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소설 <듄>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튼 꼭 극장에서 보시길.

1만몇년이라는 연도(서기인가?). 우주제국의 귀족들이 행성 하나씩을 자신의 영지로 갖추고 군림하는 시대. 명망있는 아트레이데스 공작 가문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환각제 '스파이스'의 산지 아라키스 행성을 관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가장 큰 강점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차분한 진지함'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이야기든, 스토리텔러가 이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빌뇌브의 영화들은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성실한 완벽주의에 끌려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눈을 팔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주를 무대로 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도 그런 성실성은 빛을 발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은 한스 짐머의 음악과 함께 가히 압도적이다(사실 스토리도 앞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유사해질 기미가 보인다. 모두가 탐내는 자원이 풍부한 사막의 나라. 그들을 장악하려는 악의 제국. 외부의 간섭을 싫어하는 용감무쌍한 토착민. 이들을 도와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파란 눈의 백인 전사...).

우주전함은 광선포를 쏘고 있는데 전사들은 검(광선검 아님)으로 승부를 겨루고 있는 기이한 상황도, 빌뇌브의 손을 거치면 그럴싸한 긴장을 유발한다. 어느 순간 설득당하고 마는 진지한 친구 같달까. 



티모데 살라메의 여린 몸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남주를 연상시키는 듯 나름 성공적. 하지만 배우 중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레베카 퍼거슨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캐릭터의 약점이 퍼거슨 덕분에 보완되는 느낌이다. 퍼거슨의 캐스팅으로 인해 제시카-폴 간엔 모자간답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생긴 건 감독의 의도적인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개봉이 다소 늦었지만 그 시점에 이미 해외 개봉(미국 기준임)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제 관건은 빌뇌브가 몇 편까지 감독을 맡는냐 하는 문제.

이 영화가 '파트 1'이 된 것은 6권으로 된 시리즈 중 1권의 파트1이라는 뜻이다. 현재 빌뇌브는 1권을 2편으로 나눠 만들고, 2권을 3편으로 하는 트릴로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트릴로지가 성공하면 소설 3권 이후도 죽 시리즈로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과연 빌뇌브가 계속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마블 외에도 기다려 가며 볼만한 시리즈가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 그런데... 한 2023년에는 볼 수 있는건가. 

P.S. 워낙 방대한 원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일각에선 세계관을 공부하고 가야 하네 말들이 많던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이라면 관람에 아무 무리 없을 듯. 

P.S.2. 1984년작인 데이비드 린치의 <듄>(국내 비디오 출시명은 <사구>)은 왕년에 보기는 했으나 혀를 끌끌 차며 잠들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거대한 샌드웜 뿐. 문득 이 <사구>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서극의 <촉산>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기억도 난다.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은 멀리 하고 싶었던 기억도.

728x90

몇해에 한번씩 그해의 히트작을 겨냥해 '내 아이디어', 혹은 '(아무도 모르는)내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믿으란 말이냐'고 주장하는데, 드라마 신인작가 공모전 채점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혜성이 지구를 삼킬 거라는 영화가 거의 동시에 두편 나온 적이 있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998년.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었다. 

<돈 룩 업>이 지금까지의 범 지구적 재난 영화들과 철저하게 다른 점은 인류의 단결에 대한 냉소다. 지금껏, 최소한 영화 속에서 세계 각국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계인의 침공, 혜성, 괴수, 질병, 기후위기에 일치 단결해 맞서 왔다. 이런 영화들 중 절대 다수가 할리우드 산이었던 만큼, 미국 대통령이 그 선두에 서서 엄청난 명 연설로 인류의 단합을 촉구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또 지난 50여년간 만약 그런 재난이 닥친다면, 웬만하면 미국 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을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2021년. 아담 맥케이(<돈 룩 업>의 감독이다. 혹시 모르실까봐)는 과연 지금도 그런가 묻는다. 1998년이든 2021년이든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건만 어째 '미국 대통령이 지구 대통령'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최악의 대통령이 코로나라는 최악의 시기에 집권하는 바람에? 

