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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니의 오페라 제목이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세비야 Sevilla 의 이발사'로 바뀌어 자리잡은 건 아마도 1992년 세비야 엑스포를 전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1992년은 '투우와 태양, 다혈질의 나라'였던 스페인이 '세련되고 매력적인 나라'라는 브랜딩을 위해 전력투구했던 해인 듯 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같은 해다.

 

세비야는 이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흔적으로 유명한 도시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개의 문화 유산, 투우와 플라멩코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착시킨 곳이 바로 세비야라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 메리메는 세비야의 담배 공장을 배경으로 소설 '카르멘'을 썼고, 이를 비제가 불멸의 오페라로 만들었다. 카사노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의 근거지도 세비야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를 거쳐 마드리드로 가는 일정. 과연 중간에 어디를 거쳐야 할까 하는 걸 놓고 잠시 고민했는데, 가 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그래도 일단 세비야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고? 일단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ía de la Sede 이 있기 때문에.

 

스페인의 도시 치고 카테드랄이 없는 도시는 없지만, 그래도 세비야의 카테드랄은 다른 도시와는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묘.

 

15세기 말. 당시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대국은 포르투갈이었다. 항해왕 엔리케를 비롯해 바스코 다 가마, 바솔로뮤 디아스 등 명성 높은 탐험가들의 활약에 의해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해안을 따라 인도양으로 진입해 인도 서안에 이르는 무역로를 개척하고 거대한 부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비롯한 많은 선각자들은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다(많은 사람들이 '지구는 둥글다'는 주장을 갈릴레오가 처음 한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지동설이나 지구 자전설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별개의 주장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기원 3세기 이전,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널리 알린 주장이다). 만약 남쪽으로 돌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서 인도가 나왔다면, 반대로 서쪽으로 똑바로 나아가도 인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많은 모험가들(당시의 벤처 투자자들)이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대개의 투자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1492년 1월, 코르도바에서 역사적인 영토 회복으로 한창 들떠 있던 이사벨라 여왕을 후원자로 삼는 데 성공했다(물론 6년이나 공을 들인 끝의 성공이었다). 그리고 1492년 4월3일, 콜럼버스는 니냐, 핀타, 그리고 산타마리아라는 이름의 세 범선을 이끌고 지금 우엘바(Huelva)의 일부인 작은 항구 팔로스 델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를 출발했다.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아인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코르도바에서 이사벨라 여왕에게 투자 허락을 받고, 산타페(그라나다 부근의 소읍)에서 '발견된 땅의 총독이 되고, 신대륙 수입의 10%를 갖는다'는 약정에 서명했고, 팔로스에서 1차 원정을 출발했고, 서인도제도에 도착했다가 바르셀로나로 귀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라 여왕 부부를 알현하며 원정의 성공을 알렸다.

 

저 많은 인연 있는 땅을 두고 왜 세비야에 콜럼버스의 묘가 있을까. 그 이유는 세비야야말로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영광을 가장 크게 누린 도시였기 때문이다. (다음 글로 이어짐)

다시 시점은 그라나다를 출발할 때로 거슬러 올라감. 

 

 

 

그라나다에서 세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세비야. 입구의 야자수 가로수가 손님을 반긴다.

 

그라나다-세비야 구간은 기차 버스 모두 가능하고, AVE가 아직 다니지 않아 시간도 얼추 비슷하다. 단지 버스가 약간 싸다.

 

뭐 꼭 가격이 싸서라기보다, 스페인의 고속버스는 어떤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ALSA 버스는 깨끗하고 편했다. 3시간 짜리 노선이라 그런지 중간에 정차는 없었고, 시속 100Km를 준수했다. 물론 도로 중간을 봐도 한국식의 거대한 휴게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유소와 편의점, 화장실 정도만으로 구성된 휴게소는 중간에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오래 전 이탈리아의 아우토스트라다에서 들렀던 휴게소는 그래도 커피숍과 카페테리아 정도의 설비를 갖춰 놓고 있었는데, 이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차이인지, 아니면 그라나다-세비야 구간이 짧아서 없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ALSA 버스는 와이파이를 제공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터지지는 않았다. 옆자리 미국인의 아이폰도 마찬가지. 그 외에는 깨끗하고 쾌적했고, 인터넷으로 예매도 할 수 있어 간편했다.

 

물론 한국의 우등버스와 비교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지만.

 

 

 

세비야 고속버스 터미널. 나름 운치있게 꾸며져 있다.

