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5월13일. 명동에 이상한 아저씨들이 우글우글 모였습니다. 장소는 명동의 한 중심인 명동예술극장 사거리. 명동예술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메이지좌(明治座)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던 고급 문화 공간으로 한때 국립극장으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이후 다른 용도로 쓰인 적도 있었으나 2009년 과거의 모습을 되찾고 극장으로 복원된 유서깊은 공간입니다.

 

(네. 명동예술극장에서 도와주신 게 많아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명동예술극장 앞 작은 사거리에 한 패는 명동성당 쪽에서, 다른 패는 명동 전철역 쪽에서, 또 다른 패는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서 진입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매우 불량해 보이는 패거리인데다 검정 양복 차림이라 한 눈에도 뭐하는 사람들인지 대략 짐작이 갑니다.

 

 

 

 

 

사거리 앞에 모이더니 대뜸 대거리를 시작합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듯 합니다.

 

 

 

 

 

 

시비가 몇번 오가더니,

 

가장 인상이 나쁜 빨간 띠 편에서 먼저 외칩니다. "안되겠다, 얘들아! 쳐라!"

 

똘마니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돌진합니다. 그런데 무기가 좀...

 

 

 

 

네. 총천연색 물총입니다.

 

 

 

 

 

 

 

 

현장 영상입니다.

 

 

 

 

구경하던 관광객들만 신났습니다.

 

 

 

물총 싸움이 한참 벌어지다 사이렌이 울리고, 명동예술극장 벽면에서 현수막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고 깜짝 등장한 남자.

 

바로 이재윤입니다.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야왕'에서 수애의 오빠 역으로 지명도를 높였죠.

 

실물로 보니 엄청 건장합니다.

 

 

 

 

"'무정도시'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는 이재윤의 인삿말로 이벤트는 끝.

 

그런데 뜻밖에 이재윤의 팬들이 엄청 많습니다. 이벤트가 끝나고도 이재윤은 한동안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건 일본에서 온 관광객 아주머니들. 대체 언제 이재윤을 보셨는지, 반가워서 펄쩍펄쩍 뜁니다.

 

모처럼 명동 나들이에 팬들의 반응이 좋아 이재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관광객들도 즐거워 하시고, 구경하는 사람 모두 좋아했던 한 폭의 이벤트였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취재해 주신 덕분에 검색어 순위에도 죽죽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편집한 영상이 나왔습니다.

 

 

 

 

이건 이재윤씨 팬들을 위한 보너스.

 

 

 

 

3분 정도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더랬습니다. 기획서를 썼다 찢기를 수십번. 마침내 이벤트의 틀이 마련됐고 수많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국 명동예술극장 앞 사거리가 선택됐습니다.

 

 

 

 

일단 명동예술극장에 현수막을 드리운다는 게 정상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더군요.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은 배우들. 제작비 절감을 위해 사전 리허설은 하지 못하고(ㅠㅠ), 대신 당일 새벽부터 여의도 공원에서 치열한 연습이 이뤄졌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솔로대첩'이 이뤄졌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듯 웃던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조직의 일원이 되어 갔습니다. '우리 형님'이 '저쪽 형님'에게 학대를 당하자 나중에는 진심으로(?) 흥분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아무튼 행사가 무사히 끝나 다행. 그리고 이제 드라마가 잘 되는 게 남았습니다.

 

 

 

 

 

http://drama.jtbc.co.kr/moojeong/?cloc=jtbc|header|drama

 

현재 '무정도시' 홈페이지에서는 4개의 이벤트가 동시 진행중입니다.

 

입맛대로 골라잡으시면 푸짐한 상품이 쏟아집니다. 관심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조 아래 숫자 눌러 추천 한방만 꼭! 부탁드립니다.

 

728x90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첫 주말이 지나갔습니다. '인조' '김자점' '소용 조씨'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 등 관련 검색어들이 주말 내내 포털 헤드라인을 장식(물론 가장 오래 떠 있던 검색어는 아무래도 소현세자빈 역의 '송선미' 였지만)하더군요. 물론 검색의 동기에 대해 말하자면 또 다른 얘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뭐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이 증폭됐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1,2회에서는 인조(이덕화)와 김자점(정성모)의 질긴 인연이 중요한 요소로 그려졌습니다. 1636~37년에 걸친 병자호란이 끝났을 때, 인조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도원수 김자점을 죽였어야 정상이었습니다. 도원수는 오늘날의 육군 참모총장.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항복을 하는 상황에서 도원수가 멀쩡히 병력을 유지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죽어 마땅한 죄죠.

