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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사실은 왕국이지 제국이 아니지만- 이 자랑하는 수출품 중 하나로 영화를 꼽게 된 데 대해 공로상을 준다면 아무래도 둘로 나눠서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리처드 커티스가 이끄는 영화사 워킹 타이틀 Working Title이 받는다면 나머지 하나는 마땅히 배우 휴 그랜트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휴 그랜트와 워킹 타이틀은 <네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어 보이> <러브 액추얼리>라는 일련의 걸작 로맨틱 코미디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가 주연하지 않은 워킹 타이틀의 대표작을 꼽자면 <빌리 엘리어트>나 <사랑도 리콜이 필요해 High Fidelity>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요?

아무튼 그랜트와 워킹 타이틀의 호흡은 대단한 찰떡궁합입니다. 그랜트가 주연한 다른 영화들, <투 윅스 노티스>나 <미키 블루 아이즈>, <비터 문> 같은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어떤 쪽이 그의 강점을 제대로 살렸는지는 명약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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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제외하고 휴 그랜트의 캐릭터에 매우 짙은 일관성이 느껴진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소심한 남자'죠. 한발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워킹 타이틀이 만든 대부분의 히트작들이 '소심하고 별 내세울 것 없는 남자가 멋진 여자와 맺어지는 이야기'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고 그 핵심에는 휴 그랜트라는, 그 역할을 똑 따 먹을 수 있는 배우가 있다는 얘깁니다.

 영화 속에서는 약간 얼띤 캐릭터만 맡지만 그는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수재(?)에다가 <노팅 힐>에서 공연한 줄리아 로버츠에 대해 물으면 "입이 크다. 엄청 크다. 어찌나 큰지 키스신을 찍을 때면 어디선가 희미하게 키스 소리의 메아리가 퍼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다" 고 말할 정도로 멋진 유머감각도 갖춘 사람입니다. 물론 오랜 연인이던 엘리자베스 헐리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대부가 될 정도로 대범한(한국사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남자이기도 합니다.

왜 휴 그랜트 얘기를 이렇게 오래 했을까 하신다면,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복선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바로 오늘의 주제, '소심한 남자'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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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남자의 힘, 할리우드를 누를 수 있다

2006년 6월, 온 한국이 월드컵의 광풍에 휘말려 있을 때 일본 영화 한편이 조용히 개봉됐다.
<전차남>은 화제만으로도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품. 별볼일없는 소심한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꿈에 그리던 미녀와 인연이 닿은 뒤 연애 상황을 인터넷에 올려가며 조언을 통해 사랑을 성취해가는 이야기로 2005년 일본에서 드라마와 영화. 소설 모두 빅 히트했다.

따지고 보면 <전차남>의 직계 조상은SBS TV가 이문식-박선영 주연으로 리메이크해 방송했던 일본 드라마 <백한번째 프로포즈>다. 정말 별볼일 없고 못생긴 노총각이 공주같은 여주인공과 맺어진다는 내용으로 이미 지난 93년에는 문성근-김희애 주연으로 국내에서 영화화되기도 했고 2004년에는 중국에서도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진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런 류의 드라마들은 굳이 말하면 신데렐라의 정 반대 스토리(‘개구리 왕자 스토리’라고 해야 하려나). 즉 ‘소심하고 사랑에 서툰 남자의 성공담’이라는 범 인류적인 소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소재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있는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남자의 용모는 여자를 사귀는 데 큰 장애가 되지 않지만 소심한 성격과 기술의 부족은 절대적인 장벽이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이란 결국 능란한 사람보다는 서툰 사람이 많기 때문이고. 관객들도 후자 쪽에 훨씬 감정이입이 쉽다. 그러다 보니 얘깃거리도 풍부하다.

게다가 소심한 남자의 연애담은 찍는 데 돈이 들 일도 거의 없다. 영국 영화를 세계적인 대중문화 상품으로 끌어올린 제작사 워킹 타이틀의 히트작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그리고 <러브 액추얼리>에 모두 사랑에 서툰 남자(주로 휴 그랜트)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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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영화에서도 소심한 남자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짭짤한 성공을 거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도 김주혁의 캐릭터가 빛났고.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도 박용우의 활약이 힘을 발휘했다. 특히 <달콤 살벌한 연인>의 순 제작비가 9억원에 불과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쯤 되면 한국 영화에서도 소심한 남자들의 활약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싸고 재미있으면서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먹힐 수 있는 소재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태풍>이 미국에서 개봉 첫주에 24개 스크린에서 약 6만6000 달러(한화 약 6500만원)의 흥행 수입에 그친 현실이나.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 사례를 보나 역시 한국 영화에 활력을 더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강력한 시나리오의 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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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괴물'이나 '디 워', '놈놈놈' 같은 영화가 한국이 주력해야 할 분야인가 하는 것은 오랜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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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드라마 속 커플인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펜 배즐리. 미국에서 화제를 뿌리던 드라마 '가쉽걸' 속의 커플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함께 찍다가 만들어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커플들 중 최신 커플에 해당합니다.

자, 이건 극중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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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실제 상황 키스로군요. (구별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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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는 수없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배우들은 '까놓고 하는 얘기'로 "청춘 남녀가 서로 껴안고, 눈 들여다보고, 키스하고, 이런 연기를 한달이고 두달이고 계속하다 보면 서로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게 정상 아니냐"고 반문하곤 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정말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연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자기를 속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난 이 사람을 정말로 좋아해'. 그러다 보면 둘이 사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거죠.

그런데 한 작품에 출연하다가 사귀게 되는 경우 말고, 아예 사귀는 커플들이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찍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생각보다는 이런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서로 사귀는 동안에는 오히려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걸 조금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돌이켜 볼 때 그런 작품들은 흥행에서도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세를 풍미한 벤 애플렉-제니퍼 로페즈 커플의 '질리(Gig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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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도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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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연인들이 드라마 속 상대역으로 나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면서 실제 연인관계로 발전한 연예인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맺어진 커플만 해도 최수종-하희라(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차인표-신애라(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김호진-김지호(드라마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리고 최근의 연정훈-한가인(드라마 <노란 손수건>) 등 십여쌍이나 되고 대강 사귀다 헤어진 경우를 합하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럼 한창 열애중일 때 같은 작품에서 공연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조승우-강혜정 커플이 영화 <도마뱀>에 출연한게 화제가 된 것도 이런 경우가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TV에서는 한창 열애중인 커플이 무려 두 커플이나 한 드라마에 동시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잘 모르는 배우들이 아닌 당대의 톱스타들이 그랬다는 거다.

여기서 <웨딩드레스>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면 당신은 상당한 TV 중독자이거나, 연예인 뒷얘기 중독자다. 혹시 이 답을 맞힌 분이 있다면 아래 주소로 메일 보내주시기 바란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면 이 칼럼을 물려 줄 용의가 있다.

97년작인 <웨딩드레스>는 <가을동화>를 비롯한 사계 시리즈의 윤석호 PD와 <프로포즈>의 최윤정 작가가 만난 작품. 이 드라마의 라인업은 사뭇 화려하다. 이승연 김희선 신현준 김민종이 주연했고 당시 김국진과 "밤 새지 말라 말이야"라는 CF 유행어를 히트시키고 있던 무명 신인 송혜교가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더구나 당시 김민종은 이승연과, 신현준은 김희선과 목하 열애중인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캐스팅이 가능했을까?

최윤정 작가가 나중에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이건 캐스팅이 아니라 "출연자의 요구에 못이겨 쓴 작품"이었다. 연예인들과 친분이 두텁기로 소문난 최 작가는 이승연과 친구, 김희선과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 하루는 이 두 배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기투합, '우리가 남자친구들을 데려올테니 넷이 같이 나오는 드라마를 써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나쁠게 없는 캐스팅(솔직하게 말하면 나쁠게 없는게 아니라 정말 하기 힘든 호화 캐스팅)이라 그 자리에서 승낙을 해 버렸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최작가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됐다. 이유는 두 커플의 치열한 경쟁. 당시 최작가는 이승연과 한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고 있었는데, 집필 이후 이승연은 최소 하루에 서너시간은 최작가의 집에 머물렀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희선은 자기도 걸핏하면 '놀러왔다'는 핑계로 최작가의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최작가의 집에 출퇴근한 것은 드라마의 매회 엔딩 장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당신은 드라마 마니아로 자처할 자격이 없다.

