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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 서서히 인기에 불이 붙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하녀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란 나라가 선 지 1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상황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가 아니고 보면 1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닙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두메산골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란 새 나라가 섰다는 사실도 최신 뉴스일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나라의 주역들이 가장 경계할 일은 아무래도 전 왕조의 후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동태 파악입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백제의 강역에서 부흥운동이 펼쳐졌고, 고구려도 부흥운동이 일어난 데 이어 그 땅에서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하는 발해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자료를 보면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후예들에게 상당히 관대한 듯 하지만 그 아랫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죠. 자신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조선이 망한 뒤 고려 왕씨들이 어떤 운명을 걸었는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은 바로 '왕 거을오미' 입니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 1393~) [가장 극적으로 살아남은 고려의 후예]

 

드라마 하녀들에는 조선 초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반목하는 사이 고려를 수복하려는 왕씨들과 그 유신들로 구성된 만월당이라는 비밀 조직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가 망한 뒤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고려 유신들이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는 기록은 있으나, 누군가 조직적으로 고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운동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의 안승이나 백제의 귀실복신 같은 인물은 고려가 망한 뒤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 고려 왕씨의 후손들은 조선 건국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집권 직후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공양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데 이어 태조 2(1393) 526일에는 거제도를 비롯한 낙도로 유배가 있던 공양왕의 후손들을 육지로 나오게 해 생업을 주고 안정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 중 왕강은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에게 동조한 공이 있어 조선 건국 뒤에도 벼슬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 본인보다 정도전을 비롯한 공신들은 훨씬 더 강력하게 왕씨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을 내버려 둘 경우 새로운 왕조에 해가 될 것이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마침내 1394226일에는 이성계가 직접 보호하던 왕강와 왕승보 등도 귀양가는 몸이 되었다. 이어 414일 윤방경 등을 강화에, 손흥종 등을 거제에 보내 왕씨 일족을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다. 말인즉 파견되는 관리가 재량껏 단속하라는 것이었으나, 조정의 여론을 감안하면, ‘재량껏이란 씨를 말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삼척에 귀양 가 있던 공양왕도 이때 아들과 함께 처형됐다.

 

야담집 추강냉화에는 당시 학살의 풍경이 기록돼 있다. 파견된 관원들이 왕씨들에게 육지에서 떨어진 낙도에 모두 모여 살게 해 주겠다며 거짓 포고령을 내려 포구에 모은 뒤, 배에 싣고 가다가 가라앉혀 몰살시키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죄없는 내 후손들을 몰살시키니 네 아들들도 뒤가 좋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어 426일에는 아예 왕씨라는 성의 사용 금지령이 내려진다. 본래 왕씨면 어머니의 성을 쓰고, 사성(賜姓)으로 왕씨를 받은 자들도 본래의 성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왕씨들이 전()씨나 옥(), ()씨로 성울 바꾼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다들 한자로 보면 자가 들어 있는 글자들이다.

 

공양왕의 형인 왕우는 태조의 8남 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귀의군에 봉해진 뒤, 이런 변란 속에서도 왕씨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목숨을 보존했다. 하지만 1397년 왕우가 죽고 장남 왕조가 귀의군의 칭호를 물려받은 뒤, 이듬해인 1398 826일엔 귀의군 왕조와 그 아우 왕관이 죽었다는 기록이 실렸다. 이날은 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방석 형제와 정도전, 남은 등이 주살당한 날이다. 방번이 죽었으니 그 처남들인 왕조와 왕관을 더 이상 살려 둘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왕씨가 사라졌다.

 

하지만 태종 13(1413) 11, 고려 왕족인 왕휴의 서자 왕거을오미가 발견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왕휴가 이밀충이란 사람의 누이를 첩으로 삼아 낳은 아들인데 20세가 되어 호패를 마련하려는 것을 지신사 김여지가 조정에 보고한 것이었다.

 

 

 

관계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 공초가 있었으나 태종은 역성혁명이 일어나도 전조의 자손들을 아예 멸족시킨 경우는 없었다. 특히 태조의 경우 왕씨들을 몰살시킨 것이 본의가 아니었고, 당시만 해도 내가 나이 어려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제 내가 왕씨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며 거을오미의 석방령을 내렸다. 이후 문종 1(1451)에는 왕씨의 사용 금지령을 해제하고 임금이 직접 "왕씨의 후손들을 찾아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오늘날까지 개성 왕씨의 후손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가 망한 뒤 부흥의 움직임이 공식 문서에 기록된 바 없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가혹한 박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왕거을오미도 왕씨에 대한 박해가 끝났음을 알린 인물이기는 하나, 관직이나 토지를 주어 잘 살게 했다는 기록 역시 없는 것을 보면 무슨 특전이 주어진 것은 아닌 듯 하다. 문종 때 왕씨의 사당인 숭의전을 짓고 왕우지를 발탁해 왕순례라는 이름을 내린 뒤 숭의전 부사로 봉해 토지와 집을 주어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한 것이 완전한 사면의 첫 기록이다.