 

공식 명칭은 프라도 데 산 세바스티안(Prado de San Sebastian) 터미널.

 

그냥 Estacion 은 역, Estacion de Autobuses는 버스 터미널이다.

 

 

 

밖으로 나오면 이렇다.

 

 

 

단 1박만을 위해 구한 민박 숙소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장점은 세비야 구시가와 가깝다는 것.

 

투우장 바로 옆이었고, 대성당까지 빠른 걸음으로 5분 정도 걸렸다. 또 직접 제작한 지도를 나눠주고 포스트를 설명해 주는데, 특히 식당 추천이 좋았다. 초행길에 꽤 도움이 됐다. 침구류에서도 불쾌한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단점은 대부분의 민박이 그렇듯 바닥이 아예 맨발로 다닐 수 없는 돌 바닥이고, 욕실에서 방까지 신을 신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 2인실이라도 방 안에 욕실이 있는 구조와 복도를 지나 공용 욕실이 있는 구조는 천지차이다. 그리고 식사는 전혀 기대할 바가 못 된다. 그냥 혼자 자취하면서 먹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워낙 대단한 대접을 받아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주요 관광 포스트와의 연결점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추천. 나머지 요소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면 비추.

http://cafe.naver.com/sevilla5happy.cafe

 

 

 

지도에서 B지점이 민박집, A지점이 대성당 모퉁이(대성당이 워낙 거대하다. 농담 아니고 지도상의 저 구획이 모두 성당이다).

 

도보로 5분은 조금 과장이고 7,8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지도 왼쪽의 큰 M자가 써 있는 곳이 프라도 데 산 세바스티안, 즉 버스를 내린 고속터미널.

 

거기서 꽤 큰 공원(공원 이름도 프라도 산 세바스티안인 모양이다. 버스 터미널 이름과 같다)을 건너가면 바로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na이다.

 

그러니까 작정하고 대성당 부근, 그리고 에스파냐 광장만 보기로 맘먹은 사람에겐 좋은 입지가 아닐 수 없다.

 

 

 

숙소에서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식당 피멘톤(Pimenton)은 반드시 들러 볼만한 곳. 나중에 자세히 소개한다.

 

 

저 피멘톤 앞길로 죽 내려가 도착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의 남쪽 면(엄밀히 말하면 성소교회의 남면).

 

세비야를 대표하는 교통 수단인 트램이 마침 지나갔다.

 

 

 

트램의 뒷모습. 1.5유로에 시내의 주요 지점을 연결해 주는데 꽤 편리하다.

(카테드랄 앞에서 고속터미널까지 단 2정거장. 5분이면 도착)

 

표를 끊고 차를 탔는데, 전혀 검표와 관련된 수단이 없어 매우 당황했다.

물론 처음엔 당황하지만, 다음엔 매우 기뻐하게 된다.

 

 

 

꽤 걸어야 카테드랄과 성소교회(Iglesia del Sagrario: Church of Sanctuary)의 경계면에 도착한다.

 

왼쪽은 왕실예배당의 입구, 오른쪽은 카테드랄의 서쪽 문.

 

 

 

그러니까 저 빨간 동그라미를 친 곳이 바로 대성당의 부속 건물인 성소교회다.

 

지금 서 있는 길이 저 빨간 선이 그어진 길이고.

 

 

 

전에도 말했듯 스페인의 카테드랄 앞길은 그리 넓지 않아서 전경을 찍기가 편치 않다.

 

그래서 꼭 이렇게 올려찍기를 해야 한다.

 

그래도 이 서문, 즉 승천의 문(Fuerta del la Asuncion)이 이 거대한 성당의 메인 도어라니 찍어 둬야지.

 

 

 

서문의 좌우를 자세히 찍은 뒤, 옆의 성소 교회로 입장한다.

 

 

 

성소교회 의 내부. 천장의 흰 천은 보수공사를 위해 씌워 놓은 것인데, 제법 잘 어울렸다.

 

성소교회, 즉 영어로 하면 Church of Sanctuary 인데, 무엇을 위한 성소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지도 않고... (보기에 따라선 깊숙한 곳일 수도 있다.)

 

아마도 예수의 유골이나 성인의 유골을 안치했다는 의미로 Sanctuary라고 한 듯.

 

 

 

왕실예배당만 해도 규모가 상당하다. 물론 잠시 후 보게 될 대성당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

 

스페인식 성당의 배치를 보면, 복도(?) 양쪽으로 있는 작은 방 하나 하나가 모두 예배당 역할을 한다.

