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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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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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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뉴스 사진입니다.)

올해들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양준혁이 요즘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프로야구 최고참 자리를 다투고 있는 이 노장의 분전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옛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95년 여름의 어느 날입니다. 당시 삼성은 어정쩡한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방망이는 괜찮았습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주역이던 방망이는 비록 김성래가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지만 양준혁을 중심으로 신인 이승엽, 무명 중고신인 이동수(결국 95년 신인왕이 됩니다), 그리고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의 후광을 받은 신동주와 최익성 등이 수혈되면서 만만찮은 기세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투수력. 김태한과 박충식을 제외하곤 믿을 선수가 없었습니다. 오봉옥이 잠시 구원투수로 반짝했지만 불펜의 양과 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롯데전 전담요원 성준이 아직 건재했지만 일단 선발이 무너지면 대책이 없는 게 당시 삼성의 팀 사정이었습니다.

아무튼 팀 성적이 썩 좋진 않았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대구구장에 인조잔디를 깔고 관중석을 정비한 이후 대구구장은 연일 매진 행진을 벌입니다. 뭣보다 양준혁-이동수-이승엽의 클린업이 인기의 중심 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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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차에 팀의 중심이 된(물론 데뷔 시즌에도 중심이었지만) 양준혁은 영 삐딱한 성격이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친해지고 나면 의리도 두터운 친구였지만 아무튼 대구인 특유의 뻣뻣함이 돋보이는 인물이라 기자들에게는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타플레이어이니 멀리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김성근 백인천 같은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습니다. "3할을 치잖습니까"라면 "양준혁 정도면 3할3푼에 홈런 30개 정도는 기본으로 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더군요. '스윙이 나빠 체격에 비해 홈런이 적게 나온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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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코치'가 1루에 나가 있을 때도 있었군요. 뒤는 더구나 신경식...^^
참, 대부분의 사진은 http://www.yangjunhyuk.com 에서 퍼 온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당시 1994년에 이어 95년에도 삼성을 맡았고, 동봉철 김태한 양준혁 등 88학번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준이나 류중일 같은 선수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고참 선수들은 대개 기자들에게도 '틱틱거리는' 걸로 유명했죠.

강기웅 김용국 이종두 같은 선수들은 팀 성적에 비해 스타의식이 지나친 선수들로 불렸습니다. 그걸 보고 기자들은 "아직도 삼성이 최강팀인줄 안다"고 말하곤 했죠. 결국 이들 선수들은 96년 백인천 감독에 의해 대거 정리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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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 길었는데, 양준혁은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사고를 한번 칩니다. 95년의 어느 여름날, 삼성과 LG가 대구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중반, 양준혁이 친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쭉 뻗어나갔는데, 어기적 어기적 하던 LG 중견수 최훈재의 글러브에 맞고 공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이때 전광판에는 E자 아래 불이 들어왔습니다. 안타가 아니라 최훈재의 실책이란 판정이 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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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외야로 공이 나간 경우, 에러보다는 안타 판정이 나는 게 대부분이긴 했기에 약간 의외다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에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기자실과 같은 층에 있는 기록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러 판정에 격분한 양준혁이 기록실로 뛰어올라와 문을 발로 걷어 차며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분명 어느 쪽으로도 판정이 날 수 있었습니다. 에러로 판정을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경기후 이 소식을 들은 최훈재는 "아니 그건 내가 실수한게 맞는데 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공식 기록원의 판정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선수가 그것도 경기중에 기록실 문을 발로 차면서 안타-실책 판정에 항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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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는 양준혁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우루루 떴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양준혁은 무척 분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욕할 수가 있느냐는 항의를 해왔습니다.

다음날 낮, 경기장에서 양준혁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욕을 먹을 상황이다. 어떻게 선수가,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스타플레이어가 기록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했죠. 그는 이런 부분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관례상 외야수가 포구를 못 했을 때 실책으로 판정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럼 선수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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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말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프로 선수는 안타 하나를 치는데 정말 목숨을 건다. 선수에게서 안타 하나를 빼앗는 것은 선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죠. 그럼 저도 "기자도 기사 하나 쓰는데 목숨을 건다"고 맞섰어야 하는데, 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제가 '기자계의 양준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훌륭한 기자 중에는아마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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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월이 흘러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2000개의 안타를 친 타자가 됐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날 그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 한개 한개의 안타에 대한 '목숨을 걸고 친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영광도 없었겠죠.

일본과 미국에서는 대 선수의 기준이 3000안타입니다. 경기 수도 많고, 병역 의무도 없는 나라와 비교하자니 한국에서의 기준은 낮춰질 수밖에 없죠. 양준혁이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서 활약했다면 지금쯤 3000안타를 넘어섰거나 넘보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앞으로 누가 나오건 당분간 2000안타를 넘볼 선수도 쉽지 않습니다. 과연 양준혁이 스스로 목표라고 밝힌 3000안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얘기 하나.

