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영화 '명량'의 주된 텍스트는 '난중일기'입니다. 특히 해전 당일의 진행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1598년 음력 9월16일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본인과 아들 이회, 그리고 송희립 나대용 안위 김억추 등 당일 전투에 참여한 부하 장수들은 물론이고 승려 혜희, 정찰꾼 임준영, 항복한 왜의 무사인 준사 등등 조연급의 인물들도 모두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 실제 역사는 역사,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어서 '명량'이 나쁜 영화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단 '명량'을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일을 방지하거나, 혹은 그저 호기심에서 '명량'과 역사상의 기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이순신(1545~1598)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생을 간략하나마 한 페이지로 정리한다는 것은 감히 저지를 수 없는 불손한 짓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명량에 기록된 ‘1598 9이란 제한한 시간 안에서, 각종 기록에 담긴 이순신의 전적을 다뤄보고자 한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개전 한달만에 일본이 조선의 수도 한양을 빼앗는 등 파죽지세의 면모를 보였으나 이후 명의 원군이 참전하고 강화 논의가 시작되며 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화의가 깨지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분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시작됐다.

 

그해 3,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난 이순신은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에 따라 통제사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남은 전선은 겨우 열 두척. 뭔가를 해 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난중일기 9월은 우울하기만 했다. 가까스로 남해의 서쪽 끝, 벽파진에 본부를 차렸지만 언제 적이 쳐들어올 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말단 병졸은 물론 지휘관들도 공포에 질렸다. 92, 전체 조선 수군의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전투를 피해 탈영할 정도였다.

 

97일에는 왜 수군의 척후대가 방어 태세를 살피기도 했다. 14, 왜군이 마침내 한줌 남은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한양으로 진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결전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음력 916일의 기록도 평소보다 길지 않다. 130여척의 일본 함대는 명량해협으로 직진했다. 해류의 불리함이고 뭐고 압도적인 규모를 이용해 뭉개 버리겠다는 자세. ‘명량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가 선봉에 섰다.

 

전날 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를 부르짖어 투지에 불을 질렀지만, 막상 일본의 대함대를 마주한 장졸들은 겁을 먹고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특히 이순신이 일기에서 저런 자가 어떻게…”하고 한탄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800미터(두 마장)나 뒤쳐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최전방에 선 이순신은 대장선의 앞선 화력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왜선들의 접근을 막으며 꿋꿋하게 버텼다. ‘명량에선 그리 강조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전투 과학 기술은 이순신의 전술과 울둘목의 해류 못잖게 이날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함인 세키부네에 견고함이나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고, 조선의 천지현황 총통도 사정거리나 파괴력에서 조총을 압도했다.

 

일본 수군은 갈고리를 걸어 상대 배에 뛰어드는 전술에 능했으나, 조선군은 현대전의 크레이모어를 연상시키는 대인살상병기 조란탄(鳥卵彈, 작은 탄두 수십개를 동시에 산탄처럼 쏘아 보내는 포탄)를 활용해 접근전을 원천봉쇄했다. 이순신의 눈부신 투지에 물러섰던 부하들도 하나둘씩 전선에 합류, 기적 같은 승리를 합작해냈다.

 

일본 수군은 구루지마가 전사하는 등 31척을 잃고 후퇴했다. 임진왜란 7년을 통틀어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급 지휘관이 전사한 것은 명량의 구루지마가 유일하다.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잃지 않았고, 대장선에서는 사망자가 2, 부상자가 3명 나왔을 뿐이었다(이런 피해라면 대장선에선 명량에 그려진 백병전이 펼쳐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명량대첩의 개략적인 결과다.

 

 

 

1. 백병전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영화 '명량'은 매우 충실하게 '난중일기'의 당일 기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밝힌 대장선의 피해 규모를 볼 때, 백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물론 대장선이 아닌 안위의 배에서는 백병전이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장선이 혼자 앞으로 나가 왜 수군 전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대장선과 왜 수군 선발대의 원거리 타격 능력이 이지스함과 일반 함선 정도로 차이가 났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조금 더 들어가면, 조선 수군의 승리 뒤에는 조선의 뛰어난 선박 제조술과 화포 기술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명량'에서는 명량해전 후반에 조선 배가 일본 배를 들이받아 부수는 충파(衝破) 장면이 나오는데, 본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어는 당파(撞破)입니다(충파라는 용어는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존의 많은 사람들은 이 당파를 '조선 배로 일본 배를 들이받아 깨뜨리는 전술' 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의 해석으로는 이 당파가 직접 배와 배가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는 쪽입니다. 일찌기 1985년 드라마 '조선왕조500년-임진왜란' 편에서는 원균이 이 당파전술의 창시자(?)이며,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배보다 훨씬 견고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던 전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각종 문헌에서 사용된 '당파'를 해석해 본 결과 원거리 병기로 적함을 격침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입니다. ]

 

이 시기 해전의 전투 방법이라면 1) 배와 배끼리 동반 침몰을 각오하고 들이받는 것 2) 화포나 활 등 원거리 병기로 공격하는 것 3) 갈고리를 걸고 상대 배로 넘어가 백병전을 펼치는 것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일단 2)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의 당시 주된 전법은 3) 쪽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으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전에서는 왜군의 조총이 핵심 병기 역할을 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의 화포가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천지현황 총통과 위에서 말한 조란탄 같은 대량살상병기, 그리고 유명한 비격진천뢰처럼 목표물에 적중한 뒤 2차 폭발을 가져오는 신형 포탄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2. 거북선이 동원될 수 있었나?

 

명량해전을 앞두고 거북선을 새로 건조중이었다거나, 배설이 그 배에 불을 질렀다거나 하는 것은 본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물론 실제로 거북선을 건조하려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설은 그저 전투가 두려워 혼자 탈영을 했고, 뒷날 육지에서 체포되어 참수됐다는 기록만 전해집니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 위에 창칼을 꽂은 지붕이 덮여 있어(이것이 철갑이든 아니든^^) 왜군이 3)의 전법을 아예 시도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왜군들의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원거리 화력에서 뛰어난 조선 수군이 굳이 적의 강점인 백병전의 위협을 불사하고 배와 배끼리 들이받는 근접전을 선택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다만 거북선의 경우에는 적의 승선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보다 근접해서 화약무기를 활용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명량'에서 배 만드는 노인이 감동에 찬 목소리로 "구선(龜船: 거북선)이 돌아왔다!"고 외치는 것은 사실 좀 공허합니다.

 

 

3. 일반 백성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

영화 '명량'이나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나 윤휴 등이 작성한 이충무공의 행장에는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조선 수군이 일자진을 친 뒤에서 허장성세로 우리 함대의 수가 많은 것처럼 꾸몄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피란민들이 달아나지 않고 함대의 뒤에서 응원했다는 것은, 이 피란민들이 충무공에 대해 갖고 있던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연전연승하는 스타라서 그루피처럼 따라다닌 것이었다면 이렇게 수세에 몰렸을 때에는 백성들부터 달아났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명량'에서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난류에 휘말린 대장선을 끌어 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런 기록을 기초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6년작 영화 '난중일기'에는 울돌목 수중에 긴 쇠사슬을 설치하고, 수천명의 백성들이 이 사슬을 잡아 끌어 해전을 돕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철쇄설'이라고 해서 한때 유행했던 전설입니다. 기원은 알 수 없으나 - 아마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쇠사슬 수전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만 -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고 있던 이야기이지만, 근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강 싸움이라면 모를까, 울돌목에서 사용했을 만한 거대한 쇠사슬을 만들어 전투에 썼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합니다

 

4.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마다시인가?

 

'난중일기'에는 항복한 왜군 준사(영화에도 나옵니다)가 물 위에 뜬 비단 옷 입은 왜장의 시체를 보고 "저게 마다시(馬多時)"라고 했으므로 시체를 건져서 내걸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목을 잘라 높이 건 시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것입니다.

구루지마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쟁 중 전사한 왜군 지휘관 중 최고위급의 지위관 (다이묘 전사자는 구루지마 뿐) 이므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마타시가 이 구루지마의 별칭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역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장 간 마사카게(菅正陰)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사카게의 별명이 마타시로(又四郞)였다는군요.

 

 

5. 이순신은 왜 명장인가?

 

그럼 판옥선과 거북선이 우수하고, 조선의 화포가 뛰어나서 이건 거냐? 그게 다냐?

 

이런 질문을 하실 분들이 반드시 있을 듯 해서 덧붙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충무공의 진정한 위대함은 비슷한 전력의 전투선단을 이끌고 용맹과 지략으로 적을 물리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해 장기간에 걸쳐 이처럼 적과 비대칭의 전력을 구성하고, 교전시에는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해 학살 수준의 전투를 벌여 적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전략가의 면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피난민 구제에도 힘써 백성들이 정보 제공과 식량 및 자원 조달에 자진해서 나서게 하는 총체적인 역량을 고려할 때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기간의 시스템 구축, 단기전에서의 역량은 물론 심리전과 정훈병과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그냥 명장'들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전략가이면서도 인간적으로도 휘하 장병들과 백성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명량'의 이순신 묘사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명량, 영웅만들기에 성공했나. http://fivecard.joins.com/1266

 

 

 

난중일기 130척으로 기록된 왜적 함대 규모는 점점 부풀려져 19세기의 이긍익은 “600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이 당시 거느렸던 병력 규모로 볼 때 다 해봐야 고작 수십척이라고 맞선다.

 

일본 측 해석에 따르면 명량해전은 대첩도 아니요, 전체 판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 교전이다. 비록 일본이 선봉을 격파당했지만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의 교전 직후 후퇴했고, 다음날 일본의 본진이 명량을 지나 서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전략적으로는 일본이 승리한 전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전투 직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군산 앞바다까지(921) 일시 후퇴했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 군세를 회복해 이듬해 2월에야 고금도에 진을 치고 전남 서부 해안을 확보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량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는 점, 이후 단 한번도 이순신 수군을 박멸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재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은 이런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이순신의 전적은 한일간의 역사적 자존심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부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역시 한국 측은 승한 반면 충무공이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고 보는 반면 일본 극우 세력은 이순신이 죽었고 일본군의 주력이 한반도 탈출에 성공했으니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전혀 좁혀지지 않을 해석의 차이가 한-일간의 심리적 거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끝]

 

일본이 생각하는 이순신에 대해선 나중에 짬을 내서 자세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개는 일본의 억지가 돋보입니다만,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와 넬슨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했다는 얘기는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이 꽤 거세더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728x90

8월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엄청나게 덥네요.

 

시작합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8월의 문화가이드 (2014)

 

 

8월은 자연스럽게 공연 비수기. 이럴 때면 절로 런던의 PROM이나 에딘버러의 프린지 같은 8월의 공연 천국이 그리워지네. 대신 서울의 8월은 대신 락 페스티발의 물결이야. 프레디 머큐리는 없지만 퀸이 슈퍼소닉 페스티발(8.14), 오지 오스본과 마룬5가 현대카드 시티브레이크(8.9~10), 레이디가가가 AIA리얼뮤직(8.15~16)에 내한하네. 여유만 있다면 돈 쓸 기회는 정말 많아.

 

물론 우리의 모토는 그런게 아니지? 고개를 돌리면 일단 821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부천 필하모닉 유럽 투어 프리뷰 콘서트가 보여. 말 그대로 올 가을 유럽 투어를 앞두고 국내 팬들에게 그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기회야. 지휘는 계관지휘자 임헌정. 브람스 교향곡 4번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1번도 관심이 가지만 특히 한국 현대음악인 전상직의 관현악을 위한 크레도초연이 포함돼 있는 공연이야.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도 주목. 모처럼 3만원으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R석에 앉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다음. 우리가 항상 셰익스피어를 교양의 표상으로 거론하지만 사실 셰익스피어극을 책 말고 실제 사람이 공연하는 모습으로 보기는 쉽지 않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

 

아쉽게도 실연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 극을 그 본고장인 영국 국립극단의 공연으로 볼 기회가 생겼어. 바로 NT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영국 국립극단의 공연을 실황으로 녹화해 전 세계의 다른 극장에서 보는 행사인데, 요즘 극장에서 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연상하면 될 거야. 올초 서울 국립극장에서 워 호스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아실테고.

 

830일과 31, 두 날에 걸쳐 코리올라누스리어 왕이 하루 한 차례씩 상영돼. ‘코리올라누스는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자주 공연되지 않아 친숙하지는 않은 작품이야. 뭐 베토벤의 코리올란서곡을 아는 사람이라면 줄거리를 대략 아는 정도지.

 

 

 

 

2011년에는 레이프 파인즈와 제라드 버틀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어. 그런데 이번 연극 코리올라누스가 주목을 끄는 건 영화 토르어벤저스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배우 톰 히들스톤이 타이틀 롤을 연기하기 때문이야.

 

리어 왕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품이지. 타이틀 롤을 맡은 사이먼 러셀 빌은 그리 지명도 높은 배우는 아니지만, 이번엔 연출을 샘 멘데스가 맡았다는 데 눈길이 가. 멘데스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 ‘007 스카이폴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본래 연극 연출 출신이라는 건 다들 알지? 어쨌든 가격은 1만원~15000. 두 작품 모두 보는 걸로 알고 있을게.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831일까지 열리고 있는 백자예찬을 권하고 싶어. 백자 그 자체뿐만 아니라 백자의 미감에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한국 현대 미술의 일품들을 소개하는 전시야. 9000. 기획전과 상설전시를 모두 볼 수 있는 가격.

 

8월에 권하고 싶은 책은 아무래도 무더위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겠지. 이쯤에서 슬쩍 중앙일보 임주리 기자의 일상방황을 추천하고 싶기도 한데, 이 책이 비록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는 20~30대 여성들에게는 꽤 유용하면서 심지어 재미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기엔 좀 낯간지러운 책이기도 해.

 

그래서 진짜 추천할 책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작가 이름을 보고 스칸디나비아 느낌을 받았다면 정확해. ‘밀레니엄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은 스웨덴 출신,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 출신이지만 두 작가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 라르손이 2004년 사망해 밀레니엄시리즈는 더 볼 수 없게 됐지만 대신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전 세계 스릴러 마니아들을 사로잡고 있어.

 

해리 홀레는 신장 1m90에 비쩍 마른, 절대 미남은 아니지만 특유의 시니컬한 매력으로 여자가 끊이지 않는(소설이잖아. 이해해) 엘리트 형사야. ‘스노우맨은 그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여자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얘기지. 북유럽의 긴 겨울, 냉기가 뿜어나오는 스럴러가 더위 쫓기에도 제격일 거야. 624페이지 부담스럽다고? 곧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질 걸. 1만원 정도.

