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오우삼의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이 설 연휴를 맞아 개봉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1편은 형주를 차지한 조조가 마침내 장강을 건너 동오까지 평정하려는 각오를 품고, 오의 손권은 유비와 제갈양의 협력을 얻어 조조와 맞서 싸우기로 하는 데에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2편. 동시에 촬영된 영화긴 하지만 2편을 보고 나니 1편에 쏟아진 비판을 상당히 의식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일관성이 없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두 편을 합치면 5시간 가까이 되는 대작이니 그 긴 작품을 통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 두 편을 한번에 연결해 보시는 분이 있다면 '이거 왜 이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더군요.

1편과 2편을 모두 본 뒤의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이렇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떤 판본이든, 3번 이상 읽은 분이 만약 이 영화를 보신다면 모든 기대는 집에 두고 가시기 바랍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꽤 일치하지만, 이건 여러분이 알고 계신 삼국지와 적벽대전이 아닙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적벽대전 2'는 장강 북쪽 조조(장풍의)의 진영에 침투한 손상향(조미)의 간첩 활약상에서 시작합니다. 조조는 전염병 작전을 통해 상대 연합군의 와해를 노리고 마침내 견디다 못한 유비는 전군을 거느리고 후퇴해 동맹이 깨져 버립니다. 하지만 제갈양(금성무)은 남아 주유(양조위)를 돕기로 하죠.

제갈양과 주유는 각기 지모를 발휘해 조조의 화살 10만개를 훔쳐오고, 또 조조의 수군 도독인 채모와 장윤을 제거해 싸울 준비를 갖춥니다. 하지만 여전한 병력 열세. 중과부적을 극복하려면 화공뿐이지만 때는 겨울. 동남풍이 없어 화공이 곤란해 질 때 소교(임지령)는 조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강북으로 향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 소설 삼국지연의를 알고 계신 분들. 이 스토리를 보고 나면 뭔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뿜어 나오지 않습니까? 요즘 '꽃보다 남자'를 보고 발가락이 오그라든다는 분들이 꽤 있는데 오우삼이 망가뜨려 놓은 적벽대전 스토리를 보면 손발이 다 꼬이는 듯 합니다.

각색자의 권리도 다 좋습니다. 뭐 소교를 이용해 적벽대전을 트로이 전쟁처럼 만들어 버린 것도 그럴 수 있다 칩시다. 하지만 어느 정도라야죠.

1편에서 어이없이 유비와 손권이 합동사령부를 차려 놓고 조자룡과 감녕을 절친으로 만들더니 스스로 만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갑자기 유비를 비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오우삼이 만든 스토리대로라면 유비는 갈 곳이 없습니다. 유비가 전염병이 싫어 후퇴한다면 대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동오의 후방인 더 동쪽? 손권이 함께 싸우기 싫다는 동맹군을 자기 진영의 후방으로 가도록 허용한단 말입니까? 애당초 원작대로 유비의 위치를 조조의 측면 후방, 즉 유사시에 조조를 협공할 수 있는 지역으로 지정해 뒀다면 이런 바보같은 진행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누구나 알고 있듯 적벽대전의 시점은 한겨울입니다. 북서풍이 불고 있는 철이죠. 영화 속에서도 동지떡을 나눠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동지때는 전염병이 돌아 수만 장병이 환자가 될 수 있는 시절이 아닙니다. 게다가 등장인물의 의상은 대부분 겨울옷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왜 북서풍이 불고 있는 겁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2편에서 오우삼이 뭘 보여주고자 하는지는 3세 이상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주 유치한 수준의 반전의식이죠. 손상향은 조조군에 침투해 있는 사이 아무 생각 없는 조조군 병사와 친구가 됩니다. 이 병사에게 전쟁과 군대란 굶주리는 고향 집에서 입을 덜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누가 이기건 지건 그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죠.

이런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서 너무나 저열하고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수십만 군사의 몰살을 그려내는 오우삼의 얄팍한 자기합리화라는 것이 너무나 선명합니다. 즉 '내가 이런 대살육을 그려내면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는 하지만,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라는 식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벽대전 2'의 인물과 줄거리는 1편에 이어 최악입니다. 행동에 아무런 개연성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은 한 장면 한 장면에서 그저 멋지게 보여 살아남기 위해 헛웃음 나오는 오버액션으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장풍의의 카리스마로도, 양조위의 우수 어린 눈빛으로도 이런 한심한 캐릭터들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평가할만한 부분은 전투신입니다. 물론 모든 전투신은 아닙니다. 그 중 딱 한장면, 화공이 시작되어 조조의 함대를 불사르는 장면이 유일하게 박진감을 넘치게 하지만 이 장면 역시 전체를 보여주는 부감 신이 거의 나오지 않아 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머지 전투신들은 지금까지 본 오만 전쟁영화들의 허술한 짜깁기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트로이'가 시시각가으로 화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역시 원작을 보신 분들이라면 대체 왜 적벽대전에서 공성전이 펼쳐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아무 전쟁이나 닥치는대로 갖다 붙였다는 것이 너무 선명합니다. 이 시대의 중국군이 로마 군단의 대표적인 전술인 테스튜도(Testudo)를 사용하는 걸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테스튜도는 라틴어로 거북이라는 뜻이며 로마군이 사용하던 큰 직사각형 방패를 사용해 하나의 방진을 탱크처럼 만드는 전술입니다.

바로 아래 사진 같은 모습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이 정도도 그 사이 사이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만화적인 장면들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조조의 인질극 신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삼국지 팬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오우삼은 적벽대전에서 본격적인 화공전 못잖게 중요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바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시점이죠. 소설에서 제갈양은 조조를 물리치기 위해 도술의 힘으로 동남풍을 불게 하겠다며 멀리 강가에 제단을 쌓고 기도를 올립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던 주유와 동오 대장들.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동남풍이 불 기색이 보이지 않자 욕설과 한탄이 나오려는 상황에서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뀝니다. 경악의 외침 속에서 주유의 마음 속에서는 한가지 결단이 내려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동안에도 껄끄러운 라이벌로 여겨지던 제갈양이 이제 한 순간도 더 살려둘 수 없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는 것이죠. 원하던 바람을 얻은 이상 유비의 협조 없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확신이 생긴데다 이제부터 제갈양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은 비와 바람까지도 지배하는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빠른 판단이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다들 바뀐 바람의 방향을 기뻐하는 사이 주유는 수하 정예병을 보내 제갈양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오우삼은 어처구니없는 초등학생용 우정놀이 때문에 이 비장미 넘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날려 버립니다. 아무튼 모든 걸 다 떠나서 한겨울(전염병 도는 한겨울!) 쌩쌩 불던 북서풍이 승리의 동남풍으로 바뀌는 순간, 이 영화에서는 아무런 박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바뀐 바람의 방향'조차도 관객의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도 오우삼은 "관객은 내가 잘 안다. 내가 아는 관객의 수준이라는 것은 그따위 디테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두고 봐라. 주유 역의 양조위만 멋지게 나오면 아무 문제 없을테니까"라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일부 맞아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 중에는 '장대한 스케일과 배우들의 호연'을 칭찬하는 내용도 꽤 많더군요. 또 양조위 - 금성무를 '꽃보다 남자'처럼 소비하는 관객들도 '적벽대전' 1, 2편에 만족을 표하곤 합니다. 취향은 제각각인게 당연하지만, 대체 뭘 봤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보셔도 좋고, 안 보셔도 좋습니다. 미리 마음의 다짐만 하고 가신다면 의외의 재미를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확 낮추고, 감독과 제작진의 실책을 비웃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할 수도 있거든요. 제가 걱정하는 건 '삼국지의 웅장한 모습이 제대로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가 실망할 분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원작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별 관심 없는 분들은 보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대자면, 제발 이 영화를 보고 '삼국지를 봤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초등학교 극단이 공연한 '햄릿'을 보고 "뭐야,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하더니 별 거 아니잖아"라고 말하거나, 어린이들이 리코더로 연주하는 합창교향곡을 듣고 베토벤을 폄하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p.s. 글을 쓰고 나면 내용에 동의하는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 이런건 너무 당연한 건데 꼭 써야 할까' 싶은 부분을 빼놓으면 거기에 대해 논의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더군요.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당연히 역사 자체가 아닙니다(물론 진수의 정사 삼국지 또한 부분적으로 그렇죠). 또 원작이나 역사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때 인물이며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은 창작자의 권리이기도 하죠. (이런게 바로 너무 당연한 얘기기 때문에 생략되는 부분입니다)

오우삼의 '적벽대전' 1,2편이 비판을 받는 것은 재구성이나 새로운 해석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재구성이나 새로운 해석이 원작에 비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형편없음의 기준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죠. 감독이 애써 공들여 만든 영화를, 누군가는 재미있게 봤을 영화를 왜 네 맘대로 폄훼하냐는 분들, 그럼 대체 블로그라는건 뭐하러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난해 썼던 1편 리뷰입니다.

728x90
 

이걸 안 하고 한해를 넘기니 어째 좀 껄적지근합니다. 뭐 며칠 늦었지만 그래도 한번은 짚어 봐야 할 것 같더군요. 리뷰를 쓴 영화도, 안 쓴 영화도 있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 한해도 여름 기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폭격이 대단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올해도 '트랜스포머 2'가 벌써부터 기세를 올리고 있더군요. 그래도 지난해 한국 영화 중에는 꽤 건질 작품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돈 많이 안 들인 영화 중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반면 대작들 중에는 그리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쉬움 반, 걱정 반으로 남습니다. 그만큼 수업료들을 냈으니 이제 앞으로 잘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이제 그분들이 그만한 투자를 받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죠.

아무튼 2008년의 만족스러웠던 영화 열편입니다. 순위가 그닥 큰 의미는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아이언맨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때 가장 만족스러웠던 영화. 유치하지도 않으면서 경박하지도 않았고 주인공이 지나치게 착해서 답답하지도 않았다. 2편도 기대 기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쿵푸팬더

더 이상 재미있기 힘들 것 같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뭘 더 바랄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강의 캐릭터, 최강의 호흡. 같은 해였다면 히스 레저는 죽어서도 조연상을 못 받았을듯.





사용자 삽입 이미지


4. 추격자

탄탄한 스릴러의 힘을 보여준 걸작. 짝퉁 스릴러들은 제발 좀 참고해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월 E

전의상실. 상상력의 승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6. 고고 70

이렇게 잘 만들고도 외면당하는 심정은 어떨까. 한국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한 수작.





사용자 삽입 이미지


7. 다크나이트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과 역사에 남을 걸작은 아니라는 생각의 교차.

 

사용자 삽입 이미지


8. 님은 먼곳에

누가 뭐라건 마음이 끌린다. 감독의 뚝심으로 끌어낸 20세기의 여신 전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9. 더 폴 - 오디어스의 문

불가사의한 시각적 도전. 이렇게만 찍으면 대체 누가 스토리를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리뷰 쓸 시기를 놓쳤습니다. 죄송-_-. 나중에 추가하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 미쓰홍당무

 

포스팅 제목 그대로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꽃게같은 영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합: 영화는 영화다

11등? 뭐 아무튼 박력 넘치는 수작. 이렇게 제한된 자원으로도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






다음은 실망스러웠던 다섯 편의 영화입니다.

위의 열편과 아래 다섯 편에 포함되지 않은 영화들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영화들일 수도 있고, 아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 다섯 편도 기준은 저의 개인적인 기대와 거기에 대한 배반의 크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들이 아무리 편견으로 보더라도 '2008년의 가장 못 만든 영화'들은 아닙니다.

이번엔 순위도 빼 버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놈놈놈

멋진 장면 몇개로 의문부호 투성이인 세시간 짜리 영화를 구하는 방법: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비든 킹덤

 

두 명의 쿵후 전설을 모은 결과가 이거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뻔한 기획과 뻔한 결과. 안이함과 나태함이 돋보였던 범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벽

 

800억원을 들여 10억 독자를 실망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 보고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피

제발 천녀유혼을 10번만 더 봐라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편견은 어떠신지.

