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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의 이민호가 인기 상종가를 누리고 있습니다. 스타들 중에는 가끔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딱 한 작품이나 노래 한 곡으로 곧바로 톱스타 진용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이민호는 그렇지 않습니다. 2006년 EBS 드라마 '비밀의 교정'으로 데뷔한 이래, 아슬아슬하게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그 작품은 대박이 나고, 천신만고끝에 캐스팅된 작품은 조기종영을 하거나 흥행에서 참패했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형수술을 한 것도 아니죠. 이런 건 그냥 운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마침내 '꽃보다 남자'의 히트가 이런 설움을 모두 씻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이민호가 뜬 걸 보고 가장 아쉬워하는 건 누굴까요. 뭐니뭐니해도 영화 '울학교 이티'의 제작진입니다. 5개월 정도만 버티고 개봉을 했더라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이민호 하나면 사실 아쉬움은 그리 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에는 무명의 똘망똘망한 배우들이 학생들로 줄줄이 출연하고 있었죠. 어떤 얼굴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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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학교 이티'는 강남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철밥통 생활을 즐기고 있던 천선생(김수로)이 어느날 체육시간을 줄이고 국-영-수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학교 방침에 따라 직장을 놓칠 위기에 놓이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일이 되려다 보니 어찌어찌하다가 대학 재학 시절에 따 놓은 영어교사 자격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납니다. 이 자격증을 발판으로 천선생은 영어 교사로 변신을 노립니다. 이것이 바로 이티(ET: English Teacher)의 정체죠.

이 영화는 시사회 직후엔 각계의 호평으로 "잘하면 300만 정도는 가능하겠다"는 기대를 자아냈지만 불행히도 스크린에 걸렸을 때에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1주일 앞서 개봉한 '맘마미아'와 '신기전'이 의외로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같은 9월11일 개봉한 '영화는 영화다'도 선전하는 가운데 묻혀 버린 피해자가 됐죠. 적절한 웃음과 따뜻함이 조화를 이룬 영화라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일각에서는 '너무 착한 영화'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극장 관객 70만은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아쉬운 숫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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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영화가 지금 개봉한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나오는 겁니다. 지난해 9월11일 개봉 당시만 해도 이 영화는 김수로의 원맨 무비로 홍보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습니다. 그만치 다른 배우들의 지명도가 떨어졌기 때문이죠.

아역 출신으로 고정팬을 어느 정도 확보한 백성현이 있었지만 극중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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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바로 F1 이민호가 꽤 큰 비중으로 나오기 때문이죠. 이민호는 이 영화에서 부잣집 아들 출신의 반항아로 우여곡절을 거쳐 천선생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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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이민호라면 극중 비중도 편집 과정에서 훨씬 더 커졌을 겁니다. 지금의 웨이브 머리 모습이 다소 느끼하다면 저 때는 보다 야성미가 강조된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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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영화가 개봉된지 2주 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박신양 문근영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기생 정향 역을 맡은 문채원이 각광을 받았죠. 네티즌들이 문근영과 문채원의 묘한 관계를 '닷냥커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문채원의 고전미 넘치는 마스크가 화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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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원은 영화에선 가난으로 시달리다가 원조교제에 나서는 여학생 은실 역을 맡았습니다. 물론 정의감 넘치는 이티 천선생의 도움을 받는 캐릭터죠. 그늘진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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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 3개월 뒤, 아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영화 '과속스캔들'이 바람을 탔습니다. 현재 6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코미디 사상 두번째로 많은 관객('미녀는 괴로워'의 661만 바로 다음)을 기록하고 있죠.

이 영화를 통해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신인 박보영이었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박보영이라는 이름이 '제2의 전도연'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집중적인 조명이 쏟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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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영은 '울학교 이티'에서는 반의 모범생이자 전교 1등 송이로 출연하죠. 공부도 잘 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천선생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최고의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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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울학교 이티'가 지난해 9월11일이 아니라 올해 1월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요. 박보영-문채원은 몰라도 이민호의 덕은 확실히 볼 수 있었을 듯 합니다. 지난해까지는 영화를 다 찍어 놓고도 홍보비 문제로 개봉이 미뤄지는 영화들도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깔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울학교 이티'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게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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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르다고 한장 자랄 나이의 청춘들이라 그런지 벌써 이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이는군요.





꽃보다 남자에 대한 다른 이야기:



무명시절 이민호가 겪었던 고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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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가 불같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당연히 예상됐던 궤적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소구 대상인 10대 후반-20대 후반의 여성층 중에서 원작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사실 이 원작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네 명의 엄친아들에게 전교생이 노예처럼 굴종하는 상황이라는 건 남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한마디로 '꽃보다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여주인공 츠쿠시에게 투영하는 여성들을 위한 완벽한 판타지 상품이죠.

이런 부분을 일단 접고 볼 때 현재 방송중인 KBS판 '꽃보다 남자'는 꽤 볼만한 드라마입니다. 에피소드끼리의 연결이 억지스럽지 않고, 다소 설익은 듯한 주인공들의 연기도 싱싱합니다. 일본 드라마 '부호형사' 식의 부자들에 대한 희화화도 충분히 웃음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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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완성되어 방송중인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는 드라마 내용과는 별도로 흥미로운 부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들의 행동을 제어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실종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청소년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어떻게든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성인 연기자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성인들은 고교생인 주인공들 만큼의 이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준표에 의해 '마귀할멈'이라고 불리는 어머니(이혜영)이나 동전 한푼에 목숨을 거는 희화화된 금잔디의 부모(안석환, 임예진)는 청소년들의 눈에 비쳐지는 속물적이고 한심한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배울 게 없는 어른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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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비해 F4의 지각은 다 자란 듯 합니다. 금잔디와의 연애로 희희낙락하는 준표에게 던져지는 F4 동료들의 충고를 보시죠. "우리의 자유는 연애까지야.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권리는 부모님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마." 이미 어른들의 세계 따위는 다 꿰뚫고 있다는 식입니다.

그나마 전직 대통령 이정길이나 신화그룹의 비서실장 정호빈 정도가 '철든 어른'의 모습을 앞으로 보여 줄 걸로 기대되지만 그 나머지 어른들은 모두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입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의 어른들의 공백은 만화에서는 흔한 설정이죠. '슬램 덩크' 이후로 청소년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만화에서 부모들이 의미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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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교생들의 현실은 겉으로 보기엔 '꽃보다 남자' 속 세상과 꽤 다릅니다. 일상생활에서 진로선택까지 모두 부모의 교육열과 과보호 속에서 이뤄지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게 지나쳐서 서른이 넘을 때까지 부모의 보호 속에서 사는 캥거루족이 되는 경우도 널렸죠. 아무튼 현실의 고교생들은 부모의 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마음 속에서도 어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을까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상은 권위의 부정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값싼 지식의 확산과 함께 전통적인 '어른과 아이' 사이의 장벽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접 경험의 의미는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것이죠. 여행 감상문과 진짜 여행의 체험은 직접 그 땅을 밟아 본 사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맛집 기행문과 진짜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의 느낌은 천지차이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아직 아무 것도 먹어 보지 못한 사람, 직접 거기에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마치 가 본듯 그 느낌을 줄줄 외울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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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지식민주화와 함께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지면서, 웹 검색 기술이 기존의 '어른들'이 일생 동안 읽은 도서목록을 일시적으로 추월해버리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무식한 어른들'을 인정하지 않게 돼 버렸죠. 여기에 몇몇 어른들이 동조하면서 '아이들'의 '어른들'에 대한 태도는 권위의 부정을 넘어 아예 멸시의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꽃보다 남자'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는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속에서 보여지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한창 빚어지고 있는 권위의 공백을 그대로 묘사한 듯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성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권위의 기준은 돈 뿐입니다. 돈으로 청소년들을 지배할 수 없는 어른들은 반대로 돈을 가진 청소년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들로 묘사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꽃보다 남자'는 그저 유치하고 낯간지러운 드라마에서 보고 있으면 무서워지는 드라마로 슬쩍 변신하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시각의 얘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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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 대만판이나 일본판의 캐스팅을 보면 한국산 F4의 위용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더군요. 어찌나 다들 쭉쭉 빠지고 잘생겼는지. 아니면 이런 부분이 한-중-일간의 미묘한 취향 차이를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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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안 하고 한해를 넘기니 어째 좀 껄적지근합니다. 뭐 며칠 늦었지만 그래도 한번은 짚어 봐야 할 것 같더군요. 리뷰를 쓴 영화도, 안 쓴 영화도 있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 한해도 여름 기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폭격이 대단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올해도 '트랜스포머 2'가 벌써부터 기세를 올리고 있더군요. 그래도 지난해 한국 영화 중에는 꽤 건질 작품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돈 많이 안 들인 영화 중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반면 대작들 중에는 그리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쉬움 반, 걱정 반으로 남습니다. 그만큼 수업료들을 냈으니 이제 앞으로 잘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이제 그분들이 그만한 투자를 받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죠.

아무튼 2008년의 만족스러웠던 영화 열편입니다. 순위가 그닥 큰 의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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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언맨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때 가장 만족스러웠던 영화. 유치하지도 않으면서 경박하지도 않았고 주인공이 지나치게 착해서 답답하지도 않았다. 2편도 기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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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쿵푸팬더

더 이상 재미있기 힘들 것 같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뭘 더 바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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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강의 캐릭터, 최강의 호흡. 같은 해였다면 히스 레저는 죽어서도 조연상을 못 받았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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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추격자

탄탄한 스릴러의 힘을 보여준 걸작. 짝퉁 스릴러들은 제발 좀 참고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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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월 E

전의상실. 상상력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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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고 70

이렇게 잘 만들고도 외면당하는 심정은 어떨까. 한국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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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크나이트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과 역사에 남을 걸작은 아니라는 생각의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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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님은 먼곳에

누가 뭐라건 마음이 끌린다. 감독의 뚝심으로 끌어낸 20세기의 여신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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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더 폴 - 오디어스의 문

불가사의한 시각적 도전. 이렇게만 찍으면 대체 누가 스토리를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리뷰 쓸 시기를 놓쳤습니다. 죄송-_-. 나중에 추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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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쓰홍당무

 

포스팅 제목 그대로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꽃게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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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 영화는 영화다

11등? 뭐 아무튼 박력 넘치는 수작. 이렇게 제한된 자원으로도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






다음은 실망스러웠던 다섯 편의 영화입니다.

