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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소녀시대 왜색논란'이라는 검색어가 요란하더군요. '성형 논란은 있었어도 웬 왜색 논란?'이라고 생각하며 보니 논란의 근원은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입니다. 뭐 이미 아실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요점만 말하자면, 소녀시대 앨범 재킷의 중앙에 위치한 프로펠러기가 2차대전때 일본이 사용한 제로전투기의 모습이며, 윤아가 쓰고 있는 모자의 장식이 나치 독일 공군의 상징인 독수리 마크와 거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색 반, 나치 반이 논란의 핵심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소녀시대가 아니라 '제국시대', '전범시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한참 돌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게 소녀시대의 인기에 찬물을 끼얹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들이 온갖 매체들을 통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참 눈들도 좋구나 하는 것, 둘째는 정말 할일 없는 기자들이 많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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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색이라는 말을 일단 사전에서 찾아봅시다(왜색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청소년들도 꽤 되는 듯 합니다). "일본의 문화나 생활양식을 띠고 있는 색조"라고 나옵니다. 대략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왜색=일본풍'이란 뜻이 되죠. '왜(倭)'라는 말은 일본의 오래 전 이름이자 비하하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즉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부를 때 한국인이 모욕감을 느끼듯, '왜'라는 호칭은 비하와 적대감을 담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 '왜색'이라는 말은 최악의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은 가요 투성이었고, 사회와 문화 각 분야에서 '왜색'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드라이브는 역설적으로 당시의 한국 사회가 '왜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어디를 가나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에 '다꾸앙'을 찾았고, 손톱은 '쓰메끼리'로 잘라야 했고, 부엌에서는 '다마네기'를 까고 있었죠. 대대적인 국어 순화운동이 일어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물리적인 광복 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 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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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본 문화는 이미 개방된지 오랩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게임, 가요, 영화, 내놓고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일본 만화 주인공들의 의상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취미로 받아들여 진지 오래입니다.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르면서 일본 팬들을 향해 '여러분 사랑해요'라고 외치는게 당연히 받아들여 지는 시대인 겁니다.

이런 시대에 '왜색'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녀시대의 저 영식전투기가 '왜색'이라면 과연 '왜색'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왜색'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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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라도 '왜색'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 옷을 입은 이 분이 '미스코리아'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이 분은 한 나라를 대표해서 외국에 나갔던 상황이었죠. 그런 분이 이런 국적불명의 의상을 입고 '이게 한국 옷'이라고 우긴다는 건 비판받을 만한 일이었죠. 하지만 소녀시대가 지금 국가대표로 앨범을 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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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왜색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표방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집니다. 저 앨범 재킷을 보고 저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저것이 문제가 되려면, '(1) 소녀시대는 매우 인기있고 영향력도 크다 (2) 소녀시대가 일본 제국주의의 표상을 사용했다 (3) 소녀시대가 하는 것은 옳고 아름다운 것이다 (4) 소녀시대가 일본 제국주의의 표상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옳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미다 (5) 나도 일본 제국주의의 옹호자가 되겠다' 라는 식의 사고 과정이 소녀시대 팬들 사이에서 진행되거나, 진행될 우려가 있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소녀시대 팬들이 모두 참치나 새우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 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위험하다면, 한 눈에 일본의 영식전투기를 알아보고, 한 눈에 나치의 문장을 알아보는 밀리터리 마니아들이야말로 제국주의와 침략 노선에 경도된 사람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밀리터리 마니아들이야말로 이런 식의 시각을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이들 마니아들을 탓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런 지적이 순수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든, 또는 자신의 밀리터리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든, 이런 주장 - '소녀시대의 일본 제국주의(혹은 나치) 상징 이용은 심각한 문제다!' - 을 개진할 자유는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네. 이런 주장을 펴신 분들에겐 그런 주장을 펼 만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물론 누군가 이 분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유 또한 보장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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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웃기는 것은 이런 주장을 좌우 판단 없이 그냥 받아들여서 사회적인 이슈로 포장하는 일부 매체들입니다. 23일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덮었던 수많은 '소녀시대 왜색논란'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들 가운데서 과연 21세기 초의 한국 사회에서 '왜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와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저 앨뱀 재킷에서 과연 일본 제국주의나 나치즘 추종의 혐의를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 없이 '어, 인터넷에서 화제래. 쓰자'와 '야, 쟤들이 썼네. 베끼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긴 얼마 전, 일본 작가가 만든 일본 원작이고, 무대도 일본인 '블러드'에 출연한 전지현을 보고도 '왜색 논란'이라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작자들이 있는 걸 보면 이 정도는 대단히 양호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믿기지 않는 분들은 '전지현 왜색'을 한번 검색해 보시죠.)

도대체 왜 이런 사건들이 '논란'으로 포장되는 걸까요. 더욱 우울해지는 건 날이 갈수록 이런 일들은 더욱 심해질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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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은 그냥 기분 푸시라는 짤방입니다. 참 코믹하기 짝이 없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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