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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입소문 최강인 영화 '건축학개론'. 명성대로 잘 만들어진 멜로드라마입니다.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을 보고 '이야, 이렇게 뻔할 듯한 이야기를 갖고 이만치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다니!' 하고 재능에 감동한 게 엊그제같은데 어느새 새로운 영화, 특히 전작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가지고 이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게 감개무량합니다.

소문대로 이 영화는 Y대 건축공학과를 나온 감독이 90년대초 Y대 건축공학과 학생을 주인공으로, Y대 건축공학과 출신인 가수 김동률의 노래 '기억의 습작'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영화입니다. 시대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이 30대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바보같은 스무살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촉촉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정도.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얼른 보세요."



현재.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승민(엄태웅)에게 어느날 갑자기 잊고 살던 15년 전의 첫사랑 서연(한가인)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서현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승민. 그런 승민에게 서현은 의사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며 제주도에 지을 집을 설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15년 전(1997년?). 건축공학과 신입생 승민(이제훈)은 1학년 2학기 건축학개론 시간에 음대생 서연(배수지)을 보고 가슴이 설렙니다. 알고 보니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서연. 제훈과 서연은 갑작스레 가까워지고, 건축학개론 과제를 위해 꽤 멀리까지 함께 나다니는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워낙 경험이 없는 탓에 이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모르는 승민. 갓 스무살의 신입생에게 사랑이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크로니클'에서 갑작스런 초능력을 갖게 된 10대들이나 마찬가집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시기죠(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 그렇습니다). 문제는 첫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이 에너지는 어느 방향으로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려는, 상온에서의 니트로글리세린같은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감정은 느끼되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과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이죠. 에리히 프롬이 젊음에 대해 '사랑은 충만해 있으되 그 사랑을 어디로 쓸 줄 모르는 상태'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사소한 오해, 별 것 아닌 힌트, 아무 일도 아닌 위기감, 그리고 질투, 선망, 동경 등등 미세한 감정의 흐름에 의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치닫곤 합니다.

'건축학개론'은 제목대로(?) 바로 이런 '첫사랑에 대한 개론'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첫사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낭만적인 병리적 증상을 남김없이, 그리고 매우 뛰어나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사랑에 대한 잘 만든 영화가 어디 한두편일까마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 한 영화가 우려먹고 지나가고, 그 세대가 흘러가 다음 세대가 비슷한 주제를 찾을 때까지 - 이 소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1986년의 '겨울나그네', 2000년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제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2012년의 '건축학개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짓는 세대가 나타나겠죠.)



개인적으로 - 뭐 다른 많은 분들도 비슷한 분들이 많겠지만 -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신입생 시절의 승민과 서연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김동률의 노래를 듣는 장면입니다. 

승민은 서연이 건네 주는 이어폰의 한쪽 끝을 귀에 꽂습니다. CD 플레이어가 작동되기까지 약 2,3초간의 정적이 흐르고(물론 이 정적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이 순간은 서연에 대한 승민의 마음을 0의 상태, 즉 컴퓨터로 말하자면 초기화시키는 시간인 셈입니다), 김동률의 익숙한 첫 가사, '이젠/ 버틸수 없다고...'가 흘러나옵니다.

아마도 승민은 먼 훗날 누군가로부터 '언제 서연에게 처음 사랑을 느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순간을 기억할 겁니다. 관객도 마찬가지일테죠. 이렇게 이용주 감독은 필요한 부분마다 적시타를 날려 주는 강타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표면상 주인공은 엄태웅/한가인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성인 부분은 그냥 간판 역할입니다. 진짜 영화의 핵심은 이제훈/배수지에게 가 있죠.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캐스팅은 매우 절묘했습니다.

이제훈은 갓 명문대에 입학한, 다소 어려운 집안의 젊은이로서 완벽합니다. 잘생겼으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듯한 그늘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빈부 양극화로 접어들기 직전, '한국사회에서 강남이 갖는 의미와 강남 문화를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축감'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걸그룹 출신인) 배수지는 그런 부분에서 묘한 존재입니다. 승민이 서울 강북 지역에서 자라났고, '강남/강북'의 구도가 그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폭력적인 느낌이라면, 아예 서울 사람이 아니었던 서연에게는 그런 구도가 큰 의미가 없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자라나 '서울 사람'으로의 편입을 꾀하는 서연에게는 '기왕이면 강남이 더 멋지지 않아?'라는 의식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무참히 사라진 이유 이면에는 이처럼 '강남/강북'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구조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 차이가 큰 역할을 합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서울 지역에서 '강남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적대감을 느끼고 있던(말하자면 '계급에 대한 인식'인 거죠) 승민은 그 외곽으로부터 진입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남 문화에 대한 선망과 편입 의지를 보이는 서연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서연을 사랑할수록 그 불만은 점점 깊어갈 뿐입니다. 

아마도 승민은 서연이 자신의 처지나 시각을 '알아서' 공유해 주기를 바랐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강남/강북'에 대한 인식이 없는 서연은 이런 승민이 불안하고 어색해 보일 뿐입니다. 안경 쓴 선배는 그 '강남'을 상징하는 존재지만 '그날밤의 사건'은 사실 둘이 헤어지는 데 부수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애당초 이런 인식 차이가 있는 한 승민과 서연은 잘 될 수가 없는 관계였죠. 이용주 감독은 그 부분을 잘 알고 있고, 관객에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마 이해하실...)



승민의 눈에 비치는 서연은 '예측불가능한 요정'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죠. 이런 대상이 되려면 '너무 예쁘고 세련되어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존재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서연 역을 구현하는 배수지의 스타일과 연기는 완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드림하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이 엿보입니다.





영화에서 표제곡으로 등장한 노래는 다 아시는 '기억의 습작'이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절로 떠오르는 노래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입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직접 들었다면 줄거리의 균형을 깨는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영화의 포스터 중에 이 카피가 써 있는 버전이 있군요.^^)



P.S.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우리중 인기있는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첫사랑'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중 많은 '나'는 어느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을 겁니다. (네. 불편한 진실이죠.^^ 대중은 속고 있습니다.) 


P.S.2. 납뜩이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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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봤습니다(극장을 찾은게 얼마만인지...ㅜㅜ).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세븐' '파이트 클럽'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으로 유명한 데이빗 핀처 감독이 만든 2011년작입니다.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미 2009년에 작가의 모국 스웨덴에서 영화화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밀레니엄 1부'라는 제목으로 이달초 국내에서도 개봉됐는데, 사실 이 영화에도 관심이 갔지만 개봉관이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밀레니엄'이라는 소설이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동안도 쉽게 손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에는 더욱 '영화부터 보자'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주연 여배우 루니 마라의 'W' 지 화보에서는 더더욱.




현대. 스톡홀름. 시사잡지사 '밀레니엄'에서 일하고 있는 저널리스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Blomkvist, 다니엘 크레이그)는 기업 총수 베너스트롬(Wennerstrom)의 비리를 폭로했지만, 명예훼손으로 역공을 당해 패소하고 60만 크로나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게 됩니다.

좌절해 있던 미카엘에게 스웨덴의 오랜 재벌 가문인 방예르(Banger) 가문에서 연락이 옵니다. 방예르 가문의 가주 역할인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천재적인 조사관 리스베트(루니 마라)를 이용해 미카엘이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조사해놓고 있죠.

헨리크는 미카엘에게 40년 전 갑자기 사라진 조카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내 주면 베너스트롬을 몰락시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영하 20도를 넘는 한겨울, 몸이 덜덜 떨리는 시골 저택의 별채에서 미카엘은 뭔가 음습하고 비밀이 넘치는 방예르 가문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갑니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 왜 이 작품이 소설로 국내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블롬크비스트, 베너스트롬 같은 낯선 이름. 흔히 해외 유명 작품들이 무대로 삼는 런던, 파리, 제네바 같은 도시가 아니라 퍽 생소한 스톡홀름 등의 배경이 확실히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Blomkvist라는 이름은 이전의 상식대로라면 Blomkwist, 즉 '블롬퀴스트'라고 읽어야 할 듯 하지만 여기선 또 '블롬크비스트'라는 발음이 등장합니다. 사실 '헤르미온느'나 '케드릭' 이후 한국 번역가들의 이름 발음 문제에 대해서는 큰 신뢰를 갖지 않게 됐지만, 북유럽 이름까지 가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힘든 지경에 이릅니다. 문득 올림피크 리옹에서 뛰던 노르웨이 스트라이커 John Carew의 이름 표기를 놓고 벌어졌던 왕년의 해프닝이 떠오릅니다. 존 캐루 - 욘 캐루 - 욘 카레우 - 욘 카레브 - 욘 사레브까지 온갖 한글 표기들을 검색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요즘처럼 좋은 시절이라면 http://ko.forvo.com/word/john_carew/#no 를 검색해서 '욘 카레브'라고 자신있게 쓸 수 있었겠죠.)



어쨌든 핀처의 솜씨는 레드 제플린의 명곡 'Immigrant Song'으로 시작하는 격렬한 그래픽의 타이틀에서부터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원작을 읽지 않았으므로 비교는 쉽지 않겠지만, 편집의 대가답게 핀처는 대단한 속도감으로 전반부를 폭풍처럼 휩쓸어 갑니다. 꽤 숙련된 관객에게도 '늘어지는 부분 없이 달려나간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한 속도입니다. 반면 비숙련 관객에게는 '뭐야. 얘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라는 당혹감을 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포탈 감상평을 일별하면 이런 요소가 이 영화의 흥행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달려가는 영화 사이사이에도 스웨덴이라는 낯선 나라의 풍광은 핀처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충분히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눈덮인 평야와 들, 차갑고 건조한 느낌을 주는 사물들. 모든 등장인물이 영어로 대사를 하고 있지만 '뭔가 대단히 이질적인' 이 느낌들은 관객이 이 영화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전편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당연히 천재 조사관(우리나라로 치자면 흥신소나 심부름센터;; 직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죠. 전문적으로 남의 뒷조사를 하는 사람입니다)인 리스베트 살란데르 역의 루니 마라입니다.


아마 이 장면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 말고도 '소셜 네트워크'를 보신 분이라면 놀라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저도 이 배우가 '소셜 네트워크'에서 저커버그로 하여금 페이스북을 만들 동기를 부여한, '예쁜이 여대생 에리카'였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할 뻔 했습니다.




물론 배우 노릇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욕심 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리스베트 역할은 매력적입니다. 23세. 어려서 아버지를 죽이려 시도한 죄로 금치산자 판정. 천재 해커. 발군의 운동능력. 살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과단성과 일반인과는 사뭇 다른 도덕관("정말 죽여도 돼요?"에서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오성이 연기하던 무대포 캐릭터의 "정말 죽여?"가 떠오릅니다^^). 한눈에 확 들어오는 펑크 스타일의 패션. (위 사진. 페레즈 힐튼에 따르면 저 피어싱은 모두 진짜랍니다.)




(네. 솔직히 이 분이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코믹하지 않아서 그렇지... 딱 스웨덴의 김꽃드레라고 할 수 있죠.)

고만고만한 20대 여배우 풀이 넘쳐 나는 세상, 데이빗 핀처 같은 감독이 이런 역할을 제안한다면 그건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백번 해야 마땅한 일일 겁니다. 이 역할 하나로 루니 마라는 수년간 고민했을 '존재감'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자 안톤(하비에르 바뎀)에 비견할 만한 압도적인 캐릭터라고나 할까요.

1차적으로 이 역할을 잘 수행해 낸 루니 마라를 칭찬해야겠지만, 간장보다는 고추장이 인상적인 맛을 내기 쉬운 재료이듯 이런 역할이 배우의 기량을 100% 끌어낸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3편의 원작이 모두 영화화된다면 루니 마라는 그때 가선 '어떻게 리스베트 캐릭터로부터 도망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워낙 본 모습과 멀리 떨어진 캐릭터인 만큼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할 문제 -.