 

 

 

윤현승의 뫼신사냥꾼’. 6권이나 되는 시리즈인데 일단 첫권을 사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아마 34일 정도 여정이라면 휘딱 다 읽어 버리고 내가 왜 한권만 사 왔을까 애달복달할 지도 몰라. 조선을 모델로 한 가상국가를 무대로, 각 산을 차지하고 있는 괴력을 가진 뫼신(산신)들을 노리는 자들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그려 낸 판타지 소설이야. 검술을 기본으로 하는 무사들,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무당들, 그리고 본래는 동물이면서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된 뫼신들이라는 세 축을 놓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엇갈림이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어. 일단 첫권 12천원 정도.

 

9월 초면 좀 시원해 지려나? 냉면 콩국수 빙수는 하루에 한번씩만 먹고, 배탈 조심해. 바이.

 

부천 필하모닉 유럽투어 프리뷰 콘서트         R 3만원

NT라이브, ‘코리올라누스’ ‘리어 왕             15000

서울미술관, ‘백자예찬                         9000

요 네스뷔, ‘스노우맨                          1만원

윤현승, ‘뫼신 사냥꾼                          12000

 

                                           91000

 

 

 

 

 

요 네스뵈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스티그 라르손을 잇는 북유럽 출신의 인기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데, 여담이지만 전에 들은 얘기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꽤 사이 나쁜 이웃이라고 하더군요. 구체적으로 두 나라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알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 춥고, 겨울이면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백야가 찾아온다는, 인구도 얼마 안 되는 나라에서 이런 작가가 나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는 게 참 놀랍기도 합니다. 소수 언어 작가의 경우 영역본이 히트한 이후에 세계적인 붐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에서도 언젠가는 이런 작가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겠죠.

 

 

 

 

해리 홀레 (하리 홀레?) 시리즈는 현재까지 10권 정도 나와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대로 가면 10권을 다 보게 될 듯. 흡인력이 장난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순서대로 모두 번역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시리즈의 맨 처음부터' 한글로 정주행하시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합니다. 일단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는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라 함께 읽으셔도 무방할 듯.

 

당연히 엔딩은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입니다.

 

 

 

 

 

728x90

휴가철이 다가왔습니다.

 

매년 느끼는 거지만 휴가를 일찍 가게 된 해는 다녀오고 나면 남들 가는 휴가가 그렇게 부럽더군요.^^

 

게다가 달력에 7자만 박혀도 어찌나 항공권이며 호텔 요금이 폭등을 하는지. 대부분의 국제선 항공요금은 8월15일을 경계로 정상가로 돌아옵니다(뭐 안 그런 회사도 많이 있죠). 국내 피서지도 8월하순이면 조금씩 한적해지기 시작합니다. 적절하게 늦은 휴가를 가시는 것도 생활의 지혜.

 

물론 '아이들 학원 방학할 때' 무조건 휴가를 가셔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야 누가 거들 수가 없지만. 그런데 모든 생활이 '아이들 학원'에 맞춰지는 삶은 좀 우울하시지 않을까요. 그런 분들에게도 문화생활이 필요합니다.

 

7월편. 아주 유명한 퓰리처상 수상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1997년 로스토프에서 춤추는 옐친의 모습입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7월의 문화가이드 (2014)

 

덥지? 산과 바다로, 혹은 공항으로 떠날 마음이 부푸는 달이야. 물론 그런 달이라고 해서 문화생활을 거르면 곤란해. 그리고 작년에도 했던 얘기지만, 도시의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바로 문화공간이야.

 

일단 이달의 추천 공연은 국립극장의 여우락 페스티발. 시작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줄여 여우락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한국 전통 음악의 현대화라는 그릇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무대가 됐어.

 

 

 

10개의 공연 가운데 추천 1번은 뭐니뭐니해도 양방언과 그 주변의 ‘Various Artists’ 들이 펼치는 여우락 판타지’. 7 4일과 5, 국립극장 KB 하늘극장에서 열려. 그 다음은 25일과 26일에 열리는 여우락 올스타즈’. 양방언을 비롯해 정재일, 강태환, 최희선, 사이토 테츠 등 이번 페스티발의 주요 출연진이 모두 한 무대에 서는 공연이야.

 

이런 공연들이 모두 3만원 균일. 10개 공연 중 5개를 9만원에 볼 수 있는 패키지도 있어. 다들 관심을 가져 볼 만 할거야. 아무튼 잘 골라서 두 공연에 6만원 정도는 투자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

 

아니면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72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재즈 피아니스트 피터 베이츠의 ‘Opera Meets the Jazz’ 공연에 투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요즘 한창 각광받고 있는 베이츠(Beets 라고 쓰고 베이츠라고 읽어. 네덜란드 사람이라서 그래)가 이번엔 클래식 리메이크를 주제로 펼치는 공연이야. 다 좋은데 좌석이 11만원부터라 좀 비싸. 물론 33천원짜리 B석도 있어.

 

7월은 12월과 함께 전시가 풍성해지는 계절이지. 방학을 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일단 에드바르드 뭉크 전과 퓰리처상 사진전에 눈길이 가.

 

 

 

현대미술 사상 가장 많이 패러디된 작품을 꼼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를 꼽을 거야. 절규를 포함한 에드바르드 뭉크 전이 73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려.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뭉크미술관과의 협력으로 이뤄진 전시라니까 기대할 만 할 것 같아. 1012일까지. 15000.

 

방학맞이 전시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도 빠뜨릴 수 없지. 이미 지난 1998년과 2010년에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전시지만 이번엔 작품 수가 145점에서 234점으로 늘었어. 전시 속의 전시라고 할 수 있는 맥스 데스포 특별전, ‘6.25-잊혀진 전쟁도 관심이 가네. 12000. 914일 까지.

 

 

 

이달의 책은 이노우에 아레노의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처음엔 60세 전후의 여성 세명이 주인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아니 그런 얘기가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펼치면 분명히 달라질 거야.

 

이제 60세 전후의 여성을 만나할머니라고 부르면 봉변을 당할 지도 모르는 시대야. 아들 딸이 시집 장가를 가서 손주를 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예전의할머니들이 갖고 있던 위치에 올려 놓을 사람은 거의 없지.

 

이 책에 나오는 세누나들도 마찬가지. 이혼녀인 코코, 남편과 사별한 이쿠코, 평생 짝사랑만 해 본 마쓰코는 아직도 마음 속에는 소녀가 살고 있어. 그리고 이들과 이런 저런 사연으로 연결되는 꽃미남 총각도 나와. ‘꽃보다 누나의 생활 버전이라고나 할까. 인터넷 서점에선 1만원 내외에 살 수 있어.

 

 

한 권 더 추천하자면 그레임 심시언의 로지 프로젝트가 있어. 남자주인공 틸먼은 일단 얼굴도 잘 생기고, 직업도 교수인 A급 조건의 독신남. 그런데 문제가 있어. 아스퍼거 증후군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질 못해. 슈퍼 이성을 갖고 있어 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문제는 늘 지나치게 이성적으로만판단한다는 거지.

 

그의 인생에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여자 로지가 나타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야. 물론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도 틸먼의 기준이고, 여기에도 반전이 있지만 아무튼 일단 모르고 읽는게 더 재미있을 거야. 미드 빅뱅 이론이나 일본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강추 2만배. 가격은 역시 인터넷으로 11000원 정도.

 

약간 과용했나? 에어컨 바람 조심하고, 8월은 락페 스케줄도 체크해 봐. 그럼 안녕.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발 (74~) 공연당 전석 3만원

예술의전당 피터 베이츠, ‘Opera Meets the Jazz’  B 33000

에드바르드 뭉크 전(73~)                   15000

퓰리처상 사진전(624~)                     12000

이노우에 아레노,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1만원

그레임 심시언, ‘로지 프로젝트                     11000

 

합계 111000

 

 

이번 달엔 굳이 더 토를 달 부분이 없어 보입니다. 즐거운 7월 보내시고, 8월에.

 

이제는 다들 익숙하실 양방언의 Frontier로 마감합니다.

 

 

 

 

 

728x90

[김수현 전지현 생수 광고 해지 논란]

 

난데없이 한류스타 김수현과 전지현이 생수 광고 때문에 뜻하지 않은 화제의 중심이 됐더군요.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인기 상종가를 달리던 이들이 중국 생수 광고에 출연한게 문제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게 큰 파문이 되면서 두 스타는 수십억원의 손해를 무릅쓰고 광고 계약을 해지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용을 읽어 보니 쓴 웃음이 먼저 나옵니다.

 

헝다 생수 업체의 원산지 표기가 백두산 아닌 장백산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고,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북공정의 무시무시한 함의가 들어 있는 호칭이라는 주장이군요.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사전식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장백산

 

[명사] 장빠이산(長白山). 중국에서 백두산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


2014년 6월. 김수현과 전지현이 한 편의 광고 때문에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들은 최근 중국의 헝다(恒大)그룹 계열 생수 업체의 모델로 등장하게 됐다. 그런데 일각에서 두 한류스타가 이 광고에 출연한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용당한 것이라고 주장을 제기했다. 이 생수 제품의 취수원이 백두산인데, 백두산 대신 ‘장백산’이란 이름이 표기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리를 들어 보면 이렇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장백산을 ‘중국 10대 명산’에 포함시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름을 장백산으로 못박아 놓고 ‘자기네만의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러니 생수 산지를 백두산 아닌 장백산으로 표기하는 광고에 출연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행위라는 주장이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일파만파로 번져갔고, 부담을 느낀 전지현과 김수현이 해당 생수 업체에 광고 모델 계약 철회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실관계를 따져 보면 참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백두산, 혹은 장백산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천지라는 거대한 화산호가 있고 최고봉은 장군봉 혹은 병사봉이라고 불리며, 높이는 해발 2744m다. 많은 사학자들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개국한 태백산 신시가 바로 백두산 기슭이라고 보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불함문화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불함산도 백두산을 가리키는 별칭 중 하나다.

 

 


뭐니뭐니해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의 가사를 보든, 북한에서 사실상 국가와 맞먹는 무게를 가진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된다는 점을 보든  이 산이 한국인의 정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민족만이 이 산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 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자신들 만주족의 시조는 백두산 천지에 내려와 목욕하던 천녀가 신령한 열매를 먹고 낳은 아이라고 선언했다. 이 아이에게서 자신의 조상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씨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포함해 만주 지역을 영유했던 모든 민족은 백두산을 영산으로 섬기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다산 정약용도 지인 신광하에게 준 글에서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각종 지리지에는 장백산으로 소개된다’며 ‘청 황제가 전통적인 명산을 말하는 오악(五嶽)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때를 맞춰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라고 했다. 백두산, 아니 장백산이 중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산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국경 지역의 산이나 강이 국가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른 경우 역시 드물지 않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이루는 알프스 산백의 남쪽 연봉들을 가리켜 오스트리아에서는 쥐트티롤(Südtirol), 즉 남 티롤이라고 부르고 이탈리아에서는 돌로미티(Dolomiti)라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끝 경계를 이루는 강은 중국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러시아에서는 아무르(Amur)강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이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동북공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거의 천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에 의해 흔히 사용됐다. 위에서 거론한 다산 정약용 뿐만이 아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谷州公館新樓記)’에서 "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我國壤地。三面大海。北連長白山)"고 썼다.

 

 

 


1458년 신숙주가 집필한 ‘국조보감’의 세조 초 기록에도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자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같은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백두산이 95회, 장백산이 40회 나온다.

 

1712년, 청태종은 사신 목극등 등을 보내 백두산을 기준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을 구분하는 정계비를 세우게 했다. 여기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송화강의 상류)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간도 지역을 조선 땅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청은 이 토문강은 발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고 우기며 간도 탈취의 야욕을 불태웠고 1909년 일본은 만주 철도 이권을 차지하는 대가로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해버린다. 이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시대를 맞으면서 두만강 이북의 우리 강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2년 북한과 중국 정부가 맺은 변계조약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국경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힘에 의해 실제 영토가 왔다 갔다 하는 냉엄한 현실에서, 한낱 생수병의 원산지 명칭이 그 나라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법석을 떨어 봐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그 생수 광고에 출연한 한국 연예인을 놓고 역사 의식이 없다며 훈계하는게 가당한 일일까. 심지어 그 명칭은 수천년 동안 한-중 양국이 공유했던 이름인데 말이다.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끝]

 

 

 

 

 

 

 

 

그러니까 이 생수 광고 출연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마치 '장백산'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중국이 '한국인의 영산'인 백두산을 빼앗기 위해 날조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두산-장백산의 관계가 독도-다케시마의 관계인 것처럼 본다는 얘기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백두산은 영토 분쟁지역도 아니고, 중국과 한국(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산입니다.

 

윗글을 읽고 나서, 동북공정의 장착 유무를 떠나, 대체 정상적인 중국 생수 제조 업체라면 그 생수의 원산지 이름을 어디로 표기해야 할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나라에서 쓰는 이름인지, 아니면 남의 나라에서 쓰는 이름이어야 할지.

 

현재 백두산은 천지를 중심으로 절반 정도는 중국 땅, 나머지 절반이 북한 땅으로(정확하게는 천지의 54.5%는 북한 것이고, 나머지 45.5%가 중국 땅이라고 합니다) 되어 있습니다. 물론 백두산 정계비를 우리 쪽 주장대로 해석해도 백두산의 30%는 중국 땅이었던 셈입니다만, 어쨌든 현재 백두산의 일부가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남한에 사는 한국인들도 백두산을 관광하러 갈 수 있습니다. 말하지면 그 분들도 백두산을 오른 것은 아니죠. 장백산을 오른 겁니다.

 

 

 

 

어쨌거나 생수 이름이 장백산인 것도 아니고, 그저 취수원이 장백산이라고 표기된 생수의 광고에만 출연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걸 근거로 전지현이나 김수현이 생수 광고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 무슨 역사의식이 결여된 행동이라거나, 매국적인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 어이없는 얘기죠. 어처구니없는 사건 때문에 지금 막 일고 있는 중국 내 한류에 찬물을 끼얹는 거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아마도 '1박2일'의 '백두산을 가다' 편이 준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 프로그램에도 곳곳에 '장백산'이 붙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동북공정에 이용당한 바보같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주장하실 셈인가요.

 

 

 

 

 

 

 

 

 

 

자, 이제 다들 냉정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길어서 이해 못하는 분이 있을까봐 정리해 드립니다.

 

1. 백두산은 옛날부터 한-중 양국에서 장백산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그냥 장백산이라고 불러도 된다.