위의 열편과 아래 다섯 편에 포함되지 않은 영화들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영화들일 수도 있고, 아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 다섯 편도 기준은 저의 개인적인 기대와 거기에 대한 배반의 크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들이 아무리 편견으로 보더라도 '2008년의 가장 못 만든 영화'들은 아닙니다.

이번엔 순위도 빼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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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

멋진 장면 몇개로 의문부호 투성이인 세시간 짜리 영화를 구하는 방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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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든 킹덤

 

두 명의 쿵후 전설을 모은 결과가 이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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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뻔한 기획과 뻔한 결과. 안이함과 나태함이 돋보였던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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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

 

800억원을 들여 10억 독자를 실망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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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피

제발 천녀유혼을 10번만 더 봐라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편견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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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를 보다 보면 참 요즘과 다르고, 조선시대와도 또 다른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위험성 - 굳이 천추태후가 역사의 주역으로 나서야 하는가 - 등에 대해서는 심히 공감하고 있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을 했지만 차후에 다시 모아서 포스팅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먼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희한한 고려 왕조의 가족내 혼인상(사촌 정도는 근친혼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에 대해서 조금만 얘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근친혼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오늘날에 와서는 더없이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 전에는 이것이 상식인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그냥 알아 두는 선에서 그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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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방송분에서 한 신하가 경종이 외사촌남매간인 황보씨의 두 자매(뒷날의 천추태후와 동생)와 혼인하겠다는 데 대해 '근친혼'이라면서 반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고려 초기의 신료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외사촌남매간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끔찍한 근친혼이지만 당시 왕가의 혼인 습속을 살펴보면 거의 남남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도 외사촌간의 혼인은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합법입니다. 친사촌이라고 해도 미국 절반 이상의 주에서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혈족 개념이 강한 한국이니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죠. 그리고 내막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사촌간 혼인은 고려 초기라면 근친혼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 안에서 경종(최철호)은 신정황태후(반효정)에게 꼬박꼬박 '외할머니'라고 부르고 치(뒷날의 성종)이나 두 공주에게 '짐의 외사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한국의 족보상으로 이들은 외할머니나 외사촌이 아닙니다. 그냥 할머니나 사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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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대로 고려 태조 왕건은 6명의 황후를 비롯한 29명의 부인을 통해 수없이 많은 자손을 두었습니다. 모두 왕권 안정을 위한 노력이었죠. 신라 왕가를 비롯해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 모두 혼인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자손들 사이에서 빽빽한 혼맥이 다시 형성됩니다. 즉, 똑같은 왕건의 소생인 형제 자매들끼리 어머니만 다르면 다시 혼인을 한 것입니다. 단지 남자는 아버지의 성대로 왕씨를 따랐지만 딸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얼핏 봐서는 형제간 혼인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고려 5대 왕인 경종은 4대 광종의 아들입니다. 광종은 태조의 제3 황후인 신명황후 유씨의 소생이죠. 그리고 광종의 아내인 경종의 어머니는 제4 황후인 신정황후 황보씨(드라마의 반효정)의 딸인 대목황후입니다. 대목황후도 황보씨로 설정되어 있지만 엄연히 왕건의 딸이죠. 어머니만 다른 남매끼리의 혼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황후 유씨는 정종이 되는 요 왕자, 광종이 되는 소 왕자를 낳고 신정황후 황보씨는 뒷날 대종으로 추증되는 욱 왕자를 낳습니다. 이 욱 왕자가 제6 황후인 정덕황후 유씨의 딸(역시 어머니만 다른 남매입니다)과 결혼해서 낳는 것이 바로 뒷날의 성종인 황주원군 치, 그리고 천추태후 황보수와 황보설 자매입니다.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들이지만 위의 예에 따라 아들은 왕씨, 딸은 황보씨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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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경종이 신정황태후를 가리켜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일면 맞는 얘기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황주원군이나 황보수-황보설 자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인 대종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외사촌인 동시에 친사촌이 되는 셈이죠. 아울러 신정황태후 또한 할아버지의 여러 부인들 중 하나이니 그냥 할머니도 되는 셈입니다.

이처럼 거미줄같은 고려 왕조의 혼맥이 결정판을 이루는 것이 바로 8대 현종입니다. 현종의 아버지는 현재 출연하고 있는 경주원군 욱(대종 욱과 한자가 다릅니다. 드라마 속의 김호진). 왕건의 아들이며 제5황후인 신성황후 김씨의 소생입니다. 신성황후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촌이니 신라 왕가를 외가로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신라계 중신들이 다음 왕으로 경주원군을 밀려 하죠.

경주원군은 나중에 경종의 아내였던 효숙왕태후(헌정왕후) 황보설(그러니까 뒷날의 신애)과 정분이 나서 그 사이에서 대량원군(뒷날의 현종)을 낳습니다. 엄연한 왕비가, 그것도 자신의 숙부이며 남편의 숙부가 되는 황실의 근친과 바람을 피운 셈입니다. 그런데도 왕족의 씨앗이기 때문에 아이는 대량원군이라는 엄연한 왕자의 칭호를 받고 자라나죠. 심지어 불륜의 주범인 경주원군까지도 사후에 안종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자리를 추증받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된 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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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대의 불륜 커플... >

그러니 뒷날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천추태후 자신이 왕건의 친손녀이니 그 아들도 절반은 왕씨의 자손이니 말입니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자신의 친정 쪽으로 아예 왕가를 바꿔 놓으려 한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씨나 측천무후 무씨에 비하면 훨씬 양심적인 편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살펴볼 때 고려 초기의 왕실 계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참 곱게 잘 갈린 콩 분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나름대로 다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오늘날의 도덕관념으로 재단해서는 안되겠죠. 왕가가 사방의 귀족들로부터 권위의 위협을 받던 시절, 조금이라도 왕가의 권위와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외성 귀족들이 외척으로 참여하는 것을 심각하게 제한해야 했고, 그 결과가 이런 심각한 족내혼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시청자들의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그런 부분(예를 들면 남매간 혼인)은 살짝 가려 보려고 시도하고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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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말. 왕(주진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건룡위를 측근에 두고, 특히 그 수장인 홍림(조인성)을 총애합니다. 홍림과 왕은 이미 그냥 군신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죠. 그런 왕인 만큼 원의 공주인 왕비(송지효)와는 전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왕은 후사가 없다는 것을 명분으로 한 일부 친원파에 의해 권력 유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왕은 자신의 심복인 홍림을 왕비와 동침시켜 그 소생으로 후사를 이으려 하죠. 하지만 그 한번의 잠자리 때문에 홍림과 왕비는 이성애에 눈을 뜨고, 불안한 삼각관계가 시작되고 맙니다.

'쌍화점'이 개봉해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아무래도 개봉 전 켜켜 쌓인 화제가 이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듯 합니다. 물론 '앤티크'가 어느 정도 총알받이 역할을 해 주기도 했지만 금단의 동성애 묘사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죠. 그렇다면 이런 화제 요소를 걷어내고 본 영화 '쌍화점'은 어떤 작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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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은 치열한 치정 멜로드라마입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슬쩍 비치긴 했지만 이 영화의 구조는 왕과 홍림의 동성애 관계를 제외하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사뭇 닮아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쌍화점'의 배경이 된 고려말의 실제 역사와 이 영화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만 살펴 봤었죠.

(그 부분이 궁금하신 분은)


보스(김영철)가 심복(이병헌)에게 자신의 여자(신민아)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고, 심복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스는 엄청난 분노를 폭발시키죠. 이처럼 '쌍화점'은 굳이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라는 사실을 빼도 충분히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그 관계까지 깔려 있으니 감정의 폭발력은 말할 것도 없겠죠.

사실 '쌍화점'의 왕과 '달콤한 인생'의 보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에게 일을 맡기지만, 한편으로는 그 심복과 자신의 여자 사이에서 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복수가 폭발하는 것이죠. (이 부분에 주목하면, 과연 '쌍화점'에서 동성애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부분인가 하는 의문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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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감독의 묘사는 이 분노와 폭발의 매커니즘에서는 상당히 정교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사건의 전개나 인과관계는 전혀 맺힌 데 없이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이 영화가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엔 이 영화가 사람들의 감정에 충실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믿고 따르는 홍림에게 애정을 베풀고, 홍림은 그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서(이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죠) 동성애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래서 왕과 홍림 사이에서 절박한 연인들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홍림과 왕비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죠. 한번 치정에 눈을 뜬 두 사람이 생명의 위협과 존재의 기반을 모두 내던지고 매달릴만 한 열정이 두 사람에게서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보신 분이 있나요? 아마 이 대목에서 자신있게 '뭔가를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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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 부분에서 '쌍화점'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이 가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런 게 필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도저히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을 보여주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몸이 먼저, 마음이 나중'인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쌍화점'도 두 사람이 어쨌든 타의에 의해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두 사람이 어떻든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가 그리 설득력있어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조인성과 송지효가 영화 속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흘러야 할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보니 이야기는 슬쩍 겉으로 돕니다.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희한한 치정담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죠.