 

이런 작은 방들을 카필라 Capiilla 라고 한다.

 

 

 

작은 방 하나 하나마다 이런 식의 성상 배치가 되어 있다.

 

대부분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예배당이다.

 

 

 

중앙의 주 성상만이 예수를 모시고 있다.

 

 

 

조금 자세히 보면 이런 모습.

 

예수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면 아마도 이 제단 뒤편일 것 같다.

 

나머지는 거의 모두 성모상이다.

 

 

이렇게 금빛으로 찬란하게 묘사된 성모상.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성모의 발 아래를 받치고 있는 올망졸망한 아기 천사상들이다.

 

신체의 다른 부위는 보이지 않고 얼굴만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좀 징그럽기도 하고, 성모가 아이들의 머리통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식으로 천사의 몸통을 다 묘사하고 있다면 그나마 낫긴 하다.

 

아무튼 좀 적응하기 힘든, 스페인 식의 묘사법이다.

 

 

주 예배석 위쪽의 쿠폴라에서 들어오는 빛. 흰 천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보수중이라 조금 더 돋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카테드랄의 앞길로 이렇게 한가롭게 관광객 용 마차가 다닌다.

 

 

 

서쪽 문 근처에서 죽 내려와 왼쪽으로 꺾어지면 대성당의 남쪽 문, 즉 관광객을 위한 일반 입구가 나타난다.

 

위 사진의 파란 세모가 있는 곳. 바로 여기다.

 

 

 

이것이 세비야 대성당의 대략의 입면도. 아까 위에서 본 승천의 문(Puerta de la Asuncion)이 오른쪽(그러니까 서쪽)에 있고, 지금 서 있는 면은 저 입면도에서 안 보이는 남쪽이다.

 

그 남쪽에는 왕자의 문(Puerta de la Principe)이 있다.

 

바로 이 문. 이 문 왼쪽이 관광객용 출입구다.

 

 

 

남쪽면에 위치한 카테드랄의 동쪽 출입구. 개인 입장객은 이곳으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체 입구는 북쪽, 히랄다 탑 옆구리에 따로 있다)

 

입구의 청동상은 세비야의 문장이 든 깃발과 세비야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입구로 처음 들어가면, 세비야 대성당과 관련된 박물관을 먼저 보게 되는데,

 

 

 

 

에그머니나. 이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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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둘쨋날. 역시 아침부터 바르셀로나 여행에 나섰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유로자전거나라 투어. 이번엔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속살 투어다. 특히 전날 밤 투어에서 다녀 본 길들을 낮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끌렸다. 다만 걷는 거리가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다소 긴장했다.

 

그런데 정작 집합한 뒤, 카탈루냐 광장 맞은편의 카페로 향한다.

 

 

카페 이름은 4Gats. 4가 Quatro라 콰트로가츠라고 읽는다. 정식 이름은 카탈루냐어로 Els Quatro Gats 다. gat이 영어의 cat이니 네 마리의 고양이란 뜻.

 

이 카페가 바르셀로나에서 무명 시절의 피카소가 늘 죽치고 앉아 시간 때우던 유서깊은 곳이라는 거다. 갈 데가 없어 하루 종일 자리 차지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가끔씩 커피도 한잔씩 서비스로 주고 하던 주인장이 사실상 피카소를 키웠다는 이야기. 피카소 뿐만이 아니고 이 카페는 당대 스페인 화단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라몬 카사스 Ramon Casas 였기 때문. 파리를 늘 동경했던 카사스는 바르셀로나에도 파리의 유명 카페들처럼 예술가들의 보금자리가 될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게(?)를 열었다.

 

아래 그림이 카사스의 유명한 대표작. 자전거 앞자리에 수염난 사람이 카사스 자신, 뒷자리 사람은 콰트로가츠의 공동 경영자인 페레 로메우 Pere Romeu라고 한다.

 

 

여기 있는 그림은 사본이고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아무튼 화가들답지 않게 경영 수완도 좋았던지 4Gats는 오늘날까지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중이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에도 나왔다. (사실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바르셀로나의 풍광이 그닥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아래쪽 자리 중 하나다.

 

 

 

 

아무튼 1897년부터 성업해온 유서깊은 곳 답게 곳곳이 예쁘고 아늑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카소의 일대기(말하자면 피카소와 일곱 여자-아내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날 바르셀로나 투어의 시작이다.