 



728x90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말. 왕(주진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건룡위를 측근에 두고, 특히 그 수장인 홍림(조인성)을 총애합니다. 홍림과 왕은 이미 그냥 군신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죠. 그런 왕인 만큼 원의 공주인 왕비(송지효)와는 전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왕은 후사가 없다는 것을 명분으로 한 일부 친원파에 의해 권력 유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왕은 자신의 심복인 홍림을 왕비와 동침시켜 그 소생으로 후사를 이으려 하죠. 하지만 그 한번의 잠자리 때문에 홍림과 왕비는 이성애에 눈을 뜨고, 불안한 삼각관계가 시작되고 맙니다.

'쌍화점'이 개봉해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아무래도 개봉 전 켜켜 쌓인 화제가 이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듯 합니다. 물론 '앤티크'가 어느 정도 총알받이 역할을 해 주기도 했지만 금단의 동성애 묘사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죠. 그렇다면 이런 화제 요소를 걷어내고 본 영화 '쌍화점'은 어떤 작품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쌍화점'은 치열한 치정 멜로드라마입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슬쩍 비치긴 했지만 이 영화의 구조는 왕과 홍림의 동성애 관계를 제외하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사뭇 닮아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쌍화점'의 배경이 된 고려말의 실제 역사와 이 영화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만 살펴 봤었죠.

(그 부분이 궁금하신 분은)


보스(김영철)가 심복(이병헌)에게 자신의 여자(신민아)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고, 심복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스는 엄청난 분노를 폭발시키죠. 이처럼 '쌍화점'은 굳이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라는 사실을 빼도 충분히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그 관계까지 깔려 있으니 감정의 폭발력은 말할 것도 없겠죠.

사실 '쌍화점'의 왕과 '달콤한 인생'의 보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에게 일을 맡기지만, 한편으로는 그 심복과 자신의 여자 사이에서 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복수가 폭발하는 것이죠. (이 부분에 주목하면, 과연 '쌍화점'에서 동성애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부분인가 하는 의문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하 감독의 묘사는 이 분노와 폭발의 매커니즘에서는 상당히 정교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사건의 전개나 인과관계는 전혀 맺힌 데 없이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이 영화가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엔 이 영화가 사람들의 감정에 충실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믿고 따르는 홍림에게 애정을 베풀고, 홍림은 그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서(이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죠) 동성애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래서 왕과 홍림 사이에서 절박한 연인들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홍림과 왕비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죠. 한번 치정에 눈을 뜬 두 사람이 생명의 위협과 존재의 기반을 모두 내던지고 매달릴만 한 열정이 두 사람에게서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보신 분이 있나요? 아마 이 대목에서 자신있게 '뭔가를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혹자는 이 부분에서 '쌍화점'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이 가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런 게 필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도저히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을 보여주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몸이 먼저, 마음이 나중'인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쌍화점'도 두 사람이 어쨌든 타의에 의해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두 사람이 어떻든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가 그리 설득력있어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조인성과 송지효가 영화 속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흘러야 할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보니 이야기는 슬쩍 겉으로 돕니다.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희한한 치정담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죠.

이런 이유에 대해선 조인성과 송지효의 연기력을 탓하기 보다는 유하 감독 쪽으로 책임을 돌려 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유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녀를 본 기억이 그리 선명치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한가인 정도 될텐데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단계는 '쌍화점'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죠. 이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으로서 유하 감독이 '과연 멜로드라마가 나에게 맞는 장르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연히 세 배우 중에서 왕 역을 맡은 주진모의 연기가 가장 돋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가장 그대로 드러내면 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반면 감독으로부터 뭔가 세심한 터치를 부여받지 못한 조인성과 송지효는 뭔가 열심히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관객이 마음 속으로부터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에선 여러 부분에서 '색, 계'의 영향이 짙게 느껴집니다. 물론 '색, 계' 조차도 국내외 평단으로부터는 상당한 칭찬을 받아냈지만, 일반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격정'이라는 것은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결과로 '쌍화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의 울림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그 좀 희한하고 야했던 영화' 정도로나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인성은 지금까지 시도했던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어려운 역할을 맡아 엄청나게 몰입해서 노력했습니다. 발음도 비록 '사극에 맞지 않는 목소리'라고 지적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호평받았던 '비열한 거리' 때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우 주연상은 군 제대 후로 기약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대단히 큰 각오를 했을 걸로 보이는 송지효에게 아쉬운 것은 표정입니다. 지나치게 큰 눈이 연기에 방해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송지효의 표정은 너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놀람인지, 분노인지, 체념인지 아무튼 등등등의 수많은 감정들을 모두 한가지 표정으로 정리하는 건 큰 배우가 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죠. 좀 더 자기 나이에 맞는 역할로 적응력을 높이는게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정신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는 간간이 삽입되는 액션 장면에서나 간신히 숨통을 터 줍니다. 물론 편집 전에는 홍림을 질투하는 승기(심지호)가 "전하, 제게도 성은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대사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극장판에서는 이 장면이 삭제되었다고 하더군요.^

기타 의상이며 고증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이런 부분은 이 영화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동성애와 원초적인 섹스 장면을 상업적 코드로 활용해 본 듯 하고, 결과는 이런 코드들이 아직 한국에서는 흥행에 플러스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p.s. 조인성 캐릭터의 성은 홍이고 이름이 림인 것이 분명한데 왜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홍림아, 홍림아' 하는 겁니까. 그럼 김범은 '김범아, 김범아'하고 불러야 하나요?





이 영화와 관련된 새로운 논점에 대한 글입니다.





728x90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용 포스팅이 보입니다. 크리스마스용 영화 관련 포스팅도 넘쳐나죠. 주관적으로 뽑은 베스트 크리스마스 무비 순위 등등. 뭐 역시 뻔합니다. '러브 액츄얼리', '세렌디피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로맨틱 홀리데이' '그린치' '007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달달한 영화들의 줄세우기죠.

그래서 약간 색다르게 구성해봤습니다. 제목은 '7편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통해 정리한 한 남자의 일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기적이 일어나 인생의 전기를 맞는 꿈을 꿉니다. 아무튼 일곱 편의 영화 속 주인공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일곱 번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어떻게 변신해가는지 살펴보자는 의도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보시면 내용을 보시면 이해가 갈 겁니다. 자, 그럼 첫번째 영화부터 시작합니다.



1.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Tokyo Godfathers,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 제목은 이렇지만,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에겐 '도쿄 갓파더스', 혹은 '도쿄 대부'로 더 익숙한 작품입니다. 콘 사토시 감독의 2003년작이며 초강추작입니다.

존 웨인 주연의 1947년작 '3 Godfathers'의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작은 황야에 버려진 아기 하나를 발견한 세 명의 무법자가 어찌 어찌 하다가 자기 목숨을 버려 가면서 아기를 보호한다는 내용으로 저도 어렸을 적 TV에서만 본 작품입니다.

콘 사토시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까칠한 노숙자, 은퇴한 게이, 가출 십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고 친부모를 찾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감동, 웃음, 액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걸작입니다.

...뭐 이런 얘기가 전부가 아니고, 아무튼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 고해라는 걸 깨달은 셈입니다.



2. 나홀로 집에(Home Alone, 1990)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애정이 없는 영화입니다. 참고로 저는 '톰과 제리' 보면서도 톰을 응원한 사람입니다. 매컬리 컬킨 같은 꼬마를 보면 그냥...

...아무튼 우리의 주인공은 갓 태어났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집에 도둑이 들면 울거나, 오줌을 싸거나, 도망치거나 하겠지만 이 당돌한 소년은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대항합니다. 영화니 망정이지 실제 상황이었다면 도둑들은 화상으로 죽고, 맞아 죽고, 계단에서 굴러 목 부러져 죽고, 못 밟아 죽고, 과다출혈로 죽고, 이 소년은 어린 나이에 찰리 맨슨의 후계자로 위키피디아에 등재됐을 지도 모릅니다.

어째 다음 영화로 '양들의 침묵'이 나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이 소년의 폭력성(!)은 약 30년  동안 잠잠하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살아납니다.




3. 패밀리 맨 (Family Man, 20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돈 밖에 모르는 월가의 거물 니콜라스 케이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사랑하던 여인 티아 레오니와 헤어지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고 꿈을 꾼 뒤 인생의 의미를 찾는 내용입니다. 수전노 스크루지가 꿈을 꾸고 나서 새 삶을 찾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패러디죠.

사실 제가 독신이던 시절, 이 영화는 꽤나 가슴을 무겁게 했습니다. 라디오 출연때 이 얘기를 했더니 황정민 아나운서 왈, "내가 아는 독신남 하나는 지난 10년간 크리스마스 때마다 케이블 채널에서 이 영화를 보고, 볼 때마다 운다더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이 영화엔 남자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의 첫 시퀀스입니다. 하룻밤 파트너 아가씨에게 "오늘 저녁에도 만날까?" 했다가 "뉴저지에 사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 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라는 말에 머쓱해진 니콜라스 선생. 괜히 파바로티가 부르는 '여자의 마음(La Donna Mobile)'를 100평짜리 아파트에 쩌렁쩌렁 울려퍼지게 틀어 놓고 팔까지 휘저으며 따라 부릅니다. 남자들은 압니다. 본능적으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지극히 성공지향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해서 바람둥이가 되고, 꿈을 꿔서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지만(영화의 결말과는 조금 다르게) 결국 다시 혼자가 됩니다. 그래서...?




4. 러브 어페어(An Affair to remember 1957, Love Affair 199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케리 그란트-데보라 카, 워렌 비티-아네트 베닝 두 번의 커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자고. - 자연스럽게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과 연결되는 전설적인 멜로 영화들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람둥이 남자가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자를 우연히 만나, '우리의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6개월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나오지 않고... 평생을 갈 것 같던 오해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아름답게 다시 태어납니다.

아마도 현대 관객들에게는 1994년판의 비티와 베닝이 더 취향에 맞겠지만, 그 원작의 아름다움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아, 물론 보진 못했지만 프랑스 영화인 진짜 오리지널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데보라 카가 불렀던 'Our Love Affair'를 조쉬 그로번이 부릅니다. 원곡을 알건 모르건, 이 목소리와 이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남자의 인생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듯 하지만 그 다음 영화는...?



5. 다이 하드(Die Hard, 198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절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랑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여자는 남자가 있는 뉴욕을 떠나 LA로 일하러 가버립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아내를 만나러 LA에 간 남자는 아내가 있는 건물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점거되는 광경을 목격하죠.

어쩌겠습니까. 아내를 구해야죠. 그런데 신기한 건 자신이 이런 상황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그가 어린 시절, '나홀로 집에' 있을 때 저질렀던 그 잔혹한 만행들을. 그 꼬마가 커서 이제는 힘과 경험, 총기 사용법까지 익혔으니 그저 상대 테러범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몇년 뒤, 공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홀로 집에'를 보지 못한 악당들은 너무도 가련하게 시체조차 찾기 힘든 죽음을 맞습니다. 또 다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몇 차례나 테러의 위협을 물리쳐 영웅이 된 남자는 정계로 진출합니다.



6.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유쾌했던 건 영국 총리가 된 휴 그랜트가 비서를 유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워킹 타이틀=휴 그랜트라고 불려도 좋을 만한 그의 명 연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테러를 진압하더니 갑자기 웬 영국 총리냐고 항의하시는 분들, 네. 그 분들을 위해 수정하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의 주인공, 미국 대통령 빌리 밥 손튼이 되어 영국 총리가 눈독 들이고 있던 비서에게 추근댑니다. 그 결과가 미국에 대항하는 영국의 자주 정책(?)으로 나타나죠. 뭐 어느 쪽이면 어떻습니까. 아무튼 정치를 하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총리 관저에서 '미국 대통령에 맞선 용감한 총리'라는 라디오 방송의 칭찬을 듣던 휴 그랜트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노래는 포인터 시스터즈의 올드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걸즈 얼라우드의 'Jump'.





