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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의 역사를 가진 동춘 서커스가 해체를 선언했다는 얘기를 듣고 쓴 글인데, 어느새 '해체는 없다'는 새로운 소식이 떴습니다. 일단 수원시가 상설 공연을 할 수 있는 부지를 무상으로 대여하기로 하는 등 각지로부터의 관심이 급한 불을 끄게 했다는 얘깁니다.

지난달 말, '마지막 공연'을 전제로 진행된 공연은 동춘서커스 역사상 가장 홍보가 잘 된 공연 중 하나였을 겁니다. 동춘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지조차도 까맣게 잊었을 사람들까지도 '해체' 기사를 보고 '아, 아직도 열심히들 하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했을테니까요.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그 공연에도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나 '동춘' 얘기를 하면서 유행처럼 '태양의 서커스'를 반찬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런 식의 단순한 비교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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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커스

2세기 초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포기한 다음부터, 우리는 단 두 가지에만 목을 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장 달콤한 복리와 오락에 혹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포기한 민중에 대한 비판이다. 이미 이 시기 로마에선 각종 기예나 신기한 동물 쇼, 광대놀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에 전차 경주까지 합쳐진 대규모의 서커스가 성행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수많은 해외 사신들을 초빙한 가운데 백희(百戱)라는 이름의 대형 서커스 쇼를 펼친 기록이 있다. 2세기 초 장형(張衡)이 쓴 '이도부(二都賦)'에 동해황공(東海黃公)이나 어룡만연(魚龍蔓衍)처럼 구체적인 연희의 제목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의 2000년간 인류를 즐겁게 해줬던 서커스는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놓였다. 산업사회의 성숙과 함께 등장한 TV와 영화, 프로 스포츠 등 다양한 볼거리와 맞서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8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춘 서커스가 경영난 끝에 오는 11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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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4년 창단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서커스가 결코 시대에 뒤진 오락이 아님을 입증해냈다. 이들은 기존의 볼거리에 음악과 조명, 의상과 스토리 등 현대적인 요소들을 가미해 관객의 발길을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창단 이후 지금까지 200개 도시를 돌며 9억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내년에도 20개의 서로 다른 공연을 온 세계에서 펼칠 예정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으로 꼽는 상하이 서커스(上海雜技)도 유서 깊은 중국 기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나 사라져가던 이 연희가 재건된 것은 1994년, 아크로바트 쇼 '금색서남풍(金色西南風)'이 크게 성공한 뒤의 일이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역시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가 손을 잡기 전까지는 사양 시장으로 취급됐다. 어떤 장르도 그 역사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는 변신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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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는 주브날(Juvenal)이라고 불릴 것 같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는 16편의 정치 풍자시(satire)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빵과 서커스'가 나오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유베날리스의 시대는 로마의 혼란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정 초기, 5현제 시대로 이어지는 안정기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베날리스는 대중이 '빵과 서커스'에 눈이 멀어 민주주의를 포기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고민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던져주는 '양식'과 '오락'에만 취해 길들여졌다는 얘깁니다.

이 시기의 서커스는 지금의 서커스와는 좀 다릅니다. '서커스'라는 것이 거대한 공연장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각종 기예나 동물 쇼, 광대 놀이처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커스의 요소 외에 검투사의 싸움이나 전차 경주까지 포함된 초대형 버라이어티 공연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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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동안 면면히 내려오던 서커스가 어떻게 위기를 맞았는지는 이미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몰락의 길을 걷던 서커스라는 장르에 태양의 서커스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하며 이를 모방한 수많은 '현대적 서커스' 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서커스가 그렇듯, '현대화된 서커스' 또한 모두 성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태양의 서커스'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 역시 그냥 되는 건 아닙니다. 쉴새없이 새로운 요소와 도전이 실현되고 있고, 그 동안 쌓아올린 자본력과 노하우로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취향이란 변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동춘이든 누구든, 혹시라도 정부 당국이 나서면 결과는 너무나 뻔할 겁니다. 해외 연수를 통해서든 자료 분석을 통해서든 '태양의 서커스'를 모델로 한 개혁이 이뤄지겠죠. 하지만 과연 그런 모방이 얼마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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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웨스트엔드의 황금기를 연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는 "우리가 처음 무대에서 쇼를 짤 때만 해도 뮤지컬은 돈 버는 쇼가 아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젠가 우리 쇼로 이 공연장을 꽉 채우고 말겠다"는 열정 뿐만 아니라, 그 열정을 실현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장르든 공연 예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의 애환이 담긴 장르를 살려야 한다는 동정'이나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공무원들의 문화 상품 기획서의 구색 맞추기 항목'이 아닙니다. 바로 이 열정과 재능이죠.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지원도, 어떤 동정도 저절로 관객을 몰아다 주지는 않을 겁니다.

P.S. 쓰고 보니 '신문산업'에도 해당되겠군요. 갑자기 한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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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휩쓸고 있는 '디스 이즈 잇'의 열풍에서 한국은 슬쩍 빗나가 있는 느낌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디스 이즈 잇'의 2주 한정 상영 방침이 바뀌어 연장 상영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지방 몇개 극장에서 상영관이 축소되면서 '상영기간 단축'에 대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도 합니다.

마이클 잭슨 같은 대형 스타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에 대한 예우 치고는 좀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물론 개인적인 감상일 뿐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스타라도 '추모의 열기' 혹은 '사후의 영광' 같은 것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팬들로부터 시작된 감정이 일정한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에나 조성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문득 지난 세기를 장식했던 다른 스타들이 남긴 마지막 흔적들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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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완성 유작

1973년. 홍콩 권격 스타 이소룡은 인기 절정의 순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해 미주 대륙에 공개된 '용쟁호투(龍爭虎鬪)'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흥행업자들은 그가 더 이상 새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군가가 이소룡이 사망 직전 차기작을 위해 촬영한 10여 분가량의 액션 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5년 뒤 개봉된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戱)'는 이 촬영분에 스토리를 덧붙여 만들어졌다. 앞부분을 만들기 위해 이소룡과 닮은 한국 배우 김태정이 기용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망유희'까지는 이소룡의 작품으로 인정받지만 그의 마지막 출연작으로 알려진 1981년작 '사망탑(死亡塔)'은 지나친 장삿속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 영화엔 이소룡이 나오는 몇 개의 자투리 장면이 스쳐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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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마릴린 먼로가 사망했을 때에도 그가 출연 중이던 영화 '섬싱스 갓 투 기브(Something's Got to Give)' 제작진은 어떻게든 영화를 살려 보려 했다. 하지만 촬영 분량이 너무 짧아 결국 이 영화는 그냥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 아닌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곧 개봉될 히스 레저의 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좀 더 기발한 방법을 썼다. 2008년 레저가 죽기 직전 연기한 부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세 배우가 '얼굴이 변했다'는 설정으로 레저의 역할을 연기한 것이다. 그의 유작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패럴 등 정상급 배우들이 선뜻 나섰다는 미담도 전해진다.

지난 6월 사망한 마이클 잭슨이 준비하고 있던 생애 마지막 공연의 리허설 광경을 편집한 다큐멘터리 '디스 이즈 잇'이 지난 28일 세계 99개국에서 공개됐다. 잭슨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라 팬들은 앞다퉈 극장으로 향하고 있지만 몇몇 측근은 본인이 이 영상의 공개를 원했을 리 없다며 개봉을 반대하기도 했다. 누나 라토야 잭슨은 “리허설 때 최선을 다해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는 없다. 마이클이라면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이번엔 팬들의 손을 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이 공연의 기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잭슨이 살아서 이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면 얼마나 대단한 공연이 됐을지'를 더욱 아쉽게 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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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과 '사망유희'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사망유희'를 만들기 위해 제작진이 짜낸 스토리는 대략 이런 것입니다.

홍콩 최고의 스타 빌리(이소룡)가 의문의 범죄 조직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당하고, 그 실체를 찾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던 빌리는 자신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빌리는 생전의 자기를 위협했던 조직을 하나하나 파괴해갑니다.

그럴싸한 스토리이고, 스토리상에 등장하는 장례식 장면에는 진짜 이소룡의 장례식 장면을 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안성맞춤입니다(당연히 이런 부분을 계산한 스토리죠). 다만 진짜 문제는 그 나머지 스토리를 연기할 이소룡이 없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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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축구'와 '킬빌'은 물론 '사망유희'의 '노란 추리닝'은 이소룡의 이미지를 타고 끝없이 재활용되고 있습니다. 빈약한 퀼리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국이라면 죽기 전의 이소룡 역에 다른 배우를 쓰고 '복수를 위해 성형수술을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홍콩에서는 아시아 전역에서 그를 대신할만한 배우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발탁된 것이 한국의 당룡(唐龍: 위에서 말한 김태정의 예명)과 뒷날 톱스타가 되는 홍콩의 원표였습니다. 특히 당룡은 '선글라스만 씌워 놓으면 똑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죠. 상대적으로 고난도의 액션 연기는 원표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의 퀄리티가 그리 높을 리는 없겠죠. 이소룡의 명성을 쫓아 '사망유희'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실망 뿐입니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당대의 이소룡을 사랑했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몫일 뿐입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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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패럴이 각각 1차 변화후, 2차 변화후, 3차 변화후의 모습을 연기한다는군요. 히스 레저가 테리 길리엄 감독과 만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스스로 인생을 정리했는데, 레저의 유작을 살리기 위해 감독이 이들 배우들을 만나 "조금씩만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다들 흔쾌히 응해 한 역할을 네 배우가 연기하는 희한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군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좀 너무 어두운 유머 감각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튼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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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디스 이즈 잇'의 퀄리티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보는 사람들 역시 충분히 이런 부분을 고려하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절대 다수의 반응이 "저걸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가서 (잭슨은) 얼마나 원통할까"인 것으로 봐도, '불완전한 공연'에 대한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듯 합니다.