 

사실 공식적인 미술사를 보면 피카소는 수없이 변신한다. 초기 - 청색시대 - 장밋빛시대 - 아프리칸 - 입체파 - 신고전주의 - 다시 입체파 - 자유분방한 만년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스타일을 보였다. 막연히 이렇게만 알고 있던 터에 그 변화의 시기마다 피카소의 내면이 흔들릴만한 생활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창백하고 우울한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청년기 절친이었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Carlos Casagemas의 자살, 그리고 1901년 파리로 건너가 느낀 '나는 우물 만 개구리였구나'와 식의 느낌에서 온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다. 피카소가 1881년생이니 이 해 나이 만 스무살. 이 콰트로가츠에서 늘 어울리던 친구, 그리고 파리로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간 친구가 모델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고 자살한 사건 정도면 충분히 인생을 바꿔놨을 만 하다.

 

 

 

이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인생 La Vie'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카사헤마스라는 설명. 피카소의 친구에 대한 애도가 느껴진다. 아무튼 이 청색시대는 피카소에게 사랑이 찾아오면서 끝난다. 역시 젊은이에겐 사랑이 약. 피카소가 모델 페르난도 올리비에 Fernando Olivier 와 사랑에 빠지면서 우울한 청색은 사라지고 바로 장및빛 시대가 시작된다.

 

 

 

 

피카소는 올리비에의 초상만 100장 이상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피카소가 여자를 총 몇명 사귀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여성 편력에서 시작점은 늘 이 올리비에다.

 

 

 

 

에바 구엘 Eva Gouel - 피카소의 초기 입체파 시기. 하지만 구엘은 1912년 피카소를 만나고 3년만에 결핵으로 병사한다. 깊이 사랑했다고는 하나, 피카소는 죽기 직전의 그녀를 나몰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피카소는 본래 현실적인 성격이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우 민감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처음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이었지만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일제히 혹평을 해 대자 장롱 깊숙히 그림을 감춰 두었다가 1916년, 시대가 큐비즘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전시에 내놨다...는 이야기. 이유야 어쨌든 '아비뇽의 처녀들'이 9년 동안 미발표작으로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올가 코흘로바 Olga Khokhlova - 러시아 발레단의 발레리나. 이 시기 피카소는 화단의 기린아로 칭송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면서 과도한 실험성에서 도피,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지향한다. 어쨌든 피카소가 실제로 결혼한 첫 여자는 올가.

 

사실 수많은 여자관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가 단 두번밖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올가가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Therese Walter - 1927년, 피카소는 17세의 마리 테레즈를 만난다. 임신중이던 아내 올가는 마리 테레즈도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격분해 이혼을 요구하지만 피카소는 재산 분할을 거부. 따라서 올가는 1955년 죽을 때까지 피카소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유지한다. 

 

아무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위 그림)'의 주인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얼굴들을 보면 평온함과 행복이 느껴진다. 반면...

 

 

 

 

도라 마르 Dora Maar -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낳을 수 있게 했던 여자라는 평. 사진작가이며 그 스스로도 예술가여서 피카소 자신도 스스로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라고 불렀다고 함. 1936~1944년 사이 피카소의 연인이었지만, 자유분방한 피카소에게 너무 집착하다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피카소의 유명한 '우는 여자(위 그림)' 연작 그림이 바로 신경쇠약으로 피카소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것이다.

 

마리 테레즈를 그린 그림과 뒷날의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 만큼 그 여자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비교도 없을 듯.

 

 

 

 

 

프랑수아즈 질루 Francoise Gilot - 가장 얘깃거리가 많은 여자다. 1943년, 62세의 피카소는 22세의 미술학도 를 만나 깊은 관계에 빠진다. 젊은 연인의 활력 덕분인지 이 시기의 피카소는 '고전 다시 그리기'의 새로운 세계에 진출한다.

 

 

 

이 그림도 지금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의 피카소는 자신감이 흘러 넘친 나머지 "야, 내 그림이 벨라스케스 그림보다 훨씬 낫지 않아?"하고 물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화면 아래쪽의 개 그림에서 피카소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이 개는 1992년, 바로 유명한 이 개의 모델이 된다.)

 

 

 

바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모델인 코비 Cobi. 어딘가에서는 피카소가 키우던 개 이름이 바로 코비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아무튼 잠시 곁길로 이야기가 샜다.