왕년의 히트작인 <여인천하>가 100회 넘게 방송되는 동안, 드라마의 진행상 가장 큰 배역은 전인화가 연기하던 문정왕후였지만 김재형 PD는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든 엔딩 장면을 강수연의 클로즈업으로 처리했다. 이는 '드라마 안에서 누가 더 많이 나오건, 누구의 대사가 더 많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강수연'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한 드라마에서 매회 엔딩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는 것은 출연자들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웨딩드레스>의 경우, 제작진은 처음부터 '번갈아 가면서 똑같이 엔딩에 나오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두 여배우는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집필 시간을 지나치게 빼앗은(?) 탓인지, 같은 시간대였던 차인표 송승헌 최불암 주연의 <그대 그리고 나>가 너무 강한 상대였는지 시청률은 예상을 밑돌았다.

사실 실제 연인들인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아 흥행에 성공한 예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영화 <도마뱀>도 고전했고, 왕년 할리우드 최고의 커플로 꼽히던 벤 애플렉과 제니퍼 로페즈가 함께 나온 <질리 Gigli>도 최악의 흥행을 기록했다. 아무래도 일은 일, 사랑은 사랑으로 구별해서 하라는 대박신의 계시가 아닐까. (끝)


아무튼 세월이 흐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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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주인공은 모두 웨딩드레스를 입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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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정말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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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선생이 내한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한번 올때마다 화제를 뿌리고 가시는 히딩크 선생님. 참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지만 이분으로 인해 한국과 네덜란드간에 형성된 우호 친선의 분위기는 이루 다 말하기가 부족할 정도입니다. 물론 이분의 후임들인 조 본프레레와 핌 베어벡이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게 좀 안타깝지만 히딩크와 아드보카트의 업적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닙니다.

아무튼 이런 양국간의 우호가 형성된 것은 좋은데, 이 우호관계를 거론할 때 약 400년 전 한국을 찾았던 화란인 하멜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사실 좀 불만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면 납득하시겠지만 하멜은 양국 우호를 상징하기에 그리 적절한 인물이 아닙니다. 한국에 정을 붙이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끝없이 빠삐용처럼 탈출을 시도하다가 마침내 성공한 사람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한 네덜란드 기업인들이 만든 자선단체의 이름이 '하멜협회'로 붙여지는 등 항상 하멜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좀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안이 없다면 모를까, 정말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박연, 한국인들이 잊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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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정체가 궁금하시면 아랫 글을 자세히 읽어보셔야 합니다.^^)

<두루두루> 박연에서 아드보카트까지

두 차례의 월드컵을 통해 한국과 네덜란드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고한 유대가 형성됐다. 특히 히딩크는 일본전을 앞두고 "명예 한국 시민의 자세로 일본을 반드시 꺾겠다"는 멘트까지 날려 한국 팬들의 가슴을 다시 한번 불타오르게 했다. 한 개인의 노력이 두 나라를 그 어느 때보다 친근하게 만들어준 사례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한 이방인이 머나먼 아시아의 한 나라를 방문한 뒤 서서히 그 나라 사람들과 동화되고, 마침내 그들과 목숨을 걸고 어깨를 나란히 싸운다. 그렇다. 바로 일본을 무대로 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다. 이 영화는 없는 신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네이선 알그렌이라는 가상 인물까지 동원해 감동을 쥐어 짜려 했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 역사에는 우연히 한국과 인연을 맺고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네덜란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과 네덜란드의 인연을 얘기할 때 1643년 한국에 온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을 꼽지만, 그는 한국 여자와 결혼해 13년 동안을 살고도 결국 적응하지 못해 결국 탈출한 뒤 고국에 돌아가 책을 썼다. <하멜표류기>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귀국을 막은 한국인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만큼, 그는 사실 '우호의 상징'으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반면 박연(벨테브레)은 하멜보다 16년 앞선 인조 5년(1627년) 두 동료와 함께 한국에 표류했고,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총포술 교관으로 일하면서 박연이란 이름으로 귀화해 결혼도 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조선을 위해 청나라에 맞서 싸우다 두 동료는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남았다.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박연은 통역 자격으로 이들을 만나 "이 나라는 살 만한 곳이니 정을 붙이고 살아 보라"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먼 이방의 나라에서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뛰어들어 피를 뿌려 가며 이 땅의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했던 벽안의 한국인. 박연과 동료들의 실화를 모델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면 <라스트 사무라이>의 엉성한 감상주의를 능가할 수 있지 않을까? (끝)




그런데 놀랍게도 네덜란드 현지에서도 이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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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의 고향인 De Rijp(어떻게 읽는지 모르겠군요) 지방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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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가문 홈페이지(http://www.weltevreden.com/Fame/Fame.htm)에도 '우리 조상중에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이런 분이 계시다'는 내용이 올라 있더군요. 참 감개가 무량합니다. (사실 중간의 사또 차림을 한 박연의 사진은 2002년엔가 박연과 하멜의 모습을 재현한 행사 사진 중 하납니다. 당시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분장한 것이라는군요.^^)




마지막으로 유머 하나:

2002년 당시에도 이런 비슷한 논의가 있어서 회사에서 얘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 얘기를 했더니 회사의 어떤 선배가 하신 말씀:

"이야, 그럼 아악을 정리한 사람이 네덜란드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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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딩크형, 언제 또 오시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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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다 보면 비밀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정준호군으로부터 들을 때만 해도, 그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혼자만 킥킥거리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긴 세월이 흘렀고, 어느날 TV를 보니 정준호 본인과 신현준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물론 방송용이기 때문에 살짝 달라진 부분도 있고, 또 본인 이외의 다른 사람이 본 시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흥미거리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나자나 정군, 빨리 장가를 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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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선택으로 <친구>를 날려 버린 정준호

캐스팅을 둘러싼 뒷얘기는 결국 연기자의 입장에선 '놓친 고기가 크다'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에 출연해 달라고 매달리는 제작진을 간신히 거절하고 자신이 평소 생각해온 작품을 선택했을 때, 공교롭게도 거절한 작품은 대박이 나고 고심 끝에 선택한 작품이 악평과 흥행부진 속에 묻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얼마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현준이 "영화 <친구>의 장동건 역할은 원래 정준호 거였다. 내가 반대해서 정준호가 그 작품을 놓친 것"이라고 얘기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사실은 사연이 좀 더 길다. 이야기는 지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경택 감독과 <친구> 제작진은 처음부터 두 주인공을 유오성과 정준호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당시 정준호는 MBC TV 드라마 <왕초>에서 50년대의 정치주먹 이정재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곱상한 용모 이상의 배우임을 만천하에 인정받았던 터. 이 때문에 <친구> 팀도 정준호에게 선이 굵은 남성적 연기를 기대했고, 정준호도 90% 이상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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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친구>팀은 제작비 조달 문제로 촬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고 정준호의 주변에는 <친구> 출연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곽경택 감독이 <친구> 이전에 연출한 <억수탕>과 <닥터K>가 흥행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대한 평가마저도 신통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준호는 절친한 후배 장동건으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았다. 술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다가 대본을 바꿔서 읽어 보기로 했다. 장동건이 정준호에게 건넨 시나리오는 <싸이렌>. 소방관들의 이야기로 역시 선 굵은 남성 드라마를 표방하는 작품이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이 맞았는지, 두 사람은 서로 바꿔 본 대본에 푹 빠졌다. 장동건은 장동건대로 자신의 꽃미남 이미지를 깨 버릴 수 있는 조폭 동수 역할에 끌렸고, 정준호도 <싸이렌>에서의 지적인 소방관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이미 <싸이렌> 출연이 결정된 신현준도 "같이 하자"며 정준호를 부추겼다. 결국 정준호는 며칠 뒤 장동건을 만나 "작품을 맞바꾸자"는데 의기투합했다.