오히려 '디스 이즈 잇'은 일각에서 유포되는 별 근거 없는 이야기들 - 2000년대 이후로 잭슨은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든가, 이미 모든 공연은 립싱크로 이뤄지고 있었다든가 하는 내용들 - 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듯 화려한 춤사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공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에는 이런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유능한 무용수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안무가로서의 잭슨이 갖고 있는 무대 장악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사망유희'가 있어 이소룡을 추억하는 팬들을 위로하고, '디스 이즈 잇'이 잭슨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이런 작품들에까지 완성도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담긴 의미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는 충분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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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축구라는게 본래 발로 하는 거다 보니 눈으로 보기엔 답답할 때가 많죠. 세 골째를 먹었을 때에는 저절로 채널이 돌아가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골을 넣고, 그렇게 쉽게 골을 내주다니..

물론 8강이면 훌륭한 성적입니다. 당초 이번 대회가 시작할 때만 해도 목표는 16강 진출이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20세 이전부터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이 팀을 이룬 상태에서도 16강 진출에 계속 실패해왔고, 이번 대회에도 카메룬-미국-독일과 한 조를 이루면서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브라질-스위스-나이지리아와 붙어야 했던 2005년, 브라질-미국-폴란드와 한 조였던 2007년에 비해 유난히 나쁜 대진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면서 1983년의 기억이 되살아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찬란했던 기억과 함께 그 시절의 아쉬움도 함께 다시 살아나더군요. 그래서 써본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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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소년 강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이집트에서 선전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에게 잊혀졌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1983년 6월 16일 오전 8시. 일찌감치 출근한 사람들은 TV 앞에서 일손을 잡지 못했다. 각급 학교에서도 수업은 뒷전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은 멕시코에서 열리고 있던 한국과 브라질의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 경기에 쏠려 있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경이적인 연승으로 세계 4강에 진출, 온 국민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비록 접전 끝에 1대2로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외신들은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의 분전에 ‘마치 붉은 악마들 같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뒤로 이 말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됐다.

박종환 감독과 주축 선수들은 귀국해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신군부는 “이 팀이 88년 올림픽 대표팀의 주축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온 국민이 ‘88팀’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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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공 신화는 여기까지. 박종환 감독은 1986년 대표팀을 맡았지만 88년 7월, 올림픽 개막을 2개월 남기고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됐다. 결국 그해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는 2무1패로 조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83년 멤버’ 가운데 소기의 목적대로 88년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는 수비수 김판근 정도였을 뿐, 신연호와 김종부 등 발군이었던 선수들은 여러 이유로 한국 성인 축구의 간판이 되지 못했다. 83년 당시 한국을 꺾고 우승한 브라질의 베베토와 둥가·조르징요 등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되어 1994년 미국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축구에서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 청소년’은 세계 수준의 기량을 과시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나 과학 올림피아드 무대에서도 한국 고교생들이 지난 20여 년간 거둔 성적이 좋은 예다. 하지만 이들이 성인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라났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어느 분야에서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즉시 점수를 딸 수 있는 편법만 판을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명보 감독의 데뷔작인 이번 젊은 영웅들은 ‘한국 축구의 미래’로 커나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끝)


1983년 청소년 팀의 기적같은 4강 신화는 이미 리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브라질만 베베토나 둥가 같은 저런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8강에서 탈락한 네덜란드 멤버 가운데에도 그 이름도 거룩한 마르코 반 바스텐이 포함돼 있더군요.

잘 키운 청소년 대표팀이 미래의 주축이 되는 경우는 여러 차례 목격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991년, 피구와 코스타 등이 이끈 포르투갈의 '황금세대'죠. 이들의 힘으로 포르투갈은 유로 2000 등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일약 유럽 축구의 주도국 대열에 진입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화려하게 꽃필 것으로 예상됐던 2002 월드컵 무대는 주최국 한국과 같은 조가 되는 바람에 망쳐졌다는 느낌도 있죠. 이 대목에서 잠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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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 당시 공포의 투톱이었던 앙리와 트레제게도 바로 1년 전인 97년 U-20 대회에서 곧바로 두각을 보였습니다. 이때의 프랑스도 8강 진출국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예선 같은 조였던 한국은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각각 두골씩을 내주며 2대4로 참패했습니다. 이관우가 이끌던 당시 한국 팀은 박진섭이 두 골을 넣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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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국이 국제대회 대진운이 별로 안 좋은 편이긴 하지만 이 해의 대진은 참 볼만합니다. 브라질-프랑스-남아공과 한 조. 아, 물론 이 대회 전까지 프랑스의 느낌은 지금 같은 강팀의 느낌은 아닙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프랑스도 축구 강국의 면모를 되찾았죠.

이 대회 최고의 참극은... 당시 브라질에게 당한 3대10의 참패입니다. 지금 볼로냐에서 뛰고 있는 아다일톤에게 무려 6골을 먹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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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등등의 성공사례들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83년 멤버들은 그 뒤로 화려하게 개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모으고 집중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멤버들 치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입니다.

88년 대표팀에 속했던 83년 멤버들은 김판근 김종건 김풍주의 세 사람입니다. 이중 주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김판근 정도였죠. 물론 2년 전에 열린 86년 월드컵 대표에 속했던 김종부가 있지만 프로 진출과 관련, 복잡한 스카우트 파문에 휘말려 운동을 쉬면서 성인 무대에서는 기대했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골감각을 자랑했던 신연호는 물론이고 '제2의 스트라이커'였던 이기근 역시 88년 K-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지만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이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당시의 기형적인 대표팀 운영과도 관련이 깊죠. 90년대까지 역대 K-리그 득점왕들은 대부분 국가대표에서는 소외된 선수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김주성은 거론되지 않나 하실테지만 김주성은 '88팀'의 주요 멤버였긴 했지만 '83년 멤버'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김주성도 83년 멕시코에 뛴 것으로 착각하시는데 김주성은 83년 4강 이후 88팀의 육성 과정에서 최진한 김삼수 황영우 여범규 등과 함께 뒤늦게 발굴된 선수들 중 하나였던 것이죠.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 축구의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만, 윗글은 '83년 멤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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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거듭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국은 그동안 유독 '청소년만 강한 나라'의 면모를 여러 분야에서 보여왔다는 것입니다. 수학과 과학 올림피아드의 예도 들었지만 그에 앞선 기능올림픽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스포츠의 여러 종목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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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감독은 2012년 올림픽까지 일단 지휘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번 대회가 U-20(20세 이하)이고 올림픽은 사실상 U-23 대회인 만큼, 2009년과 2012년의 연관성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축구계의 비주류였던 박종환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의 적자인 홍명보 감독의 입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훨씬 좋은 여건과 지원이 이뤄지겠죠. 부디 어젯밤 눈물을 흘리던 선수들이 3년 뒤 런던에서는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때에는 8강 이상의 성적을 내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한번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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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본 총선에서 만년 여당 자민당이 침몰하고 사실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일어난게 지난 8월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용히 묻혀 지나간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이쪽으로 가져올 타이밍을 놓쳐 버렸는데, 바로 일본 최고의 스타, 여자들이 매년 뽑는 '최고의 남자 연예인'에서 10년 넘게 일본 최고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는 기무라 타쿠야와 소속 그룹 SMAP이 관련된 사건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SMAP 정도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여당인 한나라당을 공개 지지하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옹호하고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기 있는 연예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일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SMAP의 자민당 지지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전해 들은 분도 있겠지만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비교할만한 한국 사례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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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타의 한마디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장에 당대 최고 인기 코미디언 김병조가 등장했다. 그가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 통민당(당시 통합 야당이던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자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음 날 언론에 보도되자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김병조는 하루아침에 방송·광고계에서 퇴출돼 '자숙'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받은 대본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도 소용없었다.

일본의 총선 열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8월 26일, 대표적인 우익 언론인 산케이 신문에 희한한 광고가 실렸다. 신문을 완전히 싼 4페이지짜리 래핑 광고. 겉보기엔 일본 최고의 인기 그룹인 남성 5인조 스마프(SMAP)의 새 음반 광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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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안쪽 두 페이지 내용.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이란 제목의 글이 SMAP 멤버들의 명의로 실려 있었다. 내용은 '경기가 좋으면 총리도 인기가 있고, 경기가 나빠지면 인기도 떨어진다' '행복한 미래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남 탓하기는 쉽지만 막상 자기가 직접 하려 하면 뭐든 힘든 법이다' 등등.

긴 글 어디를 봐도 '자민당'이나 '민주당'이라는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누가 봐도 의미는 불 보듯 선명했다. 위기에 몰린 집권 자민당을 응원하는 노골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서구 언론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크게 보도했다. 일본 주오 대학의 스티븐 리드 교수는 영국 텔레그래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스마프가 정치 캠페인에 동원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민당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보여준 증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외에서의 이야기다. 정작 일본 내에서는 이 사건을 거론한 언론 보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광고가 실린 신문은 품귀현상 속에 인터넷 경매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지만, 그 내용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 강요된 말 한마디로 방송에서 퇴출되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만약 한국의 인기 아이들 그룹이 선거를 앞두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글 한 줄이라도 미니홈피에 쓴다면 그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한해협 양쪽에서 '연예인의 발언'에 실리는 무게가 이토록 다른 이유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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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펼쳐 놓으면 이런 내용의 광고입니다.

위에 대략 정리를 했지만 주제만 얘기하면 '지금 있는 사람들도 선거로 뽑은 정치인들 아니냐. 사실 막상 일 시켜 놓으면 거기가 거기다. 구관이 명관이다.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해라. 바꿔 봤자 별수 없다...' 이런 내용입니다.