 

 

 

질루는 60이 넘은 피카소의 일방적인 만행과 왕자병,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젊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에 피카소와 결별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식으로 피카소에게 복수를 했다. '피카소와의 삶 Life with Picasso'라는 자서전 풍의 책을 내면서, 한 해변에서 늙은 피카소가 큰 양산을 들고 젊은 자신을 공주처럼 모시고 따라다니는 장면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 봐도 '망할 놈의 영감, 어디 엿 좀 먹어 봐라' 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유사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은 젊은 연인을 사귀면서 자신의 창의성을 유지했던 것 같다. 피카소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끝없이 끌렸던 것이 바로 야수와 같은 창작력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질루는 이에 대해 "그 '성스러운 괴물(sacred monster)'에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은 여자는 나 뿐"이라며 피카소의 이기적인 모습을 고발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 자신이 얻은 건 무엇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질루가 낳은 딸 팔로마 피카소는 뒷날 티파니의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쳐 피카소의 자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자클린 로케 Jacqueline Roque - 유로자전거나라 설명에선 '피카소도 결국 질루 이후 지친 탓인지 만년은 35세의 과부와 보냈다'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피카소는 1953년 27세의 이혼녀 로케를 처음 만났다. 이 시기, 피카소는 도자기에 새롭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35세의 로케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니까 로케 역시 피카소가 좋아했던 '젊은 여자'였다. 단지 오래 버틴 젊은 여자였을 뿐이다. 운이 따랐다면 피카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 '공식 아내'인 올가 코흘로바가 1955년 사망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로케는 피카소의 '아내 2호'가 됐다.

 

피카소의 두번째 결혼은 1973년 피카소의 죽음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질루를 비롯해 수많은 과거의 연인들, 피카소의 '씨'를 낳은 엄마들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놓고 도전해 왔고, 로케는 이들과 맞서 '피카소의 아내'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1986년, 로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설명에 따르면 로케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다른 유족들의 접근을 막을 정도로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피카소 이야기 끝.

 

[물론 저는 미술사 전문가도 아니고, 바르셀로나를 다녀 온 여행객일 뿐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혹시 더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피카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페에서 듣는 느낌도 색달랐다.

 

 

 

바르셀로나 시가 인증한 문화공간으로서의 표석. 바르셀로나 곳곳에 이런 식의 유적 인증 표지가 있다.

 

 

 

"아저씨, 제가 죽치고 있어도 뭐라고 안 해 주셔서 감사해도. 혹시 제가 뭐 해 드릴거라도 없을까요?"

"음. 너 곧잘 그리는 것 같은데 우리 가게 포스터 하나만 그려 봐라."

"포스터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로트렉 그림이 마음에 들더라구요."

 

뭐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 피카소가 그린 4Gats의 포스터.

 

이렇게 해서 첫 코스인 4Gats를 나서 피카소 미술관 Museo Picasso 로 간다.

 

 

 

 

 

 

좁다른 고딕 지구의 골목길을 수십번 꺾어져서 도착한 곳이 바로 피카소 미술관. 왜 피카소 미술관인데 철자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B' 마크를 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 시의 공식 문장인 것 같기도 하다.

 

 

 

 

한 귀족 가문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덕분에 중정이 있는 고운 건물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름답다. 규모나 소장품의 수가 결코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위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들(!)과 함께 거론된 피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잘 정돈된 미술관이었다. 입장료 11유로. 월요일 휴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갔다면.^^

 

 

 

 

피카소 미술관에서 역시 다시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넓어지면서 빛을 한껏 안고 나타나는 건물이 있다. 바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델 마르 Santa Maria del Mar.

 

1384년 완공될 당시에는 이 성당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찰랑 하는 해변이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는 잘 알려진대로 뱃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

 

 

 

 

고전적인 사원의 양식미가 잘 살아 있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처럼 전 세계에 단 하나 있는 아름다움과는 좀 다르지만, 아무튼 내부에 들어서면 위압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유럽 대 성당의 느낌에 충실하다.

 

 

 

그렇지만 고전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는 1992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 있다.

 

1992년은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니셜들이 쓰여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중 메달리스트들의 이름 철자를 이용해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다. 누가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중에 황영조 선수의 이니셜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이 좀 찾아 주기 바란다. 내 눈엔 안 보여서.

 

 

 

 

 

7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산타마리아 델 마르는 여전히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카탈루냐 카톨릭의 상징인 검은 성모상.