(일각에서는 스웨덴 판에서 리스베트 역할을 한 누미 라파스와 비교하는 시각이 있습니다만... 글쎄, 일단 사진만으로는 23세라는 설정과 라파스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23세가 원작과는 관련 없는 나이일 수도 있겠군요. 라파스에게서는 마라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한 미성숙'의 느낌이 풍겨나오지 않습니다.)



리스베트 캐릭터가 빛이 나는 만큼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블롬크비스트는 그닥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007 배우가 육체적으로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역할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히려 너무 무기력하게 리스베트에게 리드당하는 역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게 핀처의 의도인지, 원작자의 의도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단한 미스테리를 기대하고 '밀레니엄'을 보신 분이 있다면 실망하시기 십상일 겁니다. 어차피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적이고, 결과를 볼 때 그리 엄청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과 첨단 디지털 기법을 병행해 가며 묵묵히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리스베트/블롬크비스트 콤비의 노력은 대단히 흥미롭고, 충분히 돈 값을 합니다. 죽도록 달려 목표에 도달하는 본 요원이나 헌트 요원 못잖게, '죽어라고 머리를 쓰는' 것으로도 긴장감 유발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다고나 할까요.

리스베트의 여성성을 강조한 에필로그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에필로그를 보고도 2편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상당히 건조한 삶을 살고 계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튼 핀처 판 '밀레니엄'은 강추작입니다.



P.S. 헨리크 역을 맡은 할아버지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실 단역에 해당하는, 대사 하나 없는 '젊은 헨리크' 역을 줄리언 샌즈(58년생인데 '젊은 헨리크'...)가 맡을 정도로 호화 캐스팅이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P.S.2. 날이 갈수록 동태눈 증세가 심해지는지, 로빈 라이트와 대릴 해너가 헷갈릴 지경에 온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P.S.3. 도입부의 'Immigrant Song'과 '해커1'의 NIN 티셔츠는 웃음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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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의 모든 교과과정에서 '혹성'이라는 말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제목이 바로 '혹성탈출'입니다. planet이라는 말의 공식 한국어 번역은 '행성'입니다. 일본어의 와쿠세이(惑星)는 더 이상 한국에서 쓰지 않는 말이지만 일단 한번 붙여진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의 생명은 길기도 합니다. 뭐 일단 붙여진 제목이 워낙 유명하니 흥행을 생각하는 입장에선 어떻게든 그 제목을 유지하려는게 당연하겠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 시작된 '혹성탈출'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1968년,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 '혹성탈출'이 개봉된 뒤, 사람들은 원숭이 탈을 씌운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됐고, 이 시리즈가 유명한 인간 스타 배우(예를 들면 찰턴 헤스턴)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줄거리:

제약회사의 스타 연구원 윌(제임스 프랑코)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뇌세포 재생 약제의 개발에 골몰합니다. 암컷 침팬지에게 실험한 결과 놀라운 지능 향상 효과를 발휘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침팬지는 살해되고, 윌은 발견되지 않은 새끼 침팬지를 맡아 기르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아기 원숭이는 시저(앤디 서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같은 또래의 인간 아이를 능가하는 지능을 보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시저는 자신과 인간이 왜 다른 대우를 받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죠.



영화의 원제는 원숭이 행성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약간 우스꽝스러운 제목입니다. 일단 제목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1968년작 '혹성탈출'의 원제가 Planet of the Apes. 직역하면 '원숭이의 행성'입니다. 한국 제목 '혹성탈출'이 일본어 제목에서 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본어 제목은 원작의 제목을 직역한 '원숭이의 혹성'이죠. 이 제목이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혹성탈출'이라는 한국 제목을 붙인 걸로 보입니다.



어쨌든 '혹성 탈출'에는 네 편의 공식 속편이 있습니다.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 (1970)
- 1편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 지구 지하에 원숭이의 지배를 피해 살고 있는 인류가 있습니다. 이 인류들은 겉보기엔 완벽한 미남 미녀들이지만 사실은 핵 오염으로 추악한 외모를 정교한 가면으로 감춘 것 뿐이고, 이들의 신은 지구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거대한 핵무기입니다. 어쩐지 '매트릭스'에도 영향을 준 듯한 영화. '속 혹성탈출'이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scape from the Planet of the Apes (1971)
- 더 이상 속편을 만들 수 없게 된 줄거리상(?) 과거로 돌아갑니다. 1편에서 찰턴 헤스턴을 도와준 원숭이들이 어찌 어찌 해서 인류의 과거로 돌아가 현생 인류에게,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무모한 과학 발달 때문에 인류가 절멸하고, 미래는 원숭이의 차지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경고에 놀란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그 미래를 막을 수 있을까 골몰하는 이야기.
  결국 지구를 지배하게 된 원숭이들은 미래에서 온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과거를 만들고 다시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루프 스토리.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1972)
- 앞편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당연히 인간들의 책동(?)은 실패하고, 원숭이 부부가 낳은 아이 시저가 지구상의 원숭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아 인간을 상대로 봉기합니다. 당연히 원숭이의 반란은 성공하고, 지구는 원숭이 판이 됩니다.
  아주 오래 전에 KBS가 여름 방학 특선인가 하는 제목으로 여기까지 세 편의 시리즈를 연속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제목은 '행성정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공영방송 KBS는 시청자들의 지적으로 '혹성'이란 제목을 포기했던 거죠.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 (1973)
- 지구를 차지한 원숭이들의 내전 이야기. 정권을 차지한 원숭이들 사이에 분란이 생겨 침팬지파와 고릴라파가 지구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고 합니다. 위의 영화들은 어렴풋이 줄거리라도 기억나지만 이건 본 적이 없는 영화라...

이밖에도 '혹성탈출'을 TV 시리즈로 만든 작품, 그리고 '완결편'을 자처하는 'Back to the Planet of the Apes'라는 TV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혹성 탈출' 시리즈는 이런 장대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위에서 든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에서 바로 나온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서 온 원숭이' 보다는 훨씬 설득력있는 '유전공학 기술의 실수로 태어난 천재 원숭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죠.

'진화의 시작'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시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정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돌연변이 천재로 태어난 시저는 자신이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음에도 인간들 사이에 낄 수 없다는 데 분노를 느끼는데, 영화는 관객이 그 분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미물 원숭이'가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데 관객은 인간보다는 시저의 편에서 응원하게 되는 것이죠.

이건 어찌 보면 또 하나의 '아바타' 스토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 혹은 '아바타' 때 외계인에게 미군이 궤멸당하는데도 미국 관객들이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입각한 스토리 전개라고 할 수도 있겠죠 - 아무튼 영화 속의 시저는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특히 윌과 시저가 느끼는 감정의 연대가 잘 표현되어 있어 "Caesar is home" 같은 대사는 꽤나 감동적인 울림을 자아냅니다.



그리 길지도 않고, 엄청난 액션 장면이 있지도 않지만 시저의 성장기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또 다른 시리즈가 시작되려는 것인지는 알수 없군요. 그건 관객들이 제임스 프랑코 없이 시저를 주인공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크게 돈 들인 장면이 없어 보이고, 심지어 앞부분은 저예산 영화의 냄새(윌이 일하는 제약회사에서의 전반부 촬영 장면은 돈 들이지 않고 찍은 태가 역력합니다. 90년대 이전 한국 영화의 영상 수준이랄까...)까지 나지만 이 영화 역시 1억 달러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입니다. CG 기술의 발달로 가상 캐릭터 시저를 생동감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비용은 여전히 만만찮습니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속편의 가능성을 거론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 이야기가 인간 관객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과연 원숭이 영웅이 병든 인간 사회를 정복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흥미있을까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좀 보고 싶기도 하군요.^^)


어쨌든 '진화의 시작'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습니다. 정말 앤디 서키스가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P.S. 말포이는 여기서도 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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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여름 시즌의 블록버스터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개봉 날짜를 잡습니다. 당연히 방학 앞부분, 즉 7월 초쯤에 개봉하는게 제일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날짜를 앞당겨 경쟁작과 '박치기'라도 하게 되면 피해가 막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 1위' 달성은 매우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더 '기업 마인드'로 스크린수를 조절하는 한국 멀티플렉스들의 성향으로 볼 때, 미국처럼 개봉 초기에는 미미했지만 점점 더 스크린 수를 불려 나가며 롱테일 흥행작으로 우뚝 서는 경우는 더 보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후반에 개봉하는 작품들은 스스로 약세를 인정한 셈이라는 시각이 있었는데, 의외로 올해는 8월 중순 개봉작들이 완성도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났습니다. '최종병기 활'과 '블라인드'가 그렇고, 외화 중에도 '혹성탈출 2'가 평이 좋더군요.


인조반정. 광해군의 측근에 대한 토벌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어린 남이와 자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북쪽으로 달아납니다. 아버지의 친구 김무순(이경영)에 의해 길러진 남매. 자인(문채원)은 곱게 자라 무순의 아들 서군(김무열)과 혼인을 하게 되지만, 혼인 당일날 병자호란의 발발로 청의 군대에 의해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서군과 자인은 포로로 끌려가는 몸이 됩니다.

바뀐 시점. 청의 바이러(貝勒)이며 황제의 동생인 용장 쥬신타는 전쟁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이상한 궁수 하나가 앞서 귀환한 조카(청의 황자)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재촉해 보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그 궁수가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으며, 자신이 한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자와 동일인물이라는 확신만 굳어 갈 뿐입니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속도감이 일단 발군입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따로 감정 신을 나열하는 식의 구태의연한 연출은 없습니다. 석양이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주인공들이 굳이 자기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시 같은 대사를 읖조리게 할 만큼 이 영화는 한가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손실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의 탄력이 살아났습니다. 어느 부분을 짚어도 탱탱하게 튕겨나갈 듯한 박진감이 느껴집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과 비교해 볼 때, 윤색에 참여했다는 하리마오 픽처스('추노'와 '7급 공무원'을 히트시킨 천성일 작가의 회사입니다)의 공헌이 꽤 커 보입니다.

아무튼 재미 요소에서 이 영화는 근 몇년 동안 개봉됐던 한국 영화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권해도 욕 먹지 않을,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주연배우들의 힘은 굳이 말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쥬신타를 연기하는 류승룡의 중량감이야말로 영화의 큰 힘입니다. '고지전'의 인민군 중대장 역할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다는 것이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아무튼 '넘어야 할 막강한 적'이면서 '그 적에게도 싸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역할로 이보다 좋은 캐스팅과 연기는 찾기 힘들 듯 합니다.

박해일의 남이는 참 흥미로운 역할입니다. 만약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혁이 이 연기를 했다면 정말 진중한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박해일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비장미 넘치는 장면에서 슬랩스틱에 가까운 장면까지 캐릭터의 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물론 취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이 영화가 이 정도까지 큰 호응을 얻는 데 있어 박해일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는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도르곤 역의 박기웅을 비롯해 남이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격하는 니루들의 역할도 모두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더군요. 아무튼 요즘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저 장면 하나 찍기 위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절벽에서 따라 뛰는 장면 같은 부분에서는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꽤 중량감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니 당연히 광해군과 북방 외교 정책, 인조반정과 서인의 득세에 이은 외교 균형의 파괴,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역사적인 치욕에 대해서는 관객의 사전 지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르곤이나 정황기, 바이러나 니루 같은 청나라의 군 제도에 관련된 단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쑥쑥 튀어 나오고 육량시, 애깃살 같은 군사 전문 용어(?)도 마구 등장합니다. 물론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알고 보면 볼수록 더 재미있어 진다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입니다. (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니 직접 검색해서 찾아 보시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듯 싶습니다.)

영화 속 청의 군대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제 사어 취급을 받는 만주어입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복원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만주어를 복원할 정도의 공덕인데 남이와 서군은 어찌하여 이렇게 현대화된 한국어를 쓰고 있는 것인지...)