결단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2000년 개봉한 <싸이렌>은 곧이어 개봉한 <리베라메>와 함께 그해 최대의 재난영화(재난을 소재로 다뤄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재난이 된)로 기억되게 됐지만 이듬해 개봉한 <친구>는 8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장동건은 이 작품으로 '얼굴만 잘 생긴 배우가 아니었다'는 호평을 얻었고, 그가 연기한 동수 역은 지금까지도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대사와 함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싸이렌>의 실패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친구>가 대박이 나자 정준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불과 며칠만에 내린 '맞바꾸기'가 이렇게 큰 차이로 남을 줄이야. 울화를 달래기 위한 술자리가 잦아졌다.

이 무렵 정준호의 후배 하나가 혼자 술집에 앉아 있는 정준호를 발견했다. 본래 두주불사인 정준호였지만 이날은 꽤나 취해 수첩에 깨알같이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 만한 사람, 모를만한 사람 합쳐 2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형, 뭐 적어요?"
"응. 명단.
"무슨 명단?"
"<친구> 하지 말라고 말리던 놈들 명단."

후배도 뭔가 서늘한게 느껴졌지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적어요?"
"다시는 아는 척도 안 하려구. 내가 앞으로 이 놈들이랑 어울리면 성을 간다."

그러나 사람 좋은 정준호에게 이런 원한이 오래 갈 리 만무한 일. 게다가 <친구>를 놓친 대신 그해 <두사부일체>, 이듬해 <가문의 영광>으로 한국 영화계 최고의 달러 박스로 우뚝 일어섰으니 한때 그토록 가슴아팠던 <친구>얘기도 이제는 웃으며 할 수 있는 추억담이 돼 버렸다는 얘기다. 이처럼 '순간의 선택'으로 배우의 운명이 갈리는 건 연예계에선 그야말로 비일비재한 일이다. (End)





그러니까 그림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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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친구' 동수 역 제가 하는게 맞을거같지 않슴까? 이렇게 연습까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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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동건이가 건달 연기를? 하지만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 그 정도는 양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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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도 현준이형이랑 '싸이렌'을 하는게 나을거 같으니까."
"그래. 역시 우리는 같이 가는게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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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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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 연기? '해안선'에서 하던 대로 하니깐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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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싸이렌... 헉, 그런데 왜 다들 날 외면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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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감사합니다. 인기랑 돈이랑 상이랑 제가 다 가져갑니다.
"..."
(주위: 웅성웅성 "우리가 잘못 권한 모양인데..;;" "당분간 피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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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대체 왜 날 꼬신거야. 왜 그랬어, 응?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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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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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냥 그랬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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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얼굴없는 가수'였던 브라운아이즈, 란(위 사진입니다), 지아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얼굴없는 밴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캐나다 출신의 클라투(Klaatu)도 2년만에 정체가 드러났죠. 정말 드러나지 않는 얼굴없는 가수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조성모나 스카이(최진영)으로 대표되는 얼굴없는 가수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됐을까요. 놀랍게도 70년이 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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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가수'의 역사

얼굴없는 가수의 원조격인 조성모가 곧 가요계로 복귀한다. 입대 직전 만난 조성모는 "어차피 공익(근무요원)인데요"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만 2년간 사회와의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운 듯 했다(그런데 벌써 2년이 지났다니!). 그런 조성모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왜 얼굴없는 가수가 됐는지 아세요?"

<투 헤븐>이 한동안 인기를 얻을 때까지 조성모는 매스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방송사 PD의 말 한마디 때문. 당시 연예계의 실력자로 불렸던 이 PD는 조성모와 소속사 사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송(TV)은 하지 마. 노래 실력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얼굴로 방송 나가면 음반이고 뭐고 다 망해"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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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속사는 이병헌 김하늘 정웅인 등이 등장했던 <투 헤븐>의 뮤직비디오를 앞세운 홍보전을 폈다는 얘기. 요즘은 '왕년의 꽃미남 가수'로 분류되는 조성모가 이런 수모(?)를 겪었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인 듯 싶지만 본인이 털어놓은 얘기인 바에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투 헤븐>이 공전의 인기를 끈 덕분에 조성모는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성공사례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원조와 거리가 멀다. 진짜 원조를 찾자면 19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요 연구서인 장유정의 <오빠는 풍각쟁이야>에 따르면 지난 34년 경성에서는 '미스 코리아'라는 이름의 가수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가수는 앨범 재킷에까지 눈을 검게 가린 사진을 넣어야 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가수 활동이 용납되지 않는 신분의 인물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성모 이후 가장 큰 주목을 끈 얼굴없는 가수로는 SKY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한 최진영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이름과 얼굴을 감추고 <영원>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킬 무렵, 방송가에서는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모 방송사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새로 맡게 된 PD A씨는 SKY의 정체가 최진영이라는 사실을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 흥분은 살짝 '뒷북'이었다. 일반인들은 몰랐지만 방송가에서는 처음부터 SKY가 최진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베일에 가려진 가수 SKY…"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지만 이를 몰랐던 A PD는 촬영팀을 앞세워 최진영이 있던 기획사 사무실을 덮쳤다.

갑자기 나타난 ENG 카메라에 당황한 기획사 측은 즉시 문을 걸어 잠궜다. '얼굴없는 가수 전략'의 핵심은 '언제 얼굴을 공개하느냐'하는 것. 아직 공개의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기획사 사장에게 있어 분위기를 모르고 특종을 요구하는 A PD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이들 얼굴없는 가수군단의 공통점은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정체를 밝힌다'는 것. 그러나 아직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팀도 있다. 지난 90년대 초, 헤비스라는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김원준의 히트곡 <모두 잠든 후에>를 코믹한 가사로 편곡한 <모두 출근 후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을 패러디한 <어떤이의 땅> 등을 히트시키며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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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비스의 핵심 멤버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으로 롱런하고 있는 포크 그룹 나무자전거의 강인봉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당시 제일기획 광고음악 프로듀서로 일하던 강인봉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모아 헤비스라는 얼굴없는 그룹을 조직, 패러디 음반을 발표한 것이다. 헤비스는 예상외의 반향을 얻으며 2집까지 발매하는 호황을 누렸다.

가요계에는 요즘도 얼굴없는 가수들이 나오고 있고, 이런 얼굴없는 가수들은 재활용 가수들(아, 걔가 그때 걔었어?)의 새로운 포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없는 가수라는 것이 전혀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이고 보면, 가요계는 뭔가 좀 더 새로운 홍보 기법을 개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끝)



사실 이런 가수까지 나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걸 짜내라는 것도 무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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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또 어딘가에서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 릭 윤...'어쩌고 하는 얘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얘기가 안 나올때가 됐는데 싶었지만 뭐든 한번 잘못 알려지면 끝이 없더군요.얼마전 2006년 개봉된 '강적'의 리뷰를 이쪽 글로 옮겨왔는데, 거기에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작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사람은?


 영화 퀴즈. 한국인 중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누구일까?

온 세상이 월드컵 판(주=이 글이 처음 쓰여진게 2006년이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인데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잠시 머리를 써 보시기 바란다. 물론 <다이 어나더 데이>의 릭 윤이나 윌 윤 리를 꼽았다면 실격이다. 그렇게 쉬운 문제면 내지도 않았다. 만약 이 문제에 오순택이라는 답을 댔다면 당신의 잡학도도 만만치 않다.
오순택은 지난 1974년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제임스 본드를 돕는 홍콩의 영국 정보요원 입 경위 역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본드는 로저 무어였고, 악당 역할은 전문 드라큘라 배우로 유명한(이제는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이라는 쪽이 더 알기 쉬운) 크리스토퍼 리가 맡았다.