이런 이유에 대해선 조인성과 송지효의 연기력을 탓하기 보다는 유하 감독 쪽으로 책임을 돌려 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유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녀를 본 기억이 그리 선명치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한가인 정도 될텐데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단계는 '쌍화점'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죠. 이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으로서 유하 감독이 '과연 멜로드라마가 나에게 맞는 장르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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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세 배우 중에서 왕 역을 맡은 주진모의 연기가 가장 돋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가장 그대로 드러내면 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반면 감독으로부터 뭔가 세심한 터치를 부여받지 못한 조인성과 송지효는 뭔가 열심히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관객이 마음 속으로부터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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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선 여러 부분에서 '색, 계'의 영향이 짙게 느껴집니다. 물론 '색, 계' 조차도 국내외 평단으로부터는 상당한 칭찬을 받아냈지만, 일반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격정'이라는 것은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결과로 '쌍화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의 울림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그 좀 희한하고 야했던 영화' 정도로나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인성은 지금까지 시도했던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어려운 역할을 맡아 엄청나게 몰입해서 노력했습니다. 발음도 비록 '사극에 맞지 않는 목소리'라고 지적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호평받았던 '비열한 거리' 때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우 주연상은 군 제대 후로 기약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대단히 큰 각오를 했을 걸로 보이는 송지효에게 아쉬운 것은 표정입니다. 지나치게 큰 눈이 연기에 방해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송지효의 표정은 너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놀람인지, 분노인지, 체념인지 아무튼 등등등의 수많은 감정들을 모두 한가지 표정으로 정리하는 건 큰 배우가 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죠. 좀 더 자기 나이에 맞는 역할로 적응력을 높이는게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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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정신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는 간간이 삽입되는 액션 장면에서나 간신히 숨통을 터 줍니다. 물론 편집 전에는 홍림을 질투하는 승기(심지호)가 "전하, 제게도 성은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대사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극장판에서는 이 장면이 삭제되었다고 하더군요.^

기타 의상이며 고증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이런 부분은 이 영화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동성애와 원초적인 섹스 장면을 상업적 코드로 활용해 본 듯 하고, 결과는 이런 코드들이 아직 한국에서는 흥행에 플러스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p.s. 조인성 캐릭터의 성은 홍이고 이름이 림인 것이 분명한데 왜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홍림아, 홍림아' 하는 겁니까. 그럼 김범은 '김범아, 김범아'하고 불러야 하나요?





이 영화와 관련된 새로운 논점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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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에덴의 동쪽'에 나오고 있는 이다해의 모습을 2주 후면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다해가 '거짓된 연기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선언한데 이어 제작사와 방송사 측이 이다해는 40회 정도까지만 출연하는 것으로 조정을 마친 듯 합니다.

이다해와 유사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김정은이 너무 과도한 PPL 등으로 비난을 받아온 '루루공주' 출연 도중 "진심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출연할 수 없다"고 했고 '마녀유희'의 한가인이 제작진을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례들도 이다해와는 사건의 핵심적인 동기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쨌든 출연하던 작품을 끝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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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해의 글이나 주변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중도 하차를 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이다해의 역할이 당초 기획단계에서 약속된 것에 비해 너무 축소된 것이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너무도 흔했습니다.

1997년, '별은 내 가슴에'라는 드라마에서 최진실 차인표 안재욱 전도연이라는, 당시로서도 빛을 발하는 캐스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안재욱과 전도연은 아직 최고 스타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레벨이었고, 차인표와 최진실이 단연 투톱이었죠.

시놉시스 단계에서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만화 '캔디 캔디'와 똑같았습니다. 고아 출신의 여주인공 최진실이 부잣집에 들어오고, 우연히 명문가 출신으로 가수 지망생인 반항아 안재욱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죠. 물론 이 뒤에는 조용히 최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엄친아 차인표가 있습니다. 결국 안재욱은 전도연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전도연과 맺어지고 최진실은 차인표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당초의 구도였습니다. 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캔디(최진실) 테리(안재욱) 윌리엄(차인표) 스잔나(전도연)이 그대로 구현됐다는 걸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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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하자 구도가 흐트러집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톱스타 감은 아니라고 여겨졌던 안재욱은 이 드라마를 앞두고 독한 마음을 먹고, 앞머리를 늘어뜨린 순정만화형 캐릭터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여기에 당시 소녀 팬들의 열광이 쏟아진 거죠. 시청률은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치솟고, 제작진은 이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안재욱-최진실의 비중을 높입니다. 주인공이었던 차인표는 조연이 되어 갔고, 조연이었던 전도연은 단역이 되어 갔죠. 결국 결말마저도 시청자들의 뜻대로 최진실과 안재욱의 해피엔딩이 됐습니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분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인표와 전도연은 지금도 당시 드라마의 제작진과 소원한 관계입니다만 당시에도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부분은 연출진의 권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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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얘기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을 해 가면서, 시청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체크해 가면서 드라마를 만드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드라마의 결말이나 인물의 비중이 당초의 구상과 달라지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합니다. 이유도 여러가지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갑자기 비중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연출자의 판단에 따라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류의 문을 연 드라마 '가을동화'도 마찬가지. 당초 송승헌-송혜교의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악역은 송혜교와 바뀐 딸 역인 한채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인이었던 한채영은 그 역할을 감당할만한 연기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채영은 단역으로 변했고 송승헌의 애인 역으로 나왔던 한나나의 비중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왕년의 인기 드라마였던 '여인천하'에서도 강수연-전인화가 주인공으로 굳혀지는 과정에서 박상민과 김정은 등 당초 주연급으로 간주됐던 연기자들이 도중에 빠져나갔습니다. 당연히 이들 또한 자신의 역할 축소에 대한 문제로 제작진과 갈등을 빚었죠.

이처럼 배우의 비중이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커지고 작아지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그런 상황에 이다해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는 일은 대단히 드뭅니다. 이다해의 경우, 하차 문제를 놓고 제작진과 충분히 논의를 했고, '하차선언' 이전에 하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 '나 이 작품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경솔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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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현장 관계자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해도, 한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것은 그 작품이 끝날 때까지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합의한 것인데 이렇게 빠져나가 버린 건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는 입장입니다. 또 어떤 경우든 자신이 출연하던 작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 줘야 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스스로 원했든, 제작진의 선택이든 중도 하차가 그리 자랑할 일은 아닌 만큼 내놓고 얘기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은 배우와 제작진 중 누가 헤게모니를 쥐느냐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일부 연기자들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영화만 하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의 경우에도 중간에 배우의 비중이 달라지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죠.

얼마 전 '박중훈 쇼'에서 박중훈은 최진실과 함께 출연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의 에피소드를 얘기했습니다. "처음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최진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연기도 썩 잘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촬영이 진행되는 사이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광고가 떴고, 하루가 다르게 최진실이 스타가 되는 걸 느꼈다. 결국 영화가 개봉될 때 영화사는 포스터에서 아예 내(박중훈) 사진을 빼고 최진실 혼자 있는 모습을 내놨다. 기분이 나빠 항의했다"는 얘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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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다해의 문제는 결국 전작제가 실시되지 않는 상황, 즉 드라마 전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을 시작하고,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촬영을 계속해야 하는 현재의 드라마 제작 환경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방송 전에 드라마가 모두 촬영됐더라면 이렇게 문제가 될 일도 없었죠.

하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게다가 20부작도 아닌 50부작을 모두 사전제작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그리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죠. 또 어떤 배역이 축소되고 어떤 배역의 중요성이 갑자기 부각되는 것은 결국 제작진의 권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라마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제작진이죠. 이를 위해 역할을 조정하거나 아예 빼 버리는 일, 새로운 역할을 추가하는 일 등은 제작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다해의 '공개 해명'은 좀 성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 이다해가 할 수 있었던 방법은 조용히 하차하거나 묵묵히 끝까지 출연하는 것이었을텐데, 그렇게 하기에는 연기자로서의 자존심이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이다해의 가장 좋은 복수는 최대한 이 작품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에서 멋지게 성공해 '에덴의 동쪽'이 스타 이다해의 위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것이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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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용 포스팅이 보입니다. 크리스마스용 영화 관련 포스팅도 넘쳐나죠. 주관적으로 뽑은 베스트 크리스마스 무비 순위 등등. 뭐 역시 뻔합니다. '러브 액츄얼리', '세렌디피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로맨틱 홀리데이' '그린치' '007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달달한 영화들의 줄세우기죠.

그래서 약간 색다르게 구성해봤습니다. 제목은 '7편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통해 정리한 한 남자의 일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기적이 일어나 인생의 전기를 맞는 꿈을 꿉니다. 아무튼 일곱 편의 영화 속 주인공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일곱 번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어떻게 변신해가는지 살펴보자는 의도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보시면 내용을 보시면 이해가 갈 겁니다. 자, 그럼 첫번째 영화부터 시작합니다.



1.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Tokyo Godfather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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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제목은 이렇지만,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에겐 '도쿄 갓파더스', 혹은 '도쿄 대부'로 더 익숙한 작품입니다. 콘 사토시 감독의 2003년작이며 초강추작입니다.

존 웨인 주연의 1947년작 '3 Godfathers'의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작은 황야에 버려진 아기 하나를 발견한 세 명의 무법자가 어찌 어찌 하다가 자기 목숨을 버려 가면서 아기를 보호한다는 내용으로 저도 어렸을 적 TV에서만 본 작품입니다.

콘 사토시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까칠한 노숙자, 은퇴한 게이, 가출 십대 소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고 친부모를 찾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감동, 웃음, 액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걸작입니다.

...뭐 이런 얘기가 전부가 아니고, 아무튼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 고해라는 걸 깨달은 셈입니다.



2. 나홀로 집에(Home Alone,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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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애정이 없는 영화입니다. 참고로 저는 '톰과 제리' 보면서도 톰을 응원한 사람입니다. 매컬리 컬킨 같은 꼬마를 보면 그냥...

...아무튼 우리의 주인공은 갓 태어났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집에 도둑이 들면 울거나, 오줌을 싸거나, 도망치거나 하겠지만 이 당돌한 소년은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대항합니다. 영화니 망정이지 실제 상황이었다면 도둑들은 화상으로 죽고, 맞아 죽고, 계단에서 굴러 목 부러져 죽고, 못 밟아 죽고, 과다출혈로 죽고, 이 소년은 어린 나이에 찰리 맨슨의 후계자로 위키피디아에 등재됐을 지도 모릅니다.

어째 다음 영화로 '양들의 침묵'이 나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이 소년의 폭력성(!)은 약 30년  동안 잠잠하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살아납니다.




3. 패밀리 맨 (Family Man,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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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밖에 모르는 월가의 거물 니콜라스 케이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사랑하던 여인 티아 레오니와 헤어지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고 꿈을 꾼 뒤 인생의 의미를 찾는 내용입니다. 수전노 스크루지가 꿈을 꾸고 나서 새 삶을 찾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패러디죠.