7. 34번가의 기적  (Miracle on 34th Street 1947, 1973, 199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타클로스는 실제로 존재할까요? 영악한 아이들은 일찍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은 꽤 믿는 편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미국의 수많은 백화점들이며 각종 기구에서 '아르바이트 산타클로스'를 고용하죠. 할일없는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를 주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를 진짜 산타라고 믿는 소녀, 소녀를 위해 진짜 산타임을 고집하는 노인, 그러다 이 노인이 법적으로 자신이 산타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선의를 가진 어른들이 노인을 도우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세 편의 영화가 있지만 아무래도 우체국 두 남자의 장난(?)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오리지널 1947년판의 문제 해결 방식이 가장 유쾌하고 인상적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 대통령직(총리직...?)도 말아 먹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걸 반성하고 아르바이트 산타로서의 직무에 충실해집니다. 마지막에나마 세상에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말이죠.

이렇게 해서 이 남자의 인생에도 마지막으로 평화가 찾아옵니다.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10년에 한번 꼴로 인생이 변하는 남자라니. 하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만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기대해보시길.


728x90

요즘 한국 영화의 제목 짓는 기술이 영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과속스캔들'도 제목만 잘 지었다면 훨씬 더 히트했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데 이어 '달콤한 거짓말'도 어쩐지 이 너무나 평범한 제목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가장 핵심적인 정보는 '박진희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예고편은 박진희가 거짓말을 해서 여러 남자를 농락하는 여자인 양 그려져 있습니다. 상세한 줄거리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어쨌든, 제목의 '거짓말'과 상승작용을 하면서 뭔가 너무나 뻔한 영화인 듯한 느낌을 주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심한 영화 취급하기엔 '달콤한 거짓말'은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특히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중 가장 여주인공의 비중이 큰 영화의 주역을 맡은 박진희의 열연이 빛을 발하는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박진희는 그럴 자격이 있는 배우라는 걸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술버릇이 꽤 고약한데다 맡은 방송마다 조기종영하기 일쑤인 노처녀 방송작가 지호(박진희, 그래 봐야 스물아홉 서른 정도의 나이입니다)는 어릴 적부터 남자와는 낭만적인 첫 만남으로 한 눈에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릴 적 고교 1년 선배인 민우(이기우)에 대한 짝사랑이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아 있죠.

그런 그가 어느날 소매치기를 쫓아 달려가다 외제차에 부딪힙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 그리고 자신을 들이받은 차의 운전자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민우라는 걸 알게 됩니다. 물론 짝사랑이었으므로 민우는 지호를 절대 알아보지 못하죠. 민우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어 가기 위해 지호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자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기억상실증을 가장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통해 민우의 집에 들어앉게 된 지호는 우연히 민우의 이상형이 현모양처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갖은 내숭으로 민우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본색을 너무나 잘 아는 고교동창 동식(조한선)의 등장으로 지호의 사기극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까지 배경을 읽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게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많은 사건들이 대부분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 듯도 하지만, 설정을 잘 살펴 보면 어떻게든 아귀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민우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지호가 우연히 동식을 만나 위기를 맞곤 하는 것도 지나친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세 주인공이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고, 그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세 주인공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지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 은숙(최은주)이나 민우의 친구이자 옛날 은숙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한상(조진웅)이 모두 고교 동문이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추억의 공간이 모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한 동네이며 함께 소풍을 가곤 했던 동물원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죠. 아울러 양자강이라는 동네 중국집도 여전히 영업중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보시면 압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도 코미디 영화인 만큼 가끔씩 개연성의 벽을 슬쩍 넘으려 드는 '달콤한 거짓말'을 안정시키는 절대적인 요소는 박진희입니다. 한국 영화의 신화 중 하나인 '여고괴담' 첫편이 벌써 10년 전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만큼 빨리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 배우는 어느 감독이라도 욕심낼 만큼 탄탄한 연기력으로 자신을 관리해왔습니다. 쉽게 빠질 수도 있었던 '글래머 여배우'의 길과는 다른 성실한 노선을 걸어 온 거죠.

최근 들어 '돌아와요 순애씨'나 '쩐의 전쟁'같은 드라마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둬 왔지만 불행히도 스크린에서는 데뷔작 '여고괴담'만큼 주목받거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의 기대작 '궁녀'에서도 훌륭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본이 박진희의 열연을 묻어 버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번 '달콤한 거짓말'은 그야말로 박진희의 원맨쇼입니다. 관객들은 박진희가 가는 길로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두 남자 상대역은 아직까지는 '연기 멀었음'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젊은 배우들이죠. 이기우도 조한선도 키 크고 허우대 좋지만 한 사람의 배우로 평가받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진희의 분전은 정말 눈부십니다. 몸을 날려 차를 들이받는 건 기본이고, 코미디의 기본 요소인 순간적인 표정 변화와 적절한 망가짐이 이 배우가 일정 수위 이상의 내공을 확보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안타까움이 있다면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정도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남자 배우 중에는 조한선의 캐릭터가 좀 더 유리합니다. 그저 멋진 척만 하면 되는 이기우에 비해 조한선은 확실한 변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죠. 동식이란 인물은 뜯어 놓고 보면 복잡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말이나 찍찍 내뱉고 패션이라곤 트레이닝복이 제격인 껄렁한 '동네 형'의 분위기인데 의외로 착실한 살림꾼이고 마음 씀씀이도 깊은 데다 정도 깊습니다. 나름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동식에게 있어 최고의 장면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패러디 신입니다(역시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기준으로 조한선의 연기를 평가한다면... 한 75점 정도는 줘도 될 듯 합니다. 슬슬 이 친구에게도 배우의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콤한 거짓말'의 가장 큰 미덕은 코미디를 위해 배치한 사소한 요소들이 제몫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 큰 역이라고 볼 수 없는 지호 동생 역의 김동욱, PD 역의 김광규나 AD 역의 개그맨 정성호, 그리고 제법 중요한 역할인 양자강 맨 정재용은 큰 욕심 없이 자기 몫을 다 합니다. 모든 배우가 홈런을 치려고 달려들다 망하는 실패한 코미디 영화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입니다.

'달콤한 거짓말'을 전체적으로 봐도 이 영화는 '두 시간 이내에 최대한 웃긴다'는 코미디 영화의 미덕을 한껏 발휘한 작품입니다. 무슨 대단한 교훈을 주겠다는 야심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엔딩은 - 물론 무슨 반전이 있는 듯도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이죠 - 나름 따듯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실한 제목인 '달콤한 거짓말'에 비하면 훨씬 속이 알찬 영화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코미디의 수작이라는 말은 아깝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제목이 주는 거부감을 누르고 표를 살지에 달려 있다고 봐야겠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가장 박진희의 매력이 빛나는 장면은:
지호: 그럼 민우씨가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민우: 거짓말하는 사람이요.

p.s.2. 영화 도입부와 뒷부분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참 의이한 부분입니다. 만약 영화가 진행 순서대로 촬영됐다면, 정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s.3. 이승환의 '좋은날'이 나옵니다. 공식 주제곡은 리메이크 버전이지만 역시 원곡을 따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맛뵈기로 살짝 들어 보시길.







728x90
사람마다 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각양각색입니다. 주인공을 보고 고르는 사람(통계에 따르면 모든 조건 중에서 남자 주인공을 기준으로 고르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감독을 보고 고르는 사람, 또는 특정 제작사(예를 들자면 전성기의 골든 하베스트나 워킹 타이틀)의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 등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제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은, 실망하든 만족하든 '돈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어쨌든 보고 나서 말을 해야 하는' 감독에 속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이 그렇듯 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벼랑 위의 포뇨'가 18일 국내에서도 개봉됩니다. 2004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4년만이지만, '하울'은 원작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야자키의 오리지날 스토리로 된 작품은 2001년의 '센과 치히로의 모험' 이후 7년만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단 간단한 줄거리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다섯살 소년 소스케는 벼랑 위의 집에서 선장인 아버지 고이치, 양로원에서 일하는 엄마 리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바닷가에서 놀던 소스케는 사람의 얼굴을 한 빨간색 붕어 한마리를 발견하고, 포뇨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가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치히로가 성장한 듯한 씩씩한 엄마 리사)

하지만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는 인간 세상이 싫어 바다에서 살기로 결심한 마법사. 후지모토는 갖은 수단을 다해 포뇨를 바다로 다시 데려옵니다. 하지만 포뇨는 육지로 나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죠. 결국 포뇨는 수많은 동생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실험실에 침투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뇨의 아빠인 마법사 후지모토)

'벼랑 위의 포뇨'는 한폭의 예쁜 동화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은 작품입니다. 그만치 어린 관객들을 의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띕니다. 예쁜 화면, 너무나도 앙증맞고 귀여운 캐릭터, 동화적인 전개 방식과 일체의 비극이나 희생을 배제한 플롯 등등이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위한 맞춤형 작품으로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또 작품을 볼작시면 은근히 미야자키 선생이 뿌려 놓은 떡밥이 눈길을 끕니다. 그냥 그림만 보기에 심심한 어른 관객들을 위해 생각할 거리를 주자는 심산이겠죠. 뭐 당연히 이 작품의 포스터만 봐도 생각나는 '인어공주'나 '니모를 찾아서'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인어공주'의 막내 공주는 다리가 생긴 뒤에도 땅을 밟을 때마다 면도칼 위를 걷는 고통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포뇨는 착한 제작자를 만난 덕분에 아무 통증 없이 땅 위를 달립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신의 장녀(포뇨)를 브륀힐데라고 부릅니다. 딸이 브륀힐데 라면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동적으로 보탄(오딘)이 되고, 그 수많은 일본 명란젓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꼬마 동생들은 발퀴레가 되는 거죠. 네. '벼랑 위의 포뇨'와 '니벨룽의 반지' 사이에는 제법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뇨의 동생들, 왠지 다음 사진이 생각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의 명란젓 광고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


이런 관계에 대한 추정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생명의 물을 마신 포뇨가 거대한 물고기로 변한 동생들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수면을 향해 솟구칠 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유명한 '발퀴레의 기행'과 아주 흡사한 연주곡이 울려퍼집니다. 변주곡이라고 해야 할지도.

푸르트벵글러의 기악곡 버전 '발퀴레의 기행'입니다. 본래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중 2부에 해당하는 '발퀴레' 3막에 나오는 곡인데, 여기서는 발퀴레 역을 맡은 소프라노들의 목소리가 빠져 있습니다. 뭐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신 분이라면 너무나 귀에 익었을 곡이죠.



 
바그너의 장대한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근간이 되는 '니벨룽의 노래' 신화에 비쳐 보면 소스케 역시 지그프리트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죠. 브륀힐데는 아버지인 주신 보탄의 명을 어긴 죄로 봉인당하고, 난관을 돌파하고 그녀를 찾아올 만한 영웅을 만날 때까지 잠자는 신세가 되죠.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후지모토는 포뇨를 공기방울 안에 가둬 둘의 만남을 방해하지만, 결국 포뇨의 엄마인 바다의 여신의 뜻에 따라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듯 하여 색깔로 가려 놓겠습니다. 감수하고 보실 분이나, 이미 영화를 보신 분만 보시기 바랍니다. 마우스로 긁으면 글자가 보입니다.)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4부 제목은 '신들의 황혼'입니다. 이 '황혼'은 북구 신화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라그나로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를 일궈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신화에서 주인공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는 비극적인 운명을 마치고, 그것이 신화의 종결을 상징하지만 포뇨와 소스케는 행복한 결합을 통해, 바다의 힘으로 인간들의 문명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아버지 후지모토로부터 인류 문명을 보호합니다. 어쨌든 '인류 문명의 재개'를 뜻한다는 의미는 통한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란맘마레)

포뇨의 엄마 이름은 '그란맘마레'라고 되어 있죠. Grandmom와 프랑스어로 바다를 뜻하는 mare의 합성어입니다. '바다 할머니' 정도가 되겠군요. 대강 봐도 농경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서 숭상해온 대지의 여신(大母神, Magna Mater)의 해양판에 해당하는 바다의 여신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바다의 주신을 여신으로 설정한 신화는 그리 접해보지 못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소스케의 아빠 고이치가 탄 배의 선원들에겐 '관세음보살'로 보이죠.

