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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잘 하란 말이야
 
똥오줌 못 가리는 문과출신의 OPEN AI 사태에 대한 관전기.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이며 회사의 리더인 샘 알트만을 해고시킨 것까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이사회는 주주들이 아니라 사회 공익단체 간부 같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결국 잽싸게 나선 마이크로소프트가 알트만을 채용하겠다고 하고,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선다고 하고, 결국 알트만이 OPEN AI 대표로 복귀하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지켜봤다.
1. 샘 알트만(올트먼?)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관둔다고 500명이 따라서 관두겠다고 하는 일은 엄청난 일.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한폭의 드라마. 대체 평소에 어떻게 해줬길래?
2. 일리야... (이름이 길어서 못 외움. 수츠케버)는 연구는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인간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반란의 수괴가 하루만에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3. 이게 결국은 AGI로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세상에 인공지능 연구하는 회사가 OPEN AI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 회사의 CEO를 날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4.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게 목표였다면 일단 크게 울린 셈. 하지만 무슨 수로 저 열차를 세울수 있을까.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AGI를 나쁜(놈들이 키운) AGI보다 빨리 개발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샘 알트먼과 일리야 수츠케버
문득 또 생각. 저 일리야...님이 "인간이 평생 만나는 정보량을 단어 수로 계산하면 약 10억개, 아주 넉넉잡아 20억개라고 쳐도(20억개라면 약 6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단어씩 보는 셈), 이건 AI가 학습하는 정보량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양"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최소한 초기에는 오염된 정보/ 가짜 정보/ 틀린 정보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옆에서 '편견(일부러 이 표현을 썼습니다)'을 넣어 줘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 지나 그것도 결국 일부의 의견이라는 걸 다 아신, 통계학적으로 다음 어순에 들어갈 단어 찾기를 지나, 논리적 추론도 지나, 예측과 분석을 다 하게 되고, 진짜 자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신, 정말 최고의 현자가 되신 AI님에게는 이 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댁이 보기에 '진정 인류를 위하는 길'이란 어떤 길인가요?"
이 질문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더 분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그런데 문득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XX이야?')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질문은 다른 분이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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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오타니 다큐, <오타니 쇼헤이: 비욘드 더 드림>을 봤다.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매우 실망.
 
이런 다큐를 만들 생각이라면 과연 시청자는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지구적 스타가 된 오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궁금해 한다. 대체 오타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오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시절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괴물이 나왔을까. 대체 어떤 훈련을 한거지? 야구 과외라도 했을까?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오타니도 친구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려서도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완성된 인간이었을까? 고교시절 같은 팀 동료들은? 니혼햄 시절 동료들은? 과연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첫사랑은? 
 
 
그렇다면 이 다큐에는 오타니의 초딩 동창, 고교시절 야구부 동료, 은근히 지켜본 같은 반 여학생, 이와테 지역에서 맞붙었던 다른 학교 라이벌이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 다큐에는 부모 형제는 물론, 과거 니혼햄 동료나 현재 엔젤스 동료 한명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야구계의 전설들이 나와서 오타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타니가 만나본적도 없는 마츠이 히데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와서 대체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오타니가 고1때 만들었다는 야구인생 계획표. 몸 만들기, 컨트롤, 키레('구위'라고 누군가 해석해 놨던데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시속 160km,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 8가지를 단련해서 고교 졸업때에는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는 것(일본은 여러 구단이 한 선수를 동시지명할수 있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이게 고1 소년이 세울수 있는 계획일까. 아무리 봐도 외계인.
 
(그런데 왜 타격에 대한 얘기는 없을까. 그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ㅎ)
 
 
그 밖의 멘트들은 역시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들이라 재미라곤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좀 섬뜩할 뿐. 오타니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나랑은 다른 인간이야. 나도 야구를 좀 잘 한 편이지만 나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면서 낄낄 웃은 C.C 사바시아에게 훨씬 호감이 가더라.