필자는 이번 주초 영화 <강적>의 시사회에서 깜짝 놀랐다. 악의 거두인 황회장 역으로 오씨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70세인 오씨는 지난 59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도미한 뒤 100편에 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한국 영화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강적> 촬영장에서도 오씨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민호 감독과 박중훈 정도였던 것 같다. 조민호 감독은 "첫 작품인 <정글주스>에 출연했던 재미 배우 김만(79년작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올드 팬들에겐 친숙한 이름이다)씨의 소개로 오씨에게 출연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노역 배우 풀이 제한된 한국 영화계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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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뮬란>에서 아버지 목소리를 맡았던 오씨는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아아'하고 알아볼 만한 얼굴.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 야마모토 제독 역할로 출연한 일본계 배우 마코와 함께 할리우드에서는 대표적인 동양인 배우로 꼽힌다. TV에서도 <미녀삼총사> <에어울프> <맥가이버> 등 추억의 외화들에 골고루 등장했고, 필자에게는 지난 82년작인 TV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항하는 남송의 재상 양저 역을 맡은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 서울예대 연극과 석좌교수로 재직중인 오씨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한국 영화의 제작 현장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출연하게 됐다"며 "출연 조건이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생각같지 않더라"며 웃었다.

박중훈과 오순택, 한국이 낳은 할리우드 배우 두 명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 <강적>이 22일, 월드컵 열풍과 정면으로 대결에 나서지만 이를 홍보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도 오씨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에서 41년간 현역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차치하고라도, 모처럼 고국 영화에 출연한 노배우에 대한 예우가 이 정도라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산 경험이야말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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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은 자신을 가리켜 '할리우드에 진출한 두번째 한국계 배우'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첫번째 배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필립 안이라는 것이죠. 필립 안은 <킬 빌>에서 빌 역할을 맡아 요즘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데이비드 캐러딘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리즈 <쿵후>에서 캐러딘이 연기한 케인의 사부 역을 포함해 거의 20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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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택의 출연작 중에는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이상기류에 휘말려 진주만 기습 직전의 북태평양으로 시간이동을 하는 내용이었죠. 여기서 오씨는 니미츠호 함재기에 맞서다 포로가 되는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 역으로 출연합니다. 오씨는 "한국 사람 역할로는 출연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잘 살게 됐으니 괜찮은 역할도 생길 텐데..."라며 허허 웃더군요.

오씨는 자신의 대표작을 <미저리>의 캐시 베이츠와 공연한 독립 영화 <Home of our own>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는 홍콩-태국 등 동남아를 무대로 한 영화라서 친숙한 배경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의 근거지는 태국의 유명한 휴양지 푸껫의 팡아만에 있는 실제 지형으로, 지금은 '제임스 본드 섬'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력을 가진 배우의 한국 영화 데뷔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웠습니다.  한동안 잊혀졌던 정창화 감독에 대한 재발견도 이뤄지는 시대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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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의 비는 '스피드 레이서' 출연으로 주가를 한껏 올렸고, 다시 미국 영화 '닌자 어새신' 촬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박진영 역시 소녀그룹 원더걸스를 히트시키면서 A급 제작자로 거듭났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갈라섰을 때만 해도 매우 불안해 보이는 시점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시각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해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물론 비가 가수로서 미국을 진출하는 것은 아직도 재개 시점이 묘연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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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떠난 비, 불안한 ‘홀로 서기’LA 공연 막판에 취소된 가수 비
송원섭 JES 기자 | 제17호 | 20070707 입력  


2004년 프로듀서로 막 미국 진출에 성공한 박진영씨를 만났을 때 일이다. 그는 대뜸 “우리는 모두 야구선수 박찬호에게 고맙다고 절해도 모자라요”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다.

“미국 여자들은 아시아계 남자들을 섹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공부는 잘하지만 신체 능력이 엉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채노박’이 메이저리그의 A급 투수가 되면서 얘기가 달라졌죠.”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비가 영어만 되면 당장이라도 금발 미녀들이 아시아인에게 환호하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비의 영어 실력은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 상태지만 이 말은 거의 사실이 되는 듯했다. 2006년 이후 비는 최고 권위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에 2년 연속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인기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르가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하고, 뉴욕 타임스가 그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의 리뷰를 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욱일승천하던 비가 최근 살짝 갈지자 행보로 우려를 낳고 있다. 하와이 공연의 취소야 정말 돌발 사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바로 뒤이어 1일(한국시간) LA 공연이 시작 1시간30분을 남기고 취소된 것은 뒷맛이 좀 나쁘다.

관객 2만을 목표로 했던 규모의 공연이 하루 전도 아니고 1시간30분 전에 취소됐다는 것은 공연 주관사의 업무 추진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주관사 ‘스타엠’ 측의 설명대로 현지 공연 업체의 불성실한 준비가 공연 취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더라도 무대가 설치돼 있지 않을 정도로 부실한 준비 상황을 주관사가 공연 당일에야 알았다는 것은 직무유기라 따져도 할 말이 없다.

이 대목에서 미국 LA 타임스는 3일(현지시간) “비가 다시 미국에서 공연하기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흠집을 냈다. 물론 비가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촬영에 들어가 당분간 가수 활동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도 고려한 얘기였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이 정도의 심각한 사고를 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미국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비는 5월 11일자로 그를 키워낸 ‘JYP 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하고 여타 기획사들의 거액 베팅을 마다한 채 홀로 서기에 나섰다. 아직 공식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비는 이제 스스로 프로듀서 겸 아티스트, 그리고 그 자신의 매니지먼트까지 맡아야 할 전망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매니저로도 자신 정도의 거물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인정하기 쉽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와 결별한 박진영씨는 같은 시기에 미국 지사 격인 ‘JYP USA’를 설립, 아시아계 청소년들을 미래의 팝 아이들(Pop Idol)로 키워 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비는 또 만들 수 있다’지만 아무리 노하우가 뛰어나다 해도 만드는 족족 비가 될 수는 없을 게 당연한 일. 헤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둘 다 지나치게 길어 보여 아쉽기만 하다.





지난해 7월7일의 글입니다. 이후 PD수첩에서 비의 잇단 미국 공연 취소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긴 취재 탓인지 미국까지 다녀와서도 시원한 규명은 없었죠. 아직 이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누가 책임이 있느냐'보다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일 것입니다. 분명히 책임은 조각 조각 나눠져 있습니다. 전체 투어를 책임 감독했어야 하는 스타엠의 책임이 분명히 있는 한편, 스타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비나 JYP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발생함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결국 비 본인, 그리고 팬들일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조언은 아랫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707/18/2007071810025618760201000002010200020102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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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황진이'가 개봉됐던게 작년이군요. 송혜교는 요즘 드라마 복귀로 분주합니다. '황진이' 때의 얘기니까 확실히 옛날이죠. 아무튼 기록은 남겨야 하니까.


이제 숙성을 시작한 와인 같은 여자
영화배우 송혜교
송원섭 | 제13호 | 20070609 입력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이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지었다는 ‘동작대부(銅雀臺賦)’의 구절을 슬쩍 바꿔쳐 주유를 흥분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유가 격분한 것은 조조가 강동 일대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이교(二喬) 자매를 탐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교가 누군가. 언니 대교는 죽은 친구 손책의 아내, 동생 소교는 주유의 아내였다.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이 두 미녀로 인해 천하의 영웅들은 마침내 세 나라로 편을 갈라 맞붙게 된다.
 

그 시절 이교가 논란의 초점이었다면 지금 한국 영화계에선 혜교(慧喬)에 시선이 몰린다. 송혜교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가 이번 주말 관객의 심판대에 올랐다. 심은하를 키워낸 사람으로 유명한 이춘연 ‘시네2000’ 대표는 ‘황진이’ 시사회장에서 “한국 영화는 앞으로 10년간 여배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시사 이후에도 영화 ‘황진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어쨌든 송혜교는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제작 전부터 워낙 적역이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던 것을 감안하면 송혜교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하다.

1996년, 김국진과 함께 한 컴퓨터 광고에서 ‘밤 새우지 말란 말이야’라는 광고 대사를 히트시키던 열네 살 때 이후 송혜교는 중요한 대목마다 적역 논란의 대상이 됐다. ‘한류’의 기원을 만든 작품으로 꼽히는 ‘가을 동화’ 오디션 때도 윤석호 감독은 “너무 하이틴 이미지가 강하다”며 송혜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쨌든 송혜교는 역할을 따냈고, 동아시아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이병헌과 공연한 ‘올인’ 때에도 최완규 작가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헌에 비해 너무 어려보여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걸로도 부족했는지 송혜교는 아예 보란 듯 이병헌과 연인이 되어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선언했다.