 

본래의 검은 성모상은 이슬람 지배 초기, 이교에 대한 박해를 겁내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시절의 유물이다. 그때도 처음부터 검은 색이었던 것은 아니고, 지하 동굴 성당에서 예배를 보려니 촛불이나 횃불의 그을음 때문에 성모상이 검게 변했다는 것. 그 전통을 기려 이렇게 지상에 나와 있는 성모상에도 검은 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검은 성모상은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중 유명한 관광지인 몬세라트에서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해서 오전 일정 끝. 한여름은 아니지만 바르셀로나의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난데없이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위대한 한국인과 마주치게 된다. 대체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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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야간 투어는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랜 경험에 따라 '첫날은 일단 피곤하게'라는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첫날 무리해서 여정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무서운 건 시차의 극복이었다. 첫날 일정을 오후 7~8시 정도에 마감하고 쓰러져 잠들어 버리면 기껏 많이 자 봐야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정도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다시 자 보려는 부질없는 노력과, 다음날 일정까지 망치면 어쩌나 하는 스트레스가 매우 짜증스럽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가능한 한 첫날은 일찍 잠들어선 안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둘쨋날 기상 시간이 늦으면 늦을 수록 그 여행은 성공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르셀로나 야경 투어는 람블라스 길 한 귀퉁이, 지하철 역으로 리세우 Liceu 역 부근에 있는 레이알 광장 Placa Reial 에서 시작됐다. 레이알 광장은 네 면이 건물로 둘러싸인 거의 정사각형의 공간이다.

 

 

 

사실 사진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결코 사진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한복판의 랜드마크인 분수는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주변 건물들의 아치에는 세월의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노천 카페에서 먹고 마시며 금요일 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저분하다면 지저분한,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그런 장소였다.

 

그리고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색이 다른 가로등, 이게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이게 가우디의 데뷔작이라는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 본래 가스등으로 설계된 것이었다고 하나 "왜 니가 설계한대로 짓기만 하면 뭐든 왜 설치비가 두배씩 드는 거야"라는 시 당국의 반응 때문에 결국 1호 등인 이 등만 남고 나머지는 설치된 곳이 없다고 전한다. 비록 가우디의 건물들이 지금은 입장료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하지만, 건축 당시로 돌아가 보면 정말 경제적으로 성공한 곳이 없다.

 

아무튼 야경을 찍으면서 새로 산 카메라의 놀라운 성능에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이 밝기에서 삼각대도 없이 이 정도..?

 

마침내 가이드 도착. 야경 투어 출발.

 

 

 

 

 

이 지도에서 A라고 표시된 곳이 출발 지점인 레이알 광장, 그리고 B라고 표기된 곳이 일단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탈루냐 음악당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이다. 위의 구글 지도상으로는 1.2Km,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거리라고 볼 수 있는데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만큼, 약 1시간 동안 골목을 이리저리 돌며 지나간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카탈루냐 광장의 남쪽, 바르셀로나의 구 도심은 엄청나게 미로같은 골목과 골목의 연속이다.

 

그리고 지도 오른쪽의 동그라미 친 부분 바로 아래를 보면 El Gotic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로 이것이, 이 주변을 가리키는 이름인 '고딕 지구' 라는 뜻이다. 이 주변에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 Cathedral, 왕의 광장 Placa del Rei, 그리고 시립 역사 박물관 등의 포인트가 있다. 비록 도착 첫날, 한밤중에 골목길을 빙빙 돌아 간 위치가 제대로 기억에 남을 리 없으나, 아무튼 나중에 지도상으로 확인해 보면 그렇다.

 

사실 저 위 지도가 커버하는 영역 안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찾는 바르셀로나 관광 포인트의 절반 가량이 들어 있다. 아무리 미로같은 골목의 연속이라지만 방향만 눈에 익으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지도 왼쪽 윗부분의 미로처럼 표현된 카탈루냐 광장, 광장을 등지고 바로 오른쪽 아래(바다 방향)로 뻗은 라 람블라 La Rambla 거리,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라이에타나 길 Via Laietana 만 알면 절대 헤매지 않는다. 중간에서 아무리 헤매도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10분 내에 두 길 중 한 길과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이건 한참 나중의 이야기고, 일단 밤길을 즐겨 본다.

 

 

 

 

이렇게 가이드의 뒤통수만 보고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는게 시작.

 

소니 RX100 2의 렌즈 밝기 때문에 길이 실제보다 밝아 보일 수 있다. 사실은 굉장히 컴컴하고 으슥한 골목이다.  

 

 

 

그런 좁은 길에도 수시로 자전거가 지나간다. 긴장은 해야 한다.