어쨌든 오타니 다큐는 누군가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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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2차 시기가 한번 훑고 지나간 뒤로 면역이 약화됐는지 잔병이 끊이질 않는다. 이 몸을 너무 오래 써서 그런가.
그런 사이에도 간신히 가본 캐롤스. 간판부터 닐 세다가의 오 캐롤을 연상시키니 전체적으로 아메리칸 다이너, 가까이는 한때 국내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TGIF나 베니건스를 연상시키는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압구정 코코스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성기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였던 만큼, 그 세대에 맞춘 듯한 BGM이 제격이다. Chicago의 You're the inspiration과 Peter Cetra의 Glory of Love에 맞춰 멜론 절반만한 잔에 나오는 프로즌 스트로베리 마가리타 주문. 크어. 역시 격에 맞는다.
시그니처 비프 립 바베큐, 베이비 백 립(돼지), 애피타이저 샘플러, 프라이드 치킨 샐러드가 잇달아 등장. 옛날 그 맛이기는 커녕 훨씬 발달한 첨단의 맛이다. 바베큐 소스에 푹 전 소갈비와 돼지갈비를 버터에 지진 빵 사이에 끼우고 코울슬로와 할라피뇨를 얹어 먹으면...
이건 정말 알기 쉬운 직설적인 맛. 0.01초만에 뇌에 쨍하게 전달되는 그 맛. 헤어날 수 없다. 샘플러에는 코코넛 쉬림프, 모짜렐라 튀김, 어니언 링 등이 향수를 자극하는데 찍어먹는 소스가 청양고추 마요네즈라면 이것 또한 더 바랄게 없다.
 
흥이 나서 좀 달릴까 했더니 업장 마감이 10시고 건물 조명이 꺼지는 시간이 9시50분쯤이니 참고하시라는 안내. ㅠㅠ 이게 아마도 유일한 약점일듯 싶으니 한번 추억의 안주로 달리실 분들은 좀 일찍 가셔야 할듯. 개인적으로 그저 먹고 마시는 걸 넘어서, 매장에서 좀 살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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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가게를 좋아한다. 유튜브스타인 선배가 굳이 익명을 포기해가면서 회사 이름으로 예약한 집이라 가슴이 설렜다. 성신여대 옆 동네 이름은 동선동, 골목 안을 가득 채운 샌드위치 전문점, 키토 푸드점, 패스트푸드 가게, 카페를 다 지나, 아마도 90년대 초에 성장을 멈춘 듯한 동네 골목 안에 있다.  밀양손칼국수라는 간판이 살짝 바랜게 벌써 신뢰감을 자아낸다. 

칼국수의 친구인 생선전과 아롱사태 수육이 감동적인데 여기에 서울식으로 쨍한 김치에 말을 잊었다.
 
 
이 김치 맛을 봐선 간판의 '밀양'을 지워야 하는게 맞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들어갈 것 다 들어갔는데도 짜지 않은, 제대로 익은 김치 맛이 기립박수를 부른다. 석박지와 무생채도 완성도가 높다. 부라보.
여기서 사실 뭐라 덧붙이면 전부 사족인데, 사골 베이스의 메인 칼국수도 은은하고 고급스러웠다. 특히 마지막의 살짝 걸치는 참기름 한방울 맛이 그렇게 적절할수가 없었다.
 
당분간 밀가루를 자제하라는 의사 선생님들 말씀에 국수를 1/3쯤 남기고 나오는 가슴이 어찌나 쓰린지. 면종복배(麪從腹背), 국수를 추종하면 뱃속이 배신한다 하나 어찌 국수를 벗어나 살 수가 있을까...
 
결론은 맛으로 볼 때 '밀양'은 아무래도 갸우뚱. 하지만 맛은 진짜. 근처 발 닿는 분들은 절대 후회 안 하실. #송원섭맛집 #밀양손칼국수 #성신여대 #동선동 #돈암동아님 #면종복배그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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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김오랑 중령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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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문화의 핵심을 성리학의 기본 단위인 이(理)와 기(氣)를 통해 해석, 전통적인 한국 사회와 해방후 급격한 경제 발전, 사회의 변화, 특징적인 민주화 등이 어떤 정신적 분위기(?)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공자는 참으로 강하구나" 했던 바로 그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한국에 정통한 학자라 해도 한계는 있겠으나, 매우 독특한 해석이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부분들이 많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면.