물론 이 이유도 크지만, 설사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었다고 해도, 이미 '미래를 위한 인류의 단합' 자체가 그리 공감가지 않는 이슈가 되어 버린지 좀 된다. 코로나 이전에도 기후 이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각국 정부의 태도는 인류의 공동 대응이란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줘 왔다. 전문가들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수도 있는 대대적인 생태계 파괴와 생물다양성의 소멸이 금세기 안에 일어날 거라고 경고의 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지만, 어떤 국가도, 어떤 기업도 자신들의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데 과연 혜성이라면 다를까? 그것이 바로 <돈 룩 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계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고 싶지 읺지만, 과연 이 아이디어의 구현을 위해 메릴 스트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케이트 블랜칫, 티모시 살라메, 조나 힐 같은 엄청난 출연진이 필요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솔직히 좀 낭비다 ㅎ), 반대로 저 배우들이 모두 '정상적인 출연료'를 모두 챙겨 받았다면 이 작품이 7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완성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로 얼마를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운동에 기부한 누적 금액은 1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 작품 출연의 동기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초반은 지나친 코미디 설정으로, 중반은 그리 진행에 도움되지 않는 요소의 남용으로 잠시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마지막 20분은 걸작의 일부로 손색이 없다. 떠나려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엔딩이다. (그리고 쿠키도!) 

P.S.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가 내가 뭘 놓쳤나 싶은 분들은 다시보기를 통해 지난주 <차이나는 클라스-인생수업> 최재천 교수님 편을 찾아 보시길 권장함.

728x90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태곳적부터 있었던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냉장고나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보다는 좀 덜 선명한 요소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도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을 거라든가, 조선시대에도 "역시 한우가 맛있네" 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은 <양식의 양식>을 보시길 권장한다.

 2. 또 그 얘기냐고 하실 분들을 위해 신속하게 주제 전환. 오늘 얘기는 프로 스포츠의 기원에 대한 거다. 축구의 발상지 영국에서 FA컵이라는게 있는 시절이라면 당연히 밥먹고 축구만 하는 선수, 그러니까 프로 선수가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19세기 말까지 오히려 '돈을 받고 축구하는 선수'가 있는 팀은 출전정지를 먹는 게 룰이었다.

 3. 이유는 당연히 '스포츠맨십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 스포츠란 건강과 여가를 위한 것이니 돈에 팔린 선수는 그 순수함을 해치는 존재라는 논리다. 직장인 야구적인 사고방식.

 4. 이런 논리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립된 것인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모이면 공을 차던 시절, 그러니까 축구나 팩차기나 별 차이 없던 시절에 이튼과 해로우 등 영국의 유명 보딩 스쿨 축구인들이 모여 공식 룰을 만들었다. 대주분 귀족 출신인 동호인들이 축구를 '소유' 했기때문에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이 축구의 본질이 된 것이다.

 5. 그런 시대, <더 잉글리시 게임>에서 최초의 프로 축구선수가 된 퍼거스 수터(블랙번 로버스)는 말한다. "만약 그 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같은 노동 계급 선수는 당신들처럼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을 영원히 축구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따로 연습할 시간도 체력도 없습니다."

 (정말 똑똑한 자본가들은 이 대목에서 ', 축구라도 져 주는게 장기적으로 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겠구나! 입장료 수입이 얼마지?'라고 느꼈을 터.)

6.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축구라는 것이 어떻게 귀족들의 여가에서 노동계급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해가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너무나 훌륭한 교과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축구판 <양식의 양식> 아닌가!

 

 

728x90

 

넷플릭스 드라마 <플레이크드 Flaked>를 조금씩 쪼개 시즌 2까지 봤다. 미친듯이 정주행한 건 아니고 시간날때마다 곶감 빼먹듯 계속 보고 있었다. 낄낄대며.

주인공 이름은 칩. 그럭저럭 관리가 된 40대 싱글 남자. 전 장인(전처의 아버지) 소유 건물에서 전혀 장사가 되지 않는 가구점 운영. 세 안냄. 친구 데니스 어머니 소유 주택 본채(?)에 얹혀 생활. 역시 세 안냄. 인생에 대한 대단한 철학이 있는 척 하기 위해 핸드폰도 운전면허도 없이 산다. 한마디로 보기에 멀쩡한 빈대. 왜 제대로 된 뭔가를 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특기는 순간적인 멋진 척, 생각있어 보이는 척, 상처 많이 받은 척, 그리고 얄팍한 거짓말을 이용한 임기응변. 실상을 알고 보면 도대체 긍정적인 면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워낙 뛰어난 사회적 위장막 덕에 사람들에게 은근히 인기있는 편이다. 특히 그를 무슨 롤모델인 양 떠받드는 남자 후배들(?)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자아는 비대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유아 수준인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다. 이 두가지가 종특이라는 중년 한남으로서, 보고 있으면 누군가 옆에서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매저키스틱한 쾌감이 일품이다. 그런 면에서 아저씨의 세계를 필요 이상으로 미화했던 <나의 아저씨>와는 우주 정 반대에 위치한 작품이랄까. 어쩌면 홍상수 영화를 영어로 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대체 왜 제목이 flaked일까. '너무 얄팍해서 속이 뻔히 보일 듯한 캐릭터' 때문일까도 했는데 한국어로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 들통난? 뽀록난? 드라마 좀 보다 보다 뻔하지 않은 드라마 찾는 분들께 추천. 이런 엉망진창 개차반인 캐릭터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실지도 궁금.  