사실 제가 독신이던 시절, 이 영화는 꽤나 가슴을 무겁게 했습니다. 라디오 출연때 이 얘기를 했더니 황정민 아나운서 왈, "내가 아는 독신남 하나는 지난 10년간 크리스마스 때마다 케이블 채널에서 이 영화를 보고, 볼 때마다 운다더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이 영화엔 남자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의 첫 시퀀스입니다. 하룻밤 파트너 아가씨에게 "오늘 저녁에도 만날까?" 했다가 "뉴저지에 사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 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라는 말에 머쓱해진 니콜라스 선생. 괜히 파바로티가 부르는 '여자의 마음(La Donna Mobile)'를 100평짜리 아파트에 쩌렁쩌렁 울려퍼지게 틀어 놓고 팔까지 휘저으며 따라 부릅니다. 남자들은 압니다. 본능적으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지극히 성공지향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해서 바람둥이가 되고, 꿈을 꿔서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지만(영화의 결말과는 조금 다르게) 결국 다시 혼자가 됩니다. 그래서...?




4. 러브 어페어(An Affair to remember 1957, Love Affair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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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그란트-데보라 카, 워렌 비티-아네트 베닝 두 번의 커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자고. - 자연스럽게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과 연결되는 전설적인 멜로 영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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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남자가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자를 우연히 만나, '우리의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6개월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나오지 않고... 평생을 갈 것 같던 오해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아름답게 다시 태어납니다.

아마도 현대 관객들에게는 1994년판의 비티와 베닝이 더 취향에 맞겠지만, 그 원작의 아름다움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아, 물론 보진 못했지만 프랑스 영화인 진짜 오리지널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데보라 카가 불렀던 'Our Love Affair'를 조쉬 그로번이 부릅니다. 원곡을 알건 모르건, 이 목소리와 이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남자의 인생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듯 하지만 그 다음 영화는...?



5. 다이 하드(Die Hard,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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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랑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여자는 남자가 있는 뉴욕을 떠나 LA로 일하러 가버립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아내를 만나러 LA에 간 남자는 아내가 있는 건물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점거되는 광경을 목격하죠.

어쩌겠습니까. 아내를 구해야죠. 그런데 신기한 건 자신이 이런 상황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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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그가 어린 시절, '나홀로 집에' 있을 때 저질렀던 그 잔혹한 만행들을. 그 꼬마가 커서 이제는 힘과 경험, 총기 사용법까지 익혔으니 그저 상대 테러범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몇년 뒤, 공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홀로 집에'를 보지 못한 악당들은 너무도 가련하게 시체조차 찾기 힘든 죽음을 맞습니다. 또 다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몇 차례나 테러의 위협을 물리쳐 영웅이 된 남자는 정계로 진출합니다.



6.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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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유쾌했던 건 영국 총리가 된 휴 그랜트가 비서를 유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워킹 타이틀=휴 그랜트라고 불려도 좋을 만한 그의 명 연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테러를 진압하더니 갑자기 웬 영국 총리냐고 항의하시는 분들, 네. 그 분들을 위해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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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인공, 미국 대통령 빌리 밥 손튼이 되어 영국 총리가 눈독 들이고 있던 비서에게 추근댑니다. 그 결과가 미국에 대항하는 영국의 자주 정책(?)으로 나타나죠. 뭐 어느 쪽이면 어떻습니까. 아무튼 정치를 하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총리 관저에서 '미국 대통령에 맞선 용감한 총리'라는 라디오 방송의 칭찬을 듣던 휴 그랜트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노래는 포인터 시스터즈의 올드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걸즈 얼라우드의 'Jump'.





7. 34번가의 기적  (Miracle on 34th Street 1947, 197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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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는 실제로 존재할까요? 영악한 아이들은 일찍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은 꽤 믿는 편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미국의 수많은 백화점들이며 각종 기구에서 '아르바이트 산타클로스'를 고용하죠. 할일없는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를 주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를 진짜 산타라고 믿는 소녀, 소녀를 위해 진짜 산타임을 고집하는 노인, 그러다 이 노인이 법적으로 자신이 산타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선의를 가진 어른들이 노인을 도우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세 편의 영화가 있지만 아무래도 우체국 두 남자의 장난(?)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오리지널 1947년판의 문제 해결 방식이 가장 유쾌하고 인상적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 대통령직(총리직...?)도 말아 먹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걸 반성하고 아르바이트 산타로서의 직무에 충실해집니다. 마지막에나마 세상에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말이죠.

이렇게 해서 이 남자의 인생에도 마지막으로 평화가 찾아옵니다.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10년에 한번 꼴로 인생이 변하는 남자라니. 하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만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기대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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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영화의 제목 짓는 기술이 영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과속스캔들'도 제목만 잘 지었다면 훨씬 더 히트했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데 이어 '달콤한 거짓말'도 어쩐지 이 너무나 평범한 제목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가장 핵심적인 정보는 '박진희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예고편은 박진희가 거짓말을 해서 여러 남자를 농락하는 여자인 양 그려져 있습니다. 상세한 줄거리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어쨌든, 제목의 '거짓말'과 상승작용을 하면서 뭔가 너무나 뻔한 영화인 듯한 느낌을 주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심한 영화 취급하기엔 '달콤한 거짓말'은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특히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중 가장 여주인공의 비중이 큰 영화의 주역을 맡은 박진희의 열연이 빛을 발하는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박진희는 그럴 자격이 있는 배우라는 걸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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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버릇이 꽤 고약한데다 맡은 방송마다 조기종영하기 일쑤인 노처녀 방송작가 지호(박진희, 그래 봐야 스물아홉 서른 정도의 나이입니다)는 어릴 적부터 남자와는 낭만적인 첫 만남으로 한 눈에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릴 적 고교 1년 선배인 민우(이기우)에 대한 짝사랑이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아 있죠.

그런 그가 어느날 소매치기를 쫓아 달려가다 외제차에 부딪힙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 그리고 자신을 들이받은 차의 운전자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민우라는 걸 알게 됩니다. 물론 짝사랑이었으므로 민우는 지호를 절대 알아보지 못하죠. 민우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어 가기 위해 지호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자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기억상실증을 가장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통해 민우의 집에 들어앉게 된 지호는 우연히 민우의 이상형이 현모양처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갖은 내숭으로 민우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본색을 너무나 잘 아는 고교동창 동식(조한선)의 등장으로 지호의 사기극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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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배경을 읽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게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많은 사건들이 대부분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 듯도 하지만, 설정을 잘 살펴 보면 어떻게든 아귀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민우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지호가 우연히 동식을 만나 위기를 맞곤 하는 것도 지나친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세 주인공이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고, 그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세 주인공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지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 은숙(최은주)이나 민우의 친구이자 옛날 은숙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한상(조진웅)이 모두 고교 동문이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추억의 공간이 모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한 동네이며 함께 소풍을 가곤 했던 동물원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죠. 아울러 양자강이라는 동네 중국집도 여전히 영업중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보시면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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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코미디 영화인 만큼 가끔씩 개연성의 벽을 슬쩍 넘으려 드는 '달콤한 거짓말'을 안정시키는 절대적인 요소는 박진희입니다. 한국 영화의 신화 중 하나인 '여고괴담' 첫편이 벌써 10년 전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만큼 빨리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 배우는 어느 감독이라도 욕심낼 만큼 탄탄한 연기력으로 자신을 관리해왔습니다. 쉽게 빠질 수도 있었던 '글래머 여배우'의 길과는 다른 성실한 노선을 걸어 온 거죠.

최근 들어 '돌아와요 순애씨'나 '쩐의 전쟁'같은 드라마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둬 왔지만 불행히도 스크린에서는 데뷔작 '여고괴담'만큼 주목받거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의 기대작 '궁녀'에서도 훌륭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본이 박진희의 열연을 묻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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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달콤한 거짓말'은 그야말로 박진희의 원맨쇼입니다. 관객들은 박진희가 가는 길로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두 남자 상대역은 아직까지는 '연기 멀었음'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젊은 배우들이죠. 이기우도 조한선도 키 크고 허우대 좋지만 한 사람의 배우로 평가받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진희의 분전은 정말 눈부십니다. 몸을 날려 차를 들이받는 건 기본이고, 코미디의 기본 요소인 순간적인 표정 변화와 적절한 망가짐이 이 배우가 일정 수위 이상의 내공을 확보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안타까움이 있다면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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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배우 중에는 조한선의 캐릭터가 좀 더 유리합니다. 그저 멋진 척만 하면 되는 이기우에 비해 조한선은 확실한 변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죠. 동식이란 인물은 뜯어 놓고 보면 복잡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말이나 찍찍 내뱉고 패션이라곤 트레이닝복이 제격인 껄렁한 '동네 형'의 분위기인데 의외로 착실한 살림꾼이고 마음 씀씀이도 깊은 데다 정도 깊습니다. 나름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동식에게 있어 최고의 장면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패러디 신입니다(역시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기준으로 조한선의 연기를 평가한다면... 한 75점 정도는 줘도 될 듯 합니다. 슬슬 이 친구에게도 배우의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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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거짓말'의 가장 큰 미덕은 코미디를 위해 배치한 사소한 요소들이 제몫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 큰 역이라고 볼 수 없는 지호 동생 역의 김동욱, PD 역의 김광규나 AD 역의 개그맨 정성호, 그리고 제법 중요한 역할인 양자강 맨 정재용은 큰 욕심 없이 자기 몫을 다 합니다. 모든 배우가 홈런을 치려고 달려들다 망하는 실패한 코미디 영화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입니다.