 

 

 

물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수백년 전에 건설된 성벽의 잔해, 그리고 아치와 만날 수 있다.

 

(이 광장은 영화 '향수'의 무대가 되었다는 곳.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작은 광장 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금세 익숙해진다.

 

 

구 도심에는 높은 건물 없는 5~6층짜리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스페인 특유의 파티오 Patio, 즉 중정(中庭)을 갖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통으로 된 돌 건물 같지만 내부에는 뻥 뚫린 공간과 작은 정원이 있다는 뜻.

 

도시 경관 유지를 위해 건물의 외부를 수리하는 일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다. 이건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 대부분 적용되는 규정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부에 들어가 보면 그렇게 오래된 건물이라는 느낌은 없다고 하지만, 건물 외관을 봐선 도저히 현대인이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의 아파트들은 특히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도 도심 한복판인데다, 보기보다는 치안도 좋고, 무엇보다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에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집세는 꽤 비싼 편이라고 한다.  

 

아무튼 저 위 사진들이 페란 Ferran 거리, 아비뇽 Avignon 거리 등을 지나며 찍은 것들이다. 잠깐 아비뇽 거리? 그렇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오는 바로 그 아비뇽 거리다. 피카소가 살던 무렵에는 도심의 집창촌이었고, 그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 또한 거기서 일하는 매춘부들이었다는 얘기다.

 

 

 

이 아비뇽이 '아비뇽의 유수'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거리 이름이었다니.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그 사연을 알고 나니, 이 그림이 그렇게 큰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가 단지 화법이 대담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피카소는 과감했다. 20세기 초에 누가 이렇게 누구나 입에 담기 꺼려 하는 창녀촌의 여자들을 올 누드로 그리고, 제목까지 명확하게 붙여 작품으로 내놓을 생각을 했을까 싶다.

 

 

 

 

사실 야경 투어 가이드의 방침 자체가 '분위기를 느껴보라는 보너스 투어' 형식이지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어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지나가다 보니 그럴싸한 건물 벽면에 뭔가 중요한 듯한 설명 명패가 붙어 있어 찍었다.

 

팔라우 델 라 헤네랄리타트 Palau de la Generalitat 는 '카탈루냐 자치정부 청사'라는 뜻. 팔라우는 스페인어로 궁전, 청사라는 뜻이고 헤네랄리타트는 카탈루냐 특유의 자치 시스템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건 그 자치청사의 뒷골목. 건물과 건물 사이를 '행정적 편의'를 위해 연결해 놓은 모습이다. 공무원 건물이라지만 관광객이야 알 바 아니고, 밤에 보면 꽤 멋지다.

 

 

 

 

미로같은 건물마다 도로명이 써 있긴 하지만 초행자가 길 찾기란 매우 힘들다. 그래도 갈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 위에서 말한 대로 어느 방향이든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람블라 거리나 라이에타나 길 중 하나를 만나게 되니까.

 

단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전 스페인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 주의사항.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거나 잘 모르는 듯한 사람을 만나면 빨리 패스하고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 상대방이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한데도, 딱 잘라 이쪽인지 저쪽인지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뭔가 수다를 떤다. 특히 노인들이 이런 경향이 짙다. 마치 '너는 스페인어를 모르지. 하지만 내가 계속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너도 귀가 트여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악의에서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겠지만, 바쁜 관광객의 입장에선 잡혀 있으면 좀... 곤란하다.

 

 

 

어둑어둑한 골목만 보면 마치 유령도시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골목 사이마다 카페나 바가 있고 사람들이 빼곡 들어차 술을 마시고 있다. '있을까' 싶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 골목을 돌고 돌다 가게 된 곳이 유명한 포인트 중 하나인 왕의 광장 Placa del Rei. 저 아마추어 밴드가 공연하고 있는 계단이 바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최대한 스페인 발음에 가깝게 하면 끄리스또발 꼴론)가 이사벨라 여왕에게 신대륙의 발견을 보고한 역사적인 자리다.

 

 

 

 

 

왜 이 자리에서? 하는 생각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면 사라진다. 이곳이 바로 스페인이 분할되었던 시대, 아라곤 Aragon 왕국의 궁전 앞이기 때문이다. 아라곤 왕국의 수도는 사라고사 Zaragoza 지만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도 왕궁이 있었던 모양이다.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초간단으로 설명하면, 아랍계 무어인들과 오랫동안 공존해 온 스페인의 기독교/유럽 세력은 강력한 국토 회복 운동을 벌여 수많은 지역이 몇 개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 결과 중부 스페인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던 카스티야 왕국과 동남부,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을 장악한 아라곤 왕국이 양강을 형성하게 됐다.