단지 하나 딴지 아닌 딴지를 걸자면,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병자호란'이라는 시기와 사용되는 무기가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의 주력이 일단 궁장기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청의 팔기군은 이 궁장기병의 기동력으로 총포를 사용한 명군을 무력화하며 승승장구한 기록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청을 상대로 기록한 몇 안되는 전과 가운데 하나가 청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라는 명장 양고리(楊古利)를 사살했다는 것인데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양고리는 고창 출신 무장 박의의 조총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 가장 신빙성있게 보입니다. (물론 원두표라는 설도 있고, 무명의 병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방어 전술은 활보다는 총포를 중심으로 한 성곽 체제였고, 조선을 대표하는 병기 역시 조총으로 급격히 변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 속 남이가 정규군 소속도 아니었고, 혼자 산속에서 무예를 익힌 인물이었으므로 활대 활의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영화를 처음 만들 당시에도 '배경이 병자호란이라면 활대 활이 아니라, 청의 활대 조선 총의 대결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괜한 지적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부 기록은 박의가 양고리를 사살한 무기가 활인 듯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만...ㅋ 5천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 명궁의 전설이 '명포수'로 바뀌어 가는 것이 이 시대였기 때문에 해 본 얘기였습니다.)



아울러 한가지만 더: 속도감을 높이는 편집을 위해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위에도 했지만, 그래도 남이와 몇몇 동료들이 '호랑이 사냥을 위해 압록강 일대를 자주 넘나들어 주변 지리에 익숙해 있었다' 정도의 밑밥은 영화 앞 부분에 좀 깔아 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남이의 활에 써 있던 문장 해석.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는 '앞은 태산처럼 무게를 두고 시위는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 쏘라'는 뜻입니다. 알고 보니 국궁 용어 중 유명한 전추태한 후악호미(後握虎尾)의 변형이더군요.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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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을 보러 가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이 거의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지명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각계의 호평이 쏟아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대체 어떻게 이런 많은 관객을 몰고 왔나 궁금할 지경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사전정보를 수집하는 거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워낙 온 세상이 영화 정보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 근 몇년 사이 이 영화만큼 사전에 아무런 지식 없이 본 작품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내가 "'그을린 사랑'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게 전부였죠.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은 빨리 창을 닫으시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를 보지 않고 2011년을 그냥 흘려 보낸다면 여러분은 이 해에 단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캐나다 퀘벡에 위치한 장 레벨씨의 공증인 사무소. 쌍둥이 남매 시몬과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기묘한 유언장을 접하고 당황합니다. 어머니는 남매에게 두 가지를 각각 부탁합니다. 잔느에게는 '너희의 아버지를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 시몬에게는 '너의 형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작에 죽었다고 알고 있고, 형이 있다는 말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남매는 일순 반발합니다. 하지만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버티는 시몬과는 달리 어머니에게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 잔느는 어머니의 과거를 찾기 위해 나왈의 고국인 '아랍의 어느 나라'로 향합니다.



끝까지 나왈이 태어나 자란 '이 나라'가 어디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인종 청소와 관련된 내전이 거론되는 탓에 구 유고 연방 지역의 어딘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보고 있으면 레반트 지역의 어느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요르단. 하지만 기독교 민병대와 PLO가 개입된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될 정도의 심각한 혼란을 겪은 나라라면 레바논이 모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원작이 된 연극의 저자도 레바논 출신이라는군요.

(다만 이 시기 중동 지역에서 펼쳐진 종교분쟁의 아수라장을 얘기할 때 책임을 피하기 힘든 이스라엘과 미국 관련 내용은 이 영화에서 아예 거론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중함이 이 영화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리주의를 고집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요소가 비판을 부르는 부분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영화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10대 후반쯤이었을 나왈은 '이 나라'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팔레스타인 난민 청년(당연히 무슬림입니다)과 해서는 안될 사랑에 빠지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손에 묻은 피를 새로운 적의 피로 씻는 복수극의 정서입니다. 온갖 참극을 직접 몸으로 겪은 나왈 역시 스스로 복수의 화신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이런 격렬한 복수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로 전환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을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보여주며 관객을 설득하는 빌뇌브 감독의 스토리텔링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 할만 합니다.

빌뇌브 감독이 모성애에 기반한 이해와 용서를 웅변처럼 외치고 있는 이면에서 또 한가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록에 대한 애정입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가 기록자의 시각에 따라 왜곡될 여지가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반면, 숫자로 표현되는 기록은 묵묵히 진실을 대변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물론 기록 자체도 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어떤 기록이 채택되는지에 의해 주관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지만 화려한 수사로 서술된 '말의 역사'에 비하면 도표와 숫자는 훨씬 더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빌뇌브 감독의 입장은 선명합니다. '기록하라'. 당장 의미가 부여되지 않아도 제대로 된 기록은 언젠가 진실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죠. 뒷날 기록에 의한 진실 규명이 이뤄진 뒤에도 용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닐까(프랑스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가르침대로 덮어 둘 것은 그냥 덮어 두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그을린 사랑'을 보고 나면 빌뇌브 감독의 이런 주장에 대략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너무나 강력한 서사가 지배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에 대해 뭐라 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왈 역을 맡은 루브나 아자젤은 1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한 여자의 반생을 기가 막히기 표현해 냅니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글자 그대로 '망가져'가는 개인의 삶을 묵묵히 표현해내는 연기는 보톡스와 친한 중년 여배우들에게선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절제와 균형이 빛을 발하는 연기와 연출입니다.

사실 '그을린 사랑'의 가장 큰 강점은 빌뇌브 감독의 메시지보다는 이야기를 배치하는 교묘한 솜씨입니다. 특히 충격적인 결말 이후에도 영화의 에너지가 전혀 사라지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아무리 칭찬해도 진정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반전'을 너무 기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반전에 신경 쓰다 보면 진정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뇌브 감독은 이 부분에서 반전을 감추기 위해 살짝 영화적인 반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안 속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영화의 감동은 사라진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아무튼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 역시 같은 요령으로 가려 둡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마우스로 긁어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끝까지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바로, 표 사러 나가세요.


전체적인 영화의 얼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이오카스테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니야드를 나중에 알아보기 위해 표시하는 부위가 발 뒷굼치라는 점('오이디푸스'는 '부은 발'이란 뜻입니다)은 관객을 위한 힌트라고 봐야 할까요.

물론 니야드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빌뇌브 감독은 지나치게 나이 든 배우를 기용해 자신의 의도를 가립니다. 나왈이 크파르 리야트에 수감되어 있을 때 니야드는 만 스무살을 넘기 힘들죠. 하지만 그때 니야드의 얼굴을 보고 스무살 안팎의 청년이라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 합니다. 일종의 반칙인데, 애교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P.S. 영화에는 두 가지 형태로 지식인의 역할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은 다레쉬에 갔을 때 잔느가 처음 만나는 수학 교수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이죠. 잔느가 "빌어먹을 코헨(이 교수를 소개시켜 준 자신의 은사를 말합니다)"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살짝 중의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헨이라는 대표적인 유태인 이름을 이용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비극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네. 과잉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 바로 나왈의 고용주였던 공증인 장 레벨입니다. 레벨이 병상에 누운 나왈의 구술에 따라 편지를 대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남매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 줄 수도 있었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남매가 어머니의 유언을 직접 몸으로 수행하고 어머니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합니다.

물론 편지는 죽기 전에 써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레벨도 전모를 알고 있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끝까지 '기록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을 주는 레벨의 역할을 생각하면, '기록자'에 대한 빌뇌브 감독의 애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P.S.2. 원제 INCENDIES는 '전쟁의 참화', '불에 그을린 것'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군요. 거기에 비하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순한 제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쁜 제목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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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훈('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시나리오 박상연('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선덕여왕 공동집필)이라는 브랜드만으로도 '고지전'은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입니다. 이런 한국 영상계의 에이스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면 굳이 배우 요소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보고 얘기해야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해 훌륭합니다. 후반 약 30분은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치 제작진이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 났다는 선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놓고 감히 말하자면, '태극기 휘날리며'류의 감상주의에 대한 압도적 승리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가 가져온 가장 큰 수확은 고수라는 새 배우의 발굴입니다. 네. 1998년 만 20세때부터 활동한 바로 그 고수 말입니다.



1953년 1월, 지리한 휴전협상을 바라보던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는 사소한 시비 때문에 동부전선의 격전장 애록고지로 전출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전출 이유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전투의 핵심인 악어중대에서 뭔가 인민군과 내통한 흔적을 수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강은표는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친구 김수혁 중위(고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강은표는 방첩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전쟁의 진실을 하나 하나 알아차립니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이 전쟁의 첫 8개월은 엄청난 규모의 역전과 재역전이 펼쳐집니다. 개전 한달만에 낙동강에 고립됐던 한국과 UN군은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10월1일(국군의 날)에는 북진을 시작합니다. 12월, 한반도의 북쪽 끝까지 국군의 진격이 이뤄지지만 중공군의 투입과 맥아더의 퇴진, 1.4후퇴로 다시 전선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내려오죠. 이 1951년 1월 이후 전선은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루한 휴전 국면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휴전 국면은 그야말로 누가 땅 한뼘을 더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고, 지휘관과 국정 지도자들이 지도상의 땅 1cm, 아니 1mm를 놓고 책상 위에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휴전선 일대의 고지들은 시체로 산을 쌓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살육전의 핵심을 지목한 것이 바로 영화 '고지전'입니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애록(Aero.K)이라는 고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동부/중부전선 어디를 가나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될만한 고지들이 널려 있습니다. 유명한 백마고지를 비롯해 펀치볼, 피의 능선, 베티고지 등 수많은 고지들이 바로 그 '지도 위의 1cm'를 놓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곳들입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화 '고지전'은 '한 고지를 사이에 두고 몇 개월, 몇년씩 마주 보고 싸워야 하는 적들 사이의 묘한 관계'에 주목합니다. 그렇게 매번 같은 고지를 놓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이다 보면 서로 얼굴도 알아볼 만 합니다. 더구나 같은 언어로 대화도 통하는 동족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흥미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제작진은 이 '고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합니다. 어떤 때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함께 청승맞은 노래를 합창하며 눈물을 닦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먹을 것을 나눠 먹기도 하지만 어느 한 순간, 서로 목숨을 노리며 눈을 부라리는 관계는 지금도 변한 게 없습니다. 서로 이름까지 알 사이지만 돌아서서 "그 자식, 어제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평양에서 펼쳐지는 남한 가수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는 손과, 연평도에 포탄을 퍼붓는 손이 다른 손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도 반대쪽에서 볼 때에는 이쪽도 마찬가지로 보인다는 것. 1953년 동부전선에서 펼쳐지던 웃지 못할 희비극이 지금도 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야말로 영화 '고지전'의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이런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 넘쳐난 것이 '고지전'의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혹자는 이런 요소를 "한국 전쟁영화는 역시 죽기 전에 너무 말이 많아"라고 한마디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건조하게,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영화였으면 하는 느낌입니다. 이미 제작진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후반부의 '전선야곡' 합창으로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감정에 어필해야 하고, 얼마나 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해야 하느냐에 따라 수천가지 입장이 나뉠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지전'은 지금까지 나온 대략의 한국전쟁 영화들에 비해 감정의 분출을 가능한 한 억제한 영화라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그동안 쏟아진 울고 짜고 하는 감상주의에 비해선 대단히 큰 발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상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법이란 얘기가 아니라, 감상주의 일변도의 신파 노선을 벗어나서도 이렇게 큰 울림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큰 성과라는 뜻입니다.)