'달콤한 거짓말'을 전체적으로 봐도 이 영화는 '두 시간 이내에 최대한 웃긴다'는 코미디 영화의 미덕을 한껏 발휘한 작품입니다. 무슨 대단한 교훈을 주겠다는 야심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엔딩은 - 물론 무슨 반전이 있는 듯도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이죠 - 나름 따듯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실한 제목인 '달콤한 거짓말'에 비하면 훨씬 속이 알찬 영화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코미디의 수작이라는 말은 아깝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제목이 주는 거부감을 누르고 표를 살지에 달려 있다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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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가장 박진희의 매력이 빛나는 장면은:
지호: 그럼 민우씨가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민우: 거짓말하는 사람이요.

p.s.2. 영화 도입부와 뒷부분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참 의이한 부분입니다. 만약 영화가 진행 순서대로 촬영됐다면, 정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s.3. 이승환의 '좋은날'이 나옵니다. 공식 주제곡은 리메이크 버전이지만 역시 원곡을 따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맛뵈기로 살짝 들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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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독사'와 '독사2'가 만났습니다. 현재 방송중인 MBC TV '종합병원2'에는 류승수가 악명 높은 치프 레지던트로 나옵니다. 쌍꺼풀 없는 쭉 찢어진 눈에 우락부락한 생김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후배들을 단련시키는 '독사' 역할은 류승수에게 딱 어울립니다. '종합병원2'가 어떻게 끝나든 류승수에겐 남는 게 있을 법 합니다.

오래된 시청자들은 이 '독사' 캐릭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바로 원조 '종합병원'에 나왔던 오욱철의 캐릭터였죠. 오욱철의 매서운 눈매와 고문 앞에 이재룡 신은경 등 당시의 젊은 레지던트들은 모두 벌벌 떨었습니다. 특히 권위와 관행에 얽매이지 않으려던 주인공 이재룡은 독사에게 '찍혀' 고난의 나날을 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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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병원'의 인기에는 바로 이 독사 캐릭터가 큰 몫을 했습니다. 며느리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드라마의 인기를 주도하듯 한 거죠. '대장금'으로 대입하면 이재룡이 장금이, 오욱철이 최상궁 정도 됐으려나요. 그런데 18일 방송에 오욱철이 등장하면서 '원조 독사'와 '현재의 독사'가 만났습니다. '종합병원'의 역사를 생각하면 사뭇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독사도 독사 나름입니다. 후배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되라고 갈구는' 선배와 '죽이려고 드는' 선배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독사라고 불렸다 해도 메디컬 드라마의 단골 캐릭터인 치프 레지던트(레지던트들의 기강과 훈육을 담당)는 분명 전자에 해당하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주인공이 최고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메디컬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이런 캐릭터는 쉽게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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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실미도'의 허준호. 부대원들을 악마처럼 굴리는 조중사 역이었죠. 하지만 마지막에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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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오래 된 영화지만 '사관과 신사'의 루이스 고세트 주니어입니다. 해군 비행학교 사관생도 리처드 기어를 악랄하게 못 살게 구는 교육 담당 하사관 역이죠. 이 연기로 82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그 역시 매끝에 정든다는 속담을 구현하기라도 하듯 마지막에는 리처드 기어와 서로 인간적인 교감을 보여줍니다. 이 대사가 지금도 생각나는군요. 마침내 역경을 딛고 장교가 된 리처드 기어. 이제 상관이 된 기어에게 고세트 주니어가 "Sir"라고 부르며 경례를 합니다. 그리곤 그동안 고마웠다는 듯 닭살스러운 말을 하려는 기어에게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이죠. "빨리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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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 제인'의 비고 모텐슨은 독사이기도 하면서 너무 처음부터 데미 무어에게 동정적인 모습을 보여줘 진정한 독사로서의 순도는 떨어집니다. 아무튼 기억에 남는 독사 캐릭터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드라마의 공식 속에서 독사는 끝까지 독사로 남으면 안 되죠. 어느 시점에선가는 '그게 다 너 잘 되라고 그런 거였어'라는 식의 해소가 필요합니다. 뭐 너무 당연한 일이라 드라마의 흐름상 이런 장면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다소 단순한 시청자들을 고려하고, 또 독사 캐릭터를 맡았던 배우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이런 장면은 반드시 들어가는게 좋겠죠.^

기자들도 초년병일 때에는 거의 모두 독사같은 선배를 경험합니다. 그 선배가 좋은 기억으로 남는지, 아니면 끝까지 '인간 말종'으로 기억되는지는 결국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칼자루를 바꿔 잡고 보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없어도 어쨌든 어리버리한 후배들을 보면 목소리가 커 지는게 선배들의 인지상정인 것 같더군요. 물론 소리만 질러서 될 일도 아니죠. 적당히 조이고, 적당히 풀어주는 게 선배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너무나 심하게 '쪼아 대는' 선배 때문에 고민하는 후배들에게는 이런 말로 슬쩍 넘어가곤 합니다. '탄소를 다이아몬드로 바꿔 놓는 건 엄청난 압력'이라고. 아무튼 요즘 고민 많은 '종합병원 2'에 '돌아온 독사' 오욱철이 어떤 영향을 줄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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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각양각색입니다. 주인공을 보고 고르는 사람(통계에 따르면 모든 조건 중에서 남자 주인공을 기준으로 고르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감독을 보고 고르는 사람, 또는 특정 제작사(예를 들자면 전성기의 골든 하베스트나 워킹 타이틀)의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 등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제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은, 실망하든 만족하든 '돈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어쨌든 보고 나서 말을 해야 하는' 감독에 속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이 그렇듯 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벼랑 위의 포뇨'가 18일 국내에서도 개봉됩니다. 2004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4년만이지만, '하울'은 원작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야자키의 오리지날 스토리로 된 작품은 2001년의 '센과 치히로의 모험' 이후 7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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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간단한 줄거리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다섯살 소년 소스케는 벼랑 위의 집에서 선장인 아버지 고이치, 양로원에서 일하는 엄마 리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바닷가에서 놀던 소스케는 사람의 얼굴을 한 빨간색 붕어 한마리를 발견하고, 포뇨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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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히로가 성장한 듯한 씩씩한 엄마 리사)

하지만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는 인간 세상이 싫어 바다에서 살기로 결심한 마법사. 후지모토는 갖은 수단을 다해 포뇨를 바다로 다시 데려옵니다. 하지만 포뇨는 육지로 나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죠. 결국 포뇨는 수많은 동생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실험실에 침투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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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의 아빠인 마법사 후지모토)

'벼랑 위의 포뇨'는 한폭의 예쁜 동화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은 작품입니다. 그만치 어린 관객들을 의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띕니다. 예쁜 화면, 너무나도 앙증맞고 귀여운 캐릭터, 동화적인 전개 방식과 일체의 비극이나 희생을 배제한 플롯 등등이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위한 맞춤형 작품으로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또 작품을 볼작시면 은근히 미야자키 선생이 뿌려 놓은 떡밥이 눈길을 끕니다. 그냥 그림만 보기에 심심한 어른 관객들을 위해 생각할 거리를 주자는 심산이겠죠. 뭐 당연히 이 작품의 포스터만 봐도 생각나는 '인어공주'나 '니모를 찾아서'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인어공주'의 막내 공주는 다리가 생긴 뒤에도 땅을 밟을 때마다 면도칼 위를 걷는 고통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포뇨는 착한 제작자를 만난 덕분에 아무 통증 없이 땅 위를 달립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신의 장녀(포뇨)를 브륀힐데라고 부릅니다. 딸이 브륀힐데 라면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동적으로 보탄(오딘)이 되고, 그 수많은 일본 명란젓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꼬마 동생들은 발퀴레가 되는 거죠. 네. '벼랑 위의 포뇨'와 '니벨룽의 반지' 사이에는 제법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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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의 동생들, 왠지 다음 사진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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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명란젓 광고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


이런 관계에 대한 추정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생명의 물을 마신 포뇨가 거대한 물고기로 변한 동생들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수면을 향해 솟구칠 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유명한 '발퀴레의 기행'과 아주 흡사한 연주곡이 울려퍼집니다. 변주곡이라고 해야 할지도.

푸르트벵글러의 기악곡 버전 '발퀴레의 기행'입니다. 본래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중 2부에 해당하는 '발퀴레' 3막에 나오는 곡인데, 여기서는 발퀴레 역을 맡은 소프라노들의 목소리가 빠져 있습니다. 뭐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신 분이라면 너무나 귀에 익었을 곡이죠.



 
바그너의 장대한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근간이 되는 '니벨룽의 노래' 신화에 비쳐 보면 소스케 역시 지그프리트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죠. 브륀힐데는 아버지인 주신 보탄의 명을 어긴 죄로 봉인당하고, 난관을 돌파하고 그녀를 찾아올 만한 영웅을 만날 때까지 잠자는 신세가 되죠.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후지모토는 포뇨를 공기방울 안에 가둬 둘의 만남을 방해하지만, 결국 포뇨의 엄마인 바다의 여신의 뜻에 따라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듯 하여 색깔로 가려 놓겠습니다. 감수하고 보실 분이나, 이미 영화를 보신 분만 보시기 바랍니다. 마우스로 긁으면 글자가 보입니다.)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4부 제목은 '신들의 황혼'입니다. 이 '황혼'은 북구 신화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라그나로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를 일궈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신화에서 주인공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는 비극적인 운명을 마치고, 그것이 신화의 종결을 상징하지만 포뇨와 소스케는 행복한 결합을 통해, 바다의 힘으로 인간들의 문명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아버지 후지모토로부터 인류 문명을 보호합니다. 어쨌든 '인류 문명의 재개'를 뜻한다는 의미는 통한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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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란맘마레)

포뇨의 엄마 이름은 '그란맘마레'라고 되어 있죠. Grandmom와 프랑스어로 바다를 뜻하는 mare의 합성어입니다. '바다 할머니' 정도가 되겠군요. 대강 봐도 농경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서 숭상해온 대지의 여신(大母神, Magna Mater)의 해양판에 해당하는 바다의 여신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바다의 주신을 여신으로 설정한 신화는 그리 접해보지 못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소스케의 아빠 고이치가 탄 배의 선원들에겐 '관세음보살'로 보이죠.

어른 관객들에게는 소스케와 포뇨가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활짝 열려있는 진행형이긴 합니다만, 미야자키 선생은 두 어린아이가 기존의 주인공들처럼 어려움을 겪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듯 합니다.