정말 자민당이 얼마나 다급했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일본의 수많은 신문-방송 가운데 이 문제를 짚고 나선 곳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블로고스피어가 좀 시끄러웠고, 그걸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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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팬들은 그 래핑 광고가 담긴 신문을 서로 사고 파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일본 옥션의 매물 페이지입니다. 꽤 전에 캡처한 화면이라 지금은 다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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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문이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인기 높은 SMAP인데 정작 그 메시지는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니.... 이건 광고를 낸 쪽이 서운해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SMAP 쪽에서 서운해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사건은 일본 정치를 바라보는 해외 매체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됐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쟈니즈쪽에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광고를 한 것이냐'고 문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답은 '이건 아무런 정치적인 의도가 없는, 그냥 SMAP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제정신인 사람 가운데 저 글을 SMAP 멤버들이 직접 썼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누가 보나 쟈니즈와 극우 언론 산케이의 합작품이겠지만 이런 일에 말려들어 이름을 내주고도 아무 소리 없는 SMAP 멤버들이나, 거기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SMAP 팬들이나, 언론 매체들이나 한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한국같으면 이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이 통했을까요. 어림도 없겠죠.

문득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윗글에 나오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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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19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하신 말씀은 이런 식으로 보도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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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내용이었지만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1987년 6월. 바로 뜨거웠던 '6월 항쟁'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앞선 4월29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이 있었고, 6월10일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후보가 민정당의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이때를 전후해 민심은 들끓었고, 마침내 6월29일 노태우 후보는 당시 헌법의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87년 연말 대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튼 이건 좀 지난 다음 얘기고, 바로 다음날 신문 만화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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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시청자들의 항의로 MBC는 김병조씨의 방송 출연을 제한할 것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김병조씨가 출연하는 방송은 모두 MBC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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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일만인 6월13일. 김병조씨는 스스로 '당분간 쉬겠다'고 선언합니다.

'지구를 떠나거라' 등의 유행어, '나도 리도 샴푸를 써야겠다'는 등의 광고로 세상에 거칠 것이 없던 인기 코미디언이 하루 아침에 야인이 돼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예인이 무슨 힘이 있나. 시키는데 어떻게 안 하냐"는 항변은 일면 일리가 있는 얘기였지만 성난 여론은 그런 변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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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나는 이름들이 몇명 더 있지만, 아무튼 김병조씨는 당시의 뜨거웠던 정치 열기에 애매하게 희생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한국과 너무나 대조적인 일본의 반응. 과연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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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 감독판 상영 등으로 화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흥행 최고점은 지나친 듯 하지만 뒤늦게 이 영화를 보는 분들이 아직 적지 않은 듯 합니다.

'국가대표'가 주는 메시지는 자명합니다. 21세기의 '겉으로는 최첨단'인 대한민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타인에 대한 관용의 결여'라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밥(헌태)은 스키 점프 대표팀의 정체에 대해 안 다음 자신이 이용당하고, 또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국가대표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은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재일동포인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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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가대표

관객 800만 동원을 앞둔 영화 '국가대표'에는 밥(하정우)이라는 재미동포가 나온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아예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되지만 밥은 애국가 1절 가사도 모른다. 자연히 '양키 새끼'라며 욕하는 동료와 갈등을 빚는다.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재일동포 출신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1961년 1월 1일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처음 국가대표로 뽑혔다. 당시 나이 19세. 59년 8월 7일 재일동포 학생야구선수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최근 출간된 자전적 에세이집 『꼴찌를 일등으로』에 따르면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으로 불리던 소년은 한국에 와서야 자기 이름이 '김성근'이라는 걸 알았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동포 여학생의 미소는 따뜻했다. 처음 먹어 보는 불고기 맛에 반했고 영화 '비극은 없다'의 주인공 김지미에게 매료됐다. 동료 선수의 친척들이 숙소로 찾아오면 그때마다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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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지만은 않았다. 경기 도중 교포 투수의 공이 경남고 4번 타자 박영길의 머리를 맞히자 관중은 일제히 '쪽발이 물러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고 차별받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재일동포 선수단을 구성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데, 쪽발이라니….” 국가대표가 된 뒤에도 '쪽발이'라는 수군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일민족'의 순혈주의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기 아이들 그룹 2PM의 리더였던 재미동포 출신 박재범은 4년 전 인터넷에 남긴 몇 마디 불평 때문에 하루아침에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고향인 시애틀로 돌아가는 신세가 됐다. '군대도 안 가는 교포'라는 이유가 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북돋웠다. “한국에서 돈만 벌어 돌아갈 거라면 지금 당장 꺼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혹시 한국식 생활 방식과 예절에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4년 전의 그를 몰아붙인 결과가 '난 한국인들이 싫어(I hate Koreans)'라는 불만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을까. 그 실수 하나로 등을 떠밀듯 보낸 조국은 과연 그에게 어떤 나라로 기억될까. 그를 바라보는 다른 동포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은 까다롭고 차갑기만 한 나라로 기억되는 건 아닐까. 2009년 현재 재외 한인의 수는 682만 명에 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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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은 - 가끔 해설자로 TV에 나오는 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 아직도 한국어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특히 ㅇ 받침 발음은 절대 안 되는 편입니다.^ 그의 아들 김정준은 그에겐 여전히 '존준'입니다. '꼴찌에서 일등으로'를 보면 '고려왕'이라는 브랜드의 CF 모델로 나섰을 때 '고려왕'이 '고려완'으로 발음되는 바람에 수없이 NG를 낸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그가 1961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지 1년 반만에 국가대표가 됐을 때는 어떤 상태였을지 쉽게 상상이 됩니다. 1년 반을 모두 한국에서 산 것도 아닙니다. 학생야구단 원정을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고교 졸업후 프로 구단과 사회인 야구단 진출이 좌절된 뒤 한국 동아대에 스카웃되어 6개월 정도(그러니까 야구 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철도부 야구단의 선수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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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서 일등으로'에는 '쪽발이라는 말을 들어도 올 수 있는 조국이란게 있다는게 좋았지만, 조국은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국가대표 투수로, 60년대 실업야구의 에이스로 명성을 떨친 그였지만 워낙 외곬수인 성격 탓인지, 아니면 서투른 한국어 탓인지 그는 수시로 코너에 몰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국'을 따뜻하게만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한때 삼성에 김성길이라는 투수가 있었습니다. 언더스로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죠. 그도 몇 차례 이런 어려움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이나 광주 경기에서 이기고 있으면 어김없이 '이 쪽발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일본에서는 내가 속한 팀이 이기고 있으면 '조센진'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불과 15년 전 일입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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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과 순혈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재외 한인의 수는 700만에 육박합니다. 결혼이나 기타 이유로 아예 이 통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 자손들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를 자진해서 이어 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먼 해외에서 그런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다 보면 결국 한국은 자꾸 작은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윗글에서는 분량때문에 제외했지만, 700만에 달하는 재외 한인은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의 '다문화 가정'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용모는 같지만 한국말도 못하는' 부류와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어딘가 용모가 이질적인' 사람들은 이미 '한국인'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단일민족의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풍토가 자리해야 합니다. 더 넓게 수용하지 않으면 이 나라 앞에는 점점 더 쪼그라들거나, 쪼개지는 길이 선명해 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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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가 소리소문 없이 귀국하려다 길목을 지키던 취재진에게 '적발'됐습니다. 느닷없이 카메라를 발견했으니 놀랐을 법도 한데 찍힌 사진을 보면 우아하기만 합니다. 역시 월드스타답게 취재진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얼굴을 가리거나 어설픈 달리기로 '못볼 꼴'을 찍히는 우를 범하지 않았더군요.

사진들을 보니 입국검사장보다 훨씬 안쪽인 방역검색대 앞에까지 진출해서 찍은 사진도 있던데 이 지점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속사정을 알고 보니 취재진의 치밀함이 참 놀랍습니다. 경쟁매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스타들을 추적하는 취재진도 고생이지만, 문득 소위 신비주의 노선을 가고 있는 스타들도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대중과의 접촉을 피하는 데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문득, 거의 80년 전부터 신비주의를 몸소 실천했던 한 스타의 일생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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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비주의

1936년 11월 23일, 미국의 사진 전문 주간지 라이프(Life)는 창간 특집으로 그레타 가르보의 화보를 실었다. 인터뷰는 없었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로 군림했던 가르보는 화면 밖에서는 철저하게 은둔자의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 초기를 제외하면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팬들의 사인 요청도 거절했으며 자기가 주연한 영화의 시사회에도 참석을 거부했다. 41년 은퇴 후 90년 사망할 때까지 어떤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비주의의 원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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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신비주의(mysticism)란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절대자와 소통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대중과의 소통을 극도로 기피해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로 남겨두려는 연예인들의 전략’을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의미의 ‘한국적 신비주의’는 마땅히 영어로 옮길 말이 없다. 간혹 비유적인 의미로 쓰이는 가르보이즘(Garbo-ism)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평소 이런 신비주의의 화신으로 꼽히던 이영애가 결혼까지도 극비리에 치러 화제다. 남편의 신원을 일절 공개하지 않은 채 해외에서 식을 올리고, 결혼 이튿날 법무법인을 통해 사실 통보만을 한 결과 온갖 억측과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쏟아지고 있다. 이영애의 행동에 대해서도 국민적인 스타로서 팬들에 대한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는 비판론과 아무리 스타라 해도 스스로 사생활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옹호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분위기다.