 

하지만 인조는 김자점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캐자면 1623년,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이 될 때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드라마에서도 그 장면에 다뤄졌죠.

 

 

 

 

 

일단 인조반정의 주역들을 인명록처럼 살펴보겠습니다. 1623년 3월12일(음력)로 돌아갑니다. 그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기록입니다. 광해군의 마지막 날이죠.

 

 

왕이 대신·금부 당상·포도 대장을 부르게 하고, 또 도승지 이덕형(李德泂), 병조 판서 권진을 입직하게 하였다.【이반의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그 상소를 보았는데,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이에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어 속히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을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벌써 닫혔으므로 비변사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들도 와서 모였다.】 도감 대장 이흥립(李興立)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게 하고,【흥립은 박승종의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직임을 제수받았는데 이 때 은밀히 반정군과 합세하였다.】 천총 이확(李廓)을 보내어 창의문(彰義門) 밖을 수색하게 하였다.【이반이 문 밖에 반정군이 주둔해 있다고 고했기 때문이었다. 이확이 명령을 받고 즉시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 때 밤이 이미 자정이 지났다.】 이날 금상(今上)은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대장 김류(金瑬),【이때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집에 있었다.】 부장 이귀【이때 전 평산 부사로서 논핵을 받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은 최명길(崔鳴吉)【전 병조 좌랑.】·김자점·심기원【유생.】 등과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였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 이서(李曙)는 부하 병사를 거느리고 왔고, 이괄(李适)【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는데 떠나지 않았다.】·김경징(金慶徵)【전 찰방인데 김류의 아들이다.】·신경인(申景摠)【도총도사(都總都事).】·이중로(李重老)【이천 방어사(伊川防禦使).】·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유생인데 이귀의 아들이다.】 장유(張維)【전 한림.】·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유생.】·신경유(申景裕)【무신인데 전 부사이다.】·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송영망(宋英望)【유생.】·박유명(朴惟明)·이항(李沆)【무신.】·최내길(崔來吉)【사예.】·한교(韓嶠)【전 현감.】·원유남(元裕男)【전 병사.】·이의배(李義培)【무장.】·신경식(申景植)【전 현감.】·홍서봉(洪瑞鳳)【전 승지.】·유백증(兪伯曾)【전 좌랑.】·박정(朴茢)【승문원 정자.】·조흡(趙潝) 등이 모두 와서 모였다. 문무 장사(將士) 2백여 명이【군사는 모두 1천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으로 들어가【전날부터 바람이 불고 운애가 끼어 성안이 낮에도 어두웠었는데 반정군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걷혀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이흥립이 지팡이를 버리고 와서 맞이했고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신 및 재신(宰臣)들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역사 상식. 광해군 때의 정권 주도 세력은 북인, 특히 대북이었고 인조 반정의 주역들은 서인들이었습니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대부분 소장파였던 서인들은 벼슬이 없거나, 부사/좌랑 정도가 고작입니다. 북병사로 임명된 이괄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내쫓기던 중종반정 때에도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양다리를 걸쳤듯 인조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광해군이 반정 음모를 입수하고 궁성 경비를 맡긴 이흥립이 바로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으니 이건 뭐 성공하지 못하면 이상할 지경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인조실록의 첫번째 기사, 즉 3월13일 기록된 인조반정의 상세한 내막을 보면 참 진행 과정이 가관입니다. 어쩌면 성공한게 신기할 정도로 엉성한 반란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엉성한 음모에도 무너질 정도로 광해군 하대의 정국은 어수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해군에 대한 최근 역사가들의 우호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그리 유능한 군주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하선이 아니고 진짜 광해여서 그랬는지도.^^)

 

 

 

 

인조반정 기사입니다.