아무튼 일본에서도 이 작품은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어린이들은 미칠듯이 좋아했지만 어른들은 '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뒤로 갈수록 너무나 단순해지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플롯 상의 문제들(대체 왜 소스케 엄마와 포뇨 엄마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밀담을 나눠야 하는지 등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돼기도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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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심심해서 해 본 짓이지만, 사실 '벼랑 위의 포뇨'같은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저런 신화와 연관을 지어 보는 건 상당히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스크린에 지나가는 곱고 귀여운 형상들을 보면서 가벼운 유머에 미소지으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혹시 옆에 앉아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이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요? '벼랑 위의 포뇨'에서 받을 만한 메시지라면 이미 수십년 전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의 토토로'에서 충분히 다 받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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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야자키는 소스케 캐릭터에 대해 "아들 고로가 다섯살 때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 고로'가 바로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게드 전기'의 감독이죠.

주제가, 마냥 신납니다.^^ 정말 중독성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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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화제의 영화 '쌍화점'이 공개됐습니다. 예상을 뛰어 넘는 신체 노출과 자극적인 장면들이 일단 눈길을 끄는 가운데 보는 사람을 압박하는 긴장감에서는 일단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잘 봤지만, 자세한 리뷰는 일단 뒤로 미루겠습니다. 아직 개봉이 열흘 넘게 남은 터라.^^)

영화 '쌍화점'을 보면 막연히 이 이야기가 고려 공민왕 대의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과연 실제 역사와 얼마나 흡사한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과연 영화 '쌍화점'은 얼마나 실제 역사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거의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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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은 왕(주진모)이 자신이 사랑하는 건룡위 수장 홍림(조인성)에게 왕비(송지효)와 동침하라고 명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왕명을 따랐을 뿐인 홍림과 왕비는 점차 이성간의 사랑에 눈뜨고, 이들의 격정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공민왕은 1351년 왕위에 오릅니다. 실제로 긍정적인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왕입니다. 우선 강도(강화도)를 나와 원에 입조한 이후 고려의 왕은 조-종의 칭호를 쓰지 못하고 왕으로 강등된데다 반드시 몽고 공주들과 혼인을 해 부마가 되어야 했고, 왕호 앞에 반드시 '충'자를 넣게 되어 있었죠. 충숙왕, 충혜왕, 충선왕 등이 그 예입니다. 공민왕은 굴욕의 '충'자를 떼낼 수 있을 만큼 자주적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당 현종의 치세가 성군으로 꼽히던 전기와 당 멸망의 근거를 가져온 후기로 선명하게 갈리듯, 공민왕의 치세도 전기와 후기로 정확하게 갈립니다. 친원파 귀족들을 척살하고 북방 영토를 회복하며 홍건적을 물리치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였던 공민왕은 1365년, 금슬이 유달리 좋았던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고 이때부터 신돈이 권력을 쥐어 고려말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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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년, 신돈 마저도 반역죄로 척살되고(드라마 '신돈'에서 보듯 기득권 귀족들의 반발이라는 설도 유력합니다), 세상 일에 흥미가 없어진 공민왕은 1372년 명문 자제들 중 용모가 아름다운 자들을 골라 자제위(子弟衛)를 궁안에 두게 됩니다. 이때부터 공민왕의 동성애설이 세상에 퍼지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쇼. 궁 안에 거주하는 남자는 본래 왕 하나뿐인게 정상입니다. 나머지 남자는 모두 내시들 뿐이죠. 그런데 궁녀와 후궁들이 득시글거리는 궁 안에 미남 청년들을 풀어놓았으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궁 안의 풍기가 문란해진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결국 자제위의 하나인 홍륜(洪倫)이 노국공주 사후 맞아들인 익비를 임신시킵니다. 내시 최만생이 이를 공민왕에게 밀고하자 공민왕은 대노하여 사실을 아는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고 입을 막으려 합니다. 이를 눈치챈 최만생은 오히려 홍륜과 결탁해 먼저 공민왕을 암살하죠. (일설에 따르면 동침 자체가 왕의 생각이었지만, 왕실의 안정을 위해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려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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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이미 1363년 흥왕사에서 김용의 자객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었지만 내시 안도치가 대신 칼을 맞은 덕분에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운이 미치지 못했죠. 물론 왕을 살해한 자들도 사후 처리가 미숙했던 바람에 최영과 경복흥 등에 의해 모두 참살당하고 맙니다.

이상은 '고려사'의 기록입니다. 공민왕 사후 우왕-창왕-공양왕으로 세 왕이 더 왕위에 오르지만 사실상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고려조는 끝을 봅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사가들은 공민왕의 동성애나 신돈과의 어지러운 이야기 등은 모두 조선 왕조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건국 세력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아무튼 이쯤 되면 '쌍화점'의 중요한 스토리는 거의 대부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어찌 보면 홍륜을 홍림으로 바꿔 놓았을 뿐 역사와 거의 똑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홍륜과 공민왕의 로맨스 같은 것은 역사책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죠.

공민왕은 정치와 군사에도 훌륭한 자질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사극의 주인공이 될만한 자격을 갖춘 왕이죠. 그의 그림 천산대렵도는 이 영화에도 등장합니다. 물론 - 영화 속의 그림은 종이에 그려지지만 현재 남은 천산대렵도는 비단에 그려진 것이란 차이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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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현재 남은 천산대렵도가 길게 찢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그 그림이 대체 왜 찢어져 있는지도 아마 아시게 되겠죠. 그렇게 따지면 '쌍화점'은 실제 역사와 아귀를 맞추기 위해 대단히 많이 노력한 영화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쌍화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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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쌍화점'의 이야기는 아서 왕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위대한 왕인 아서는 왕비 기네비어가 자신의 오른팔인 랜슬로트와 사랑에 빠지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질투로 타락해갑니다. 그리고 위 장면은 뭔가 이 스토리와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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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서와 랜슬롯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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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달콤한 인생'의 강사장과 김실장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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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재료를 다 넣어 봅니다. 최고급 꽃등심에 싱싱한 전복, 참치 뱃살과 캐나다산 바닷가재를 전부 한 남비에 넣었습니다. 각각 먹어도 맛있는 재료들이니 한꺼번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최고의 요리가 나올까요? 불행히도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트로픽 썬더'의 진용은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벤 스틸러가 연기파로 변신하려는 액션 스타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를 위해선 성형수술도 불사하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잭 블랙이 진지한 연기파로 변신하려는 악동 코미디언으로 나옵니다. 여기에 톰 크루즈, 닉 놀테, 매튜 매커너히가 조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가 과연 재미 없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를 따진다는게 별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아래 내용 중에 스포일러가 있다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이 영화의 예고편에도 다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래도 꺼려지시는 분은 여기서 멈추시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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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서너개의 예고편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극중 스타들의 주요 경력이 지나가는 거죠. 터크 스피드맨(벤 스틸러)은 5편까지 속편이 나온 액션 영웅 시리즈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지만 최근 하락세인 액션 스타입니다. 아카데미상을 노리고 발달장애 연기에 도전한 '바보 잭(Simple Jack)'역시 엄청난 혹평을 듣죠.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이번엔 월남전 당시의 실화를 다룬 대작 영화 '트로픽 썬더'로 재기를 노립니다.

'트로픽 썬더'는 월남전 영웅 포리프 테이벡(닉 놀테)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스피드맨은 포리프 역을 맡고, 상대역인 흑인 오시리스 역으로 아카데미상 5회 수상을 자랑하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 커크 라자러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기용합니다. '한번 어떤 역할을 맡으면 DVD의 코멘터리를 녹음할 때까지 그 역할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라자러스는 흑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피부색을 바꾸는 수술까지 감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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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뚱뚱이 가족 코미디로 인기를 끈 악동 배우 제프 포트노이(잭 블랙), 마초 이미지의 흑인 래퍼 겸 배우 알파 치노(알 파치노가 아닙니다^^, 브랜든 T 잭슨), 신인급 배우 케빈 선더스키(제이 버루철)이 합류합니다.

하지만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한 이들 톱스타들은 젊은 영국인 감독 콕번(스티브 쿠건)으로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게 곧 드러납니다. 당장 영화사 사장인 레스 그로스맨(톰 크루즈)에게 끌려가 혼쭐이 나는 콕번에게 원작자 포리프는 약간 정신나간 아이디어를 줍니다. "엉망진창인 배우들을 위험한 실제 정글에 내던지고, 곳곳에 설치된 몰래 카메라를 동원해 영화로 만들라"는 것이죠. 하지만 베트남 정글 속에 수없이 남은 지뢰, 마약밀매집단의 게릴라, 정글 속의 지독한 날씨가 개입되면서 영화는 이들이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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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정도까지 소개해도 영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기대가 만발합니다. 정말 기발한 설정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만족한 관객들은 많이 잡아야 20%, 냉정하게 보면 10%를 넘지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한국과 미국식 코미디의 온도 차이입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코미디는 (1) 바보 흉내로 웃기려는 코미디, (2) 넘어지는 걸로 웃기는 코미디가 되었습니다. 영구 심형래와 맹구 이창훈 이후 바보 흉내로 성공한 코미디언이 없다는 게 방증입니다. '개그 콘서트'의 박준형이나 김대희가 살짝 시도를 했지만 그건 전체 코미디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 성공적이지도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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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덤 앤 더머'류의 코미디가 상당히 중요한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벤 스틸러의 특기인 화장실 유머가 결합되면 할리우드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물론 이 계열의 코미디로 한국에서도 패럴리 형제와 벤 스틸러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가 꽤 히트한 적이 있죠. (사실 저는 이 영화가 전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똥으로 웃기는 코미디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영화 초반에 잭 블랙이 보여주는 1인 6역(7역인가요?)의 코미디 역시 한국인의 유머감각에는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너티 프로페서' 역시 한국에선 그리 히트하지 못했죠. 이 영화의 '필살기'라고 여겨지는 톰 크루즈의 엉덩이 춤 역시 '분장하는데 꽤 애썼구나' 이상의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웃음 포인트를 생각하면 장동건이 대머리 분장을 하고 나와서 춤을 춰도, '...애 썼다' 이상의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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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트로픽 썬더'류의 영화에서 배우들이 따발총처럼 쏴대는 욕설과 풍자를 몇 줄의 자막으로 옮겨놓는다는 건 대단한 무리입니다. 배우들이 한 줄 정도로 읊어대는 문장도 그 배경과 왜 웃기는지의 포인트를 설명하려면 세 줄, 네 줄이 넘어가야 할테니까요.