사실 이영애에 대한 이런 큰 관심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가르보의 전기 작가인 존 베인브리지는 “결국 언론 보도에 대한 지나친 공포가 그녀를 역사상 가장 파헤쳐 보고 싶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비화한 결과가 필요 이상의 궁금증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일부 팬이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결혼으로 인한 논란이 장기적으로 이영애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정작 걱정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마땅히 내세울 출연작도 없이 그저 이영애풍의 신비주의를 추종하며 30초짜리 CF를 대표작으로 삼고 있는 일부 스타들이다. 이영애야 10년 뒤에도 ‘대장금의 이영애’로 기억되겠지만, 과연 그들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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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위에서 말했듯, '대중과의 직접 접촉이나 매체를 통한 접촉을 모두 극도로 기피하는 경향'을 과연 '신비주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약간 복잡한 문제입니다. 제1감으로는 누군가의 무신경한 오용이 굳어진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비'와 '소통'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아주 얼토당토 않은 적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한국어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라고 쓰고서 그걸 mysticism이라고 옮겼다간 큰일 난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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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우면서도 차가운 미모로 근 20년간 톱스타의 자리를 지킨 가르보의 은둔생활은 여러 모로 특이합니다. 가르보는 신분을 감추고 어디 적막산골로 간 것이 아니라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맨하탄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에서 만년을 보냈습니다. 라이프는 만년에도 가르보를 몇번 더 괴롭힌 적이 있지만, 가르보는 입을 꼭 다물고 취재진을 뿌리쳤을 뿐입니다. (위 사진은 사망 4일 전 '라이프'가 포착한 1990년의 가르보입니다. 지팡이를 들어 사진기자에게 반감을 표현하고 있죠. ...노인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다니.)

아무튼 신비주의의 요체는 분명합니다. '가릴 수록 더 궁금하다'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전략이죠.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개인적인 성향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타덤에 높이 오를수록 사생활이라는 것은 사라져가기 때문이죠. 소위 유명세라는 것도 날이 갈수록 비싸집니다.

(가끔 신문 등에서도 '유명세를 타다'와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실수입니다. '유명세'라는 말은 有名勢가 아니라 有名稅, 즉 유명해진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세금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명세는 '타는' 것이 아니라 '치르는' 것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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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신부 이영애는 이제 귀국을 했고, 결혼한 사람으로서 생활해 갈 겁니다. 당장은 취재 열기가 뜨겁겠지만 언젠가는 그 관심도 잦아들겠죠. 어쩌면 신비주의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직 연기생활을 계속할지, 하지 않을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연기를 계속 한다면 앞으로는 좀 더 자연스럽게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상태에서 연기를 중단하고 '보통 사람'이 된다면 오히려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겠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영애든 그레타 가르보든, 스타덤에서 멀어진 다음에 생각해 볼 때 신비주의는 매우 사소한 문제입니다. 현역으로 활동할 때 카메라를 피했건 안 피했건, 이건 한 배우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냥 에피소드로나 기억될 문제죠. 그레타 가르보는 '안나 카레리나'나 '마타 하리'로 기억될 것이고, 이영애는 '장금이'나 '금자씨'로 기억될 겁니다.

하지만 그만한 업적도 없이 신비주의로만 인기를 유지하는 배우들은 과연 늘그막에 어떻게 될까요. 대체 무엇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과연 몇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왕년의 유명했던 핸드폰/샴푸 모델'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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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보면서 든 생각은 - 누구라도 비슷했겠지만 - 정말 한 시대가 마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과 비교하자면 결례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이끌고 가던 인물의 사망 소식이라는 건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위업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정리가 있었을 겁니다. 여기선 생략하고, 이 분의 죽음에 임해 '화해'를 표방하고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에 눈길이 갔습니다. 지난해 연말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DJ에 대해 "정신이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게 아니다"라는 말로 원색적인 비판을 했던 YS입니다. 그런 그가 DJ의 병문안을 가 "화해라고 봐도 좋다"고 말하고, 추모의 코멘트를 하는 모습은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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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라이벌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와 로마의 1인자 자리를 다툰 최강의 라이벌은 폼페이우스였다. 3두 정치의 두 축을 이뤘던 두 사람은 결국 내전으로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패주하던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까지 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가담한 자들을 모두 처단해버린다. 이를테면 라이벌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역사를 장식한 라이벌들은 상대로 인한 위협이 사라진 순간, 때로 일생을 사귄 친구처럼 유대감을 드러내곤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초기 사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때문에 줄곧 왕위를 위협당했다. 엘리자베스가 결국 메리를 사형에 처하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를 빌미로 무적함대를 동원해 영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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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굳이 메리의 아들 제임스(뒷날의 제임스 1세)를 지목했다. 메리에 대한 정신적인 보상도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물론 모든 라이벌 관계가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다. 중국 전국시대 방연(龐涓)은 최고의 전략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손빈(孫臏)의 다리를 잘랐고, 복수에 나선 손빈에게 패한 방연은 최후까지 “이렇게 해서 어린 놈이 명성을 얻는구나(終於成就了這小子的名聲)”라고 분개하며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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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에게도 마지막 화해란 없었다. 1881년 4월 디즈레일리가 사경을 헤맬 때 글래드스턴은 문병 한번 가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권유에도 글래드스턴은 “가 봐야 할 말도 없다”며 거절했다. 디즈레일리가 국장을 사양하고 개인 장례식을 택한 데 대해서도 글래드스턴은 “겸손해 보이려고 쇼를 하는 것”이라고 빈정댔다.

디즈레일리가 죽은 다음달, 글래드스턴은 의회에서 송덕문을 낭독하게 돼 있었다. 마지 못해 짧은 송덕문을 읽은 글래드스턴은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이라고 불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비하면 대한민국 1인자의 자리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생을 경쟁한 YS와 DJ의 마지막 화해 분위기는 훨씬 훈훈한 풍경이다. 물론 이들의 진정한 협력이 20년, 30년 전에 있었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지만, 구태여 이를 따지기에도 퍽 긴 세월이 흘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9단들의 시대'가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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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그당의 글래드스턴과 토리당의 디즈레일리는 평소에도 디즈레일리가 재난과 불행의 차이에 대해 "글래드스턴씨가 강물에 빠진다면 그건 불행이지만 누군가 그를 건져 준다면 그것은 재난"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지독한 앙숙이었습니다.

물론 빅토리아시대의 총리로서 두 사람은 누가 더 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이 시기의 영국은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총리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영어를 세계 공용어의 자리에 올려 놓는 데 초석을 제공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인물들도 상대방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용서나 화해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참 의외의 일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한국식의 사고방식과는 참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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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DJ와 YS의 화해(...뭐 좀 일방적이긴 합니다만)를 보고 있으면 1987년을 정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두 사람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특히 1987년의 단일화 실패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습니다. 물론 '정치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인 터라 더욱 쉽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을 포함해 몇몇 사람을 가리켜 흔히 '정치 9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측불허의 한국 정계에서 50여년간 정상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만 봐도 이런 호칭에 의아해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9단'이 아니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의 비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9단의 시대란 마주보는 9단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9단의 한수'는 그 의미를 짐작하고 대응하는 다른 9단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DJ의 서거를 진정으로 아쉬워 할 사람은 YS라는 말이 그리 과장은 아닐 듯 합니다.

이런 9단들의 시대가 갔다는 것이 과연 발전일까요, 아니면 퇴보일까요. 그건 세월이 알려줄 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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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정우성의 기무치 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보드카의 원조 전쟁(?)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책에서 그 이야기를 보고 시간이 좀 지난 터라 약간 부정확한 인용이 있었는데, 다시 참고해서 정확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책은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입니다.

최근 한국의 술 막걸리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몇몇 일본 대형 주류사들이 막걸리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김치-기무치 전쟁'이 재현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습니다. 이번엔 막걸리 대 맛코리가 되는 셈이겠죠.

관심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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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막걸리

보드카는 어느 나라 술일까. 스카치 위스키의 고향이 스코틀랜드이고, 사케 하면 일본이듯 보드카라면 러시아가 떠오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정답'은 공짜가 아니었다.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에 따르면 1977년 유럽과 미국의 주류회사들이 소련 정부가 생산한 보드카에는 보드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자신들이 보드카를 상품화한 것(1918년)이 소련 정부(1923년)보다 5년 빠르므로 배타적 우선권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수백 년 전부터 보드카를 마셔온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선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얘기였으므로 역사책 한번 들추는 것으로 이 문제는 가볍게 해결됐다. 그러나 같은 1977년 폴란드 정부가 “보드카는 16세기 폴란드에서 발명됐으며, 다른 나라는 보드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자 느긋하던 소련 정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자료 조사팀이 발족돼 고문서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5년간의 분쟁(?) 끝에 1982년 러시아는 '보드카의 조국'으로 공인받았고 보드카의 출생 연도도 1446년으로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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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쟁은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한국이 자랑하는 발효식품 김치의 국제 공식 표기가 kimchi 아닌 kimuchi가 될 뻔한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kimchi'를 공식 표기로 인정하면서 이 분쟁은 끝났다.

최근에는 서민의 술 막걸리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막걸리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며 일본의 대형 주류업체들이 '일본산 막걸리'를 내놓을 것이란 얘기에 국내 주조사들이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 아닌 맛코리(マッコリ)에 시장을 빼앗기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등장했다.

물론 일련의 사태로 인해 막걸리의 국적이 흔들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쌀로 만든 탁주가 한국만의 술은 아니다. 일본에도 니고리자케(にごり酒)가 있고 중국도 일찍부터 요(醪)를 만들어 마셨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가 막걸리의 우수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욕심을 내자면 '막걸리는 본래 한국 술'이란 것만 인정받는 걸로는 부족하다. 이미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보드카 생산국 자리를 미국에 내준 지 오래다. 주류업계가 분발해 상품으로도 '한국산 막걸리'의 인기가 죽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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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 막걸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위 사진의 니고리자케 때문입니다.