#자신있는사람만도전

728x90

최근 몇 년, 2019년에는 개취 10대 영미 드라마, 2020년에는 개취 10대 외국 드라마를를 포스팅했는데 이제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K-콘텐트 원년, 그냥 한국을 포함해 2021년 본 드라마 시리즈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것들 것 꼽겠습니다. 이른바 개취로 꼽는 전 세계 드라마 TOP 10’. 물론 제가 본 것 중에서만 꼽았습니다. (별로 꼽을 게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한국 드라마까지 합하고 보니 좀 넘치네요. 양해해주세요.) 

그래도 제목은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폼나는 건 TOP10일 때잖아요.

(매년 보시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2021년의 드라마라고 해서 꼭 2021년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2021년에 본 것 중에 최고라는 뜻이죠.)

 

 

라인 오브 듀티 Line of Duty

경찰 조직의 건강성 확보를 위해 부패 경찰을 수사하는 내사 조직 이야기. 그런데 어느 순간, 내사 조직이 오염되고 있다는 경보음이 들리고, 형사들은 이제 바로 옆의 동료를 의심하게 된다. 시즌1~5까지 왓챠에 있고 시즌6을 기대하고 있음.

개인적으로 2021년에 본 작품들 중 단연 최고. 인생 드라마 중 하나. 

라인 오브 듀티, 이런게 바로 드라마다 (tistory.com)

 

라인 오브 듀티, 이런게 바로 드라마다

넷플릭스가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 쉽지 않을 거라는 의견을 말하자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2배속 기능이 없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물

fivecard.joins.com

 

플랙  Flack

셀럽들의 사생활에서 터지는 사건사고를 어떻게든 커버해 그들의 몰락을 막아주는 여성 위기관리전문가 이야기. 그 주인공이 <피아노>의 안나 파퀸이라는 걸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일반인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수준의 사기와 조작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뇌하는 주인공. 나는 정말 괜찮은 인간인가, 아니면 괴물인가. 이것도 왓챠에서 봄.

 

조용한 희망 Maid

세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천둥벌거숭이 미혼모는 어떻게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나. 그건 그의 행운인가, 타고난 자질 덕분인가. 보고 나니 실화라고.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 Maid, 너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려면 (tistory.com)

 

조용한 희망 Maid, 너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려면

영어 제목이 Maid라니까 많은 사람들이 혹시 전도연 나오냐는 드립을 쳤다. 한국 제목은 <조용한 희망>. 사실 잘 지은 제목은 아니다. 스무살 나이에 아기 엄마가 된 주인공. 알

fivecard.joins.com

 

D.P.

탈영은 수시로 일어난다. 스무살 안팎의 피 끓는 청춘들을 대체 무슨 수로 통제할 것인가. 그런 청년들의 일탈을 군법이란 무시무시한 단어로 억눌러도 될까.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약자 D.P.

(요번 링크는 리뷰가 아니라 잡담입니다. ㅎ)

D.P.를 보다 생각난 드라마 만들던 시절 (tistory.com)

 

D.P.를 보다 생각난 드라마 만들던 시절

1. 6년 전. 드라마팀에 있던 시절. 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던 무렵이다. 김보통이란 작가의 '아만자'를 재미있게 봤는데 누군가 'D.P. 개의 날'이라는 작품도 좋다는 얘기

fivecard.joins.com

 

잉글리시 게임

놀이와 스포츠는 언제부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나?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스포츠라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을까? 공을 차서 골에 넣는 것은 즐겁지만, 그 즐거움을 먹고 사는 수단으로 삼아도 되는 것일까? 영국에서 프로 축구라는 것이 탄생할 무렵, '돈을 받고 축구를 하는 것'이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지던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낯선 문제에 접근해 보는 것도 어떤 이들에겐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 같다. (아직 넷플릭스에 있나?)

