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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의 스핀오프(히트한 전작의 기본 설정 중 일부를 따 와서 만드는 드라마. '전부'를 잇지 않기 때문에 '속편'과는 다릅니다)인 SBS TV '아테나' 첫회를 본방사수했습니다. 방송 전에는 은근히 걱정도 많았죠. 예상보다 사전제작의 진척이 빠르지 않다, 정우성과 수애의 존재감이 이병헌과 김태희만 못하다, 줄거리가 마지막까지 확정되지 않고 있다 등등... 그래서 '아이리스'의 히트를 잇기는 좀 힘들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회를 본 결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회에서 이미 '아이리스'의 완성도는 넘어섰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뒷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테나' 첫회의 완성도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기존의 '아이리스'에서 군더더기로 지목됐던 부분이 깔끔하게 제거됐고, 대작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첫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해 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역시 추성훈이 있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첫회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대통령(이정길)은 북한 원자력 기술의 핵심인 김명국 박사를 남쪽으로 데려오려 하지만 러시아 기관이 개입, 일본에서 김박사를 빼앗깁니다. 전 세계가 차지하고 싶어하는 김박사지만 해외에서 한국 정보기관이 작전을 펼칠 경우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결국 국가와 관계없이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권박사(유동근)의 팀이 동원됩니다. 팀 구성은 권박사와 B1부터 B6까지 총 7명.

그러나 작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B5, B6가 각각 혜인(수애)과 손혁(차승원)에게 제거당하고, 작전은 위기에 놓입니다. 그래도 무리하게 작전에 들어간 권박사 팀은 결국 김명국 박사를 되찾지만 전원이 사망하고, 권박사 본인도 생포된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납니다. (이때 손혁이 왜 권박사를 살려 두었는지는 차후 복선으로 작용할 전망입니다.) 이 과정에서 손혁은 CIA 팀의 일원으로 이 작전에 개입했음이 드러납니다.



3년 뒤. 대통령은 김박사를 주축으로 한 신형 원자로 개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국정원의 외부에 NTS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초야에 묻혀 있던 권박사를 불러내 NTS의 지휘를 부탁합니다. 권박사는 거절하려 하지만 손혁이 미국 DIS 동아시아지부장이 되어 서울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막기 위해 나섭니다.

국정원 요원 출신인 정우(정우성)는 우연히 국정원 홍보팀에서 일하는 혜인을 보고 반해버리지만 혜인은 쌀쌀맞기만 합니다. 은밀히 권박사가 NTS의 지휘를 맡은 직후, 정우는 갑자기 미지의 해외 임무 수행을 위해 이탈리아로 파견되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다시 혜인을 만납니다. (1부 끝)


대체 추성훈은 언제 나오냐고 하실 분들, 저 줄거리에서 손혁(차승원)과 격투를 벌이다 죽음을 당하는 B6가 바로 추성훈입니다.

추성훈의 등장은 차승원이 연기하는 손혁이 얼마나 신체적으로 터프한 인물인가를 설명해주는 데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추성훈이 격투기의 강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보면, 그 추성훈과 1대1로 맞붙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대인 격투에서는 손혁을 넘어 설 사람이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정은 이렇습니다. B6가 권박사 팀의 일원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손혁이 그가 팀에 합류하기 전에 미리 제거에 나선 것이죠. B6의 일터에 나타난 손혁은 그를 미행, 그가 들어간 화장실 앞에 '보수중' 표시를 걸고 안에 들어가 볼펜형 독침으로 그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만만찮은 B6는 그의 기습을 피한 뒤 역공을 가해 오죠. 그래서 호텔 화장실(?) 공간 하나를 박살내는 혈투가 펼쳐집니다.

사실 화장실은 격투를 벌이기엔 대단히 위험한 공간입니다. 미끄럽기도 하고, 사방에 단단한 변기와 세면대 등 도기들이 널려 있습니다. 거울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 '터미네이터3'에서 사이보그들이 대격돌을 벌이는 장소로는 적절할 지 모르지만 뼈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싸우기에는 너무 위험한 공간입니다.



물론 전투력이 사이보그급인 손혁과 B6는 변기를 박살내고, 거울 파편을 맞아 가며, 세면대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굴하지 않고 격전을 펼칩니다. 뭐 드라마다 보니 과장이 개입돼 있지만, 아무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장면입니다. 실제 격투 장면만 추리면 채 4분이 안 되는 시퀀스이지만, 이 격투 신이 보여주는 힘은 압도적입니다.




이 장면에 앞서 수애의 멋진 니킥(물론 니킥은 턱에 맞아야 위력을 발휘합니다. 가슴에 부딪히는 니킥은 사실 공격으로서의 효용이 크지 않죠)이 등장하는 B5 암살 신도 있었지만, 1회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차승원-추성훈의 땀방울이 쏟아진 화장실 격투 신이었습니다.


이 신에서 발휘된 흥분은 곧바로 권박사 팀의 김박사 구출작전, 권박사-손혁의 자동차 치킨 게임으로 이어져 확실하게 시청자들을 손아귀에 쥐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물론 일부 여성 시청자들은 이 장면 언저리에서 "너무 잔인하다"며 채널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격투 신의 완성도는 '올해의 드라마 장면'으로 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밖에도 주인공 정우성이 시작한지 40분이 지나서야 처음 등장하는 구성, 빠른 사건 진행, '비교적' 말이 되는 플롯(물론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이 '비교'의 기준은 당연히 '아이리스'입니다), 그리고 첫회에 보여준 수애의 매력 등은 '아테나'가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아무래도 드라마가 진행되다 보면 수애와 김태희가 비교의 대상이 되겠지만, 솔직히 말해 연기력 면에서는 비교하는게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특히 수애가 첫회에 보여준 양면성 - 잔인한 살인자와 흰 셔츠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교사의 모습 - 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물론 '아테나'가 시청률에서 '아이리스'를 앞지를 것인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죠. 1회만 놓고 볼 때, '아테나'는 좀 더 잔혹하고,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빠른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전체 시청자'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좀 더 두고 볼 문제입니다. 드라마의 장르에 무관하게 '어쨌든 한국의 모든 드라마는 멜로드라마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촌스러운 시청자'가 여전히 많이 있다는 점 역시 앞으로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만약 이런 요소들을 극복하고 첫회에 보여준 톤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아테나'의 업적이 되겠죠.


P.S. 추성훈의 손끝이 움직인 것은 역시 유동근이 살아 남았듯 추성훈도 살아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무래도 한번만 나오고 말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어쨌든 미국의 수족이 된 듯한 차승원이 사실은 숨은 애국자...였을 가능성은 계속 열려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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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눈이 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겨울 하면 눈이죠.^^

물론 제멋대로 고른 리스트입니다. '눈이 소재인 영화 10선'도 아니고, '눈이 소재인 영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성을 가진 영화 10선'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눈발이 날릴 때면 그냥 저 혼자 생각나는 영화 10편일 뿐입니다. 대략 1위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이긴 하지만, 1위부터 10위까지의 순위가 크게 의미가 있는 숫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 놓고 시작해도 반드시 왜 그 영화가 있냐, 이 영화는 왜 없냐, 뭐 리스트가 이따위냐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는 그냥 직접 리스트를 꼽으시라는 말밖에 드릴 수가 없을 듯 합니다. (네. 많이 겪어 봐서 하는 얘깁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좀 예상을 뒤엎어 보고도 싶지만, 1위는 너무나 뻔한 영화 -


네. 오겡키데스카 맞습니다. 바로 그 영화. 다른 영화가 떠오른다 해도 솔직히 이 영화보다 먼저 떠오르지는 않더군요.

이 영화와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때문에 저 먼 홋카이도의 오타루라는 도시가 관광 명소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다녀오고 나서 만족하신 분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참 뭐 이런걸 보러 여기까지 왔나 하는 곳이었습니다. 관광 명소로 꼽히는 오타로 운하, 오타루 유리 박물관 등등은 뭐 그냥 예쁜 동네 레벨.

개인적으로 홋카이도의 겨울 관광은 눈, 온천, 식도락 외에는 전부 무시하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눈이 오면 러브레터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2번은 좀 튑니다. 국내 제목은 '존 카펜터의 괴물'. 영어 제목 'The Thing'이라야 좀 더 아실 분이 늘어나려나요.

북극 기지에 갑자기 개 한마리가 나타나고, 그 개의 뒤를 쫓아 미친듯이 총을 쏴 대는 사람이 보입니다. 어찌 어찌 해서 북극 기지에서 그 개를 키우게 되는데, 그 뒤로 자꾸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개 안에는 산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외계에서 온 괴물이 숨어 있었던 거죠.

눈과 얼음으로 고립된 기지. 그 기지 안에서 필사적으로 외계 괴물과 싸우는 인간들. 특히 누가 괴물이고 누가 진짜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지금 보면 특수효과가 좀 유치할 지 모르겠지만, 당대에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1951년작인 'The Thing from Another World'의 리메이크라고 해도 좋을 듯 한데 리메이크라는 표현은 쓰지 않더군요. 물론 줄거리는 흡사하지만 내용은 훨씬 정교합니다.

구해서 보실 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으면 보셔도 좋을 듯. 재미납니다.




하얀 자작나무 숲을 보면 이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신화처럼 떠받드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무튼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흡혈귀 소녀의 종이면서 보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던, 그리 유능하지는 못한 옆집 아저씨의 운명이 매우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안 보신 분은 한번쯤 보셔도 후회하지 않을 영화입니다.


다음 세 편의 영화는 좀 얼굴을 찌푸리실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일단 일본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입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배우들과 함께 1년간 산촌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고도 하고, 극중 할머니 역의 여배우는 자해 장면을 위해 일부러 돌에 이를 부딪혀 부러뜨리는 연기 아닌 연기를 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이쯤되면 열정을 넘어 광기의 수준이죠.

이런 부분에서는 참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영화입니다만, 마지막 시퀀스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들의 고려장 장면은 참 가슴이 미어지는 명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생각하고 나면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습니다.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년의 '명화극장'에서는 '바렌'이란 제목으로 방송된 작품입니다. 원제는 'The Savage Innocents', 1960년작입니다. 앤서니 퀸이 에스키모 청년 이누크 역을 맡았고 일본 여배우 타니 요코가 그 아내, 그리고 지성파 배우 피터 오툴이 이들을 이해하는 문명인 역으로 등장합니다.

'바렌'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황무지를 뜻하는 barren을 쓴 것이 아닐까 싶은데, 어쩌다 저런 '한글 제목'이 붙었는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주인공 이누크는 빙원의 황무지에서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살아갑니다. 가끔씩 사냥한 바다표범 가죽 등을 가져가 백인들이 만든 교환 상점에서 쓸만한 물건으로 바꾸는 것이 이들에겐 유일한 문명과의 접촉 기회입니다.

그런 이누크가 어쩌다 살인 혐의를 쓰게 되고, 사법관인 피터 오툴은 이누크를 체포하기 위해 빙원을 건너 옵니다. 그러다 사고가 나고, 오툴은 오히려 이누크 부부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됩니다.

평범한 감독이 만들었다면 매우 서정적이고 슬픈, 문명이 순수한 야만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유 없는 반항'의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이 영화를 문명과 야만에 대한, 놀랍도록 뛰어난 통찰이 담긴 코믹 터치의 걸작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이 영화 이야기는 나중에 또 길게 할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뭐 아무튼 에스키모 영화이니 당연히 눈과 얼음이 넘쳐 납니다.^^)



그 세번째 영화는 일마즈 귀니 감독의 '욜' 입니다. 1980년대 그래도 영화에 대해 한마디 하려면 반드시 봐야 했던 영화죠. 한때 '매춘'의 개봉에 즈음한 외국 문화의 일제 해금기에 어쩌다 이 영화도 개봉관에 걸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 전편을 즐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에피소드, 남편과 부정을 저지른 아내, 그리고 아들이 눈 덮인 들판을 건너는 에피소드는 정말 집중하고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거의 모든 관객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주는 설득력은 앞부분의 지루함을 충분히 잊게 할만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시작된 세 편의 자유연상은 여기까지.


눈 덮인 환경과 인간의 비극을 그린 작품들을 건너 다시 눈의 서정이 강조된 작품입니다. 바로 '에드워드 가위손'.