영화 ‘황진이’의 경우엔 어땠을까. 드라마 ‘황진이’의 하지원과 비교되기도 했고, 북한의 원작자 홍석중이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봤는지 “난 송혜교보다 수애가 하길 바랐다”고 했다는 말도 화제가 됐지만 송혜교는 장윤현 감독이 그려내고자 했던 이지적이면서도 도도한, 시대에 맞서는 황진이의 얼굴을 적절하게 표현해 냈다. 물론 적어도 황진이 역할이라면 좀 더 농염한 매력을 뽐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여배우 송혜교가 일선에서 활동할 시간은 앞으로 줄잡아 15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교(二喬)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군웅들의 운명을 갈랐다면 혜교는 ‘슈렉3’와 ‘다이하드4’ ‘트랜스포머’의 내습에 맞서 한국 영화계를 수호해야 하는 중임을 맡았다. 과연 어떨까.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그로 인해 한국 영화계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만하다. 1982년은 한국 여배우에겐 좋은 빈티지(vintage)다. 손예진과 한예슬, 김아중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 이들과 함께 숙성해 갈 송혜교의 모습이 궁금하다. (끝)







당일 오전에 청탁을 받고 오후 4시쯤 기사를 보냈더니 담당자인 강혜란 기자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썼냐길래 오히려 좀 놀랐습니다. 지난 15년을 '이거 써!'하면 30분만에 날려 쓰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죠. 물론 그런 덕분에 나쁜 버릇도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쓰고 나면 다시 다듬는 게 습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상하게 나이를 먹으니 자꾸 오자가 납니다.




교씨 자매와 주유, 그리고 제갈양의 이야기는 삼국지를 읽어 본 분이면 모두 아시는 얘기일테니 구구하게 보태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송혜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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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갑이라는 건 참 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경쟁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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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갓 건너온 한채영을 봤을 때, 이런 보석이 있나 싶었습니다. 특히 국내 여자 연예인들에게서 흔히 보기 힘든 글래머 체형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했죠. 조랑말을 보다가 서러브렛 순종 말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강렬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한채영은 사진 찍을 일이 있을 때마다 헐렁한 옷을 걸치고 나타났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죠.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년전 드라마 <불꽃놀이> 제작발표회장에 나타난 한채영의 모습은 그날의 헤드라인을 휩쓸어버렸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쓴 글입니다. 그게 벌써 2년이나 지났군요. 그 사이 한채영은 유부녀가 됐죠.



'초원이 다리'만 백만불 짜리는 아니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호텔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리처드 기어는 거품 목욕을 하고 있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렸다"며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이때 줄리아 로버츠의 대답. "이리 와요. 내가 '80인치'로 위로해 드릴게요."

여기서 말하는 80인치란 로버츠의 두 다리 길이. 1인치가 2.54㎝이니 말대로라면 한쪽 다리가 1m를 넘는다는 얘기다.

'다리가 아무리 길다 한들 설마 1m나 되랴' 싶기도 하지만 최근 MBC TV 새 드라마 <불꽃놀이> 제작발표회에 등장한 한채영의 위용은 이런 의심을 한방에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과시했다. 그야말로 '각선미란 이런 것'임을 백마디 말이 필요없게 만드는 무력시위라고나 할까.

동양적인 신체미의 핵심이 목에서 어깨로 내려오는 가녀린 선이라면 쭉 뻗은 각선미는 그야말로 근대 이후 도입된 서구적인 미의 상징. 이런 면에서 한채영의 다리가 주는 느낌은 1980년대 국산 자동차 개발자들이나 90년대 반도체 연구원들이 느꼈을 법한 감회를 줬다. '이제 더 이상 수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물론 한채영에게도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드라마 데뷔작이 2000년 <가을동화>이니 결코 신인은 아닌 한채영. 하지만 데뷔 초에는 인터뷰 사진을 찍을 때 항상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포대자루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소속사 스타제이의 정영범 대표에게 물으니 "몸매를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한다"는 거였다.

저런 몸매를 쑥스러워하다니. 당시 필자의 머릿속에는 초패왕 항우의 '금의야행(錦衣夜行)'이라는 고사가 스쳐갔다. 항우의 라이벌인 유방의 참모들은 전국의 노른자위인 함양을 장악한 항우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공을 세워도 고향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비단옷(錦衣)을 입고 밤길을 가는(夜行) 격'이라는 말을 퍼뜨렸다고 한다. 자랑해야 할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도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얘기. 이런 맥락에서 세월이 흘러 한채영의 생각이 바뀐 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팬들을 위해서나 백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리 얘기를 하자면 제이미 리 커티스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왕년의 명우 토니 커티스의 딸이며 영화 <트루 라이즈>의 주인공 커티스는 한때 스타킹 모델로 나서면서 100만 달러의 '다리 보험'을 들어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몇몇 연예인들이 유사한 보험을 들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해당 보험사에 확인해 보면 '보험료를 내지 않아 그저 명목상의 보험일 뿐'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이쯤해서 보험사 하나가 나서 '한채영 다리보험'을 유치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보험료가 부담스럽다면 그 정도는 보험사가 부담해도 되지 않을까? 최근 며칠 사이 '한채영의 다리'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과 회사 홍보 효과를 생각하면 별로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 같다. '초원이 다리'만 백만불짜리는 아닐 텐데 말이다.
(신문에 실렸던 글은 여기까지.)




아참,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한채영이 몸매 드러내기를 꺼리던 시절'의 증거사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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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푸대자루같군요.^^





물론 한채영의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채영이 몸매 드러내기를 부끄러워 한 것은, '연기자라면 몸매나 외모보다는 연기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박찬호가 '그저 공을 빨리만 던질 수 있는 어깨'를 부끄러워하거나, 차범근이 '발만 빠르면 뭘하나'라고 생각했더라면 과연 그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타고난 재능이나 천분을 과시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도, 부당한 일도 아닙니다.

오늘의 교훈은 '누구나 자신의 장점을 깨닫는 순간이 진정한 자각이 오는 순간'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그렇게 '자각' 할만한 장점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 막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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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는 사람들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모자이크 사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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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자이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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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자이크를 말하는 겁니다. 방송국에서 모자이크를 하고 음성변조를 할 때 신문들은 이니셜 기사를 씁니다. 물론 이니셜 기사는 '선정적인 나쁜 기사'의 표본처럼 되어 있긴 하지만, 다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니셜 기사가 없어지면 필요 이상으로 피해를 보실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Start.



배도환씨, 죄송했습니다.

정치인과 연예인은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 신문에 자기 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사람들이 못 알아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밥은 굶어도 체면 구겨지는 일은 못 참는다.

그렇다면 연예인과 정치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정치인들은 자기가 이것으로 불리는 걸 영광으로 알지만 연예인들은 이걸 죽기보다 싫어한다. 정답은 바로 `이니셜`이다.

일찌기 JP에서 시작해 DJ, YS를 거쳐 KT, DY까지 내려오는 이니셜은 바로 `저렇게만 불러도 누구나 다 안다`는 지명도의 상징이자 거물의 증거였다. 최근엔 고작 30대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을 ES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물론 정치인이 아니긴 하지만 이 두 글자 이니셜의 유구한 전통을 생각하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반면 연예인들은 이니셜로 불리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IS는 얼마전 조폭 관련 사건으로 수사를 받은 연예인들에 대한 보도를 하며 이니셜을 사용했다. 그중 L씨는 "경찰이 신원을 철저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해서 조사에 응했고, 혐의 내용을 전부 부인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내 이름이 마구 나돌고 있더라. 도대체 인권 보호에 관심이 있기나 하다는 얘기냐"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예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무분별한 이니셜 보도` 운운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여기서도 보듯 이니셜 사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당사자의 신원은 보호하되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내용만큼은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까지 실명을 밝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나쁜 이니셜 보도는 있다. 첫번째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주는 이니셜 보도다. 예를 들어 `동남아는 물론 미국에서도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수 겸 탤런트 B`라고 쓰려면 차라리 그냥 실명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다.

