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이 있고, 왕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있습니다. 영화적으로는 당연합니다. 두 인물은 1인 2역으로 같은 배우가 연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다 보면 1인2역이 아니라 1인3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왕이 아니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효과적이려면 두 남자는 생김새와 목소리가 똑같지만 신분상으로서는 상당한 격차가 나야 합니다. '왕자와 거지'를 보건, '가게무샤'를 보건 한쪽 남자가 비천한 신분인 것은 매우 당연한 공식입니다. 그리고 그 비천한 남자는 빠른 속도로 변해갑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이라는 한 평범한 남자가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15일간 왕 노릇을 하고, 그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변신 이야기는 놀라운 완성도로 이미 큰 성공이 예견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조선의 왕 광해(이병헌)은 암살의 위협을 다시 한번 넘기고 심복 허균(류승룡)에게 "나와 용모가 꼭 닮은 자를 구해 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된 것이 기방에 출입하며 광대놀음을 하던 하선(이병헌). 왕의 용모는 물론 목소리까지 똑같이 흉내내며 글도 읽을 줄 아는 하선에게 왕과 허균은 만족하고, 하선은 이따금씩 왕의 미행을 감추는 대리 역할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광해가 알 수 없는 독극물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허균은 왕의 변고를 감추기 위해 하선을 궁으로 데려온 뒤 왕을 은밀한 곳에 숨겨 치료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선은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광해를 대신해 조선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허균과 조내관(장광) 두사람 뿐. 비밀이 드러날 것에 대비해 "비빈들, 특히나 중전(한효주)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지지만....

 

 

 

 

 

 

조선의 여러 왕들 가운데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에 가장 큰 평가의 변화를 겪은 임금을 하나 꼽으라면 광해군을 빼고 생각하기 힘들 듯 합니다. 연산군과 함께 패륜과 폭정의 상징이었던 광해군은 20세기의 눈으로 볼 때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현명한 판단으로 전쟁 개입을 피하려 했던 외교의 대가요, 대동법을 도입한 선각자에다 임진왜란의 피해 극복을 지휘한 위대한 지도자로 탈바꿈했습니다.

 

사실 다들 아시겠지만 조선은 충보다도 효를 더 강조했던 윤리의 나라였습니다. 20세기 초, 전국에서 모인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공하려던 의병장 이인영이 모친상을 당한 몸으로 군을 이끌 수 없다며 귀향해 상을 치르고 체포된 것이 상식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광해군 시대를 기록한 사서의 표현에서는 광해군의 정책에 대해 일면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를 유폐하고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패륜'을 저지르고서는 왕위를 제대로 보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해도 지도자를 선정할 때 개인적인 윤리 차원의 '검증'이 필요 이상으로 중시되는 걸 보면 이건 한국인의 내재된 속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광해에 대한 아쉬움이 이 영화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슷하게 왕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세종 때라는 배경이 특별한 의미가 아니지만, 이 '광해'는 비슷비슷한 다른 영화들에 비해 '시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모든 시대극은 그냥 시대극으로만 그쳐선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듭니다. 일본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나는 단지 내 이야기에 가장 맞는 시대적 배경을 고를 뿐"이라고 말한 이후 이건 상식이 됐죠.

 

'광해' 역시 사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많은 한국 영화들이 이걸 지나치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광해' 역시 이런 부분에서 다소 무리수가 보이지만, 그동안 나왔던 수많은 팩션 가운데 그래도 '역사의 무게'에 대한 인식에선 확실히 한발 앞서 있는 영화가 바로 '광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게 '광해' 속의 당시 정치 상황이 역사에 기록된 모습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존중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 뭐 '높은 것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아랫 것들은 사소한 의리에 따라 목숨을 건다'는 식의 지나치게 도식적인 배치는 아니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이를 포함해 '광해'에서 가장 두드러진 강점은 '무거운 이야기'와 '가벼운 이야기'의 황금비율입니다. '둘 다'를 소화해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배우 중 하나인 류승룡이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류승룡의 움직임에 따라 두 이야기의 배분이 조절되기 때문이죠. 류승룡이 중심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코믹함이 돋보이는 배우 김인권이 강직함을 표상으로 하는 도부장 역을 맡아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칼 관련 에피소드, 즉 김인권의 "저~~~~~언 하~~~ 히잉" 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전반적으로 코미디와 관련된 '호흡'과 '박자' 면에서 추창민 감독은 장인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배우들 이야기로 넘어가면 이병헌의 호연은 굳이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사실 영화 초반에는 하선과 왕을 가르는 선이 그리 분명치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왕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하선이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선이 지나치게 시정 잡배처럼 보여선 안된다'는 제작진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하선1(광대놀음을 하던 원래 하선)이 하선2(왕이 된 뒤 변모한 하선)로 바뀌어 가면서 이병헌의 연기는 빛을 발합니다.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왕 하선2와, "용상에 앉았던 천한 것을..."이라며 서늘한 분노를 감추는 광해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이렇게 해서 이병헌은 세 인물을 연기하는 셈이 됩니다. 물론 광고 영화인 '인플루언스'에서 이미 1인3역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영화가 하선이라는 인물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 인물 가운데서도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하선2'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이병헌의 연기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효주는 이미 사극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비련의 중전 역할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우라를 풍겼습니다. 역할의 특성상 눈에 띄는 자극적인 연기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광해'의 중전 역할을 할 배우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객의 공감'입니다. 즉 '저런 중전이라면 하선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해 가면서도 보호하려 기를 쓰는게 당연해'라는 생각을 줄 수 있는 배우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효주의 캐스팅은 탁월했습니다.

 

 

 

 

 

가짜와 진짜 사이의 에피소드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입니다만 '광해'에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의 영향이 좀 더 느껴집니다. 가짜가 어느 한 순간 자신의 가능성을 각성하고, 진짜가 되어도 큰 무리가 없는 '가짜 진짜'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하나 기억나는 영화는 션 코너리 주연의 고전 영화 '왕이 될뻔한 사나이 (The man who would be king)' 입니다. 국내에서 극장 개봉은 없었던 듯 하고, TV에서 방송될 때에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을 달았던 작품이죠. 인도에 파병됐던 두 명의 영국군 낙오병이 네팔 부근의 오지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그중 한 병사(션 코너리)는 몇번의 우연이 겹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재림으로 오해받게 되고, 서서히 그 자신도 자신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나 혼동을 일으킵니다.

 

널리 알려진 영화는 아니고, 쌍둥이가 나오지도 않지만 가짜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새로운 삶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사소한 성공들, 도주의 기회, 자발적인 거부,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한 몰락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은 광해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이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양쪽 영화 모두 성공적입니다.

 

(DVD 출시명은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로군요.)

  

 

 

'광해'에서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빛의 사용입니다. 진짜 왕 광해는 빛을 등에 이고(후광이라고 할까요^) 있거나, 인공적인 조명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선은 왕위에 있을 때도 자연광 앞에 노출됩니다. 이런 배치는 '태어난 왕'과 '만들어진 왕'의 차이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입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얼른 보세요.

 

 

 

P.S. 사실 광해군은 33세에 왕이 됐고 중전 유씨는 당시 30세. 배경이 광해군 8년이므로 광해군은 41세고 유씨는 40세... 뭐 이런 생각을 하면 '광해'의 로맨스가 깨질 우려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는 별도 포스팅으로.^^

 

 

 

 

바로 위 네모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