 

 

 상(=능양군, 즉 인조)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상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원종 대왕(元宗大王)【 정원군(定遠君)으로 휘는 이부(李琈)인데, 추존되어 원종이 되었다.】의 장자이다. 모후는 인헌 왕후(仁獻王后)구씨(具氏)【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다.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다.】로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만력 을미년(1595년) 11월 7일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탄생하였으니, 당시 왜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 선묘(宣廟)께서는 이것이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크게 애중하여 궁중에서 길렀고, 친히 소자(小字)와 휘(諱)를 명하고 깊이 정을 붙였으므로 광해가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굳건하여 큰 도량이 있었다. 여러 번 자급이 올라가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져서는 더욱 겸양하면서 덕을 길렀다.


(중략. 중간 내용은 광해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입니다. 반정의 정당성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죠.)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 및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전 동지(同知) 김류(金瑬)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1620년)이었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李貴)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3년 된 음모. 이렇게 3년에 걸쳐 모의가 진행됐고, 참여자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음모가 소문이 아니 날 재주가 없습니다. 특히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주동자인 이귀가 입이 싸서 '음모가 자주 누설되었다'고 되어 있을 정도.)

 
임술년(1622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中軍)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김자점이 광해군의 총애를 입은 김상궁 김개시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것이 1차 위기.)

 

신경진과 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德津)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 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당시 정승 박승종(朴承宗)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都監軍)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가 흥립을 보고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회합하였다.

 

(도감군이란 바로 훈련도감의 정예병. 말하자면 광해군이 정권을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는 군사력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도감을 지휘하는 훈련대장 이흥립이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반(李而攽)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李惟聖)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金藎國)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告變)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자 곧 풀어주었다.

 

(이흥립의 평소 처신이 좋았던 것인지... 광해군 말년에 정말 인물이 없었던 것인지. 아무튼 위에서 보듯 이흥립은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반정 핵심인 장유의 아우의 장인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측근인 박승종과도 사돈 사이입니다. 내심 '어느 쪽이 이기든 내게 설마 해를 입힐까'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 인조반정 때의 실록 기사를 보면 어찌나 5.16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은지 가끔 놀라곤 합니다.

 

이렇게 양다리에 능했던 이흥립은 결국 반정에 참여한 댓가로 공신의 자리에 오르지만, 1년 뒤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하는 운명을 맞습니다. 도성으로 쳐들어 온 이괄 앞에서도 이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 한편으로 몰린 것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정작 거병 소식을 박승종에게 고발한 김신국이 인조 즉위 후에도 중용됐다는 점입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만...)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체포하러 오는 관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솔직히 '나를 잡으러 오는 놈을 베고 가려 했다'는 말은 핑계로 들립니다. 오히려 다 들통났다고 생각하고 움츠리고 앉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다른 기록에는 '포자를 죽이고 가겠다'는 호기있는 표현보다 '이렇게 된 이상 체포될 뿐'이라고 말했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정작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이괄 뿐이었는데 반정의 공로를 가를 때 이괄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결국 이것이 반정 1년 뒤, 이괄의 난의 계기가 된 것이죠. 저런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김류가 금세 장 행세를 하고, 정작 군대를 이끈 이괄에게 2등 공신 자리밖에 주지 않은 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죠.)

 
 상이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讖地)로 여겼다.

 

(바로 '꽃들의 전쟁'에 나오는 '김자점이 능양군을 찾아가 설득해서 끌어냈다'는 부분은 이 대목이라야 할텐데, 실록에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려실기술'에는 능양군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추대할까 경계해 일찌감치 가솔들을 거느리고 연서역에 나와 있었다고 전합니다.

 

아무튼 김자점은 초기 능양군을 임금 감으로 점찍어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고, 그 뒤로도 인조가 김자점을 감히 떨치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인연이 큰 역할을 합니다.) 

 

 

 

 

장단의 군사(=장단부사 이서가 거느린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상이 인정전(仁政殿)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直宿官)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왔는데, 도승지 이덕형(李德泂)과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 두 사람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명패(命牌)를 내어 이정구(李廷龜) 등을 불러들이니,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朴鼎吉)이 병조 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權縉)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宗室) 항산군(恒山君)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그러니까 박정길이 죽은 것은 혼란중의 착오에 의한 것이지만, 원래 미움 받는 사람이었다...는 정도의 의미. 항상 혁명 때에는 반혁명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요주의 대상이 됩니다. 얼른 궁으로 찾아온 것은 잘 한 것이지만 오해를 풀지 못할 정도로 혁명 주체들과 평소 관계가 엉망이었다는...)