두번째는 이니셜을 쓰는 것이 기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쓰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다. 즉 사실이라는 확증도 없는 내용을 기사화하면서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항의를 피해 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이니셜 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심각한 내용보다는 요조숙녀 A양이 드라마 쫑파티를 하다가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잠이 들었다는 정도의, 장난기어린 정도가 대부분이었긴 했지만 대부분의 연예 기사에서 비난받았던 이니셜 기사는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튼 최근에는 K씨, M씨, T씨처럼 구체적인 이니셜은 사라지고, 기사 안에 이름이 나오는 순서대로 A씨, B씨, C씨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가 익명으로 처리된 연예인들의 신상을 보호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만을 가진 분들은 여전히 있었다. 예전에 한 동료 기자는 이런 항의를 받은 일이 있다.

"이것 봐요, 이기자, 아니 왜 이니셜로 기사를 써서 사람을 귀찮게 해."

"저희는 선생님 기사를 이니셜로 쓴 적이 없는데요."

"글쎄 며칠 전에 A양이 B군이랑 어쩌고 저쨌다고 기사가 났다면서?"

"예, 그런데요?"

"사람들이 죄다 날 보고 난리야. 당신이랑 안문숙이랑 사귄다고 신문에 났던데 어떻게 된 거냐고."

항의하던 사람은 바로 배도환. `B군 맞잖아, 나, B군` 하던 그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항의받던 기자는 물론,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모두 웃다가 쓰러져 버렸다. 안문숙씨, 배도환씨, 사소한 일로 가끔 귀찮게 해드린 데 대해 업계 종사자로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p.s. 이 글을 쓰고 났더니 나이 어린 시청자들은 '배도환씨가 누구에요'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니, 국민배우 배도환씨를 모른단 말입니까.

바로 이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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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어린이는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배도환씨의 사진을 보니 웬만한 사진은 모두 어린이를 안고 있군요. 정치인의 특징 중에는 '사진찍을 때는 무조건 가까이 있는 어린이를 덥썩 안아든다'는 것도 있는데, 이분도 기질이 좀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늘 '이니셜이 소용없는 연예인'으로 통하는 가수 겸 탤런트 B군(RAIN), 안재욱씨, 배용준씨 등 여러 A군과 B군들에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한가지만 더. 신문에 가수 J양 혹은 가수 J라고 나오면 그냥 이 분인줄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거 아주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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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처럼'의 가수 제이입니다. 이 분을 쓸 때는 대개 제이(J)라고 쓰죠. 그냥 J양이라고 나오는 건 이니셜이 J로 시작하는 여자 연예인의 신원을 가리기 위해 쓴 겁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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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마돈나’ 꿈꾸며 일본으로
가수 이효리
송원섭 | 제12호 | 20070602 입력
 사진 뉴시스 


가수 겸 엔터테이너 이효리가 바다를 건넜다. 3일 도쿄 국제포럼에서 열리는 ‘SG 워너비’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 20여 분간 무대에 선다. 4일에는 효리 자신이 주제가를 부르고 주인공까지 맡은 드라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유료 시사회도 열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효리의 하이라이트를 일본 관객과 연예 관계자들 앞에 펼쳐 보이는 셈이다. 양쪽 모두 티켓은 매진됐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람들은 상대 국가의 어떤 사물을 소개할 때 자국의 것에 비교해서 설명하곤 한다. 고도(古都) 경주를 설명할 때 일본에서는 ‘한국의 교토’라고 하고, 요코즈나(橫綱ㆍ일본 씨름인 스모의 최고 지위)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도 흔히 ‘일본의 천하장사’라고 말한다.

한국에 이효리가 있다면 일본에는 고다 구미라는 여가수가 있다. 2005년과 2006년 일본 골든디스크 대상을 2연패한 고다 구미는 가창력도 수준급이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인기의 원천은 과감한 노출을 피하지 않는 섹시하고도 역동적인 이미지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두 가수는 그래서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각각 ‘한국의 고다 구미’와 ‘일본의 이효리’로 불릴 때가 많다.

그 ‘일본의 효리’ 고다 구미가 지난해 6월 전남 담양에서 열린 ‘아시아 송 페스티벌’ 참가차 내한했을 때 누군가 “한국의 이효리와 비교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좋다’도 ‘나쁘다’도 아닌, “한국 연예인과 비교하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였다. 그래서 현장에선 “고다가 이효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사실 이효리는 이번이 첫 번째 공식 일본 프로모션이다. 지난해 4월 케이블TV M.net의 일본 개국 축하 공연차 다른 가수들과 함께 한 차례 도쿄 무대에 선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뷰도, 집중 조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연예계가 이효리에 대해 보인 관심은 적지 않았다. 올해 국내 무대에 서기 시작한 소녀가수 윤하는 “일본에서 활동할 때 한국 연예인들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 효리 언니에 대해 묻는 사람이 단연 많았다”고 털어놨다.

최근 국내 활동 성과가 성에 차지 않았던 이효리는 과연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일각에서는 이효리를 ‘한류의 미래’라고 보기도 하지만, 계은숙 이후로 한국 여가수가 일본에 연착륙한 적이 없다는 우려 섞인 비관론도 있다.

고다 구미가 불편해한 것은 자기는 ‘일본의 이효리’가 아니라 ‘일본의 마돈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효리 역시 지향점은 ‘한국의 마돈나’. 효리가 다시 바다를 건너올 때쯤이면 누가 ‘아시아의 마돈나’인지 판가름이 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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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인간, 이눔시키, 왜 정신 사납게 날아다녀?"

영화배우 김수미씨가 전면에 나섰다. 한국 영화계를 덮친 ‘거미 인간’과의 한 판 승부다. 김수미 주연 영화 ‘못말리는 결혼’이 10일 280개 스크린에서 개봉됐다. 좀 외로워 보인다. 무려 800개 상영관을 장악한 외화 ‘스파이더맨 3’의 기세등등한 모습 앞에서 웬만한 한국 영화는 죄다 개봉을 미루거나 피했기 때문이다.

김수미씨로서는 오랜만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만한 작품을 내놓은 참인데, 어쩌다 보니 한국 영화의 명예를 건 전사가 돼버렸다.

그가 드라마건 영화건, 단독 주인공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을까? 있긴 있었다. 1982년 이상언 감독의 영화 ‘화순이’에서 그는 타이틀 롤을 맡았다. 당시 방송되던 MBC TV 드라마 ‘새 아씨’에서 아씨 김영란을 모시는 몸종 화순이 역을 맡았는데, 이 수다스럽고 조심성 없는 캐릭터가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아예 화순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된 것이다.

이때를 빼고 그는 항상 조연이었다. 물론 조연이되 MBC TV ‘전원일기’의 일용엄니처럼 주연보다 인기 있는 조연인 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항상 그 자신의 마음속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반면 영화 ‘못말리는 결혼’은 김수미에 의한, 김수미를 위한 영화다. ‘가문의 부활’과 ‘가문의 위기’에서도 비중이 작지 않았지만 ‘못말리는 결혼’은 김수미를 빼면 아예 영화가 이뤄지질 않는다. 대체 그녀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출연한 최근 히트작들인 ‘가문…’시리즈와 ‘맨발의 기봉이’의 시나리오 작가 김영찬씨는 “김수미씨의 출연이 결정되고 나면 최소 두 번은 시나리오를 고치게 된다”고 말한다. 연습 리딩 때 김수미의 애드리브가 터져나오고, 이 즉흥 대사를 주워 담아 대본을 수정한 뒤 다시 현장에서 김수미의 아이디어를 추가한다는 얘기다.

‘가문의 부활’에서 명장면으로 꼽히는 홈쇼핑 신은 대부분 그가 즉석에서 쏟아 부은 애드리브의 잔치다. 그는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입심을 뽐냈는데 사실 이런 식의 토크도 어찌 보면 김수미가 원조다.

중년이 지나 ‘낼모레 환갑’인 이 배우에게 책(대본)이 쌓이는 이유는 많다. ‘시원시원하게 내지르는 말맛’, 눈에서 느껴지는 묘한 힘 등. 지난해 MBC TV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2’에서 이사벨 역을 맡아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는 이 배우는 “내 라이벌은 김태희”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줄도 안다.