또 미국 관객들에겐 백인 배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흑인으로 변신해 사용하는 '흑인 영어', 그리고 백인이 흑인 흉내를 내는 것이 불만인 알파 치노 역의 브랜든 T 잭슨과 벌이는 실랑이가 그 자체로서 훌륭한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 한국 관객(물론 저 포함입니다)에겐 똑같이 영어 쓰는 놈들끼리 쑈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관객들을 위해 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벤 스틸러가 잇달아 시도하는 '플래툰' '람보2'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패러디 정도입니다. 잭 블랙은 이 영화에서 전혀 코미디를 주도하지 못하고, 그냥 짜증 내는 뚱보 역일 뿐입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전혀 웃지 않는 표정으로 로버트 드 니로나 말론 브란도를 형상화한 듯한 '약간 미친 듯한 연기파 배우'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영화광이 아니라면 전혀 먹히지 않을 코미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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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픽 썬더'는 한마디로 코미디에 대단히 관대한 미국 관객들을 위한, A급 배우들이 B급을 표방하고 만든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내수에 초점을 기울이다 보니 수출용 상품으로서의 매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죠. 미국에서 8월13일 처음 공개돼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한 영화가 한국에선 12월11일에서야 개봉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나 유학, 사업을 앞두고 자신이 얼마나 미국식 정서에 적응했는지를 테스트해 볼 분이라면 적극 추천합니다. 단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스쿨 오브 락' - '아이언 맨'을 재미있게 봤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하시는 분이라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단단한 각오란, 아무런 기대 없이, 마음을 비우는 걸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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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닉 놀테와 매튜 매커너히는 오히려 꽤 웃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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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이 마침내 막바지로 치달았습니다. 마지막회를 남겨 둔 상태에서 소설 원작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사대결, 즉 그림 대결 장면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방송계에서는 '경합이나 대결이 나오지 않으면 사극이 아니다'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대결'의 미학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한방의학 드라마 '허준'에서는 살아있는 닭의 몸에 아홉개씩의 침을 놓는 구침지희가 나왔고, '대장금'에선 끊이지 않는 후계자 선발이 열렸죠. '주몽'에서는 태자 자리를 놓고 세 왕자가 경합을 벌였고, '이산'에서는 그리 중요하진 않았지만 송연(한지민)이 화사경합에 참가해 기량을 겨뤘습니다.

하지만 '바람의 화원'에서의 화사경합은 '이산'에서의 경합과는 중량감이 다릅니다. 참가자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인 단원과 혜원이었기 때문이죠. 사극의 거장 이병훈 PD마저도 '그림 대결에서의 박진감 묘사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던 화사경합을 '바람의 화원'은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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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바람의 화원' 전체의 공과를 떠나 3일 방송된 화사대결은 한국 드라마에 남을 명장면 중 하나로 꼽을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화사대결을 위해 지난 몇회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던 드라마의 지지부진한 진행은 비판받아도 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작 소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조년은 정향과 윤복의 관계에 대한 질투로 사제간의 화사 대결을 벌이게 만듭니다. 이 부분에서 동기가 좀 납득이 안 가는 부분도 있고, 뭐하러 이런 짓을 벌이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시청자들은 최고의 가상 대결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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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결에 등장하는 그림은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와 김홍도의 '씨름도'. 두 사람은 김조년의 발제에 따라 '쟁투'라는 주제에 맞는 그림을 각각 그려 제출합니다...라는 것은 물론 작품의 설정입니다.

실제로 이런 대결이 있었다는 근거도, 두 그림이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근거도 실제로는 전혀 없죠. 다만 '대결'을 소재로 한 두 작가의 작품을 갖고 이런 설정을 만들어 낸 이정명 작가의 상상력은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쌍검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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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씨름도입니다. 두 그림 모두 너무나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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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도에서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바로 이 화사대결의 승부를 가를 수 있었던 김홍도의 '왼손 오른손 실수' 장면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어 있지요.

알고 보면 유명 화가들도 이런 실수를 한다고 합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도 그런 실수가 있다는군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1/12/2007111200050.html

드라마에서는 이 실수가 김홍도의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살짝 풍깁니다. 또 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김홍도는 황혼을 이용하죠. 황토색과 주황색을 주로 쓴 이 씨름도가 황혼녘의 햇살을 받으면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황토색 위주의 채색이 쓰인 것은 김홍도가 사실은 색맹이었다는 역사적으로 아무 근거 없는 설정과 맞물린 것입니다.

사실 김홍도는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또 있습니다. 바로 아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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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동도'에서도 오른쪽 아래에 앉은 악공의 손이 거꾸로 그려져 있습니다. 저 각도로도 악기를 잡을 수는 있지만, 연주를 할 수는 없겠죠.

아무튼, 장태유 PD의 사설을 풀어가는 솜씨는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화사 대결을 묘사한 손길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특히 씨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김홍도가 정지 상태의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장면이나 두 기생의 실제 검무 장면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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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원작에 나와 있는 두 그림의 숫자 균형 중 '쌍검대무'쪽의 7+2+7(그림의 상단, 중단, 하단의 사람 수)만을 살리고, 씨름도의 숫자 균형을 다루지 않은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이날 방송이 55분여만에 끝난 걸 봐선 편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기도 하고...

보충 설명하자면 김홍도의 '씨름도'의 사람 수 배치는 좌측 상단에 8명, 우측 상단에 5명, 중앙에 2명, 좌측 하단에 5명, 우측 하단에 2명씩입니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대각선을 그어 놓고 보면, 정확한 대칭이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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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선을 따라서 배치된 사람 수는 12명, 그리고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대각선을 그어 봐도 12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숫자의 배열을 보면 불균형 속의 균형이 보입니다. 이런 계산이 다 되고 나서 비로소 '거장 김홍도'가 그려 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대결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 주고 있을까요. 소설이든 드라마든, 두 사람의 대결은 무승부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무승부란 신윤복의 승리라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지난번에도 한번 얘기했듯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대화원 김홍도에 맞서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화원 신윤복이 그 시대를 넘어 지금에 와서 동등하게 평가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관련글은 아래 링크 참조)



당대에는 비루하고 천한 것으로 여겨졌던 파격적인 화풍이 세월이 흐른 뒤에 제 값을 인정받은 셈이라고나 할까요. 당시의 환경에서 이런 그림을 계속 그려왔던 신윤복이란 화가의 고집을 생각하면, 이 드라마를 반체제 드라마 취급했던 지만원씨의 얘기가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농담이지만 역시 무슨 얘긴가 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 참조)



아무튼 '바람의 화원'은 두 화원의 대결을 통해 지지부진했던 중반의 기억을 씻고 깔끔한 마무리를 이룰 수 있을 듯 합니다. 비록 배우들의 이름값에 비하면 10%대 중반을 넘지 못한 시청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봐야겠지만 나름대로 명품 드라마라는 이름도 얻었고, '그림그리기'라는 행위를 본격적으로 영상으로 옮겨 놓은 최초의 드라마라는 점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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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과는 이렇게 안녕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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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위에서 잠시 얘기한 유명 화가 실수 시리즈 중의 하납니다. 이 그림은 고흐의 '해바라기(Sunflowers)'. 수많은 해바라기 그림 중 하나로 일명 '14송이 해바라기'입니다. 고흐 자신이 '14송이를 그린 해바라기 그림'이라고 이 그림을 지칭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림의 해바라기는 분명히 15송이라는 겁니다. 고흐가 잘못 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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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스미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올드보이'를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어이없어 할만한 얘기였죠.

'올드보이'가 담고 있는 어둡고 음침하며 염세적인 분위기가 윌 스미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와 과연 어울리기나 한단 말입니까. 윌 스미스가 가발 쓰고 성형수술 하고 특수분장이라도 해서 최민식의 얼굴이 된다는 것 만큼이나 어이없는 얘기라서 많은 국내외 팬들은(국외에도 '올드보이' 마니아들은 많습니다)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그동안 언급을 하지 않던 윌 스미스가 모든 사람을 안심하게 할만한 대답을 내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올드보이'는 '올드보이'인데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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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chool Rejects라는 한 영화 전문 웹진은 21일, 브라이언 깁슨이라는 필진의 글을 통해 윌 스미스가 자신의 '올드보이'는 박찬욱의 영화를 번안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런 건 전문을 보셔야 직성이 풀릴 겁니다.

제목: 윌 스미스는 올드보이가 박찬욱 영화의 번안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윌 스미스의 '7 파운드(Seven Pounds)'의 레드 카핏 시사회에서 막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이미 두 번이나 오스카 후보로 노미네이트됐던 이 스타는 벌써부터 오스카 관련 소문이 돌고 있는 이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시사회 투어 중이다. 레드 카핏 시사회 풍경은 나중에 다른 글로 전하겠지만, 나는 스미스를 멈춰 세우고 몇가지 질문을 던진 뒤 함께 낄낄거리고 웃을 기회가 있었는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게 있어 가장 궁금한 소식은 그가 스필버그의 '올드보이' 판권 획득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였고, 스미스는 이 뉴스에 대해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이 소식을 거의 2주 전에 보도했지만, 그 사이 스미스가 내게 얘기해 줄만한 큰 발전이 있었다. 팬들은 벌써부터 이 리메이크와 스미스의 주연설에 대해 탐탁찮은 얘기들을 주고받아 왔다. 글쎄, 그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스필버그의 '올드보이'에 출연한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스미스는 그가 박찬욱의 2003년작 영화를 번안한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강조했다. 그럼 대체 어떤 영화일까?

"우리는 지금 그 작업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영화 '올드보이'의 번안은 아니다. 우리의 영화는 바로 '원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 역할을 한 만화 말이다. 영화의 번안이 아니다" 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분명히 스필버그는 영화 '올드보이'가 아니라 원작 만화 '올드보이'의 판권을 구입한 것이다. 아마도 다음 질문은 "대체 그게 무슨 의미야?"라는 것일게다. 팬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무도 미국 관객들을 위해 (박찬욱의 영화보다) 더 나은 '올드보이'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스필버그가 원작 만화를 각색하려는 것이지 박찬욱의 걸작이 갖고 있는 뛰어난 점을 베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건 또 스필버그의 작품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것임을 뜻하지만, 사실 원작 만화와 박찬욱의 영화도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들어올 때까지 관심을 기울이시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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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스미스와 스필버그는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이 됐던 일본 만화의 판권을 구입해 그걸 원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든다는 얘깁니다. 미네기시-쓰치야의 만화 '올드보이'를 영화화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죠.