어른 관객들에게는 소스케와 포뇨가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활짝 열려있는 진행형이긴 합니다만, 미야자키 선생은 두 어린아이가 기존의 주인공들처럼 어려움을 겪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듯 합니다.

아무튼 일본에서도 이 작품은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어린이들은 미칠듯이 좋아했지만 어른들은 '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뒤로 갈수록 너무나 단순해지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플롯 상의 문제들(대체 왜 소스케 엄마와 포뇨 엄마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밀담을 나눠야 하는지 등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돼기도 했다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저는 심심해서 해 본 짓이지만, 사실 '벼랑 위의 포뇨'같은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저런 신화와 연관을 지어 보는 건 상당히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스크린에 지나가는 곱고 귀여운 형상들을 보면서 가벼운 유머에 미소지으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혹시 옆에 앉아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이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요? '벼랑 위의 포뇨'에서 받을 만한 메시지라면 이미 수십년 전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의 토토로'에서 충분히 다 받지 않았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미야자키는 소스케 캐릭터에 대해 "아들 고로가 다섯살 때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 고로'가 바로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게드 전기'의 감독이죠.

주제가, 마냥 신납니다.^^ 정말 중독성 강합니다.









728x90
드디어 화제의 영화 '쌍화점'이 공개됐습니다. 예상을 뛰어 넘는 신체 노출과 자극적인 장면들이 일단 눈길을 끄는 가운데 보는 사람을 압박하는 긴장감에서는 일단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잘 봤지만, 자세한 리뷰는 일단 뒤로 미루겠습니다. 아직 개봉이 열흘 넘게 남은 터라.^^)

영화 '쌍화점'을 보면 막연히 이 이야기가 고려 공민왕 대의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과연 실제 역사와 얼마나 흡사한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과연 영화 '쌍화점'은 얼마나 실제 역사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거의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쌍화점'은 왕(주진모)이 자신이 사랑하는 건룡위 수장 홍림(조인성)에게 왕비(송지효)와 동침하라고 명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왕명을 따랐을 뿐인 홍림과 왕비는 점차 이성간의 사랑에 눈뜨고, 이들의 격정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공민왕은 1351년 왕위에 오릅니다. 실제로 긍정적인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왕입니다. 우선 강도(강화도)를 나와 원에 입조한 이후 고려의 왕은 조-종의 칭호를 쓰지 못하고 왕으로 강등된데다 반드시 몽고 공주들과 혼인을 해 부마가 되어야 했고, 왕호 앞에 반드시 '충'자를 넣게 되어 있었죠. 충숙왕, 충혜왕, 충선왕 등이 그 예입니다. 공민왕은 굴욕의 '충'자를 떼낼 수 있을 만큼 자주적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당 현종의 치세가 성군으로 꼽히던 전기와 당 멸망의 근거를 가져온 후기로 선명하게 갈리듯, 공민왕의 치세도 전기와 후기로 정확하게 갈립니다. 친원파 귀족들을 척살하고 북방 영토를 회복하며 홍건적을 물리치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였던 공민왕은 1365년, 금슬이 유달리 좋았던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고 이때부터 신돈이 권력을 쥐어 고려말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371년, 신돈 마저도 반역죄로 척살되고(드라마 '신돈'에서 보듯 기득권 귀족들의 반발이라는 설도 유력합니다), 세상 일에 흥미가 없어진 공민왕은 1372년 명문 자제들 중 용모가 아름다운 자들을 골라 자제위(子弟衛)를 궁안에 두게 됩니다. 이때부터 공민왕의 동성애설이 세상에 퍼지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쇼. 궁 안에 거주하는 남자는 본래 왕 하나뿐인게 정상입니다. 나머지 남자는 모두 내시들 뿐이죠. 그런데 궁녀와 후궁들이 득시글거리는 궁 안에 미남 청년들을 풀어놓았으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궁 안의 풍기가 문란해진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결국 자제위의 하나인 홍륜(洪倫)이 노국공주 사후 맞아들인 익비를 임신시킵니다. 내시 최만생이 이를 공민왕에게 밀고하자 공민왕은 대노하여 사실을 아는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고 입을 막으려 합니다. 이를 눈치챈 최만생은 오히려 홍륜과 결탁해 먼저 공민왕을 암살하죠. (일설에 따르면 동침 자체가 왕의 생각이었지만, 왕실의 안정을 위해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려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민왕은 이미 1363년 흥왕사에서 김용의 자객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었지만 내시 안도치가 대신 칼을 맞은 덕분에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운이 미치지 못했죠. 물론 왕을 살해한 자들도 사후 처리가 미숙했던 바람에 최영과 경복흥 등에 의해 모두 참살당하고 맙니다.

이상은 '고려사'의 기록입니다. 공민왕 사후 우왕-창왕-공양왕으로 세 왕이 더 왕위에 오르지만 사실상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고려조는 끝을 봅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사가들은 공민왕의 동성애나 신돈과의 어지러운 이야기 등은 모두 조선 왕조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건국 세력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아무튼 이쯤 되면 '쌍화점'의 중요한 스토리는 거의 대부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어찌 보면 홍륜을 홍림으로 바꿔 놓았을 뿐 역사와 거의 똑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홍륜과 공민왕의 로맨스 같은 것은 역사책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죠.

공민왕은 정치와 군사에도 훌륭한 자질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사극의 주인공이 될만한 자격을 갖춘 왕이죠. 그의 그림 천산대렵도는 이 영화에도 등장합니다. 물론 - 영화 속의 그림은 종이에 그려지지만 현재 남은 천산대렵도는 비단에 그려진 것이란 차이가 있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흥미로운 점은 현재 남은 천산대렵도가 길게 찢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그 그림이 대체 왜 찢어져 있는지도 아마 아시게 되겠죠. 그렇게 따지면 '쌍화점'은 실제 역사와 아귀를 맞추기 위해 대단히 많이 노력한 영화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쌍화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쩐지 '쌍화점'의 이야기는 아서 왕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위대한 왕인 아서는 왕비 기네비어가 자신의 오른팔인 랜슬로트와 사랑에 빠지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질투로 타락해갑니다. 그리고 위 장면은 뭔가 이 스토리와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 아서와 랜슬롯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걸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럼 혹시 '달콤한 인생'의 강사장과 김실장도...? ^^





728x90
좋은 재료를 다 넣어 봅니다. 최고급 꽃등심에 싱싱한 전복, 참치 뱃살과 캐나다산 바닷가재를 전부 한 남비에 넣었습니다. 각각 먹어도 맛있는 재료들이니 한꺼번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최고의 요리가 나올까요? 불행히도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트로픽 썬더'의 진용은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벤 스틸러가 연기파로 변신하려는 액션 스타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를 위해선 성형수술도 불사하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잭 블랙이 진지한 연기파로 변신하려는 악동 코미디언으로 나옵니다. 여기에 톰 크루즈, 닉 놀테, 매튜 매커너히가 조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가 과연 재미 없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를 따진다는게 별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아래 내용 중에 스포일러가 있다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이 영화의 예고편에도 다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래도 꺼려지시는 분은 여기서 멈추시는게 좋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막이 오르면 서너개의 예고편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극중 스타들의 주요 경력이 지나가는 거죠. 터크 스피드맨(벤 스틸러)은 5편까지 속편이 나온 액션 영웅 시리즈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지만 최근 하락세인 액션 스타입니다. 아카데미상을 노리고 발달장애 연기에 도전한 '바보 잭(Simple Jack)'역시 엄청난 혹평을 듣죠.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이번엔 월남전 당시의 실화를 다룬 대작 영화 '트로픽 썬더'로 재기를 노립니다.

'트로픽 썬더'는 월남전 영웅 포리프 테이벡(닉 놀테)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스피드맨은 포리프 역을 맡고, 상대역인 흑인 오시리스 역으로 아카데미상 5회 수상을 자랑하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 커크 라자러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기용합니다. '한번 어떤 역할을 맡으면 DVD의 코멘터리를 녹음할 때까지 그 역할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라자러스는 흑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피부색을 바꾸는 수술까지 감행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에 뚱뚱이 가족 코미디로 인기를 끈 악동 배우 제프 포트노이(잭 블랙), 마초 이미지의 흑인 래퍼 겸 배우 알파 치노(알 파치노가 아닙니다^^, 브랜든 T 잭슨), 신인급 배우 케빈 선더스키(제이 버루철)이 합류합니다.

하지만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한 이들 톱스타들은 젊은 영국인 감독 콕번(스티브 쿠건)으로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게 곧 드러납니다. 당장 영화사 사장인 레스 그로스맨(톰 크루즈)에게 끌려가 혼쭐이 나는 콕번에게 원작자 포리프는 약간 정신나간 아이디어를 줍니다. "엉망진창인 배우들을 위험한 실제 정글에 내던지고, 곳곳에 설치된 몰래 카메라를 동원해 영화로 만들라"는 것이죠. 하지만 베트남 정글 속에 수없이 남은 지뢰, 마약밀매집단의 게릴라, 정글 속의 지독한 날씨가 개입되면서 영화는 이들이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 이 정도까지 소개해도 영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기대가 만발합니다. 정말 기발한 설정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만족한 관객들은 많이 잡아야 20%, 냉정하게 보면 10%를 넘지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한국과 미국식 코미디의 온도 차이입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코미디는 (1) 바보 흉내로 웃기려는 코미디, (2) 넘어지는 걸로 웃기는 코미디가 되었습니다. 영구 심형래와 맹구 이창훈 이후 바보 흉내로 성공한 코미디언이 없다는 게 방증입니다. '개그 콘서트'의 박준형이나 김대희가 살짝 시도를 했지만 그건 전체 코미디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 성공적이지도 않았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덤 앤 더머'류의 코미디가 상당히 중요한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벤 스틸러의 특기인 화장실 유머가 결합되면 할리우드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물론 이 계열의 코미디로 한국에서도 패럴리 형제와 벤 스틸러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가 꽤 히트한 적이 있죠. (사실 저는 이 영화가 전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똥으로 웃기는 코미디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영화 초반에 잭 블랙이 보여주는 1인 6역(7역인가요?)의 코미디 역시 한국인의 유머감각에는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너티 프로페서' 역시 한국에선 그리 히트하지 못했죠. 이 영화의 '필살기'라고 여겨지는 톰 크루즈의 엉덩이 춤 역시 '분장하는데 꽤 애썼구나' 이상의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웃음 포인트를 생각하면 장동건이 대머리 분장을 하고 나와서 춤을 춰도, '...애 썼다' 이상의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다가 '트로픽 썬더'류의 영화에서 배우들이 따발총처럼 쏴대는 욕설과 풍자를 몇 줄의 자막으로 옮겨놓는다는 건 대단한 무리입니다. 배우들이 한 줄 정도로 읊어대는 문장도 그 배경과 왜 웃기는지의 포인트를 설명하려면 세 줄, 네 줄이 넘어가야 할테니까요.

또 미국 관객들에겐 백인 배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흑인으로 변신해 사용하는 '흑인 영어', 그리고 백인이 흑인 흉내를 내는 것이 불만인 알파 치노 역의 브랜든 T 잭슨과 벌이는 실랑이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 한국 관객(물론 저 포함입니다)에겐 똑같이 영어 쓰는 놈들끼리 쑈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관객들을 위해 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벤 스틸러가 잇달아 시도하는 '플래툰' '람보2'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패러디 정도입니다. 잭 블랙은 이 영화에서 전혀 코미디를 주도하지 못하고, 그냥 짜증 내는 뚱보 역일 뿐입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전혀 웃지 않는 표정으로 로버트 드 니로나 말론 브란도를 형상화한 듯한 '약간 미친 듯한 연기파 배우'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영화광이 아니라면 전혀 먹히지 않을 코미디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트로픽 썬더'는 한마디로 코미디에 대단히 관대한 미국 관객들을 위한, A급 배우들이 B급을 표방하고 만든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내수에 초점을 기울이다 보니 수출용 상품으로서의 매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죠. 미국에서 8월13일 처음 공개돼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한 영화가 한국에선 12월11일에서야 개봉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나 유학, 사업을 앞두고 자신이 얼마나 미국식 정서에 적응했는지를 테스트해 볼 분이라면 적극 추천합니다. 단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스쿨 오브 락' - '아이언 맨'을 재미있게 봤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하시는 분이라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단단한 각오란, 아무런 기대 없이, 마음을 비우는 걸 말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닉 놀테와 매튜 매커너히는 오히려 꽤 웃깁니다.