과연 김수미는 이번에 만난 스파이더맨에게는 뭐라고 일갈을 날릴까. “이눔시키, 왜 정신 사납게 날아다녀? 시커먼 거 뒤집어쓴 건 또 뭐야? 한 번 지대로 맞아볼 텨?” 하면서 제대로 맞상대를 해줄 것 같지 않은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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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 - 160만을 넘지는 못했지만 140만까지 선전하면서 그나마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살짝 지켰습니다. 배급사인 롯데까지도 시네플렉스 롯데시네마의 상영관을 뽑아 가는 상황이었으니 그만하면 선전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과연 김수미의 원맨 쇼 외에 무엇이 더 볼게 있었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이 좀 궁색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짐 캐리가 나오는 영화도 대개는 짐 캐리가 유일한 볼거리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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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99년 영화 <카라>의 한 장면입니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이 연출하고 송승헌 김희선 김현주 등 호화 출연진이 출동했는데도 흥행에서는 참패한 비운의 영화죠.

얼마전 이효리가 방송에서 고교시절 강타를 알고 지낸 이야기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톱스타들이 데뷔하기 전에 서로 알고 지낸 경우는 생각보다 그리 드물지 않습니다. 거주지역이 비슷한 경우에는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보는 게 오히려 맞을 겁니다. 한혜진과 송혜교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서 미모 대결을 벌인 얘기도 유명하죠.

물론 안면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관계일리는 없습니다. 성시경의 세화고 선배인 싸이는 학교 다닐 때 주먹 깨나 쓰는 친구들을 시켜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시경을 '잡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써 본 글입니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톱스타가 되어 다시 만난다면?

톱스타 A와 역시 여성 톱스타인 B에게는 사실 남들이 모르는 비밀 하나가 있다. 바로 어린 시절 함께 발가벗고 물놀이하던 친구 사이라는 것. 이들은 자신들의 우정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우정이 사랑으로 바뀐다…?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현실로 나타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의 스타들 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사이가 아주 없지는 않다. 국가대표급 미남 미녀라고 할 수 있는 송승헌과 김희선이 한 동네 친구라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까지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얘기였다. 송승헌이 나온 영훈고는 미아동, 김희선이 나온 혜성여고는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어 한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송승헌은 "어린 시절부터 김희선이라는 예쁜 여학생이 있다는 사실은 인근 남학교 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서로 아는 친구들이 있어 어린 시절 몇 차례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고 옛일을 회상하기도 했다.

물론 김희선은 고2때인 93년부터 연예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당시 그냥 일반인이었던 송승헌과는 신분의 격차(?)가 있었던 셈. 송승헌도 96년 MBC TV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을 통해 방송에 데뷔한 뒤 지금의 톱스타로 성장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이력을 자랑하지만 이들은 지난해 1월 방송된 MBC TV <슬픈 연가>에 캐스팅되기 이전까지는 함께 일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송승헌은 군 면제 파문으로 빠져나갔고, 송승헌의 역할은 연정훈이 대신 하게 됐다. 이들이 함께 <슬픈 연가>를 촬영했더라면 혹시 어떤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효리는 최근 동갑내기인 신화 멤버 김동완과 고교시절 소개팅을 했던 사연을 공개했다. 이효리가 서문여고, 김동완이 휘문고 출신이니 이들 역시 '강남 8학군'이라는 같은 커뮤니티 출신.

이효리는 일찍부터 '서문여고 짱'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소개팅은 김동완이 '이효리를 소개시켜 달라'고 친구들을 졸라 이뤄졌다. 당시 김동완은 록 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연기자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절이라 가죽 바지 차림으로 소개팅을 나왔다는 후문이다.

이효리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김동완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만나자마자 반말로 '네가 효리냐? 네가 예쁘다기에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며 천연덕스럽게 반말을 하는 태도에 질려 그날 이후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과거의 비화를 소개했다.

김동완은 이때부터 연예인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효리가 핑클로 데뷔한 것은 국민대 연영과 진학 뒤의 일. 만약 이효리가 나중에라도 김동완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이것 역시 그저 상상일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를 따지자면 세븐과 박한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안양예고 동기동창인 두 사람은 연예계에 데뷔한 것과 동시에 열애설의 주인공이 됐다는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본인들은 '별 사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하지만(물론 10대들이 사귀었대봐야 무슨 일이 있었을까마는)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이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떠돈 것도 2002년 월드컵 현장에서의 응원 광경 사진, 그리고 안양예고의 소풍 기념 사진 등 인터넷에서 떠도는 온갖 사진마다 두 사람이 바로 옆에 꼭꼭 붙어있더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들 역시 앞날이 어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이다.

이런 동화가 현실이 된 케이스라면 여의도중학교 선후배간인 손지창-오연수 부부의 스토리. 평소 너무 친해서 '혹시 사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던 이들이 부부가 되어 잘 살고 있는 이야기처럼, 어린 시절의 친구가 함께 스타가 되어 맺어지는 순정만화같은 스토리가 어디선가 구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연예계에 대한 흥미를 부풀리는 요인 중 하나다.

2006.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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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주간 <프라이데이>에 쓴 첫번째 칼럼입니다.

당시는 WBC가 한창일 때라 야구 열기가 뜨거웠죠. 마침 ESPN 연예인 야구리그도 시작됐고, 실력으로 한국 연예인 야구리그의 최고 선수들은 누군인지 뽑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야구기자를 거친 만큼 야구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터라 말이죠.

그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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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를 휩쓴 한국 야구의 위력이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하긴, 그럴 만 하다. 한국인의 야구열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프로야구 리그는 물론이고 연예인들이 주축이 되어 뛰는 전 세계 유일의 '연예인 야구 리그'가 있는 나라이니 말이다.

케이블 TV 스포츠채널 MBC ESPN은 요즘 주말마다 연예인 리그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다. 정준하 이휘재 유재석 등이 주축이 된 '한', 박상원 김태균 이종원 등의 '조마조마', 강성진 손무현 정웅인 등이 뛰는 'CRP', 그리고 양상문 김용철 등 왕년의 스타들이 나서는 'MBC 올스타(아나운서-해설위원 팀)' 등 4개 구단이 매주 2경기씩을 펼친다.

이들 외에도 연예인이 주축을 이룬 팀으로는 안재욱 김건모 이성진 등이 주축인 '재미삼아'와 장동건 주진모 정우성 조인성 등 초 호화 멤버를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스'가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두 팀이 MBC ESPN 리그에는 참가하지 않게 됐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장 역사가 오랜 한과 재미삼아의 라이벌전은 '연예인 야구'를 대표하는 명승부로 꼽혔다.

그렇다면 연예인 야구계를 뒤흔드는 스타플레이어들 중 베스트9은 과연 누구일까. 이쯤에서 '연예인 드림팀'을 한번 뽑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듯 싶다. 경기 결과가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아 야구의 생명인 통계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각 구단 관계자들과 상대 팀 선수들의 평가에 따라 포지션별로 베스트 플레이어를 꼽아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연예인 야구계 최강의 에이스는 함정엽 지티비엔터테인먼트 대표(CRP). 차승원 유지태 허준호 김소연 등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함대표는 서울고 재학시절 시속 154km를 던져 1년 아래인 부산고의 박동희와 함께 80년대 중반 고교야구계의 양대 강속구 투수로 군림했던 유망주였다.

그러나 한양대 진학후 부상으로 야구계를 떠나 매니지먼트계로 진출했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 <웰컴 투 동막골>의 장진 감독(CRP)과 의기투합, 연예인리그에 뛰어들었다. 물론 왕년에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으니 연예인으로 봐도 무방하다. 지금도 시속 13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모습을 보고 상대 팀들이 일제히 항의, 연예인리그에서는 '선수 출신은 한 경기에서 3이닝 이상을 못 던진다'는 '함정엽 룰'을 만들었다. MC로 변신한 프로야구 10승 투수 강병규(전 두산)가 오지 않는 한 '이 판'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평가다.