뭐 설명이 필요 없겠죠. 특히 마지막 시퀀스에서 에드워드가 만들어 내는 인공 눈(?)을 맞으며 그를 그리워하는 위노나 라이더의 청순한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네. 솔직히 이 영화가 생각났지만 너무 뻔해 보일까봐 참고 있었던 거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란시스 레이의 그 유명한 음악과 함께, 이 영화의 눈 장난 장면은 그야말로 클래식이 됐죠.

너무 젊어서 제목을 모르는 분들에게 서비스하자면 제목은 '러브 스토리'입니다. 네. 정말로 영화 제목이 '러브 스토리'라니까요. 그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부잣집 아들이 가난한 집 여자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서, 갖은 고생 끝에 남자가 변호사가 되자 여자가 백혈병으로 죽는 이야기입니다.

네. 정말 그런 뻔한 영화가 있었다니까요. 거 참... ;;


뭐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습니다만, 안 보신 분이 의외로 많은 영화입니다. 코엔 형제의 재능이 발휘된 수많은 걸작 중 하나(물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죠. 저는 이 영화와 '밀러스 크로싱'을 최고로 칩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눈 덮인 벌판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던 영화. '파고' 입니다.

 

이 영화에서 대체 눈이 뭐 중요하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눈에 대한 영화를 생각하다 보면 이 영화가 떠오르는 걸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이 영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1편의 배경도 크리스마스였지만 공간이 LA였기 때문에 눈발은 날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편은 그야말로 눈밭에서 개고생하는 브루스 윌리스의 분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이 하드 2'는 1편 못잖게 재미있었던 2편의 예로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합니다.

물론 제아무리 항공유라고 해도, 불이 번지는 속도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속도에 비해 비교도 안 되게 느리다는 과학적인 상식 따위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은 잠시 꺼 두시는게 좋습니다.



 마감 때가 되면 효율이 높아지듯 이미 열 편은 찼지만 왠지 이 영화도 꼽고 싶어집니다. '쿨 러닝'. 이 영화에서 언제 눈 내리는 장면이 있냐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 선수들이 밟고 있는 건 모두 눈 맞습니다.

물론 그런 기준이라면 '국가대표'도 꼽고 싶어지는데... 아무튼 패스.


아울러 이 영화도 꼽고 싶어집니다만, 이 장면에서 날리는 것은 보시다시피 눈이 아니라 종이 테이프입니다. 그럼 대체 이 영화에서 눈이 나오는 장면은 어디일까요? 스케치 북 넘기는 고백 장면의 뒷 배경이 눈 덮인 길이었던가...?

기억이 안 나서 패스.



개인적으로는 위 영화, '프랑켄슈타인, 더 트루 스토리'도 꼽고 싶었지만 너무 마이너해서 빼기로 했습니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이었던 레너드 휘팅(화이팅?)이 프랑켄슈타인박사 역으로 나오는 TV판 영화입니다.

1973년작으로 역시 오래 전 베타 VTR과 TV 방영을 통해서만 봤지만 지금까지 본 프랑켄슈타인 영화 중에서는 단연 최고입니다. TV 영화라지만 본드걸 출신인 제인 세이무어, 제임스 메이슨, 데이비드 맥컬럼 등 호화 출연진이 눈길을 끌죠.

이 영화에서도 박사에 의해 창조된 '아담'이 처음 자살을 기도하며 눈밭 위에 뿌리는 검붉은 피가 너무나 인상적입니다....만, 패스.



좀 로컬한 퀴즈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영화가 생각나시나요? 하긴 이건 퀴즈라기보다는 공감도 테스트 같군요.^^ 힌트는...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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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작으로 기획된 KBS 2TV '성균관 스캔들'이 마침내 마지막 4회를 남겨 놓고 금등지사 찾기 모드에 들어갔습니다. 드라마 초반부터 이미 홍벽서-재신(유아인)가 금등지사를 거론하며 조정 중신들을 공격했고, 윤희(박민영)의 아버지와 재신의 형이 모두 정조의 최측근들인데다 금등지사와 관련된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 금등지사 이야기는 드라마의 핵심으로 등장할 것이 자명했습니다.

대체 금등지사가 뭐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초간단으로 설명하자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론 벽파를 처단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비밀 문서'라고 하는게 가장 적절할 듯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어쨌든 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수시로 등장했던 소설/드라마/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이 드라마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그리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본래 금등지사란 일반명사입니다. 그냥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이고이 간직된 글' 정도의 뜻입니다. 중국 주나라때부터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 만큼, 널리 쓰이던 단어입니다.


금등지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정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영조는 손자 정조를 왕위에 올려놓는 조건으로(즉 노론 벽파가 정조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게 하는 명분으로), "나(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다. 만약 누가 나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부르는 자가 있다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공식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선언하게 합니다. 또 영조는 여러 차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주모자'가 있다면 첫째는 자신이요, 그 다음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즉 정도의 외조부)이라고 주입시킵니다.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 싶지만 사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한다면, 그것은 선대왕인 영조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며, 그것은 정조의 국정 운영 정당성을 부정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조가 왕이라 해도 이런 무리수를 두다간 반정이 일어나 왕위를 빼앗길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영조가 뒷날 입장을 바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내 뜻이 아니었고, 너(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면 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단하라'는 밀지를 내린 적이 있다면 상황은 일변합니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거역했다는 정치적 부담 없이 보복을 할 수 있고, 이는 곧 정조와 대신들의 힘겨루기에서 정조가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금등지사입니다. 그럼 실제로 금등지사가 존재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금등지사는 소설 속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금등지사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정조 17년인 1793년 5월28일, 영의정 채제공은 상소를 올립니다. 잘 알려진대로 채제공은 남인이고 정조가 노론인 윤시동, 김종수와 함께 자신이 탕평책으로 국정을 논할 수 있는 세 사람의 중신으로 꼽은 사람입니다(아울러 이 드라마에서 4인방이 이뤄낸 성과로 그려지는 신해통공의 주역이죠^^). 그런데 상소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정조가 즉위한지도 이미 17년, 그런데 갑자기 그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사하고 확실히 진실을 밝힌 뒤 역적들을 토멸하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전략) 신이 기유년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묘)을 옮길 즈음에 우리 성상(정조를 말함)께서 입으신 소매자락에 흐른 눈물이 피로 변하여 점점이 붉게 물든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일찍이 옛 글에서 혈루(血淚)라는 두 글자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었는데 부득이하게 군부의 소매자락에서 직접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전하께서 제왕의 효성으로 몸소 증자(曾子)·민자(閔子)와 같은 효도를 행하시는 것은 본디 알지만, 진실로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치고 맺힌 한을 펴지 못한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이 어떻게 참으로 피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가슴 속에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또 억제하여 의리가 크게 천명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단지 혹시라도 선대왕(즉 영조)의 훌륭한 덕에 털끝 만큼이라도 관계됨이 있을까 염려하신 때문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사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왕께서 이미 전하를 위해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에 대하여 이름을 들어 말씀하였으니 선대왕께서 확연히 느껴 깨달았음을 이로 미루어 대략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느껴 깨달으심이 이미 이와 같이 정녕하였고 보면 전하께서 속히 천토(天討)를 거행하시어 사도 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야말로 비록 성인에게 질정해보더라도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중략)


                                                 (번암 채제공)

신이 수십 년 동안 마음을 썩히고 뼈에 사무치는 아픔으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던 까닭은 바로 여러 역적 무리가 무함하였던 일들은 곧 천고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아직까지 미처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서 그 거짓들을 소상하게 변파하여 천하 만세에 알리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신이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세자에 대한 무함이 깨끗이 씻겨져서 징계와 토죄가 크게 시행되기 이전에 신이 만일 다시 관복을 찾아 입고 반열의 한가운데에 선다면 이는 의리를 잊어버리고 부귀를 탐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가 신을 영의정에 발탁시킨 뜻이 어찌 신을 부귀하게 해 주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신으로 하여금 의리로써 마음을 가지고 의리로써 임금을 섬겨 온 세상을 의리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전하를 섬기는 일 가운데서 이 큰 의리를 버려두고 다시 어디에다 손을 쓰겠습니까. (중략)

신의 부적합한 실상과 병에 찌든 상태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 것입니다. 오직 이 큰 의리만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나갈 것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대로 간직한 채 황천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수상직을 체직하시어 하찮은 신의를 온전히 지키도록 해주시고, 이어 신의 말을 채택하여 의리가 크게 밝혀지도록 하신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은유고 뭐고 없습니다. 정면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정조 혼자 끙끙 앓고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라, 이제 그 죽음을 다시 현실 정치의 아젠다로 삼고,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방 유생 몇몇이 아니라 국정의 수반인 영의정이 말입니다.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논란을 잠재우려 하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안 이상 정국은 발칵 뒤집히고, 좌의정이자 노론의 수반인 김종수는 목숨을 걸고 이 상소를 올린 채제공을 역적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김종수 본인이나 노론 전체가 그 책임을 지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복수가 감행된다면 정국의 균형은 일시에 무너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김종수로서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조용한 해결을 택합니다. 채제공과 김종수를 모두 파직시킴으로써 이 상소에 대한 논의를 강제로 덮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여론이 전부 가라앉을리는 없습니다. 3개월 뒤까지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8월8일, 2품 이상의 모든 대신들을 소집한 정조는 금등지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합니다.


"(전략)전 영상(채제공을 말합니다)의 상소 가운데는 비(非) 자 한 구절로 말머리를 꺼내고 즉(卽) 자 한 구절로 말을 끝맺었는데, 즉 자 이하의 내용은 아무해의 일(사도세자의 죽음)과 관계되어 있는 지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가령 전 영상이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하고 미덕을 천양하려는 애타는 마음과 피끓는 정성에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 영상이 감히 말하였으니 그 겉면만을 얼핏 본다면 그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략) 그러나 전 영상이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 즉 영조)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褥]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 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내가 처음 왕위에 오른 병신년 5월 13일 문녀(文女,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 정조가 즉위한 직후 처단됨) 의 죄악을 드러내어 공포할 적에 전 영상이 윤음(綸音)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아뢴 것이 있었고 승지와 한림(翰林)을 보내어 이를 받들어 상고한 일까지도 있었다. 지금 물러가기를 청하는 상소에서 죽음에 임박하여 이런 진실을 말한 것은 전 영상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혼자서 그 일을 말한 것이니, 이는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전 좌상은 이런 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 표면에 나타난 것만을 의거하여 지난 여름 이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의리로써 성토한 것이니 이 또한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다. (하략)"


그럼 정조는 그것이 전해진다는 사실만을 알고 그 내용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예 정조는 작정하고 그 내용을 공개합니다. 단 두줄만. 이것이 바로 영조가 직접 썼다는 금등지사 가운데 공개된 20자입니다.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

"내가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을 사형에 처하게 하던 날 문녀와 김상로(金尙魯)도 처단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때 이미 금등의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의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그 뜻을 약간 반영하였던 것이다. (중략) 내가 차마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생각이 있어서이다. 요컨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 영상이 상소에서 말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전 좌상이 준엄한 성토를 한 것도 내면의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인 것이다.(중략)

오늘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대체로 ‘대고(大誥)’의 뜻을 모방하여 사람마다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는 다시 이를 빙자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사람마다 성토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사리를 천명할 책임은 오로지 경 등에게 있는 것이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정조는 다음날, 김종수를 따로 불러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설명합니다. 즉, 채제공이 한 상소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왜 채제공을 처벌하지 않는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입니다.
 