 그리고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를 참수하였다. 김 상궁은 선묘(宣廟)의 궁인으로 광해가 총애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참형을 받았다. 홍도는 흉패함이 흉당 중에서도 특별히 심한 자라 궐내에 잡아들여 참수하였다. 광해는 상제가 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廢世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상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金自點)과 이시방(李時昉)을 보내 왕대비(王大妃)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史官)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 두 사람이 복명하여 아뢰자 상은 곧 대장 이귀(李貴)와 도승지 이덕형, 동부승지 민성징(閔聖徵) 등에게 명하여 의장을 갖추고 나아가 모셔오게 하였다. 이에 이귀 등이 경운궁(慶運宮)에 나아가 사실을 진계하며 누차 모셔갈 것을 청하였으나 대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이에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유사가 연(輦)을 등대하고 위의를 베풀었으나 상은 이를 모두 거두라 명하였다. 교자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고 말만 타고 가면서 광해를 떠메어 따르게 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오늘날 다시 성세를 볼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하는 생략. 어쨌든 무력으로 궁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서열상 광해군의 모후 뻘인 인목대비의 추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나 광해군은 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것 때문에 여론의 공격을 받아왔고, 그런 의미에서 인목대비의 인정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죠. 다만 인목대비는 은근히 '누가 새 왕이 될지는 내가 결정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광해군을 죽여서 내 아들(영창대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뜻이 강해 공신들과 꽤 긴 시간 동안 옥신각신합니다. 이때 이귀가 인목대비와의 기 싸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덕분에 인조반정의 핵심 주체 사이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유지하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류, 최명길, 심기원, 원두표, 구인후, 김자점 등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14년이 지난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시점에도 정국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자점을 해칠 수 없는 것은 김류의 조언 때문입니다. 사실은 인조보다는 김류에게 김자점이 더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당시 이들 혁명 주체 세력은 같은 서인 출신이지만 뒤늦게 사림에서 정치에 나선 송준길, 송시열, 김상헌 등의 인물들에게 위협을 느낍니다. 특히나 패전에 대한 책임이나 명에 대한 의리의 선명성에서 이들은 뭔가 뒤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혁명 주체 세력의 투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 용도로 김자점이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이건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시각과는 약간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그렇게 판단을 했건 말건, 김자점은 왕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 '꽃들의 전쟁'의 출발점이니까요.

 

아무튼 김자점의 생애와 의혹(그는 정말 반란을 꿈꿨나?)에 대한 부분은 다른 글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기록을 보면 볼수록, 참 흥미로운 삶을 산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절해고도에서 인조의 배신과 옛 인연을 되새기다 광기어린 춤을 추기 시작하는 김자점 역의 정성모. 정말 대단한 에너지의 배우라는 생각입니다. 이 장면은 두고 두고 '궁중잔혹사'의 명장면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은 기획 초기부터 '여성 사극'을 표방했던 작품입니다. '꽃들의 전쟁-여자들의 정치 이야기'라는 캐치프레이즈부터 그랬습니다.

 

'여성 사극'이라는 말은 사극 중에서도 특정한 작품군을 떠오르게 합니다. 대개 고전이 된 '개국'에서부터 '무인시대', '연개소문'으로 이어지는 KBS 대하사극풍의 작품들을 '남성형 사극'이라고 부른다면 '여성 사극'은 오래 전 MBC를 통해 방송된 '여인 열전'에서 SBS 사극의 정점을 찍었던 '장희빈'과 '여인천하'류, 그리고 JTBC의 개국 콘텐트로 큰 역할을 했던 '인수대비'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관통하는 특징은 분명합니다. 주로 궁정이나 양반가의 규방이 주 무대가 되죠. 그리고 성격상 호쾌한 액션이나 군중을 동원한 몹 신보다는 오밀조밀한 대사를 통해 갈등과 해소가 이어집니다. 대개의 경우 주인공과 악녀의 무한대립이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꽃들의 전쟁'은 이런 전형적인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19일 선공개된 1회 영상(본 방송은 3월23일)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현재 온라인에 선공개된 1회 영상은 실제로는 1회를 조금 넘어 2회 앞부분까지 살짝 걸치는 내용입니다. 대작의 위용을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간에 영상을 교체하는 바람에 카운트가 내려갔는데, 약 18시간만에 5만명 가량이 이 영상을 보시고 호평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간략한 도입부 줄거리.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에서 겨울을 넘겨 새해를 맞은 조선 16대 왕 인조(이덕화). 정축년 초 마침내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맞습니다. 김상헌(한인수)을 비롯한 척화파 대신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인조는 대군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합니다.