잉글리시 게임, 프로 스포츠란 어떻게 만들어졌나 (tistory.com)

 

잉글리시 게임, 프로 스포츠란 어떻게 만들어졌나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태곳적부터 있었던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냉장고나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fivecard.joins.com

 

갯마을 차차차

도대체 왜 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영화 <홍반장>TV 리메이크. 뒤늦게라도 한국 로맨틱 코미디 사상 가장 멋진 캐릭터 중 하나인 홍반장이 부활한 기쁨. 물론 조용하지는 않았으나… tvN.

 

괴물

선악이 불분명한 주인공을 선호하는 취향 저격. ‘누구도 믿을 수 없는마음 속 어둠의 심연과 내가 너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니가 여전히 살아 있는 시골 마을 정서가 교묘하게 한데 어우러지는 부분이 비슷비슷한 다른 작품들과 확실한 차별화 포인트다. 심나연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 어려운 완성도. 여진구 신하균은 말할 것도 없고, 김신록은 <지옥>의 김신록 이전에 <괴물>의 김신록. JTBC.

 

지옥

어느날 찾아온 지옥의 겁벌. 그런데 그 겁벌이 대체 무슨 기준으로 주어지는 지 알 수 없게 된다면 세상이 어찌 될까에 대한 이야기. 모든 종교의 오랜 질문을 CG로 풀어낸 K-CONTENT의 수작. 연상호 감독의 한 칼. 

지옥,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법 (tistory.com)

 

지옥,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법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지옥으로 소환되기 시작하고, 어떤 수단도 그 소환을 막을 수 없다. 이 소환은 신의 심판일까? 그럼 그 소환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일까?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

fivecard.joins.com

 

범죄의 희생양      The Victim

2019BBC. 범인도 피해자도 미성년자인 과거의 사건. 당연히 범인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어느날 피해자의 엄마는 한 남자가 어린 시절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라고 SNS에 게시해 버리고, 남자의 일상은 그때부터 지옥이 된다. 법이란. 제도란. 그리고 그걸 운영하는 사람의 태도란.

 

나쁜 아이들(은비적각락)        隱秘的角落

10대 초반 청소년들이 우연히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아이들은 살인범에게 쫓기게 되겠지만 이 드라마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음. 후반의 다소 무리한 진행 때문에 점수를 깎아먹기도 하지만, 예상을 빗나가는 나쁜아이들 이야기는 중독성이 극강.

 

프로페서T          Professor T

하다 하다 벨기에 드라마까지 보게 될 줄은. 결벽증 환자인 천재 범죄심리학 교수인 T 선생이 일선 형사들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 몽크와도 다르고 하우스 박사와도 또 다른 이상성격 교수님의 좌충우돌 활약이 포인트. 형사들간의 로맨스와 T 교수의 아련한 앳 사랑도 시청자의 즐거움.

 

그리고 막상 또 하다보니 열개로 끝내기가 좀 아쉬워서 몇개 더 꼽아 봅니다. 물론 이것들도 추천작.^^

플레이크드

영웅/반영웅을 넘어 이제는 과연 인간 쓰레기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를 얘기해야 할 듯한 시대. 중년에 갓 접어든 한 남자가 있다. 허우대는 멀쩡하고 자칭 직업은 목수. 하지만 실제론 주위 사람들의 호의에 얹혀 살고 있고, 매일 하잘것없는 사기와 몽상, 엽색(?)으로 세월을 보내는게 일이다. 과연 이 남자의 인생도 제 길을 찾아 갈 수 있을까?

플레이크드, 좀 심하게 적나라한 중년남의 실체 (tistory.com)

 

플레이크드, 좀 심하게 적나라한 중년남의 실체

넷플릭스 드라마 <플레이크드 Flaked>를 조금씩 쪼개 시즌 2까지 봤다. 미친듯이 정주행한 건 아니고 시간날때마다 곶감 빼먹듯 계속 보고 있었다. 낄낄대며. 주인공 이름은 칩. 그럭저럭 관리가

fivecard.joins.com

 

지니 & 조지아 Ginny and Georgia

첫눈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엄마와 딸 이야기지만 한꺼풀 까고 들어가면 미스터리, 그리고 두 모녀가 각각 펼치는 연애 이야기. 10대 안에서의 다문화 환경 이야기까지 담으며 세상의 변화까지 엿볼 수 있는 엄청나게 풍성한 보따리가 되었다.