728x90

윌 스미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올드보이'를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어이없어 할만한 얘기였죠.

'올드보이'가 담고 있는 어둡고 음침하며 염세적인 분위기가 윌 스미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와 과연 어울리기나 한단 말입니까. 윌 스미스가 가발 쓰고 성형수술 하고 특수분장이라도 해서 최민식의 얼굴이 된다는 것 만큼이나 어이없는 얘기라서 많은 국내외 팬들은(국외에도 '올드보이' 마니아들은 많습니다)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그동안 언급을 하지 않던 윌 스미스가 모든 사람을 안심하게 할만한 대답을 내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올드보이'는 '올드보이'인데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아니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Film School Rejects라는 한 영화 전문 웹진은 21일, 브라이언 깁슨이라는 필진의 글을 통해 윌 스미스가 자신의 '올드보이'는 박찬욱의 영화를 번안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런 건 전문을 보셔야 직성이 풀릴 겁니다.

제목: 윌 스미스는 올드보이가 박찬욱 영화의 번안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윌 스미스의 '7 파운드(Seven Pounds)'의 레드 카핏 시사회에서 막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이미 두 번이나 오스카 후보로 노미네이트됐던 이 스타는 벌써부터 오스카 관련 소문이 돌고 있는 이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시사회 투어 중이다. 레드 카핏 시사회 풍경은 나중에 다른 글로 전하겠지만, 나는 스미스를 멈춰 세우고 몇가지 질문을 던진 뒤 함께 낄낄거리고 웃을 기회가 있었는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게 있어 가장 궁금한 소식은 그가 스필버그의 '올드보이' 판권 획득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였고, 스미스는 이 뉴스에 대해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이 소식을 거의 2주 전에 보도했지만, 그 사이 스미스가 내게 얘기해 줄만한 큰 발전이 있었다. 팬들은 벌써부터 이 리메이크와 스미스의 주연설에 대해 탐탁찮은 얘기들을 주고받아 왔다. 글쎄, 그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스필버그의 '올드보이'에 출연한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스미스는 그가 박찬욱의 2003년작 영화를 번안한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강조했다. 그럼 대체 어떤 영화일까?

"우리는 지금 그 작업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영화 '올드보이'의 번안은 아니다. 우리의 영화는 바로 '원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 역할을 한 만화 말이다. 영화의 번안이 아니다" 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분명히 스필버그는 영화 '올드보이'가 아니라 원작 만화 '올드보이'의 판권을 구입한 것이다. 아마도 다음 질문은 "대체 그게 무슨 의미야?"라는 것일게다. 팬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무도 미국 관객들을 위해 (박찬욱의 영화보다) 더 나은 '올드보이'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스필버그가 원작 만화를 각색하려는 것이지 박찬욱의 걸작이 갖고 있는 뛰어난 점을 베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건 또 스필버그의 작품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것임을 뜻하지만, 사실 원작 만화와 박찬욱의 영화도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들어올 때까지 관심을 기울이시길.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까 스미스와 스필버그는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이 됐던 일본 만화의 판권을 구입해 그걸 원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얘깁니다. 미네기시-쓰치야의 만화 '올드보이'를 영화화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죠.

기사 원문입니다.

FSR Exclusive
Will Smith Says Oldboy Won’t be Adaptation of Chan-wook Park’s Film
Posted by Brian C. Gibson (
brian@filmschoolrejects.com) on November 21, 2008

I just came home from a red carpet premier of Will Smith’s film Seven Pounds. The star is on a tour of premiers promoting the film which is starting to create some major Oscar buzz for the already twice-nominated superstar. I’ll have a full red carpet report later, but first, I was able to stop Smith for a few questions, and a couple laughs. One of the hottest topics for me is Smith’s involvement in Steven Spielberg’s acquisition of the rights for Oldboy, and the actor didn’t disappoint on the news front.

We reported on this news almost two weeks ago, but there is a big development from what the star was able to tell me. Fans have already made themselves heard about their distaste for Oldboy being remade and Smith being the man rumored to take the lead. Well, we heard it straight from the star’s mouth that he is definitely starring in Steven Spielberg’s Oldboy…with a twist. Smith wanted to make a very strong point that this is not an adaptation of Chan-wook Park’s 2003 film. So what is it an adaptation of?

"We’re looking at that right now. Not the film though, it’s the original source material. There’s the original comics of ‘Oldboy’ that they made the first film from. And that’s what we’re working from, not an adaptation of the film…,” said Smith.

Apparently Spielberg wasn’t acquiring the rights to the film Oldboy, he was acquiring the rights to the original source material of the graphic novel ‘Oldboy.’ I guess the next question would be - what does this mean? This means that fans can rest a bit easier knowing that no one is trying to make a better Oldboy for an American audience. This means that Spielberg is free to truly adapt the source material and not try and copycat the brilliance of Park’s masterpiece. This also means that it will likely be an entirely different film, however, but the graphic novel is still very close to Park’s movie. So stay tuned as more details come in.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기자가 쓴 글은 아닙니다.^^ 저 FSR이라는 사이트의 성격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블로그와 웹진의 중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도 필진이 10여명이나 되는 제법 큰 사이트로군요. 아무튼 저 글을 받아 쓴 뉴스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들의 논조는 거의 다 일치합니다. '다행이다. 좋은 영화 하나 망치나 걱정했는데. 스필버그, 잘 생각했다.'

그만큼 영화 마니아들이 '올드보이'를 높이 평가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을 걱정한 겁니다. 리메이크설이 한창일 때 해외 네티즌 반응 중에 이런 게 있더군요.

올드보이는 걸작이야. 너 바보구나. 예를 들어서, 스필버그가 만들고 윌 스미스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근친상간 얘기가 다뤄질 리가 없잖아! 스필버그는 아마 망치를 워키토키로 바꿔 버릴 거야.

Oldboy is a classic, you are a moron..For one...a movie made by Speilberg and Starring Will Smith..isnt' going to be about incest...Is Spileberg will change the hammer to a walkie-talki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이 장면의 망치...;;;

물론 원작 만화와 영화 '올드보이'가 아주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 좀 걱정이긴 하지만(어쨌든 '올드보이'의 핵심인 15년간의 감금생활 같은 건 그대로 남겠죠), 만화에 등장하지 않는 박찬욱판 '올드보이'의 특징들은 스필버그의 영화에서는 제외될 거란 얘깁니다. 어찌 보면 스필버그와 박찬욱의 '올드보이' 각색 대결이 되겠군요. 은근히 '내 작품 망가질까봐' 걱정하셨다는 박찬욱 감독님(전해 들은 얘깁니다), 이젠 마음 편히 보셔도 될 듯 합니다.

혹시 "뭐야, 그럼 한국영화의 수출이 아닌 거야?"라고 실망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스필버그가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한다면 제대로 만들 리가 없잖습니까. (대체 어떤 괴작을 만들지 궁금하기도하지만) 그렇게 만들려면 안 만드는게 낫겠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미국에서 시사중이라는 '7파운드'는 윌 스미스가 일곱 사람의 인생을 바꿀 운명을 갖고 있는 세무서 직원으로 출연하는 영화라고 합니다. 로자리오 도슨, 우디 해럴슨과 함께 13세 소년 코너 크루즈가 윌 스미스의 아역으로 출연한다는군요.

성이 크루즈라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입양한 흑인 소년입니다. 윌 스미스가 일찌감치 자기 역으로 찍었다는 후문이니 나중에 배우로 대성할지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제 29회 청룡영화상이 20일 개최됩니다. 물론 경쟁 매체의 행사지만 이 정도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건 다 접어 둔다 해도, 여자 MC가 김혜수라는 것만으로도 다른 행사보다는 30점 정도 가산점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시상식의 규모나 수준에서 볼 때 한국 영화 시상식 중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의 수고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올해는 이 불황의 그늘이 영 어둡긴 하지만 그래도 시상식이 가까워지고, 후보들이 발표되면 누가 상을 받을지에 관심이 몰리기 마련입니다. 과연 올해는 누가 트로피를 안고, 누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룡영화상 수상자는 시상식 직전에나 결정되는게 관례이니 아직 모든 후보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게 좋겠지만, 이럴 때 밖에서 수상자를 점쳐 보는게 국외자들의 재미죠. 그래서 이번엔 하루 전인 19일, 순전히 재미로 수상자를 한번 찍어 보겠습니다.

물론 저라고 무슨 특별한 정보를 갖고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냥 관객의 입장과, 다년간 이 영화제를 지켜봐 온 경험으로 찍을 뿐입니다.^^ 나중에 진짜 결과가 나왔을 때 너무 많이 틀렸다고 타박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사진은 청룡영화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겁니다. 한줄씩 가져오느라 좀 길어졌습니다. 혹시 깨진 글자가 거슬리는 분들은 사진을 클릭하면 크고 선명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품상. 사실 시상식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할 부분이지만 작품상이 맨 위에 올라와 있군요. 이제 와서 다시 순서를 바꾸기도 귀찮으니 그냥 이 부문부터 생각해 보렵니다.

소거법을 써서 일단 먼 후보부터 제외하면서 줄여 보겠습니다. 우선 개봉 시기가 먼 작품들은 수상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세븐 데이즈'와 '우생순'은 그런 의미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 것 같습니다. '추격자'도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이미 대상을 수상했으므로 좀 뒤쳐지는게 정상인데 올해는 좀 상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남는 작품이 '놈놈놈'과 '크로싱'인데, 두 작품 모두 정상적인 경우의 수상작들과 좀 거리가 있기 때문이죠. 특히 '놈놈놈'이 작품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좀 힘듭니다. 돈을 건다면 '놈놈놈'에 20, '추격자'와 '크로싱'에 40씩을 걸겠습니다. 딱 한편만 찍으라면... 고민 끝에 '추격자'.

(사실 어느 해나 이변은 있기 마련입니다. 개인적으론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살인의 추억'을 제치고 청룡 작품상을 받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 틀렸을 때를 대비한 탈출로 확보 차원. ^^;;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상. 일단 나홍진 감독이 신인감독상 부문으로 빠진 게 변수입니다. 올해의 경우 감독상은 작품상 부문의 2위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에 좀 복잡합니다.

아무래도 작품상은 아니더라도, '놈놈놈'을 완전히 외면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다른 후보들과 비교해 볼 때 '놈놈놈'의 화사한 화면이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김지운 감독을 찍겠습니다.^ 어떤 경우든, 올해 작품상과 감독상을 한 작품이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우주연상. 후보가 여섯이 된 데서 주최측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추격자'에서 김윤석과 하정우, '놈놈놈'에서 송강호와 이병헌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정우성은...).

이런 점에 역점을 두고 볼 때 일단 김주혁과 설경구의 수상 가능성은 떨어진다 보겠습니다. 근접성의 원칙에 따르자면 아무래도 '놈놈놈'이, 연기의 밀도로 보면 '추격자' 쪽에 자연스럽게 점수를 주게 됩니다.

후보를 먼저 줄여 보면 '놈놈놈'에서는 송강호, '추격자'에서는 김윤석이 한발 앞서 있다고 봐야겠죠. 양쪽 모두 수상해야 할 이유에서는 백중세. 하지만 송강호가 지난해 드디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아 한풀이를 했다는 점에 눈길이 갑니다. 결론은 조심스럽게 김윤석.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우주연상. 일반적인 시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연기를 뽑자면 단박에 공효진과 수애가 눈에 들어옵니다. 김윤진과 문소리는 근접성이 떨어지고, 손예진도 연기만 놓고 보면 훌륭하지만 '아내가 결혼했다'는 전통적으로 청룡상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닙니다.