 

 

 


1.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한국인의 사상사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명사를 통해 해석하고 가르쳤다.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이며, 단일한 원리이자 지향해야 할 선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이며,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의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기는 이 이가 현실세계에 적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이가 절대지상의 원칙이라면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흔히 이를 체(體)라 한다면 기는 용(用)이라 표현된다.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빗대 이해할 수도 있다. 


2. 오구라 기조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사회다. '주자학에 의한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라고 규정한다.
즉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 주자학 이후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리'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리'가 도덕적 정당성이 되어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나라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덕을 중시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문체에서는, 지식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며 정치의 선봉에 선 시대가 없었던 일본 역사에 대한 묘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도 시대에도 유학자들은 막부의 통치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종의 어용 학자의 역할을 했을 뿐, 유학자가 정국을 주도하거나 한 시대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정치는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전문가'들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 '공맹지학'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유학에서 맹자의 존재가 희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3. 아무튼 지식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보니, '리'에서 벗어난 물(物)은 매우 비천한 것으로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공고하고, 특히 공과 상의 귀함이 지독하게 무시당해 온 역사가 바로 이 '리'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해석이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음에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恨)이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소비는 일종의 한풀이다. 그 구매 대상이 상징하는 상위의 생활에 대한 동경이 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런거 하나 못 살까보냐', '내가 이런 것 하나 못 사줄까보냐' 같은 심성이다. 정말 일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에 대한 이런 묘사는 심히 그럴듯하다.


4. 그렇다면 왜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事大)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일까. 오구라에 따르면 그 이유는, 중국의 명조가 바로 '리'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명조에 있었고, 유학이라는 학문이 지향하는 과거의 이상, 즉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실재하는 존재가 바로 명조였던 것이다.


오구라는 여기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한중관계를 잠시 거론한다. 과거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사대를 기본 원칙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사대는 과거의 중국이 '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나 20세기 이후 중국은 그런 존재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미 20세기 이후, 한국의 '리'는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을 추종한 것 역시 오구라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이 6.25때 도와주었다거나 경제적 원조로 번영을 이끌었다거나, 혹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방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친미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과거 중화가 갖고 있던 '리'를 한국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리를 지향하고, 거기에 맞춰 국가와 국민 모두 합심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오구라 기조 교수


5. 한국의 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이 리를 숭상하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민주주의라는 리의 구현을 위해 한국 지식인들은 목숨과 지위를 아끼지 않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대부'와 '선비'로 나뉘곤 한다. 선비가 국정에 참여하면 사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재야의 사림이 된다. 항상 그 순수성은 재야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안에서 오구라의 주장은 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각이 반한적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오구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앞서도 잠시 말했듯, 일본 역사에서도 이토록 지식인(혹은 문인)이 주도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부러움이 느껴진다. 


6.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과연 오구라의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인 스스로 쓴 한국인의 정치 사상사, 혹은 한국인의 정신사에 대한 저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대한 분석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정치사상을 다룬 한국 학자의 괄목할만한 저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몇몇 권위자들께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추천할만한 책이 없다'였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은, 책 자체의 독후감보다 '없다'라는 추천의 충격이었다. 왜 없을까. 없어야만 할까. 

혹시라도 '없긴 왜 없어'라고 추천해 주실만한 분, 아울러 지금이라도 직접 써 주실 분이 궁금하다. 이 포스팅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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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던 천재. 금수저. 잘생긴 얼굴. 유혹의 재능. 섹스에 대한 집착.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영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과연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이니 스포일러가 있을까 싶지만, 감상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분은 그냥 여기서 멈추길.  

내 느낌대로 정리하자면,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어느 관종의 추락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주목을 즐거워하고, 항상 어떤 자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원하고, 더 큰 주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관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는 매우 강력한 '관종'의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어느날, 역사적인 폭탄 제작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연히, 관종답게,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 참여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 한다. 물론 충분히 자격도 있다. 그리고 미친듯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과를 냈다.