 

2. 만주의 모든 민족은 백두산을 숭상했다. 한국인에게만 백두산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3. 동북공정이 문제 없다는 것은 아니나, 생수의 원산지 표기 때문에 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4. 그러니 김수현 전지현 욕하지 말고, 이 기회에 제발 역사에 관심 좀 가져라.  

 

이상입니다.

 

 

728x90

요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감 자체와 왔다갔다 하는 상황.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약간의 노가다성)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는군요.

 

아무튼 너무 허물치 마시길...

 

올립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6월의 문화가이드

 

 

세월호의 충격으로 아직 온 나라가 어두워. 공연예술계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그 여파로 꽁꽁 얼어붙은 듯 해. 거액의 달러 빚을 내서 폴 매카트니 옹의 내한공연을 예매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취소로 허탈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이런 분위기에서 힐링을 위한 공연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건 5일 있었던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2번이었지만 이건 몇 달 전부터 매진 사례(이번 달 이 칼럼이 지각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해).

 

그래도 6월의 볼거리로 우선 추천하고 싶은 건 트럼페터 앨리슨 발솜의 내한 공연이야. 클래식계의 속성상 미녀 연주자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고 각 음반사에서도 스타를 만들기 위해 애쓰지. 또 그렇게 키워진 스타들은외모 때문에 주목받는다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한 법이지. 아무튼 발솜은 2013년 그라모폰 어워드 수상자야.

 

61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공연. 개인적으로 트럼펫 만큼 대중친화력을 가진 악기는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공연의 레퍼토리를 보면 정말 그런 느낌이 들 거야.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3악장이 왕년장학퀴즈의 테마로 유명하지), 코플랜드의시민을 위한 팡파레(제목은 낯설지 모르지만 들어 보면 무조건 아는 곡이야)’ 등이 연주돼. 물론 피아졸라의리베르탕고를 어떻게 트럼펫으로 소화할지 궁금하기도 하지. 5만원 짜리 B석 추천.

 

 

 

 

 

또 하나. 6월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 줄 공연으로 7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고란 브레고비치의집시를 위한 샴페인을 추천하고 싶어. ‘집시 음악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리에 떠오르는 건 뭔가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을 담았으면서도 미친 듯이 흥겹고,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는그런 강렬한 느낌이지(나만 그런가?).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집시 음악은 사라사테의지고이네르바이젠을 비롯해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들이 수용한 집시 음악인데, 지휘자 이반 피셔나 렌드바이 부자 같은 헝가리 출신 음악인들이 그 정서를 기가 막히게 소화해 왔어. 그런데 브레고비치는 같은 동유럽이긴 하지만 세르비아 출신이야.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틀에 수용되지 않은진짜 집시 음악의 계승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야. 궁금한 사람은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과 브레고비치가 같이 작업한 영화 ‘집시의 시간이나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찾아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티켓 가격이 그리 싸지는 않아. 8만원에서 4만원 사이. 우리는 당연히 4만원 짜리 A석을 선택해야겠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은 맨 앞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밴드와 눈을 맞추며 흥겹게 춤춰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예산을 많이 소진했네. 이달의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최민우 저, ‘뮤지컬 사회학이야. 제목은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그만치 정공법으로 쓰여진 책이야. “뮤지컬, 아니, ‘한국 뮤지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봐라는 자부심이 돋보인다고나 할까.

 

 

 

한국 뮤지컬 시장은 알면 알수록 희한한 시장이야. 뮤지컬 관객 수는 매년 폭증한다고 하는데 그럼 한국을 대표하는 국산 뮤지컬은 뭘까. 2009오페라의 유령 30만을 넘는 관객수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한 작품을 300번씩 보는 마니아 관객들이 한국 뮤지컬을 이끌어 가는 주역이라고 본다면 대체 한국의 뮤지컬 시장규모는 얼마로 봐야 할까. 대체 왜 뮤지컬 한 편의 남자 주인공으로 네 배우가 돌아가며 출연할까.

 

이런 희한한 시장이 만들어진 원인과, 그 시장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단언컨대 이렇게 속 시원한 답을 주는 책은 지금까지 없었을거야. 특히 한국 뮤지컬을 이끌어가는 팬덤 현상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주로 조승우 vs 김준수)도 압권. 이 칼럼을 읽을 정도의 대한민국 문화인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어. 인터넷 가격 1 2천원 정도.

 

뭔가 이번 달엔 평소 기준으로 약간 비싼 볼거리들을 추천해 날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무료 전시 추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월부터아시아 미술 신소장품전을 하고 있는데 622일이면 끝나. 그 전에 다들 챙겨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한국 유물만 전시하는 건 아니야. 아시아 각국의 보물들을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는데, 그중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선보이는 기회야.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이 기본 관람료가 무료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이번 기회에 한번씩 들러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참고로 유료 전시인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전(12000)도 같이 하고 있어(이건 편법 추천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이번 달은 월드컵의 달이네. 지구 정 반대편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 거리 응원은 커녕 중계방송 시청도 좀 곤란할 것 같아. 너무 밤 새고 무리하지 말고, 7월에 만나.

 

67, 고란 브레고비치 - 집시를 위한 샴페인   A 4만원

611, 트럼페터 앨리슨 발솜 공연             B 5만원

최민우, 뮤지컬 사회학                            12천원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 미술 신소장품전           무료

 

 

집시 음악이라면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집시의 바이올린이란 어떤 걸까. http://fivecard.joins.com/139

 

세월은 빨라서 벌써 이게 6년 전. 그런데 놀랍게도 저 글에서 언급한, 그날 들은 그 연주를 유튜브에서 발견했습니다.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BFO, 협연은 렌드바이 부자.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 2008년 8월23일 에딘버러 어셔 홀입니다.

 

 

 

 

 

저 박수갈채 속에 제 박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자못 감동적이군요.^

 

물론 대중음악으로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집시 킹스 형님들을 빼놓고 얘기하면 서운하겠죠.

 

 

 

 

집시 킹스에 명성으로 밀린다면 서운할 고란 브레고비치.

 

저 'Volare'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유명한 멜로디, 'Bella Ciao'.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추억의 테마인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3악장으로 마무리.

 

 

 

의외로 트럼펫 계에 미녀 연주자들이 많군요. 이건 멜리사 베네마의 연주입니다ㅣ

 

 

728x90

5월입니다. 좀 늦었습니다. 연휴와 함께 약간 게을러진;;

 

기온의 급강하/급상승으로 인한 감기 몸살 환자가 급증하는 시절입니다. 유의하시길.

 

그럼 시작합니다. 다행히 아직 지나간 추천 무대는 없군요.

 

세월호 사태 이전에 마감된 글이라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네. 이 칼럼은 이쪽으로 가져오기 전에 주간 '매거진M'의 끝에서 두번째 페이지에 실립니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마감이 빠릅니다.^^;; )

 

그때문에 너무 태평스럽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5월의 문화 가이드 (2014)

 

결혼 안 한 분들은 상관 없겠지만, 아이 키우는 분들에게 5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때문에 가외 지출로 마음이 무거운 달이야. 보통 사람들은 어린이날의 놀이공원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인파와 교통체증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게 되지만, 평소 바빠서 아이들 잘 못 돌보는 분들은 그런 고통의 현창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목말을 태워 데려가야 죄책감을 덜 수 있다고들 해.

 

이런 분들에게 공연이며 문화생활을 얘기하는 건 너무 대단한 사치일 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식의 희생을 아이들이 모두 기억하고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말로 착각이 아닐까 싶어.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의 인생이 자신의 보람이 될 수는 없다고. 뭐 당장 아이들의 학교 성적에 신경이 곤두선 부모들에게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5월의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는 서울 스프링실내악축제야.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여러 공연장에서 다양한 공연이 열리지. 그 가운데서 보너스 스테이지라고 할 만한 공연이 눈에 띄었어. 518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올 댓 재즈라는 공연이야.

(홈페이지는 http://www.seoulspringnew.org/2014-ko/ )

 

 

 

실내악축제의 다른 공연들이 5만원부터 시작하는데, 어떤 스폰서가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공연만은 전석 2만원이야. 일단 가격면에서 눈길을 끄는데 공연의 내용도 대단히 대중적이야. 재즈의 고전이라면 바로 꼽히는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를 비롯해 다양한 미국 작곡가들의 곡이 연주돼. 출연진도 프랑스의 클라리넷 연주자 로망 귀요를 비롯해 최나경(플루트), 강동석(바이올린) 등 대단히 화려해. 일단 예매부터 하라고 권하고 싶어.

 

다음은 523,24일 열리는 국립극장의 오페라 돈 카를로’. 유럽 오페라계에선 소프라노를 찾으려면 발트해 연안으로 가고, 베이스를 찾으려면 한국으로 가라는 말이 있대. 이런 분위기를 만든 개척자로 누구나 강병운을 꼽지.

 

강병운은 바그너 오페라의 베이스로도 유명하지만, ‘돈 카를로의 필리페 2세 역으로는 세계 최고라는 평을 듣는 분이야. 그가 이 역할을 맡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공연은 가치가 다르다고 봐. 그리고 연출자가 엘라이저 모신스키라는 것도 가슴 뛰는 일이지. 모신스키가 누구인지는 각자 검색해 보도록.

 

 1만원부터 12만원까지 표가 있는데, 5만원짜리 A석도 1층에 좌석이 있어. 그 정도는 투자할 만 하다고 봐.

 

날씨가 좋으니 야외로 나가는 것도 좋지. 517일과 24일에는 예술의전당 야외무대(신세계 스퀘어)에서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발 갈라 콘서트가 열려. 야외 무대인데 표는 어떻게 파냐고? 무료야. 마음 편히 와도 돼.

 

이 공연을 보러 오는 김에 전시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것 같아. 여러 전시가 있지만 54일부터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쿠사마 야요이 전시가 눈에 띄네. 쿠사마 야요이가 누구냐고 묻고 싶은 분도 있을텐데, 포털에서 저 이름을 검색하면 바로 점박이 호박 사진이 뜰 거야. 그 호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추.

 

문득 기사를 보다가 발견한 건데 2014 47일은 르완다 대학살 사태가 마무리된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어. 크게 관심 없는 사람도 대강은 아는 얘기일거야. 민족분쟁으로 100만명 이상이 살해당한 사태 말이지.

 

그런 비극을 겪은 르완다가 이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보도도 있던데, 불행히도 중부 아프리카 전체를 놓고 보면 비극은 현재진행형이야. 자원 수탈을 위한 선진국들의 지원 아래 수많은 무장집단들이 끔찍한 학살극을 계속 펼치고 있고, 만년필보다 총이 흔하다는 지경이 끝날 줄을 모른다는 거지. ‘호텔 르완다블러드 다이아몬드같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짐작할 수 있을거야.

 

이런 사태들에서 시작해 지독한 환경오염이나 핵 발전소 사고 같은 일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인류가 지구의 주인입네 할 자격이 있는 종()인지를 의심하게 돼.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의 출발점도 여기가 아닌가 싶은 거지.

 

이미 2년 된 책이라 읽은 사람도 꽤 있겠지만, 올해 5월엔(4월은 지나갔으니까) 한번 추천하고 싶은 책이야. 그리고 2년 지나는 사이 가격도 많이 떨어졌어. 처음엔 15천원 선이었지만 지금 사면 9천원, 잘 찾아 보면 7천원대로 파는 온라인 서점도 꽤 있어.

 

수입 생맥주 한잔 값도 안 돼. 물론 술 한잔에 좋은 사람들 사귀고 인생에 도움 될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겠지만, 절대 책값이 비싸서 책 못 읽는다는 얘기는 하지 말도록. 그럼 6월에 만나.

 

 

523~24일 오페라 돈 카를로’, 국립극장                  A 5만원

518일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올 댓 재즈’, LG아트센터       전석 2만원

54~  쿠사마 야요이 전. 한가람미술관                    15000

517, 24  서울 오페라페스티발 갈라콘서트, 예술의전당 야외무대      무료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소설                           7000~9000

 

 

 

 

위에서 말한 호박이란 못 보신 분이 없을 바로 이 호박이구요.

 

 

 

쿠사마 여사의 상징인 저 땡땡 무늬는 루이 뷔통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김남주가 입고 있는 의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뭐 다들 잘 아실테니 호박 얘기는 여기까지.

 

성악가 강병운에 대해서도 감히 아는 척 하는게 민망합니다. 10년 쯤 전만 해도 "유럽 무대에서 각광받은 한국인"에 대해 이야기하면 "현지에서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며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만, 스마트 월드가 된 이후에는 현지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전해져 오면서 이런 얘기가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강병운의 경우엔 너무 일찍 유럽 무대에서 각광받는 바람에(혹은 주인공인 테너만 중요한 역이라고 간주되면서) 그 위력이 국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이로이트 홈페이지의 '강병운 Philip Kang' https://www.bayreuther-festspiele.de/fsdb_en/personen/165/index.htm 페이지를 한번 보시면 8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 파프너와 훈딩 역은 거의 그의 전유물이었음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레퍼토리가 바그너 영역이긴 합니다만, 그 기록엔 1990년 안트워프에서 돈 카를로의 필리페(필립) 2세 역할을 한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다른 페이지 https://www.bayreuther-festspiele.de/fsdb_en/personen/421/index.htm 나  https://www.bayreuther-festspiele.de/fsdb_en/personen/160/index.htm   를 보시면 이런 분들의 활약 앞에 거대한 선배의 영역 개척이 있었다는 걸 훨씬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베르디의 후기 역작 돈 카를로 에 대해선 뭐 길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가장 잘 알려진 1막(프랑스어 판에선 2막)의 2중창입니다. 평생을 약속하는 두 남자의 우정의 노래죠.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게 이 오페라는 어쨌든 한 여자를 사랑한 부자간의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돈 카를로 못잖게 아버지 필리페(필립) 2세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공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적인 왕의 고뇌를 그린 노래가 유명합니다.

 

 

 

 

이 오페라에는 묘하게도 에볼리 공주 역을 맡은 온갖 메조소프라노들을 좌절시키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저주받은 나의 미모'라는 제목의 노래죠. 노래가 어렵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목 때문에...

 

그 제목에 굴하지 않았던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

 

 

 

 

수많은 영상물 중에서도 카레라스-프레니-발차 등의 슈퍼 캐스트가 빛니난 카라얀 판이 지금껏 역대 최강으로 꼽히지만 워낙 명연이 많은 작품이다 보니 최근작이 갖는 선명한 영상의 강점을 포기하실 이유도 없을 듯. 갖고 있는 파바로티-데시-레이미의 무티 판도 어떤 분들은 파바로티가 너무 대충 불렀다며 욕하시지만 개인적으론 만족스럽습니다. 지난해 짤스부르크에서 공연된 카우프만-햄슨 판도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싶고.

