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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출신의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에서 그라나다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건축물과 음악의 일체감. 나는 이미 코르도바의 이슬람 사원과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 이런 것을 짐작했다. 그런데 여기 그라나다에서 그것은 가장 명확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아랍 건축물의 최후이자 최상의 노력은 모든 물질적 형태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벽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것을 호리호리한 기둥이나 아치로 대체했다. 혹은 아랍의 카펫처럼 벽들을 조각하고 디자인했다. 그렇게 그것들은 무게에서 해방되었다.

 

기둥들은 더 가늘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낮아졌다. 아치는 영묘하게 물결친다. 장식물들은 사상처럼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 된다. 단일한 주제가 주어지고, 이 주제는 수학적인 정교함과 환상의 풍요로움으로 무한히 울려퍼진다.

 

아랍의 음악가이자 건축가들은 빛과 공기와 색으로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대담한, 하나의 특별한 목적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물질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고정되고 무거운 모든 내용물을 추상화시켜서 오직 지적인 윤곽만을 남기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고 나니 진정 실감이 난다.

 

 

윗글의 이상이 가장 잘 실현된 곳을 찾자면 역시 나스르 궁전 가운데에서도 사자의 정원 Patio de los Leones 을 꼽게 된다.

 

사자의 정원인데 사자는 어디 있다고 궁금해 하실 분들, 

 

사자 나온다.

 

 

 

뒤로 돌면 이런 장식의 문.

 

앞을 보면 생각보다 규모는 작지만 자못 감동을 자아내는 사자의 정원이 전경을 드러낸다.

 

 

 

 

 

 

나스르 궁전 평면도. 대략 파란 선을 따라 구경을 하게 된다.

 

중앙의 긴 빨래판 모양이 도금양(아라야네스)의 정원 Patio de los Arrayanes, 이고 우하단에 사자의 정원이 보인다.

 

 

사자의 정원에 있는 사자는 우리 민화 속 호랑이를 닮았다. 공포의 대상이 아닌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사자상이 12마리인 것은 매 시간마다 물을 흘려 내보내는 것으로 시계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든 사자가 입을 통해 물을 흘려 내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의 방들.

 

첫번째 방은 흔히 아벤세라헤의 방 Sala de los Abencerrajes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팔각별 모양의 천장은 나스르궁 최강의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방은 나스르 궁에서 가장 흉악한 전설을 담고 있는 방이다.

 

아벤세라헤 일족의 남자 30여명이 이 방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정치적 음모에 대한 발각설과 왕비와의 불륜설이 있다. 가이드북에는 이 방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있다는 등의 호러 스토리를 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천장의 아름다움이 매우 인상적인 방이다.

 

어쨌든 성 전체가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기 전에도, 넘어간 뒤에도 이 방은 께름칙하다는 이유로 그리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여행 사이트나 기행문의 '알함브라' 파트를 장식하는 바로 그런 비주얼이다.

 

사실 사자의 정원을 구성한 이 수많은 기둥들이 사진으로 볼 때보다 못하다고 실망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그 많은 관광객용 사진들은 대개 여름의 해질녘에 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진들 속에서 이 기둥들은 금빛으로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직접 가서 보면 솔직히 그런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날씨가 꽤 흐렸다. 해가 쨍쨍 나는 맑은 날엔 또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꽤 조명을 타는 유적이다.

 

 

 

벽에 어른어른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친다. 이런 것들이 아벤세라헤 일족의 핏자국인지도.

 

 

그리고는 왕의 방. Sala de los Reyes

 

스페인어의 Sala는 방(Room)으로도, 홀(hall)로도 번역되는데 이 경우엔 그냥 홀이라고 하는게 나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Sala de los Reyes 는 방도 홀도 아닌 그냥 긴 회랑이다.

 

 

 

그 다음 방은 두 자매의 방 Sala de Dos Hermanas 이라고 불린다.

 

특별한 전설이 있는 방은 아니다(심지어 정말 자매가 살았다는 보장도 없다). 보압딜과 그 이전의 군주들이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방으로 알려져 있다. 저 높은 천장에서부터 들어오는 빛이 꽤 아름답게 방을 감싼다.

 

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아름답다.

 

 

 

 

이렇게 해서 사자의 정원을 지나 나스르 궁의 부속 건물로 접어든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 보면 창틀의 모양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고,

 

 

천장의 글자도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여기는 카를로스 5세가 잠시 사용했다는 황제의 집무실 Habitaciones de Carlos V 이다.