연출과 대본의 훌륭함을 넘어 이 영화를 진정 살려내는 건 온갖 전력을 갖고 전쟁에서 하나로 뭉쳐진 악어중대원들의 열연입니다. "정말 형이라고 부를 거지요?"라고 궁시렁대는 류승수, 믿기 어려운 광복군 전력을 신물나게 외우는 고창석, 허풍쟁이 신임 중대장 조진웅, '전선야곡'을 구성지게 불러대는 이다윗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화려한 조연의 향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제훈과 고수가 있습니다. (신하균은 사실 연출 의도를 살리면 살릴 수록 관객에게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죠. 배우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일 겁니다.)



'파수꾼'에서 곱상하면서도 잔혹한 1진의 면모를 보여준 이제훈은 첫 등장하는 장면, 첫 대사인 "무례하네, 상관한테" 이 한마디로 절대 지워지지 않는 존재감을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원래 그러라고 있는 대사와 상황이겠지만, 커리어가 길지 않은 배우가 자신이 '따 먹어야' 할 장면을 이렇게 제대로 '따 먹는걸' 보면 제작진도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목소리가 다소 가녀린 면이 있지만 앞으로의 대성이 기대됩니다.




고수의 성공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수는 어떤 배우였을까요. 데뷔 후 줄곧 따라다녔던 '사슴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청년'의 이미지에서 고수는 얼마나 벗어나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해 이 작품 전까지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작품에서 고수가 냉혈한의 이미지를 연기하곤 했지만 그 속에는 항상 상처받은 소년이 있었고, 그 모든 캐릭터는 고수가 본래 갖고 있는 요소, 즉 수려한 용모 속에 가려져왔다고 보는게 냉정한 평가일 겁니다.

하지만 '고지전'의 고수를 보면 여러 모로 엄청난 발전이 느껴집니다. 고수의 작품 중 처음으로 고수 아닌 김수혁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나약한 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김수혁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가 곡절 끝에 탈출해서, 2년 사이 졸병에서 장교로 진급해 있는 인물입니다.

누구보다 생사의 기로를 여러번 넘나들었고,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이라는 간단한 논리에도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 인물이죠. 특히 '살고 죽는 문제가 1초의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에 단련된 남자'만이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니컬한 웃음은 정말 일품이라고 칭찬할 만 합니다. 드디어 '사슴의 외모'와 '짐승의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완성됐다는 신호인 것이죠.

올 연말과 내년 초 사이에 고수가 이 작품으로 트로피를 몇개나 모을 지 궁금합니다. 영화 '고지전'과 고수가 트로피 갯수로 경쟁을 벌일 지도 모르겠군요.^^



P.S. '잘가라' 신에서 영화가 끝날 수 있었다면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고, '전선야곡' 합창과 '돌격'에서 끝났다면 냉정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뒷부분이 과연 필요했나 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상황이지만... 이렇게 힘들고 긴 작업을 마친 제작진으로서는 더 선명한 결말을 원했을 수도 있겠죠.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난 제1감은 '영화 내용도 전쟁이지만 정말 찍는게 더 전쟁이었겠구나'하는 생각. 스태프며 배우들, 지긋지긋 했겠습니다. 고생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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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닭이란 동물은 대개 음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개 안 먹는 나라, 돼지 안 먹는 나라, 소 안 먹는 나라는 있어도 닭 안 먹는 나라(혹은 문화, 종교, 학칙...)이라는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기르기 쉽고, 알도 쑥쑥 낳아 주고, 죽으면 고기와 국물을 주고, 좀 따갑긴 하지만 털로는 베게며 이불도 만들어 주는 아주 훌륭한 동물입니다.

그런 유틸리티 애니멀인 반면 대중적인 인기는 크게 떨어집니다. 대개는 호랑이나 사자, 독수리 같은 뽀대 나는 동물들이 인기 앞 순위를 차지하기 마련이고(그런 면에서 프랑스는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 이런 경향은 한화 이글스를 비하하는 호칭인 칰스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닭이란 동물에 별 애정이나 관심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남들이 다 재미있었다는 '치킨 런'조차도 굉장히 지루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좀 다른 영화더군요.


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양계장의 암탉 '잎싹'. 늘 먹고 알 낳는 것이 일상인 수많은 암탉들 가운데서 잎싹은 문틈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마당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마침내 마당으로 나가게 되지만 그 마당은 잎싹이 바라던 살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생의 세계로 진출한 잎싹은 남성미 넘치는 야생 청둥오리 '나그네'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되는데, 종이 다를 뿐만 아니라 나그네의 옆에는 우아한 암컷 오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악역인 족제비가 나그네의 둥지를 덮치고 잎싹은 그들의 알을 대신 품어 새끼 오리가 태어나게 합니다.

알에서 깬 조류는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여긴다는 자연의 철칙대로 잎싹을 엄마로 여기는 병아리. 이 병아리에게 '초록'이란 이름을 붙인 잎싹은 아기를 데리고 바닷가 늪으로 갑니다.



살짝 코믹한 외양의 잎싹은 지성보다는 행동력이 지나치게 앞서는 타입의 여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가축들이 순종해야 하는지, 마당의 가금류들 사이에는 왜 서열이 있는지, 자연 상태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가축이 된지 오랜 닭은 왜 물가에 가면 힘들어지는지 따위의 상식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민폐 캐릭터의 모든 요소를 갖춘 잎싹. 하지만 유일한 특징은 같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능력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존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한다는 뜻이죠. 그 전에는 그냥 '오리 1', 혹은 '파수꾼'이던 오리는 잎싹에 의해 '나그네'란 이름으로 기억되죠. 초록이도, 달수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그런 민폐형 캐릭터 잎싹이가 펼치는 예상 밖의 결말은 정말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뭔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오리에게서 위장취업한 운동권 대학생류의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아무래도 제가 80년대 세대이기 때문일 듯 합니다. 아무튼 이 최민식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수컷 오리는.... 보기만큼 제몫을 다 하지는 못합니다.

뭐 어차피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도 미스테리로 남는 건 옆에 있던 암컷 오리의 정체입니다. 대사를 주지 않은 것은 연기력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제작비 절감 차원의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행색으로 보아 집오리 종류인 듯한 이 암컷 오리는 대체 어쩌다 야생으로 나오게 됐던 것일까요.

생각해보면이 암컷 오리야말로 멜로드라마 주인공으로 제격입니다만...(묵념)


유승호가 목소리 연기를 맡은 초록이는 딱 유승호 같은 캐릭터입니다. 적당히 귀엽고 적당히 반항적인데 능력은 초인적..아니 초압적입니다. 원래 오리는 그렇게 빨리 자라나요? 1년도 안 되어 다 자란 수컷 오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이 '마당을 나온 암탉' 최고의 스타 캐릭터는 수달 달수입니다. 이름이 왠지 오달수를 캐스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1/3 이상이 애드립인듯한 박철민의 연기는 불꽃을 튀깁니다.


생각해보면 주요 캐릭터들 중 상당수가 죽고 헤어지는 가운데서도 이 영화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누가 뭐래도 박철민의 공헌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을 오래 기억나게 할 건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아무래도 영상일 듯 합니다.


모든 장면이 이 장면처럼 잔뜩 공이 들어갔다면 영화가 버틸 수 없었겠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아 이건 우리나라의 산야고 우리나라의 늪지대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특히 잎 진 겨울 산야와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오리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 자연'을 그리는 데 남달리 공이 들어간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성장에 대한 우화로 여겨졌던 이 작품의 예기치 못한 결말은 원작을 안 보신 분(저를 포함해서)들에게 참으로 충격적일 것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동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이 분명한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방법도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꼭 이런 결말을 내려야 했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어쨌든 세상 만물에는 모두 특유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자연에는 이래저래 순환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변의 진리. 굳이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거론하는 건 오히려 촌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잎싹의 선택은 예전에 한번 거론한 적이 있었던 앤서니 퀸 주연의 1960년작 '이누크(The Savage Innocents)'에서 장모 할머니가 내렸던 선택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다만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으니 블라인드 처리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아래 흰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 보세요.^^)


워낙 식량 생산이 적은 에스키모들은 노령이 되어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노동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면 일종의 자발적 고려장을 요구하게 됩니다. 북극곰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버려져 곰의 먹이가 되는 거죠.

이 영화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곰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생각합니다. "곰이 나를 잡아 먹고 살이 쪄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이누크가 곰을 사냥하겠지. 그럼 이누크와 내 딸, 그리고 아기가 곰을 먹고,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는거지." 이것이 영화 '이누크'가 보여주는 에스키모의 독특한 자연관입니다. '마당을 나선 암탉'의 결말과 어쩐지 일맥상통하는 느낌이죠.


아무튼 
어린이들이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똑똑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쉽게 그 정수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입니다. 아무튼 비오는 여름철, 한번 보실만한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절대 '애들 보는 영화'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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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중간 여러번 실망하기도 하고, 책은 애저녁에 따라잡기를 포기한지 오래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10년 동안 그래도 꼬박꼬박 한편도 빼놓지 않고 영화를 따라 본 전력이 있고 보면, 그 긴 10년 세월이 마무리된다는데 하필 또 그 완결편을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 극장을 찾으려 하는데 이놈의 처지란 천상 평일은 분주한 월급의 노예다 보니 어차피 시간은 주말이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대낮에 상영관을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그래서 밤도 한참을 지나 거진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극장을 찾게 되었는데 이건 또 하필 3D 아닌 2D 상영관이었다는 사실을 극장 들어가서야 알아차리고, 그렇게 해서 '해리 포터' 시리즈 중 유일한 3D 작품을 2D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긴 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늘 '하리 포타아아아~~'하고 발음하는 코 없는 아저씨도 그립고, 점점 하관이 커져 가는 래드클리프 군도 왠지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니까 서글프고, 세 주인공 가운데 유일하게 성장의 잔인한 손길을 벗어난 엠마 '허마이오니' 왓슨 양은 뭐 물론 금세 다른 작품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 시리즈에서는 마지막 보는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새록새록....



(죄송합니다. 갑자기 박상륭 선생이 생각나서 잠시 시도해 봤습니다. 뭐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시간만 있다면 운율도 맞출 수 있을 듯 합니다.^^)

2001년 시작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이하 '8편')'는 소설의 7번째 시리즈에서 영화화된 두번째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2011년의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는 7부에 걸친 소설과 8편의 영화로 마무리되는 것이죠. 롤링 여사가 사 둔 부동산이 갑자기 지진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해리 포터'의 새 시리즈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귀염둥이 주인공들이 다른 작가에게 놀아나게 내버려 둘 것 같지도 않으니 아쉬움이 넘쳐 나시는 분들도 더 이상의 속편은 '없다'고 마음을 비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설 시리즈로 말하자면 저는 4부 이후 소설은 포기하고 영화로 스토리를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불량 독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대체 스토리가 왜 이래?'라는 의문에 대해 혹시 원작에 답이 있다면, "야 이 원작도 안 읽어보고 무식하게~"라고 성토하시는 대신 친절하게 '원작에는 이러이러하게 나와요'라고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줄거리 요약. 6편 '혼혈왕자' 이후 극에 달한 음침한 분위기는 8편까지 주욱 이어집니다. 볼드모트는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 가고, 스네이프가 교장이 된 호그와트는 디맨터들이 하늘에 둥둥 떠 있고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침실도 없이 거의 건물 안 노숙자들처럼 피폐해 가는(아니 대체 왜? 정원외 합격자를 너무 많이 받은?) 환경입니다.




우리의 하리 포타 군은 친절한 피해자 볼드모트의 마음을 스팟 스팟 읽어 또 하나의 호크룩스(볼드모트의 영혼 조각이 봉인되어 있는 성물)가 호그와트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위험천만한 호그와트에 몰래 침투합니다. 한마디로 영화 마지막 순간까지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주인공의 권능을 함부로 사용한 만용이죠.

