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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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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문화의 핵심을 성리학의 기본 단위인 이(理)와 기(氣)를 통해 해석, 전통적인 한국 사회와 해방후 급격한 경제 발전, 사회의 변화, 특징적인 민주화 등이 어떤 정신적 분위기(?)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공자는 참으로 강하구나" 했던 바로 그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한국에 정통한 학자라 해도 한계는 있겠으나, 매우 독특한 해석이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부분들이 많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면.
1.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한국인의 사상사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명사를 통해 해석하고 가르쳤다.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이며, 단일한 원리이자 지향해야 할 선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이며,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의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기는 이 이가 현실세계에 적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이가 절대지상의 원칙이라면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흔히 이를 체(體)라 한다면 기는 용(用)이라 표현된다.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빗대 이해할 수도 있다.
2. 오구라 기조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사회다. '주자학에 의한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라고 규정한다.
즉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 주자학 이후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리'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리'가 도덕적 정당성이 되어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나라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덕을 중시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문체에서는, 지식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며 정치의 선봉에 선 시대가 없었던 일본 역사에 대한 묘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도 시대에도 유학자들은 막부의 통치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종의 어용 학자의 역할을 했을 뿐, 유학자가 정국을 주도하거나 한 시대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정치는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전문가'들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 '공맹지학'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유학에서 맹자의 존재가 희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3. 아무튼 지식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보니, '리'에서 벗어난 물(物)은 매우 비천한 것으로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공고하고, 특히 공과 상의 귀함이 지독하게 무시당해 온 역사가 바로 이 '리'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해석이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음에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恨)이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소비는 일종의 한풀이다. 그 구매 대상이 상징하는 상위의 생활에 대한 동경이 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런거 하나 못 살까보냐', '내가 이런 것 하나 못 사줄까보냐' 같은 심성이다. 정말 일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에 대한 이런 묘사는 심히 그럴듯하다.
4. 그렇다면 왜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事大)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일까. 오구라에 따르면 그 이유는, 중국의 명조가 바로 '리'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명조에 있었고, 유학이라는 학문이 지향하는 과거의 이상, 즉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실재하는 존재가 바로 명조였던 것이다.
오구라는 여기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한중관계를 잠시 거론한다. 과거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사대를 기본 원칙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사대는 과거의 중국이 '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나 20세기 이후 중국은 그런 존재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미 20세기 이후, 한국의 '리'는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을 추종한 것 역시 오구라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이 6.25때 도와주었다거나 경제적 원조로 번영을 이끌었다거나, 혹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방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친미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과거 중화가 갖고 있던 '리'를 한국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리를 지향하고, 거기에 맞춰 국가와 국민 모두 합심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5. 한국의 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이 리를 숭상하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민주주의라는 리의 구현을 위해 한국 지식인들은 목숨과 지위를 아끼지 않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대부'와 '선비'로 나뉘곤 한다. 선비가 국정에 참여하면 사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재야의 사림이 된다. 항상 그 순수성은 재야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안에서 오구라의 주장은 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각이 반한적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오구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앞서도 잠시 말했듯, 일본 역사에서도 이토록 지식인(혹은 문인)이 주도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부러움이 느껴진다.
6.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과연 오구라의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인 스스로 쓴 한국인의 정치 사상사, 혹은 한국인의 정신사에 대한 저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대한 분석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정치사상을 다룬 한국 학자의 괄목할만한 저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몇몇 권위자들께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추천할만한 책이 없다'였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은, 책 자체의 독후감보다 '없다'라는 추천의 충격이었다. 왜 없을까. 없어야만 할까.
혹시라도 '없긴 왜 없어'라고 추천해 주실만한 분, 아울러 지금이라도 직접 써 주실 분이 궁금하다. 이 포스팅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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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던 천재. 금수저. 잘생긴 얼굴. 유혹의 재능. 섹스에 대한 집착.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영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과연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이니 스포일러가 있을까 싶지만, 감상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분은 그냥 여기서 멈추길.
내 느낌대로 정리하자면,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어느 관종의 추락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주목을 즐거워하고, 항상 어떤 자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원하고, 더 큰 주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관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는 매우 강력한 '관종'의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어느날, 역사적인 폭탄 제작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연히, 관종답게,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 참여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 한다. 물론 충분히 자격도 있다. 그리고 미친듯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과를 냈다.
과연 이 폭탄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많은 과학자들이 -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 이 폭탄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에 대해 많은 기록은 ‘오펜하이머는 본보기로 실제 사용을 해야 전쟁 억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폭탄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을 대략 뭉그러뜨리는 정도 선에서, 실제 투하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다른 방법을 통한 인간 살해에 비해 딱히 더 부도덕할까?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이미 도쿄에선 몇 차례의 폭격에 의해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한 것보다 많은 사망자 수다. 만약 일본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면,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폈다면 수만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고, 일본인 사망자는 수십만, 수백만에 달했을 것이다. 핵폭탄 투하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펜하이머에게는 사용을 지지하는 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이미 일본의 패배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고, 그렇다면 미군을 포함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성과가 그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좋은 조건일테니까.
폭탄이 무사히 실험을 마치고, 군인들이 두 개의 폭탄(아마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일)을 로스 알라모스로부터 외부로 반출하는 시점. 여기서부터 놀란의 카메라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의 오펜하이머를 쫓기 시작한다. ‘저 폭탄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는 물론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이어 폭탄 투하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오펜하이머의 실망은 극에 달한다.
