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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한국에 온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던 무렵, 저 바다 건너 나라에서 치러진다는 다양한 락 페스티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한 폭의 상상도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글래스톤베리며 후지 락 같은 이름들을 듣게 됐을 때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꽤 듣게 됐습니다. '냄새나고, 진창에다, 덥고 더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은 계속 커졌고, 언제 한번 그런 곳에 가서 뒹굴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록 페스티발이 열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바로 1999년,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발'이란 이름이었죠. 하지만 첫 만남은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비가 며칠씩 쏟아지는 가운데 송도 갯벌에 세워진 무대와 주변 공간은 거대한 진창으로 변했습니다. 공연은 좋았지만 새로 산 신발 한 켤레가 재기불능이 되어 그냥 버려야 했고, 주차해 놓은 차가 물에 빠져 레커차를 불렀습니다. 비를 맞으며 진창 속에 서 있자니 극기훈련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걸 즐길 나이는 어느새 지나가버렸나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 후로 오랫동안, 아예 록 페스티발이라는 말을 잊고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디 가서 잘 놀고 왔다는 얘기를 해도 '너희들 아직 젊구나'라며 웃어넘겼죠. 그러다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31일 지산 락 페스티발을 통해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한 거죠.


지산리조트에서 열리는 지산 락페에는 3개의 무대가 설치됐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빅 탑 스테이지. 31일에는 오후 5시30분에 장기하와 얼굴들, 7시에 언니네 이발관, 그리고 9시에 왕년의 형님들인 펫 샵 보이즈가 공연하는 라인업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다른 무대에서 열리는 6시30분의 크래쉬도 있었습니다.

한낮의 땡볕은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 오후 일찍 경부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빅탑 스테이지 앞의 드넓은 잔디밭이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더군요. 본래 잔디밭은 텐트를 위한 공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몇개의 텐트가 진출해 있었고, 낚시 의자를 동원한 '선수'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대세는 돗자리.



네. 지산 락페의 문화는 바로 돗자리의 문화였습니다. 공연은 당연히 서서 보고, 아무데서나 땅에서 뒹구는 저 서양식 락페와는 달리 한국의 락 페스티발은 돗자리와 선크림이 함께 하는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락 페스티발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여초 공간이었다는 점. 수만 많았던 건 아닙니다. 조금만 뻥을 보태면 온 나라의 미인들은 다 와 있는 듯 했습니다.



도착하고 현지 적응을 마치고... 시원한 맥주로 일단 몸을 헹구고 나니 뜨거운 날씨도 한결 견딜만 해졌습니다. 이내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이 시작됐고, 어디 한번 뛰어 볼까....

역시 뛰니까 덥더군요. 장기하의 고동색 티셔츠가 30분만에 검정색으로 변할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습니다. 공연 중간 지나가는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 해서 반가워했는데 알고 보니 사방에서 쏘아올리는 물총.^^ 사방에서 뿜어나오는 사람들의 열기로 갑갑한 공간에서 이 물총 놀이는 매우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락 페스티발의 다른 이름은 자유입니다. 풀타임 공연을 다 미친듯이 '달릴' 수도, 또는 돗자리와 양산 아래서 누워서 즐길 수도 있는 거죠. 각자의 체력과 취향에 따라 즐기는 문화가 성숙해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화장실(특히 여자 화장실)은 갈 때마다 장사진이었고, 먹거리며 마실거리를 사는 줄도 항상 길더군요. 그렇지만 짜증 내는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시간에 비해 모든 시간이 천천히 진행됐습니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줄을 서고, 누워서 음악을 듣다가 흥이 나면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기도 하고,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허공에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잔디밭에 누워서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는 기분.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문득 20년 전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네.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먹고 마시는 사이 언니네 이발관이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들으며 또 먹고 마시고, 언니네 이발관의 강렬해진 베이스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론 언니네가 역시 여성 팬들이 많았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면서, 그렇게 완전히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깜깜해진 뒤, 이날의 헤드라이너인 펫 샵 보이즈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돗자리를 걷고 무대 앞으로 우루루 몰려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외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백인 여성 두 사람이 맞고를 치고 있는 진푼경도 있었죠^^), 무대 앞쪽으로 가 보니 외국인과 내국인의 비율이 1:2 정도는 될 듯.



사실 공연장에서 이 '외국인'들은 약간 애물이기도 합니다. 액션이 크고 부딪힐 위험이 있고 무엇보다 체취가 좀 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여름철, 그리고 이런 야외에서는.... 하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뒤쪽을 외국인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됐습니다.

뭐 이런 것도 공연의 재미라면 재미겠지만 아무튼 이 냄새나는 덩치 큰 형씨들이 땀에 젖은 등을 비벼 오는 건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뒤에 있던 친구는 음료수인지 뭔지가 담긴 작은 통을 들고 뛰다가 계속 제 다리에 액체를 흘리더군요.

도시였다면 싸움이나 언쟁이 오갔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락페. 그냥 잊고 즐기는게 상책입니다. 아무튼 기다림은 지나고 음악이 꽤 사람들을 달궜을 무렵, 마침내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강렬한 비트의 신스 팝이 관중들을 들뜨게 하고 30분 남짓, 첫번째 절정은 알려질대로 알려진 히트곡 'Go West'에서 왔습니다. '오 오 오오 오오오, 오 오 오오 오오오'하는 전주와 함께 관중들은 전부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춤사위도 없고, 세련되게 추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냥 그저, 다들 제 흥에 겨워서, 전부 색다른 자세로, 하늘을 향해 뛰는 겁니다.


(요긴하게 쓰였던 저 골판지 박스, 공연 내내 쌓았다 허물었다 하다가 끝날때는 관객들에게 던져서 가져 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대체 그걸 가져다 뭐에 쓰시려는지.^^)

밤이라 더위는 훨씬 견딜만 해졌지만 사람들의 열기는 몇배나 뜨거워져서, 공연 후반부는 다시 돗자리 모드.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모든 손님들을 무대로 달려나가게 했던 전설의 히트곡 'It's a sin'으로 공연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Go West'의 전주부를 합창하며 앵콜. 그리고는 'Being Boring'과 'West End Girls'가 흘러나왔습니다.

...정말이지 스물 몇살때였다면 집 같은 건 정말 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평생 다시 보기 힘들 형님들의 공연을 귀가 문제 때문에 맨정신으로 봐야 했다는 게 정말이지 안타까웠습니다.ㅠㅠ)


비록 귀가 때 주차장 연결 버스의 수가 너무 적어 1시간 가까이 길에서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이런 부분은 좀 시정되어야 할 거라고 믿습니다),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공연을 만들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됐고,

내년에는 공연이 끝나도 집에 오지 않을 방법을 연구해보게 됐습니다.^^


P.S. 웬만하면 근 10년만에 들어보는 쿨라 셰이커와 서드 아이 블라인드, 그리고 얼마 전 내한공연을 했던 뮤즈의 1일 무대도 찾아 보고 싶었지만, 밥벌이가 유죄라..ㅠㅠ 티켓이 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시간과 여유가 되는 분들은 오후에 고속도로를 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P.S.2. 주변에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시는 분들, 지금부터 내년을 위해 친구를 잘 사귀어 보시기 바랍니다. 1년, 금세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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