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자료와 영상을 봤고, 책도 꽤 읽었지만 새로 나온 책을 정좌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는 힘들었던 한해였다. 그러고 보면 1년간 읽은게 다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10년 전에서 5~6년 전에 읽은 책을 쓸데가 있어서 다시 읽었다. 올해는 유난히 그런 해였던 것 같다. <생각에 대한 생각>, <이기적 유전자>, <그릿>, <몰입(flow)>, <창의성을 지휘하라>, <특이점이 온다> 같은 책들. 20년 전에 읽은 책들은 대략 기억이 나지만 10년 전에 읽은 책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4~5년 전에 읽은 책은 밑줄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 내가 이 책을 읽었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슬프다.
어쨌든 항상 책 파트 정리는 '아 젠장 올해는 정말 읽은 책이 없네'로 시작해 '10권을 어떻게 꼽나'로 갔다가 '그래도 한권만 더 하자'로 끝나는 듯. 올해는 12권.

새왕의 방패 (이마무라 쇼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는데 정작 읽게 된 것은 넷플릭스 시리즈 <이쿠사가미>도 같은 이마무라 쇼고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의 일이다. (이쿠사가미가 재미있었다는 뜻은 아님) 이쿠사가미는 원작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새왕의 방패>를 읽은 뒤의 소감은, <새왕의 방패>가 영화화되었더라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새왕의 '새'는 '요새'의 '새'. 사실 '두 천재 장인이 벌이는 숙명의 대결'이라는 슬로건은 일본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성을 건설하는 축성 전문가들과 화약무기를 다루는 조총 전문가들의 대결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저런 표현을 쓰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새왕'이라 불리는 쪽, 즉 축성 전문가 쪽에 너무 큰 무게가 실려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다는 뜻은 절대 아님. 특히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을 책.

여학교의 별 (와야마 야마)
가라오케 가자 (와야마 야마)
<가라오케 가자>를 보고 반해서 찾아 읽게 된 만화. 근래 예전처럼 만화를 열심히 보지 못하고 있지만, <페이블> 이후 가장 재미있는 만화라고 인정할 만한 작품을 만났다. 어느 여학교의 왁살스러운 여학생들과 얌전한 선생님들 이야기. 자신이 인기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과 인기 같은 것은 1도 관심이 없는 두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 무지막지하게 웃기는 에피소드들을 뿌린다. 왜 이런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혹시 나왔는데 모르고 있는 거라면 알려주세요)

애프터 넷플릭스 (조영신)
집필에 아주 조금 관여(?)를 했다는 면에서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반칙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미디어 상황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논리가 담긴 책이다. 특히 조영신 박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당위'나 '지사적 책임감', 혹은 '국뽕' 때문에 현상을 무시하는 일부 관찰자들의 주장을 보면 쓴웃음이 나올 때가 꽤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조영신 박사의 브런치 https://brunch.co.kr/@troicacho/102 도 참고해 보시길.

먼저 온 미래 (장강명)
이미 수없는 상찬을 받은 책. 인류 문명에 AI가 미칠 영향에 대해 최대한 국외자인 것처럼, 이 사회와 거리를 두고 서술하려 노력한 면이 특히 마음에 들었고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다만 항상 이런 책들은 'AI는 이런 일들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어차피 99.99%의 인간도 안 되는 일을 갖고 AI의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연결되는데, 이 책도 이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다. 결국 인류 문명이라는 것은 그 0.01%에 의해 좌우되어 오지 않았던가. 그 0.1%가 반드시 엔지니어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미 나는 내가 현실적인 부분에서 0.01%일 수 없음을 알았고, 만약 그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해도 과연 나의 삶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데, 혹시 내가 전체 인류의 0.01%라고 생각하는 부분(예를 들어 그렇다는 얘기다.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냐고 묻지 말아주시)을 추월당한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다.

몸, 내안의 우주 (남궁인)
응급외과 전문의의 '우리 몸'과 건강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서. 응급 환자들의 사례에서 시작해, 우리의 몸은 어떤 기관들의 어떤 작용에 의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만약 외부로부터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서 병상에 누운 몸이 될 수 있는지를 소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일단 순서대로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상당히 두꺼운 책이니 책꽂이에 꽂아 두고 뭔가 궁금하거나 불편할 때 가장 먼저 찾아 읽어볼 수 있는, '남궁인의 가정의학백과' 같은 책으로도 가치가 높다. '2025년의 역저'로 꼽힐 책.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남궁인 손원평 등 공저)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행복한 불로소득자가 될만한 자산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우리 중 대부분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산다.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 2024'라는 제목대로, 그렇게 '벌어야 먹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노동 현장을 소재로 한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그 중엔 전문 소설가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위 책에서 바로 이어지는 남궁인 박사는 의사의 노동 이야기 아닌,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쿠팡 새벽배송 사태 때 '그나마 쿠팡이 상당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서는 괜찮은 일자리'라는 말에 꼬투리를 잡혀 유명해진 천현우 작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본래 남의 돈 버는 게 고달프지 않을 리가 없으니, 이 책의 소감이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일지, '그나마 나는 양반이었네' 일지, 그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여기에 2025년의 히트 드라마 <...김부장 이야기>가 겹쳐지면 정말 그런 '고달픔에는 위아래가 없구나'가 되고, 영화 <어쩔수가 없다>가 겹쳐지면 '그래도 아직 일자리가 있는게 다행이야'가 될 수도.

