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도둑들'의 전지현과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앤 해서웨이를 비교하는 기사들이 나올 때부터 올 여름 한국 극장가의 판도는 결국 '도둑들'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맞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된 듯 합니다. 물론 '연가시'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 이후, 관객 동원 면에서 단 한번의 비틀거림도 없이 정상을 질주한 희대의 흥행사입니다. 이 '흥행사'라는 말이 불편하신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투자자와 제작사의 입장에서 보면 구세주나 다름 없죠. 더구나, 그 작품들 중 어느 한 편도 성미 까다로운 비평자들로부터 '대체 어떻게 저따위 영화가 대박이 날 수가 있나. 관객이란 존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한탄을 자아내지 않았으니, 한국 영화계의 간판 스타라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빠돌이풍의 도입부를 걸었으니, 이 글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대략 예상하실 듯 합니다. 사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홍콩 느와르 전성기의 정서였습니다.
줄거리. 한 유명 미술관 복도. 모녀간으로 변장한 씹던껌(김해숙)과 예니콜(전지현)이 걸어들어갑니다. 예니콜이 작업해 놓은 젊은 관장(신하균, 특별출연)을 만나기 위해서죠. 밖에서 뽀빠이(이정재)와 잠파노(김수현)이 와이어를 걸고, 이들은 순식간에 미술관의 보물 향로를 훔쳐냅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뽀빠이가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고, 때맞춰 도착한 마카오박(김윤석)의 콜을 받아 일당은 마카오로 날아갑니다. 가석방된 펩시(김혜수)도 일행에 합류합니다.
마카오에는 첸(임달화)와 조니(증국상), 줄리(이심결), 그리고 앤드류(오달수) 등 홍콩 패거리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카오박은 한국과 홍콩의 연합 도둑 드림팀에게 마카오 카지노로 오고 있는 300억짜리 다이아몬드를 훔치자고 제안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참 노골적입니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정점을 찍은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를 모의해서 실행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영화)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 제작사 이름이 '케이퍼 필름'입니다. 이렇게 내놓고 시작하니 비슷하다 뭐다 하는 얘기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케이퍼 무비에다 올스타 캐스팅까지 갖춰졌으니 이제 필요한 건 조율. 한 영화에 한두명만 써도 적절하다 싶은 배우들을 통으로 엮었으니 자칫하면 분량 시비가 일어나고, 심하면 "야, ***는 그 영화에 대체 왜 나온 거냐?"는 소리가 나올 판입니다. 그렇다고 배우 체면 때문에 분량을 살려 주다가 영화가 지루하네, 군더더기가 너무 많네 하는 얘기를 듣게 되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죠.
바로 그 부분에서 최동훈 감독은 신의 솜씨를 발휘합니다. 열 손가락이 각각 다 역할을 하되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어느 하나 아쉽지 않은 안배가 이뤄집니다.
사실 머리 좋은 도둑들이 스케줄을 짜고, 놀라운 솜씨로 최첨단 방어막을 돌파하고, 그 결과로 부자가 되고 안 되고 하는 이야기로는 이제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이 분야를 파고들었고, 레이저 광선에서 행글라이더까지 동원되지 않은 장비가 없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긴장감 넘치는 침투 과정을 설정해 봐야 관객은 지루할 뿐입니다. 결국 승부가 나는 지점은 캐릭터인 것이죠.
순도 높은 액션 장면들이 보여주는 시각적 쾌감과 아주 찰진 대사가 빚어내는 웃음 사이에서 그 캐릭터들의 얽히고 설킨 사연이 잘 버무려질 때 비로소 코믹 케이퍼 무비가 완성됩니다.
(사실 이런 생각으로 만든 영화다 보니 개연성은 일단 뒤로 제쳐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엄청난 사건을 벌이는 범인들 중 아무도 스키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죠. 마카오에서도 그렇고 부산에서도 그렇고... 아무도 공개 수배 같은 건 걱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들간의 비중이 철저하게 1/N 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김윤석에게는 다른 배우들과 다른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도둑 연합군의 리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가장 머리를 많이 쓰는 인물이기도 하고, 다이아 탈취 작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윤석은 특히 이 영화의 중국어 대사에서 빛을 발합니다. 중국어를 얼마나 잘 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 특히 중요한 홍콩 느와르의 냄새를 가장 잘 소화해 내는 배우라면 김윤석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서가 좀 바뀐 듯도 하지만, 이 영화는 아마도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곳곳에는 왕년의 홍콩 영화들이 이뤄낸 성과들에 대한 오마주성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산의 낡은 건물을 배경으로 한 와이어 액션을 보면서 서극의 '순류역류(Time and Tide)'가 생각나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오래된 아파트에서의 총격전 신은 정말 당시까지는 전 세계에 비길 데가 없었던 와이어 액션(와이어를 이용해 날아다는 것 처럼 표현하는게 아니라 진짜 주인공들이 건물에 와이어 걸고 그걸 이용해 벌이는 액션!)의 명장면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도둑들'의 부산 액션 장면에는 이 영화가 영향을 미쳤을 듯 합니다.