 

이렇듯 조선 왕조가 왕씨를 받아들이는 데 대략 건국에서 60년이 걸렸다. 다시 한번 망국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P.S. 고려 왕씨에서 비롯된 성씨 중에는 위에서 거론한 성씨 외에 개성 내()씨가 있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초 검문하던 군관이 무슨 성씨냐고 묻는 말에 당황한 왕씨 일족이 ?”하고 반문하는 바람에 내씨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것인데, 믿을만한 이야기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개성 내씨 이야기는 참 코믹합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

 

뭐 역사의 만약이란 얘기해 봐야 그냥 재미를 위한 것일 뿐이지만, 왕우와 이성계가 사돈을 맺을 때 하필 방번과 왕우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 묘한 상황입니다. 이성계가 후계자로 삼으려 한 아들은 방번과 어머니가 같은 방석이었으니, 그대로만 됐으면 왕우의 집안은 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으로 태종 방원이 방번-방석 형제를 처지했으니 왕우의 자손들은 두 겹의 역적이 된 셈이죠. 망국의 왕손인데다 난신적자의 집안... 이것이 팔자 소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 전씨(全이든 田이든) 중에 고려 왕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속설에 따르면 가능성은 꽤 있는 편입니다. 한때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의 측근들도 넌즈시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비슷한 경우를 부여 서씨의 경우에도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왕성은 본래 부여(夫餘)씨인데, 나라가 망한 뒤 여(餘)자의 일부를 변형해 여(余)씨나 서(徐)씨로 성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왕씨의 후손들은 이렇게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문종 때 세워진 왕씨들의 사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니, 굳이 누가 진짜 고려의 후손인지를 따질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하녀들'은 태종 초, 함흥차사가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시작했으니 왕씨의 후예들은 모조리 참살당한 뒤의 상황입니다. 그래도 고려 부흥의 음모가 등장하니 왕씨가 아예 안 나올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하녀들'의 등장인물 중에는 누가 고려 왕실의 후예일까요. 뭐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눈치 빠른 분들은 대략 짐작을 하실 듯 합니다. 당연히 비밀조직 만월당의 주역들 중에 있겠죠.^^

 

('하녀들'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미 김치권[김갑수]와 아들 은기[김동욱]가 고려 왕실의 자손이고, 무명[오지호]은 이방원의 아들이란 게 밝혀졌습니다. 이 글은 그 전에 쓰여진 글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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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하녀들'이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금요일 밤 9시45분(정확하게는 금-토 9시45분)이라는, 드라마가 낯선 시간대에 처음 등장해서 '삼시세끼'와 '정글의 법칙'이라는 강력한 두 예능 프로그램에 '나는 가수다 3'까지 끼어든 뒤, 자력 생존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하녀들'이 갖고 있는 '(양반들의) 슈퍼 갑질에 대한 을(노비들)의 분노'라는 주제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땅콩 리턴' 사건과 맞닿아 일으킨 화학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녀들'은 지금껏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애사극'입니다. 템포와 주인공의 배치가 남다르죠. 지금까지의 사극들 가운데에도 '멜로 사극'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대부 계층의 남성 위주로 판이 짜여져 있고, 거기에 맞춰 다양한 캐릭터들이 배치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대장금' 처럼 서민 계급의 주인공을 배치한 위대한 작품도 있었지만 '대장금'은 사실 대표적인 궁정 사극이고, 연매물도 아니었죠.