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 ( 브누아 시마 저/필리프 베르코비치 그림)
이 책과 다음 두 권은 뭔가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인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반사적으로 불멸을 꿈꿔 왔다. 그리고 그 지난한 역사는 인류 과학 문명의 발달과 연결되어왔고, 현대 사회에서는 실리콘밸리를 지배하고 있다. 레이 커즈와일이 먹고 있는 비타민이나 일론 머스크의 우주선 모두 '불멸'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될 수 있다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있게, 증거 중심으로 구성한 책. 그리고 그 불멸이란 오늘날에 와서는 결국 '트랜스휴먼'이라는 키워드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 흥미롭고, 정교하다.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하드 SF의 대가 그렉 이건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아무래도 테드 창과 비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창에 비해 이건은 좀 더 이과적인 작품을 쓴다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테드 창을 따를 수 없고, 이건은 '내가 현대 사회와 기술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데'를 자랑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의 <내가 되는 법 배우기>는 이글먼이나 아닐 세스의 책을 읽고 읽으면 더 실감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타이틀 트랙(?)인 <내가 행복한 이유>. 행복해지는 방법을 물리적으로 제거당한 남자의 분투기가 눈물겹다. 아무튼 강추.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데이비드 이글먼)
읽다 보니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나 미치오 가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글먼의 방향은 인간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 능력의 확장, 즉 '인위적인 진화'에 이르는 길. 앞서 읽었던 <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굳이 불멸이 그렇게 필요할까. 어쨌든 이 시대의 주제인 '인간의 확장'을 이해하기 위한 책들 중 손꼽히게 좋은 책.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는 감독이면서 뛰어난 시나리오 라이터이기도 했으나 대본 외에 구로사와 감독이 직접 쓴 글들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이 남아 있다는 것이 감동적일수밖에. 정말이지 '이 양반 굉장히 솔직하구나' 라고 느낄만한 담백한 문장들이 반갑기 그지없다. 어려서 겪은 관동대지진의 참상(강 위로 항문이 벌어진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이나 2차대전 끝물의 위기들, 빈민가의 생활, 형의 자살 등이 수채화처럼 흘러간다. 그의 영화 세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볼만한 이야기.

제로 투 원 (피터 틸)
팔란티어라는 회사는 대체 뭘 하는 회사고, 온톨로지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다가 결국 가장 먼저 읽게 된 책. '유태인 동성애자이나 극우파'라는 정말 기묘한 포지션의 스탠포드 철학 석사 피터 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경쟁을 싫어하고 독점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놀랍게도 많은 부분이 이해가 간다. 무려 1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상당히 유효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 때문에 이 방면의 책들을 꽤 여러권 보게 되었는데, 로저 마틴의 <디자인 씽킹 바이블>, 에릭 리스의 <린 스타트업>, 애시 모리아의 <린 스타트업 10주년 기념판> 등에 비해 뭔가 쨍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다만 피터 틸은 엄청 급한 성격인 듯, 문장들이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점은 감안할 것.
그런데 틸의 책이 경영 지침서, 특히 스타트업 용의 교훈서로 상당히 훌륭한 반면, 알렉산더 카프의 <기술공화국 선언>은 참담한 수준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탠포드 로스쿨, 독일 사회철학 박사라는 으리으리한 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책에 나오는 수많은 석학들의 인용과 다양한 상황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이라는게 개발독재형의 리더(그가 가장 찬양하는 지도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다. 차마 시진핑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라는 점은 지금 대체 이 책을 왜 읽고 있나 하는 허탈감을 줬다.
그리고 모처럼 연말 약간 여유가 생겨 읽고 있는 책은 이 책.

대만이라는 따뜻하고 음식이 발달한 나라의 풍광과 음식 이야기, 그리고 점령국/피점령국 국민인 두 여자의 우정이 버무려진 책. 여행안내가 아니라 소설인데, 아직 결말까지 도달하지 못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무작정 대만으로 가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너무 '여자여자' 한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담가 보실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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