지금은 오히려 그런 얘기를 덜 듣지만, 신인 시절 그는 '머리가 크다'는 말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습니다. 삼성의 김상엽, 롯데의 주형광 임수혁과 함께 4대 거두로 불리기도 했죠. 94년인가 95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야구장에 나가 그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나: 어이 양군, 머리가 크면 정말 야구를 잘 하나?

늘 그냥 씩 웃고 말던 그가 한마디 하더군요.

양: 내가 요즘 눈여겨 봤는데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
나: 에이, 설마 자네랑 비교가 될까?
양: 아니, 말로 할 거 없이 내 모자 한번 써 봐요.

설마 하는 생각에 그가 벗어서 내미는 헬멧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려는 순간, 이.럴.수.가.... 헬멧이 안 들어가는 겁니다. 허걱.;

그 다음부터 선수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저를 잘 알아보더군요. 대신 닉네임은 좀 길었습니다. '준혁이 모자도 안 들어가는 기자'라구요. 정말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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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LG 시절의 모습. 역시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은 양준혁은 왠지 가짜같습니다.

마지막으로 2006 까지의 통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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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꿈의 성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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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모두 고개를 흔들던 이 타법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만세! 타법.^^

아무튼 부상 없이 무사히 선수생활을 마치고, 이미 대구상고 재학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삼성라이온스 감독'이 되어 무궁무진 활약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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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매직이 유로 2008에서 부활했죠. 네덜란드까지 이길 줄은 정말 몰랐는데, 역시 네덜란드는 뒷심이 없는 팀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전력을 보면 어느 팀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절대 우승을 못하는 팀들이 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죠.

또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납니다. 히딩크 감독이 희동구가 된 사연에 관련된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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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뜨거운 열기가 온 나라 안에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열기가 뿜어나온 것은 6월4일, 폴란드전에서 한국이 월드컵 본선 사상 첫 1승을 올린 다음부터라고 얘기해야 정확할 겁니다.

당시 다른 회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저도 한 술집에서 폴란드전의 승리에 들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 히딩크 시나리오가 뭔지 알지?"

인터넷에는 일찌감치 히딩크가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축구당을 만들어서 대통령에 출마한다, 뭐 히딩크교가 생긴다 어쩐다 하는 유머가 나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죠.

"그럼 그 속편을 빨리 우리가 발굴해야겠다."

속편 같은 건 본 적도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원작도 없는데 무슨 속편입니까.

"니가 만들어."

만들라니요. 이건 기자로서의 윤리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어차피 농담인데 뭘 그래. 그리고 니가 만들어서 유행시키면 될 거 아냐."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요즘 분위기면 그런 건 아무도 따질 사람 없으니까 걱정 말고 재미있게만 만들어라. 진짜로 유행이 되면 될거 아니냐' 는 지시였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히딩크를 영웅으로 만드는 분위기'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터이므로 다음날 뚝딱뚝딱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OK가 나서 신문에 실렸습니다.


http://www.sportschosun.com/news/news.htm?name=/news/life/200206/20020606/26f81001.htm

(옛 직장이지만 이제는 경쟁사 비슷한 처지라 그냥 퍼올수가 없어서 링크를 걸었습니다. 보실 분은 좀 불편하지만 직접 건너가서 보시길. ;)

다른 건 뭐 다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이미 인터넷에 떠돌던 이야기에 살을 입힌 것인데 두 가지는 좀 신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4강에 오를때'의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라는 이름을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결승에 오를 때'에서  '한국 국민이 되더라도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선거법 규정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후자는 선관위에 문의해서 알아본 내용이었거든요.

'희동구'라는 이름은 개화기 한국에 기여한 외국인들이 대부분 원두우(언더우드), 석호필(스코필드) 처럼 한국식 개명을 한 것을 본딴 것입니다. 굳이 '히동구'가 아니라 '희동구'라고 한 것은 '히딩크'의 '히'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라서 가능한 한 발음이 비슷한 한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한문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성은 당연히 기쁠 喜, 이름은 동방의 공이라는 뜻으로 東球 정도로 생각했고 본관인 상암은 당연히 상암 경기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동구'란 이름은 그 뒤로 엄청나게 널리 쓰였습니다. 간혹 '히동구'라는 경쟁 표기도 보였고 한자의 뜻까지 생각한 '희등구' '희동규'라는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희동구'가 대세가 되는 걸 보고 신이 났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희동구'라는 이름을 새긴 주민등록증도 인터넷에 등장하더군요. 발급일은 월드컵 개막일인 5월31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喜東丘라는 한자는 저 주민등록증을 만든 분이 붙이신 걸 겁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서 그 유명한 이규태 칼럼에도 '상암 희씨'라는 말이 나온 걸 보고 혼자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노파심에서 토를 달지만 제가 이 이름에 대해서 무슨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희동구'라는 이름은 누구도 조금만 생각하면 지을 수 있는 별명이고, 누군가는 우연히 같은 별명을 붙인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선동열 감독의 별명인 '무등산 폭격기'를 지은 것도 어느 기자일텐데 이 별명이 이렇게 히트했다고 해서 그분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가겠습니까. 그저 만만한 주위 사람들에게 '저게 어떻게 해서 나온 건줄 알아?' 하면서 흐뭇해하고 마는 거죠. )