 

이에 비해 '하녀들'은 조선 초기를 무대로 일단 양반댁 규수 가운데서도 "조선의 개국공신인 명문거족 국씨 집안의 무남독녀라 여느 반가의 규수들과는 급이 다른", 그 시대의 it girl 이던 인엽(정유미)가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한방에 최고의 지위에서 노비로 전락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드라마 '하녀들'에서 가장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엽을 중심으로 정혼자이며 양반 댁 도련님인 은기(김동욱), 그리고 뭔가 비밀스럽지만 온갖 능력을 다 갖춘 병판 댁 노비의 우두머리 무명(오지호)의 연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역사 이야기는 가능한 한 축소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뭔가 아쉬움을 느낄 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함흥차사'입니다. 극중 인엽이 병조판서 허응참(박철민)의 연회장에 박차고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함흥에 차사로 가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구명해 달라는 요청을 하러 간 것이죠. 또 이어 허응참의 아내이며 윤옥(이시아)의 어머니인 윤씨부인(전미선)이 인엽에게 쏘아부치는 "네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잔혹한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럼 대체 이 함흥차사란 무엇일까요. 대개는 아시겠지만, 혹시 잘 모르실 분들을 위해 해설 들어갑니다.

 

 

 

 

 

 

함흥차사

[명사] 咸興差使. 심부름 등을 위해 한번 떠난 사람이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음. 함흥은 함경남도의 지명, 차사는 예전 긴한 일을 위해 보내던 사신에게 주는 임시 관직명.

12일부터 방송된 JTBC 새 주말연속극 하녀들은 여주인공 인엽(정유미)의 아버지 국유(전노민)이 조선 태종(안내상)의 밀명을 받아 함흥차사로 갔다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함흥차사네 글자는 요즘도 널리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말에는 불발된 쿠데타의 흔적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본래 8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권력 다툼으로 세 아들을 잃었다. 결국 천수를 누린 사람은 2남 방과(정종), 3남 방의, 그리고 5남 방원(태종) 뿐이었다.

 

'태조는 왕좌를 위해 형제들을 죽인 태종을 용서하지 않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흥(영흥부)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한지 10년도 되지 않은 1401. 아버지가 아들의 왕 자격을 부정한다는 것은 민심을 뒤흔들 수 있는 위협이었으므로 태종은 수시로 태조와 가까웠던 인사들을 보내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하지만 태조는 차사들이 오는 족족 목을 베어 돌아갈 뜻이 없음을 알렸다.' 여기까지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함흥차사의 유래다.

 

 

     [극중 인엽의 아버지 국유(전노민)이 이성계(이도경)에게 차사로 가서 도성 귀환을 설득하다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장면.]

 

그럼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현재 함흥차사에 대해 가장 많은 기록이 전해지는 문헌은 역사서가 아니라 야담집인 축수편(逐睡篇)이다. 여기에는 성석린이 이성계를 회유하다가 귀공은 나를 달래러 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제가 그런 이유로 왔다면 제 아들들이 눈이 멀 것입니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정작 그의 두 아들은 장님이 되었고, 성석린은 "아무리 목숨이 걸렸어도 그런 장담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하고 탄식했다는 내용이다.

 

또 이 책에 따르면 이성계가 도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또다른 차사 박순의 죽음 덕분이다. 태조는 박순에게 설득당했으나, 그가 돌아가자 태조의 측근들은 그를 따라가 죽일 것을 권했다. 이에 태조는 그가 이미 멀리 갔을 것이라 보고 장수에게 칼을 주며 용흥강을 못 건넜거든 베어 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병으로 걸음을 지체했던 박순은 강가에서 죽음을 맞았고, 이를 후회한 태조가 귀경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正史)의 기록은 어떨까. 일단 태조가 처음 북쪽으로 떠난 것은 태종 1(1401) 3월의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해 410일 태종이 도승지를 보내 안변(현재의 원산 부근)에 머무는 태조의 문안을 묻고, 태조가 오래 머물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태종이 성석린을 보내 설득하자 태조는 426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해 1126, 태조는 한밤중 갑자기 소요산으로 떠났다. 실록은 임금(태종)이 전송하려 따라갔으나 미치지 못했다고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꼴도 보기 싫은 태종의 전송 같은 것은 전혀 바라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종은 다시 성석린을 보내 설득했으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결국 해가 바뀌고 14024, 태종이 직접 신하들을 거느리고 소요산 자락까지 찾아갔다. 426, 마침내 태조의 입에서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왔다.

 

6개월 뒤인 115, 안변부사 조사의반란을 일으켰다. 명분은 태종에게 살해당한 이복동생 방번-방석 형제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18일자 실록에 눈여겨 볼 기사가 실려 있다. 조정에서 파견된 박순이 함주에서 조사의의 난에 가담하지 말라고 지방 수령들을 설득하다가 피살됐다는 내용이다. 이 박순은 위의 축수편에 대표적인 함흥차사로 기록된 그 '함흥차사' 박순이다.