어쨌든 포타군은 그 호크룩스가 마지막 호크룩스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또 하나의 호크룩스가 늘 볼드모트의 곁에 붙어 있고, 볼드모트 외의 다른 사람은 파괴할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호크룩스가 또 있습니다. 원작을 보신 분들이 천지인데 뭐 이게 스포일러일까 싶지만, 아무튼 호크룩스가 파괴될 때마다 조금씩 약화된 볼드모트는 마침내 하리 포타 군과 맞대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아무튼 원작은 점점 더 길어지는데 영화의 길이는 한정되어 있는 탓에 5, 6 편으로 갈수록 영화만 보는 관객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그렇다고 매번 각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쪼개자니 안 그래도 점점 노년으로 향해 가고 있는 래드클리프군이 머리가 벗겨지지 말라는 법도 없어 눈물을 머금고 강행군을 해야 했던 제작진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자를 건 과감하게 자르고, 키울 건 키워서 영화만 보는 관객들을 악착같이 끌고 간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의 역량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롤링 여사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시리즈가 계속 진행중인데 영화판도 나란히 따라가고 있는 만큼 다니엘 래드클리프라는 쑥쑥 자라고 있는 배우에게 줄거리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상당한 고충이었을 듯 합니다. 지난번에도 몇몇 분들이, 연재를 시작할 때 롤링은 이미 마지막 편의 줄거리를 다 생각해 뒀다는 둥, 시리즈 7편을 보면 앞에서부터 얼마나 정교하게 그 얼개가 짜여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둥 하는 얘기를 하셨지만 이런 분들은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 10년 뒤에 나올 수천 페이지 뒤의 내용을 다 고려하고 글을 썼다면 롤링은 시간여행자이거나 신의 경지일 수밖에 없겠죠. 이건 J.J 에이브럼스가 '로스트'를 시작할 때 마지막 시즌 내용을 다 고려하고 있었다는 거나 마찬가지 얘깁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 놓고 대략 끝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대략의 구상은 있었겠지만,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척척 아귀가 맞는 듯 한 '증거'로 보이는 것들은 유능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좋은 작가들일수록 뒤에 가서 어떻게든 소용에 닿게 하기 위해서 잘 보이지 않는 각종 설정들을 초반에 '마구' 던져 놓는 경향이 있죠.)

어쨌든 긴 긴 스토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이번 8편은 손색 없는 수작입니다. 뭐 '반지의 제왕'에 꽂혀 있는 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스펙타클로는 '애개' 하실 수도 있겠지만 공포정치의 무대가 된 호그와트의 시각적 형상화(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1980년대의 한국 대학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나, 2차대전 초기 히틀러의 악받친 공습에 맞서 싸워야 했던 영국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호그와트 공방전의 모습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 다음 내용은 살짝 스포일러가 됩니다. 뭐 책에는 당연히 다 써 있는 내용이고, 여기까지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영화 줄거리가 어떻든 일단 보러 가실 분들이니 별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튼 저는 책임 못 집니다.

롤링 여사의 성향으로 보아 아마도 결말에서 하리 포타 군이 성인이 된 뒤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대략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을 겁니다(아,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말이죠). 그런데 19년 뒤라고 해 봐야 30대 후반인데 그렇게까지 파삭 늙은 모습들이라니...ㅜㅜ

언젠가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됐던 네빌 롱바텀 군이나 맥고나걸 교수가 후반 들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보상도 마지막회에 충분히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련의 주인공 스네이프 교수의 허무한 죽음에는 참 공분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갖은 궂은 일을 다 시키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한단 말입니까.

(이런 데서도 볼 수 있지만 역시 롤링 여사는 인간적으로 본받을만 하거나 함께 어울려서 즐거운 성품의 소유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지금도 가끔씩 많은 사람들(특히 어르신들)이 "우리도 해리 포터에 맞먹는 오리지날 스토리를 내놓고 그로 인한 엄청난 파생 이익을 따내 문화 강국이 되자"는 말씀을 하시곤 하는데, 그런 분들일수록 '돈 벌 수 있는 스토리=해리 포터와 비슷한 이야기'로 착각하시곤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옵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좋은 인재들이 책을 써서 먹고 살 수 있게 하고, 글쓴이의 저작권이 기본적으로 보호받게 해 주고... 뭐 이런 등등의 제반 여건이 갖춰 지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긴 한데 그걸 어떻게 확보해야 하느냐고 하면 참 그 또한 어려운 문제로군요. 세월이 빨리 흘러서 당장 비싼 걸 먹고 좋은 옷 입고 큰 차에 타는 것 말고도 다양한 욕구들을 가진 세대가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P.S. 몇몇 주인공들이 나이 먹으면서 무시무시하게 무너진 반면 네빌 롱바텀 군은 의외의 훈남으로 자라났더군요. 물론 8편에서는 분장으로 많은 게 커버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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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트랜스포머'를 처음 보고 마음 속으로 '그래 이거야 이거!'라고 외친 것이 벌써 4년 전의 일입니다. 물론 다 큰 분들게 2007년은 바로 어제같겠지만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는 관객 중에는 그 4년이 인생의 30%나 40%, 심지어 50%인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온 주말 내내 3D 상영관과 2D 상영관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극장이 매진에 가깝다는 놀라운 환경에서(심지어 개봉관이 적은 것도 아닌데!) 간신히 심야를 틈타 '트랜스포머3'를 보고 왔습니다. 뭐 장사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보고 나서 괜히 볼멘 소리 할 거면 안 보는게 낫다고 할테고, 사실 보기 전부터 이미 '트랜스포머3'의 품질에 대한 기대는 매우 낮았지만 그래도 안 볼수는 없다는 묘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습니다. (물론 결과도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단 줄거리.

1961년, 인류는 달에 뭔가 외계물체로 추정되는 것이 충돌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물체의 정치를 파악하기 위해 우주계획에 박차가 가해지고,

두번의 모험 뒤에도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는 실업자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곡절인지는 모르겠지만 샘은 이미 미카엘라(메건 폭스)를 차버리고 새로운 여자친구(슈퍼모델인 로지 헌팅턴 위틀리)와 동거중입니다. 나라가 샘에게 해준 보상은 장학금과 훈장이 전부. 직장은 자기가 잡아야 합니다. 당연히 샘에겐 울분의 나날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옵티머스 프라임은 러시아에서 자신들과 관련된 문명의 편린을 발견하고, 이것이 달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들이 달에서 발견한 것은 오토봇들의 행성이 멸망하기 직전 간신히 탈출한 우주선. 그리고 문명의 부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다리'의 부품입니다.



'트랜스포머3'는 평론가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습니다. 특히 유명 평론가 로저 이버트로부터 심각하게 욕을 먹었는데 사실 전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버트는 이미 2009년의 시리즈 2편도 박살을 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 2편을 모두 보신 분이라면 이런 평가가 상식에서 벗어난 얘기는 아니라는 데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의 흐름을 경험했습니다. (이버트도 1변은 호평했다가 2편에서 개실망을 드러냈죠.)

트랜스포머, 마음속 소년이여 일어나라    http://fivecard.joins.com/453
트랜스포머2, 2년새 애정이 식었나?    http://fivecard.joins.com/454



사실 3편에 대해 평론가들이 혹평을 쏟아 붓는 걸 보면 새삼스럽게 뭘 또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2편에서 플롯이라는 요소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그 2편이 흥행에서 온전히 대박을 기록하면서,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는 관객층은 플롯 따위는 발가락의 때 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증명된 셈입니다. 그럼 굳이 그렇게 2편을 만든 마이클 베이가 3편이라고 논리에 충실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리는 만무하겠죠.

(뭐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보면, '수십톤에 가까운 로보트들이 소리도 안 내고 2족 보행을 하거나, 아스팔트를 망가뜨리지 않고 도로를 질주하는게 말이 되냐'는, 애당초 이 영화의 근간을 흔드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 영화 안에서의 논리가 일관성이 있느냐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슨 수로 광선을 갖고 칼싸움을 한다는 거냐'고 주장하실 분은 아예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지 않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든 '1편에선 저게 됐는데 2편에선 왜 안돼?'라는 소리를 들어선 안된다는 것이죠.)



반대로 2편에서 스토리에 대한 기대를 싹 걷어낸 결과, 개인적으로 3편은 꽤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듯 합니다. 다른 분들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 장면과 뒷 장면의 논리적인 연속성, 어떤 인물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냥 꽤 길고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생각하시는게 가장 좋은 태도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접으면 장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교한 그래픽과 생동감 넘치는 로봇들간의 전투는 박진감이 넘칩니다. 특공대원들이 날개를 달고 도시 상공으로 낙하하는 장면은 심지어 CG가 아니라 실사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는, 멋진 장면입니다. 한동안 3D 값을 제대로 못하는 찌질한 영화들에 질린 분들은 제대로 박진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낙하하냐고 물어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건 트랜스포머3를 감상하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딱 하나, 제대로 이치에 닿는 부분이 있다면 '인간 전투력의 성장'입니다. 1편에서 디셉티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인간들이 2편에선 제법 저항을 하고, 3편에서는 어떻게 디셉티콘에게 인간의 화력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달은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디셉티콘을 상대하는 인간의 능력이 점점 성장한다는 게 당연한 거겠죠. 아마 4편이 나온다면(마이클 베이는 손을 떼겠다고 얘기했지만 영화사가 이런 돈나무를 그냥 베어 버릴 리가 만무하겠죠) 오토봇 없이도 디셉티콘들은 인간과 감히 맞서기 힘들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3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메건 폭스의 결장입니다. 이미 온갖 언행을 통해 '내가 왜 남들의 눈치 따위를 봐야 하나'라는 인생관을 노출한 처자인 터라 예상은 했지만, 베이 선생님과 스필버그 선생님까지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폭스는 3편의 캐스팅에서 제외됐고, 영화 내용상으로도 샘에게 한방에 차인 꼴이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꼬마 오토봇들로부터는 "걔 정말 밥맛이었어"라는 말까지 듣죠.)



그 대안으로 나타난 로지 헌팅턴 위틀리도 팔등신 미인인 건 분명하지만, 1m76의 라보프와 1m63의 폭스가 괜찮은 비례를 보여준 데 비해 위틀리는 너무 큽니다(수치상으로 라보프가 1cm 큰 걸로 되어 있지만, 영화 속에서 라보프가 위틀리를 안아 올리는 장면에서 위틀리의 발은 여전히 지면에 붙어 있는 굴욕적인 장면도...). 게다가 연기력은 아직 초보 수준이라는 약점도 그대로 노출됩니다. 뭣보다 용모만 놓고 보면 폭스에 비해 많이 처진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개인 취향이 반영된 주장입니다.)



결론입니다. 속도감과 화려한 액션, 박진감만으로도 '트랜스포머3'는 재미있게 볼만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1편이 갖고 있던 주인공의 성장에 대한 기대, 꽤 볼만했던 유머, 그리고 로맨틱한 느낌은 영영 사라져버렸습니다. 네. 이제 더 이상 '소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이죠.