“(전략) 아무해의 사변(사도세자의 죽음)은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양조(兩朝)의 미덕을 천명하기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여태껏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했기에 차라리 덮어둔 채 드러내지 않은 지가 지금 거의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끝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중략)

전 영상(역시 채제공)이 설사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제기하여 나에게 들려준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가령 그 마음이 옛날의 미덕을 드러내기 위한 데에서 나왔더라도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막중한 자리에 미치게 한 것도 죄이며, 옛날 일을 언급하면서 선조에게까지 언급이 된 것도 역시 죄인 것이다. (중략) 이를 보았거나 들은 뭇신하들로서 그를 엄중히 성토하려 했던 것은 경(김종수) 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들 그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다만 전 영상이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을 혼자서 말한 데에는 대체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선대왕(先大王, 영조)께서 휘령전에 친림했을 적에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입시하였었는데 사관을 문밖으로 물러가게 한 다음 선대왕께서 한 통의 글을 주면서 신위(神位)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넣어두게 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금등 문서였던 것이다. 내 그 내용을 반포하는 것이 막중한 관계가 있고 또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간직한 채 오늘까지 끌어온 것은 오로지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녀의 처분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는 그 속에 약간의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문 가운데 즉 자 이하는 바로 아무해 이전의 흉도(凶徒)들이 한 흉악한 말이었는데
아무해 이후에 선대왕께서 즉각 이를 깨닫고 이 금등의 글을 내렸던 것이고 전 영상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만 이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 상소문이 나온 뒤로 조정이 시끄럽게 들끓었으나 그대로 방임했던 것은 내가 차마 제기할 수 없어 아직껏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인데, 오늘에서야 한 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말하게 된 것이다.

(중략) 이제 와서 내가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세상에 멋대로 전파되도록 내버려둔다면 세상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볼지 모를 일이니, 그렇다면 한때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은 작은 문제이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그 사실이 후세에 흘러 전하게 되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중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때 정조의 입장은 분명해집니다. 즉,

"나는 금등지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내용이 영조가 한때 사도세자를 미워해서 죽였지만 그것이 실책이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후손에게 분명히 알리고자 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따라서 그 사실을 전한 채제공을 처벌할 이유는 없다. 아울러 나머지 중신들이 채제공을 비판한 것 역시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니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정치적인 보복을 할 생각 따위는 없다. 채제공의 상소를 묵살하고 그를 즉시 파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논의가 가라앉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 상소의 내용을 이유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불안해 하거나, 상대 당파를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혼란을 빚어내고 있기 때문에 온 중신들에게 분명히 밝혀 둔다.

병신년 3월10일(정조가 즉위하던 날) 분명히 밝힌 대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밝힌다는 것이 그 사건과 관련된 일들을 다시 캐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모든 의혹이나 불안을 씻고, 나와 함께 정국을 이끌기 바란다."



물론 정조의 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김종수는 다소 삐걱거립니다만, 아무튼 이상의 내용을 보면 금등지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이라는 건 전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정조는 금등지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도 합니다. 즉 실제로 금등지사 카드를 사용하기 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들먹여 노론 세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럴듯 합니다.

사실 정조는 집권 초기에 금등지사 없이도 꽤 신나게 복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7년. 다시 또 사실을 캐고 한대봐야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늙어 죽었거나, 정조 초기에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했죠. 30년이나 지난 뒤에 굳이 복수를 거론하는 건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한 명분쌓기였을 뿐인 듯 합니다.

아무튼 너무 길어져서 정작 금등지사와 현재 '성균관 스캔들'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겨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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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 신에서 가장 열연하고 있는 배우로는 SBS TV '대물'의 고현정과 MBC TV '욕망의 불꽃'의 신은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두 배우 모두 팔색조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여배우로서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두 배우에 대한 평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현정은 '선덕여왕'에 이어 다시 한번 카리스마를 재확인했다는 호평에서부터, 사투리 쓰는 아가씨에서 아나운서,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는 다양한 변신에 성공했다는 칭찬을 듣고 있는 반면 신은경은 '신들린 열연'이라는 말은 듣고 있지만 그 이상의 호평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작품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먼저 '대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그린다는 이 드라마는 고현정이 대통령이 될 결심을 하기까지를 그리는 단계입니다. 사투리 쓰는 아가씨에서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는데 성공한 고현정은 카메라기자인 남편이 중동 위험지역에 무리하게 취재를 나갔다가 현지 반군들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결국 남편의 죽음을 맞은 고현정은 왜 대한민국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지 않느냐는 항변을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대통령이 된 장면에서도 "더 이상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있어선 안됩니다. 그것이 제가 대통령이 된 이유입니다"라고 말하죠.



그 다음 '욕망의 불꽃'의 신은경. 이 인물은 성공을 위한 집념의 화신입니다.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재벌 회장이 의리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아들과 언니를 결혼시키려 하자 깡패 출신 직원을 동원해 언니를 강간하게 하고, 자기가 언니 대신 재벌 아들과 결혼합니다. 그 재벌 회장 아들이 이미 임신한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 자기 대신 아이를 낳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방송가에 등장했던 막장 드라마를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초 막장 스토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여자가 대신 낳아 자신이 아들로 기른 유승호가, 자신이 낳아서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르는 딸 서우와 연인이 된다는 얘기죠. 전에는 드라마 한 편 정도를 만들 수 있었던 사연과 배신과 원한과 우연이 한방에 시청자를 집어삼킬듯 기세가 등등합니다.



고현정과 신은경에 대한 평가의 차이는 '대물'과 '욕망의 불꽃'의 차이입니다. 물론 '대물'이 흠 없는 걸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설정은 억지 투성이고, 인물들은 어처구니 없는 대목에서 시청자보다 훨씬 빨리 흥분해버립니다. 감정을 절제해서 전달하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사실 '욕망의 불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물'에서 고현정이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느끼는 분노에 개연성이 있고, 그건 한국인들이 작은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겪었던 일과 와 닿습니다. 비록 드라마 속의 작은 분풀이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맛이 있습니다.



반면 신은경이 '욕망의 불꽃'에서 재벌가 며느리가 되고, 아들을 재벌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어떨까요. '나도 저런 상황이면 저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도의 공감은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얼마나 인간이 추악해 질 수 있는지 한번 보자'는 정도는 가능할까요? 여기에는 어떤 명분도, 어떤 메시지도 없습니다.

'욕망의 불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청자들을 향해 '그래, 당신들이 비틀린 스토리를 좋아한다니, 사람들의 어두운 면을 좋아한다니, 거기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 주지. 자,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스토리야'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뿐입니다. 진저리가 쳐 질 정도입니다.



지금 두 배우가 받고 있는 평가의 차이에는 개개인의 기량이나 실력보단 작품의 차이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느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욕망의 불꽃'에서 신은경이 연기하는 캐릭터나 그 주변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세상은 참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리고 '욕망의 불꽃'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대체 막장 드라마의 끝은 어디까지일지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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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을 향해 가고 있는 MBC TV '동이', 마침내 숙종은 세자에게 선위를 거론하며, 숙빈을 출궁시키고 세자를 후사로 삼는 일에 아무도 더 이상 이론이 없게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진행입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장희빈이 낳은 세자와 숙빈(동이)이 낳은 연잉군은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인 것이죠. 여기서 왕이 세자의 손을 들어 준 이상 연잉군과 그 어머니 숙빈에게는 다소 냉랭하게 대하는 것이 정상일 듯 합니다. 그러다 장무열이 정세를 오판하고 숙빈에게 무력 시위를 하는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 비쳐 보면 좀 황당무계한 일입니다. 숙종이 지시한 세자의 대리청정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동이'에서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숙종이 대리청정을 얘기했던 날, 이 날은 바로 1717년 7월19일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숙빈은 궁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1717년, 7월19일, 56세를 맞은 숙종은 심한 안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역대 조선의 국왕 가운데선 상당히 장수한 편에 속합니다. 이날 숙종은 자신의 건강을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킬 것을 공표합니다.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지는 않되, 실질적으로 국정 운영은 세자가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드라마에선 소년이지만 1688년생인 세자는 이미 29세의 장년. 동생인 연잉군 역시 23세의 팔팔한 청년이었습니다. 당장 왕이 되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였죠. 그런데 숙종은 청정 발표 전에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를 한 겁니다.

세자의 혈통을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의 지지세력은 소론과 몰락한 남인, 그리고 연잉군의 지지세력은 노론입니다(물론 이 시기의 노론은 영/정조때와는 달리 막강한 독재집단이 아닙니다. 숙종의 통치술이 만만찮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발표를 하기 전인 미시(오후 1시-3시)에 노론의 영수와 홀로 만난 것입니다.



본래 임금이 신하를 만날 때에는 승지와 사관이 옆에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숙종은 이이명 혼자 들어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승지 남도규와 사관 권적 등이 "이런 법은 없다"며 따라 들어가려 하는데 또 임금이 굳이 혼자 들어오라고 했는데 마구 밀고 들어가기도 켕겼는지 "자, 들어갑니다" 하고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임금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고 결국 뒤늦게 들어가긴 하지만, 이미 임금과 이이명의 대화는 끝나 있었습니다.

 
(정황을 생각하면 마땅히 사관과 승지가 배석해야 하는 것이므로, 뒷날 '왜 배석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액션은 취하되, 또 마구 밀고 들어가면 임금의 진노를 살 우려가 있으므로 어정쩡하게 밖에 서서 기다린 것이 분명합니다.^^ 눈치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임금은 이이명과의 독대를 마친 뒤에야 더 많은 대신들을 부릅니다. 이건 신시(오후 3시-5시)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이명 등을 불러서 접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이기익(李箕翊)·가주서(假注書) 이의천(李倚天)·겸춘추(兼春秋) 김홍적(金弘迪)·대교(待敎) 권적(權?)이 따라 입시하였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遇)·김우항(金宇杭)은 병을 핑계하고 패초(牌招)를 어기고서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왕과 마주 앉은 사람들은 모두 노론의 거두들입니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이 안질이 심해 국정에 대안이 필요하나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꼬리를 흐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론의 세 대신이 일제히 "세자는 영명하고 자애로우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입을 모아 외칩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고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한다는데 노론 대신이 찬성을 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죠. 더구나 '세자 카드'는 숙종이 이미 노론을 겁주는 데 써먹었던 카드입니다. 12년 전인 1705년, 숙종은 한번 "건강이 안 좋으니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화들짝 놀란 신하들이 일제히 '앞으로 잘 할테니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외치자 슬며시 철회한 사건이었죠.

그리고 머잖아 그 답은 나옵니다. 왕과 이이명의 독대에서 왕은 "세자에게 대권을 잇게 하되,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아 그 뒤를 잇게 하겠다"는 언질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극비에 해당하는 중대사였으므로 사관과 승지가 들어선 안되는 일이었던 겁니다.

이이명은 왕과 독대한 뒤 김창집과 이유에게 이 거래를 공유했고, 이후 세 대신은 자진해서 세자에게 청정을 맡기는 데 동의한 것입니다. 당장 세자가 바뀐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어차피 세자(뒷날의 경종)는 후사를 둘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상황이고, 병약해 얼마를 더 살 지 모르는 상황이고 보면 연잉군에게 그 다음 임금 자리를 약속한다는 것은 노론에게도 큰 불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뜻대로, 경종은 즉위 1년만인 1721년에 인원왕후의 허락을 얻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합니다.)



결국 숙종은 이런 방법을 통해 두 아들을 모두 살리는 선택을 한 듯 합니다. 두 아들에게 동시에 왕좌를 물려줄 수는 없지만 세자의 신체적 결함을 감안할 때 연잉군의 위치만 보장해 준다면 노론이 당장의 후계구도를 양보해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죠.

물론 소론이 이런 숙종과 노론의 거래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론 윤지완은 며칠 뒤인 7월28일 상소를 올려 이 조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세자로 하여금 항상 측근에 모시게 하여 문안하고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한 다음 큰 일은 품정(稟定)하게 하고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게 하신다면 성궁(聖躬)께서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고 국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위안(慰安)하는 방도와 훈도(訓導)하는 의리가 둘 다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는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리청정이라는 것은 사실 명분이고, "중책을 맡겨 놓은 뒤 트집을 잡아 세자 교체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리청정을 시켰다가 세자를 교체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거야말로 그냥 생트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뒷날 경종때, 연잉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때에도 소론은 반대합니다. 대리청정이 나쁜 것이라면 이때 반대할 이유가 없죠) 정작 이 상소가 공격하고자 한 것은 다음에 나옵니다.