물론 언론은 ‘전쟁 종결자’ 오펜하이머를 놓치지 않고, 그는 명성의 최절정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을 방문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관종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낸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기대했을) 공감이나 동정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다. “폭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기서 알기나 할 거 같은가?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나야.” 두 개의 핵폭탄을 날려 전쟁을 끝낸 사람은 난데 어디서 일개 과학자 따위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 하느냐는 불쾌감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양심적 고뇌를 시작한’ 오펜하이머와 ‘인명 따위 관심없는 권력자’ 트루먼의 대립 같지만 사실 내게 보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건 관종과 관종의 대결이다(...문과와 이과의 대결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밀린 오펜하이머는 어색하게 퇴장한다. (문과 만세!)
대개의 관종들은 선량하고 나이브하다. 관종일수록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대체 어떻게 그 호의 뒤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관종의 패턴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자신을 고의로 음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을 가까스로 끝내고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체제 경쟁을 시작한 미국의 여론 앞에선, 이런 노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심쩍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소폭탄을 개발해선 안된다’는 의견은 ‘원폭은 되고 수폭은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소련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데’에 부딪히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UN이 공동관리하게 하자’는 의견은 ‘소련과 핵무기를 공유하자고?’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화상으론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오펜하이머가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영화에 따르면 스트로스의 공작에 의해) AEC에서 밀려난 것은 1954년,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을 받고 미국 상원이 그의 지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54년은 아직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던 시절이지만 그 뒤로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꼈고, 1959년이면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을 낳아 여론을 반전시킬 시기였다.
심지어 놀란의 영화상으로는, 오펜하이머는 ‘냉전의 시대에 용기있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해서’가 아니라 ‘스트로스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가 보복당해’ 공직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가 나라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고, ‘지나친 관종이라 주위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쨌든 70여년 동안 인류는 용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 데 성공했고, 이건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놀란은 거기에 오펜하이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인류가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관종끼 강한 천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소위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하는지에 관심 있어 보일 뿐.
너무 길어졌다.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영웅의 추락을 그린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오펜하이머의 추락 원인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오만과 공명심,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시, 억제할 수 없는 ‘관종’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몰락한다. 성격을 중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측면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탁월한 영화다.
3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핵 폭발 실험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킬리안 머피에서 시작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먼, 조쉬 하트넷,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케네스 브라나, 라미 말렉, 한때 넥스트 디카프리오였던 데인 드한까지... 단역까지도 올스타급으로 채운 라인업은 중국 영화 <건국대업>을 연상시켰는데, 현재 할리우드에서의 놀란의 위상을 보여주는 면모.
아무튼 명작이지만, 두번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P.S.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는 바가바드 기타 11장32절 머릿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후로 수많은 힌두교 연구자들이 이 말이 적절하게 인용된 것인가에 의문을 던져 왔다.
이 말은 인도 신화에서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이며 무적의 용사인 크리쉬나가 자신의 사촌이며 동조자인 영웅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와 같은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데, 크리쉬나가 파리 죽이듯 인간 전사들을 살상하는 것을 보고, 전능한 신에게 대체 싸움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대답한다.
The Supreme Lord said: I am mighty Time, the source of destruction that comes forth to annihilate the worlds. Even without your participation, the warriors arrayed in the opposing army shall cease to exist.
Therefore, arise and attain honor! Conquer your foes and enjoy prosperous rulership. These warriors stand already slain by Me, and you will only be an instrument of My work, O expert archer.
크리쉬나가 말하는 힘의 비교 대상은 시간이다. 세상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모두 소멸될 뿐이다. 그러니 아르주나가 돕건 안 돕건, 그런 강대한 내가 참전한 이상 전장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물론 힌두교의 전제상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누가 죽고 누가 사는 일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연연하지도 말고, 그저 내 도구로서 승리를 즐겨라.
한마디로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영원을 다루는 신의 의도와 권능을 이해하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짖음인데, 과연 오펜하이머의 인용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크리쉬나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인지, 그냥 단장취의하고 ‘뭔가 강력한 것’이란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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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고, 살아가면서 얽힘이 없는 인간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늘 꼽는 학연/지연/혈연을 옹호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주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의 성취(혹은 그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는 자기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판타 레이> 저자인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이런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책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구한말-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의 암흑기에, '우리 조상들이 좀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분단과 남북한 독재의 탄생과 같은 민족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뭔가를 알려 할수록, 그 시기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를 그 시대에 데려다 놓은들 과연 더 낫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917년작인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사람들에게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미국 유학가서)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물론 형식 자신도 생뭏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광수는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꿔놓기 위해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등장하는 조선의 과학자들은 1920년대 이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같은 서구의 최신 물리학 조류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식민지의 계몽에 온 정성을 바쳤다. 이 책은 최규남 최윤식 도상록 이극로 등 당대의 선각자들이 조선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배운 사람'들은 '무식한 민중'을 탓하며 자신들만의 성역에 안주하지 않았다.
최규남이 '백만원이 있다면 지상 5층 지하 5층의 번듯한 이과학 연구소를 만들겠지만, 백만원이라면 일원짜리 지폐 백만장이 아닌가''라며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한 순간에선 안타까움이 앞선다. 간송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 1만원에 산 것이 화제가 되었던 시절이다. 누가 식민지 젊은이들을 위해 그 큰 돈을 모을수 있었을 것인가. 1938년에서야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설치된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학생 한명당 2만원 수준의 투자가 이뤄졌다고 하니 최규남이 바랐던 것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 같다.
'이과 책'이긴 하나 어려운 과학 지식을 요하는 내용은 없다. 사실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과학사')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궁극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책이다. 가능하면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거룩하고 지루한 책 같지만, 저자의 취향이 개입된 trivial한 팩트들이 주는 자극을 또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선데이 과학(?)' 적인 요소도 다분하니 재미없다는 얘기는 안 나올 듯.^^ 아무튼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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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놈놈놈과 석양의 무법자의 관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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