사실 샤이아 라보프가 미래의 톰 크루즈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외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인간 배우들에 대해선 별로 할 얘기가 없습니다. 엄청난 배우들이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편 리뷰 때 '유일하게 연기할 거리가 있는 역할'로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시먼스 요원 역할을 얘기했는데 그건 3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나 존 말코비치같은 관록의 명배우들이 카메오처럼 별 의미 없는 역할로 흘러갑니다. 특히 말코비치는 대체 왜 나왔는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스타 패트릭 뎀시가 정말 찌질한 역으로 나와 굴욕을 당하는 건, TV 스타들에게 좋은 역할을 주지 않는 할리우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도 하지만, 역시 TV 시리즈 '라스베가스'의 스타 조쉬 두허멜이 이 영화를 통해 영화배우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한 걸 보면 베이에게 그런 편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P.S. 샘의 부모 역할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자자 뱅크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볼수록 짜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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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슈퍼 에이트(8), 감독 J.J. 에이브럼스, 제작 스티븐 스필버그. 이건 뭐 관객들을 향해 '이래도 안 볼래?' 수준의 무력 시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요소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인 만큼 영화 내용에 대한 노출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당대 강호 최고의 낚시왕과 전대 최강의 대마두가 한 편을 먹고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는데, 이럴 때 정직한 관객의 태도는 '네네 알겠습니다. 봐 드리죠' 하고 고개 숙이고 매표구로 달려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리뷰를 읽어보는 시점은 영화를 보기 전이 아니라 영화를 본 다음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시각을 참고한다는 건 스스로 영화를 보는 눈을 제한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다 제작진이 스스로 이렇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꽁꽁 싸매고 있는 경우에는 무리하게 정보를 취득하려 하지 말고 그냥 선입견 없이 보는게 최곱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기본적인 얘기부터 하자면, 이 영화는 대략 이런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1979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인구 1만2천의 소읍 릴리안. 사고로 엄마를 잃은 중학생 조(조엘 코트니)는 여름방학을 맞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 찰스의 꿈은 영화감독. 이들을 포함한 다섯 친구는 단편 영화 촬영에 열중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동급생 앨리스(엘르 패닝)를 영화에 끌어넣으면서, 이들은 평생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 속으로 말려듭니다.

줄거리는 이 정도만 아셔도 충분합니다(오히려 많이 아실수록 감상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만 보더라도, 이런 영화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스필버그가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온 장르라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 그 계보는 아무래도 'E.T'에서부터 시작해야겠죠.

'E.T'에서 리처드 도너 감독의 '구니스'(직접 연출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의 원안은 스필버그의 것입니다)까지, 스필버그는 어느날 갑자기 초유의 대사건에 휘말리는 일단의 어린 친구들 이야기를 다루는 데 천부적인 솜씨를 보여왔습니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그가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천재였기 때문이겠죠.

물론 그 '소년의 마음'이 '후크'나 'A.I' 에서처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뭣보다 그 '소년의 마음'이 없었다면 '태양의 제국'이나 '주라기공원' 같은 영화는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됐을 겁니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비록 '슈퍼 8'가 J.J 에이브럼스의 주도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그 색깔은 지금까지 에이브럼스가 만들어 온 작품들에 비해 훨씬 스필버그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도 있지만 이 영화는 '21세기 판 구니스+E.T' 라고 규정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죠. 어쩌면 성장기에 두 영화를 보고 자란 에이브럼스가 스필버그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구니스와 E.T를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관객들 들었다 놨다 하는 수작입니다. 스필버그적인 낙관이 좀 불편하신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영화라면 입장료가 절대 아깝지 않다는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그럼 아동용 영화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드실 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가장 크게 공감할 관객은 30,40대 남성 관객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 사람들이 왕년의 10대 초기를 회상할 때 가장 아쉬웠을 부분을 건드려 주는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뭣보다 그때 꿈꿨음직 한 꿈의 여자친구 캐릭터가 등장하죠.

어느 영화에서도 아역이 연기를 못해 망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 영화의 핵심은 여섯 친구들, 그 중에서도 조와 앨리스 역의 두 배우에 몰려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앨리스 역을 맡은 엘르 패닝은 다코타 패닝의 동생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다코타가 1994년생, 엘르 패닝은 1998년생으로 네살 차이가 납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이들 자매를 보고 있으면 정말 연기는 뱃속에서부터 몸에 밴 듯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임신중에도 계속해서 줄담배를 핀 게 아닐까 하는(...훈제...) 생각을 하게 될 정도입니다. 다코타 패닝을 보았을 때 이렇게 외모와 재능을 타고 난 아이가 있을까 생각하신 분이라면 아마도 이번에 그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시게 될 겁니다.



게다가 만 13세에 이미 신장은 1m68. 다코타 패닝의 한계로 꼽히던 신장과 '유아 몸매'도 이미 벗어나 버렸습니다. 한 5년 뒤가 기대됩니다.

(...한국의 고아라는 언제 포텐셜이 터질지.)




P.S.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목의 '슈퍼8'은 필름의 종류를 말합니다. 기존 8mm 필름에 비해 좌우 비율이 개선된 포맷을 말하죠.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가 나오기 전까지 홈 무비의 대세는 8mm였습니다. 당연히 이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영화가 바로 슈퍼 8mm 영화인 것이죠.

스필버그는 1960년(14세), 이미 40분짜리 8mm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잘은 모르지만 영화 속 1979년의 에이브럼스(영화 속 주인공들과 마찬가지인 13세)도 아마 딱 저런 짓을 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P.S.2. 배경이 1979년이면 스필버그는 이미 1975년작 '조스'로 유명 감독이 되어 있던 시절인데, 영화 속에 스필버그의 개입은 보이지 않더군요(혹시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좀비 영화의 대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이름은 영화 속 '로메로 화학'에 들어 있던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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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prequal)이라는 말은 오히려 시이퀄(속편, sequal)이란 말보다 잘 알려진 단어가 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이퀄은 '속편'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프리퀄은 '전편'으로 번역하면 의미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죠. '엑스맨-퍼스트클래스'가 '엑스맨'의 프리퀄이라고 말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아듣지만 '전편'이라고 얘기하면 누군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엑스맨'이 가장 첫번째 작품인데 무슨 전편이 있느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뭐 아무튼 그렇다는 얘깁니다.

최근 들어 히트한 영화에는 속편 제작의 유혹만큼이나 프리퀄 제작의 기회가 있는 게 보통입니다만 모든 종류의 프리퀄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거의 모든 관객이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요 인물의 생사에 대한 자유도는 전혀 없어지는 것이죠.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를 모든 관객이 아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줄거리.

2차대전 중 폴란드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에릭 랜셔는 나치의 학대 속에 자신 속에 잠자는 초능력의 발현을 경험합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동부 명문가의 아들 찰스 재비어는 집에 몰래 들어온 어린 레이븐(뒷날의 미스틱)을 동생처럼 거둡니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미국 정보요원 모이라는 소련의 첩보활동을 돕는 세바스찬과 일단의 초능력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초능력=돌연변이의 소산(이라는 놀라운 추론을 해내다니!)이라는 생각에서 돌연변이 연구로 각광을 받던 젊은 날라리 학자 찰스 재비어를 찾아나섭니다. 미국의 방첩활동에 뛰어든 재비어는 오래지 않아 복수를 위해 세바스찬을 뒤쫓던 에릭 벤셔와 만나게 됩니다.



위에서 말한 문제점은 고스란히 '엑스맨-퍼스트 클래스(이하 FC)'에도 해당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찰스 재비어(제임스 매커보이)와 매그니토-에릭 랜셔(마이클 패스빈더)가 아무리 우정을 나눠도, 언젠가는 적이 될 거라는 걸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돌연변이 악당 세바스찬(케빈 베이컨)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릴 거라는 점 역시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럼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까요. 사실 프리퀄의 약점부터 얘기하고 시작했지만 좋은 점도 있습니다. 프리퀄을 보러 오는 관객의 특성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히스토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매그니토가, 내가 좋아하는 X박사가 철들기 전에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은 냉철하고 판단력 뛰어난 비스트는 어려서 어떤 타입이었을까, 미스틱은 어쩌다 X박사와 등지고 매그니토와 같은 편이 되었을까와 같은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관객들은 액션의 부족이나 거대한 볼거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신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서로간의 관계를 맺어 가는지에 주목하는 경향이 짙죠. 이것만 잘 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매튜 본은 이 과업을 특유의 유머 감각을 살려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영화감독보다는 클라우디아 쉬퍼의 남편으로 더 유명하고, 이따금씩 수컷판 백조의 호수를 연출한 매튜 본과 혼동되며(무용 매튜 본은 Matthew Bourne, 영화감독은 Matthew Vaughn 입니다^^), 원래 '엑스맨 3'의 감독이 될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프리퀄을 맡게 된 이 감독의 유머감각은 프로듀싱을 맡은 영화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나 자신의 데뷔작 '레이어 케이크'에 잘 나타나 있죠. 괴짜 돌연변이들의 성장 드라마에 이보다 적절한 감독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교해보자면 나쁜 프리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스타워즈 1, 2, 3'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세 편이나 되는 대작 영화에 거대한 음모와 대전쟁을 그려 놓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루했을 뿐입니다. 전쟁이 아무리 엄청난 규모로 그려져봐야 어차피 스톰 트루퍼가 승자가 된다는 건 다 알고 있으니 관심 갈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에피소드 4~6에서는 한두명만 있어도 행성간 전쟁의 전세를 바꿔 놓을 수 있을 것 같던 초전사 제다이들이 1~3에서는 수십명 있어도 백병전에서 몰살이나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이 시리즈에 대한 반감을 폭증시켰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에피소드 1, 2, 3가 관객들에게 보여준 거라곤 '대체 요다는 어떻게 싸울까'에 대한 대답 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매튜 본의 이 프리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에는 기존 배우들의 젊은날을 연기한 새로운 배우들이 큰 몫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뭐 요즘 한창 뜨거운 배우들인 매커보이나 패스빈더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간 건 역시 엠마 프로스트 역을 맡은 재뉴어리 존스. '언노운'을 못 봤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처음 대했는데 왠지 클라우디아 쉬퍼가 젊었으면 욕심냈을 것 같은 역할이더군요. 아니면 이런 타입이 바로 매튜 본의 스타일인지도....ㅋ



이미 속편('엑스맨4'가 아니라 이 FC의 속편 - 그러니까 여전히 '엑스맨' 보다 앞의 시대 이야기)을 만든다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데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반, 두번의 프리퀄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반 정도 듭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굳이 FC라는 이름을 건 것은 '비긴스'나 '리턴스'의 또 다른 표현이며 이제부터 이 배우들을 갖고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 보겠다는 얘기일테니, 2편부터는 굳이 프리퀄의 굴레를 씌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울버린이나 성인 미스틱 같은 배우들의 얼굴이 잠깐 비쳤던 건 또 어떻게 소화할 생각인지...^^



P.S. 생각해보면 왕년의 NBA 선수중에 보스턴 셀틱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등에서 뛰었던 재비어 맥다니엘이라는 선수의 별명이 'X맨'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드물게 이름이 X로 시작(Xavier)한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엑스맨' 시리즈와 무관하지 않은 별명이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P.S.2. 얼마나 가능성있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부잣집 출신의 마음씨 넉넉한 재비어는 매튜 본 자신을, 재능은 뛰어나지만 독선적인 에릭은 가이 리치를 그리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쩍 스치고 지나가더라는.... ('뭐 아니면 말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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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트루맛 쇼'를 좀 늦게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제는 커녕 시사회에 갈 수 있는 특권도 사실상 박탈당한 상태이고 보니^^ 빠른 접근은 쉽지 않더군요.

사실 지금 전국 어디에서든(서울이든 지방이든) '트루맛쇼'를 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개봉관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굉장히 한정된 '예술영화 전문관'에서나 상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건 '트루맛쇼'의 오락적인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큐멘터리로서의 가치를 털어 버리고, 근래 한국에서 나온 코미디 영화 중에서 냉정하게 따져 볼 때에도 이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는 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트루맛쇼'는 TV 맛집 프로그램을 둘러싼 잡음들을 정면으로 파헤친 작품입니다.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가졌을 법 합니다. 물론 업계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런 정황에 대해 눈치채고 있기 마련입니다. TV에 나오는 스타의 단골집이 다 단골집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죠. 사실 대부분의 스타들이 '아는 사람(혹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최근 개업한 식당'을 자신의 단골집으로 포장해 주는 데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도 소개된 남희석 칼럼은 이런 풍조에 대한 드문 자기 고백으로 꼽을 만 합니다. (제가 유치해서 진행한 칼럼입니다. 이럴 때 참 뿌듯합니다.^)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592169

'트루맛쇼'의 가장 큰 미덕은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치지 않는 유머감각입니다. TV의 시사/고발성 프로그램들이 흔히 하듯, 인상 팍 쓰고 당장 지구가 멸망할 듯한 표정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과장하는 논법으로 일관했다면 아마 이 영화의 가치는 지금의 절반 정도에 그쳤을 겁니다.