 

 

방 자체가 지금까지 거쳐온 알함브라의 방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누가 봐도, 기독교도들이 알함브라의 주인이 된 뒤에 구축한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 나타나는 방이 바로 '워싱턴 어빙의 방'.

 

전에 말했던 '알함브라 이야기'의 저자이며, 사실상 서구 사회에 알함브라 관광 붐을 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중세 이후 먼지에 덮여 있던 알함브라를 세상에 널리 알린 덕분에 관광객들이 밀려오고, 그 덕분에 스페인 정부도 알함브라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고 정비에 나섰다는 얘기다.

 

어빙은 물론 '스케치북'의 저자로 알려진 미국 문학의 비조이기도 한데, 이렇게 알함브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방이 남을 정도의 영광은 역시 알함브라를 소개한 공이 아닐까 싶다.

 

(국내 번역 제목은 '알함브라' 1권과 2권인데 그라나다로 갈 때 꼭 읽고 가야 할 정도는 아니다. 감상이 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고나 할까. 맘에 드는 문장은 아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의 형상.

 

아시는 분 있으면 설명 좀...

 

 

 

워싱턴 어빙의 방을 나선 테라스에서 구 시가 쪽을 바라보면 이런 정경이 펼쳐진다. 안달루시아 특유의 구조를 가진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아름답다.

 

 

 

 

그래서 이런 장난도 쳐 보고 싶어진다. 인형 같은 집들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나스르 궁 구경도 거의 끝이다.

 

쇠창살의 정원 Patio de la Reja. 글자 그대로 네 면이 모두 건물에 둘러 싸인, 정통 사각형 파티오다. 작고 아담.

 

 

 

그리고 나서 건물을 돌아 나오면 오렌지 정원 Jardín de los Naranjos 이 나온다.

 

 

옆으로 돌아 들어가면 아랍풍 목욕장의 유적이 등장.

 

 

 

타일로 방수가 되어 있는 목욕방. 별 모양의 천장 창을 통해 조명을 해결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오렌지 나무 정원을 거쳐 밖으로 나오게 된다.

 

 

나스르 궁 안녕. 그리고 관람 시간이 끝났다.

 

알함브라는 여기서 안녕.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빗발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의외로 알함브라를 보고 실망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생각보다 매우 작은 규모(나스르 궁에 한정해 이야기할 때), 나스르궁을 보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절차와 줄서기의 번거로움, 또 아마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직면해야 할 안달루시아의 직사광선과 더위 등이 이런 실망을 부추긴 요인이 아닐까 싶다.

 

알함브라는 다른 중동 지역의 이슬람 유적에 비해 규모와 색채감이 좀 약한 것도 사실이다. 돌과 벽돌의 자연색을 그대로 활용한 유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마르칸트의 티무르제국 유적의 웅대함과 신비로운 파란 타일에 넋을 잃어 본 사람이나, 이스탄불 톱카피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금은보화의 빛을 본 사람에게 알함브라는 다소 소박하게 보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알함브라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전에도 얘기했지만) 알함브라의 아간 관람 사진을 보고 난 뒤였다. 아마도 밝은 태양 아래서는 워싱턴 어빙이 그토록 강조하는 '달빛 어린 전설'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관능적이고 요염한 분위기'를 느끼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언젠가 돌아와 밤의 알함브라를 보게 되길 기원하며.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식당...은 다음 편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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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엠비씨 일기예보 배경음악(일설에 따르면 오늘의 주요 프로그램 안내 배경음악이라고도 한다^^)으로 늘 나오던 청승맞은 기타 연주곡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곡의 제목이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함브라 궁전? 뭔가 아라비안 나이트 풍의 이름을 가진 이 궁전이 아라비아가 아닌 스페인 땅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세월이 또 흘렀다. 제법 머리가 굵었고 왜 스페인에 아랍인들의 궁전이 있는지도 알았다. 또 세월이 흘러 그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역은 바로 나스르 궁전이고, 그 나스르 궁전이야말로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땅에 남겨 놓은 최고의 보물이라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왔다.

 

 

 

 

바닥도 예사롭지 않아.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 작다면 작은 공간이다. 나스르 궁전은 절대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단지 치명적인 조형미가 있을 뿐이다.

 

 

설계도면으로 보면 이렇게 생겼다. 입구로 들어가 직진하면 제일 먼저 메수아르 Mexuar 에 도달한다.