 

 

 

게다가 이성계는 안변 바로 북쪽인 함주에 머물고 있었다. 119일자 실록은 태종과 조정 대신들이 반란군 지역에 있는 태상왕의 안전을 걱정하는 내용과 무학대사를 급파해 태조의 귀경을 설득하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쯤 되면 축수편에서 박순을 죽이라고 주장했다는 태조의 측근이 누구일지 대략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기세등등했던 조사의의 반군은 한달도 못 되어 1127일 안주 부근에서 궤멸됐고, 128일자 실록에는 태상왕(이성계)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짧은 한 줄이 기록됐다. 다시 야사로 넘어가면, 마지막 함흥차사는 무학대사라고 전해진다. 박순의 죽음으로 자책하던 태조는 옛 스승 무학대사의 말에 마음이 풀어져 도성으로 돌아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수편에는 도성으로 돌아온 태조와 태종 사이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환영 잔치를 벌이려 장막을 칠 때, 태조의 성품을 잘 아는 하륜이 태종에게 기둥은 반드시 사람 몸통보다 굵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간했다. 태조는 멀리서 태종을 보자 바로 활을 쏘았고, 태종은 급히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명궁으로 소문난 태조 이성계였으나 화살은 기둥을 뚫지 못했다.

 

태조는 탄식하며 태종에게 내가 졌다. 네가 원하는 옥새가 여기 있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하륜은 또 직접 술을 권하지 말고 내시를 시켜 전달하라 조언했고, 태종은 그대로 했다. 그러자 태조는 술잔을 들이키고 긴 한숨을 내쉰 뒤, 옷소매 속에서 무쇠방망이를 꺼내 내려놓고 모두 하늘의 뜻이로구나하며 껄껄 웃었다.’

 

과연 태조의 북행과 차사들의 죽음은 조사의의 난과 무슨 관계일까. 태조는 아들 태종에 대항해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 쿠데타를 시도한 것일까. 축수편의 마지막 기록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하녀들'에서 인엽의 아버지 국유는 아마도 성석린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한편으로 조사의의 난이라는 실제 사건을 통해 '함흥차사'의 고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성계는 8명의 아들을 뒀는데 첫 아내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장남 방우, 2남 방과(정종), 3남 방의, 4남 방간, 5남 방원(태종), 6남 방연의 여섯 아들을 두었고 한씨 사후 계비 신덕왕후 강씨로부터 7남 방번과 8남 방석을 두었습니다. 이중 6남 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사망했고 장남 방우는 - 여러 기록을 볼 때 아버지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듯 한 - 역시 조선 건국 2년만인 1394년 40세에 술병(?)으로 사망합니다.

 

누가 봐도 아들들 가운데 가장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1392년 당시 25세였던 방원이었지만 정도전과 이성계는 8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노골적으로 방원을 후계 구도에서 배제합니다. 결국 방원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을 비롯해 방번 방석 형제를 죽였고, 2남 방과를 정종으로 즉위시킨 뒤 1400년 초 2차 왕자의 난으로 바로 위의 형인 방간을 축출합니다. 방간을 바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자신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한 뒤 마침내 그해 11월 왕위에 오릅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뜻을 어기고 형제들을 참살한 방원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고, 태종의 입장에서도 자기의 공을 무시하고 왕위를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려 한 아버지가 좋을 리 없지만, 그래도 개국 10년도 안 된 나라의 안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까지 죽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고려를 되돌려 놓으려는 유신들의 세력(곧 밝혀질 '하녀들'의 또 다른 축입니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조사의의 난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고, 정사든 야사든 꼭 집어 '그 배후에 이성계가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이 사건이 이성계와 무관할 리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태종은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설득해 반란에서 발을 빼게 하려 특사들을 보내 설득했고, 함흥차사들은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약간 완곡하게 표현한(아버지와 아들이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살짝 감추고)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에 살짝 과장과 은유가 깃들며 '축수편'에 나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 진 것이죠.

 

(진짜 의문은 당대 최고의 무장인 이성계가 뒤에 있었다면, 왜 조사의의 군대가 한달도 못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종과 이성계의 극적인 타협? 조사의의 심각한 무능? 이성계의 일방적 변심? )

 

 

어쨌든 '하녀들'은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음모인 고려 회복 운동과 태종의 대처,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인엽이 노비의 치욕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려 하지만,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 남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절대 을'이었던 노비들이 '슈퍼 갑'인 양반들을 어떻게 조롱하고 나름대로의 삶을 이끌어가는지가 지금까지의 사극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집니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그 시대의 '슈퍼 갑'이었던 양반들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씁쓸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피고용인을 노비 대하듯 하는, 어쩌면 그 시절보다 더 심한 모습일 수도 있는 기괴한 모습들...)