 

(뭐 늘 하는 얘기지만 오페라를 즐기는 가장 싸고 효율적인 방법은 DVD를 이용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론 DVD라는 매체가 오페라를 위해서 나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 여담이지만 비슷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뮤지컬 부문에서는 아직 DVD가 그리 중요한 매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점을 매우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글을 마감한 것이 세월호 사건 이전이라 '제노사이드'의 선정이 참 묘한 느낌을 줍니다.

 

안타까운 영혼들에게 안식을.

 

 

 

 

728x90

금세 4월입니다.

 

이러다 곧 연말 공연 안내가 나갈 듯한 속도감...ㅠ

 

 

 

 

 

 

 

10만원으로 즐기는 4월의 문화가이드(2014)

 

4. 내한공연이 별들의 전쟁일세. 수잔 베가(42)도 오고 제프 벡 영감님(427)도 또 오시지만 다들 너무 비싸. 베가 공연은 제일 싼 표가 66000, 벡 영감님은 88000. 능력 있는 사람들에겐 볼만한 공연인 게 분명하지만 이 칼럼의 취지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 528일 폴 매카트니 옹의 내한공연 계획이 발표됐으니 거기에 맞춰 저금을 해야 할 사람도 있겠지?

 

현존하는 최강의 기교파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 내한공연도 눈길이 가는데 레퍼토리가 너무 가곡 위주네. 물론 취향에 따라 이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불만이 없겠지만, 그래도 드세이가 공연을 한다면 오페라 아리아 위주로 리스트를 짜 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지.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다른 공연에 우선순위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

 

이렇게 저렇게 다 빼고 추천할 공연은 따로 있어. 41일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교향악 축제가 시작돼.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교향악단들이 모두 회심의 역량을 선보이는 기회지. 예당 홈페이지에서 연주 곡목들을 살펴본 뒤 맘에 드는 곡을 고르는게 아마 제일 간편할 거야. 제일 비싼 티켓이 4만원. 이럴 때 예당 콘서트홀의 중앙 자리에 앉아 보는 거야. 물론 같은 돈으로 1만원 짜리 표를 사서 4개의 공연을 보는 것도 추천. 개인적으론 419일 열리는 부천 교향악단과 서울대 최연소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의 협연이 궁금하네.

 

국립극장은 3월부터 셰익스피어 관련 공연이 한창인데, 3월에 이미 시작해 413일까지 공연되는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도 좋을 것 같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공연은 425일부터 27일까지 공연되는 한여름밤의 꿈이야.

 

 

 

 

공연 주체는 핸드스프링 퍼펫 컴패니라는 이름의 남아프리카 극단. 이름을 보면 눈치채겠지만 인형극단이야. 그게 뭘 어쨌느냐고 하는 사람들에겐 영국 국립극단(National Theatre)워 호스라는 연극을 검색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 표정까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말 인형을 무대에 등장시켜 기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팀이지.

 

당시 워 호스를 연출했던 톰 모리스가 연출을 맡아서 더 기대가 돼. 티켓은 4만원에서 5만원. 정교한 인형들의 움직임을 잘 보려면 과감하게 5만원을 투자하라고 권하고도 싶어.

 

돈을 많이 썼으니 4월의 책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 ’. 요즘 드라마나 영화 뿐만 아니라 현실 세상에서도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게 쏟아지고 있는데, 이 소설은 1959년작이니 그야말로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인 셈이야.

 

 

 

당시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고, 그해 연말 한국에서도 출간됐어. 당시 한 신문에 실린 책 광고를 보면 싸강양() 쾌심(快心)의 일대역작(一大力作)’이라는 카피와 함께 크리스마스와 새해 선물로 추천하고 있어.

 

서른아홉살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폴라는 부유한 애인 로제와 연애중이지만 그의 사랑을 진지하게 믿고 있지는 않아. 아니, 그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지. 그런 폴라가 스물다섯살의 순수한 견습 변호사 시몽을 만나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야.

 

당시에서는 서구에서도 남녀간 열 네살의 차이가 대단히 크게 느껴졌던 모양이야. 요즘은 한국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와 유아인이 극중 스무살 차이가 나는 남녀 사이의 감정을 다루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

 

사강은 1960년대와 70년대,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감정선을 지배했던 여류 작가의 대명사야. 그런데 정작 서른 아홉 독신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던 사강의 당시 나이가 24세였다는 건 어쩐지 뭔가 속는 기분이 들기도 해. 아무튼 지금 그의 문체를 다시 읽어 보면 어딘가 흑백 영화를 보는 듯, 마음이 촉촉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거야. 이 소설은 1961년 할리우드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이브 몽탕, 앤서니 퍼킨스 주연으로 영화화됐어. 지금은 구해 보기 힘든 영화가 돼 버렸지만.

 

봄바람이 살살 불면 주말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 마침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전이 열리고 있어.

 

 

 

이타미 준의 본명은 유동룡. 재일교포야.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고인이 유품으로 남긴 스케치, 모형, 영상, 회화 등 500여점을 기증했고, 그 덕분에 이 전시가 열리는 거지. 참고로 고인은 평생 귀화하지 않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분이고, 이타미 준은 귀화명이 아니라 예명이야.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겨서 방주교회, 포도호텔 등 대표작들을 제주도에 지었지. 여기서 영감을 받으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날씨야. 다음달에 봐.

 

 

 

그 다음은 덧붙이는 이야기들.

 

 

톰 모리스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연극 '워호스'는 전 세계에서 벌써 240만명이 직접 봤다는군요. 영화라면 별 것 아닐 수 있겠지만 연극이라면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직접 공연이 아닌, 무대 공연을 촬영한 영상물로 볼 수 밖에 없었지만(그것도 단 3일 동안 국립극장에서 개봉), 좀 기다리면 '워 호스'에 이은 충격이라는 '한여름밤의 꿈'은 직접 공연 팀이 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워 호스의 말 인형들 - 馬形 이라고 쓰는게 맞을런지도^^ - 들이 준 충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정교한 제작 기법과 조종술의 조화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BBC의 소개 영상을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듯. 톰 모리스 인터뷰와 '워 호스', 그리고 '한여름밤의 꿈'을 다룬 내용입니다. 인형극과 연극의 경계를 넘은 환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영화화한 할리우드 영화 '굿바이 어게인'이 나온 1961년 기준으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46세, 앤서니 퍼킨스는 29세였습니다. 실제 나이 기준으로 하면 현재 '밀회'에 나오고 있는 김희애-유아인과 거의 비슷한 차이지만, 사실 사진상으로는 그리 큰 차이가 나 보이지 않습니다.

 

 

 

 

퍼킨스에 비하면 유아인은 심하게 동안인 셈이죠.

 

 

요즘 밀회 때문에 피아노 다시 배우러 나가는 분들이 많다는 소문도. 아무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다시 보시면서 '밀회'를 즐기시면 더 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P.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끝 점 세개는 사강이 꼭 그렇게 해 달라고 고집했다더군요.

 

 

 

728x90

이번달엔 후다닥 올립니다.

 

3월 공연/음악계가 꽤 풍성합니다. 조카들 졸업/입학 선물로 지출이 많으셨던 분들은 주머니 사정이 안 좋으실 수도 있겠지만, 월 10만원 정도는 나만을 위한 지출로 남겨 두셔도 좋을 듯 합니다.

 

생각해 보면 꽤 좋은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 돈 모아 봐야 다른 큰 일 못해요. 2년 모아야 명품 비슷한 백 하나 살 정도... 그러니까 마음을 살찌우는데 팍팍 쓰세요.^^

 

 

 

 

 

 

10만원으로 즐기는 3월의 문화생활가이드

 

 

우선 뮤지컬 마니아들이 흥분할 만한 소식. 지난해 7월 라민 카림루가 소리소문없이 내한공연까지 하고 나가더니 이번엔 알피 보 내한공연 소식이 들어와 있네. 315일 예술의전당.

 

혹시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면 알피 보는 현재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연 테너야.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역으로 특히 잘 알려졌지. DVD로 발매된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 국내 뮤지컬 마니아들에게도 친숙한 편이야.

 

당연히 그리 싸지는 않아. R석은 13만원. 꽤 비싼 공연인데 노래 들으러 가는 거니까 C 4만원도 갈만 한 공연이라고 봐. 각자 사정에 맞게 좌석 선택하길 바라. 그리고 이 공연을 보러 갈 사람이라면 이미 갖고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25주년 기념 공연 DVD는 정말 돈이 아깝지 않을 거야.

 

지난 2010 103일 런던 O2아레나에서 열린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공연은 지금껏 인구에 회자되는 명연인데, 사실 알피 보가 장발장 역을 맡은 건 이 공연이 처음이야. 그 뒤로 웨스트엔드에서 장발장 역을 맡아 명성을 떨쳤고, 지금은 현역 최고의 장발장이 됐지. 물론 개인적으론 초연 때의 코엄 윌킨슨이 더 마음에 들지만. 9900(1년 전에도 추천한 적이 있으니 이번 달 계산에선 뺄게).

 

 

전시. 38일부터 515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스팀펑크 아트전도 눈길이 가네. 스팀펑크(steamfunk)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도 꽤 있을 거야.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 , 이런 거?’하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친숙한 물건들이지.

 

SF장르가 염세적인 분위기의 사이버펑크로 진화하던 무렵, ‘혹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현대문명으로 진화한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등장한 거야. ‘스팀펑크의 스팀은 당연히 증기기관을 말하는 거고, 증기기관 시대의 아날로그적인 디자인이 현대 문명과 결합됐을 때 이질적이면서도 옛스러운 느낌을 즐기는 거지. 이게 디자인에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어.

 

알기 쉽게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같은, 19세기적인 분위기에 최첨단 기술이 결합된 느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야. 이런 분위기에는 유머 감각이 필수라서 꽤 즐거운 구경이 될 거야. 12000.

 

 

321일에서 23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무사시도 관심이 가네. 일본의 셰익스피어 극 전문가인 니나가와 유키오가 연출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인데, 영화 데스노트의 주인공인 청춘 스타 후지와라 타츠야가 무사시 역을 맡아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야. 물론 국내 공연에도 후지와라가 온대. 무사시의 라이벌인 사사키 고지로 역도 드라마 신참자시리즈로 인기 높은 미조바타 준페이라니, 얼굴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베가본드로만 무사시 이야기를 접한 사람은 벙어리인줄 알았던 사사키 고지로가 말을 하는 걸 보고 당황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노우에의 설정일 뿐, 사사키가 벙어리였다는 기록은 없어. 어쨌든 본 적 없는 연극을 추천하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자는 취지에서 일단 추천. 티켓은 7만원에서 3만원까지인데, 주인공들 얼굴 표정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3만원 짜리 추천.

 

지난해 12월 조용히 콜린 윌슨의 부음이 떴어. 아는 사람들은 저 이름을 보는 순간 아웃사이더라는 책이 떠올랐을 거야.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아웃사이더의 원작이냐고? 아니, 그건 수잔 힌턴의 소설이고, 아웃사이더콜린 윌슨의 독특한 시선으로 본 세계 문명사라고 해야 할 그런 책이야.

 

이 책을 접하면 누구나 참 벼라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인간이 있었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케사르, 징기스칸, 바그너, 히틀러 등 인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대의 아웃사이더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거든.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이 책을 썼을 때 콜린 윌슨이 25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이 오지.

 

물론 읽다 보면 스물 다섯 청년만이 할 수 있는,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듯한 치기 어린 오만함을 느끼고 미소를 지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나이에 이만한 성과를 낸 해박함과 기발함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책이지. 이 책 한권만을 읽고 나도 콜린 윌슨만큼 박식해졌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야. 대략 12000.

 

3월은 아무리 봄이라도 쌀쌀해. 다들 감기 조심하고, 4월에 만나.

 

 

315일 알피 보 내한공연          C 4만원

321~23일 연극 무사시           C 3만원

38~518일 스팀펑크 아트전    12000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12000

(선택: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공연 DVD      9900)

 

합계                              94000(103900)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 처럼 잘 정리된 신화도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시카와 에이지 원작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권위가 워낙 견고하기 때문이죠.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이 1954년부터 내놓은 영화 '미야모토 무사시' 3부작도 원작 소설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사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베가본드' 역시 몇가지 새로 만들어 넣은 에피소드와 몇몇 설정(예를 들면 사사키 고지로를 벙어리로 설정해 둔 것 같은)을 제외하면 원작 소설의 스토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본 적 없는 작품을 추천한다는 건 꽤 꺼려지지만, 공연의 스펙으로 볼 때 안목을 넓히는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할 듯.

 

스팀펑크라는 장르는 위에 설명한 이상은 힘들 듯 합니다. 그러니까,

 

 

 

 

윌 스미스 주연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는 전형적인 스팀펑크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19세기 유럽의 낙관적인 분위기 + 첨단 과학기술을 그려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장르는 유머가 필수가 돼 버렸습니다.

 

 

 

황정민 엄지원 주연 영화 '그림자 살인'은 한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스팀펑크의 분위기를 가진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알피 보. 뭐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마는.

 

 

 

 

 

레미제라블 관련 곡들은 많이 들어보셨을테니. 알피 보가 부르는 'Music of the Night'입니다.

 

 

 

 

다음은 영화 '물랑 루즈' 수록곡인 'Come What May'를 왕년의 걸 그룹 스파이스 걸스 멤버 멜라니 C와 함께 부르는 모습. 왜 듀엣 상대를 멜라니 C로 골랐는지 모르겠지만 두 가창자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좋은 듀엣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무튼 목적은 알피 보의 솜씨를 보자는 것이니 일단 들어 보시길.

 

 

 

마지막으로 알피 보가 본래 정통 테너였음을 보여주는 영상. 그가 부르는 Nessun Dorma를 듣고 나니 그가 뮤지컬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기존 테너들에게는 큰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오페라 스타로도 요나스 카우프만을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을지도. (외모지상주의)

 

 

 

노파심에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번 공연의 이름은 '알피 보 내한공연'이 아니라 '2014 봄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알피 보의 단독 공연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보가 부르는 노래는 전체 레퍼토리 중 7곡입니다(듀엣 포함).

 

왜 이런 구성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알피 보를 한국에서 만날 기회라는 것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소개했습니다. 혹시라도 '단독 공연이 아니었어!' 라는 실망을 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http://www.sac.or.kr/program/schedule/view.jsp?seq=21400&s_date=20140315

 

 

 

 

 

 

728x90

제가 좀 미친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무튼 늦었지만 아직 하나밖에 안 지나갔군요. ^^;;

 

나머지 추천 문화생활을 충분히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2월의 문화가이드

 

1년 중 가장 짧은 달, 2월이야. 그래도 문화적으론 꽤 풍성한 달이지. 직장인들은 설 연휴에 목돈이 빠져나가 여유가 없을 수도 있지만, 학생들은 세뱃돈을 받아 풍성해졌을 테니 문화생활의 갈증을 한껏 풀어 보도록.