 

과연 이 폭탄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많은 과학자들이 -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 이 폭탄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에 대해 많은 기록은 ‘오펜하이머는 본보기로 실제 사용을 해야 전쟁 억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폭탄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을 대략 뭉그러뜨리는 정도 선에서, 실제 투하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다른 방법을 통한 인간 살해에 비해 딱히 더 부도덕할까?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이미 도쿄에선 몇 차례의 폭격에 의해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한 것보다 많은 사망자 수다. 만약 일본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면,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폈다면 수만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고, 일본인 사망자는 수십만, 수백만에 달했을 것이다. 핵폭탄 투하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펜하이머에게는 사용을 지지하는 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이미 일본의 패배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고, 그렇다면 미군을 포함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성과가 그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좋은 조건일테니까.

 

폭탄이 무사히 실험을 마치고, 군인들이 두 개의 폭탄(아마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일)을 로스 알라모스로부터 외부로 반출하는 시점. 여기서부터 놀란의 카메라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의 오펜하이머를 쫓기 시작한다. ‘저 폭탄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는 물론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이어 폭탄 투하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오펜하이머의 실망은 극에 달한다.

물론 언론은 ‘전쟁 종결자’ 오펜하이머를 놓치지 않고, 그는 명성의 최절정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을 방문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관종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낸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기대했을) 공감이나 동정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다. “폭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기서 알기나 할 거 같은가?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나야.” 두 개의 핵폭탄을 날려 전쟁을 끝낸 사람은 난데 어디서 일개 과학자 따위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 하느냐는 불쾌감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양심적 고뇌를 시작한’ 오펜하이머와 ‘인명 따위 관심없는 권력자’ 트루먼의 대립 같지만 사실 내게 보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건 관종과 관종의 대결이다(...문과와 이과의 대결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밀린 오펜하이머는 어색하게 퇴장한다. (문과 만세!)

대개의 관종들은 선량하고 나이브하다. 관종일수록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대체 어떻게 그 호의 뒤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관종의 패턴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자신을 고의로 음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을 가까스로 끝내고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체제 경쟁을 시작한 미국의 여론 앞에선, 이런 노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심쩍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소폭탄을 개발해선 안된다’는 의견은 ‘원폭은 되고 수폭은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소련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데’에 부딪히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UN이 공동관리하게 하자’는 의견은 ‘소련과 핵무기를 공유하자고?’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화상으론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오펜하이머가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영화에 따르면 스트로스의 공작에 의해) AEC에서 밀려난 것은 1954년,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을 받고 미국 상원이 그의 지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54년은 아직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던 시절이지만 그 뒤로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꼈고, 1959년이면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을 낳아 여론을 반전시킬 시기였다.

 

심지어 놀란의 영화상으로는, 오펜하이머는 ‘냉전의 시대에 용기있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해서’가 아니라 ‘스트로스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가 보복당해’ 공직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가 나라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고, ‘지나친 관종이라 주위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쨌든 70여년 동안 인류는 용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 데 성공했고, 이건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놀란은 거기에 오펜하이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인류가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관종끼 강한 천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소위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하는지에 관심 있어 보일 뿐.

너무 길어졌다.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영웅의 추락을 그린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오펜하이머의 추락 원인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오만과 공명심,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시, 억제할 수 없는 ‘관종’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몰락한다. 성격을 중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측면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탁월한 영화다.

3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핵 폭발 실험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킬리안 머피에서 시작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먼, 조쉬 하트넷,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케네스 브라나, 라미 말렉, 한때 넥스트 디카프리오였던 데인 드한까지... 단역까지도 올스타급으로 채운 라인업은 중국 영화 <건국대업>을 연상시켰는데, 현재 할리우드에서의 놀란의 위상을 보여주는 면모. 

아무튼 명작이지만, 두번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P.S.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는 바가바드 기타 11장32절 머릿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후로 수많은 힌두교 연구자들이 이 말이 적절하게 인용된 것인가에 의문을 던져 왔다.

이 말은 인도 신화에서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이며 무적의 용사인 크리쉬나가 자신의 사촌이며 동조자인 영웅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와 같은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데, 크리쉬나가 파리 죽이듯 인간 전사들을 살상하는 것을 보고, 전능한 신에게 대체 싸움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대답한다.