이 전통을 잇듯 2006년 대표팀을 한때 지휘했던 조 본프레레에게는 '조봉래', 본선 대회를 이끈 아드보카트 감독에게는 어느새 '안두복'이라는 한국 이름이 붙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허정무 감독에게는 이런 이름이 필요없겠죠. 다 지나간 시절의 기억입니다.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이제 나이들어 스웨덴 대표팀은 못 맡겠다고 손을 홰홰 젓지만 그래도 한번쯤 월드컵 우승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 개인적으로는 히딩크가 지휘하는 아프리카 팀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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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히딩크는 왕년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경기를 지휘하는 스타일이나 선수를 선발하는 스타일 등은 전혀 다르지만, 약팀의 무명 선수들을 강하게 조련해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 놓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강팀에서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히딩크도 한때 바르셀로나 감독을 했고 김성근도 90-92년 삼성 감독을 했습니다. 성적은 둘다 그저 그랬죠), 우승은 시키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다 아다시피 김성근 감독도 이제는 우승을 시킬 수 있는 감독이 됐죠.^^ 히딩크도 언젠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키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p.s. 저 회사의 웹 관리에 문제가 있는지 링크가 깨지고 기사가 안 나오더군요. 사실 기사라고 하기도 유치한 장난이지만, 모두가 행복했던 그 시절엔 아무도 그런 걸 문제삼지 않더군요.^^

그냥 본문을 첨부합니다. 2002년 6월6일 기삽니다.






히딩크의 축구당 창당, 귀화설 운운했던 히딩크시나리오에 이어 2탄격인 신 히딩크시나리오가 나돌아 화제다.'히딩크 사단'이 16강을 넘어 더 좋은 성적을 낸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막힌 스토리. 인터넷과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공전절후의 사태, 즉 히딩크 가상시나리오를 공개한다. < 편집자주>


한국 4강 오르면... 히딩크 귀화...'상암 희씨' 시조

한국을 빛낸 위인에 선정
 
16강에 오를때

히딩크는 "16강은 애당초 목표도 아니었다"는 코멘트로 한국 국민들을 열광시킨다. 종래의 '히사모'(히딩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히귀모'(히딩크를 귀화시키기 위한 모임)로 변해 '히딩크 잡기'에 나선다, 히딩크의 매니지먼트사에서는 몸값 관리를 위해 광고 모델제의를 전면 거절하고, 노래방 히트곡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이 히딩크가 들어간 가사로 개사되어 나온다.

출판사 종신 모델로 고용
 
8강에 오를때
 
히딩크를 스카우트하려는 일본을 비롯한 축구 개도국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보디가드가 붙는다. 일단 히딩크는 2006년까지 대표팀을 맡게 된다. 히딩크의 캐릭터 상품 '히동크'가 등장해 인기를 끈다. 히딩크 붐으로 네덜란드에 '조기 축구 유학'을 보내려는 과열 학부모들 때문에 네덜란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 치열한 경쟁 끝에 '꼴찌가 우등생 되는 법'을 주제로 한 학습교재 출판사에서 히딩크를 종신 광고 모델로 고용한다.

4강에 오를때
 
히딩크가 밀려드는 권유와 압력에 귀화,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로 개명한다. 히딩크의 조상이 한국인이었다는 설이 재야 사학계에서 제기된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사실은 희사부였다, 향가 '찬기파랑가'가 사실은 '찬희파랑가'였다는 주장 등이 나온다. 대선주자들의 입당 제의가 쏟아져 히딩크가 '정치 중립'을 선언한다. 톱스타 A양이 "히감독의 아이를 가졌다"고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국내 모든 대학이 경쟁적으로 히딩크학과를 개설한다.

대선출마 선거법 논란 일어

결승에 오를때

'히'자가 붙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상호를 '히언대 그룹'으로 바꾼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폭등한다. 국적을 취득한 히딩크가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설수 있느냐를 놓고, 선거법 16조의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법조문의 해석에 논란이 벌어진다. 국사 교과서 표지 모델이 히딩크가 된다.

'대통령 만들기' 헌법 개정

우승할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히딩크 스토리' 제작을 발표한다. 주인공 히딩크 역을 맡기 위해 션 코너리는 가발을 새로 맞추고, 해리슨 포드가 체중을 늘려 경합을 벌인다. 네덜란드 정부가 가족과 친지들을 동원, 히딩크의 한국 국적 취득을 반대하고 나서지만 히딩크는 한국인이 되고, 대통령선거가 그의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은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포기한다.

2004년 올림픽 金 재기
 
선전하지만 16강에는 실패할때
 
전 국민이 축구를 저주하게 되고 집집마다 내다 버린 피버노바가 길에 쌓인다.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대표팀 감독 자리를 위해 일부 선수들을 사주, 고의로 16강에서 탈락하게 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이 음모의 배후인물로 지목된 지도자들이 해외로 도피한다. 히딩크는 2004년 올림픽 팀을 맡아 금메달을 따내며 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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