작품의 규모로 보면 수애가 유력하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청룡영화상의 연기상 부문은 가끔씩 의외의 선택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2004년 '아는 여자'의 이나영같은 깜짝 수상이 이뤄질 때가 있어서 대단한 백중세로 예상합니다. 아무튼 공효진 수애 둘 중에서 굳이 찍으라면 수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우조연상. 엄태웅과 임원희를 일단 제일 먼저 빼겠습니다. 정경호도 아직까지는 후보에 오른 걸 영광으로 여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1감으로는 '영화는 영화다'에서 감독 역을 기가 막히게 뽑아 낸 고창석이지만, 시상식이 원하는 '얼굴'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죠. 그래서 박희순이 살짝 유리해 보입니다. 청룡상이 이제껏 유지했던 '시상을 통한 스타의 발굴'이라는 관점에서도 박희순에게 표를 던지고 싶어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우조연상. 여기서도 우선 김미숙과 박시연은 피하게 됩니다. 나머지 세 사람 중 사실 김해숙은 반칙입니다. '무방비도시'의 진짜 주인공은 손예진이나 김명민이 아니라 김해숙이기 때문입니다. 주연상 후보로 올라가야 마땅한 배우가 조연상에 들어 있다는 건...^

아무튼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김지영과 김해숙, 서영희 중 누가 수상자가 되어도 이유는 충분합니다. 심사위원들이 무엇을 중요시하느냐에 달렸죠. 일단 '영화상'의 순결성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영화배우'의 이미지가 강한 서영희에게 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유동근이 한때 남우조연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이미 중견 배우이던 장동건이나 배용준도 영화배우로서 신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조연상은 영화계를 오래 지킬 새로운 얼굴에게 주는 게 보통입니다. 서영희 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자 신인상. 아마도 가장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분야일 겁니다. 이 영화상이 장동건과 배용준에게 준 상이 이번엔 소지섭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명도 뿐만 아니라 연기로도 이제는 인정해줄만 하다고 봅니다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자 신인상. '거물'과 '진짜 신인'의 싸움이군요. 한예슬에겐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수상이 약간 부담이 될 것이고, 서우와 황우슬혜는 같은 작품에서의 경쟁이 감점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수상자들을 고려해 볼 때 한예슬과 황우슬혜로 과감하게 압축. 근접성의 원칙에서 황우슬혜에게 조금 더 점수를 주는게 그리 부당한 건 아닐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인감독상. 사실 소지섭보다 조금 더 쉬운 예측이겠죠. '영화는 영화다'와 '미쓰 홍당무'의 높은 완성도가 안타깝지만, 나홍진 감독이 감독상 후보에서 빠진 이상 신인감독상을 다른 사람이 받는 건 정말 이변 중의 이변일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상 주요 부문을 예측해 봤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예측일 뿐입니다. 설마 심사위원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실 분은 안 계시겠죠.^^ 혹시 이 글에서 본인이 수상자가 아니었다고 해서 시상식을 불참하거나 하는 분들도 없길 바랍니다. 이거 그냥 장난이라니까요.

여러분도 같이 찍어 보셨습니까? 그럼 진짜 수상 결과를 기다려 보겠습니다.





728x90

지난번 '퀀텀 오브 솔러스' 리뷰를 쓸 때 제목을 '로저 무어가 그립다'고 달았는데, 이 탄식이 멀리 영국에까지 들린 모양입니다. 로저 무어 경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씀 하셨군요. "본드 무비가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해 슬프다(I'm sad that it has turned so violent)."

사실 그런데 인터뷰 내용을 읽다 보니 아직 '퀀텀 오브 솔러스'를 안 보셨다고 합니다. 뭐 '카지노 로열'은 보신 모양이니 그 톤은 대략 알고 있다는 뜻이겠죠. 아, 그리고 제목에 낚여서 '퀀텀'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내막은 지난 4일 발간된 본인의 자서전 얘기더군요.

아무튼 꽤 흥미로워서 본문을 옮깁니다.

당연히 녹색 부분은 제가 덧붙인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목: 로저 무어는 보다 폭력적인 본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Roger Moore dislikes the more violent Bond movie)

현대 관객들은 왕년에 로저 무어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007 역을 맡았던 시대와는 달리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잔혹한 장면을 기대한다. 최소한 로저 무어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그 역할을 해서 행복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그토록 폭력적이 된 걸 보니 슬프더군요." 무어는 북미지역에서 금요일 개봉하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어둠의 007로 나오는 '퀀텀 오브 솔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게 시대와 보조를 맞춘다는 거죠. 그게 바로 영화 관객들이 원하는 것일테고, 박스 오피스 수치로 드러났잖습니까." 무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내 말이 곧 내 본드(My Word is My Bond)"라는 자신의 회고록에 대해 말했다. (11월4일 출간됐군요. 알고 보니 인터뷰는 책 광고!)

런던에서 10월31일 개봉한 '퀀텀'은 2500만 달러의 흥행으로 영국의 주말 박스 오피스 기록을 깼다. 전 세계에서는 1억6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81세의 무어는 지난 1985년 자신의 7번째이자 마지막 007 작품인 '뷰 투 어 킬(A View to a Kill)'을 촬영할 때 폭력 신에 진저리를 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본드답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저서에서 무어는 자신이 10대 시절 BB탄으로 한 친구의 다리를 맞힌 이래로 총을 싫어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때에는 본드가 좀 더 터프해지길 원했던 가이 해밀턴 감독이 본드가 정보를 얻기 위해 본드걸 모드 아담스의 팔을 꺾으며 부러뜨린다고 협박하는 장면을 연기하게 했다. 무어는 "그런 종류의 캐릭터 설정은 나하고는 영 맞지 않았다. 하지만 가이는 내가 연기하는 본드가 좀 더 무자비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썼다.

"나는 '내 스타일의 본드'는 그녀를 먼저 침대에 데려감으로써 정보를 빼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의했다. 내 스타일의 본드는 연인이고, 익살을 떠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나는 결국 가이에게 동의했다." (물론, 이 팔 꺾는 장면도 '침대'에서 이뤄지죠.^^)

무어는 아직 '퀀텀 오브 솔러스'를 보지 않았지만, '카지노 로열'을 근거로 짐작할 때 이 영화 역시 북미 지역에서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니엘은 본드 영화를 한 편 찍었고, '뮌헨'에도 출연했다. 여러 가지 역할을 했지만, 본드 영화를 한 편 찍은 뒤에는 그가 원하는 것 모두가 그의 얼굴에 담겨 있다. 그가 바로 본드다."

배우 인생을 통해 본드 역이나 TV 시리즈 '세인트', 혹은 토니 커티스와 공연한 '전격대작전(Persuaders)'에서의 역할에 의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데 대해 무어는 "나는 아마도 위대한 리어 왕 역이나 햄릿 역의 배우들 중 하나로 기억되기를 바랐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나는 본드 역을 맡은 덕분에 대단히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 전격대작전이 뭐지? 하는 분들을 위한 참고 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비망록은 비비안 리, 메이 웨스트, 라나 터너 등 그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스타들과의 일화로 가득하다. 그는 또 '뷰 투 어 킬' 을 촬영하다가 그레이스 존스와 사이가 벌어진 사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녀가 듣는 시끄러운 음악에 질린 그가 그녀의 오디오 전원을 빼 버리고 벽에다 의자를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뭐 원래 터프하셨군요.)

런던 남부 지역 경찰관의 독자로 태어난 무어는 2차 대전 이전의 성장 과정과 전쟁 중의 생활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시골로 피난 갔다가 공습을 당한 사연, 또 태어나 첫 직업으로 만화영화 제작사에 취직했다가 해고당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징집됐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그는 연합군 점령하의 독일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제대할 때 그는 육군의 연예병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쇼 비즈니스계 입문이었고, 이 무렵 그는 영국 가수 도로시 스콰이어스와 결혼했다.

"자네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야. 그러니까 (무대에) 들어설 때 활짝 웃으라고!" 그가 처음 무대에 설 때 레퍼토리 시어터(전속 극단이 있는 극장을 의미함)의 매니저가 한 말이다. 사실 이 말도 프로 스케이트 선수 출신인 첫 아내가 한 말보다는 훨씬 나았다.

"당신은 결코 배우가 될 수 없어. 얼굴이 너무 떨어져. 턱은 너무 크고, 입이 너무 작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충격적인 코멘트의 주인공이자 둔 반 스텐(Doorn Van Steyn)과 로저 무어. 정말 보송보송합니다. 디카프리오처럼 보이기도 하는군요.


원문입니다. 보러 가시기 귀찮은 분들도 있을테니. (오역 지적 환영)

Roger Moore dislikes the more violent James Bond
Tuesday November 11 12:45 PM ET
http://movies.yahoo.com/mv/news/va/20081111/122643635200.html

Movie audiences nowadays expect scenes of graphic violence in James Bond movies, unlike when Roger Moore played the super spy with a tongue-in-cheek humor, the actor believes. "I am happy to have done it, but I'm sad that it has turned so violent," Moore said before "Quantum of Solace," starring Daniel Craig as a darker Agent 007, opens in North America on Friday.

"That's keeping up with the times, it's what cinema-goers seem to want and it's proved by the box-office figures," Moore told Reuters in an interview about his memoir, "My Word is My Bond." The new Bond film opened in London on Oct 31, breaking the British weekend box-office record with a gross of $25 million. It has taken in more than $106 million worldwide so far.

Moore, 81, recalled being appalled at the violence in "A View to a Kill," the 1985 movie which was the last of the seven in which he played Bond. "That wasn't Bond," he said. In his book, Moore writes of his distaste for guns, ever since he was shot in the leg by a friend with a BB gun as a teenager.

While making "The Man With the Golden Gun," director Guy Hamilton wanted Bond to be tougher and had him threaten to break Maud Adams' character's arm to get information, he writes. "That sort of characterization didn't sit well with me, but Guy was keen to make my Bond a little more ruthle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I suggested my Bond would have charmed the information out of her by bedding her first. My Bond was a lover and a giggler, but I went along with Guy," the British actor wrote. Moore has not yet seen "Quantum of Solace," but based on Craig's first Bond film, "Casino Royale," believes it will be a success in North America too.

"Daniel has done one Bond and he was in 'Munich' and ... he's done a lot of stuff, but his face, after one Bond film, that's all he needs. He is Bond."

Asked about his own legacy as an actor known mostly for playing Bond and in TV series such as "The Saint," and "The Persuaders," with Tony Curtis, Moore said: "I would love to be remembered as one of the greatest Lears or Hamlets. But as that's not going to happen I'm quite happy I did Bond." His memoir is full of anecdotes about Hollywood and the stars he worked with such as Vivien Leigh, Mae West and Lana Turner. He also tells of his bust-up with Grace Jones during the filming of "A View to a Kill," when he forcibly pulled the plug on her stereo and flung a chair against the wall because she was playing loud rock music.

The only child of a south London policeman, Moore also writes about growing up before and during World War Two, of evacuation to the country and air raids and getting -- and being fired from -- his first job with a cartoon film company. By the time he was called up, the war was over, but he served as an officer in Allied occupied Germany, where he ended up in the Army's entertainment regiment. That was his entree into show business, along with his marriage to British singer Dorothy Squires.

"You're not that good, so smile a lot when you come on!" his first repertory theater manager told him. His first wife, who was a professional ice skater, was no less encouraging: "You'll never be an actor, your face is too weak, your jaw is too big and your mouth's too small."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저 경, 1927년 생이고 젊은 날을 온갖 고생으로 보낸 뜻에 '세인트'로 스타덤에 오릅니다. 하지만 '세인트' 때문에 007 역을 션 코너리에게 넘겨주고, 결국 1972년에서야 제 3대 본드로 취임합니다. 이후 7편의 007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죠.

