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 <타인의 삶>으로 알려진 이 독일 감독의 2018년 작품. <작가 미상>은 독일어 원제인 <Werk ohne Autor>, 즉 ‘작가 없는 작품’에서 직역한 것. 영어 제목인 <Never look away>는 소년 쿠르트에게 이모 엘리자베트가 해 준 말에서 따 왔다.
2.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따라가고 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두각을 보이던 시점에 서독으로 망명했다는 점, 동독에서 그렸던 대형 벽화는 그가 탈출한 뒤 즉시 지워졌다는 점 등이 영화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의 가족사 디테일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3.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의 원혼이 된 사람들은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히틀러와 조언자들은 집시, 정신병자, 심신장애인, 심지어 소아마비 환자들까지도 우월한 순수 게르만 민족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세하거나 수용소에 가둬버렸다.
4.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군사법정에서 나치 부역자들을 심판했다. 처음에는 군 지휘자와 정치가들을 처단했고, 나중에는 위에서 말한 인종청소에 가담한 의사, 판사, 경찰 등을 피고인석에 세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냉전이 시작됐고, 미군 점령하의 서독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맡아야 했으므로 독일의 재무장과 생산력 회복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자발적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전범 심판은 ‘더 이상 생채기를 내지 말자’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1948년까지 집중적으로 펼쳐진 전범 재판의 피고인들은 상당수가 실형, 특히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61년 이전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상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주제)
5. 주인공 쿠르트는 어려서는 나치에 의해, 성장기에는 소련을 추종하는 동독 정부에 의해 ‘예술이란 국가와 사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피를 뿌리며 싸운 상대방이지만 의외로 똑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never look away)’ 는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6. 189분. 만만찮은 시간인데 어느 주말 새벽 1시쯤 보기 시작해서 4시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흐름이 빠르거나 대단한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일단 쿠르트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그걸로 끝. 3시간 순삭이다.
7. <타인의 삶>에 만족하신 분이면 무조건 봐야 할 영화.
<여기서부터는 아마도 스포일러.>
8. 영화는 한 세대를 휩쓴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한 예술가가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성공이 예견되는 엔딩은 일면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결코 할리우드적인 해피엔딩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지나간 시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굳이 지나간 세월의 묻혀진 진실을 파헤쳐서 새삼 또 무슨 상처를 내겠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은, 예술은 무엇을 위한 도구도 아니며 무엇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선 속 시원한 단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치 않게 그 유산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다음 세대에게 그 무게를 전가시키지 말자는 이야기일까. 이모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엔딩은 왠지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말하는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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