2월의 음악 공연 중에는 세계 정상급 솔리스트 두 사람이 참여하는 공연들이 눈길을 끄네. 바로 하피스트 라비니아 메니에르와 플루티스트 엠마누엘 파후드야.

 

14. 발렌타인데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로맨틱 라흐마니노프에 라비니아 메니에르가 나와.  연주할 곡은 모짜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메니에르는 몇해 전 화제가 됐던 다큐멘터리 라비니아의 귀향주인공이야. 네덜란드로 입양 간 한국인의 핏줄이지. 태어나자마자 해외로 입양을 보낸 처지에 굳이 한 민족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게 인지상정. 물론 연주력도 극강이니 믿어 봐.

 

이날의 메인 곡은 스테판 애즈베리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 피아노 협주곡이 아니라 교향곡 2번이야. B 2만원 추천.

 

22일 공연은 엠마누엘 파후드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이란 제목이야. 한 번에 안 외워지지? 엠마누엘 파후드는 22세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플루티스트로 뽑혔다는 천재야. 그 뒤에도 플루트의 세계에선 최고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겠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 중에서 바로크 음악에 특화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유닛이야. 더 설명이 필요할까?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을 비롯해 텔레만의 플룻 협주곡 등 친숙한 곡들을 연주해. 아마 연주의 정교함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협연이라고 생각해. 3만원짜리 C석도 있긴 한데 형편에 따라 B 5만원까진 써도 아깝지 않을 듯.

 

이번엔 국악 차례. 국립극장에서 19일부터 23일까지 공연되는 창극 숙영낭자전이야. 숙영낭자전은 신재효가 기존의 판소리 열두마당을 여섯마당으로 정리한 뒤로 판소리 사설이 전해지지 않아. 그래서 고전소설 숙영낭자전을 창극으로 개작한 작품이지.

 

달오름극장은 그리 크지 않으니 2만원짜리 A석이 목표인데 할인행사가 많아서 잘 찾아보고 가길 권해. ‘이름이 숙영인 분은 50% 할인같은 것도 있어.

 

 

공연에 돈을 많이 썼지만 아직 할 일은 많아.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선 117일부터 316일까지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려. 고인의 작품 90여점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상당히 뜻깊은 일이라는군. 또 국제갤러리에선 국내에서도 인기 높은 영국 화가 줄리언 오피의 개인전을 323일까지 개최해. 참고로 이 두 전시는 무료.

 

 

책은 그동안 소설 위주로 추천했는데 이번엔 흥미로운 역사+심리분석서를 한권 소개하려고 해. 나시르 가에미가 쓴 광기의 리더십(A first-rate madness)’.

 

제목을 보면 히틀러나 스탈린이 제일 먼저 생각날텐데, 물론 히틀러에 대한 내용도 있어.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링컨, 처칠, 간디 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는 위인들이야.

 

저자는 각 인물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정상인에 비해 상당히 심각한 정신병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병은 조증과 우울증인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가에미는 이런 병증들이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데 상당히 필요한 자질이라고 강조하고 있어.

 

예를 들면 조증 환자는 전쟁처럼 긴장감이 높아진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탁월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타입이라는 거지. 물론 다 좋다는 건 아냐. 예를 들어 2차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처칠에 대해 그는 하루에 100개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런데 그중 4개 정도만 쓸만하다고 비아냥거렸다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어.

 

사실 자신의 판단 한번에 수백만, 수천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제정신일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서 어쩌면 지도자를 고를 때도 너무 반듯하고 흠 없는, 모범생만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야.

 

2월은 금세 지나가. 3월에 만나.

 

14일 로맨틱 라흐마니노프                                               B 2만원

22일 엠마누엘 파후드와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                     B 5만원

19~23일 창극 숙영낭자전                                                B 2만원

국제갤러리 줄리언 오피전                                                 무료

가나인사아트센터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무료

나시르 가에미, ‘광기의 리더십                                       16000원 선

합계                                                                      106000

 

 

 

 

줄리언 오피는 제가 좋아하는 화가라 좀 사진이 편향되게 많이 들어갔습니다. 위에 보시는 이 블러의 앨범 재킷도 오피의 작품이죠. 또 한번 보면 처음 보는 작품도 그 사람의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맨 위에 있는 그림의 제목은 '신사동을 걷다'. 따지고 보면 한국과 무관한 사이가 아닙니다.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 빌딩(구 대우빌딩)에 걸렸던 작품 '군중'도 유명하죠. 저 동그란 머리가 바로 오피의 상징입니다.

 

 

 

일본 오모테산도 힐즈를 장식한 벽화들도 딱 보면 그의 작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추천해놓고 제가 서울 전시를 못 가보고 있다는 ㅜㅜ)

 

에마누엘 파후드는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시면 수없이 많은 공연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곡 제목인 쉬링크스(Syrinx)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가 천개의 눈을 가진 괴물 아르고스를 잠재우기 위해 만들었던 피리의 이름이죠. 당대의 '피신'으로 통하는 파후드에게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물론 이번 공연의 색채와는 좀 다른 곡이지만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습니다.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의 협연도 자료가 있군요. 바흐 관현악모음곡 2번(BWV 1067) 중 7곡 바디네리입니다.

 

 

 

(제목만 보고 뭐야 하시는 분들, 들어 보시면 다 아시는 그 곡입니다.^^)

 

 

 

라비니아 메이에르의 영상을 찾아 보면 필립 글래스의 곡만 나와 좌절하시는 분들이 있을 법 합니다(개인적으로 필립 글래스는 공포의 대상...). 몬테베르디의 바로크 곡 연주를 들으시면 기분 전환이 되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웃자는 내용. 파후드는 흔히 이런 모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드물지 않다는 거. (찾아보시면 더 심한 모습도 많습니다.)

 

남자도 사진빨, 크게 작용합니다.

 

그럼 늦은 2월 인사는 이만.

 

 

 

 

728x90

밀린 문화어 사전 세일 기간입니다.

 

별 설명 없이 그냥 나갑니다.^^

 

사진은 신성일, 윤정희가 주연한 전설의 히트작 '내시'. (조여정 주연 '후궁'과 매우 흡사한 내용입니다.)

 

 

영충호 [명사]

: 영남, 충청, 호남 지방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

전통적으로 영남, 호남, 충청 지방을 총칭하는 이름은 삼남(三南)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따로 이 세 지역을 묶어 부르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인구 순에 따라 영남-호남-충청의 순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3 812, 이시종 충북지사는 충청 지역 인구가 호남 지역 인구를 넘어선 데 맞춰 영충호 시대라는 신조어를 내놨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2 10월 기준으로 충청남북도와 대전,세종시 인구는 총 526만여명으로 전라남북도와 광주광역시를 합한 호남권의 525만여명보다 약 1만여명 많다. 이런 인구 변화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이다.

 

삼남 외에 영호남과 충청 지방을 한꺼번이 일컫는 조선시대의 표현으로는 양호(兩湖)와 영남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양호란 호남(湖南, 전라도)과 호서(湖西, 충청도)를 말한다. 이 호남과 호서는 모두 중국에서 동정호(洞庭湖)를 중심으로 그 남쪽과 서쪽을 가리키는 지명이지만 한국에는 동정호에 비길 만한 큰 호수가 없다. 그럼 대체 왜 호남과 호서라는 지명이 한국에서 쓰이게 된 것일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지리전고(地理典故) 편에는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김제 벽골제와 제천 의림지는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저수지이긴 하지만 자연이 만든 호수도 아닌 터라 중국과 같은 지명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붙인 기준임이 역력하다.

 

P.S. 호서와 호남 모두 비슷하게 억지에 가까운 지명인데도 두 지명 가운데 오늘날 호서는 상대적으로 사라진 이름이 된 데 비해 호남은 여전히 널리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대다나다 [형용사]

 

: ‘대단하다의 영혼 없는(?) 표현

 

대단하다를 아무런 억양 없이 읽으면 대다나다가 된다. ‘대다나다로 쓰는게 일반적이지만, 발음의 특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로 점을 찍어 쓰기도 한다.

 

의미도 그냥 대단하다는 뜻이긴 하지만, 진심으로 감탄하는 경우를 대단하다라고 쓴다면 내심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영혼 없이’) 형식적으로만 인정해 주는 경우에 쓰는 말이 바로 대다나다인 것이다.

 

 

어원은 2013 123 MBC TV ‘라디오 스타에 소녀시대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로 추정된다. 유리가 요가 시범을 보이자 제시카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는데, 유세윤이 이 말에 아무런 억양이 없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라며 지적했다. 이후 이 말이 대다나다라는 표기로 굳어졌다는 것이 정설.

 

(위 동영상의 2:00~2:10 사이에 나옵니다.^^)

 

P.S. VIXX의 히트곡 ....는 가사 내용과 이 말의 뜻이 아무 상관이 없다(심지어 노래 안에 대다나다라는 가사가 나오지도 않는다).

 

 

 

순애보(殉愛譜) [명사]

 

: 연인을 따라 죽음을 택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

 

1939년 출간된 박계주 원작 소설 순애보는 오늘날 보기엔 다소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희대의 히트작. 남자 주인공 문선이 인순과 명희라는 두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제목 순애보()’은 오래 전 왕이나 귀족이 죽을 때 하인들을 같이 묻는 순장(殉葬)  자다. 그래서 순애보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죽는 이야기라는 뜻. 하지만 이 순애보순수한 사랑 이야기라는 뜻의 순애(純愛譜)’로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다 보니 별 심각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 심지어 아무 위기 없이 잘 살고 있는 커플 이야기에도 순애보라는 표현이 남용되고 있다. 이재용 감독의 영화 순애보(純愛譜)’도 있지만,  한자 표기를 순()으로 쓴 경우의 90%는 별 생각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P.S. 물론 원작 소설 순애보에서도 문선이 죽을 각오를 하긴 하지만 죽지는 않음.

 

 

클리셰 [명사]

 

: cliché(불어). 본래 진부한 문구 혹은 상투적인 표현을 뜻하는 문학용어.

 

전통적으로 클리셰라는 말은 당연히 좋은 뜻이 아니다. 드라마로 치자면 재벌 2세인 기획실장님과 간신히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가난한 캔디가 회사 복도에서 부딪혔을 때 실장님이 아무 사과 없이 지나가려 하고, ‘캔디회장 아들이면 이래도 되는 거에요!”하고 화를 내며 실장님의 따귀를 때리는 뭐 그런 진행을 말한다.

 

하지만 최근 클리셰가 변명이 되기도 한다. 2013년 하반기 표절 시비에 몰린 수많은 가요들에 대해 작곡자들이 그건 장르적 클리셰일 뿐이라고 항변하면서, 클리셰라는 말이 대중에게 익숙해졌다.

 

장르적 클리셰라는 것은 일단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클리셰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상투적인 표현(음악의 경우 곡의 진행)이라는 점은 맞지만, ‘그것이 없으면 그 장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인 특징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왕과 기사, 엘프와 용이 등장하는 것은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에 무지한 사람은 드래곤 라자를 읽고 이건 반지의 제왕의 표절이잖아!”하고 흥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이런 주장은 낯설지 않다. 90년대 그룹 넥스트를 이끌며 수차례 표절 시비에 오른 신해철은 댄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오오, 이 듀스라는 녀석들은 서태지의 표절이구나!’ 할 수 있다며 특정 장르에 대한 무지가 무분별한 표절 논란을 확산시킨다고 일침을 가한 바 있다.

 

문제는 이 장르적 클리셰 이론도 이제 더 이상 대중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 특정 리듬이나 멜로디, 곡의 진행은 부분적으로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똑 같은 위치에 똑 같은 악기나 코러스를 배치한다든가, 왜 하필 특정 장르를 선택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답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대중은 또 많은 작곡가들이 이건 장르적 클리셰이므로 표절이라 볼 수 없다고 코멘트하는 것 자체가 동업자끼리의 의리 같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 법에서 표절 여부는 원저작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청구해야 법정이 판단할 수 있는 민법상의 개념이므로, 결국 그 곡의 표절 여부는 바로 전문가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니 대중이 할 수 있는 것은 맨 처음 문제가 된 곡에 대한 고발’, 그리고 실제 판결 결과와 상관 없이 자신이 의심한 작곡가에 대한 선택적 거부 정도인 셈이다.

 

비트코인 [명사]

 

: Bitcoin. 2009년부터 세계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사이버 화폐의 이름

 

전 세계 모든 국가는 자국 영토 내에서 유통될 수 있는 화폐를 법으로 규정하고, 이 화폐 유통 질서에 도전하는 시도를 엄벌을 통해 규제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정보화사회가 발달하다 보니 온라인에선 사이버머니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 오래다.

 

2013년 하반기 들어 갑자기 한국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한 비트코인은 사이버머니로 출발했지만 현실 사회에서의 통용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물론 온라인 게임 안에서 사용되는 게임머니나 아이템도 실제 화폐와 교환되는 경우가 꽤 많이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마트에 가서 디아블로3의 골드를 줄 테니 컵라면을 달라고 하면 어지간해선 통하지 않는다(물론 같은 길드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싸이월드 도토리나 네이버 해피빈과도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도 서서히 오프라인에서 비트코인을 이용한 상거래가 가능해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비트코인의 최대 보유국이 중국이며, 그 이유는 중국이 비트코인을 이용해 미국 주도의 세계 통화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음모설도 등장했다. 비트코인을 만들어 낸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인물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개인인지 집단인지도 불분명하다)이라 음모설의 등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대가 사이버 머니의 탄생을 요구한다면 어차피 보통 사람들로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 전 세계 온라인 쇼핑몰을 누비는 쇼핑 마니아들에겐 환전이나 환율을 따지지 않는 비트코인이 보편화되는 세상이 천국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철저하게 무기명이고 거래 흔적도 남지 않는 비트코인이 현재대로 발전할 경우 가장 좋아할 사람들은 마약 카르텔의 보스들이나 국제 무기상, 그리고 뇌물을 좋아하는 전 세계의 부패한 공직자들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미드 '왕좌의 게임'에도 빠지지 않는 환관 역할.

