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처럼, 순한 맛의 아수라장
1. 나이를 넘어 고혹적인 맏딸, 미야자와 리에. 둘쨋딸, 미인이지만 확 끌리지는 않는 둘째딸, 오노 마치코. 별 인기도 없고 남자와 인연도 별로 없는 셋째딸, 아오이 유우(이건 좀 캐스팅에 문제가...?), 그리고 젊음과 발랄함이 주제인 막내 히로세 스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수라처럼>을 본 사람은 누구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떠올린다. 같은 감독이 만든 자매들 이야기. 그때 밖에서 들여온 막내였던 히로세 스즈가 이번에도 막내지만 업둥이 아닌 정규 멤버가 되었다는 점에도 뭔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쨌든 믿고 보는 고레에다. 명불허전. 드라마는 아름답고 섬세하다. 안 보신분들 얼른들 보시고,
2. 그 네 딸들이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바람을 의심하고, 자매간에도 툭탁거리고, 그러면서도 가족의 테두리를 꿋꿋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라 매우 흥미롭다. 템포도 적당히 빠르고, 중간 중간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같은 것 없이 툭툭 넘어가는 시간 흐름도 좋다. 그런데 제목이 <아수라처럼>이라니.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에겐 ‘아수라장’이라면 이보다 10배는 더 극악스러워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느낌인데.
그럼 한국에서라면 어떤 제목이 적절했을까. 아사리판? 문득 아사리판의 어원이 아수라장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3. 게이샤 지망생인 마이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다가 약간 쓴 맛을 봤지만, 고레에다는 ‘글로벌 시청자를 상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로컬리티를 강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아직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일본 프로듀서들의 공통된 입장인 듯. 고레에다가 에이스인 팀 재팬은 지금까지 게이샤, 스모, 닌자처럼 오래 전부터 서구인들이 사랑해온 소재들로 넷플릭스를 노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미국 시장에서 <쇼군>의 성공을 봤으니 이런 신념은 다 굳어졌을 것 같다.
똑같이 목표는 ‘세계인에게 먹히는 콘텐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지향하지만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쪽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한국 팀과는 상반된 접근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잘 만들면 다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파이팅.
4. 그런데 자매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려면 딸이 넷이어야 하는 법칙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작은 아씨들>도 그렇고, 지난해 인상적으로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도 그렇다. 특히 같은 일본 작품이다 보니 <세설>과 <아수라처럼>은 은근히 구조적인 공통점이 눈길을 끈다.
네 자매지만 맏딸보다 둘째딸이 동생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한다든지, 그러다 보니 둘째딸의 남편이 처형이나 처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족의 일원처럼 행동한다든지, 셋째는 남녀관계에 소극적이고 넷째는 오히려 지나치게 개방적이라 대조를 이루면서 가족들의 걱정을 산다든지...사실 이런 것들보다 더 표면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일본 전통 복장의 네 자매가 전면에 나선 포스터 같은 것들이다.
(세설이 뭔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물론 벚꽃철에 교토에 간 적은 없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세상을 화려하게 뒤덮다 강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을 노래하고,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지는 벚꽃
fivecard.joins.com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보니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오히려 ‘똑같잖아!’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튼 부분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세설>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런 비교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5. 사실은 <세설>과의 공통점을 너무 강조할 수도 없는 것이, <아수라처럼> 자체가 일본에서는 워낙 유명한 브랜드였더라고. 1979년에 이미 원작 드라마가 나와 히트했고, 2003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고레에다의 2025년 드라마 출연진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올스타 캐스팅으로 보이지만, 2003년작 영화에는 오타케 시노부, 구로키 히토미, 후카츠 에리, 후카다 교코가 네 자매 역으로 출연. 굳이 점수를 매겨 보자면 이쪽이 더 대단한 캐스팅으로 보인다.
영화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네.
6. 사실 아무도 관심 없을 디테일 하나. 1980년대 초가 배경이고, 넷째딸의 남편이 권투선수이다 보니 구시켄 요코가 잠시 언급된다. 사실 나도 구시켄 요코를 직접 보거나 아는 세대는 아니지만, 장정구와 유명우를 언급할 때마다 따라다니던 이름이라 저 두 영웅을 아는 사람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한국의 장정구와 유명우가 세계 라이트플라이급을 호령하기 얼마 전, 일본의 구시켄 요코는 세계 타이틀을 무려 13차례 방어하며 일본의 복싱 영웅으로 군림했다. 물론 이 기록은 장정구가 15차 방어에 성공하며 깨진다.
이런 걸 보면 문득 한국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략 1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