 

호란의 틈바구니에서 양반가의 서녀 얌전이(김현주, 훗날의 소용 조씨)는 몰락한 양반의 자손인 남혁(전태수)와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신분 차이가 분명한 두 사람이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죠. 물론 그렇다고 얌전이가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방지축 말괄량이형입니다.

 

다시 궁정. 도원수 김자점(정성모)이 격분한 인조에게 치도곤을 당합니다. 조선의 주력군을 이끌고 임진강 언저리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죄. 하지만 영의정 김류(김종결)는 은밀히 김자점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결국 김자점은 절도유배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항복의 치욕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구차한 삶은 정작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세자(정성운)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상황. 세자빈(송선미)은 갓난 아들 석철과 눈물로 이별하고, 인조는 홀로 남겨진 손자 석철을 부여안고 비통한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인조 시대가 사극의 초점이 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찌기 80년대 초, 컬러TV 시대를 맞은 KBS가 방송사의 위용을 떨치기 위해 큰 마음 먹고 시작한 사극 '대명'에서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조명한 적은 있었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전쟁의 끝에서 바로 효종 시대로 점프하고, 전란의 마무리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조 후기의 정치사는 한국 사극의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꽃들의 전쟁'은 기존의 여성 사극류와는 규모에서 확연히 차이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간간이 보여주는 전쟁의 참화나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은 인조의 치욕 장면 등은 소위 '정통 사극'에서도 쉽게 볼 수 없던 거대한 비주얼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의 여성 사극들과 차이나는 점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작가 정하연의 내공이 빛나는 부분입니다.

 

정하연 작가의 정치 분석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일찌기 수많은 작품들에서 드러났듯, 그의 사극에는 선인과 악인의 흑백 대립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갑에게는 갑의 명분이, 을에게는 을의 명분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남한산성에서 눈물로 항복을 권하는 최명길과 군신이 다 같이 죽자는 김상헌. 기존의 사극이라면 어느 한 쪽에 좀 더 큰 정당성을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꽃들의 전쟁'에서 최명길은 세자를 청으로 보내서는 안된다는 김상헌에게 "이제 와서 좋은 말은 혼자 다 하십니다. 무슨 대안이라도 있으신지요"라고 정면으로 맞받아 칩니다. 

 

오히려 보다 큰 간신으로 그려지는 쪽은 영의정 김류와 도원수 김자점. 김자점이야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미움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 김자점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할 말'은 그렇게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던' 김자점을 인조가 다시 불러 중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중량감있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키는 '여자들의 전쟁'이기 때문이죠. 여자들의 이야기가 중심 축을 이루되, 그 근거가 되는 역사나 정치 이야기가 단순화/유치화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소용 조씨(김현주) - 소현세자빈 강씨(송선미)의 대립이 드라마의 축이지만, 그 사이에서 열다섯 나이에 입궁하는 장렬왕후 역의 고원희도 눈길을 끕니다. 최근 2AM 뮤직비디오, 아시아나 모델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드라마로 확 개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작발표회 때 보니 의외로 또박또박 말을 잘 하던데, 별명이 '애늙은이'라는군요.

 

 

 

 

 

그리고 사극에서 빠질 수 없는 깨알 재미를 책임지실 분들. 일단 침장이 역의 손병호. 가벼운 톤을 잡았는데도 존재감이 그만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이 분. 내관 역을 맡은 우현.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의 '꽃미남 부문'을 책임질 전태수. 오랜만이라 그런지 각오도 남달라 보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갖출 건 다 갖춘 '꽃들의 전쟁', 23일 '무자식 상팔자' 후속으로 공식 출범합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