내시 [명사]

 

 

: 內侍. 왕의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

 

 

오늘날에 와서 내시라는 말은 흔히 환관(宦官)과 사실상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이 말은 처음부터 같은 뜻이 아니었다. ‘성기능을 상실하고 궁에서 일하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은 엄밀히 말해 환관이다. 이에 비해 내시는 그저 권력자의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사람정도의 의미를 갖는 말이었다. 한국의 경우 14세기 이전, 고려 중엽까지 임금의 직속 비서 역할을 하던 엘리트 문관들을 내시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삼국지연의에도 조조의 사촌인 조인이 조조의 침전에 들어가려 하자 허저가 이를 막는 대목에 이 말이 나온다. “내가 조조의 친척인 것을 모르느냐고 꾸짖는 조인에게 허저는 나는 비록 친척이 아니지만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고(許褚雖疏,現充內侍), 주공이 취해 누워 있으니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혹시 이 내용을 보고 허저가 고자였다고 착각한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유사 이래 아시아권의 다양한 왕정 체제에는 복수의 여인들이 거주하는 후궁과 이를 관리하기 위한 거세된 남성의 역할이 상시 존재했다. 최고 통치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환관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특히 중국 명대 후기에는 환관들이 실질적인 재상 역할을 했으나 부패와 타락이 심해 당대의 석학 황종희가 명이대방록에서 환관들은 독약이나 맹수와 같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국왕의 시중 등 단순 업무만 처리하던 환관들은 고려 의종 이후 서서히 내시들의 영역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공민왕 5(1356) 내시부를 설치하면서 내시=환관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갔다. 고려 말에는 원의 영향으로 환관의 숫자도 많아졌고 특히 원의 조정에 진출한 고려인 환관들은 본국 내정에 간섭하며 세도가 행세를 했다.

 

조선 왕조는 내시부 체제를 계승해 1894년 갑오경장으로 내시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됐다. 하지만 고려말 환관들의 악몽 탓인지 내시들의 권력 장악에 대한 견제를 엄격하게 유지, 간혹 부를 축적한 내시들은 있어도 권력을 휘두른 강한 내시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013년 이후 최고 통치자의 참모들이 지나치게 저자세로 처신, 소신 있는 행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내시 정치라고 비꼬는 용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 고위공직자는 내시도 아니고, 울지도 않았다고 발끈하기도 했다.

 

중국의 역대 환관들이 모두 후한시대의 십상시처럼 나라를 어지럽힌 간신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환관 가운데서도 종이를 발명한 후한 때의 채륜이나 대함대를 거느리고 동남아시아 일대를 경략한 명초의 정화 같은 큰 인물들이 나왔다.

 

 

 

또 조선 세조 때부터 4대를 섬긴 김처선은 사대부들이 숨 죽이고 침묵할 때 연산군의 패악무도함을 직간하다가 팔다리가 잘려 죽은 의인이었다. 여기다 함부로 조선시대 내시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 김처선의 영혼이 저승에서도 편치 못할 듯 하다.

 

P.S. 오만석 주연 드라마 '왕과 나'에서 오만석의 역할이 바로 김처선이었습니다. 연산군을 다룬 사극에선 김처선이 빠질 수가 없죠. 최근 '인수대비'에서는 맹상훈이 이 역할이었습니다.

 

고자는 한자로 鼓子라고 씁니다. 물론 한자에 본래 그런 뜻이 없으니 '고자'는 순 우리말이고, 그걸 한자로 맞춘 게 鼓子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중국에서는 고자를 엄인()이라고 부릅니다.

 

 

드립치다 [동사]

 

: 특정 주제나 특정 형식으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다

 

인터넷 용어 드립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설이 있으나,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라틴어의 즉흥 대사를 뜻하는 약어 애드리브(ad lib)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다.

 

즉 누군가 엄청나게 형편없거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을 때, 누군가 개드립(+애드리브) 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고, 이것이 더 단축되면서 그냥 드립으로 축소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드립의 예들을 보면 그때 그때 순발력을 이용해 발생하는 애드리브의 범주에 드는 것 보다는 나름 여러 날 고민해서 만들어 낸 듯한 경우가 많다. 특히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공격할 때 ‘X드립 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드립의 어원이 드리블(dribble)이라는 견해도 있다. 축구나 농구에서 공을 몰 듯, 어떤 주장을 자신만의 생각으로 어이없이 몰고 가는 경우를 보고 비웃을 때 드립(드리블) 친다고 한 것이 시작이라는 것이다. 방송/연극/영화계에서 흔히 대사를 친다’, 애드리브 역시 친다고 표현하듯 체육계에서는 드리블도 친다고 말한다. 여기 비쳐 볼 때 충분히 그랬을 법한 표현이다.

 

드립치다라는 동사에서 출발한 드립은 접미어로 활용되며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수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아예 드립이라는 명사가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구세대가 사용하는 구라라는 말의 대체어로 자리잡아 가는 느낌이다. 개그맨 김구라의 데뷔가 한 10년쯤 늦었으면 김드립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728x90

[그린라이트] [싱글턴] [감성주점] [FA로이드] [예거밤] [아구아밤]

 

밀린 문화어 사전에 대한 묶음 특집입니다.

 

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반성의 뜻이기도... 아무튼 별다른 설명 없이 넘어갑니다.

 

 

 

 

감성주점 [명사]

 

: 청춘 남녀가 짝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찾는 유흥업소

 

마땅히 정해진 짝이 없는 청춘 남녀가 다양한 핑계로 술자리에서 즉석 짝짓기를 해 온 것은 굳이 기원을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행위다. 그리고 각 시대에 따라 이 목적을 수행하는데 최적화된 업소들이 등장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 술자리에서의 즉석 만남은 남자 손님들이 여자 손님들에게 먼저 다양한 방법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동시에 관심을 전달하고, 여자 손님들이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이뤄진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21세기 초까지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업소에 고용된 직원들이 여자 손님들을 남자 손님들에게 데려가는 부킹이라는 방식이 유행했던 것이 주목할 만한 예외일 뿐이다. 정상적인 경우 1980년대에는 디스코텍, 90년대에는 락카페, 2000년대 이후에는 클럽이 만남의 장소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보다 노골적으로 짝짓기가 목적임을 적시한 업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등장한 부킹포차류의 주점들이 대표적이다. ‘부킹포차란 이름대로 외형상으로는 대형화된 일반 실내 포장마차와 차이가 없으나 손님이 20대 남녀로 제한된다는 점, 거의 모든 고객들이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의 동성끼리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입장 자체가 이성으로부터의 접근을 바란다는 의사 표현인 것이다.

 

2013년 현재 번창하고 있는 감성주점은 이런 부킹포차의 형식이 확대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외형상으론 일반주점과 큰 차이가 없으나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개중에는 아예 DJ박스와 스테이지를 갖춘 곳도 있다. 짝짓기가 주 목적이되 대부분의 업소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남자 손님들이 여자 손님들에게 직접 수작을 건네기 보다는 종업원을 거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일부 업소에서는 남자 손님들이 여자 손님들에게 의사 표현을 할 때 간단히 사연을 쓴 카드를 이용하고 있고, 여자 손님들은 카드를 받은 뒤 승낙/거절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카드의 수에 따라 여자 손님들은 술값을 할인받을 수도 있는데 이는 외모가 뛰어난 여자 손님들을 대량 확보하기 위한 업소 측의 프로모션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2013 10월 정부 당국에서 감성주점을 변태 영업으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섰다. 손님들이 업장 내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려면 유흥주점 허가를 받아야 하나 대부분의 감성주점들이 세제 면에서 유리한 일반 음식점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변형 영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속이 이미 젊은 층에 만연한 감성주점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궁금하다.

 

 

 

 

FA로이드 [명사]

 

: FA를 앞둔 선수들이 평소보다 뛰어난 활약으로 몸값을 올리는 것을 약물 효과에 빗댄 것

 

프로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몸값 폭발의 기회가 있다. 바로 FA(Free Agent) 제도에 따른 것이다. 야구의 예를 들면, 한 구단에서 9년간 매시즌 경기수의 3분의 2 이상을 출전한 타자는 FA자격을 획득, 원 소속팀을 비롯해 나머지 모든 구단과 새로 계약할 수 있다. 물론 입단 직후부터 주전 자리를 확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므로 FA 자격을 획득하는 데에는 대개 10년 이상이 걸린다.

 

FA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FA 자격을 갖게 되는 시즌, 9번째 주전 시즌에 확실한 성적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 해에는 이를 악물고 초인적인 성적을 내기 마련인데 이를 가리켜 ‘FA로이드라도 맞은 거냐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뒷부분의 로이드는 만국 공통의 스포츠 금지 약물인 아나볼린 안드로제닉 스테로이드(anabolic-androgenic steroid, AAS)에서 따 온 것.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남자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이 메달을 박탈당한 것이나 미국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홈런(762)의 배리 본즈가 명예의 전당에 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스테로이드 사용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획득하는 프로야구 박한이(삼성)와 최준석(두산)은 올시즌 내내 그리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이 경우 적절한 표현은 “FA로이드 불발”). 하지만 이들은 팀이 한국시리즈에 오르자 맹타를 터뜨렸고, 결국 최종 승자 삼성의 박한이가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두산이 이겼다면 최준석이 만장일치 MVP를 받았을 상황. 이들은 조용한 시즌을 보내다 포스트시즌에 FA로이드를 폭발시킨 드문 경우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싱글턴 [명사]

 

: singleton. 독신. 1인가구

 

본래 수학에서 단위집합(원소가 단 한 개인 집합, unit set)을 가리키는 용어. 2013년 들어 1인 가구 독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영국 신문 가디언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때문. 어디 가서 별 실속 없는 노처녀라는 점을 지적 받고 브리짓이 분통을 터뜨리자 친구 살롯이 너도 내가 결혼하지 않은 건 싱글턴이기 때문이야, 이 잘난 체 하고, 겉늙은데다 편협하기 짝이 없는 병신아라고 맞받아 쳤어야지("You should have said 'I'm not married because I'm a Singleton, you smug, prematurely aging, narrow-minded morons,' Shazzer ranted.)”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싱글턴이란 말은 독신자가 스스로를 다소 높여 표현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국내에선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책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이후 널리 퍼졌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 싱글은 독신자, ‘싱글턴독신 가구(1인 가구)’로 번역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이건 독신인 성인이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 실정에서나 의미 있는 이야기고, 영미인들에겐 사실상 싱글=싱글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글턴’ 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건 왠지 좀 격이 높아진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싱글을 싱글턴이라고 부른다고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따라서 이런 표현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한도전에도 출연했던 영국 배우 데이지 도노반은 브리짓 존스 시리즈가 우리에게 남긴 거라곤 싱글턴이라는 새로운 단어 하나 뿐인데, 그건 정말 최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린 라이트 [명사]

 

: Green Light. 청신호. 연애 관계에서 상대에게 대시해도 좋다고 보내는 OK 사인.

 

한국 어린이들은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에 길을 건너지만 미국 어린이들은 녹색 불에 길을 건넌다는 우스개가 있었다. 사실은 한국 신호등도 잘 보면 녹색 유리가 끼워져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신호라고 부르는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야구에서는 언제든 자의로 판단해 2루로 도루할 자격이 주어진 선수를 가리키도 한다.

 

 

2013년 하반기부터 JTBC 예능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는 그린라이트를 켜라라는 코너가 등장하면서 이 용어가 젊은 층 사이에서 연애 용어로 확산되고 있다. 연애 초기 단계에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관심을 알아챈 여자가 적극적인 호응의 뜻으로 보내는 사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한 야구 전문 사이트가 이런 용법의 원조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영미권에서는 이 말이 오래 전부터 허가(permission)’와 동의어로 사용됐고, 남녀 관계에서도 ‘OK 사인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돼 왔다. 비욘세 와 존 레전드는 모두 ‘Green Light’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두 곡 모두 내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청신호를 보내 줘라는 내용이다.

 

 

 

 

밤 칵테일 [명사]

 

: Bomb Cocktail. 맥주 대신 에너지 드링크를 사용한 신세대 폭탄주.

 

1980년대부터 아저씨들은 맥주잔에 위스키가 담긴 샷 글라스를 빠뜨리며 밤을 지샜다. 세월이 흘러 맥주와 위스키의 황금비율을 따지던 세대는 황혼을 맞았고 21세기 클럽가에선 독주와 에너지드링크를 배합한 신종 폭탄주가 전성기를 맞았다.

 

2013년 현재는 독일산 약초 리큐르인 예거마이스터가 주 재료인 예거밤과 코카 잎으로 숙성시킨 네덜란드산 리큐르 아구아(Agwa)를 이용한 아구아밤이 대세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클럽에서 각광받고 있는 칵테일들인데, 끝에 (bomb)’이 붙어 폭탄주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겐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에너지 드링크와 알코올의 결합은 술을 더 빨리 취하게 하는 동시에 잠을 쫓는 각성 효과를 발휘해 밤새 놀아 보세용 음료로 안성맞춤이다. 물론 단시간에 혈압을 올려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가 있는데, 술이라는 건 본래 산삼 녹용을 섞어도 많이 마시면 몸에 좋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작작 마셔라.

 

 

 

 

일각에선 밤 칵테일의 유행에 대해 외래 클럽 문화가 한국의 전통적인 폭탄주 문화를 망가뜨렸다고 한탄하기도 하는데, 몰라서 하는 얘기다. 맥주+위스키 폭탄주는 이미 미국에선 19세기부터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 위 사진)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왔다. 가난한 보일러공들이 빨리 취하기 위해 위스키를 원샷하고 맥주로 입가심을 한 것이 유래라는데, 지금은 맥주 잔에 위스키를 빠뜨려 먹는 제조법까지 한국의 원형 폭탄주와 똑같다.

 

 

 

 

 

728x90

새해를 맞았습니다. 새해에도 문화가이드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적극적으로 즐기시기 바랍니다. 인생 뭐 있겠습니까.

 

 

 

 

 

 

10만원으로 즐기는 1월의 문화가이드 (2014)

 

연말 술병은 다들 회복해 가나? 아직도? 세월이 하 수상해서 맨정신으로 새해를 맞을 수 없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세상이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한편에선 좋아지는 게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면 말러의 10번 교향곡을 국내에서 정상급 지휘자의 리드로 저렴한 가격에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아진 일 중 하나야. 123, 한스 그라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연주야.

 

사실 많은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죽었기 때문에 말러는 ‘9번 교향곡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이 10번 교향곡의 1악장만을 완성하고 죽어. 그리고 후세의 작곡가들이 나머지 초고를 완성해서 현재 연주되는 이 곡을 만들었지. 어떤 평론가는 이 10번의 정서를 용서라고 규정했던데,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못잖게 서정적인 선율이 일품이야. 123. B 2만원에 아직 쓸만한 자리를 살 수 있어.