 

The Supreme Lord said: I am mighty Time, the source of destruction that comes forth to annihilate the worlds. Even without your participation, the warriors arrayed in the opposing army shall cease to exist.

Therefore, arise and attain honor! Conquer your foes and enjoy prosperous rulership. These warriors stand already slain by Me, and you will only be an instrument of My work, O expert archer.

 

크리쉬나가 말하는 힘의 비교 대상은 시간이다. 세상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모두 소멸될 뿐이다. 그러니 아르주나가 돕건 안 돕건, 그런 강대한 내가 참전한 이상 전장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물론 힌두교의 전제상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누가 죽고 누가 사는 일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연연하지도 말고, 그저 내 도구로서 승리를 즐겨라.

 

한마디로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영원을 다루는 신의 의도와 권능을 이해하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짖음인데, 과연 오펜하이머의 인용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크리쉬나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인지, 그냥 단장취의하고 ‘뭔가 강력한 것’이란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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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고, 살아가면서 얽힘이 없는 인간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늘 꼽는 학연/지연/혈연을 옹호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주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의 성취(혹은 그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는 자기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판타 레이> 저자인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이런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책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구한말-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의 암흑기에, '우리 조상들이 좀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분단과 남북한 독재의 탄생과 같은 민족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뭔가를 알려 할수록, 그 시기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를 그 시대에 데려다 놓은들 과연 더 낫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917년작인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사람들에게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미국 유학가서)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물론 형식 자신도 생뭏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광수는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꿔놓기 위해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등장하는 조선의 과학자들은 1920년대 이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같은 서구의 최신 물리학 조류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식민지의 계몽에 온 정성을 바쳤다. 이 책은 최규남 최윤식 도상록 이극로 등 당대의 선각자들이 조선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배운 사람'들은 '무식한 민중'을 탓하며 자신들만의 성역에 안주하지 않았다.

 

1939년 영화화된 <무정>. 김신재 한은진 주연. 당시 경성 장안의 화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규남이 '백만원이 있다면 지상 5층 지하 5층의 번듯한 이과학 연구소를 만들겠지만, 백만원이라면 일원짜리 지폐 백만장이 아닌가''라며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한 순간에선 안타까움이 앞선다. 간송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 1만원에 산 것이 화제가 되었던 시절이다.  누가 식민지 젊은이들을 위해 그 큰 돈을 모을수 있었을 것인가. 1938년에서야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설치된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학생 한명당 2만원 수준의 투자가 이뤄졌다고 하니 최규남이 바랐던 것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 같다. 


'이과 책'이긴 하나 어려운 과학 지식을 요하는 내용은 없다. 사실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과학사')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궁극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책이다. 가능하면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거룩하고 지루한 책 같지만, 저자의 취향이 개입된 trivial한 팩트들이 주는 자극을 또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선데이 과학(?)' 적인 요소도 다분하니 재미없다는 얘기는 안 나올 듯.^^ 아무튼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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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한다. 당연히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도 좋아한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지금까지 나온 유현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생각하면 왜 <인문 공간 기행>이 아닌지도 궁금하지만(아마도 게으른 서점을 위해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 읽다 보면 처음엔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나 저기 갔었는데. 왜 저걸 못 봤을까. 유홍준 선생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항상 참이다. 베를린에 갔어도 국회의사당은 밖에서 보는 걸로 스쳐 지났고, 베네치아를 몇번 갔어도 퀘리니 스탐팔리아는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오사카에 갔어도 빛의 교회나 아주마 하우스를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뭐 대신 히메지성을 갔으니 이건 후회는 없다). 물론 어쩔 수 없었던 때도 떠오른다. 산 세바스찬에 갔어도 빌바오를 들를 수는 없었던 것처럼.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남들에게도 그 감동을 전하고 싶어하고, 글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 책은 건축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건축덕후의 글에 가깝다.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감정이 있다. ‘...어렵게 찾아가느라 짜증이 났는데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는 식의 표현. 어떤 것인지 바로 느낌이 온다. 그래 맞아, 맞아.
이 책이 꿈이라면, 이 책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두 찾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건 슬픔. 우와 하는 생각에 정확한 위치를 검색해 보면 파리에서 6시간.... 어렵다.
 
