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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홈리스(homeless)래요.”
“아니. 나는 하우스리스(houseless)야. 그건 다른 거야.”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세상에 의해 강요된 ‘집 없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 뜻일까.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도시 하나가 없어지다시피 하는 날벼락을 맞아 낡은 밴 한 대가 전 재산인 처지가 됐다. 그 밴에 몸을 싣고 돈벌이를 따라, 날씨를 따라, 때로는 친구를 따라 미국의 대평원을 이리 저리 달리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현대의 유목민이다. 

유목이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몸이 가볍다.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쫓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에 몸을 누이고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한 일망무제 하늘 아래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기만 할 리가 없다. 쉴새없이 날씨와 굶주림, 폭력과 야만, 질병과 부상을 겁내야 하는 것이 유목 생활의 본질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나 예술은 유목민에겐 사치다. 비록 그 무대가 12세기의 유라시아 평원이 아니라 21세기 미국이라 해도 그렇다. 디지털 노매드라는 새로운 인류에 대한 보고도 있었지만, 펀은 그런 계열도 아니다. 전화기는 그저 통신수단일 뿐인 올드 스쿨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비록 아름답지만 필요 이상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펀은 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별다른 위협에 부딪히지도 않는다. 문명의 혜택으로 유목민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위생상태도 좋고, 무엇보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게 건강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펀의 모습은 참 많은 ‘만약에’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치과에 갈 일이 생기면. 만약 교통사고가 나면. 만약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하면. 영화에도 나오지만 펀에게 차 수리비를 빌릴 누군가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현재도 미국에는 이렇게 스스로 유목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 가운데서 ‘집 앞에 요트를 사 놓고 한번도 타 보지 못한 채 죽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자오의 메시지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지.

그럼 자오는 <노매드랜드> 관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랐을까. 이미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새로운 삶의 방법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어떤 삶에든 아름다움은 있다?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인생 후반에 대한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는 없었다.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젊은이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클로이 자오는 참 용감하고, 훌륭하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이런 아름다운 영화를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도 노파심이 앞서가니. 젠장. 

P.S. 맥도먼드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건 이미 수달의 수영 솜씨에 감탄하는 거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모습은 <쓰리 빌보드>나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와 사뭇 비슷하면서도 인물의 감수성 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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