 

사실 올해 1월의 음악 공연을 추천하라면 이 무지치 합주단의 사계(제일 싼 표가 5만원)나 제임스 블레이크 첫 내한 공연(균일 88000)을 첫 손에 꼽아야겠지. 하지만 역시 이런 건 이 칼럼에서 추천할 공연은 아닌 것 같아. 대신 오상진의 북콘서트같은 공연을 눈여겨 보라고 하고 싶어. 부제가 하루키의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2013년 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소설 속에 나오는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같은 곡이 궁금할 거야. 대체 어떤 곡인지 찾아 들어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겠지.

 

하루키는 본래 클래식과 재즈, 올드 팝에 대한 식견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봐. 이번엔 오상진이 책을 읽고 캐나다 교포 피아니스트 루실 정이 곡을 연주하는 진행. ‘1Q84’에 나오는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드뷔시의 달빛등이 연주돼. 119, 예술의전당. 4만원.

 

만약 이런 컨셉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가가 사랑한 음악이란 제목의 CD도 추천할 만 하다 싶어. ‘무라카미 하루키 30년 소설 속의 음악이란 부제를 보면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듯. 3CD. 15000. 클래식과 재즈만이라는 게 아쉽지만 비틀즈나 롤링스톤스 등 하루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뮤지션들은 이런 컴필레이션을 좋아하지 않아.

 

맑은 겨울날, 이런 음악을 틀어 놓고 먼 산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영화로 본 분들이 꽤 많겠지만, 영화와 원작 소설은 초코파이와 자허 토르테만큼 큰 차이가 있어.

 

 

 

 

로맨틱 코미디의 대명사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비해 소설은 근본적으로 쓴 맛을 베이스로 깔고 있어. 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 역시 영화에선 그냥 한국 월화드라마의 귀여운 4차원 아가씨 정도지만 소설에선 미쳐도 단단히 미친 X이거든. 물론 꽤 매력있는 미친 X이긴 하지.

 

이 책을 읽어 보면 생각나는 작품이 둘 있어. 하나는 에밀 졸라의 나나, 또 하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아마도 영화만 본 사람이라면 대체 왜 이런 비교가 가능한 지 상상하기 힘들거야. 그러니 이번 기회에 원작을 한번 읽어 보길 바라.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새 번역본으로 약 1만원, 나머지 두 책은 7천원 내외로 살 수 있어. 싸지? 고전이 이래서 좋은 거야.

 

 

 

춥다고 너무 분위기를 떨어뜨린 것 같으니 아주 발랄하고 활기넘치는 전시 하나 소개할게. 스페인의 천재 그래픽 디자이너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전시회가 예술의전당에서 316일까지 열려.

 

마리스칼의 작품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를 비롯해서 동글동글한 귀여운 선이 특징이지. 동심의 세계를 늘 떠나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는 마리스칼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아직도 세상에는 상상력과 낙천적인 에너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그럼 다들 감기조심하고, 2월에 만나.

 

오상진의 북콘서트 119    A 4만원

말러 교향곡 10 123     B 2만원

하비에르 마리스칼 전          12000  

소설가가 사랑한 음악(3CD)     15000

티파니에서 아침을               1만원

나나                           7천원

생의 한가운데                  7천원

 

 

 

말러가 수많은 선배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을 작곡한 뒤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유 때문에 '9번 교향곡'이라는 말을 꺼렸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러의 교향곡 번호는 9번이되 9번으로 불리지 않는 '대지의 노래'와 실제로는 10번째 교향곡이지만 9번으로 불리는 그냥 9번으로 약간 족보가 틀어집니다.

 

어쨌든 9번을 내놓고 10번은 완성하지 못한 채 말러도 고인이 됐으니 그렇게 두려워했던 징크스가 현실이 된 듯 합니다. 베토벤 이후 브루크너, 슈베르트, 드보르작이 모두 걸린 9번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물론 교향곡을 풀빵처럼 찍어낸 작곡가들은 이후에도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스타 작곡가 가운데선 15곡을 작곡한 쇼스타코비치가 이 징크스를 무력화시킨 공로자로 꼽힙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미완성으로 남은 10번은 데릭 쿡에 의해 5악장으로 완성된 버전으로 꽤 자주 연주됩니다. 국내에선 2010년 서울 시향이 처음 연주한 버전이죠. 안 그래도 들을 곡 천진데 굳이 다른 사람이 완성한 미완성곡까지 연주해야 할까...하는 의문도 물론 있지만, 흔히 그냥 '아다지오'라고도 불리는 1악장의 아름다움은 심하게 매혹적입니다.

 

 

 

특히나 이 곡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뮤즈 역할을 했던 말러의 아내 알마에 대해 말러의 '용서'를 담은 곡이라는 사연이 전해집니다. 솔직히 좀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있는 얘기지만...^^ 곡 해설과 사연에 대해선 이쪽 참조.

 

http://www.pungwoldang.kr/board_music/content.aspx?b_UniqueID=107&tname=board_music

 

 

'티파티에서 아침을'의 원작 소설에 대해선 사실 그닥 관심이 없었지만, 지난해 나온 '트루먼 커포티 선집'에 끼어 있는 걸 보고 흥미가 생겼습니다. 이 독특한 작가와 누구나 다 아는 '그 영화'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싶었던 거죠.

 

아니나 다를까. 책에 나오는 미스 고라이틀리(Go+lightly^^)는 영화의 오드리 헵번과 너무x너무나 차이가 컸습니다.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에 의해 '4차원적 사랑스러움'이 원작에선 너무나도 선명한 '돌아이 짓'이더군요. 원작자 커포티가 오드리 헵번의 캐스팅에 대해 "난 마릴린 먼로가 훨씬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원작을 보시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와 원작은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긴 합니다만, 이렇게 핵심적인 주인공의 캐릭터가 달라지고 보니 전혀 다른 작품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에밀 졸라의 '나나'가 연상되는 것이고(고라이틀리는 오늘날 뉴욕에 떨어진 나나처럼 보입니다. 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후일담도 졸라가 나나에 퍼부은 저주와 거의 유사한 수준...).

 

아무튼 영화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아예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고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리스칼의 코비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 패스. 다시 한번 생각나는 것은 이 코비의 디자인에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피카소의 '여관들'이라는 그림입니다.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그림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그린 그림이죠. 혹시 관련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이 글 http://fivecard.joins.com/1190 참조.

 

2월에 만나요~~

 

 

728x90

12월입니다.

 

이 코너를 쓰기 시작하고 13번째 글. 그러니까 1년이 돌았다는 얘깁니다.

 

새해 준비, 1년의 마무리...이런 말들에 너무 크게 의미 두고 갑갑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 뭐 있나요? 한살 더 먹으면 그만이지. 사실 남들도 별거 없어요.

 

송년회 못 가고 야근하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볼 사람들은 새해에 보면 돼요.

 

연말에 괜히 한 것도 없이 올해가 다 갔네 뭐 쓸데없이 자책하지 마시라고 한 얘깁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12월의 문화생활 가이드

 

이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됐어. 세월 징하게 빠르군.

 

12월에 뭔가 문화생활을 하라고 권할 때에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커플인 사람들에게 이 날은 참 잘 넘기기 어려운 날이야. 솔직히 말해 1224일과 25일에 권하고 싶은 행동 강령은 아무리 재미있는 공연도, 아무리 멋진 콘서트도, 아무리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도그 두 날 만큼은 절대 가지 말라는 거야.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질문. 주위에 알만한 선배나 친척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연인과 함께 보낸 즐거운 기억에 대해 물어봐. 없지? 없는 게 정상이야. 그럼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하다가 힘들었던 기억을 물어봐.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늦게 왔다고 자리 빼서 싸운 얘기, 없는 돈에 마이클 볼튼 공연 예매했다가 차가 밀려서 앵콜 곡밖에 못 들은 얘기, 밤에 명동에서 술취한 여친 등에 업고 택시 잡느라 허리 부러진 얘기, 결국 택시 못 잡고 한남동에서 상계동까지 걸어서 집에 간 얘기 등등, 아마 끝없이 나올 거야.

 

젊어서 힘들었던 얘기가 뒷날의 추억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크리스마스고 뭐고 당장 군대를 가. 갔다 왔다고? 그럼 해병대 캠프라도 다시 가든가.

 

 

그렇다고 명색이 커플인데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지. 관계가 꽤 성숙한 사람들은 쓸데없이 고생하지 말고 야외로 나가. . 이때도 빠져나가는 길이 엄청나게 밀릴 테니 일찍 출발하는 건 필수. 물론 당일 귀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야. 대한민국, 특히 서울 주변에는 이런 커플들을 위한 인프라가 굉장히 발달해 있어.

 

아직 이러기엔 서먹서먹한 커플들, 살아 남으려면 뭉쳐. 서너 커플만 모아도 방 하나 빌리는 데 큰 부담은 안 될거야. 호텔엔 방이 없을 거야. 변두리 레지던스를 알아 봐. 넓은 거실, TV, 냉장고, 주방이 있어. 이런 날 한우 등심에 양주 한병이면 정말 추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만들 수 있어. 물론 이것도 비용이 꽤 들지만, 밖에서 인파에 치이고, 밀리는 길에 짜증내면서, 별로 대단치도 않은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내고 짐짝 취급 받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고 장담해.

 

솔로들은 어쩌냐고? 쓸데없이 모여 봐야 한숨만 나올 테니 괜히 모여서 스트레스만 더 받지 말고, ‘이런 날은 외출하지 않는게 내 원칙이라고 해. 그리고 집에서 특집 프로그램이나 봐. 폭설에 한파가 밀려오길 기도하면서. . 이런 얘기는 여기까지.

 

1211, 미샤 마이스키+서울시향의 ‘3 Concertos’. 이렇게 유명한 연주자의 비싼 공연을 추천하긴 처음이야. 하지만 5만원 짜리 예술의 전당 B석이라도, 연말이고 뭔가 감성적이면서도 고상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누구든 포털사이트에 초본데 좋은 첼로 곡 좀 추천해 주세요라는 질문을 올리면 아마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그리고 생상스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1,2,3번 댓글로 달릴 거야. 그런데 이 세 곡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면 아니 좋을 수가 없겠지. 3층이라도 충분히 즐길 만 해.

 

1212, 코리아심포니의 베토벤 교향곡 9합창’. 12월에는 합창을 들어야 한 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 용. 베스트셀러는 정명훈의 서울 시향 연주지만 1226일과 27일 모두 매진이야. 그 안으로 추천할 만한 공연. 3만원짜리 A석이면 1층에도 앉을 수 있고, 15천원 짜리 B석도 괜찮을 듯.

 

 

 

 

국립 현대미술관이 서울 소격동에 서울관을 오픈하면서 기념 전시에 들어갔어. 국가대표 설치 미술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서도호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집속의 집 속의 집을 비롯해 현재의 현대미술 지평을 그리는 연결-전개, ‘자이트 가이스트, ‘알레프 프로젝트전 등 모든 전시를 7000원에 볼 수 있지. 이런 건 일단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겨울의 책이라면 역시 미스터리. 이번엔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을 추천하겠어. 미미 여사를 구태여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분은 최근 2이란 이름으로 에도 시대를 무대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어. 이 작품군을 대표하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외딴 집이야.

 

10페이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탄탄한 구성과 감탄을 자아내는 디테일을 읽어 가다 보면 어느 새 입을 떡 벌린 시커먼 동굴로 떨어져 에도 시대의 일본 어촌 마을로 툭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느 시대나 힘 있는 자들의 게임 사이에서 희생되는 불쌍한 보통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

 

악인에 대한 응징과 복수가 시원하게 이뤄지는 활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다음 내용이 알고 싶어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미미 여자의 마력은 이 작품에서 진정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 바닥에 배 깔고 귤 까먹으며 보기엔 최고야. 신간이 아니라서 상/ 2권 세트에 12500원이면 살 수 있어.

 

정리하면, 

미샤 마이스키, 3Concerto B 5만원

코리아 심포니, 베토벤 교향곡 9합창’, B 3만원~C 1500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통합 관람권 7000

미야베 미유키, ‘외딴 집/하권 12500

합계 99500~84500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도, 명절이며 이름 있는 날에는 뭔가 복작거리는 데서 지지고 볶아야 제맛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2월24일이면 코엑스, 대학로, 홍대앞, 명동 언저리는 미어 터지다 못해 분노 범죄의 온상이 되고, 곳곳에서 패싸움과 난동으로 경찰서 보호실까지 만원이 됩니다.

 

물론 공연장도 일찍 일찍 도착하고, 예약 시간에도 꼭꼭 맞춰 가고, 이런 날 바가지 씌우지 않는(대부분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속이 이런 날은 '스페셜 디너 코스'라는 이름으로 평소엔 하지도 않던 메뉴로 10몇만원씩 커플들의 - 주로 남자 쪽의 - 등골을 빼놓죠) 착한 업소를 찾고, 어디 가서 술 한잔 걸쳐 분위기를 낸 뒤에도 안전하고 쾌적하게 귀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놓는다면(아마도 기사 딸린 리무진 외에는 별로 없을 듯 한데...) 뭐 아무 상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분들, 혹은 그러기엔 좀 사정이 열악한 분들은 저 위의 충고를 따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즘은 아예 파티룸이라는 신종 공간도 임대 가능한 모양이던데 지금부터 서두르면 아직 남아있는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싱글들은... 역시 위에 있는 행동강령을 따르시구요. 싱글들끼리 이런 날 밖에서 만나 봐야 우울증만 더 심해지고 사고 칠 가능성만 높아집니다. 그리고 이런 날 TV에서도 재미있는거 많이 하더라구요. 그래도 정 누구라도 만나야겠다 싶으면, 누구 하나 집에서 모이는게 제일 나을 거에요.

 

본론으로 돌아가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첼로라는 악기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곡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게다가 길이도 10분 정도.

'콜 니드라이'는 히브리어로 '신의 날'을 뜻한다고 합니다. 곡의 분위기는 곧 '참회의 기도'.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는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장에서 듣는다면 훨씬 강렬한 느낌.

 

 

이어서 하나 더 듣는다면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보다 조금 덜 알려졌다고 할 수 있지만 1악장부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초절정의 기교는, 흔히 첼로라는 악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악기'라는 선입견을 확 날려 버립니다.

 

아울러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어쩌다 보니 연말의 '반드시 들어야 하는 선택' 처럼 된 느낌이라 소개했습니다. 지난해 서울 시향의 경우에는 '합창'과 모짜르트의 레퀴엠 공연이 모두 12월에 있어 분산되는 효과도 있었는데, 올해는 너무 몰린 듯.

한 해를 정리하는 느낌으로는 개인적으로 이 곡도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합창교향곡 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는 없어서 덜 연주되는 듯 합니다. 물론 베토벤의 9번 교향곡도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잘 알려졌다 뿐이지 1,2,3악장은 그리 말랑말랑한 곡은 아닙니다만...^^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5악장의 피날레, 역시 합창 부분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런던 필하모니 연주.