로저 무어의 본드와 션 코너리의 본드는 섹시하고 유머러스하다는 면에서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각론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입니다. 코너리의 본드가 가끔 야비하고 잔혹하게까지 보이는 냉철함을 깔고 있는 반면 무어는 철저하게 느끼할 정도로 유들유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무기로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미 본드 역을 맡을 때 45세였던 무어에게는 이언 플레밍의 007이 요구하는 액션을 소화하기엔 무리여서 '결국 지나치게 특수장비에 의존하며 007의 순수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세인트'나 '전격대작전'을 봤다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본래 무어와 액션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어의 본드는 사이먼 템플러(세인트)나 싱클레어 경(전격대작전)과 사실상 똑같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인트 시절의 모습입니다. 007이나 세인트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분의 본드 무비 가운데 최악은 아마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일 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문 레이커'죠. 역시 '정통' 007 팬들은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한때 007 팬 사이트에서 '최고의 007 영화' 1위에 뽑히기도 했죠. 취향이 워낙 엇갈리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겁니다.

아무튼 제게는 이 분이야말로 최고의 007입니다. 물론 코너리 옹이 멋지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이 분의 능글능글함을 당할 사람이 앞으로도 누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혹시 조지 클루니?) 가장 멋진 본드걸도 이 분 시절에 나왔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 유어 아이즈 온리'의 캐롤 부케입니다.

작품 목록은 하나 있어야겠죠?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 1973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74
나를 사랑한 스파이 The Spy Who Loved Me 1977
문레이커 Moonraker 1979
포 유어 아이즈 온리 For Your Eyes Only 1981
옥토퍼시 Octopussy 1983
뷰투어킬 A View to a Kill 1985

기회 되시면 책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 그리고 '퀀텀 오브 솔러스' 리뷰입니다.




728x90
영화는 '카지노 로열'이 끝난 뒤 약 30분 뒤의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베스퍼 그린의 죽음 뒤에 감춰진 베일 속 인물 미스터 화이트를 체포해 달아다는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그의 부하들과 숨가쁜 카 액션을 펼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문제의 조직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훨씬 강력하며, 훨씬 정교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손 대는 것마다 모두 죽여버리는 죽음의 천사 본드가 날아간 곳은 아이티. 여기서 본드는 친환경 기업 경영자로 포장된 악당 도미닉 그린(마티유 아말릭)과 복수를 위해 그에게 접근한 카밀(올가 쿠릴렌코)을 만나게 됩니다. 본드는 그린을 뒤쫓지만, 그린은 이미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유력한 조력자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 그에게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 내려오지만 본드가 그런 사소한 명령 따위에 얽매일 리가 없겠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서야 거대 조직의 이름이 '퀀텀 오브 솔러스'라는 걸 가르쳐 주는 이 작품은 매우 이색적인 본드 영화입니다. 21편 혹은 22편에 달하는(23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죠) 007 시리즈 전편 중에서 앞 편의 내용에서 그대로 이어 시작하는 경우는 이 영화 한편밖에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새로운 007로 등장했을 때만 해도 온 세상이 반대자들로 떠들썩했지만 그가 주연한 '카지노 로열'이 흥행에서 대성공을 기록하면서, 반대의 소리는 쑥 들어갔습니다. 어떤 본드 팬들은 다니엘 크레이그와 '카지노 로열'의 방향이 이언 플레밍과 초기 본드 영화의 근원에 다가간 것이라며 옹호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옛날 블로그에서 오래 전에 펼쳐졌던 그 본드 논란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런 얘기가 - 제임스 본드가 왜 제이슨 본을 추종하고 있느냐는 주장을 비롯해서 - 전혀 새롭지 않을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크레이그-본드의 2탄, '퀀텀 오브 솔러스'는 액션 영화로서 매우 훌륭합니다. 액션이 좀 지나치게 정신없긴 하지만, 액션에서 액션으로 건너 뛰는 솜씨는 매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 자주 권총도 아닌 주먹다짐이 등장하는 점을 포함해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가 왠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준다는(굳이 제이슨 본을 다시 들먹이지는 않겠습니다)게 좀 아쉬울 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 더 두드러진 단점도 있습니다. 두 명의 본드걸이 출연하지만, 예전의 본드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합니다. 특히 본드와 하룻밤을 보낸 뒤 '골드핑거'의 오마주 신에 등장하는 처지가 되고 마는 영국 배우 젬마 아터튼은 여러 모로 실망스럽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메인 본드걸이라고 할 수 있는 올가 쿠릴렌코 역시 영화 속에서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복수에 눈이 먼 아이큐 25짜리 캐릭터를 원망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이 영화에서 쿠릴렌코가 연기하는 카밀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본드가 너무 빨리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거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는 106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러닝타임이 그렇게 짧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그리 탄탄하지 않은 플롯을 감안할 때 러닝타임을 줄인 제작진의 과감한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여전히 저는 크레이그가 주도하는 새로운 본드 시리즈에 적대적입니다. 아마도 지금껏 로저 무어가 최고의 본드라고 생각하고, 로저 무어 시절에 성장해 다 큰 뒤에 션 코너리의 본드 영화들을 역사책 보듯 본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레이그 옹호자들은 크레이그의 스타일이 초창기 코너리의 스타일('위기일발' 이전까지의 액션형 본드)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이언 플레밍이 묘사한, 해사한 미중년이 아니라 오른쪽 뺨에 상처가 있는 현장 요원형 본드에 더 어울린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기존의 본드와 크레이그 본드의 결정적인 차이는 유머 감각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른 걸 다 떠나서 유머 감각이 없는 본드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퀀텀'에서 본드는 단 한 차례 유머를 구사하더군요. "우리는 교사들인데 로또에 맞았소." 위기에 닥쳤을 때 찡그리고 인상을 쓰는 것이 과연 본드일까요? 여기에는 정말 동의하기 힘듭니다.

옹호자들은 또 말합니다. 새로운 본드는 이제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그 본드가 완성될 때(아마도 다음 편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예전의 본드가 갖고 있던 아우라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지금 본드 제작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저 돈다발일 뿐입니다.

그 '새로운 본드'라는 것은 이미 '카지노 로열' 때 다 드러났지만, 제이슨 본과 '24'의 잭 바우어를 합쳐 놓은 듯한 잡종 액션 영웅일 뿐입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나오는 본드도 존중할 의미가 있겠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본드는 20여편의 영화를 통해 자리잡은 새로운 캐릭터입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본드도 있고, 저런 본드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 본드의 모습도 바뀌곤 하는 게 정상이겠죠. 저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레이어 케이크'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주연급 배우의 역량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스티브 맥퀸 팬 중에서 과연 스티브 맥퀸이 007 역으로 나왔을 때 환호할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언 플레밍이 가장 강력하게 밀었던 본드는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나왔던 전형적인 영국 신사 데이비드 니븐이었습니다. 물론 플레밍도 '위기일발'에서의 코너리를 보고 극찬을 했지만, 이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코너리가 자신이 니븐에게서 기대한 요소들을 연기해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크레이그가 코너리나 니븐이 보여줬던,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에서도 연미복을 차려 입고 "그래도 아직 담배 필 시간은 있겠지?"라고 말하는 식의 여유와 유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선 매우 비관적입니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본드 시리즈가 흥행에 줄곧 성공하는 한 이런 기대를 채워줄 또 다른 본드의 출현은 먼 미래의 일이 되고 말 것 같아 더욱 아쉽습니다.

이런 본드는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보드카 마티니를 마시지 않는 이 007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칵테일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스폰서 중 하나인 세계적인 보드카 메이커 스미르노프는 이 칵테일을 '베스퍼'라고 부를 모양입니다. 성분은 15ml Smirnoff Black Vodka, 45ml Gordon’s Gin, 7.5ml Lillet Blanc.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칵테일이라고는 하지만 40도짜리 술들의 조합이니 스트레이트를 먹는 거나 비슷하겠군요. 이걸 6잔 마셨으니 67.5 x 6 = 405 ml. 700ml짜리 위스키를(안주도 없이) 반병 이상 마신 셈이었네요. 주당 인정.




p.s.2. 로저 무어 경이 또 한 말씀 하셨군요.




728x90

마이클 크라이튼도 과거의 인물이 돼 버렸습니다. 아직 66세면 한창 나이인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암'이 사인이라니, 참 허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20세기 후반 세계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의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은 대부분 영상물로 만들어졌고, 많은 부분에서 그는 소설가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5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8편은 직접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직접 연출한 작품들은 대부분 흥행에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최소한 원작의 힘 만으로도 그의 성과가 무시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의 상상력이 개발한 새로운 세계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죠.

조상하는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그가 연출한 모든 작품을 보지는 못했으니 당연히 제가 아는 작품들 위주의 얘기가 될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4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크라이튼은 하버드와 캠브리지대에서 수학했고, 1969년 하버드 메디컬 스쿨을 거쳐 의학박사(M.D)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단한 경력이죠. 'E.R'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6피트 9인치(2.06m)의 키는 의사로서는 너무 큰 키였다고 생각했는지, 작가로 변신합니다.

최초로 영상화된 그의 작품은 1971년작(모두 영화 기준) '안드로메다 위기(Andromeda Strain)'입니다. 외계로부터 온 미지의 유기체가 과연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연구하는 미국 과학자들로 구성된 비상 대책반(?)의 이야기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소설을 책으로 읽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외계로부터의 이런 위협에까지 대비하는 매뉴얼과 설비를 갖춰 놓고 있다는 데 대한 놀라움이었습니다. 그것도 1969년이라는 태고적에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은근히 '역시 선진국은 다르구나'라는 생각도 끼어듭니다. (그리고 소설이 나온 1969년은 크라이튼이 메디컬 스쿨을 졸업한 해인데, 의대를 다니면서도 이런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 역시 놀라웠습니다.)

아무튼 무대가 좁은 실험실 하나인데도 전편 내내 긴박감이 넘치게 하는 문체는 일품이었습니다. '안드로메다 위기'는 올해 TV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방송됐더군요.

그 다음으로 제가 기억하는 작품은 1973년작 '웨스트월드(Westworld)'입니다. 70년대의 어느날 2부작으로 나뉘어 한국 TV에서 방송된 적이 있기에 TV 시리즈인줄 알았는데 극장용 영화였더군요. 크라이튼의 극장판 감독 데뷔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야기는 첨단 로봇 기술을 사용, 관광객이 14세기의 영국 기사도나 서부 개척시대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꿈의 성인용 놀이공원 웨스트월드에서 시작됩니다. 관광객들은 자기 마음대로 중세의 기사가 되거나 서부의 총잡이가 되어 살인과 섹스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컴퓨터가 폭주하고, 놀이공원은 살육의 현장으로 돌변합니다.

로보트 총잡이로 나오는 율 브리너의 무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작품.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게 넋을 잃고 두 시간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은 80년대의 남성 섹스 심벌이었던 톰 셀렉이 주연한 '런어웨이(Runaway, 1984)'입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정식 수입도 되지 않은 1985년 서울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였습니다. 당연히 자막도 없는 비디오로 봤지만 충분히 즐길만 한 활기찬 액션 영화였습니다. (나중에 더빙된 TV 방송때 보니 좀 지루하기도 하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나선 곧바로 1993년의 '쥬라기 공원'으로 넘어갑니다. 소설이건 영화건 이 작품에 대해선 굳이 더 보탤 말이 없겠죠. 그의 경력의 절정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 사이 살짝 감춰져 있는 것이 '떠오르는 태양(Rising Sun, 1993)'이라는 영화입니다. 사실 서구인의 시각으로 동양인을 보는 작품은 동양인들이 보기엔 어색할 때가 많죠. 전자제품 수출로 제2의 진주만 공격을 노리는(?) 일본인들의 음모에 션 코너리와 웨슬리 스나입스가 맞서 싸우는, 좀 어정쩡한 얘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때부터 그의 원작 영화화는 미친듯이 진행됩니다. 마이클 더글러스, 데미 무어의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묘한 우화 '폭로(Disclosure, 1994)', 회오리바람(tornado)을 쫓는 과학자들 이야기 '트위스터(Twister, 1996)도 이때 영화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 최악의 졸작은 1995년작 '콩고(Congo)'죠.