아무래도 살아 생전에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베어런(그 유명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이 있다)이나 텍사스 주 포트워스(킴벨 미술관)같은 곳에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안타깝다.
이 책에 나와 있는 30개의 건축물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여기에 올라와 있을 지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 유현준 교수가 본 ‘세계 3000대 건축물’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엄선된 것일 거란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투자자만 있다면 멋진 건축 다큐(...아니다). 아무튼 또 한동안 여행병에 시달리겠다는 생각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은 읽으실 분들을 위한 주의사항 모음]

P.S. 단순한 관람기가 아니다. 한 건물을 설명하기 위해 대략 10개 안팎의 다른 건축물과 예술작품들, 해당 건축물들의 역사적 맥락과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워싱턴 베트남 베테랑 메모리얼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서도호의 ‘ some/one’ 이 매우 반가웠다.
 
한때 리움의 상설전시작품이었던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옛 글귀를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표현하다니, 라고 감탄했던 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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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
 
보는 동안은 잘 봤다. 너무 자주 반복되는 추격 장면이 좀 지루했고 너무 말이 안 되는 줄거리가 몰입을 방해했지만, 일단 주제가 'Raiders' March' 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반가웠다. 마지막의 ‘대체 안 아픈데가 어디야’(1편의 대사다)에서 뭉클하기도 했다. 그런데 보고 나오는데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했다.
 
<옐로우스톤>의 스핀오프 중 하나로 현재 방송중인 미국 드라마 <1923>의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다. 족보상으로 <옐로우스톤>의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의 종증조부 쯤 된다. 타협을 모르는 늙은 카우보이.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지만 이미 말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카우보이의 시대가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굴의 투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그의 나이가 보는 이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에 나오는 해리슨 포드는 극중 70세(존스 박사는 1899년생이었던 것이다)인데 내용을 봐선 대체 왜 70세인지 알 수 없다. 처음 세 편의 시리즈에서 존스 박사는 각각 37세, 36세, 38세였다.
 
70세를 맞은 1969년, 존스 박사의 펀치력, 주력, 근력, 지구력은 30대 후반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여전히 몸으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한다. 성배로 물을 마신 덕분인가. 2043년쯤 나올 <범죄도시 23>의 마동석을 미리 보는 것 같다. 영화 배경이 1940년 정도였다면 딱 어울릴 시나리오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젊은 영웅’역할을 했어야 할 헬레나(피비 월러-브리지)는 방해꾼에 애물, 코믹 전담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소란스럽고 장황하다. 그냥 <플리백>을 보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제작사들은 만에 하나 늙은 챔피언이 은퇴하더라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젊은 챔피언이 그의 영광을 물려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 것 같다. 다행히 그 소원은 실현될 모양이다.
 
요즘 들어 자꾸 ‘위대한 왕국이 퇴색하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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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추구할수밖에 없다는 낙관, 식량과 자원의 부족은 기술의 발달이 모두 해결해 줄 거란 낙관,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통제 불가능한 정보의 확산은 진정한 인류애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낙관...
마블의 혼란과 DC의 제자리걸음을 보면서, 과연 이 세가지 낙관이 모두 무너진 세계에서 슈퍼히어로 영화가 살아남을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오갤3>와 <플래시>를 본 뒤 이 느낌은 더욱 굳어졌다.
누가 이런 망가진 세상에서 한가하게 슈퍼히어로 집단 따위가(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정의로운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줄 거라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낙관의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2. 그런 시대에,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정말 끔찍한 제목. 이하 MI7)>의 현실 파악은 진정 탁월했다. 기후위기와 식량 및 자원의 부족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이 회의적인 분위기, 전 지구적인 이기주의의 확산으로 전쟁 발발의 위협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 정보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는 '엔티티'라는 고도로 진화된 AI가 등장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체 어떤 정부가, 어떤 기관이 이 엔티티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까.
 