 

 

 

 

 

 

'하녀들'에서 놀라운 것 하나는 남다른 공간감입니다. 조명의 사용을 통한 실내 공간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요. 조현탁 감독의 연출은 지금까지 사극에 나왔던 대청/안방/주방/창고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하녀들'을 보는 새로운 재미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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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로 가는 길은 고속전철 AVE 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소 흐린 날씨. 새로 지어진 세비야 산타 후스타 역은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한가로움도 좋지만, 역시 초행 여행자라면 기차를 이용하는게 좀 더 안정된 여행의 지름길인 듯.

 

 

 

AVE 내부.

 

 

 

장거리 여행자를 위한 큰 짐칸이 따로 마련돼 있다. KTX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중간 정차 역에선 슬쩍 불안해서 한번 가 보기도 했다.

 

 

 

 

간단한 스낵을 파는 가운데의 휴식 공간이 인상적. 본격적인 식당칸은 아예 없었다.

 

 

마드리드 아토차 Atocha 역에 도착. 2시간 30분 소요.

 

마드리드로 오는 길에는 약간의 고민이 있었다. 중간에 워낙 명망 높은 관광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코르도바에서 1박을 할 생각도 있었지만 일단은 마드리드로 직행하는 것이 여러 모로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AVE를 이용해 오전에 이동하면 오후 시간을 편안하게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

 

 

이쯤 되면 현대 광고만 봐도 좀 반갑다.

 

 

역에 내리자 가는 빗발이 떨어진다. 순식간에 택시 잡는 줄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보도로 뛰어내려 택시를 잡는다.

 

그러고 보면 역에 내려서도 별 말 없이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밀치고 지나간다.

 

이 고향에 온 듯한 친숙함은 뭐지? ^^

 

 

 

멀지 않은 그란 비아 Gran Via 거리의 아틀란티코 마드리드 Atlantico Madrid 호텔로 이동.

 

수영장이나 헬스클럽이 있는 화려한 대형 호텔은 아니지만 유서깊은 대도시를 여행하는 데 매우 적절한 호텔이었다. 가격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교통이 편했다. 1호선의 Gran Via 역과 5호선의 Callo 역이 지척이었고, 솔 광장은 걸어서 10분 이내에 위치해 있었다. 방이 좀 좁기는 했지만 깨끗하고 쾌적. 유럽 호텔들이 다 그렇듯 방이 좀 작은 것 빼곤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당시 마드리드 지역 1위였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호텔이었다. 추천.

 

http://www.tripadvisor.co.kr/Hotel_Review-g187514-d227459-Reviews-Hotel_Atlantico-Madrid.html

 

 

 

여장을 풀고 늦은 점심을 위해 '마드리드의 국물'을 먹으러 갔다.

 

마드리드의 국물, 라 볼라의 코시도 http://fivecard.joins.com/1177   참조.

 

 

그리고 나서 한걸음에 달려간 곳은 바로 프라도 미술관.

 

3대 뭐니 4대 뭐니 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흔히 우피치, 에르타미주, 프라도를 유럽 3대 미술관이라고 한다는데, 이 순위의 묘한 점은 파리의 미술관이 모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루브르나 오르세가 위의 세 미술관에 비해 모자란 점이 있단 말인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는? 뮌헨의 알타 피나코텍은?

 

아무튼 3대니 4대니 이런 숫자에는 신경쓰지 말자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프라도 미술관이 위대하지 않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거기에 규모와 컬렉션에서 딸리지 않는 미술관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

 

 

 

 

의외로 한산한 풍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이 빽빽하다. 

 

마드리드를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에게 비해 볼 게 없다고들 한다. 마드리드가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게 그리 오랜 일이 아니고, 스페인 여행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는 대성당이나 찬란한 아랍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결코 그렇지 않다. 일단 톱스타 프라도가 있고, 레이나 소피아와 티에센 보르네제 미술관이 있다. 특히나 프라도는 벨라스케스, 고야, 무리요 같은 로컬 스타들과 루벤스, 엘 그레코, 보쉬 같은 용병들을 대거 끌어모은 진정한 미술관의 레알 마드리드라고 불러 손색이 없다.

 

 

2층 중앙의 긴 복도. 벽에는 주로 루벤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4시간 정도를 보냈다. 미술관이 8시 넘어 문을 닫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미술관 곳곳에는 모사를 하고 있는 캔버스가 펼쳐져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배려인 듯...?