독대(獨對)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상국(相國, 재상인 이이명을 말함) 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가 있으며 대신(大臣)도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를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의혹하고 국언(國言)이 떠들썩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네. 결론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왕이 노론과 몰래 협상을 했다는게 불쾌한 겁니다. 어쨌든 소론으로서는 연잉군이 지금 세자의 뒤를 잇는다는게 매우 싫긴 하지만, 당장 세자가 왕이 된다는데 거기에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죠. 드라마 속 장무열처럼 군사를 일으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몰락을 앞당기는 해괴망칙한 일을 벌일 정도로 정신나간 사람들은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그 흐름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여기에 뭐라 토를 달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선 굳이 '동이'가 연장방송에 들어가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와는 달리 숙빈 최씨는 숙종이 이런 결단을 내리기 1년 전인 1716년 이미 병을 이유로 사저에 나가 치료하고 있었고, 1718년 3월 숨을 거둡니다.

그러니 숙종이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한 것은 어느 한 당파에 힘을 몰아 주지 않고, 두 아들에게 모두 살 길을 열어 주면서 불필요한 싸움을 억제하자는 뜻에서 내려진 판단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다룬 수많은 사극 때문에 숙종은 '여자 치마폭에서 놀아난 왕'이란 느낌이 강했지만, 보면 볼수록 정치적 수완이란 면에서 영조나 정조보다 한수 위였던 듯 합니다. ...그나자나 이렇게 '동이'도 끝나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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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의 새 드라마 '닥터챔프'가 1,2회 방송에서 모두 1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작 대열에 올라섰습니다. 9시대 드라마는 MBC, KBS1의 메인 뉴스와 경쟁해야 하는 시간대이지만 SBS가 올해들어 이 시간대를 집중 공략한 결과, 시청자들의 시청 습관이 점차 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에서도 8,9,10대가 모두 드라마로 채워지고 11시대에 가서 메인 뉴스가 방송되는 미국 TV를 따라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닥터 챔프'(극본 노지설, 연출 박형기)는 초반부터 늘어지지 않는 진행과 호감가는 주인공들을 배치,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습니다. 갖고 있는 능력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김소연은 이번엔 지방대 출신으로 서울 명문대 대학병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주인공을 맡았고, 역시 개인적으로 후기지수의 선두 그룹으로 생각하는 정겨운은 여유넘치는 씩씩한 유도선수 역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바로 엄태웅입니다. 이 캐릭터를 생각하면 왜 극 초반에 갑자기 키스신이 나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엄태웅이 연기하는 이도욱 박사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재활의학을 전공, '박찬호와 박지성이 부상으로 신음할때 재기를 가능하게 했던 스포츠 전문의'입니다. 그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태릉선수촌의 의무실장으로 부임하면서 드라마가 시작되죠.

그가 등장한 첫 장면, 별로 의사같아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흰 바지에 지팡이를 짚고, 까칠한 표정으로 공항 출국장을 걸어나옵니다.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식하며 "선수 진료에는 지장이 없겠느냐"고 묻자 "내가 재기시킨 박찬호 박지성은 선수가 아니었느냐"며 곧바로 맞받아칩니다. 그리고는 바로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죠.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면 미드 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휴 로리가 연기하는 닥터 그레고리 하우스. '하우스'의 타이틀 롤인 그 사람이죠.

부스스한 머리와 언제 갈아입는지 알 수 없는 푸른색 셔츠, 회색 재킷과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지팡이와 언제든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진통제(바이코딘) 약통이 바로 하우스 박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각 요소입니다. 여기에 상대방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듣는 이의 속을 뒤집어놓는 독설이 있어야 진정한 하박사님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엄태웅이 연기하는 이도욱은 약통에서 약을 꺼내 입에 넣습니다. 옆 사람이 "다리가 많이 아프신거냐"고 묻자 "아뇨. 비타민인데요? 씹어먹는 거라 물 없이도 드실 수 있는데, 좀 드시겠습니까?"합니다.

한마디로 노골적인 '하우스' 패러디입니다. 저 지팡이는 바로 '천재적으로 유능하지만 까칠한 성격과 신랄한 화술 때문에 대인관계가 썩 원만하지 않은 의사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가 지금부터 그려내는 캐릭터는 하우스 박사를 참고한 것입니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죠. 한마디로 하우스 박사의 크리에이티브 마크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도욱 박사는 왕년에 국가대표 스피드 스케이터 활약하다 부상과 '뭔가' 깊은 사연 때문에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의사가 된 사람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스포츠 스타 출신의 의사란 좀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전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물은 바로 미국의 빙상영웅 에릭 하이든입니다. 지난 1980년 레이크 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관왕에 오른 전설의 빙상왕 하이든은 빙상에서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의대에 진학, 제 2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스포츠 재활의학에서도 일가를 이뤄 올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표팀의 팀닥터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죠. 한마디로 대단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입니다.

물론 이도욱 박사의 캐릭터가 스케이터로서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고, 부상으로 진로를 변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어쨌든 스피드 스케이터 출신의 재활전문의라는 면에서 하이든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녹아 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밖에도 진짜 현장을 지킨 스포츠 의학 전문가들의 도움이 이 드라마에 녹아 있을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20년 동안 발만 생각해왔습니다. 남은 20여년도 발만을 생각하겠습니다." 노원을지병원 족부정형외과 과장 이경태 박사(49)가 인터넷 블로그에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적어놓은 글이다. 그의 별명은 '발 박사'다.>> 라는 오늘 아침 신문 보도에서 보듯 스포츠의 발달에 전문 의학인들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도욱 박사를 형상화하는 외피로 하우스 박사가 사용된 것은 흥미로운 적용 사례입니다. 이건 슬쩍 베끼는 것과는 좀 차원이 다른 인용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유사성이 너무나 선명한 만큼, 앞으로는 두 캐릭터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강조될 것인지가 중요하겠죠.


 
아마도 초반에 차예련과의 강렬한 키스신이 배치된 것도,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선을 긋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걸로 보입니다. 닥터 하우스에 비해 닥터 이도욱은 훨씬 멜로드라마의 성격이 강한 캐릭터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것이 아마 그 키스신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닥터 챔프', 관심 가는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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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대략 두개의 키워드로 정리 가능합니다. 바로 '짝사랑'과 '야구'입니다. 후자에는 'YMCA 야구단'과 '스카우트', 그리고 대본을 맡았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전자에는 '광식이 동생 광태'와 이번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들어갈 겁니다. (묘하게도 전자는 흥행 대박을 냈거나 대박이 예상되는 반면, 후자의 야구 소재 영화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미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드러났듯, 김현석 감독은 미묘한 연애심리와 그 예측불가능성을 묘하게 짚어내는 데에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이번 '시라노'는 '광식이 동생 광태'를 뛰어넘어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역사를 다시 쓸만한 완성도를 과시하고 있더군요. 더구나, 올 연초부터 이어진 아바타 열풍까지 이 영화의 앞길에 레드 카펫을 깔아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뜨거운 형제들'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연극 연출을 하던 병훈(엄태웅)은 자금 마련을 위해 '시라노-연애조작단'이라는 회사를 차려 놓고 연애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다양한 첨단 기술을 이용해 맺어 주는 사업을 벌입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가는데 어느날 펀드매니저 상용(최다니엘)이 찾아와 희중(이민정)과 자신을 연결해 달라는 청탁을 해 옵니다. 좋은 조건의 고객이지만 병훈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입니다. 희중이 유학시절 자신의 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진행은 제목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와 원작이랄 수 있는 희곡 '시라노 드 벨주락'은 사실 어찌 보면 비슷하고 어찌 보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극중에서도 충분히 설명되듯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벨주락 Cyrano de Bergerac 은 최고의 글재주와 검술 실력을 갖췄지만, 우스꽝스러운 코로 인한 외모 컴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록산느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시라노는 어찌 어찌 하다가 잘생긴 부하인 크리스티앙이 록산느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랑을 이뤄 주기 위해 자신의 글재주를 이용합니다. 연애편지 대필에다 그녀를 만나 읊어 줄 즉흥시까지 써 주는 거죠. 이렇게 해서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의 사랑이 이뤄지는 것으로 시라노는 대리 만족을 합니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에서는 그래도 시라노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집니다. 크리스티앙이 죽은 뒤, 혼자 살고 있는 록산느에게 중상을 입고 찾아간 시라노는 어둠 속에서 크리스티앙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외워 보이죠. 그제서야 그동안 모든 편지를 쓴 것이 시라노란 것을 알게 된 록산느는 그녀가 시라노 또한 사랑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 고백을 마지막 위안으로 삼아 시라노는 세상을 등집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맺어지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은 비슷합니다. 비록 우스꽝스런 외모는 아니지만 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할 상황이라는 게 포인트죠.



영화 '시라노'는 전개며 예상이 전혀 예측 불가능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고비 고비마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탄탄한 대본은 이 영화가 가장 자랑할만한 강점입니다. 특히 배우들이 영화의 진행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로 출연하는 배우들이 모든 대사가 입에 붙은 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놀랄만한 호연을 보여주는 배우로는 최다니엘을 반드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과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나이답지 않은 연기적응력을 보였던 최다니엘은 이 영화에서 최상의 캐릭터 몰입력을 보여줍니다. 한국 영화/드라마의 미래를 이끌어 갈, 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의 탄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이하의 내용은 영화 내용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습니다. 뭐 스포일러성은 아니니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나머지 부분은 영화를 보신 뒤에 읽어보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시라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은 기술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연애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기술의 부족'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영화 '시라노'에 나오는 연애조작단이 하는 일은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랑의 기술'을 다른 데서 가져올 수 있게 해 주는 겁니다. 극중에서 최다니엘이 연기하는 상용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잘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제가 못하는 연애는 아웃소싱하자는 거죠. 이러면 정말 효율이 높아지지 않겠어요?" 하지만 과연 연애라는 것이 '아웃소싱'한다고 해서 정말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이 어떤 음식, 어떤 음악,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팁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하루 종일 생각나지 않는다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에도 모니터에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이뤄져봐야 말짱 꽝'인 사랑일 뿐입니다. 영화의 후반, 최다니엘이 크리스티앙과 시라노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이런 말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키스 한번 정도를 얻어내거나, 하룻밤 정도 같이 잘 수 있는 방법도 아마 수없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의 한계는 거기서 끝난다는겁니다. 연주하지도 않는 첼로를 가지고 다닌다거나, 별 관심도 없는 스쿠터에 대해 아는 척 한다거나, 누가 만들어 준 요리로 정말 요리에 재능있는 척 하거나, 누가 대신 써 준 편지로 사랑을 고백한다거나 하는 건 누가 녹음해 준 노래를 자기가 부른 척 하는 거나 별반 차이 없는 짓들입니다. 이런 '기술'의 마력은 그 '기술'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 되는 순간 훅 날아가 버릴 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기술'을 기술로 끝내지 않고, 자기의 내재된 속성으로 바꿔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생전 물가에도 가지 않던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수영 선수가 되는 일도 있고, 갑자기 섹소폰 연주의 대가가 되기도 합니다. 평생 티셔츠만 입던 사람이 패셔니스타가 되기도 하죠. 이런 '자기화'의 노력은 정말 높이 평가받을 만 합니다.

영화 '시라노'의 앞부분은 이런 '기술'이 사랑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살짝 포장해 놓습니다. 하지만 뒷부분에선 결국 기술은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해 줍니다. 사실 아바타가 진심으로 노력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뜨거운 형제들'만 열심히 본 사람도 알만 하죠.



세상이 아무리 얄팍해졌어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결국 연애의 성패는 사람1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사람2에게 알리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2가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도 거부하는지, 아니면 진심임을 알고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지에 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진심'을 전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이 생각보다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2가 자기를 향해 던져진 사람1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면서도 뿌리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2 들은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그게 진심이라는 걸 모르는 척 합니다(심지어 그 스스로에게도 모른다고 우기죠).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전달된 진심이 상대에게 승인을 받고, 그 자신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 '진심'이 사실과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을 때 비로소 '사랑이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 '시라노'는 그런 사실을 꽤 정확하게(때로는 암묵적으로 -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못생긴 여자가 잘생긴 남자에게 구애하는 방법' 같은 건 나오지 않습니다)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저는 이 영화의 대본을 올해 한국 영화 최고의 대본으로 꼽아야 할 듯 합니다.

결론: 이번 추석 연휴 영화 중 '무적자' '아리에티' '퀴즈왕' '시라노'를 본 결과, 최우선순위의 추천작은 역시 '시라노'입니다. 이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라도, 그 완성도는 충분히 인정하실 걸로 믿습니다.