원작 소설 콩고는 구 콩고 지역의 밀림 속에 감춰진 황금의 사원을 우연히 발견한 탐험대와 유적을 지키는 놀라운 수호자들(고릴라라고 말해도 재미가 떨어지진 않습니다) 사이의 대결이 숨가쁘게 펼쳐지는 스릴러의 걸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그 재미있고 박진감넘치는 원작을 갖고 코미디도 아니고 액션도 아닌, 어정쩡하고 한심한 영화가 나와 버린 거죠. 당부를 하나 하자면, '콩고' 원작을 보신 분은 절대 영화를 보지 마시고, 둘 다 안 본 분은 그냥 소설만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원작을 이렇게 망쳐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냉정하게 말해 크라이튼의 영화는 '쥬라기 공원' 1편에서 끝났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시리즈의 2, 3편도 그렇고, 그 뒤에 나온 '13번째 전사(13th Warrior)'도 그렇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품 역시 권하고 싶은 것은 소설 쪽입니다. 중세 베오울프 전설에 대한 참신하고도 신비로운 해설에다 아랍 문화의 흔적을 섞은 크라이튼의 솜씨가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크라이튼이 직접 나선 영화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죠. 아마도 이 시기의 크라이튼은 'ER'에 너무 힘을 많이 기울인 듯 합니다.

2003년의 '타임라인'은 영화와 원작 모두 기대 이하라고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타임 슬립 액션이었고, 캐릭터도 진부하기 그지없었으니 당연히 흥행에서도 대패했죠.

현재 할리우드에서는 '웨스트월드'의 리메이크와 '쥬라기 공원' 4편의 제작이 한창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가는 건 당연히 '웨스트월드'쪽이죠. 첨단 CG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더 강력한 영상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나자나 크라이튼 옹이 이제 저 세상 사람이 되셨다니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군요. '타임라인' 이후로는 신작을 보지 않았는데 이제 유작인 셈인 '공포의 제국(State of Fear)이나 읽어 봐야 할까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명나라로 추정되는 시대. 중국 북서쪽 변방의 한 요새를 지키던 장군 왕생(진곤)이 유목민족과의 전쟁터에서 미녀 소유(주신)을 데려온 이후부터 성 안에서는 심장을 도려낸 시체들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왕생의 아내 왕부인(조미)은 소유를 의심하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소유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죠. 이때 왕부인을 사모하던 도법의 달인 방용(견자단)이 성으로 돌아오고, 우연히 여우 요괴를 쫓던 항마사 하빙(손려)과 마주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피(畵皮)'의 원죄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를 보는 순간 열 중 일곱 사람은 '천녀유혼'을 떠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녀유혼'의 영어 제목이 Chinese Ghost Story라는 데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혜안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 제목은 영화 한 편의 제목이라기보단 하나의 장르 이름으로 어울릴 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 이후로, '중국의 미녀 귀신'을 소재로 한 아류작들이 끝없이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화피'와 '천녀유혼' 사이에는 일단 똑같은 '요재지이'에서 원작을 뽑아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녀유혼'도 마찬가지지만 '화피' 역시 원작의 이야기는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 남자가 미녀를 집으로 데려와 첩으로 삼고 희희낙락하는데, 길에서 만난 도사가 "당신 지금 혼이 빠져나가고 있어. 그냥 두면 오래 못 살아"라고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고 나니 정말 건강에 이상이 생기죠. 그러다 우연히 문틈으로 미녀가 가죽을 벗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가죽에다 그림(화장)을 그리고 있는 걸 목격합니다. 뭐 그런 얘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화피' 제작진은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외로운 변방의 장병들과 요괴, 무림의 고수에다 심지어 요괴를 사모하는 다른 요괴(아마도 천년묵은 도마뱀 정도로 추정되는)까지 등장하는 복잡한 이야기로 바꿔 놓았습니다.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공간과 요괴의 습격이라는 주제는 고전 공포영화 '더 씽(The Thing)'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야기가 초반 도입부에서 방용과 하빙이 등장하기까지 약 40분이 지나면 하품이 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사건이 해결되건, 주인공들이 요괴에게 죽음을 당하건 뭔가 결론이 지어 져야 할 시점이죠. 하지만 이야기는 16부작 드라마처럼 지지부진하게 한참 동안 방황합니다.

정리는 커녕,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동안 '말하자면 주인공'인 왕생은 꿈과 현실을 오가며 아내 패용에 대한 사랑과 소유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방황이나 그 방황 과정에서 필연처럼 따라다니는 패용의 오해와 절망이 너무나도 전형적이라 관객의 짜증 역시 필연처럼 따라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다가 불행히도 이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천녀유혼'과 비교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서극-정소동-장국영-왕조현이라는 황금의 멤버들이 만들어낸 역작 '천녀유혼'을 가슴 한 구석에 담은 관객에게 있어 '화피'는 우울하고 조악한 복제품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나아진 것은 CG 가술 뿐인데, 그나마도 영화에 대한 평가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관객의 인내심을 기대하는 것 외에는 달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피'는 중국어권 영화의 위기를 대변해주는 듯한 작품입니다. 지난 2006년 이후 중국 영화 거장들이 줄줄이 내놓는 대작들 중 도대체 이거다 싶은 영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죠.

풍소강의 '야연'과 '집결호', 진가신의 '명장(投名狀)', 장예모의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 정소동의 '연의 황후(江山美人)', 심지어 오우삼의 '적벽대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무협 액션과 결합된 스펙터클만 살아 있을 뿐, 따분하지 않은 영화를 찾아 보기가 힘듭니다. 한마디로 내러티브의 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볼거리만 있고 뭘 봤는지 기억나지 못하게 하는 이런 영화들의 범람은 결국 중국 영화의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게 자명해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겉으로는 올림픽 개최로 떵떵거리는 외형을 과시하면서도 속으로는 엉터리 분유 파동으로 갓난아이들이 죽어가는 중국 내정의 현실을 영화계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2005년작인 진개가(첸카이거)의 '무극', 서극의 '칠검하천산', 당계례-성룡-김희선의 '신화'까지 올라가 봐도 한숨만 짙어질 뿐입니다. 뭐가 문제인지, 깊은 반성이 필요할 듯 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를 얘기하기엔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이 영화의 유일한 볼거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두 스타 여배우의 모습 정도군요. 물론 거기에도 차이가 꽤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76년생 동갑인데도 조미의 얼굴에서 이제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반면('적벽대전'과 비교해 볼 때 이 영화의 조미는 3년 정도는 더 나이들어 보입니다. 의도된 분장인가 생각할 정도입니다), 주신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한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긴 이런 모습도 미녀 요괴의 기준이 된 이 분과 비교하면 어쩐지 초라해지고 마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미녀 요괴를 사모하는 도마뱀 요괴 소이(小易) 역의 척옥무. 어쩐지 연정훈을 연상시키는 얼굴이라 웃음을 자아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년의 왕조현과 '천녀유혼'의 전설이 그리우신 분은

 

728x90

안면홍조증이란 약간의 감정 변화, 심지어 약간의 온도 차이만 느껴도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하는 증세를 말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병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갖가지 치료 방법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피부병이나 마찬가지로 '절대 죽을 병은 아니지만 완치도 되지 않는' 증세인 듯 합니다.

안면홍조증에다 외모 컴플렉스가 심각하고 스토커 기질을 보이는 여주인공. 대체 이런 주인공을 누가 만들어 낼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어떻게 이런 주인공을 가지고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미쓰 홍당무'는 해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피부과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양미숙(공효진)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여중 영어교사인 미숙은 고교시절 스승이자 이제는 같은 계열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종철(이종혁)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철에게는 아내(방은진)와 미숙의 제자인 딸 종희(서우)가 엄연히 있죠. 게다가 예쁜 얼굴에 백치미 넘치는 동료 교사 유리(황우슬혜)와 종혁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사실까지 알아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를 받고 '소주 한 잔'으로 쓰라린 속을 달래며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강함은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즉 '네가 아니면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이 어디 없을 것 같냐'는 생각이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양미숙은 그런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기상천외의 독특한 해결 방식이 등장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를 보고 난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독창적이고 싱싱한 캐릭터들입니다. 양미숙 같은 캐릭터라면 주변이 어떤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건, 왕따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낮을 겁니다. 늘 피해의식과 암울한 자기만의 상상에 갇혀 있고, 늘 기괴한 자기만의 해결 방식을 고집하면서 자기는 남들에게 피해 주는 것도 없는데 왜 남들이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의아해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괴짜를 싫어하는 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의 거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집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일상은 엉망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서서히 그 주변을 피하기 시작하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양미숙은 이런 괴짜의 매커니즘을 너무나 제대로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누구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조금은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에게 마음을 열기도 쉽지만, 또 한편으로 양미숙은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바보같은 면을 증폭시킨 캐릭터이기 때문에, 너무 심하면 짜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양미숙은 그 사이의 선을 적절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여성의 적'으로 묘사되는 이유리 선생은 언뜻 공주병의 흔적과 함께 '왜 다들 나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라는 식의 백치미가 돋보입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착한 공주' 스타일이기도 하죠. 이런 캐릭터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진짜 예쁘기 때문이기도 하고(안 예쁜 공주는 매장당하기 십상이죠), 또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기본적으로 선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지막으로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전따(전교 왕따)가 되어 있는 종철의 딸 종희. 자신이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는 깊은 컴플렉스를 안고 있습니다. 아무튼 본질적으로 평범해지기를 거부하는 영혼(요즘 여중생 중에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아이가 몇명이나 있을까요?)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위 아이들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볼수록 내공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인데다 그 역할을 맡은 공효진, 황우슬혜, 서우는 모두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호연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혼연일체라고나 할까요.

이런 인물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나오는 이경미 감독의 솜씨 또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캐릭터에 곧 스토리가 담겨 있고, 스토리가 캐릭터를 다시 보여주는 데 있어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솜씨 때문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 비교되는 올해의 영화는 바로 '놈놈놈'입니다. 2차원의 스토리와 2차원의 캐릭터가 그나마 따로 따로 놀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유머감각입니다. 영화 곳곳에서, 만화에서 곧바로 실사영화가 된 듯한 장면들이 관객들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미 유명해진 "러시아 어로 라이터를 섹시하게 말해봐!" 장면을 비롯해 영화를 보는 내내 심심함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습니다.

결말은 '영화라는 건 메시지가 있어야지!'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만족시킬만 합니다. '왕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고 말하는 건 사회적 패자(loser)들을 다루는 영화에서 너무 자주 등장해 진부하게 느껴지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왕따와 왕따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모습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더군요. 그걸 보여주는 방법도 매우 독창적입니다.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엄청난 대박은 아니지만 이런 영화를 알아보고 호응하는 관객이 꽤 있다는 것도 한국 영화의 희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마디로 알이 꽉 찬 꽃게를 쪄서 쪽쪽 빨아 먹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양미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는 코트. 자세히 보면 영화 마지막의 고교시절 단체사진 촬영 장면에서, 종철의 옆에 선 (그리고 아마도 종철이 귀여워했을) 여학생이 입은 코트와 같습니다. 미숙의 뿌리 깊은 열등감을 표현해줍니다.

또 학교 축제 장면에서는 교장선생님의 복장을 그대로 코스프레한 여학생이 교장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는 장면이 얼핏 지나갑니다. 특정 장면에서 유리 선생의 구멍난 원피스도 웃음을 자아내죠. 한마디로 배경 하나에도 제작진이 신경을 썼다는 증거가 역력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2. 유리 선생 역의 황우슬혜는 연극 경력이 탄탄한 82년생, 종희 역의 서우는 중학생 역이지만 88년생으로 20세입니다. 사실 서우의 '엽기성'은 '옥메와까'라고 불리는 빙과 CF에서 익히 드러난 바 있습니다.

못 보신 분들이라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정관념을 깨 주는 CF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