물론 흔한 플롯이긴 하지만, 또 생각나는 영화는 주윤발-장국영-종초홍이라는 황금의 트리오가 출연한 '종횡사해' 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세 도둑과 그 사이의 엇갈린 러브라인. 문득 '도둑들'의 이정재에게서 '종횡사해'의 장국영에 대한 오마주를 느꼈다면 오버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그런 오마주를 몸으로 대변하는 인물은 바로 임달화입니다. 사실 1980~90년대에도 임달화는 주윤발-장국영이나 사대천왕 급의 스타는 아니었지만 왕년 '첩혈가두' 등의 영화를 통해 깊은 눈빛의 배우로 강한 인상을 남긴 분입니다. (문득 임달화 이야기를 하자니 이수현이나 양가휘처럼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왕년의 스타들이 생각납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임달화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권총을 손에 쥐었을 때 관객을 압박하는 비장미는 한국 배우들에겐 아직 기대하기 힘든 듯 합니다(은근히 리얼리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특히 '도둑들'에서 임달화의 라스트 신은 두고 두고 기억날 장면이라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아울러 임달화와 김해숙의 러브 라인도 빛을 발합니다.^^
임팩트를 놓고 보자면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배우는 전지현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배우의 능력보다는 감독의 역할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전지현은 여전히 '엽기적인 그녀'에 머물러 있고, 그 캐릭터를 여전히 잘 소화해 냅니다. 그 캐릭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뽑아낸 것이 바로 '도둑들'에서의 전지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캐럭터는 대성공입니다.
반면 김혜수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전지현의 따발총같은 대사와 많은 액션이 극장에 앉아있는 내내 관객을 즐겁게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더 많이 기억나는 것은 김혜수의 캐릭터 쪽입니다. 어쨌든 이 영화의 핵심 축은 김윤석 - 김혜수 - 이정재 라인이고, 이 라인 위를 흐르는 감정이 마무리되어야 영화가 끝납니다.
비중으로 보면 오달수와 김수현은 조연이죠. 하지만 김수현이라는 거물(?)이 출연한 만큼, 그 캐릭터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고, 연기도 흠잡을데가 없었습니다. 분량이 적다는게 아쉬울 정도. 김수현과 전지현을 주축으로 한 속편을 기대하게 합니다. 일각에서는 '전지현을 뺀 배우들의 존재감이 부족하다'고도 하는데, 그건 이런 올스타 캐스팅 영화를 보는 자세가 아니죠. 이런 말은 '타워링'에서 스티브 맥퀸밖에 기억이 안 난다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모건 프리맨이 낭비됐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도둑들'의 캐스팅이 사기라고 생각되는 건 정말 지나가는 듯한 역할까지도 대단한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비의 여인 역을 맡은 예수정이나 채국희, 카지노 매니저 역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최덕문, 그리고 사건의 키를 쥔 인물(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생략) 역으로 출연하는 연출가 기국서 등이 그렇습니다.
기국서의 경우에는 기주봉씨로 착각하신 분도 아마 있을 듯. 왼쪽이 기주봉, 오른쪽이 기국서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것으로 예상되는 '도둑들', 한마디로 2012년 한국 영화의 뛰어난 성취라고 불러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재미 면에서든, 느껴지는 공력 면에서든.
'뭘 좀 하다가 > 영화를 보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니 스콧, 그를 기억하게 하는 다섯편의 영화 (16) | 2012.08.21 |
---|---|
알투비,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뜻? (23) | 2012.08.15 |
다크나이트 라이즈, 놀란의 한계를 드러냈다? (93) | 2012.07.23 |
모피를 입은 비너스, 웃음으로 풀어낸 욕망의 세계 (5) | 2012.07.14 |
프로메테우스, 과연 걸작인가? (18) | 2012.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