아울러 이 배우가 나온다는 점도 충분한 흥행 포인트죠.^^



P.S. 그런데 대체 이 정도의 장비와 인력, 소품을 운영하려면 대략 천만원대는 받아야 운영이 가능할 듯 한데, 과연 이 정도의 돈을 들여 '사랑을 성취'하려는 사람의 시장이 그렇게 클까요? (뭐 어차피 그것부터 판타지라면...^^)

P.S.2. 희중(이민정)은 병훈(엄태웅)이 "파리에 있을때 오르세 박물관도 못 가봤다"고 하자 "오빠는 루브르도 30분만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이잖아. 모나리자 앞에서 사진 한번, 다비드상 앞에서 사진 한번 찍고..."라고(아주 정확하진 않습니다) 합니다만, 이건 좀 그렇습니다. 저 '다비드상'이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말하는 거라면(뭐 다른 군소 다비드상은 있을 수 있겠죠), 그건 루브르가 아니라 피렌체의 아카데미 갤러리에 있죠. 물론 화가 이름인 다비드를 말하는 거라고 우긴다면 별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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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제빵왕 김탁구'는 올해 최고의 히트작으로 기록될만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중반 이후 40%대의 시청률을 유지했고 16일 마지막회는 무려 50%를 넘는 대박 시청률을 기록했죠. 결말의 처리도 아쉬움보다는 환영의 목소리가 더욱 컸습니다.

그런데 좀 의아한 것은 각 매체들의 반응입니다. 모든 목소리가 입을 모아 '제빵왕 김탁구'의 성공을 축하하며 이 드라마의 장점을 열거하기 바쁩니다. 마치 '제빵왕 김탁구'가 그동안 한국 TV 드라마들이 잊고 있었던 미덕을 모조리 갖춘 걸작이며, 앞으로 만들어질 드라마들이 본받아야 할 상징적인 존재인 양 말입니다.

솔직히 의아합니다. '제빵왕 김탁구'는 웰메이드 드라마일까요? 지금 쏟아지는 찬사를 모두 감당할 만큼의 수작일까요?



초반부터 출생의 비밀과 엇갈린 가족사, 정실 소생과 서자의 대립 구도 등 판에 박힌 홈드라마적 구조 때문에 욕을 먹었던 '제빵왕 김탁구'는 월드컵으로 인한 경쟁 드라마의 부재 등 좋은 조건을 타고 화끈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도 이야기 구조 면에서 '제빵왕 김탁구'는 수시로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비밀을 알면서도 '단지 드라마 속 갈등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비밀을 공개하지 않는 전형적인 '답답이 진행'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신유경(유진) 캐릭터는 민폐 캐릭터로 취급받을 위기를 겪었죠.

게다가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인 26-30회로 가면서 원래 판타지였던 드라마는 완전히 동화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김탁구와 만나면 모든 사람이 착해지는 '착해져라 뽕' 마술 전개(심지어 한승재의 명령으로 김탁구 어머니를 납치하러 온 건달까지도 탁구의 절규를 보곤 바로 착해져서 어머니를 놓아 주고 사라집니다^^)는 참 즐겁더군요. 아울러 드라마의 진행을 보면 과연 무엇을 위해서 구회장은 병을 가장하고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과연 이게 함정이기는 했나요?


이런 부실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김탁구'를 선호했습니다. 다른 채널의 경쟁작들이 완전히 중년 시청자들을 포기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와 '장난스런 키스'였던 것도 큰 힘이 됐겠지만, 아무튼 '쉬운 진행'을 거쳐 '동화 수준의 진행'은 중년층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초반에 등장했던 '제빵왕 김탁구'의 막장성을 질타하는 기사들은 시청률이 40%를 넘으면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른바 방송가에 만연한, '잘 나가는 프로그램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한다'는 원칙이 작동된 것이죠. 야구에 비교하자면 '3할3푼 치는 타자에게는 타격코치가 조언하지 못한다'는 얘기와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시청자들이 좋아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은 드라마의 질 논쟁을 쑥 들어가게 하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역시 종영 후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죠. 모든 평이 찬사 일색입니다. 갖가지 이유를 끌어대 '김탁구의 성공요인'을 분석한답시고 난리지만 대개는 억지로 끼워다 맞춘데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연기력을 갖춘 중년 연기자의 힘이라지만, 대체 어떤 드라마에서 전광렬 전인화 전미선 정성모가 연기를 못 한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대한민국 드라마에 출연하는 45세 이상의 연기자 중에서 과연 '연기를 못한다'는 평을 들을만한 사람이 대체 몇명이나 있을까요?

김탁구의 성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대를 준 것도 분명하지만 감동과 기대를 준 드라마가 김탁구 한 편 뿐은 아니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제빵왕 김탁구'의 성공 요인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중들의 기호에 충실했다'는 겁니다.

'제빵왕 김탁구'는 음식으로 치자면 라면 같은 드라마죠. 고급 음식들은 참 많지만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불만 없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라면을 따라갈 것이 없습니다. 조미료가 들었네 기름에 튀겼네 가릴 사람은 여러가지를 가리지만, 그래도 그 가격에 이만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도 라면을 '우수한 요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빵왕 김탁구'를 낯간지러운 찬사로 포장하는 건 제발 그만 뒀으면 합니다. '명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는 거지 김탁구의 존재 가치나 효용을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김탁구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만듦새는 좀 부실하지만 대중의 기호를 잘 파악하고 거기에 부응한, 착하고 행복한 결말을 지향한 드라마'라는 것일 겁니다.

물론 김탁구가 마지막에 던진 메시지, 즉 처음부터 구회장의 어머니가 '대를 이을 아들'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중간의 이런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그래서 결국 그룹의 후계자 자리는 장녀 자경이 맡게 됩니다) 메시지는 유효합니다.

'제빵왕 김탁구'가 아무 의미도 없는, 배신과 변신이 난무하는 초막장 드라마와는 다른 레벨에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 드라마들보다 백배 낫다는 건 당연히 인정합니다("채널 돌리다 보면 얼마나 후진 드라마들이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김탁구는 정말 걸작이야!"류의 반응은 사양합니다).

다만 착하고 선량한 드라마,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드라마라고 해서 그 드라마의 모든 흠결이 사라지고, 갑자기 희대의 걸작 드라마로 칭송을 받아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P.S. 사실 대중이 사랑한 '김탁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착하고 성실하고 영리한 김탁구는 어쨌든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둔다는 행복한 판타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김탁구는 구회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설정입니다. (구회장으로부터 물리적인 도움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DNA로부터 영특한 두뇌와 불굴의 신념, 긍정적인 자세, 호감가는 외모 같은 우수한 요소들을 물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평범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바로 시청자 자신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성공하지 못하는 건 구회장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위안도 은근히 얻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김탁구'는 이 두가지 판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드라마였습니다. 진정한 성공의 비밀은 아마 이런 데 있는게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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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처음 방송된 KBS 2TV '성균관 스캔들'은 상당히 관심을 자아낸 작품입니다. 정은궐 작가의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워낙 좋은 작품으로 찬사를 받았고 그동안 수많은 곡절을 거쳐 마침내 드라마로 만들어져 공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원작과 얼마나 비슷하냐, 혹은 다르냐가 드라마나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다고 해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는 건 넌센스입니다. 실제로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작품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보여준 바 있습니다.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김성종 원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성도를 보여준 바 있죠.

그런데 의문은, 왜 거의 모든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진은 언제나 '원작 그대로'는 나쁜 것이고, '원작의 재해석'이 있어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작의 좋은 부분을 살리지 않을 바에는 왜 굳이 원작이 필요한 것일까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도입부에서는 원작의 강점을 살려 발전시킨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17세기말의 성균관과 그 주변을 현재의 대학가에 오버랩시키려는 시도들입니다. 대학가의 벽보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보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과장을 묘사하면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자막을 삽입하는 점, 공중에 글씨를 띄워 자막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는 것 등등의 새로운 기법은 야심찬 시도를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드라마의 시각적인 면은 원작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를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좀 달라집니다.

원작과의 차이를 먼저 살펴보면, 선준의 캐릭터가 좀 다릅니다. 소설 속의 선준은 어진 마음과 냉철한 두뇌를 갖춘 최고의 완벽남입니다. 소설 속의 선준이라면 공부를 못하는 동료가 애써 모은 머리칼을 하늘에 날려 버리는 등의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굳이 왜 선준을 '까칠도령'으로 바꿔 놓았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아무튼 늘 온화한 미소로 윤희를 감싸는 선준의 모습을 기대했던 원작 팬들에겐 참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초반에 선준이 까칠한 모습을 보여 윤희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드라마적인 긴장감을 높이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면 상당히 실망스럽습니다. 오히려 이런 설정 때문에 '성균관 스캔들'의 도입부는 개성을 잃어버립니다.

(까칠한 수재남과 자존심 강한 여주인공의 대립으로 시작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많았고,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박유천과 박민영의 연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윤희 역이 좀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긴 대사만 주어지지 않으면 박민영은 충분히 윤희 역을 소화할 수 있는 재목입니다.

박유천 역시 일천한 연기경력을 감안하면, 놀랄만큼 안정된 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까칠도령으로서의 연기에서는 그닥 허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만, 수재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에는 살짝 아쉬움이 느껴집니다(하기사 이건 '장난스런 키스' 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쨌든 1,2회만으로도 박유천은 연기 면에서는 동방신기의 다른 동료들보다 확실하게 한발 앞서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앞서 연기자로 변신한 모습을 보여줬던 정윤호나 김재중의 참기 힘든 연기와는 다른 레벨이었다고 평가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 대목에선 연출진과 박유천의 교감이 상당히 돋보입니다.




가장 큰 기대를 모으게 한 건 역시 여림 역의 송중기. 사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영상으로 다시 만들어지면 가장 주목을 끌 것이 여림 역할이란 건 너무도 자명했습니다. 문제는 이 역을 맡은 배우가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하는 점인데, 드라마가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역시 가장 큰 수혜자는 송중기가 될 듯 합니다.



반면 유아인이 걸오 재신을 연기한다는 것은 최고의 미스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선준, 여림, 재신이 모두 꽃미남이기만 하다는 건, 원작과 달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드라마의 균형을 이루는 데 상당히 장애가 될 조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기본 틀은 윤희를 꼭지점으로 한 세 남자의 알듯말듯한 경쟁입니다. 그렇다면 선준, 여림, 재신은 각각 다른 매력을 보여줘야 시청자에게 좀 더 설득력이 있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원작의 재신이 보여주는 야수같은 남성미를 포기한 것이 영 아쉽습니다.



1, 2부를 봐선 윤희가 어떻게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지까지의 과정이 원작에 비해 상당히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 원작에선 1/4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이 1/8 정도로 압축되어 들어갔다는 얘기죠. 이건 뒷부분에서의 이야기가 원작보다 늘어난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어떤 얘기가 나올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원작 팬들에게는 성균관 입소 전에 진행되는 알콩달콩한 에피소드가 모두 희생된게 아까울 듯 합니다. 특히 원작의 은근한 이야기에 비해 새로 추가된 액션 스토리가 그리 설득력이 있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저런 부분을 종합해 볼 때 '성균관 스캔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는 꽤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물론 현재의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은 한폭의 드라마이고, 앞으로의 전개에 따라 썩 괜찮은 작품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이 드라마의 앞날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지나친 '현대'의 개입입니다. 아무리 성균관이 당대 수재들의 요람이고, 이 성균관을 현대의 대학가에 덮어쓰워 재치있는 연출력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강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기 만점의 성군 정조가 등장한다는 점이 우려를 낳습니다. 거의 모든 드라마가 정조에 대한 존경을 깔고 시작하기 때문에 정조에게 대항하는 노론은 악의 존재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17세기 조선은 왕정 체제에 있었고, 정조가 아무리 현명한 군주라 해도 결국은 민주 사회의 지도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재자라는 점을 간과하면 곤란합니다. '현대적'인 시각을 가미하면, 오히려 왕의 1인통치를 부정하고 권력의 분산을 지향한 신하들이 보다 '민주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정조가 현명하기 때문에 왕권 강화가 선(善)이라는 것은 지극히 구시대적인 발상인 것이죠. (혹은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고..^^)

이런 기본적인 모순을 무시하고 드라마에 자꾸 '21세기 한국'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할수록 작품은 점점 더 삐걱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소설 원작에서도 그런 시도는 수시로 불쑥불쑥 등장합니다만, 전체 원작을 지배하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정서에 비하면 매끄럽게 넘어가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차별화'가 어쩌다 '생각 있는 드라마로 보이려는 시도' 쪽으로 기울게 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재난이 시작될 거란 우려를 지울 수 없습니다. 아, 물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그야말로 기우일 겁니다.