쌀로 만든 술을 덜 걸러 만든 니고리자케는 눈으로 보기에도 막걸리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도수가 한국산 막걸리보다 좀 더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똑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리스의 우조와 터키산 라키의 차이 정도라고나 할까요.

다만 일본에서도 '별반 자극 없는 맛'이라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술은 아니라고 하는군요. 이런 비슷한 술이 있는데도 한국산 막걸리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건 이색적이기도 하면서 막걸리의 우수성(?)을 알게 해 주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중국에도 막걸리가 있(었?)다는 것 역시 문서자료로 충분히 확인이 가능합니다. 한자로 막걸리를 뜻하는 요(醪)라는 글자는 이미 병서 '육도삼략'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가 유구합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현대 중국에서 이 요는 사전에 '강미주(江米酒)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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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주란 이렇게 생겼습니다. 술보다는 식혜에 더 가까운 모습인 듯 합니다. 이런 술은 들어 본 적도, 당연히 마셔 본 적도 없습니다. 혹시 중국에서 강미주라는 것을 접해 본 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 중에는 막걸리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분들이 많습니다. 농민의 술이라는 이유에서였죠. 그리고 연산군(하필 연산군이라서 좀 그렇지만) 막걸리를 소재로 한 시를 두 편이나 썼다는 사실이 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중 한 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掉雀爭枝墮, 飛蟲滿院遊。
濁醪誰造汝 一酌散千憂

참새는 가지를 다투다가 떨어지고
비충도 원에 가득히 노니고 있네.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더냐
한 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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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말했지만 동양 3국에 모두 탁주 문화가 있다는 사실은 막걸리의 독자성을 절대 훼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3국 중에서 탁주를 이만한 경쟁력있는 물건으로 키워낸 것은 한국 뿐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죠.

비교하자면 이 3국 가운데 쌀로 만든 청주(淸酒)문화가 없는 나라도 없습니다. 중국 하면 40도가 넘는 백주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찹쌀로 만든 소흥주(紹興酒)는 중국을 대표하는 명주입니다. 한국 역시 천년이 넘는 청주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이 청주 문화의 원조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나라는 일본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쌀로 만든 술 = 사케'라는 식의 관념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죠. 그냥 사케도 아니고 정종(正宗)이라고 불리면서 말입니다. 이 정종은 일본 사케의 한 브랜드인 마사무네(正宗)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입니다. 우리 말이 아닙니다.

여튼 황급히 보드카 얘기로 마무리를 하자면, 현재 보드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주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보드카도 러시아산이 아닌 스웨덴 원산의 압솔루트라는 점, 세계에서 보드카를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도 미국이라는 점 등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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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학교를 다니게 된 덕분에 막걸리를 좀 마셔 봤습니다만, 솔직히 이 술을 값진 술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시고 트림하면 냄새가 환장하는 술, 안주를 덜 먹어도 배 부른 술, 너무 마셔서 토할 때에는 가장 호쾌하게(?) 뿜어 나오는 술, 바지에 튀기면 잘 안 지워지는 술... 유난히 봄날 아침이면 여기 저기 토해져 있어 시큼한 냄새를 풍기곤 했던 술에 대해 그리 아름다운 기억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나이를 먹고 공기 좋은 곳에 가면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여러 사발은 좀 곤란합니다)에 두부나 파전이 입맛을 당기더군요. 보쌈이나 감자지짐에도 제격이죠. 이런 막걸리 맛을 다른 나라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그런데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 막걸리의 영문 표기가 Makgeolli 라는 건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걸 읽으라는 것인지... 그냥 Makoli나 Macoly 정도로 간편하게 쓰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의미를 살려서 Takju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해외 언론들이 막걸리를 Milky Sake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빨리 이름 알리기부터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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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책, '미식견문록'은 이번 휴가철에 본 책 중 최고의 강추작으로 꼽을 만 합니다. 해박한 저자가 넓고 광대한 맛의 세계에서, 누구라도 쉽게 들어보지 못했을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펼쳐놓는데, 그야말로 한번 잡으면 정말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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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는 해운대를 덮치는 가상의 쓰나미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지진 전문가 김휘 박사(박중훈)는 부산 재해대책 당국에 메가 쓰나미의 공포를 역설하지만 당국자는 "이제껏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 당국자가 몰랐기 때문에 나온 반응입니다. 최근 30년간, 적어도 두 차례 한국은 쓰나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1983년과 1993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두 차례 모두 '해운대'의 설정과 흡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위력은 영화에 나온 메가쓰나미에 비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일본 연안의 해저 지진이 한국에 해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충분했습니다. 특히 1993년엔 '우리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동안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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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22일 개봉한 영화 ‘해운대’는 쓰나미로 부산 해운대가 쑥대밭이 되는 가상 상황을 그린 영화다. 이런 영화에는 재해를 정확하게 예언하지만 무시당하는, 이른바 카산드라(Cassandra) 캐릭터가 반드시 등장한다. ‘해운대’에선 박중훈이 연기하는 김휘 박사가 줄곧 “일본 쓰시마 섬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할 경우 해일은 10분 만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다”며 대비를 촉구하지만, 피서철을 맞은 공무원들은 안 그래도 바쁘다며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 땅에 쓰나미가 밀어닥친다는 얘기는 얼핏 허황된 듯하지만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다. 1983년 5월 27일자 중앙일보는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여파로 강원도 동해안에 바닷물이 높아졌다 낮아지는 승강현상과 함께 파고 3m의 해일이 밀어닥쳐 3명이 실종되고, 74척의 선박이 침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지진 발생 지역은 홋카이도의 남쪽인 일본 서부 해상. 이 지진으로 일본은 1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쓰나미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을 뿐, 해저 지진으로 인한 해일과 수면 승강 현상은 바로 쓰나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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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7월 12일에도 역시 홋카이도 남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해저 지진으로 동해안에 해일이 발생, 57척의 어선이 파손됐다. 이 해 7월 20일자에는 당시 서울대 오임상 교수가 “일본 근해에서 해일이 발생할 경우 2~3시간이면 우리나라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해저 지진이 있을 경우 즉각 대비 태세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영화 속 김휘 교수의 주장도 그리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피서객의 입장에서 오늘날 해운대를 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쓰나미보다는 백사장의 침식이다. 80년대 이후 해안의 무분별한 개발 결과 백사장의 길이가 날로 짧아져 해마다 여름이면 몇만t씩 모래를 보충한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침식 때문에 해안선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수면이 깊어지는 협곡화 현상까지 발생했다고도 한다. 다양한 백사장 보호 대책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별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자신의 호 고운(孤雲)에서 한 글자를 떼어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피서지 해운대. 글자대로 바다와 구름만 남고 해수욕장은 사라지는 비운을 맞는다면 그거야말로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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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제가 쓰나미 전문가일리는 없으니 그림 설명을 보는게 낫겠습니다.

일본어의 쓰나미(津波)는 그냥 물결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지만, 학술용어 쓰나미는 해일을 발생 원인으로 구별할 때, 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해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림에서 보듯 쓰나미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에서 물 아래로 파동을 전달, 육지 가까운 곳에 도착하면 그 에너지를 높은 파도로 바꿔 덮쳐온다는 겁니다. 당연히 진앙으로부터의 거리와 지진의 크기가 파도의 크기를 결정하겠죠.

지금까지 기록된 한국의 쓰나미들은 비교적 거리가 먼 북해도 인근 해상에서 일어난 것들이라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3년과 93년의 사고를 봐도, 거의 매년 일어나는 홍수 피해에 비하면 별다른 큰 재난이라고 하기 힘든 정도입니다.

1983년의 재해 보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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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93년 5월20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지진에 대한 기획기사. '한국도 안전지대는 아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보다 일주일 전인 5월12일 홋카이도 남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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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사상자 없이 어선 57척이 파손되는 정도의 피해였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쓰나미로 14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대피할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이 기사의 끝부분에 이런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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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4-5m 정도라고 되어 있지만 가까운 지점에서 대형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 쓰나미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현재까지 기록된 최대의 쓰나미는 1958년 7월 9일 미국 알래스카 리투야만(Lituya Bay)에서 목격된 것으로, 파도의 높이가 524m(1720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대체 뭘로 측정했는지가 정말 궁금하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기록된 가장 높은 쓰나미였다는군요.

영화에도 나오는 2004년의 인도양 쓰나미는 수마트라 섬 서쪽 160km 지점에서 진도 9.0의 해저 지진이 발생,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 주변국들을 덮쳤습니다. 총 사망자만 30여만명. 수마트라 해안에서 본 파도의 높이는 30m에 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영화 속의 대형 재해가 발생하려면 한국과 상당히 거리가 가까운 쓰시마 섬의 서안에서, 그것도 초대형 지진이 발생해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재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화 얘기는 언제 나오나 하는 분들을 위해: 영화 리뷰는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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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까지 가능성으로 따진다면, 해운대 해수욕장은 쓰나미로 사라지는 것보다 모래 침식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을 듯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자동으로 모래사장이 평형을 유지한다, 심지어 최근 몇년 사이에는 오히려 백사장이 넓어지고 있다는 등의 주장들이 엇갈리고 있지만, 현재의 백사장 넓이를 보면 끝없는 모래사장으로 기억되던 왕년의 해운대와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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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최근 내린 비로 한 신축 건물 앞의 해변은 이렇게 자갈이 드러나기도 했다는군요. 이거야말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수중 제방을 설치한다는 등의 다양한 대책이 세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음 세대에도 해운대 백사장의 전설이 전해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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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옷을 하나씩 벗는다. 혹은 아예 아무 것도 안 입은 여자가 뉴스를 진행한다. 처음 들으면 참 솔깃한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네이키드 뉴스 서비스가 국내에서도 시작됐습니다. 엄청난 인기라는 사람도 있고, 정작 보니 시시하더라는 사람도 있더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성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자극적인 성인용 오락물에 비해 지독하게 단순하고 심심하겠죠. 여기에 살짝 뉴스라는 서비스를 얹어 상품으로 개발해 낸 발상이 웃음을 짓게 합니다.