예전 같으면 '세계의 경찰'이며 '가장 정의로운 국가'인 미국이 그 엔티티를 떠맡으려 했을 것이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누구도 70억 인구 전체가 다 같이 손잡고 밝은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 과연 우리의 영웅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3. 배경은 소름끼치게 현실적이지만, 물론, 본질적으로, MI7은 불로불사 톰 크루즈 아저씨의 동화다. 믿을 수 없는 선의로 가득찬 기사들과, 가면 하나로 다른 인간이 되는 마법이 공존하는 판타지 세계다. 그래도 어쨌든 '그냥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비록 그 주역들은 총알 한방이면 죽을 수 있는 약한 존재들이지만 불굴의 투지와 선을 향한 의지로 어떻게든 우리가 알던 세상이 유지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해서, 이 암울한 미래를 앞둔 인류가, 이제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4.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이런 세계를 설계하는데 최고의 장인임을 보여준다. 파트 원인데도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장악력. 탁월한 캐스팅과 적절한 교체. 고전과 미래를 넘나드는 미적 감각 모두 최고다.
개인적으로 MI 시리즈 중 최고이면서 코로나 이후 본 모든 영화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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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시선 -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볼륨.

등장인물만 대충 꼽아 봐도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 스티브 잡스, 오스카 코코슈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말러,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슈테판 츠바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마 말러... 뭐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벨 에포크.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 통일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때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아이디어가 넘쳤던 이 시기는 '아무도 예측할수 없었던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이 끝난 뒤, 기존의 어떤 것도 믿을수 없게 된 시대에 가장 창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학교를 만든다. 그 이름도 찬란한 바우하우스.
 
<창조적 시선>은 그 바우하우스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버티다 어떻게 달라져갔으며,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에 대한 책이다. 또한, 인류가 어떻게 해서 '창조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게 되었는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방대한 책의 내용을 더 이상 짧은 몇줄에 압축할 재간은 없다. 김정운 교수의 '10년 공부가 담겼다'는 윤광준 선생(이 책의 사진을 맡은)의 말씀이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것 밖에는.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끝나는지가 궁금해 약 3주를 매달렸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대단원.
 
맨 위에 써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얽혀 어디로 흘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 단 각오는 단단히 하고 달려들어야 할 것. 어려워서 못 읽을 책은 절대 아니지만, 이야기의 망망대해 속에서 일엽편주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P.S. 문득 이 책과 매우 유사한, <판타레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두 책은 빈의 제체시온 미술관에서 만난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이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는 미술관. 이 두 세계가 만나면 거기선 또 얼마나 더 엄청난 이야기가 쏟아질까. 한국에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와 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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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가 있고 감독 류승완.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재미있는 여름 영화'의 간판으로 손색이 없다. 보고 나서도 만족. 
 
2. 2021년 촬영. 22년을 그냥 넘기면서 제작진이 했을 고민이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의 관객과 이후의 관객은 어떻게 다를까.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할까. 그리고 그 선택은 강력한 다이어트로 나타났다.
 
2시간9분. 네 주연과 고민시 외의 다른 캐릭터들은 이 다이어트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밀수>는 한눈팔지 않고 그냥 달린다. 물론 좋은 선택. 오해도, 갈등도, 굳이 오래 끌지 않는다.
불필요한 우리편의 희생(개인적으로 21세기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도 없다. 따져 보면 꽤 심각한 스토리인데 빠른 해결로 바로 치고 나가니 발걸음이 가볍고, 관객도 편안해진다. 확 눈에 띄는 김혜수-염정아 여성 투탑의 서사를 빼고도 이 시대에 잘 맞춰진 영화다.
 

 
3. 아쉬움이 있다면 조연 라인이 좀 낭비됐다는 느낌. 특히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로 구성된 해녀팀은 촬영중에는 꽤 큰 비중이었을 듯 한데 완성된 영화론 거의 존재감이 없다. 반면 이런 점을 생각하면 고민시의 활약이 놀랍다. 후반부는 고민시가 끌고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물론 이 영화 최고의 수혜자로 조인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연 넷 중에선 등장시간이 가장 짧은 캐릭터. 하지만 조인성이 과연 지금까지 이렇게 '여심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한 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훌륭한 변신을 보여준다. 조인성, 이제 느끼한 것도 된다!
 
