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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0년생인 펠레는 1958, 1962, 1970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 줄리메 컵을 영원히 조국 브라질에 귀속시킨 영웅이 되었다. 물론 펠레에게는 좋은 파트너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가린샤, 후기에는 자일징요(자이르지뉴) 같은 초특급 스트라이커들이 곁에 있었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브라질 축구와 유럽 축구 사이에는 꽤 레벨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은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신 브라질을 쓰러뜨린(그리고 나중에 북한도 탈락시킨)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이 대회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처럼 축구란 역시 알 수 없다. 오늘날의 펠레는 '예측 못 하기로 유명한 왕년에 축구 좀 했던 아저씨' 대접이지만 펠레가 아니라도 원래 맞추기 힘든게 축구의 승부다. 더구나 스코어까지 맞춘다는 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펠레가 한국 팀과 붙어도 아슬아슬한 승부가 연출될 수 있는 게 축구다. 50년 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 펠레는 한국에서 딱 한번 경기를 한 일이 있다. 1972년 6월2일. 당시 소속팀이던 산토스의 아시아 순회 경기에 참가해 서울운동장에서 국가대표 상비군과 친선 경기를 펼쳤다. 차범근 이회택 이세연 박이천 김호 등 당시의 톱스타들이 모두 출전했는데 차범근과 이회택이 득점하며 종료 4분전까지 동점으로 접전을 펼치다 3대2, 한골차로 패했다. 

펠레는 후반 한 골을 넣었지만 '펠레 부진'이라는 기사 제목이 뽑힐 정도로 당시 한국 팬들이 펠레에게 건 기대는 컸던 모양이다. 3만5천 관중이 모이고, 나중에는 관중들이 펠레에 붙어 밀착 수비하는 이차만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전에 본 이회택 회고록에는 "이차만이 경기 전부터 '펠레는 내가 꽁꽁 묶겠다'고 장담을 했다. 나중에 한방, 어! 하는 사이에 펠레에게 공이 가더니 바로 골이 됐다. '책임진다더니' 하는 뜻을 담아 이차만을 쳐다봤더니 이차만이 '형, 딱 한번 눈 질끈 감았소. 관중들도 표값은 해야지' 라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펠레가 뛴 산토스 팀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건 한국 축구계의 대단한 쾌거로 평가됐다. 다른 기사를 보면 암표가 극성을 떨고, 경기장 앞에서 사람들이 '펠레 방석'이라며 펠레 사진이 박힌 신문을 팔고, 펠레 얼굴이 인쇄된 '펠레 손수건'이 날개돋친듯 팔렸다는 내용을 봐도 대단한 화제였다.



3. 사실 펠레=골이라는 게 기본 상식이지만, 펠레는 본질적으로 '득점을 만드는 선수'지 '골 넣는 기계' 타입이 아니었다. 야구만큼 공식적으로 매겨진 것은 아니지만 축구에서의 등번호 역시 포지션과 관련이 있다. 

야구의 1번이 투수이듯 축구에서의 1번은 당연히 골키퍼. 2~6번은 수비수고 7~11은 공격수다. 대략 7번과 11번이 양쪽 윙어를 말하고, 전통적으로 스트라이커, 즉 센터포워드의 번호는 9번이었다. 펠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꼽은 디 스테파노에서 호나우두, 해리 케인에 이르는 9번의 역사는 유구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래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펠레는 10번. 물론 어느 포지션에 갖다 놔도 아마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심지어 골키퍼를 포함해) 뛰어난 축구감각을 가진 선수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10번이며, 마라도나와 메시가 10번을 달게 한 그 사람이다. 펠레 이전에도 푸스카스와 같은 역사적인 포워드들이 10번을 달았지만 진정한 10번, 최전방에서 미드필드까지 공격을 조율하며 득점을 창출해내는(스스로 넣든, 넣게 해 주든) 역할을 정립한 것은 누가 뭐래도 펠레다.

당연한 얘기지만 펠레 이후 브라질의 에이스들은 무조건 '제2의 펠레'로 시작했다. '하얀 펠레'로 불렸던 지코(지쿠)를 비롯해 나타나는 족족 '펠레의 후계자'로 불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브라질의 에이스는 펠레-지쿠-베베토-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10번 계열과 가린샤-자일징요-소크라테스-호마리우-호나우두로 이어지는 9번 계열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현재까지 나타났던 선수들 중 진정한 '제2의 펠레'라면 호나우지뉴를 꼽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얼마 전 FIFA 홈페이지에서 이번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축구의 GOAT는 메시로 판가름났다는 망발을 저질렀다가 곧 내린 적이 있는데(마라도나 팬들의 항의로 없어졌다고 함), 메시가 2026년 월드컵에 출전해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지 않는 한, 펠레-마라도나-메시를 놓고 벌이는 GOAT 논쟁은 앞으로도 수십년간 유효할 것이다. 

펠레에게 축구는 '뷰티풀 게임'이었다. 이기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로, 축구를 전쟁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와 브라질의 축구가 아니었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미학에 충실한 것이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 심지어 요즘에도 - 브라질 대표팀의 축구를 보다 보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선수들이 '너희 이런 식으로 하면 나 안 해', '이렇게 재미없게 하면 나 안 해'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같은 남미 축구라고 해도 정말 황소떼처럼 밀어붙이는 아르헨티나 축구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펠레의 시대에는 그렇게만 해도 월드컵 우승도 할 수 있고, 만사가 행복했다. 유럽 축구가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며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으던 시절도 아니었다(펠레의 유럽 이적을 막기 위해 브라질 정부가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프리메라리가가 지금의 프리메라리가라면 펠레는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을 것이다). 모든 게 지금보단 소박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제 10만년 이내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참 슬프다. 

RIP. 펠레. 



P.S. 펠레의 아버지도 축구선수이긴 했지만 크게 성공한 선수는 아니었다. 펠레는 한때 '제2의 펠레'를 묻는 흔한 질문에 "제2의 펠레는 나타날 수 없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너무 늙으셨거든"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7명의 자녀를 뒀는데 그중 축구선수가 된 것은 장남(넷째) 에디뉴 하나 뿐. 하지만 골키퍼였고, 국가대표급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산토스에서 2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온 세계가 기대한 '펠레 2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축구에서도 성공한 2세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축구를 잘 하는 데 있어 유전자의 힘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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