뉴스를 보기 위해 네이키드 뉴스를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뉴스도 뉴스 아니냐?'고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궁색해 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네이키드 뉴스는 왜 뉴스가 아닌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키드 뉴스만 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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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뉴스

일본에 뇨타이모리(女體盛り)라는 묘한 풍속이 있다. 옷을 벗은 여자의 몸에 생선회나 초밥을 올려 놓고 먹는 것을 말한다. 최근엔 일본 음식 붐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런 풍습이 꽤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생선회를 여자의 몸 위에 올리면 맛이 각별할까. 아무리 시각이 미각에도 영향을 미친다지만 맛 때문에 뇨타이모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번 달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가 화제다. 지난 1999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네이키드 뉴스는 근엄한 정장 차림의 앵커 대신 나체의 여자가 뉴스를 읽어준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감출 것은 없다(Nothing to hide)'는 광고 문구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현재 세계적으로 1000만명에 가까운 유료 이용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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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네이키드 뉴스를 놓고 뉴스의 질을 논하는 것은 뇨타이모리의 초밥 맛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 다 벗은 여자를 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 인터넷 방송의 음란성을 주목하겠다고 밝혔지만 성인용 유료 서비스를 놓고 새삼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아닌 듯 싶다. 굳이 지적하자면 이 '뉴스 아닌 뉴스'의 진짜 문제는 단 한명의 기자도 없고, 단 한 건의 기사도 직접 취재하지 않으면서 뉴스 서비스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같은 뉴스라도 어떤 기자의 손을 거쳐 어떤 앵커가 보도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는 상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이들 스스로 '뉴스는 그냥 구색 맞추기'라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눈을 돌려 보면 이것이 네이키드 뉴스만의 문제는 아님을 알게 된다. 기자 없이도 뉴스를 생산하는 매체들이 이미 널려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 7월호에 따르면 올해 3월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신문은 1399개나 된다. 절반은 유명무실이지만 실제로 기사가 공급되는 곳만도 706개에 이른다.

그나마 상당수는 실제 취재 인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남이 쓴 기사를 '긁어다 붙여(copy and paste)'. 바이라인도 없는 기사를 양산하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이 과정에서 기사의 저작권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된다. 이런 '사이버' 사이비 언론들이 멀쩡히 숨쉬고 있는데 누가 네이키드 뉴스를 '무늬만 뉴스'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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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CSI 뉴욕'을 보다가 이 뇨타이모리가 나오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인터넷 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뇨타이모리와 관련된 사진은 서구인들이 등장하는 게 훨씬 더 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서양에서 뇨타이모리를 그렇게 많이 즐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걸 '변태 짓'이라며 아예 거론하기를 꺼리는 우리 쪽과는 달리, 서구에서는 그냥 신기한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전혀 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뜨뜻한 스시는 생각만 해도 별로일 것 같거든요. 아, 왜 남자들을 위한 서비스만 있냐고 분개하실 여자분들을 위해 난타이모리(男體盛り)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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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에도 썼지만 뇨타이모리의 스시와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는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그냥 눈가림이란 얘기죠. 물론 이 스시로도 배는 채워지고, 그 뉴스로도 시사 상식은 채워질 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왜 네이키드 뉴스의 뉴스가 '진짜 뉴스'가 아닌지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기자 없는 뉴스'의 심각성은 인터넷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 요즘 이쪽 업계에서는 '기사 도둑질'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매체에 나온 기사를 받아 쓰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매체가 똑같이 취재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기사가 사실인지, 혹시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지 보충 취재를 한 다음에 기사를 쓰는 것이 상식이죠. 하지만 특종성 기사가 하나 보이면 다짜고짜 휙 긁어다 토씨 몇개를 고쳐 자신들이 취재한 기사인 양 내보내는 비양심 매체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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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매체들의 비양심이 1차적인 문제지만, 그런 무자격 매체들의 기사를 싼 맛에(거의 공짜에 가까운 값이라고 합니다) 게재해 주는 포털들도 문젭니다. 이렇게 '무슨 일만 생기면 쌍둥이같은 기사들이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써 둔 글이 있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게 아무 기사나 척척 베껴서 내 기사인 척 하는 기괴한 매체들은 네이키드 뉴스에 비해 나을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쪽은 그나마 '보여주기'라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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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다시피 사상 첫 남북 동시 월드컵 진출이라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난 1986년 이후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물론 2002년은 개최국이라 예선을 거치지 않았지만) 매번 월드컵에 진출하느라고 이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그렇지, 월드컵 본선 진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나라 수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아시아에 너무 많은 티켓을 주는게 아니냐(현재 4매)고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북한이 새로 본선 진출국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건 꽤 대단한 일이라고 할 만 합니다.

북한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축구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박두익이라는 북한의 축구 영웅과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북한을 엄청나게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붙었다면 어떻게든 우열이 가려졌겠지만, 70년대까지의 남북축구사는 기를 쓰고 북한과의 대결을 피해 온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 그 세월을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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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북축구 잔혹사

1970년대까지 축구인들에게 남북 대결은 한·일전보다 두려운 경기였다. 자존심을 넘어 ‘죽어도 질 수 없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65년.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참가를 선언하자 한국은 불참을 선택했다. 혹시 질지도 모르니 아예 안 붙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선을 통과한 북한은 이듬해 본선에서도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해 세계 축구에 파란을 일으켰다. 충격을 받은 한국은 전열을 정비해 70년 멕시코 월드컵에 도전했지만 이번엔 북한이 발을 뺐다.

박두익과 북한 축구의 사다리 전법(공을 잡은 선수의 상-중-하 세 방향을 세 선수가 동시에 마크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터이니 따로 설명을 달지 않습니다. 아무튼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사상 처음 출전했고, 58년과 62년에는 석연찮은 이유로 예선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두 해 중 한번은 서류 접수 실수로 참가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죠.

아무튼 1965년, FIFA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예선을 캄보디아에서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예선에 북한이 참가한다는 이유로 한국은 발을 뺍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한국은 북한에게 경제 면에서도 절대 우위를 장담하기 힘들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축구 쯤이야...'지만 당시엔 '축구까지 지면'이란 시각이 있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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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바로 전설의 사다리 전법. 근데 대체 저게 실전에서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결국 한국은 제재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대회를 보이코트했고, 북한은 한국이 빠진 예선을 쉽게 통과해 본선에서 파란을 일으킵니다. 아, 참고로 당시엔 본선 진출국이 16개국이었으므로 예선만 통과하면 8강이었습니다. 8강전에선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패해 탈락했죠.

북한 축구의 선전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국내 최고 스타들을 한 팀에 모아 '양지팀'을 관리했다는 것 또한 유명한 얘깁니다. 양지팀 덕분에 자신감에 찬 한국은 1970년 예선에 참가하지만 북한이 이번엔 불참합니다.

북한 축구가 처음 아시안게임에 등장한 74년 테헤란. 대회 개막을 2주 앞두고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서거한 뒤끝이었다. 굳이 북한과 위험천만한 대결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고, 한국은 대회 내내 북한과의 대진에만 신경 쓰다가 석연찮은 연패로 수상권에서 멀어졌다.

이때까지도 '만약 이런 정치상황에서 북한에게 혹시 지기라도 한다면'이란 생각이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는군요. 그러다 보니 한국은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쿠웨이트 전에서,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 있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0대4로 대패하고 맙니다. 만약 이 경기를 이기면 다른 조에서 올라올 북한과 2차 예선에서 같은 조가 될 상황이었죠. 하지만 한번 북한을 패한 뒤 두번째 대결도 피하기 위해 맥빠진 경기를 벌이다 결국 2차 예선에서 탈락해버립니다.

4년 뒤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수퍼스타 차범근을 앞세운 한국은 대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양팀은 승승장구 끝에 결승에서 맞붙었고 접전 끝에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이 결정됐다.

차범근을 앞세운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1974년과 78년 월드컵 예선에서 두번 모두 호주에게 결정적인 순간 역전을 허용하며 월드컵 출전권을 빼앗깁니다. 북한은 74년 예선에 참가하지만 최종 예선까지 도달하지 못해 한국과 맞붙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한 한국은 마침내 1978년, 북한과의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노립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겁니다. 양쪽 모두 너무나 부담스러운 경기였으므로, 답답할 정도로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칩니다. 결국 결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0대0 공동 우승.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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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대에서도 신경전은 계속됐다. ‘한국축구 100년사’에서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김호곤(현 울산 현대 감독)은 “북한 주장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했지만 그는 내가 올라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골키퍼는 나를 밀어 떨어뜨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김호곤은 “우리 손 잡읍시다”고 제의,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사상 첫 남북대결은 해피엔딩이 됩니다. 그리고 별 상관 없는 얘기지만 바로 저 경기 직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 진출, 한국 축구를 세계에 알리죠.

그 뒤로 남북 대결은 흔한 일이 됐고 긴장은 사라졌다. 오히려 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최종전에서 북한은 한국에 0-3으로 대패, 한국이 기적적으로 일본을 제치고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지난해 열린 남아공 월드컵 1차 예선에서 북한은 평양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들일 수 없다며 남한과의 홈 경기를 거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일본이 '도하의 참극'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일본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과 한국의 탈락이 유력한 상황, 한국은 1승2무1패로 승점 4(당시에는 승이 2점, 무가 1점), 일본은 2승1무1패로 승점 5점으로 각각 한경기씩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북한과의 최종전을 무조건 큰 점수차로 이겨야 했고, 설혹 한국이 이긴다 해도 일본이 이라크와의 최종전을 이기면 일본이 올라가는 상황입니다. 총 6개국 중 탈락이 확정된 것은 북한 뿐.