기사 원문입니다.

FSR Exclusive
Will Smith Says Oldboy Won’t be Adaptation of Chan-wook Park’s Film
Posted by Brian C. Gibson (
brian@filmschoolrejects.com) on November 21, 2008

I just came home from a red carpet premier of Will Smith’s film Seven Pounds. The star is on a tour of premiers promoting the film which is starting to create some major Oscar buzz for the already twice-nominated superstar. I’ll have a full red carpet report later, but first, I was able to stop Smith for a few questions, and a couple laughs. One of the hottest topics for me is Smith’s involvement in Steven Spielberg’s acquisition of the rights for Oldboy, and the actor didn’t disappoint on the news front.

We reported on this news almost two weeks ago, but there is a big development from what the star was able to tell me. Fans have already made themselves heard about their distaste for Oldboy being remade and Smith being the man rumored to take the lead. Well, we heard it straight from the star’s mouth that he is definitely starring in Steven Spielberg’s Oldboy…with a twist. Smith wanted to make a very strong point that this is not an adaptation of Chan-wook Park’s 2003 film. So what is it an adaptation of?

"We’re looking at that right now. Not the film though, it’s the original source material. There’s the original comics of ‘Oldboy’ that they made the first film from. And that’s what we’re working from, not an adaptation of the film…,” said Smith.

Apparently Spielberg wasn’t acquiring the rights to the film Oldboy, he was acquiring the rights to the original source material of the graphic novel ‘Oldboy.’ I guess the next question would be - what does this mean? This means that fans can rest a bit easier knowing that no one is trying to make a better Oldboy for an American audience. This means that Spielberg is free to truly adapt the source material and not try and copycat the brilliance of Park’s masterpiece. This also means that it will likely be an entirely different film, however, but the graphic novel is still very close to Park’s movie. So stay tuned as more details com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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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기자가 쓴 글은 아닙니다.^^ 저 FSR이라는 사이트의 성격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블로그와 웹진의 중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도 필진이 10여명이나 되는 제법 큰 사이트로군요. 아무튼 저 글을 받아 쓴 뉴스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들의 논조는 거의 다 일치합니다. '다행이다. 좋은 영화 하나 망치나 걱정했는데. 스필버그, 잘 생각했다.'

그만큼 영화 마니아들이 '올드보이'를 높이 평가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을 걱정한 겁니다. 리메이크설이 한창일 때 해외 네티즌 반응 중에 이런 게 있더군요.

올드보이는 걸작이야. 너 바보구나. 예를 들어서, 스필버그가 만들고 윌 스미스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근친상간 얘기가 다뤄질 리가 없잖아! 스필버그는 아마 망치를 워키토키로 바꿔 버릴 거야.

Oldboy is a classic, you are a moron..For one...a movie made by Speilberg and Starring Will Smith..isnt' going to be about incest...Is Spileberg will change the hammer to a walkie-ta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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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의 망치...;;;

물론 원작 만화와 영화 '올드보이'가 아주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 좀 걱정이긴 하지만(어쨌든 '올드보이'의 핵심인 15년간의 감금생활 같은 건 그대로 남겠죠), 만화에 등장하지 않는 박찬욱판 '올드보이'의 특징들은 스필버그의 영화에서는 제외될 거란 얘깁니다. 어찌 보면 스필버그와 박찬욱의 '올드보이' 각색 대결이 되겠군요. 은근히 '내 작품 망가질까봐' 걱정하셨다는 박찬욱 감독님(전해 들은 얘깁니다), 이젠 마음 편히 보셔도 될 듯 합니다.

혹시 "뭐야, 그럼 한국영화의 수출이 아닌 거야?"라고 실망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스필버그가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한다면 제대로 만들 리가 없잖습니까. (대체 어떤 괴작을 만들지 궁금하기도하지만) 그렇게 만들려면 안 만드는게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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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국에서 시사중이라는 '7파운드'는 윌 스미스가 일곱 사람의 인생을 바꿀 운명을 갖고 있는 세무서 직원으로 출연하는 영화라고 합니다. 로자리오 도슨, 우디 해럴슨과 함께 13세 소년 코너 크루즈가 윌 스미스의 아역으로 출연한다는군요.

성이 크루즈라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입양한 흑인 소년입니다. 윌 스미스가 일찌감치 자기 역으로 찍었다는 후문이니 나중에 배우로 대성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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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병원2'는 전형적인 추억 마케팅입니다. 어찌 보면 14년 전의 인기 드라마 '종합병원' 동창회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94년 '종합병원'이 방송될 때에 비해 환경은 사뭇 달라졌습니다. 당시의 '종합병원'은 그저 배우들이 하얀 가운에 차트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애정행각을 벌였던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와 달리 '본격' 병원 드라마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최근 들어 메디컬 드라마는 아예 순번이 돌아가면서 고정 배치될 정도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뉴 하트'의 순으로 방송되면서 모두 일정선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죠.

그렇다고 셀레브리티들의 성형수술 열풍을 풍자한 미국 드라마 '닙턱' 처럼 특이한 설정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방송 전의 '종합병원 2'에는 '막차'를 탄 듯한 불안감도 있습니다. 그래서 19일 방송된 첫회는 이런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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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첫회는 일단 스토리나 형식상의 차별성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본래 '종합병원'은 '연속극'이 아니라 매회 하나의 에피소드를 수행하는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었고, '종합병원 2' 역시 첫회에서 수술 시연회와 동남아 근로자들의 숙소 붕괴 사고 대량 입원, 외과 신입 레지던트들의 면접이라는 세 가지 사건이 한 회에 완결되는 형태를 보였습니다.

김정은-차태현 조는 왕년의 '정신과 인턴 - 환자' 커플 때부터 다져 온 호흡이 유감 없이 빛을 발했고(자꾸만 그 드라마가 '종합병원'이었던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김정은-차태현이 함께 출연한 의학 드라마는 '종합병원'이 아니라 안재욱-김희선 주연의 '해바라기'였습니다. 그닥 나이가 어리지 않은 분들도 두 드라마를 혼동하시더군요.^^), '독사' 오욱철의 캐릭터를 이어 받은 군기반장 류승수의 모습도 친근감을 자아내더군요.

물론 이재룡-이종원의 '좋은 의사 - 나쁜 의사' 구도는 너무 많이 써먹은 전가의 보도지만 메디컬 드라마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이종원은 전형적인 '나쁜 의사'라고 보기 어려울 듯 해서, 오히려 이 드라마는 오랜만에 보는 '악역 없는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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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면들이 있었던 반면, '종합병원 2'는 보기에 따라서는 심각한 문제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묘하게도 첫회 에피소드가 '의사는 어쨌든 환자 치료가 최우선이고, 병원은 치료도 치료지만 기본 수칙의 준수가 필수'라는 식으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몇 군데에서 '기본'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바로 연출의 문제입니다. 70~80년대 한국 액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격투 장면 도중 장면이 전환될 때, 배우나 엑스트라들이 '차렷 자세로 있다가' 갑자기 서로 치고 받기 시작하는 장면이 꽤 자주 눈에 띄곤 했습니다. 편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정교함이 결여된 연출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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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감독 중에도 기타노 다케시처럼, 다소 어설퍼 보이는 액션 신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영화에 엮어 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라는 식의 거만한 당당함을 느끼게 할 지경입니다. 물론 기타노의 영화들은 피가 튀고 총알이 난무하는 장면까지도 어린아이들이 주먹다짐 하는 장면처럼 전혀 심각성 없이 가볍게 넘기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실함까지도 의도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종합병원 2'의 매끄럽지 않은 액션 연결은 진지함이 생명인 메디컬 드라마의 농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시체도 연기를 한다'는 봉준호 식의 디테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심각한 응급 상황의 병원 장면에서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의 엑스트라들은 통제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전히 정지해 있다가 카메라의 주목을 받고서야 주-조연 배우들이 움직이는 장면이 몇 차례나 등장하는 건 비전문가인 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더군요.

노도철 PD가 시트콤 연출자 출신이라서 "감히 시트콤 출신이 무슨 드라마를..."이라는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누구 못지 않게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이 연출자가 드라마 연출이 요구하는 정교함의 수준을 너무 안이하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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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병원 2' 첫회에서 지적할만한 부분들은, 만약 '종합병원 2'가 시트콤이었다면 오히려 웃음을 주는 장치의 일부로 여겨질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의 살짝 어설픈 장면들은 시트콤이라면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과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조연들은 그렇다 치고, 아무리 응급상황이라지만 주연급 배우들의 대사가 도대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으로 진행된 것은 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응급실 장면에서는 이재룡 외의 배우는 무슨 말을 하는지 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연기를 하더군요. 물론 의학 용어는 발음하기 어렵고, 배우들의 입에 붙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웅얼웅얼 왈그락 하는 수준으로 떠들고 지나가서는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이것 역시 연출자가 바로잡았어야 할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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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보고 탈락을 예감한 차태현의 전화기 배터리가 어머니와 통화할 때에는 딱 한칸 남아 있다가, 김정은의 자취방에 실려 간 다음날 새벽 합격 통지를 받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풀로 충전되어 있는 장면은 다른 드라마라면 '옥에 티'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아닙니다. '옥에 티'가 아니라 '티 속의 티'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드라마의 완성도가 끝날 때 쯤에는 어느 정도나 성장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스토리가 좋고 배우들의 감정 연기가 좋다 해도 디테일이 내내 이 정도라면, '종합병원 2'는 결코 '잘 만든 드라마'로 기억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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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드라마가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차태현은 대체 언제까지 '엽기적인 그녀'에서 정지해 있을지,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습니다.

p.s.2. 앞부분에도 '닙턱' 얘기가 나왔지만, 이런 대학병원 이야기 말고 성형외과-피부과 이야기라면 오히려 한국에서 정말 엽기적인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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