5. 훌륭한 오락영화지만 아주 세심한 영화는 아니다. 이를테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왜 닻줄이 끊어져도 배는 정지해 있나 같은 사소한 의문이 여러 곳에서 떠오른다. 이런 부분들이 디테일 마니아들에겐 다소 불편할수도 있겠으나 대세에 지장 없음. 편히 보시길.
 
6. <앵두>,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무인도>까지. 전곡을 다 따라 부를수 있는 OST(반갑다). 엔딩은 <그 얼굴에 햇살이> 정도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P.S.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웅본색>을 언급했다던데, 그리 오래지 않아 오마주 지점이 나와 (코믹 장면은 아닌데)잠시 웃었다. 흰 바바리라도 입고 나오거나, 돈을 줄 때 바닥에 흩뿌려 줬더라면 더 선명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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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초딩 동창인 세르지오 레오네(좌)와 엔니오 모리코네(우)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놈놈놈과 석양의 무법자의 관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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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시간여행과 멀티버스. 플래시의 능력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설정되었을때부터 시간여행 이야기는 언젠가 나오는게 필연이었겠으나, 막상 보고 나니 좀 그렇다. <플래시>의 리부트라기보다 <백투더 퓨처>의 리부트 느낌.
 
2. 대체 왜 마블이고 DC고 멀티버스에 꽂혀서 이 난리인가.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 다른 세계의 닥터 스트레인지... 결국 이런게 다 이제 슈퍼히어로가 빌런과 싸워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지킬수 있다는게 너무 뻔하고 순진한 소리란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아닐지. 지난번 <가오갤3> 때의 생각 반복.
 
3. 그런 의미에서 '플래시'는 추억 총소집으로 팬들을 감격시키는데 성공. 특히 가족애를 테마로 한 슈퍼마켓 신은 눈물이 찔끔 나오는 감동. 그동안의 수없이 반복된 리부트와 리빌딩이 결국은 멀티버스였다는 스토리텔링은 보너스. (근데 크리스찬 베일은 왜 왕따인가)
하지만 이 감동이 DC를 구원할수 있을지. 거기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슈퍼맨 레거시>? 글쎄.
 
4. "OH! FLASH! I LOVE YOU!" 이거 혹시 퀸의 명곡 'Flash' 에 대한 오마주인가? 이보다는 훨씬 노골적인 <쇼생크 탈출> 오마주 매우 웃겼다.
4-1. 감독이 시카고 팬인지. 왕년의 시카고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명곡이 두곡 나온다. 음악의 활용은 벌써부터 제임스 건의 영향인지 <가오갤> 느낌이 물씬.
 
5. 역시 내가 DC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배트맨의 캐릭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란걸 재확인. 다크나이트고 뭐고... 태생이 고구마다.
 
6. 에즈라 밀러는 연기력도, 역할 해석도 매우 훌륭하다. 18세 배리의 성격이 좀 짜증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성격.  (이 리뷰를 작성하고 나서 얼마 뒤 에즈라 밀러의 과거 행각을 들음. 아마도 미국에서 <플래시>의 흥행이 박살 난 데에는 밀러의 역할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생각됨. 그런데도 미국 영화가에서는 "제임스 건이 이끄는 새로운 DC 세계에서도 에즈라 밀러는 계속 출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플래시>의 가장 큰 성공은 역대 최고의 슈퍼걸 사샤 카예라고 생각. 등장, 각성, 캐릭터, 외모 모두 최고다.
 
7. 플래시의 캐릭터 중 최강의 먹방 히어로라는 점은 왜 충분히 상품화되지 않았을까. 단적인 예로 왜 플래시 초콜렛바 같은게 없을까? 에너지 보충을 위해 뛰면서도 줄창 먹어야 하는 플래시와 딱인데.

 

8. 결론: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2> 이후 지금까지 본 DC 영화중엔 최고. 하지만... DC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은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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