이 영화에는 사실상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고 등장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맛집 전문가 겸 음식점 창업 컨설턴트' 임모씨가 바로 그 분입니다. 이 분이 만들어 낸 '캐비어 삼겹살' 요리를 보여주던 화면이 보물 다루듯 캐비어를 만지는 프랑스인 주방장으로 옮겨가는 순간, 그리고 이 조리장의 입에서 "캐비어는 섬세한 음식입니다. 어떤 열도 가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카메라는 다시 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캐비어 삼겹살' 쪽으로 넘어갑니다. 정말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캐비어'의 정체는 극장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낯설게 느껴졌던 실명 비판입니다. 한 방송사의 사장님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모크 없이 맨 얼굴로 등장합니다. 만약 그 당사자들이 문제를 삼으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영화의 의도로 볼 때 비판이 그 당사자들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어쨌든 '트루맛쇼'에 대해 다른 공간에 쓴 글이 아까워서 일단 가져옵니다. 오늘 아침자 신문에 나온 칼럼입니다.



제목: 트루맛쇼

유명 담배 회사의 연구개발 부문 고위 간부였던 제프리 와이갠드는 1993년 갑작스레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는 얼마 뒤 이 담배 회사가 그동안 고의적으로 니코틴의 함량을 속여왔다고 폭로했다. 실제로는 니코틴 중독을 유발하기 충분한 양이었지만 포장지에는 그보다 훨씬 낮은 함량이 표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와이갠드는 CBS-TV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 '60분' 제작진의 취재에 응했지만 거대 기업인 담배 회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송을 차단했다. 결국 이 내용은 1996년 2월에야 전파를 탔다. 담배 회사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을 고의로 유통시켰다는 최초의 보도였다.

 소속 집단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인을 흔히 휘슬블로워(whistleblower)라고 한다. 공익을 위해 합당한 일이었다 해도 조직의 입장에서 본 휘슬블로워는 일단 응징해야 할 배신자다. 와이갠드 역시 “무능해서 해직당한 분풀이를 하는 것”이란 음해에 시달렸고 정체불명의 남자들로부터 살해 위협도 받았다. 러셀 크로가 와이갠드 역을 맡은 영화 '인사이더(99년)'가 개봉된 뒤에야 대중은 와이갠드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가능케 했던 내부 고발자 '딥 스로트(Deep Throat)'도 보복이 두려워 철저하게 정체를 감췄다. 30여 년이 지난 2005년에야 밝혀진 그의 이름은 윌리엄 마크 펠트, 당시 FBI 간부였다.

 방송사 맛집 프로그램을 둘러싼 음습한 뒷거래를 고발한 영화 '트루맛쇼'가 개봉돼 화제다. 전직 방송사 PD 출신으로 이 영화를 만든 김재환 감독 역시 방송사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MBC는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누군가 배후가 있다'는 악의적인 사주설도 널리 퍼졌다.

 가처분신청은 기각됐지만 '트루맛쇼'의 개봉관은 여전히 극소수다. 화제에 비하면 이 영화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직도 적다는 뜻이다. '트루맛쇼'에서 한 맛집 블로거는 개탄한다. “방송에서 한번 다뤄지면 식당 앞에 장사진이 생깁니다. 이게 한국 대중의 입맛 수준입니다. 이 수준이기 때문에 방송에 휘둘리는 겁니다.” '입맛'과 '식당' 대신에 '관심'과 '정치', 혹은 '기업'을 넣어 보면 어떨까. 대중이 깨어나기 위해선 좀 더 많은 '트루맛쇼'가 나와야 한다. <끝>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 감독의 액션 대작 가운데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마이애미 바이스'나 '라스트 모히칸' 정도? '히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들이 범작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느낌이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 '인사이더' 만큼은 정말 인정해 줄만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사이더'는 제프리 와이갠드(상기한대로 러셀 크로가 연기합니다)라는 실존 인물과 그를 취재하는 '60분'의 PD(알 파치노)를 통해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폭로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힘들어졌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마이클 만은 그의 영화에서 왜 여성 캐릭터가 마냥 겉돌기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이지, 블록버스터 흥행작 감독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염을 토하지만 본상은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마이크 월러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하는 이 실존 인물은 '60분'의 산 증인이기도 하며 월터 크롱카이트와 함께 CBS를 대표하는 방송 저널리스트입니다. 하지만 영화 '인사이더'에서 이 인물은 회사 편에 서서 와이갠드의 인터뷰 내용이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물론 본인은 이 영화 내용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그의 불만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이라면 명예훼손 소송부터 온 난리가 났을 겁니다. 물론 영화 속 그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다르다면 법정에서 결론이 났겠죠.)

아울러 아래 쪽의 '딥 스로트'를 볼 수 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로버트 레드포드,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죠.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기자가 좋은 역으로 나오는 몇 안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트루맛쇼'는 의식이 앞서 보는 이를 지루하게 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보고 있으면 최소한 다섯번은 의자에서 몸을 흔들며 웃게 되는, 훌륭한 블랙 코미디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개봉관을 한번씩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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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심은경의 '빙의 장면'을 못 보신 분이라도, 이 영화의 개요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은 분들은 이 영화의 흥행 포인트를 두가지로 압축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으실 겁니다. 첫째는 최근 몇년 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80년대 지향형 추억 마케팅'이고, 또 하나는 여성 영화로서의 가능성입니다.

여성 영화라고 약간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소위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것들이 왜 남자들만의 전유물처럼 표현되느냐는 반발이 저변에 깔려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든가, 흑인 여강도 집단 이야기를 다룬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셋 잇 오프', 그리고 교도소 동기들끼리의 여성 록밴드 이야기인 독일 영화 '밴디트' 같은 느낌의 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영화 '써니'를 보신 분들은 왜 이렇게 약한 표현을 쓰는지 아마 아실 수 있을 겁니다^^)을 갖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두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아무래도 이 두가지 요소를 통해 성공했던 전설적인 히트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바로 곽경택 감독의 '친구'죠.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별 고민없이 살고 있던 주부 나미(유호정)은 어머니 문병차 들른 병원에서 우연히 옛 친구 춘화(진희경)이 입원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춘화의 병은 암. 살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춘화의 말에 나미는 오래 전 함께 어울려 울고 웃던 '써니'의 일곱 친구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어린 나미(심은경)의 시선으로,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와 처음 만나게 된 춘화(강소라)와 친구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쌍꺼풀 마니아인 자칭 no.2, 국문과 교수 딸인 욕쟁이, 미스코리아 지망생, 욱하면 무서운 문학소녀, 그리고 잡지 표지 모델인 미녀까지... 이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교차되면서 나미는 잊고 살았던 '자기 자신의 삶'을 발견해 갑니다.



전형적인 '자아 찾기 영화'의 구도입니다. 사실 '전형적인' 이란 말을 리뷰에 쓸 때에는 대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강형철 감독에게는 예외일 듯 합니다. '과속 스캔들'도 그랬지만 '써니'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든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영화입니다. 오히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코미디가 이 영화의 강점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영화와 '친구'가 상당히 유사한 흥행 요소에도 불구하고, 코미디와 느와르라는 장르 성격상 사뭇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코믹했던 점은 '친구'의 한 장면과 매우 유사했던 부분이죠.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른 배우들보다 어린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 특히 심은경이라는 천재적인 청소년 연기자의 솜씨가 불을 뿜는다는 것은 굳이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도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 속 과거 모습의 재현도 정교하게 과거를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의 왜곡은 당연하다는 태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 이를테면 영화의 배경은 아무래도 1987년쯤으로 보이는데, 시위 장면에서 굳이 그해 7월 개봉한 '록키4'가 극장에 걸려 있다는 점은 옥의 티 수준입니다. 시위 내용으로 보아 87년 전반기(즉 6.29 이전)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어쨌든 아시겠지만 이런 부분은 모두 재미로 따지는 겁니다. 거기에 목숨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튼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대박을 내느냐 마느냐 하는 부분은,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남자들이 영화 '친구'때 보여줬던 수준으로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느냐에 달렸다과 봐야 할 듯 한데, 그건 좀 더 지켜봐야 알 수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위에서 '여성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얘기했지만, 그 부분에 너무 중점을 두면 이 영화를 보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그냥 '가능성' 선에 머뭅니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 가족용 코미디 영화입니다. 왠지 중년의 엄마와 10대 딸들이 같이 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들더군요.




<<< 나머지 내용에서는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보실 분들은 건너 뛰셔야 할 부분들입니다. >>>




P.S.1. 이 영화를 보실 때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희화화라든가(예전의 운동권이던 오빠의 이름이 임종& 라는 거나, '노동운동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나이 먹어서 부하 직원들 봉급이나 떼먹는 사람이 됐다'는 얘기를 듣는 점, 뭣보다 시위 현장과 여고생들의 패싸움 장면의 오버랩 등), 산타클로스의 등장으로 모든게 해결돼 버리는 데 대한 반감 같은 것은 좀 접어 두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P.S.2. 수지 역의 성인 배우가 예고편이며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되지 않는 데 대해 많은 억측과 관심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스포일러를 각오하고 얘기하자면 나오긴 나옵니다. 한때 대단히 인기있었던 분이었고, 지금도 적잖은 나이지만 우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계시더군요. 정 궁금하신 분은 아래 희게 보이는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847553


P.S.3. 주제가처럼 사용되는 'Time Atfer Time'은 신디 로퍼의 오리지널 버전 대신 턱 앤 패티의 리메이크 버전이 사용됐습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트레이시 채프먼의 리메이크를 사용한 줄 알았는데 턱 앤 패티의 여성 보컬 음색이 채프먼의 판박이더군요. 굳이 리메이크를 쓴 건 신디 로퍼의 노래가 두 곡 들어가는 걸 경계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P.S.4. 아주 오래 전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앞부분에 아역으로 나오던 제니퍼 코넬리가 뒷부분에서 엘리자베스 맥거번이 되어 있는 걸 보면서 '세월의 잔혹함을 보여주려는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시도가 나옵니다. 왕년의 꽃미남 김시후가 중년 배우 L씨로 바뀌어 있는 부분에서 인생의 비애가 느껴지죠.



P.S.5. 마지막으로 딴지는 마그마의 '알수 없어'와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가 엇갈리는 음악감상실 신은 아무리 봐도 87년이라기보다는 70년대, 아무리 더 쳐 줘도 80년대 초의까지의 느낌인 듯 합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그 분위기의 업소는 아주 조명이 캄캄해 지거나(신촌 일대), 영상 음악 카페로 바뀌어 사라졌죠. (뭐 물론 재미로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 영화 최대의 소득은 강소라라는 배우의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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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르'는 미국 마블 코믹스계 작품인 '토르(그래도 진짜 발음은 '쏘오르'에 훨씬 가깝죠.^^)'를 실사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부분적으로 인용한 작품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영화화는 아마 처음인 듯 합니다.

이 영화의 홍보 문구는 '지금까지 영웅들은 인간이었다. 이젠 신이다'라는 것인데... 글쎄, 영화 내용대로라면 토르는 분명히 신이 아닙니다. 만약 진짜 신이라면,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영웅들과 균형이 이뤄지질 않겠죠.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이 총출동하는 만화 '어벤저'(물론 영화로도 몇년 내로 나올 겁니다)같은 경우에 과연 다른 영웅들 중 누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문제 때문에 영화는 '사실은 튜튼 신화에 나오는 신들 - 오딘, 토르, 로키 등등 - 은 신이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성계에서 온 외계인이었다는 식으로 시작합니다. 뭐 나쁘지 않습니다만, 영웅 토르가 독자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가기엔 너무 스토리가 빈약합니다.