P.S.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지금이라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그 흔한 로맨스 소설'과는 천지 차이라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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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MBC TV '글로리아'는 큰 기대작은 아니었습니다. 주말드라마에서 계속 재미를 보지 못한 MBC가 뭔가 색다른 시도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이었고, 주말드라마의 막장화에 재미들린 KBS는 유부남을 유혹하는 섹시한 독신녀의 아슬아슬한 플레이로 승부를 건 '결혼해주세요'로 시청률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글로리아'는 신선하면서도 짭조름한 재미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이제 시청률 두자리를 넘어서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재벌 세컨드의 아들, 재벌 세컨드의 딸, 구질구질한 달동네, 욕쟁이 할머니, 소위 말하는 루저들의 행진입니다. 그런데 문득 두 편의 드라마가 생각납니다. 바로 MBC의 전설적인 히트작 '서울의 달'과 KBS의 히트작 '파랑새는 있다'입니다.


김운경 작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두 편의 드라마는 모두 찌질하기 짝이 없는 서민 군상들의 정말 하찮은 고민과 생활고를 그려내며,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 호평받았습니다. 그 직후에는 이 분위기에 편승한 모방작들이 여러 편 등장했지만, 한동안 이런 배경의 드라마는 보기 힘들었죠.

'글로리아'는 거기에다 삼류 나이트클럽이라는 배경까지 보탰습니다. 배경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만 설명.

김밥장사에서 신문배달까지 생계를 위해 안 하는게 없는 억척녀 진진(배두나)는 달동네에서 언니 진주(오현경)와 함께 힘겹게 살아갑니다. 진주는 한때 신인상을 싹쓸이하던 유망한 가수였지만 사고로 인해 다섯살 지능을 가진 장애인이 됩니다.

이들 주변에 진진의 소꼽친구인 동아(이천희), 동아의 조카 어진(천보근),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억척 할머니(김영옥)이 포진해 있고 저 바깥 세상에는 재벌가의 서자인 강석(서지석)과 재벌가의 서녀 윤서(소이현), 강석의 생모이자 왕년의 인기 가수였던 정난(나영희) 등이 이들을 지켜봅니다. 이들을 엮어주는 틀이 바로 나이트클럽이죠. 진진과 진주의 삶의 터전인 나이트클럽 무대에 정난이 서게 되면서 두 세계가 어우러집니다.


물론 '글로리아'는 태생적으로 판타지일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전제나 과정 없이 어느날 우연히 무대에 선 진주가 글로리아라는 이름의 나이트클럽 가수가 되고, 정난과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고, 아마도 드라마 뒷부분에는 뭔가 진짜 가수가 될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는 별 가능성이 없는 일이 되겠죠. 뭐 더 따지면 윤서와 동아, 강석과 진진의 관계 역시 꿈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라고는 해도 그를 통해 비쳐지는 세상이 진짜라는 건 '글로리아'의 큰 매력입니다.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어둡게만 그려질 필요는 없겠죠. 그러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구성이며 주고 받는 대사의 걸찍한 맛에서 '글로리아'는 대단히 매력적인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그 매력의 한복판에는 배두나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일찌감치 연예계에 뛰어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배두나의 '배두나스러움'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수십년 더 연기 활동을 하겠지만, 이미 배두나라는 배우는 절대 악역이나 사려깊은 배신자 역할, 혹은 재벌가의 상속녀 같은 역할은 맡기 힘들 듯 합니다. 그 개성이 너무나 확연하게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루저의 여신' 정도라고나 할까요.

잘 나가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뭔가 세상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고, 부모나 가족으로부터도 항상 최우선의 자리는 공부 잘하고 싹싹한 언니나 동생에게 양보한 듯한 인물. 자기 혼자 잘 되기 보다는 가족이나 친구가 잘 되는 길을 택하지만 그 보상은 충분히 받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 배두나의 가치는 독보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느끼는 관객들이 항상 존재해왔고, 그 관객들이 배두나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작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도 배두나는 세상의 약삭빠른 이치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정의감 넘치는 영어선생님 역을 맡았습니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니죠. 배두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대개 올곧게 살아가려 하지만 아무래도 영악하지는 못하고, 다소 어리바리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사물을 보는 데에도 뭔가 독특한 자기만의 시각을 갖고 있고,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그런 입장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 인물이죠. 

'플란다스의 개'며 '고양이를 부탁해'(위 사진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 '청춘'이며 '괴물' 등 배두나의 필모그래피들을 생각해보시면 이런 특징은 쉽게 추려집니다. 드라마에서도 메가 히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없지만 '학교' 이후 배두나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어쨌든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최근 들어 마이너리티(인종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역할로 각광받고 있는 일본 배우 우에노 주리의 선배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배두나는 감히 '루저의 여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포스를 갖췄습니다.

어찌 보면 배두나는 극중의 배두나와 현실의 배두나를 보는 사람들이 혼동할 정도의 독특한 개성을 차지했습니다. 약간 높은 목소리와 논리보다는 어지러운 말싸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캐릭터죠. 머리가 아주 좋지는 않지만 사람들과의 의리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의 대부분입니다. 물론 이건 100가지 변신을 시도하는 연기파 배우들에게는 미덕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장점일 수도 있죠. 좋아하는 스타에게서 기대하는 모습을 늘 볼수 있으니까요.



미니시리즈라면 이야기가 한창 중반이겠지만 50부작인 '글로리아'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설정상 이 주인공들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한참 가시밭길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리아'의 독특한 매력은 최근 주말 드라마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듯한 불륜 가족 드라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걸로 느껴집니다.


P.S. '글로리아'에 대한 최근 기사 중에 폭소를 자아낼만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배두나가 부르는 노래 '글로리아'가 아바의 '마마 미아'를 편곡한 거라는 주장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겁도 없이 이런 주장을 하나 잠시 아연했습니다.

많은 가수들이 불렀지만 아무래도 '글로리아'는 로라 브래니건이죠. 공연장 천장을 뚫어 버릴 듯한 폭발적인 가창력은 지금도 필적할 가수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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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극장에 가서 표값을 볼 때마다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꽤 흔히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일단 극장에 걸리면 모두 같은 값입니다. 1억달러를 들여 찍은 영화건, 1억원을 들여 찍은 영화건 관객은 똑같은 돈을 내고 보게 됩니다. 

이런 환경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싼 영화건 비싼 영화건 똑같은 가격이 매겨진다면 비싼 영화 쪽이 손해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영화가 8000원 받을 때, 대작 영화는 한 10000원이나 12000원 정도 받아서 더 빨리 자본 회수를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이런 시스템은 작은 영화 쪽에 훨씬 더 손해입니다.



티켓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관객의 입장에선 기왕이면 좀 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를 봐야 '본전을 찾는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실망스럽더라도 대규모 전투신이나 유명 스타의 소문난 베드신, 엄청난 CG등 '볼거리'라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인지상정이죠. 물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제작비와 만족도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만 말입니다.

'죽이고 싶은'은 누가 봐도 단촐한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단 두명. 전체 출연진을 다 합해 봐야 열명 남짓입니다. 배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두신을 제외하면 병원 주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온 몸에 마비가 진행중인 환자 김민호(천호진)는 옆자리에 새로 온 환자 박상업(유해진)을 보고 평생 잊지 못하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뇌손상인 박상업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김민호는 원수가 옆에 있건만 일어서서 박상업의 옆까지 걸어갈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박상업이 조금씩 기억을 회복해 가면서, 상황은 또다시 일변합니다.

누가 가해자인지를 가리는 게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기 때문에 흔히 이 영화는 스릴러로 분류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액션 스릴러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두 주인공이 모두 침대에 누워 있지만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아무래도 액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액션이 가능하다는 거냐?'는 질문이 떠오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시면 그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액션이 펼쳐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실 겁니다.



워낙 등장인물이 적고 배경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영화는 상당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무대극이었다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굳이 영화 중에서 비교하자면 마이클 케인과 주드 로가 열연했던 영화 '추적(Sleuth)' 정도일까요. 두 남자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수트를 입고 우아하게 싸우는 '추적'과는 달리 '죽이고 싶은'의 두 남자는 환자복 차림으로 아주 추하게 진흙탕 싸움을 벌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싸움이 가능하냐는 대목에서 연출진의 아이디어가 빛납니다. 일단 방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다 사용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특공대원이나 무술 대가를 설명할 때 흔히 '온 몸이 무기'라고 하지만 이 영화의 두 배우에겐 '잡히는게 다 무기' 입니다. 여기서 웃음과 함께 비애가 느껴집니다.

(사실 이 영화의 액션 진을 보다 보면 영화 전체가 악몽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악몽 속에선 있는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죠. 등장인물들의 상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투지만 있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 그야말로 악몽인 셈이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야구 한국시리즈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도 두 남자는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시라고 하면 간단할 듯 합니다.

구성을 보면 다른 어떤 영화보다 배우의 몫이 클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두 배우는 자기 몫을 톡톡히 합니다. 천호진은 마초적인 외양에 비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배우로 꼽힙니다. 그래서 '악마를 보았다'의 형사반장 같은 역에는 미스캐스팅의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뭐 경찰의 무기력함을 상징하는 설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듯^^). 반면 '죽이고 싶은'에서는, 과거는 알수 없지만 어쩐지 연민을 자아내는 초로의 환자 역할에 매우 어울립니다.



물론 영화의 활력은 대부분 유해진에게서 나옵니다. 아마도 상당 부분 애들립일듯한 유해진의 코미디는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에 적절한 조미료로 작용합니다. 그러면서도, 희극적인 얼굴에서 순간 범죄자의 얼굴로 바뀌는 표정 연기는 이미 이 배우가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 섰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이 영화 관계자와 잘 아는 사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상당히 초기부터 지켜 봤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롯데 자이언츠적인 요소(^^)가 정점 강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기도 했습니다(충분히 아실 수 있겠지만 감독이 부산 출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반전의 요소가 조금 더 불명확했던 상태가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 극장에 개봉되어 있는 영화는 그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이 말끔하게 의혹을 해소해 줍니다. 분명히 출연하긴 하되, 마지막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한 배우는 대체 출연료를 얼마나 받았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아무튼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대략 합의가 이뤄진 내용이 있습니다. '관건은 극장에까지 관객을 데려오는 거다. 설정과 규모를 보고 이 영화를 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일단 보고 나면 괜히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다'라는 겁니다. 이런 의견에는 대다수가 동의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화려한 캐스팅과 물량으로 관객을 유혹한 뒤 막상 보고 나면 '이 뭥미?'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와는 정 반대 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이 영화는 조원희/김상화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아무쪼록 이 두 사람이 이번 영화로 재능을 인정받아 좀 더 큰 예산의 영화를 만들어 선보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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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신민아는 처음부터 비교될만한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었죠. 이미 이 드라마가 제작되기 전부터 신민아의 구미호 캐릭터가 곧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캐릭터와 비슷한 것일 거라는 추정이 나왔고, 기자간담회때 방송된 영상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추측을 했을 겁니다.
 

이때문에 신민아에게 그런 질문이 던져졌고, 신민아는 "일부 장면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정 반대의 캐릭터"라고 답변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물론 신민아가 그 자리에서 저렇게 대답하는 건 정답입니다. 행여 그런 자리에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작가나 제작진에 대한 결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신민아에게든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이하 여친구)' 제작진에게든, 신민아나 이 드라마가 전지현이나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자꾸 비교되는 건 나쁠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신민아는, '포스트 전지현'으로 지목된 적이 있었죠.