한국-북한전. 전반을 0-0으로 비기고 하프 타임이 되자 "점잖기로 소문난 김호 감독이 발길질로 머리를 걷어차더라"고 홍명보가 뒷날 회고할 정도로 한국 라커는 "지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합니다. 북한이 과연 의도적으로 봐주려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아무튼 한국은 후반전에 대분발, 세 골을 넣어 3대0으로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열리고 있는 일본-이라크전도 일본이 2-1로 이기고 있는 상황. 결국 3대0으로 이기고도 쓸쓸히 그라운드를 빠져 나오던 한국 선수들은 벤치의 후보 선수들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함께 고함을 지릅니다. 종료 30초를 남기고 이라크의 자파르가 기적같은 동점골을 터뜨린 것이죠. 이렇게 해서 한국과 일본은 승점 6으로 동점이 되지만 북한전에서 넣은 세 골 덕분에 한국이 득실차로 94년 월드컵에 진출합니다. 아마도 해방후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가진 것이 이때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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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지난 반세기 간의 남북 축구 대결사는 양자 간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압축해 보여 주는 듯하다. 곡절 끝에 남북한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사상 최초로 동반 진출하게 됐다. 그저 본선에서도 양측 모두 선전을 거듭해 78년의 어깨동무가 재현되길 바랄 뿐이다. 

2010년 대회 예선에선 한국이 마지막까지 이란 전에서 무승부를 이끌어 낸 것이 북한과의 동반 진출을 일궈냈습니다. 제발 이게 조금이라도 경색 국면을 푸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바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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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북한이 다시 본선에서 대결을 벌이려면 둘 다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야 하는데 그건 좀 쉽지 않겠군요. '어깨동무'는 경기장 밖에서 하는 것도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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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큰 일을 겪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피력합니다. 어떤 말들은 명언이 되어 남고, 어떤 말들은 망언으로 기록됩니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마련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유비는 육손에게 패해 죽기 직전, "새가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하다(鳥之將死, 其鳴也哀;人之將死, 其言也善)"고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면 누구든 자신이 어떤 말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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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지막 한마디

오슨 웰스의 고전 명작 영화 ‘시민 케인’은 언론 재벌 케인이 숨을 거두는 순간 중얼거린 “로즈버드”라는 말의 의미를 찾는 미스터리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명 인사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유사 이래 수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카이사르의 “브루투스, 너마저도” 이후 수많은 말이 때로는 교훈으로, 때로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회자(膾炙)됐다.

마지막 말들은 망자의 일생을 압축해 보여주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좀 더 좋은 작품을 남겼어야 했다”며 마지막까지 겸손했고, 골프광이던 가수 빙 크로스비는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18홀을 돈 뒤 “이봐, 정말 멋진 게임 아니었나?”라고 말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살하기 전 남긴 메모의 “슬픔은 끝없이 지속된다”는 말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때론 죽음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마르코 폴로는 “내가 본 것 중 절반도 얘기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마지막 말 따위는 살아서 할 말을 다 못한 바보들에게나 들으라고”라며 후회 없음을 피력했다.

해학으로 후인들을 위로한 사람도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편하게 옆으로 누워 보라는 딸에게 “죽는 사람에게 쉬운 일이란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버나드 쇼도 “죽는 게 웃기는 것보다 쉽군”이라며 위트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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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첫머리인 ‘인용하자면(Citater fra)’은 끝없는 연구자의 자세를 가리키는 격언으로도 쓰인다.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도 죽음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찰스 다윈은 “나라고 죽는 게 겁이 안 날 리가 있나”라고 말했고,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이건 말도 안 돼!”라며 강한 의혹을 표현했다. 가끔은 가공의 한마디가 조작되기도 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여러분, 희극은 끝났소. 박수를 치시오”라는 멋진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여부는 지금껏 논란의 대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담배 있나?”로 기억되겠지만 유훈(遺訓)은 29일 영결식장에서 낭독된 14행의 유언 가운데서 찾아야 할 듯하다. 과연 그는 그 14행 중 어느 말이 가장 오래 기억되길 원했을까. 마지막 가는 길에도 “원망하지 말라”며 후인들의 화합을 꾀했던 그의 자세에 경의를 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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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고인들이 수없이 많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는 굳이 보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마지막 말들은 '훈요십조'라는 이름으로 남았고, 어처구니없이 수백년 뒤 호남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의 마지막 말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찾으라면 화합의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주변 정황을 생각하면, 그런 말을 남기고 가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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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달변가 김제동이 이날도 명언 하나를 남겼습니다.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달라"는 유언에 대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비석 하나씩을 세우겠다"고 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빙 크로스비(알고보니 골프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이 있다는군요)의 노래는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베토벤 교향곡 7번의 2악장이 어울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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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3등,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칸 영화제는 황금종려상, 심사위원 대상, 심사위원상의 세 단계로 작품상을 시상합니다. 지난 2004년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이번에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으니 명실공히 '칸의 사나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게 인지상정일 겁니다. 특히 타임지의 평론에서 "지난번('올드 보이')보다 마땅히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게 했기 때문일 것이고, 아무래도 이미 2등을 해 본 경험이 있끼 때문에 3등은 약간 맥이 빠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물론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감독들의 작품 20여편 중에서 네 작품 안에 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란 걸 잊어선 안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겨우 3등?'이란 식으로 대응한다면 그야말로 올챙잇적 시절 모른다는 소리 듣기 딱 좋겠죠. 한국 영화가 칸 영화제의 본상 수상 범위에 든 것도 이번이 네번째일 뿐입니다. 일본 영화는 황금종려상만 다섯 번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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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때문인지 슬쩍 아쉬움이 묻어 나는 듯한 표정입니다.

한방에 정리되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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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Palme d'Or
- 하얀 리본 Das weiße Band by Michael Haneke

심사위원대상 Grand Prix

- 예언자 Un prophete by Jacques Audiard

감독상 Prix de la mise en scene
- Brillante Mendoza for 키나테이 Kinatay

 심사위원상 Prix du Jury 
-피시 탱크 Fish Tank by Andrea Arnold
-박쥐 Thirst by Park Cha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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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본상 Prix du scenario
-춘곤증 Chun Feng Chen Zui De Ye Wan(Spring Fever) by Lou Ye
오른쪽이 주오 탄, 왼쪽이 웨이 우, 가운데 로 예 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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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연기상 Prix d'interpretation feminine
- Charlotte Gainsbourg for Antichrist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아시다시피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 사이의 딸이죠. 제인 버킨은 여자분들이 환호하시는 바로 그 버킨 백의 주인공 맞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만은 못하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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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연기상 Prix d'interpretation masculine 
- Christoph Waltz for Inglourious Basterds
시상자는 장자이입니다.

평생공로상 Lifetime Achievement Award for his work
- Alain Resnais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황금종려상은 타기가 어려운 걸까요. 거기에 대해 지난주 토요일자 신문에 썼던 글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영화제는 올림픽이 아닙니다. 1등이 2등보다 반드시 우수한 작품이라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른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등만이 기억된다는게 참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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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금종려상

칸 영화제의 대상은 황금종려상(Palme d'Or)이라고 불린다. 1939년 시작된 이 영화제의 대상은 1954년까지 그냥 그랑프리라고 불렸지만 1955년부터 칸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새를 디자인에 활용한 황금종려상이 등장했다. 49년 시작된 베니스 영화제가 황금사자상을, 52년 베를린 영화제가 황금곰상을 시상하자 자극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24일 올해 칸 영화제 수상 결과가 발표된다. 그중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제 주최 측은 매년 명망 있는 세계의 감독들에게 출품을 요청하고, 그중 선택된 소수가 대상을 수상할 수 있는 경쟁 부문에 포함된다. 올해의 경쟁부문 출품작은 20편.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포함됐지만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제외됐다.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을 우선한다는 것이 칸 영화제의 표어처럼 돼 있지만 사실 일반인이 보지 못한 영화가 태반이므로 흥행 성적은 반영할래야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심사위원도 매년 전원이 교체되므로 일정한 수상 기준이나 예상 답안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해 심사위원장이 누구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유혈 낭자한 액션영화의 대가 쿠엔틴 타란티노가 2004년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 아니었다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2등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받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거의 정설처럼 되어 있다.

물론 심사위원장의 스타일을 너무 과신해서도 안 된다. 2002년에는 '트윈 픽스'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으면서 초현실적 작품이 수상작이 될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황금종려상은 예상 외로 로만 폴란스키의 점잖은 전쟁 서사시 '피아니스트'에 돌아갔다.

송강호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영화제는 올림픽이 아니므로 금메달(황금종려상)을 따느냐 못 따느냐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전례를 살펴볼 때 황금종려상의 수상은 어느 한 해의 출품작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감독은 뒤늦게라도 상을 챙겨 주는 것이 칸의 미풍양속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보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들 중 '가게무샤'를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칸 영화제는 80년, 이 작품을 통해 70세의 노장에게 황금종려상을 선물했다. 마치 '그동안 상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사인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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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제 심사위원들입니다. 왼쪽부터 서기, 로빈 라이트 펜, 하니프 쿠레이시(영국 작가), 이창동 감독, 아시아 아르젠토, 샤밀라 타고르(인도 배우), 이자벨 위페르(프랑스 배우, 위원장),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 감독), 제임스 그레이(미국 감독)의 순입니다.