 

 

혹시 이 곡을 모르시는 분이라면 위 피날레 부분 만이라도 들어 보시라고 강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총 1시간 30분의 대곡이 이 거대한 합창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의 감동이란. 내년 6월5일에는 서울시향 스케줄에 이 곡이 잡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년 리스트에는 말러의 교향곡이 3곡(2번, 5번, 10번)이나 들어 있군요.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은 첫 장을 열면 그야말로 에도 시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섬세한 묘사가 일품입니다. 물론 이런 평가에는 필연적으로 취향이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적으론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하나만 꼽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이 '외딴 집'을 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연말. 숙취 조심하시길.

 

아래 네모칸 안의 손가락 모양을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 글 소식을 빨리 아실 수 있습니다.

728x90

유구무언입니다만...

 

그러니까 여행도 좀 다녀오고 하느라고 11월을 건너 뛴 걸 잊고 있었다는.

 

아무튼 한 분도 '왜 11월은 없냐'고 재촉해 주시지 않은 점도 약간 원망스럽습니다.

(전형적인 책임 떠넘기기)

 

뭐, 지나갔지만 아 11월엔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봐 주시길.

 

대신 12월엔 정상적으로 퍼 올리겠습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11월의 문화가이드

 

잠시 훑어보니 클래식 쪽의 11월 라인업이 정말 화려해. 2~3일 모스크바 필, 11~12일엔 베를린 필 내한공연. 솔로이스트로는 정경화와 랑랑. 오페라의 해답게 예술의 전당에서만 네 편의 오페라가 올려지더군.

 

물론 베를린 필 공연(45만원짜리 R석은 약간 남아 있는지도) 7만원 짜리 C석은 아예 구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야. 재수 좋게 구한다 해도, 과연 그런 공연에 7만원을 투자하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일까. 이게 바로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칼럼의 출발점이야.

 

그래. 45만원짜리 2장을 예매하면서 싸잖아. 베를린까지 가는 왕복 비행기표와 숙박료를 생각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틀린 말은 아니야). 단지 차는 안전이 최고라는 이유만으로 벤츠 S600을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물론 훌륭한 이유지).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좀 적은 비용으로 높은 문화적 효용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나눌 필요가 있겠지. 그래서 이런 칼럼도 필요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체나(공연 포스터에 코제나라고 되어 있는데 체코 출신에 Kozena니까 코체나가 맞을 거야)의 첫 내한 공연에 한번 투자해봐. 사이먼 래틀 경을 못 보니 대신 그 부인을 만나 보라는 얘기만은 아니야.

 

코체나는 래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늘씬한 미모라는 점 때문에 더 유명해진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가창력으로도 세계 정상급이야. 특히 이번 공연의 주 레퍼토리인 초기 바로크 시대 음악엔 더욱 강점이 있지. ‘카르멘류의 선곡으로 관객에게 아부하려는 공연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산점. 좌석을 확인해 보니 2층 사이드가 5만원짜리 B석이야.

 

 

그 다음엔 112,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에서 열리는 바흐, 피아졸라를 만나다를 추천하고 싶어. 두 작곡가 모두 시공을 초월한 팬덤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무대로 엮는 건 그리 보편적인 접근은 아니야. ‘브라질 풍의 바흐를 작곡한 빌라 로보스도 아니고 피아졸라?

 

주최측의 설명은 “17세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바흐가 했던 역할과 피아졸라가 그 시대에 했던 역할을 비교한다는 건데, 무엇보다 두 개의 세계 모두, 혹은 둘 중 어느 한 쪽에만 익숙해 있는 청중이라면 이런 식의 조합이 음악적 소양을 넓히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거야. 특히나 전문가 해설이 덧붙여진 경우라면. 55천원과 33천원인데, 전에도 얘기했지만 IBK홀은 그리 큰 공연장이 아니므로 33천원이면 충분하다고 봐.

 

 

 

 

아낀 돈으론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를 보러 가.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1228일까지. 사실 그 자리에 늘 있는 환기미술관이니 100주년 기념 전시라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에 부암동 나들이도 하고 그러는 거야.

 

마지막으로 책. 사실 11월의 책이라면 뭔가 좀 사색적인 내용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정작 권하고 싶은 책은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개인적으로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바르셀로나에 가 보고 싶게 만든 책이기도 해. 물론 주의할 점은, 실질적인 가이드 북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아. 몇 군데의 포스트를 소개하고 있긴 한데 정말 가 보라는 건지, 아니면 난 이런 데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건지 약간 경계가 불분명한 정도라고 보면 돼. 아무튼 책이 나온게 2006년이고 내가 산 2009년 이미 18쇄를 찍었으니 지금은 엄청나게 더 팔려 있겠지만, 일러스트만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야. 1만원 내외.

 

사실 연극 당통의 죽음도 관심이 가긴 하는데 뷔히너의 원작을 읽어 본 것도 아니고, 이자람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추천하는 건 좀 부담스럽더라고. 다행히 하루 이틀에 끝나는 공연은 아니니까 본 사람들의 평을 눈여겨 보도록. 그럼 연말에 봐.

 

막달레나 코체나 내한공연    B 5만원

바흐, 피아졸라를 만나다      B 33천원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   1만원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1만원

 

합계             103천원

 

 

 

 

막달레나 코체나의 노래 중 유명한 노래를 먼저 들어 봅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어떤 분은 이 노래의 제목이 '파리넬리'라고 알고 계시기도.^

 

 

 

 

 

 

다음은 코체나의 주 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바흐의 곡. 'B단조 미사(BWV 232)'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 Laudamus Te' 입니다.

 

 

 

 

 

마지막은 래틀과의 협연.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카르멘'을 공연한 적이 있는 듯 합니다. 그중 흔히 '집시의 노래'로 잘 알려진 '신나는 트라이앵글 소리 Les tringles des sistres tintaient' 부분입니다.

 

 

 

 

이걸로 11월은 조용히 건너 뛰고, 12월에...;;

 

 

728x90

임해군의 기행에 대해 두번째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앞에서 말한 유희서 청부살인 사건은 사실 빙산의 일각. 유희서가 명문가 출신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부각된 것 뿐이고, 임해군의 세도에 희생된 사람들은 부지기수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오히려 나름 잘 나가던 유희서 같은 사람도 서슴없이 해치울 정도로 임해군의 행동은 안하무인이었다는.

 

임해군의 비행에 대한 첫번째 글은 이쪽입니다.

임해군, 소시오패스에 가까웠던 왕자 http://fivecard.joins.com/1155

 

그리고 임해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임해군에 대한 정사의 기록에 대한 부분입니다.

 

 

 

 

임해군 (1574-1609) 2

 

임해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보다 인조 때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 더 임해군의 비리에 대한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수정실록이 편찬된 이유가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것임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이 목적에 충실하려면 수정실록 편찬자들은 임해군을 광해군에 의해 밀려난 피해자로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반정의 주역들로서도 차마 임해군을 옹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긴 왜란이 끝난 뒤에도 광해군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안간힘을 썼고, 명나라도 세자 책봉을 정식으로 진행하자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선조가 주저했다. 조정 대신들이 마치 광해군이 이미 왕이라도 된 양 대하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뛸 듯 기뻐했지만 시간은 광해군의 편이었다. 1607 10, 선조가 병으로 드러누웠다.

 

선조는 죽기 한달 전까지도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정인홍의 상소에 어찌 신하가 할 말이냐고 격분하는 등 의욕을 과시했으나 1608 21일 돌연 사망했다. 이이첨의 계략에 의해 동궁전에서 들여간 약밥을 먹고 숨이 끊어졌다는 독살설이 돌았으나 이미 광해군의 등극이 대세였다.

 

 

선조의 마지막 나날은 광해군에겐 상당히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 선조가 왕위를 물려줄 뜻이 없는 듯한 느낌. 영창대군의 출생. 그런데 그 선조가 병으로 쓰러진 뒤 마음이 약해졌는지 1607년 10월11일, 이런 전교를 내립니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왕위를 물려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섭정으로라도 임명해 정사를 돌보게 하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미 영창대군에게 정치적으로 기울어 있던 유영경 등이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냐는 것이죠.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황공하여 품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여러 달 동안 조섭하시어 즉시 쾌복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점차 수라를 드시어 원기가 회복되어 가니 온 나라 신민이 평복될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 의외에 이번에 갑자기 이런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조섭중에 계시더라도 적체된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이런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조섭에 전념하시면 종묘와 사직이 은밀히 도와서 성후(聖候)가 저절로 강녕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군신(群臣)의 뜻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이런 말이 몇번 오가더니 선조는 슬그머니 전위나 섭정 이야기를 거둬 들입니다. 어쩌면 애당초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이 신하들을 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도마 위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온 광해군은 아슬아슬한 마음이었을텐데 이듬해 1월18일 정인홍이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삼가 도로에서 듣건대 지난 10월 13일에 상께서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마음 속으로 원임 대신을 꺼려 다 내어 쫓아서 원임 대신들로 하여금 참여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번 방계(防啓)를 올리고 유독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공모하였으며 중전(中殿)께서 언서(諺書)의 전지를 내리자 ‘금일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거사이니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즉시 회계(回啓)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정원과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성지(聖旨)를 극비로 하여 전출(傳出)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영경은 무슨 음모와 흉계가 있어서 이토록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

 

이 말에 선조는 대노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유영경을 규탄하는 상소지만 내용은 왕 자신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지탄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 있으면 왕위를 넘본 역적 대접을 받게 된 광해군은 당장 진땀을 흘리며 죄를 청합니다.

 

"신이 못난 자질로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있으므로 밤낮으로 근심하며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상후(上候) 미령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전섭(傳攝)한다는 명을 내리시니 신은 죽으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의 회계는 어찌 신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뜻밖에 정인홍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만들어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성상의 하교에 ‘지친간에 부득불 이로 인해 의심하여 틈이 생기겠다.’고 하셨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만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다시 상달할 바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 황공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당장 정인홍을 잡아다 목을 베라는 명을 내리지 않은 것이 좀 신기할 뿐입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정인홍에 대한 선조의 신뢰가 워낙 두터웠다는 점(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인홍을 도성에서 50리나 떠난 뒤 다시 불러들일 정도. 그리고 '정인홍이 여러 사람과 불편하게 지냈다'는 대신들의 말에도 그를 옹호할 정도), 그리고 정인홍이 이때 이미 73세의 고령이었다는 점 등이 있긴 합니다. 어쨌든 죽기 이틀 전, 1월29일 선조는 "정인홍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심정을 내비칩니다.

 

"소인의 성품은 남 해치기를 즐겨 하고 일 저지르기를 좋아하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치지 않으니 그러므로 악한 자 다스리는 법을 부득불 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만약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처리하면 후일 다시 이보다 큰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만약 저들이 일시의 명사(名士)를 모두 모함한다면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을 이간시키고도 천벌을 면할 수 있었는가. 나는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이는 참으로 신하가 목욕하고 토죄(討罪)를 청할 일이다"

 

아무튼 정인홍이 옳다, 유영경이 옳다는 주장으로 조정이 들썩들썩하던 도중, 2월1일 선조가 갑작스레 승하합니다. 정인홍이 상소를 올리고 보름도 안 되었으니 잡아 죽일 새도 없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샛길로 빠졌지만 다시 임해군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제 임해군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해군이 등극한지 채 보름도 안 된 214, 이미 임해군이 몰래 장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들이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광해군은 형이 그럴 리 없다며 신하들을 꾸짖었지만, 그 사이 임해군이 여자 옷을 입고 하인의 등에 업혀 동네를 빠져나가다 잡혀 들어왔다. 역모를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임해군에겐 마지막 살 길이 남아 있었다. 1608년 6월, ‘공인되지 않은 세자광해군이 장남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이유를 조사하겠다며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두 형제를 대질시켜야 하니 교동도(강화도 서쪽의 작은 섬)에 유배되어 있던 임해군을 데려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정인홍은 대로하여 임해군의 목을 베어 사신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고함을 질렀지만, 조정의 중론은 사신을 잘 설득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쪽이었다. 국토의 2/3를 왜군에게 빼앗겼다가 명의 원군 덕분에 나라를 되찾은지 겨우 11. 명의 위세는 당당했다.

 

결국 이덕형이 나서 광해군은 사신들을 위무차 방문하는 정도로, 임해군은 서강(지금의 마포 근처)까지 나와 사신들과 면담하게 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임해군이 일부러 미친 사람 시늉을 했다일월록의 내용이다. 어째서 명나라 사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대로만 해 주면 광해군이 최소한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신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막대한 뇌물이 동원됐다. 역관 홍순언은 왜란 때 원군을 요청하면서도 명나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거늘, 이제 버릇을 들였으니 대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백성들이 더욱 괴로워 질 것이라며 탄식했다. 결국 이 예측은 그대로 실현됐다.

 

1년 뒤 교동도에서 임해군이 급사했다. 1609 429일자 실록에는, ‘유배된 임해군을 지키던 무관 이정표가 독을 먹이려다 반항하자 목을 졸라 죽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되어 있다. 물론 광해군 당대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이첨이 교동 현감인 이현영을 설득해 임해군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후임인 이직을 시켜 흉수를 쓴 것이라는 주장을 전하고 있다. 자손은 없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장남은 여럿 있었지만 임해군 만큼 악평에 시달리던 사람도 드물다. 그 본인도 문제였지만 너무 잘난 동생 광해를 둔 탓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선조의 아들들 가운데 임해군만 평판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순화군은 이유 없이 죽인 사람이 1년에 10명이 넘는다’, 정원군은 임해군보다 악하면 악했지 나을 것이 없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다만 정원군은 죽고 난 뒤 아들 능양군이 공신들에 의해 인조로 추대되면서, 비록 이름만 왕이지만 원종으로 추존됐고 생전의 악행은 조용히 묻혔다. 만약 임해군도 아들이 있어 왕위에 올랐다면 이런 오명을 후세에 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

 

 

순화군 이보의 졸기에는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이라 하고, 익성군 이향령(益城君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밖의 사료에는 대부분 정원군에 대해선 좋은 이야기만 있습니다. 효성이 두터웠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임금 감(?)으로 꼽혔던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일찍 죽은 이후 속병을 앓아 폐인이 됐다... 이유는 장남인 능양군이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되었기 때문이죠. 임해군도 아들이 있었다면... 글쎄요.

 

 

P.S. 잊고 있는 사이 '불의 여신 정이'가 끝나 버렸네요. 아무튼 임해군에 대한 정리는 여기서 끝.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