 

1479년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가 결혼을 한다. 양쪽 모두 기득권 세력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아무튼 통일과 국토 회복을 위한 대 결단이 내려졌고, 두 나라가 하나로 무혈 통합됐다. 그렇게 해서 국력이 두배가 된 이들은 1492년 1월, 그라나다에 있던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기독교 스페인의 회복, 즉 레꽁께따 Reconquesta(철자를 보면 알 수 있지만 re-conquest, 즉 '재정복'이란 뜻이다. 레꽁께스따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s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를 완성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해 8월, 스폰서를 구하다 구하다 못 구한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얻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인도를 발견하겠다고 가더니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발견해 냈다(물론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 동쪽의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향료 대신 황금을 가져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다. 1492년이 이토록 중요한 해였으므로 스페인에서는 그 500주년인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아라곤이란 말을 듣는 순간 '반지의 제왕'의 비고 모텐슨을 떠올리며 꺅 소리를 내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 아라곤은 Aragorn. 책에는 아예 아라고른이라고 써 있다.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과는 아무 상관 없이 톨킨이 만들어 낸 이름이다. 혹시 여기 오면 반지의 제왕과 관련된 뭔가가 있을까 기대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기우로 한마디 보태면,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이다. 제발 실제 역사와 판타지는 구별 해 주시길.^^)

 

 

 

 

이렇게 동상과 그림자를 이용한 조명 플레이도 꽤 멋지다. 누구 동상인지는 패스.^^

(지금 찾아보니 바르셀로나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라고 한다.)

 

 

 

왕궁의 한 귀퉁이. 지금은 이쪽 면이 라이에타나 대로변으로 나와 있다. 대로라고 해봐야 겨우 4차선 정도다.

 

 

 

뒤로 살짝 돌아 나오면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 Cathedral. 각 도시마다 있는 카테드랄은 그 도시의 수많은 성당들 중 본당을 의미한다. 당연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의 두오모와 거의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지만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은 좀 서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일단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지어지고 있는 한편, 남쪽 해변 가까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에도 지명도 면에서 뒤지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규모나 화려함 면에선 별로 뒤질 게 없어 보이는데... 안됐다.

 

 

 

거기서 길을 건너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카탈루냐 음악당이 나온다. 오페라의 전당인 리세우 Liceu 극장과 함께 바르셀로나 공연 문화의 상징이며, 이 도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대 가우디의 라이벌이라는 건축가 몬타네로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고, 외벽만 봐도 꽃 장식이 요란하다. 심지어 내부 투어만 하는데도 입장료를 받는다.

 

내일 저녁에 공연을 보러 올 예정이므로 이 정도만.

 

 

 

 

아름다운 건 분명하나 명성에 비해 너무 좁은 골목길 안에 있어 건물 전체를 찍을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여기서 불량 체력 관광객들은 일행과 결별.

 

나머지 일행은 한국의 리움 미술관도 설계했다는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지은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명물, 아그바 타워 Agbar Tower를 보러 떠났지만, 이만 하면 숙면을 취하기 충분하겠다는 판단 아래 숙소로 향했다.

 

 

 

바로 이 건물. 저렇게 태극 색으로 반짝이는 야경 사진을 보면 가 볼걸 그랬다는 생각도 물씬물씬.

 

그런데 여행은 가서 배우고, 다녀 와서도 배운다. 막상 바르셀로나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명물로 아그바 타워도 있어요"라고 말할 때, "아, 런던에서 그거랑 똑같은 건물을 봤어요. 같은 사람이 지은 건가 보죠?"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네. 그렇다고들 하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니더라는 거지.

 

알고 보니 지은 사람이 달랐다.

 

 

 

이 건물이 런던에 있는 30 세인트 메리 엑스 30 St. Mary Axe(좀 길지만 건물 이름이 이렇다). 똑같이 생겼지만 이건 장 누벨이 아니라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의 작품이었다. 이럴수가.

 

공법이 전혀 다르다 해도 외관이 이 정도로 비슷하면 표절 시비라도 이는 게 정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런던과 바르셀로나에 있는 똑같이 생긴(바르셀로나에서는 '좌약 빌딩'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두 건물은 아버지가 달랐다. 놀라웠다.

 

이렇게 해서 첫날을 마무리.

 

둘째 날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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