SBS 염용석 아나운서(한)와 장동건(플레이보이스)도 시속 120km대의 수준급 구속을 자랑한다. 특히 염용석은 볼끝이 좋아 '라이징 패스트볼'로 불릴 정도. 반면 만화가 박광수(조마조마)는 체인지업을 주 무기로 하는 변화무쌍한 구질로 에이스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3D 직종인 포수는 '연예인 야구단'에서는 기피 포지션이다. 가끔이라도 포수를 보는 선수는 해설위원 겸 선수인 배칠수(한)나 개그맨 위양호(조마조마) 정도. 별 선택의 여지가 없다. 1루수로는 현재 정준하를 위협할만한 선수가 없다. 거구에서 뿜어나오는 힘과 유연한 허리, 여기다 드문 왼손잡이라는 이점도 겹쳐 '연예인야구의 이승엽'으로 군림하고 있다.

2루수에는 야구 명문 신일고의 내야수였던 허준호(한)의 아성에 수비가 좋은 스위치 히터 윤종신(한)과 강타자 이종원(조마조마)이 도전하는 양상. 3루수로는 NRG 이성진(재미삼아)이 최고로 꼽히고 유격수 부문에선 연예인 야구계 최고의 강타자 중 하나인 김승우(플레이보이스)가 '재치있는 야구'로 손꼽히는 안재욱(재미삼아), 이휘재(한)과 경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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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에서는 춘천고 재학중 선수로 뛰었던 가수 김C(한), 사회인야구 8년의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는 강성진(CRP), 영화 <사랑니>의 주인공으로 2년전 서울고 재학중 청소년대표 상비군에도 뽑혔던 신인 배우 이태성(한)이 각각 중견수-좌익수-우익수의 베스트로 꼽힌다. 여기 경합하는 선수들은 호타준족의 공형진(플레이보이스)과 김태균(조마조마) 정도.

궁금한 것은 이렇게 야구라면 죽고 못 사는 스타들이 많은데 <YMCA야구단>이며 <슈퍼스타 감사용>같은 야구 영화에선 왜 이들 스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까 하는 점. 할리우드에서 야구광을 꼽자면 요즘은 별 소식이 없는 케빈 코스트너가 첫 손에 꼽힌다. <19번째 남자(Bull Durham)>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the Game)> 등 야구영화만 3편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케빈 코스트너처럼 스크린이나 드라마에서도 강속구를 뿌리는, '한국의 케빈 코스트너'는 과연 누가 될지도 궁금하다.

혹시 아나. 이들이 당장 내일 의기투합, 세계 4강에 오른 한국 WBC 대표팀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을지.

2006. 3. 16



2년이 지났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이런 스타들이 대거 야구영화에 뛰어든다는 소문도 아직 전혀 없고. 취미는 취미로 그냥 즐기자는 생각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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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isblog.joins.com/fivecard/13)


흔히 조선 3대 악녀(?)로 정난정, 장녹수, 장희빈을 꼽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에 광해군 때의 상궁 김개시(개똥이)를 포함시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아무튼 조선같은 신분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정권을 농단할 수 있었다는 건 대단한 재능이라고 봐야겠죠.

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준기에 비해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성연은 농염한 연기로 전과는 크게 다른 느낌을 심는데 성공했습니다. TV에선 지나치게 바른생활소녀 역할만 해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무튼 강성연이 연기한 장녹수는, 실제로는 강성연 만한 미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미녀가 아닌데도 남자를 녹이는 별난 재주가 있었다...는 것이 요지인데, 한번 자세한 내용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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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2] <왕의 남자>의 진실은?

연산군이 정씨와 엄씨의 시신을 처리한 방식은 원문에는 '裂而?之, 散棄山野'라고 되어 있다. '잘게 찢어 해(?,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흩뿌렸다'는 뜻이다. 시신마저도 제대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은 최고의 형벌을 뜻한다. 일찌기 한고조 유방이 통일의 공신인 팽월을 죽인 뒤 시체를 해(?)로 만들어 각지의 장수들에게 돌려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내용은 뒷날 '중국인은 사람 고기를 수시로 먹었다'는 오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저 처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분풀이가 되지 않았던 새디스트들이 개발한 복수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4. 장녹수는 정말로 연산군을 아이 다루듯 했나?

강성연이 연기한 장녹수는 연산군을 아기 다루듯 하며 공길과 연산의 관계를 질투하는 드센 여자로 나온다. 과연 실제의 장녹수는 어떤 여자였을까.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장녹수는 이팔 청춘도 아니었고, 빼어난 미인도 아닌 30여세의 농염한 여인이었으며 특히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다'는 것은 실록에도 나온다. 실록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장녹수는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寵愛)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얼굴은 보통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엄청난 상을 내렸다. (중략)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


5. 이극균은 정말 역모를 일으켰나?

광대들을 동물처럼 풀어놓은 사냥놀이에서 진짜 화살을 쏘다 잡힌 신하에게 연산군은 "네놈은 내 어머니에게 사약을 안긴 놈이 아니냐"고 말한다. 대본상으로 이 인물은 이극균이다(사실 진짜 이극균은 연산군에게 처단될 때 이미 67세의 노인이었으므로 활을 쏘아 누구를 노리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종조에 북방의 야인들을 무찔러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공이 많았으나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사당할 때 조카 이세좌와 함께 사약을 받든 탓에 갑자사화의 희생양이 됐다. 영화와 같은 사건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산군은 이극균이 '나라의 명을 따랐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없다'며 사약을 먹지 않고 목을 매어 죽자 시신의 목을 베어 효수한 뒤, 나중에는 무덤을 파 백골을 바람에 날리게 하는 등 복수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극균과 이세좌의 운명은 두고 두고 얘깃거리가 됐다. 뒷날 숙종 때의 장희빈은 사약을 거부하며 "나에게 사약을 안기는 자는 뒷날 이세좌의 꼴이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뒷날 경종이 될 운명이었으니 그리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다만 경종이 단명하는 바람에 갑자사화와 같은 피바람은 다시 일지 않았다.


6. 한글로 연산군을 욕한 벽보가 붙었나?


이것이 유명한 익명서 사건이다. 1504년 7월, 신수영의 집에 익명으로 된 투서가 날아들어왔다. 살펴보니 3명의 의녀들이 모여서 임금을 비판했다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익명서가 순 한글로 쓰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한 의녀가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하고 묻자 다른 의녀가 ‘그렇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하려니와,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대답했다는 등의 대담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이 익명서를 보고 연산군은 대노하여 익명서의 등장인물들인 실재 인물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다들 '전혀 모르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대신들은 '고발하는 자에게는 범인의 재산과 베 500필을 주고, 벼슬이 없는 자라면 3품 벼슬을 주며, 천민이면 양인을 만들어 준다'는 후한 상을 내걸기를 주청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범인이 잡히자 않자 연산군은 몸이 달았다. 7월22일에는 한글을 쓰는 자를 처벌하고, 한글로 구결을 단 책까지 불태우라는 '언문 금지령'이 내려지고, 7월23일에는 한글을 잘 쓰는 자들의 필체를 보고하게 하여 필적 대조를 통해 범인을 잡으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결국 25일에는 한글과 한문을 잘 쓰는 자들의 필적을 사헌부 등에서 보관하게 하여 뒷날의 사단에 대비하라는 조치가 내려진다. 이렇게 난리를 피운 데 비하면 범인이 잡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필적 대조 사태는 영화에 나온 것과 과히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7. 연산군은 동성애자였나?

정사든 야사든 '연산군과 동성애'에 대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산군에게서는 과도한 이성애의 흔적이 보일 뿐이다. 나중에 숙원의 직첩을 받은 장녹수를 비롯해 전향, 수근비 등의 수많은 여인들이 실록에 이름을 드러낸다. 특히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잔치에 불러 오래도록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종친인 월산대군부인 박씨와도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월산대군은 아버지 성종의 친형이니 자신의 큰어머니를 능욕한 셈이다.

연산군 12년(1506년) 7월20일, 월산대군부인 박씨가 사망한 내용을 다루며 실록은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자결한 것이라고 쑥덕거렸다(人言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스캔들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이 바로 이 대군부인 박씨의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박원종은 누이의 시신 앞에서 통곡했고 그로부터 불과 40여일 뒤인 9월2일, 성희안 유자광 등과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물리치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한다. 아무튼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의 온라인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참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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