지난 2008년, '엽기적인 그녀'를 연출한 곽재용 감독이 또 한편의 로맨스 판타지 영화를 내놨습니다. 제목은 '무림여대생'. 흥행 성적은 전국 관객 동원이 10만에 미치치 못하는 재난성 영화였지만 이 영화에는 사뭇 흥미로운 점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신민아는 전통의 비전 무술가의 후계자입니다. 차에 치어도, 윗집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망치를 머리에 맞아도 끄떡 없는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죠. 그런 신민아가 꽃미남 대학생 유건에게 반하고, 남자에게 보호받는 사랑스러운 여자 행세를 하기 위해 무공을 감추고... 그러면서 신민아만이 상대할 수 있는 악의 무공 고수가 등장해 이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설정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만, 그리고 신민아의 청순미는 이 영화에서도 반짝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전개가 관객의 손바닥 안에서 너무 오래 맴돌기만 합니다.

물론 이건 결과론이고, 이 영화를 보면 신민아를 '포스트 전지현'으로 육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게 여기저기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 영화의 무술 여대생은 엽기적인 그녀의 변형입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남자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엽기녀 전지현은 초인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말빨과 폭력성으로 남자주인공 차태현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감히 대들 수 없는 캐릭터였죠^^)을 가진 신비로운 여자라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찰랑찰랑한 생머리를 나부끼는 청순한 외모에서 가공할 전투력이 뿜어나올 때, 그 위력은 배가됩니다. 게다가 양쪽 모두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남자 주인공을 당황하게 하고, 그것이 웃음의 코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살짝 부족한 연기력을 커버할 때에도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대로 '여친구'로 계승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엽기적인 그녀'에서 바로 '여친구'로 이어지기보다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무림여대생'을 거쳐 '여친구'로 넘어오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죠. 아울러 '여친구'의 구미호에게서 같은 홍자매의 작품인 '환상의 커플'에서 본 한예슬의 그림자를 느끼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내용 뿐만 아니라 연출 역시 그렇습니다. 19일 방송된 '여친구'에서 나풀거리며 이승기의 뒤를 따라 뛰는 신민아의 모습이나, 이승기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검술 액션 신 등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쓴 시나리오가 영화로 재현되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습니다. 제작진도 '엽기적인 그녀'와 '여친구'의 관계에 대해 그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신민아가 두 캐릭터를 '정 반대의 캐릭터'라고 말한 것도, 차태현을 좋아하지만 차태현으로부터 결국을 멀어지려고 스스로 마음 먹는 엽기녀 전지현과는 달리, 훨씬 마음 속 깊이 이승기를 좋아하지만 오히려 이승기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구미호의 성격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분에서 충분히 납득할만 합니다. 하지만 일단 '인간과는 전혀 사고방식이 다른 구미호가 인간 세계에서 멀쩡한 인간 남자와 사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는 드라마의 등뼈 자체가 '구미호의 엽기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캐릭터의 차이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드라마 '여친구'의 본질적인 유사성에 비하면 상당히 지엽적인 부분입니다.



어쨌든 이미 '원조 청순 글래머'로서, CF 퀸으로 자리를 굳힌 신민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한방의 히트작'이었을 것이고, 이미 수년 전부터 '포스트 전지현'의 강력한 후보였던 신민아에게 적당한 것 역시 '엽기성'이 강조된 작품일 것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적 선택입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 '무림여대생'에 이어진 드라마 '여친구'는 그 전략의 두번째 도전인 셈이죠.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이 두번째 도전은 상당히 성공적일 듯 합니다. 누가 봐도 긴 머리를 나풀거리는 신민아가 이 드라마에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김탁구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 성공이 '대성공'으로 끝날 지,  '의미 있는 성공'에 그칠 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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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제빵왕 김탁구'에서 김탁구 윤시윤에 이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는 구마준 역을 맡고 있는 주원입니다. 그리고 그의 프로필을 보면 2006년 아이들 (idol) 그룹 '프리즈' 출신이라는 이력이 나옵니다. 1987년생인 주원이 19세때의 일이죠. 그리고 나서 주원은 뮤지컬 쪽으로 진출해 경력을 쌓은 뒤 이번에 드라마에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비와 붐이 멤버였던 '팬클럽'이나 원더걸스의 유빈과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멤버였던 '오소녀' 처럼 제대로 활동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그룹들도 다 기억하는 아이들 세계에서, 이상하게도 프리즈라는 그룹에 대해서는 '도대체 기억이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대체 왜 그런 걸까요?

간단히 말해 이 프리즈는 정상적인 아이들 그룹과는 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리즈라는 그룹은 지난 2006년 초, 문준원(19, 이상 나이는 모두 당시 발표 나이), 김윤미(23), 한진희(20), 이경은(20), 황바울(21)이라는 다섯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습니다. 여자가 3명, 남자가 2명이라는 구성은 지금으로선 꽤 희한하게 보이지만 서지영과 이지혜 외에도 여성멤버 1명이 더 있었던 초기 샵이 이런 구성이었죠. 외양으로는 이상할게 전혀 없었습니다.


(네. 이 무렵에도 당연히 강동원 얘기가 나왔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프리즈가 활동하던 공간은 쇼 프로그램도, 예능 프로그램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비바 프리즈'라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었다는 거죠. 2006년 11월부터 SBS에서 방송된 교육용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프리즈는, 가수로서 활동하는 그룹이라기보다는 '비바 프리즈'의 출연 캐릭터 팀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데뷔 초기부터 '아이들 그룹'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키즈 엔터테인먼트 그룹', 혹은 키즈 싱어라는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실제로 만나 본 이들은 꽤 가능성을 보이는 팀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훤칠한 키에 잘생긴 준원이 가장 눈길을 끌었고, 그저 '미인대회 출신'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경은이라는 멤버가 있었죠.



이 친구도 연기자로 나섰습니다. 지난해 케이블TV 드라마 '하자 전담반 제로'에 출연한 이경은과 동일인물입니다. 미스코리아 2005년 선 출신이죠.



아무튼 이런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프리즈는 제법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불행히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만, 멤버들이 원했던 것과 회사가 원했던 것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듯 합니다. 팀 해체와 함께 멤버들은 각각 자기 길을 가게 되죠.

그리고 본명 대신 주원이란 이름으로 뮤지컬계에서 활동하던 문준원은 '제빵왕 김탁구'를 통해 안방극장에 안착하게 됩니다. 좋은 출발입니다.



당시 프리즈 활동 때의 영상입니다. 주원이나 이경은이나 지금보다는 조금 살이 붙은 듯한(젖살?) 모습이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튼 유망주들의 변신과 과거는 늘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실 2006년 초에 이들을 불러다 놓고 인터뷰를 했을 때, 방송 카메라도 아닌 스틸 카메라 앞에서도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던 이들을 볼 때에는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첫발을 잘 디딘 연기자 주원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성공할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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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상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빈의 '아저씨' 상영관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만치 관객들의 기대가 컸다는 얘기였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난 첫번째 느낌은 '대체 한국영화계는 그동안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고 뭘 했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나가 작품상을 받을 영화가 아닙니다. 요리로 치자면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대단한 명품 음식이 아니지만, 싸고 맛있는 떡볶이 같은 영화입니다.

무슨 대단한 상상력이나 엄청난 기술의 힘, 혹은 거액의 제작비가 필요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를 등한히했던 영화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꽃미남 배우의 제대로 된 활용이란 면에서도 이 영화는 동료 감독들에게 귀감이 될만 합니다.



달동네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태식(원빈, 이름은 한참 나중에 나옵니다)의 유일한 친구는 매일 혼자서 노는 소미(김새론).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녀입니다.

하지만 마약중독자인 엄마가 섣부른 욕심을 내는 바람에 엄마와 소미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직간 암투에 뛰어든 경찰은 소미의 운명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황. 이제 소미를 구할 수 있는 건 '옆집 아저씨' 하나 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줄거리.

소미에게 다행인 건, 이 옆집 아저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설정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한 소녀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킬러의 이야기 '레옹'과,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온 프랑스의 인신매매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테이큰'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입니다(뭐 '맨 온 파이어'를 살짝 덮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대개 이런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특수부대원에 대한 판타지입니다. 80년대 한국에도 '사형집행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던 돈 펜들턴의 펄프 픽션 'Executioner' 시리즈는 아마도 이런 판타지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소설은 월남전 그린베레 출신인 맥 보란이 스스로 '1인 군대'를 선언하고 여동생을 망친 마피아에게 단신으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바로 이런 판타지에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 '사법 제도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과 불만', '여자나 어린이에 대한 보호'와 같이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잘 섞어 폭발력 강한 혼합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원칙에 민감한 법조계 관련 인사들은 법 질서에 근거하지 않은, 사사로운 정의 실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이 영화의 주제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들로서는 영화 속 원빈이 악당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면서 동정심보다는 쾌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다크 나이트'같은 속터지는 영웅 이야기보다 이런 영화를 100배 정도 선호하는 유전자가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료만 좋다고 바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만 이정범 감독의 세심한 솜씨는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것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좋은 배우들입니다.

악당 형제 역의 김희원과 김성오, 믿음직한 수사관 역의 김태훈(김태우의 동생이죠), 그리고 낯설지만 적역에 들어간 태국 배우 타나용 웡트라쿨까지 다양한 조역 배우들이 최상의 연기를 펼칩니다. 연기 못하는 아역 배우란 원래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김새론은 참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인물 배치는 현역 최고의 꽃미남 스타인 원빈이 케이크 꼭대기의 체리 역할을 유감없이 해낼 수 있게 하는 탄탄한 팀워크를 만들어 줍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원빈은 정확한 타깃 역할만 하면 되는 구성입니다. 그에게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아 골문까지 드리블을 하거나 상대 수비를 유인하는 일, 혹은 수비에 가담하는 일 따위를 맡기지 않고 오직 골을 넣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대목에서 이정범 감독의 용병술은 빛을 발한다고 하겠습니다. 

원빈의 연기력을 논하기에는 대사가 너무 적기도 하지만(녹음 때문인지, 발음 때문인지 중요한 대사가 그리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리한 요구 없이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한 것이 좋았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원빈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작품의 원빈보다 멋집니다. 역시 아무리 명품이라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법입니다. 이정범 감독과 만난 건 원빈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저씨'는 정당하게 느껴지는 폭력(물론 실제로 정당한 것과는 큰 거리가 있죠)과 적절한 유머("나, 옆집 아저씨야" "중문과, 너 오늘 알바비 날렸다" 등등), 속도감 넘치는 구성과 아동 대상 폭력에 대한 공분이 무르익은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불만 붙이면 바로 터질 수 있는 폭탄같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판타지 스타일의 마무리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지만, 오히려 여성층은 현재의 결말에 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걸 보면 이 영화의 흥행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 듯 합니다.

분명 '아저씨'는 한국 영화사에 획을 그을 걸작형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영화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장인 이정범'의 발견이란 면에서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듯 합니다.



P.S. 특수부대원 판타지와 관련: '람보' 시리즈 1편 '퍼스트 블러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트라우트먼대령이 람보를 뒤쫓는 경찰들에게 람보가 얼마나 시골 경찰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아저씨'에서도 국정원 직원들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설명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라 좀 아쉬웠습니다. (혹 다 찍어 놓고 편집에서 삭제된 것이 아닐지...)


P.S.2. 이렇게 시작된 '아저씨'의 속편은 혹시 특수부대원 '아저씨'가 특수 업무 수행을 위해 투입되는 시리즈로 이어지게...되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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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면 왕따된다는 영화 '인셉션'. 본 사람도 또 보고 아이맥스로 봐야 진짜배기라고들 소문이 자자한 인셉션. 요즘 단연 장안의 화제입니다.