제목이 왜 저런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 사실 오늘의 주제는 영화 속에도 나오는 '목요일은 토르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대체 왜 목요일이 토르의 날일까요?



개인적으로 이 목요일=토르의 날이라는 것은 참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요일의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일단 일,월요일을 보시죠.

일요일=태양의 날=sunday
월요일=달의 날 = monday

자.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 합니다. 다음 다섯개의 요일 이름은 모두 별의 이름이자, 오행사상의 오행의 이름이며, 그리스-로마-튜튼 신족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뜻이 전혀 혼란 없이 모두 잘 들어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화요일=불의 날=화성의 날=마르스(로마)의 날=튀르(게르만)의 날=Tuesday



마르스는 게르만 신화의 튀르와 같은 전쟁의 신이면서 영어로 화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참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요일=물의 날=수성의 날=머큐리(로마)의 날=보탄(게르만)의 날=Wednesday
목요일=나무의 날=목성의 날=주피터(로마)의 날=토르(게르만)의 날=Thursday
금요일=쇠의 날=금성의 날=비너스(로마)의 날=프레이야(게르만)의 날=Friday

이렇게 된 겁니다. 즉, 그리스/로마에서 정해진 각 날의 이름은 그때까지 알려진 태양계 다섯 행성의 이름이자(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신들의 이름인 것이고, 그 이름들이 로마의 게르만 정복과 함께 각각 해당하는 신들의 이름으로 '번역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번역의 기준이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각각의 주신인 주피터-보탄(오딘의 다른 이름)이 먼저 대응되어야 할텐데, 이 요일 이름의 번역을 보면 기능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주피터는 번개의 신이므로 게르만 신화의 뇌신 토르로 연결되고, 상업의 보호신인 머큐리(헤르메스)는 곧 게르만 신화의 상업의 신인 보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어떤 해설을 보면 금요일이 가정의 여신인 프리그(프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주노에 해당)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저런 원리를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엉터리 해설입니다.

그럼 마지막.

토요일=흙의 날=토성의 날=새턴(사투르누스, 로마)의 날=...=Saturday

로마 신화의 농업의 신인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격입니다. 모든 신들을 낳은 아버지인 셈이죠. 다른 신들에 비해 이 사투르누스(새턴)은 일찌감치 게르만 지역으로 진출해 이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새턴은 다른 신으로 번역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집니다. 

아무튼 참 신기한 것은 이런 의미가 고스란히 실린 채 동양으로 와서 일~토요일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인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 착착 맞아떨어지는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은 그래서 '목요일은 토르의 날'이라는 겁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느냐. 사실은 '토르'를 보긴 봤는데 영화에 대해서 도무지 할 얘기가 없더라는 겁니다. 뭐 줄거리는 전혀 뇌의 사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앉아서 하하 호호 보기만 하면 됩니다. 뭐 아주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순진하고 열린 마음으로 앉아서 즐기고 나오면 되는 영화입니다.

라는 영화 치고는 캐스팅이 상당히 화려합니다. 나탈리 포트먼이 토르의 여친인 제인(그렇다면 토르는 타잔?) 역으로 나오는 것을 비롯해 안소니 홉킨스가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 르네 루소가 토르의 어머니인 프리가 여신 역입니다. 그런데 워낙 영화의 성격 자체가 늘씬늘씬한 스칸디네이비언 남녀들로 가득 차야 하는 터라, 일본의 희망 아사노 타다노부는 온데간데 없고, 웬 넙데데한 동양인 조연 하나만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전 영화 끝나고 나서야 그게 아사노라는 걸 알았습니다). 배우들 보는 재미도 확실히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로 가장 큰 덕을 보게 될 배우는 토르 역의 크리스 헴스워스입니다. 최근 영화 '스타 트렉'에서 시작하자마자 죽어 버리는 커크 선장의 아버지 역('하우스'의 카메론 박사님과 부부로 나왔죠)으로 등장해 일부 훈남 마니아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던 헴스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듯 합니다. 

(그런데 3형제가 배우라니, 잘하면 볼드윈 패밀리를 제치고 헴스워스 패밀리가 뭔가 해낼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케네스 브라나와 이 많은 스타 배우들이 과연 이 영화에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도 남지만, 영화 '토르'의 등장을 학수고대했을 마블 팬들이 아니더라도 입장료가 아까울 수준은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단 3D 효과는 크게 기대할 건 못 됩니다.

P.S. 마지막으로 저번에도 한번 소개했던 영상 같은데, 무려 20여년전 영화에 나오는 '토르(?)'의 모습입니다. 엘리자베스 슈가 십대 소녀를 연기했던 'Babysitting Blues'의 한 장면이죠. 1985년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 자막도 없는 비디오 테이프로 본 영화인데 신기하게 이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저 토르 역의 배우가 바퀴벌레 외계인 빈센트 도노프리오라는 것은 아주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끝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개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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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사람 중에(전 세계에 1000만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절대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감독이 쩐 아인 훙(흔히 트란 안 훙이라고 번역되는 Tran anh hung의 실제 발음은 여기에 훨씬 가깝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陳英雄. 베트남어에 '트란'이란 발음은 없다는군요)으로 결정되고, 나오코 역의 배우가 기쿠치 린코로 결정되면서 "이따위 영화는 안 만들어지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쩐 감독의 최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하다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 정신이 아닌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죠.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작 영화가 만들어지자 마음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래도 한번 봐 줘야 하는게 아닐까. 욕을 하더라도 어떻게 만들어 놨나 한번은 봐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국은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의 첫 느낌. '못 볼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만족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원작을 아니 보신 분에게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지는 참 난감합니다. 특히 영화와 연동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권장사항은,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아예 영화를 안 보는게 낫다"입니다. 줄거리 따라가기도 아마 벅차지 않을까 싶네요.

1960년대말, 와세다 대학 신입생이 된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에겐 자살한 친구의 연인이었던 나오코(기쿠치 린코)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마음 속 상처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나오코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나오코는 연인의 자살이 준 상처로 인해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죠. 그러는 사이 와타나베는 발랄하고 엉뚱한 동급생 미도리(미즈하라 기코)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나오코가 있는 산 속 요양원과 미도리가 있는 도쿄의 캠퍼스 사이를 오가며 와타나베의 스무살이 지나갑니다.


'상실의 시대'는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영화로 옮기기 쉬운 작품일 지도 모릅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어지럽게 현실과 환상을 오가지도 않고, 시간에 따른 내러티브의 진행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분명히 영상화하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온게 사실입니다.

그때문에 원작자 무라카미도 쏟아지는 영화화 제의를 굳게 거절해 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쩐 아인 훙이 이 영화를 만들게 허락하는 모습을 보니, 무라카미는 아마도 영미권의 감독이 제안을 했다면 진작에 OK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원한 건 원작의 감성을 잘 살려 줄 연출이 아니라, 이 작품을 영상물로 만들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할만한 연출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약간은 불측한 상상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고심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의 불만은 기쿠치 린코가 과연 나오코 역에 적합한 배우냐는 것으로 모아질텐데, 이 답은 보기 전부터 많은 분들이 생각하신 바와 같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나오코가 단순히 산골 요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폐증의 스무살 여자라면 기쿠치는 꽤 좋은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나오코는 스무살 와타나베의 가슴을 찢어 놓을 만큼 아름다워야 하는데, 이 배우는 전혀 그런 역할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쩐 감독의 눈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위의 속물적인 '세계적인 관심' 이론을 적용하면 또 상황은 달라집니다. 쩐 감독과 무라카미는 이런 대화를 나눴을 수도 있겠죠.

쩐: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구치 린코밖에 없어.
무: 뭐라고! 그건 말도 안돼! 그건 나의 나오코에 대한 모욕이야!
쩐: 이봐, 잘 생각해 보자고. 나는 이 영화를 갖고 유럽 3대 영화제에 갈 수 있는 감독이야. 그런데 거기엔 아시아의 뮤즈가 필요하다고. 유럽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아시아 최고의 미녀 여배우가 누구겠어? 일본 유일의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배우를 두고 왜 내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하지?
무: 그래도 스무살 나오코 역에 서른살 먹은 못생긴 배우를 쓴다는 건 좀...
쩐: 오우 노우. 유럽의 바보들이 보기에 일본 여배우는 다 베이비페이스야. 당신이 원하는 게 한국 중국 일본의 관객들인가? 그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미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건, 아직 당신을 모르는 세계의 독자들이야! 그럼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고!
무: 그, 그럴까?
쩐: 그럼! 당연하지! 유럽 매스컴의 찬사가 보이지 않아? '아시아의 신비로운 미녀 린코가 무라카미의 원작을 환상적으로 재현해 냈다' 부라보! 기쿠치가 들어 오면 우린 벌써 해 낸거나 다름없어!

<= 물론 전부 농담입니다. 절대 도청한 적 없습니다. 제 상상입니다.)

심지어 기쿠치 린코를 나오코로 쓴 것보다 더 나쁜 점은 나오코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겁니다. 나오코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와타나베의 갈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나오코는 오히려 주인공 와타나베보다 영화 전반에서 더 중시되고 있습니다.

나오코에 집착하는 감독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일단 미도리. '봄날의 곰처럼'이 없는 미도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쩐 감독은 과감하게 미도리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미도리 역의 미즈하라 기코는 한국계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0.1초도 의심하지 않고 동남아 혼혈이라고 생각했을 느낌입니다. 아마도 쩐 감독의 취향이 가장 잘 반영된 캐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울러 쩐 감독이 이해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대다수 한국 독자들의 느낌과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독자들이 이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절망과 희망이 5:5 정도로 적절하게 배합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쩐 감독은 7:3 정도로 절망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퀀스조차도 와타나베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기보단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음침함만 풍겨 나옵니다.

마츠야마 켄이치의 연기력이나 외모는 와타나베를 구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그 혼자서 건져 내기엔 다른 캐스팅이나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게다가 충실하게 와타나베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면, 이 영화는 그 시선을 너무 흩어놓습니다. 심지어 나오코나 미도리도 아니고, 레이코의 시선으로도 영화를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조 아무개 감독님의 지적대로 이 레이코는 원작과는 달리 너무 미인입니다. 게다가 레이코스러운 농담은 완전히 사라진,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고 차분한 레이코입니다.)

쩐 아인 훙이 성공하고 있는 건 다양한 구상을 통해 구현되는 화면의 색채와 영상미입니다. 특히 60~70년대풍의, 다소 정제되지 않은 원색 위주의 색감과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는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가 왕가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마음이 놓이는 '상실의 시대'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상실의 시대'는 필사적으로 원작 '상실의 시대'를 요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빠져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살려 놓은 부분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려져 있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다소 천박한 용어지만 '선택과 집중'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80년대에 6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상실의 시대'가 여전히 지금의 20대에게도 유효한 원작이라면, 그 이유는 '스무살'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스무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스무살 전후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이나 사물은 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인생에서도 '열다섯에서 스무살 사이에 일어난 일' 이외의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매우 힘든 법이죠. 그런 사건들 역시 긴 시선에서 보면 다섯살 때나 일곱살 때 일어난 그저 그런 사건들과 별 차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려면 10년 이상 더 살아 봐야 합니다.

무라카미는 어느 시대, 일본이란 나라에 살았던 '스무살 짜리' 들의 이야기를 통해 온 세계가 공감한 '상실의 시대'를 써 냈고 그걸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24년전에 쓰여진 이 작품을 영상으로 변신시키는 모험에 참여했죠. 과연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는 전 세계의 '스무살 짜리' 들이 판가름할 일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지만, 굳이 영화도 책도 읽지 않은 그 언저리 나이대의 분들에게 권장한다면, 일단은 책을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P.S. 레이코의 트라우마 부분은 오히려 영화적으로 매력적이었을 듯 한데 왜 사라졌는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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