 

 

 

천장 장식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기둥과 각도가 애매하다 보니 카메라에 담기 쉽지 않은 '메수아르의 방'. 거의 모든 가이드북에 '메수아르의 방'이라고 나오는데 그냥 메수아르 Mexuar 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이 메수아르는 나스르 궁전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전실 antechamber 이며, 왕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때로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메수아르를 거쳐 나오면 다시 하늘이 보이고

 

 

작은 파티오가 하나 나온다. 저 문 안의 방 이름을 따서 파티오 델 쿠아르토 도라도 Patio del Cuarto Dorado, 즉 '황금의 방의 파티오'라는 이름이다.

 

 

 

 

작은 분수도 하나 있다. 파티오라고 불리려면 당연히 분수 하나는 있어야 한다.

 

 

 

 

 

이 황금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알함브라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황금의 방 자체는 그닥 인상적이지 않지만,

 

 

지금부터 알함브라는 디테일로 승부한다.

 

 

 

 

 

온 벽이 다 장식이다.;;

 

다른 문화권이라면 그림이나 조각이 있을 법 하지만 우상숭배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슬람의 특성상 어디에나 기하학적인 문양 뿐이다. 꽃무늬 비슷한 문양은 가끔 눈에 띄지만 동물 모양은 절대 없다.

 

 

 

황금의 방을 나와 모퉁이를 돌아 입구를 나서면 앗, 많이 보던 광경인데, 라는 정원에 도착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말 낯익은 광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을 볼 시간이 아니다. 왼쪽의 검게 보이는 입구로 발을 들여 놓으면,

 

 

 

 

 

 

 

 

코마레스 탑의 입구에 해당하는 배의 방 Sala de la Barca 이 나온다.

 

 

 

 

이런 다소 어두운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알함브라가 규모로 사람 기죽이기에 들어간다. 이것이 '대사의 방 Salón de los Embajadores '.

 

대사의 방이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알함브라의 왕이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기 위한 자리다.

 

대사의 방은 알함브라의 마지막 이슬람 군주였던 보압딜이 1492년 1월, 기독교도의 왕,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항복한 장소이기도 하다. 보압딜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해를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북아프리카로 망명한다. 물론 상대가 관용이라곤 모르는 기독교도들이었으니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기독교도 군주들의 후손인 카를로스 5세는 보압딜의 우유부단한 처사를 비웃으며 "나 같으면 알함브라를 나의 무덤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어빙은 이런 말로 보압딜을 옹호했다.

 

"권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 패배자들에게 영웅주의를 설교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불행한 이들에게 목숨 말고 남은 게 없을 때, 그 목숨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들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이 거대한 방은 이렇게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전성기 때 왕은 이 창을 등지고 앉아 귄위를 뽐냈다고 한다. 

 

 

 

여기 저기 인용되는 대사의 방의 천장.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이렇다. 이 시절 사람들에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듯한 위압감을 주었을 듯한 천장이다.

 

 

 

다들 천장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쥐어 뜯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어디에나 있는 종유석 문양.

 

대사의 방을 나서 다시 배의 방을 지나 이 아치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스페인어를 살려 '아라야네스의 정원'이라고도 소개되는 도금양의 정원 Patio de los Arrayanes 이 나타난다.

 

도금양은 뭘 도금했다는 뜻이 아니고, 식물의 이름이다.

 

 

이 샘으로부터 시작되는, 우아하고 격조있는 정원이다.

 

완벽한데 저 건물 너머로 보이는 흉물스러운 건물이 정돈된 스카이라인에 끼어든다. 바로 위에서 보압딜을 무시했던 카를5세가 이 궁 안에 지은 카를5세궁이다.

 

대체 왜 저기다 저따위 건물을 지은 것인지 불만이 생긴다.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면,

 

 

코마레스 탑이 보인다. 저 탑 안이 하나의 방이고, 그 방이 바로 그 대사의 방이다. 그러니 넓을 수밖에.

 

흔히 나스르 궁전은 3개 지역으로 이뤄졌다고 말한다. 첫째 메수아르, 둘째 대사의 방(코마레스 탑)과 도금양 정원, 그리고 세째는 사자의 정원과 거기 딸린 세 개의 방이다.

 

 

이것이 절정에 오른 기둥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자의 정원 Patio de los Leones.

 

 

 

엄청나게 많은 기둥들. 기둥 하나 하나, 벽면 하나 하나가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 안에 있으면 정말 아름다움에 둔감해 질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사자의 정원이라더니 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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