 

 

물론 미술관에 가기 전에 두 권의 책, 성경과 그리스 신화는 반드시 읽고 가야 한다... 고 전에도 강조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이 그림을 보고 '아, 여자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아킬레스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작품을 즐기기 어렵다.

 

 

 

달리 미술관에서도 언급했던 파리스와 세 여신의 대면.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을 신은 헤르메스가 파리스 옆에 있고 세 여신은 각각의 상징을 품고 있다. 각각 투구와 방패를 밑에 둔 아테네, 에로스가 매달려 있는 아프로디테, 공작을 거느린 헤라다.

 

...뭐 이런 그림이 수백점 있다.

 

그리고 눈길을 끈 그림 한 점.

 

 

 

멜렌데스라는 화가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엘 그레코의 유명한 그림 제목과 같다.

 

내용은 같다. 오르가스라는 백작이 선행을 많이 하고 신앙심이 두터웠던 덕분에 그의 매장 현장에 이미 죽은 성인들이 나타나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엘 그레코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이 사람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사람들의 놀라움이 '오오, 성인이 나타나다니, 역시 백작님은 위대한 분이셨어!' 라는 식의 것이라기 보다는 '으악! 유령이 나타났다!' 인 것 같아 좀 의아하기도 하다.

 

아무튼 비슷한 그림이라 놀랐다는 이야기.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무슨 미술에 조예 깨나 있는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는 않다.

 

 

 

그냥 호기심일 뿐.

 

이 미술관에서 보쉬의 '쾌락의 정원'과 함께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다는 벨라스케스의 '여관들(시녀들)'. '사진 찍지 말라'를 모토로 하고 있는 미술관이지만 실제로 프라도 미술관은 굉장히 사진 찍기 좋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그닥 통제하려는 시도도 없고, 사진을 찍으려는 포즈를 취한 사람에게 그냥 씩 웃기도 한다.

 

그래도 이 '여관들'이 있는 방만큼은 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통제를 하더라는. 그래서 문 밖에서 살짝 분위기 사진만 찍었다.

 

 

 

역시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승리(술꾼들)'이 있는 곳. 소심하게 멀리서...

 

직접 가까이서 그림을 보면 볼수록 벨라스케스는 천재라는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로 천재냐 하면...

 

약 400년 뒤에 태어날 미래의 사람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왼쪽은 프라도에 있는 '세바스찬 모라의 초상'이라는 난쟁이 그림. 그리고 오른쪽은... '왕좌의 게임'을 보시는 분이라면 너무도 잘 아실 배우 피터 딘클리지.

 

그림을 보고 허걱,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누가 저렇게 비교 사진까지 만들어 올려 놨다.

 

 

 

너무나도 광활하고 볼게 많은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서서 일찍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는 분들을 위해 추천하자면, 이 미술관에서 뭐니 뭐니 해도 벨라스케스의 대표작들과 고야의 '블랙 페인팅' 관 만큼은 놓쳐선 안된다고 하고 싶다.

 

고야는 일찍부터 화가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화가로 인정받은 초기 작품들은 사실 소박하다고 할 정도로 나이브한 느낌이 강하다. 농촌 정경이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동네 잔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 그가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한 만년에는 그림 자체가 바뀐다. 위에 가져다 놓은 '크로노스'도 대표적인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기를 해치는 자식이 나온다는 예언을 빗나가게 하기 위해 태어나는 아이들을 모두 집어 삼켰다. 이런 어두운 심성을 표현한 시기를 고야의 '블랙 페인팅'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기의 그림들을 보면 인간의 악한 내면을 들여다 보는 듯한 고야의 필치가 가슴을 뻥 뚫는 느낌을 준다. 전관, 수백점의 그림을 보더라도 고야의 블랙 페인팅 컬렉션 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는 곳은 또 없었다.

 

정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팁: 프라도에서 벨라스케스 관과 고야의 블랙 페인팅 전시실만큼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이런 한적한 공간도 있다.

 

 

미술관에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술관 카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슬슬 이런 카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꽤 오후에 미술관을 찾아 폐관 시간이 되어 나왔더니 밖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그런데 나와 보니 거리를 메운 시위대의 행렬. 아. 여기는 아직도 여전하구나.^^

 

 

 

시위 때문에 도로 교통이 마비되어 어찌 어찌 하다가 호텔로 귀환.

 

프라도 미술관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

 

 

 

 

 

 

호텔 야경과 함께 꿈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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