그런데 결말이 두가지네 어쩌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반지가 어쩌네 저쩌네, 킥과 토템이 어쩌네 저쩌네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괜히 화제를 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다 슬쩍 잠들었다는 분,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없었다는 분, 대체 뭐가 뭔지 헷갈린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난 다 봤는데도 당최 먼 소린지를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단,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절대 읽어선 안 될 포스팅입니다. (아, 드물게 '난 결말을 알고 봐야 영화가 눈에 들어온다'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런 분들은 보셔도 좋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무시하고 그냥 읽은 다음에 스포일러 작렬 어쩌고 화내 보셔야 소용없습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의 덩어리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는 분들을 위한 해설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설계자는 뭐고 추출은 뭐냐?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해설: '인셉션'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꿈을 연결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가거나 표적이 되는 사람을 자신의 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 다른 사람의 꿈 속에서 깊이 감춰진 비밀을 가져오는 것을 추출(extrac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꿈의 설계자(architect)입니다. 이 사람은 때로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꿈 추출의 표적이 되는 사람이 현실로 착각할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친숙한 공간을 그대로 모사해내기도 합니다. 본래 영화의 앞부분에선 내쉬(루카스 하스)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팀의 설계자이지만, 무능한 배신자로 밝혀지고, 결국 파리에서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가 설계자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밖에 꿈 속에서 활동하는 캐릭터로는 포인트맨(pointman)과 페이크맨(실제론 forger)이 있습니다. 전투 게임에서 근접전 요원을 말하는 포인트맨은 이 영화에선 꿈과 현실을 출입하며 안전을 관리하는 전술전문가를 말하고, 페이크맨은 꿈의 특징을 활용해 모든 캐릭터로 변신하는 일을 맡습니다.

 

2. 대체 맬은 왜 모든 사람의 꿈에 등장하나?

엄밀히 말하면 맬(마리옹 코티아르)은 별도의 인격이라기보다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머리 속에 박힌 하나의 소인격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평소에는 활동하지 않지만 코브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 즉시 활성화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무 꿈에나 다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코브가 들어가는 꿈에만 등장하는 겁니다. 사실 이 맬의 존재는 '인셉션'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이토의 꿈에 들어갔다게 맬에게 총질까지 당한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코브와 함께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는 일이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코브와 함께 꿈속 일을 하는 건 자살행위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2세 피셔(킬리앙 머피)의 꿈 속에 들어갈 때 그렇게 무방비상태였다는 건 아서의 무능함을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3. 왜 한 단계 깊이 들어갈 때마다 팀은 한명씩 남을까?

피셔의 꿈에 들어간 뒤, 꿈1에서 꿈2로 갈 때 유수프(딜립 라오)는 남아서 차량의 운전을 맡습니다. 이건 꿈1의 주인이 유수프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꿈2의 주인은 아서였고, 아서는 꿈3으로 가지 않죠. 이건 그 사람이 남아서 더 깊은 단계로 가는 멤버들의 몸을 돌보고, 적절한 시기에 음악 신호나 킥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뭐 이건 모두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꿈 3에서 현실로 바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고, 깨어날 때에도 꿈3-꿈2-꿈1-현실의 순서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한 스테이지에는 한 사람씩 남아서 그 과정을 관리해야 합니다.

 

4. 왜 다들 꿈 속에서 천하무적인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인셉션'의 배경이 되는 세상에서는 꿈 추출이 하나의 전문직이 되어 있습니다. 코브와 아서 팀 외에도 기억 추출을 위해 암약하는 무리들이 꽤 있다는 뜻입니다.

꼭 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들 전문가들은 꿈 속에서 거의 람보같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터프해 보이는 무장 경호원들도 이들에게는 1:1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현실세계의 킬러 하나가 코브에게 '어이, 너 현실에서도 꿈속처럼 터프하냐?'고 물어보기도 하죠.)

그건 이들이 꿈 속에서의 활동을 위해 다양한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꿈 속에서 이들은 사고하는 존재인 반면, 나머지 인물들은 그냥 표적 인물의 무의식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 계산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일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떨어지는 게임 속의 졸때기들처럼 주인공들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나 꿈속에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하죠.^ 아마 '인셉션 2'가 나온다면 그때는 주인공들이 다 날아다닐 겁니다.


5. 자살신에서 왜 둘은 젊은 얼굴인가? 실수?

아내를 림보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코브는 아내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지 말라는 인셉션을 하고, 그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철길에 누워 죽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 아내가 "나와 함께 늙어가겠다고 맹세했잖아!"라고 말하자 코브는 "이미 그렇게 했었다"고 대답합니다. 즉 림보에서 보낸 50년 동안, 그들은 노인이 되어 갔다는 걸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노인이 되어 거리를 걷는 이들의 뒷모습도 나옵니다.

하지만 앞서 나오는, 철길에 누운 자살 장면에서 코브와 아내는 젊은 얼굴 그대로입니다. 이걸 놀런 감독의 실수라고 지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실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랄까, 연출자의 의도라고나 할까요. 그 시점에서 이들의 얼굴을 노인으로 바꿔버리는 건 상당히 김빠지는 일이 됐을 법도 합니다.

영화 속에선 페이크맨 임스(톰 하디)의 얼굴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장난이 여러 번 등장하죠. 한마디로 그 정도는 알아서 이해하라는 것이 놀런의 입장인 듯.


6. 림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인가, 아니면 개인에게 하나씩의 림보가 있나?

사실 매우 혼란스러운 부분입니다. 만약 림보가 공통이라면, 코브와 아내가 림보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림보는 본래 한 사람에게 하나 씩 존재하는 공간이며, 림보에서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꿈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 뿐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코브와 피셔가 연결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코브와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가 림보로 내려가 피셔를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하에서 보면, 코브가 "사이토를 찾아서 데려가겠다"며 림보에 남는 설정이 매우 애매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코브는 사이토보다 먼저 림보에 온 것이고(코브와 아리아드네가 림보로 가고 꽤 시간이 지나 사이토는 송풍구에 수류탄도 던지고 하며 나름 활약을 하다가 꿈3 스테이지에서 숨을 거둡니다 - 정확하게 말하면 꿈1에서 죽는 거죠. 어쨌든 코브와 아리아드네보다 늦게 림보로 가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사이토만 노인이 되어 있고 코브는 젊은 채로 있다는게 말이 안 됩니다. 늙어도 코브가 더 늙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죠.

여기에 대한 해결 방법이 있긴 합니다. 아리아드네와 피셔가 뛰어내리는 킥(자살입니다)으로 꿈3에 돌아간 뒤, 코브도 꿈3으로 복귀했다가 꿈1에서 물에 빠져 죽어서(꿈1의 코브는 물에 빠진 미니버스 안에 안전벨트로 묶여 있죠^^) 다시 림보로 간다는 설정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코브가 한번 빠져나왔다가 다시 림보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코브는 젊고 사이토는 늙어 있다는 것도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코브가 호기있기 "나는 사이토를 찾아 데리고 갈게! 너희는 먼저 가!"라고 한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혹이 남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한번 더 쪼갭니다.




7. 비행 시간의 문제 - 왜 20분만 남아 있나?

주인공들이 비행시간이 10시간이나 되는 LA행 비행기 안을 '범행 장소'로 채택한 것은, 이들이 꿈1 스테이지에서 일주일 정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사이토가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사이토가 림보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는 모든 걸 계획보다 서둘러 진행하게 되죠.

(일반 꿈이라면, 사이토는 꿈 속에서 죽으면 바로 현실로 살아나지만 이들은 10시간 동안 깨지 않게 하기 위해 유수프의 독한 약을 썼기 때문에 꿈1에서 죽으면 림보로 떨어진다는 설정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스는 "나는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기 싫으니 여기(꿈1)서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코브는 "10시간이면 꿈1에서 1주일인데, 그 사이에 피셔의 경호원들에게 잡혀 죽을게 뻔하다. 차라리 일정을 앞당겨 빠른 시간 안에 일을 끝내고 킥으로 빠져 나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꿈2, 꿈3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결국 꿈 1 기준으로 약 2시간만에 모든 일정을 다 해치워 버립니다. 현실에서는 1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죠.

무슨 말이냐면, 바로 위 항에서 얘기한대로 코브가 미니버스 안에서 익사 - 그리고 바로 림보로 가서 사이토를 구출하는 과정이었다면 아무리 해 봐야 현실에서는 1시간 이상 지나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코브와 사이토가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LA 도착 20분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7-8시간 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혼자 추측해 봤습니다. 그 대답은 다음 질문에서 해결합니다.


8. 맨 첫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 장면에서 코브는 의식을 잃은 채 해변에 밀려 옵니다. 영화를 죽 보다 보면 그 해변이 바로 림보에 빠진 사람이 처음 도착하는 망각의 해변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코브는 그 상태에서 사이토의 부하들에게 이끌려(어떤 사람은 림보에서 단 둘만 살고, 어떤 사람은 림보에서도 부하들에게 둘러 싸여 삽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죠) 이미 노인이 되어 있는 사이토에게 끌려 갑니다.

사이토는 코브의 총과 토템을 보고(물론 이것도 영화를 한참 더 봐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죠) 그를 어렴풋이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사이토는 말합니다. "오래 전 꿈에서 본 젊은 남자가 이런 걸 갖고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남자..."


이 말은 코브가 이 전에도 사이토를 죽이러(즉, 죽여서 림보에서 끌어내러) 왔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 후반에서 사이토가 꿈3에서 죽고, 곧바로 코브가 사이토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현실-림보-현실-림보로 몇 차례에 걸쳐 다시 다이빙을 한 끝에 간신히 사이토에게 도달하고, 그리고서도 실패를 겪은 뒤 겨우 다시 사이토를 만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이렇게 설명하면 위에서 얘기했던, 시간이 한참 비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 안에 이런 설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지만, '매트릭스2'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네가 처음은 아니다. 네 전에도 다섯명이나 전임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의 황당함에 비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은 코브에겐 절박한 거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LA 도착 시간이 20여분 남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성공을 거둔 코브는 현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겁니다.

(그럼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뭐 중요하진 않지만 이제는 우호적으로 변한 피셔와 함께 1주일 동안 꿈1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일찍 현실로 빠져나왔는지, 사이토를 구하러 갔다가 사이토에게 죽어 현실로 돌아온 코브가 킥으로 깨워 줬는지... 그거야말로 관객이 알아서 할 부분이라는게 역시 놀런의 입장.^)



9. 그래서 도대체 마지막에 토템은 멈추나, 안 멈추나?

사실 토템이라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별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대사가 나온 다음부터, 눈치 빠른 분들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쯤에 감독이 이 이야기를 써먹을거라는 걸 짐작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이토를 무사히 구출하고, 수배에서 자유로워진 코브는 마침내 아버지(장인?) 마일스 교수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일스가 파리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는게 이 마지막 시퀀스가 꿈이라는 증거라고도 하는데, 이건 놀런의 수준에 비하면 너무 유치한 얘기죠. 그리고 애당초 파리에서 코브는 마일스에게 "아이들에게 나 대신 선물(인형)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어쨌든 코브는 집에 도착하고, 밖에 아이들이 보이자 습관적으로 토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돌려 놓고 아이들을 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죠. 물론 보인다, 안 보인다가 현실과 꿈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꿈에서 코브가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건 코브가 아이들의 얼굴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죠^^) 스스로 죄책감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그 죄책감은 꿈 속에서 다시 한번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모두 해소했죠.

(이 대목에서 아이들의 모습이 과거와 똑같으므로 이 대목은 꿈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여자아이의 옷이 똑같이 핑크 톤의 색이긴 하지만, 디자인이 다릅니다. 꿈속의 필리파는 그냥 원피스를 입고 있지만 마지막 장면의 필리파는 흰 티셔츠 위에 끈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어쨌든 코브가 아이들과의 재회하는 사이에도 토템은 계속 돌아가고, 멈출 듯 하면서 다시 돕니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서 끝나 버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토템이 그냥 쓰러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 쓰러졌고, 이게 모두 꿈이라고 믿고 싶은 분은 "그냥 그렇게 믿으라"는게 놀런의 생각입니다. 굳이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보면 이 결말을 통해 논란을 일으키겠다는 얄팍한 수이기도 하죠.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그 수는 먹혀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인셉션'의 플롯은 완벽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사이에 관객에게 큰 반발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는 물론 아니죠. 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영화에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자는 거대한 세계관이나 미래를 향한 의지 같은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건 그야말로 보기에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오백년 묵은 버드나무를 신으로 섬기는 거나 비슷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인셉션'은 아주 정교하게 잘 짜여진 오락영화이고, 수작입니다. 그리고 못 보시면 대단히 아쉬울 작품입니다. 그리고 감탄할만한 상상력의 활용이란 면에서 정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번째 리뷰. 물론 제 설명이 모두 맞다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겠죠? 지적, 의견 개진 적극 환영합니다. 함께 설명해가는 인셉션을 만들어 봅시다.^^

세번째 리뷰는 '인셉션, 아는 만큼 보인다' 정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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