뭐 공로상이라는게 따로 있긴 하지만, 평생 애쓴 노장들에게 어느 시점 이후에 상을 몰아 주는 건 어느 장르, 어느 지방에서나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영화계 뿐만이 아닙니다. 기타 황제 에릭 클랩튼만 보더라도 47세 때인 1992년 그래미상 6개 부문을 휩쓸기 전까지는 그래미상에서 단 2회밖에(1972, 1990)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미 9차례나 더 수상했죠.

그러니 2등 한번, 3등 한번을 했다고 해서 너무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황금종려상을 손에 쥘 테니까요. 하네케 감독도 지난 2001년(심사위원대상)과 2005년(감독상)으로 두 번 준비동작을 한 뒤에 이번에 최고상을 차지했습니다.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영화인들은 황금종려상을 다섯 번이나 가져간 일본 영화계보다 훨씬 에너지 넘치고 관객들이 호응하는 훌륭한 웰메이드 상업영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 해야 마땅할 듯 함니다. 아무튼 머지 않은 미래에 황금종려상을 번쩍 들어올릴 박찬욱 감독의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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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는 촬영상 시상자로 등장했던 여신(혹은 마녀?)의 대표 이자벨 아자니입니다. 확대하시면 주름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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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실상 존엄사 인정'이라는 헤드라인을 본 순간 제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마지막 대목이었습니다. 요즘 존엄사, 존엄사 하지만 참 귀에 설게 들립니다. 예전에 쓰던 안락사라는 말과 뭐가 다른지 헛갈리시는 분도 많을 법 합니다.

존엄사로 부르건 안락사로 부르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떡밥인 건 분명합니다. 말을 바꿔 놓고 보면 이런 죽음은 일종의 자살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걸 돕는 사람은 넓은 의미의 살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격하게 보자면 의료진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의료 윤리 위반이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을 덥썩 물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거기에 대해 쓴 글입니다.

전문가 분들의 지적이나 충고를 환영합니다.

아래 글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 어디선가 들어 보신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혹시 이 영화를 보려고 계획중인 분이 있다면 그냥 지나가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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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존엄사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장애인 인권단체로부터는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늙은 권투코치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딸처럼 아껴온 선수가 사고로 목 아래 전신마비에 빠지자 독극물 주사로 안락사를 돕는다. 극중에선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 행위였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장애인들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항의에 나섰다.

서울대병원이 18일 사실상 존엄사를 인정하는 방침을 발표해 한바탕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오랜 논쟁거리였던 안락사(euthanasia)라는 말 대신 언젠가부터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말이 쓰이지만 두 용어의 혼동으로 인한 혼란도 만만찮다. 엄밀히 말해 두 용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안락사는 '치료 방법이 없어 더 이상의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직·간접적 방법으로 고통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 '적극적인 안락사'는 독극물 주사 등으로 환자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이며, '소극적 안락사'는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맞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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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나 지난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모두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연구자들도 이번 서울대병원의 조치를 비롯해 국내에서 사용되는 존엄사의 의미를 소극적 안락사로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1997년 발효된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은 6개월 이내 시한부 생명을 진단받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독극물 투여를 허용하고 있다. 보수파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1년 약물 관리법을 이용해 이 법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2008년 현재 이 법의 적용을 받아 삶을 마감한 환자는 400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촉발된 논쟁은 이미 존엄사와 관련된 논의가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를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존엄사 논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좀 더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각계의 지혜가 모이기를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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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뜻으로만 풀이해도 '존엄사'란 '죽는 순간 만큼은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이미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의료진이나 가족의 의무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그저 연장하고 있을 뿐이라면 과연 그게 인간을 위한 것이냐는 의문이 떠오를게 당연합니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 이런 경우, 저런 경우, 경우에 따라 생각할 거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환자가 이미 의식이 없다면? 가족이 치료비 때문에 살 수 있는 환자의 치료 중단을 요구한다면? 환자의 잔여 수명이 1년이 넘게 예측된다면? 암이 아닌 다른 불치병이라면? 환자가 뇌손상으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런 경우들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준비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존엄사에 대한 '대표 입장'을 갖게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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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이후 의료계가 "존업사 입법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카톨릭 생명윤리위원회는 곧바로 "추기경의 죽음을 존엄사로 매도하려는 세력에게 경고하며, 이것이 안락사 허용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엄밀히 말해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존엄사의 개념에 비치면 김 추기경의 마지막 길은 존엄사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걸 '매도'라고 표현하는 것은 굳이 국내에서 통용되는 존엄사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이기도 하죠. 물론 자살을 엄금하고 있는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어쩔수없는 선택이라고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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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은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말에서, 도저히 후송 불가능한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동료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병사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나온 죽음의 형태는 아마도 이쪽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가장 끔찍한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오래 전에 들은 얘기로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뇌손상만을 입고 살아남아 침을 질질 흘리며 세살짜리 아이 수준의 지능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다더군요.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온 몸이 전신마비로 꼼짝할수 없는 상태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도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정말 참담한 심경일 겁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결말에 장애인 인권 단체들이 반발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학에 가고, 책을 저술하고, 석학이 되는 사람도 있다"며 "이런 영화의 결말은 그런 악조건에서도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꺾는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죠. 호킹 교수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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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런 상황을 개인의 결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남겨 둘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여기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을 듯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 또 옆에서 바라보는 가족의 입장, 의료진의 입장이 어차피 다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다 감안하면 카이자르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과연 어떤 죽음이 이상적인 죽음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답니다. 이때 카이자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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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교황청이 폭파 위협을 받는 동안 진짜 교황까지 뉴스의 초점이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 '천사와 악마'가 개봉하는 주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중동 지역을 순방하면서 무슬림과 기독교도, 유태인들을 하나로 묶는 '공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물론 현 교황은 지금까지 입만 열면 사고를 쳐 온 터라 이번 중동 방문을 놓고도 우려가 엇갈렸습니다. 심지어 '교황은 반유태주의자다' '지금이 십자군 전쟁 때인 줄 아느냐'는 말까지 들었던 적이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번 중동 방문은 자칫하면 제 무덤을 파는 결과가 나올 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별 무리 없는 순방을 마쳤지만 이스라엘의 일부 언론들은 "끝내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독일의 책임을 좀 더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아 실망감을 줬다"고도 보도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히틀러 유겐트라고 불리는 나치 청년단체의 활동 경력이 있는 것으로 꼽히는 인물인 만큼, 더욱 그런 언급이 필요했겠죠.

사실 평소 여기로 가져오던 글들에 비해 좀 무겁습니다. 어쩔까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아카이브의 의미로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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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시대

14일 개봉한 영화 '천사와 악마'는 중세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의 또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가톨릭에 의해 탄압당한 중세 과학자들의 후손들이 바티칸을 상대로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가톨릭의 반성을 은근히 촉구하는 이 영화가 전 세계에 공개될 무렵 진짜 교황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방문해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에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스라엘 측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해 애도를 표했고, 베들레헴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 국가 설립을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경의를 표한 셈이다.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은 천주교 교단의 입장에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교황청은 이미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선언', 즉 노스트라 아에타테(Nostra Aetate, '우리 시대'라는 뜻의 라틴어)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유대교·힌두교·이슬람교·불교 등과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러나 독일 출신인 베네딕토 16세는 그 정신에 역행하는 보수적인 행보로 이미 몇 차례 곤욕을 치렀다. 추기경이던 1990년에는 과학자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지목했던 당시 교황청의 조치를 지지해 물의를 빚었고, 2006년엔 이슬람 비하 발언으로 아랍 국가들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더욱이 올 연초엔 공공연히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내 1988년 파문당한 네 성직자를 복권시켜 국제 유대인 사회의 반발을 낳기도 했다. 그런 베네딕토 16세인 만큼 이번 방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소 긴장감이 흘렀지만 교황은 15일 별 무리 없이 일정을 마쳤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유럽 각국 군주들에게 “보병이든 기사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악의 종족을 무찌르라”고 소리 높여 외친 뒤로 수백 년간 중동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피로 물들었다. 그 성지에서 900여 년 뒤의 후임 교황이 평화를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 아직 존중되고 있다는 위안을 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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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노스트라 아에타테, 즉 '우리 시대'의 정신이란 간단히 말해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류 사이의 반목이나 대화의 단절, 상호 배타적인 입장의 철폐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서구 문화 발전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문서가 2221대 81이라는 표차로 채택된 것은 인류애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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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아무리 사고를 많이 쳤다고 해도, 그 전임자들을 두루두루 훑어보면 꽤 양호한 편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중세의 교황들이 바라보던 유럽의 군주들은 비록 기독교도라고는 하나 사랑의 실천보다는 전투의 영광을 더 높이 사는 인물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우르반 2세가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고 1095년 십자군 파병을 제안한 동기중의 하나가 "같은 기독교도 끼리의 살육을 좀 막아 보자는" 것이기도 했다니 말 다 했죠. 물론 이런 동기에도 불구하고 뒷날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꾀임에 빠져 당시 기독교 세계 최대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인노켄티우스 교황은 격분했고 책임자들을 파문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어차피 성지로 가서 이교도와의 싸움에 참가하면 다시 사면해줘야 할 입장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뒤의 무수한 교황들 역시 평화 유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현대에도 2차대전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 12세는 "은근히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는 음모설에 시달리기도 했죠. 물론 이 음모설은 거의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유력한 유태인 단체들은 피우 12세의 노력이 없었으면 유태인 희생자들은 더 늘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평화의 수호자보다는 분란의 기원으로 더 잘 어울렸던 교황이 중동 평화를 위해, 타 종교인들과의 공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보기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저 글을 쓰면서 머리 속에 떠오른 건 바로 이 동영상이었습니다.



보고 나면 참 씁쓸합니다. 대체 언제쯤 이런 모습을 안 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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