지니 앤 조지아, 가족 드라마의 미래일까. (tistory.com)

 

지니 앤 조지아, 가족 드라마의 미래일까.

왜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가장 최근 끝까지 본 드라마. (다들 그러시겠지만, 요즘은 끝까지 보고 싶은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30세의 엄마 조지아(브

fivecard.joins.com

 

 

그밖에 올해의 작품으로 거론할 만한 드라마들은 <해피니스><철인왕후>, 그리고 <악마판사>입니다. 기본적인 재미도 재미지만, 세 작품 모두 각각 기존의 드라마 틀을 깨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 배우 휴 로리 팬으로서 <로드킬>도 올해의 드라마로 꼽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강추!

여러 사람에게 강하게 추천을 받았던 <석세션>을 비롯해 항간에 화제가 됐던 작품 중 <완다비전>, <록키>, <스위트홈>, <플라이트 어텐던트>는 사뭇 실망스러웠습니다. <브리저튼>, <갱스 오브 런던>, <오징어게임>은 나름 괜찮았으나 추천까지 할 작품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취)

 

, 여러분의 2021년 선택은?

728x90

왜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가장 최근 끝까지 본 드라마. (다들 그러시겠지만, 요즘은 끝까지 보고 싶은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30세의 엄마 조지아(브리앤 하위)와 15세 딸 지니(안토니아 젠트리)의 이야기다. 백인 금발 미녀인 조지아가 가출 소녀 시절에 흑인 예술가 자이온을 만나 지니를 낳았고(그래서 지니의 외모는 흑인), 바로 헤어지는 바람에 조지아는 혼자서 아빠가 다른 남매를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미모와 사악한 지능을 최대한 활용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두운 구석이 많다. 

<지니 & 조지아>는 이들 모녀가 백인 중산층이 모여 사는 미국 동부 소도시로 이사오면서 시작된다. 이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조지아의 남편(몇번째 남편인지는 분명치 않다)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 조지아가 유산을 받기 때문인데 과연 이 죽음이 자연사인가는 드라마 후반까지 이어지는 미스테리다. 

워낙 미모가 출중한 글래머 엄마와 매력적인 딸은 새로운 환경에 오자마자 각자 삼각관계에 휘말린다(몇몇 분들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엄마와 딸이 삼각관계의 꼭지점을 이루지는 않는다). 엄마+두 남자, 딸+두 남자의 구도.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정통 삼각관계’를 미국 드라마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두 남자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도 최대한 선의와 정성을 다해 자신을 어필하는 구조다. 이런 이중 연애 드라마 구조는 한때 미국 드라마의 주류 중 하나였던 영 어덜트 장르가 <가십걸>로 소멸하고, 새로운 시장 확보를 위해 성인 연애 장르와 결합하려는 시도로 보여 매우 신선했다. 

연애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결국 이 이야기는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많은 걸 감추다니 기분나빠’라는 틴에이저 딸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런 배은망덕한 것이’라는 엄마의 갈등 이야기로 압축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건 <브레이킹 배드>의 변주이기도 하다. 

아무튼 근래 본 몇몇 작품 가운데 가장 다음편이 궁금해 후다닥 볼 수 밖에 없었던 작품. <위기의 주부들> 풍의 중산층 주택가 미스터리에다 미남 미녀가 넘쳐나는 하이스쿨 러브스토리, 그리고 시대에 걸맞는 PC함까지 한 편에 담으려 애쓴 역작이다. 흑인인 지니의 두 남친 중 하나는 대만계 중국인 2세다. 남친 집에 놀러간 지니는 또렷한 한국어로 “저, 지금 무지 떨려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즘 ‘쿨한 것’이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이라는 점에서, 현재 미국 콘텐트 기획자들의 고민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어떤 걸 만들어야 최대한 넓은 폭의 OTT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라는 느낌도 든다. 연애, 미스터리, 영 어덜트, 가족, 상당히 많은 키워드로 묶일 수 있다.

아무튼 속편이 곧 나온다고.

728x90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지옥으로 소환되기 시작하고, 어떤 수단도 그 소환을 막을 수 없다. 이 소환은 신의 심판일까? 그럼 그 소환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일까?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믿음은 곧 깨져간다. 

<지옥> 단상. 

1. <오징어게임>이 무서워서 못 봤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그러면 대체 <추격자들>이나 <곡성>은 대체 다 누가 본 거였나 의아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슬래셔 계열의 호러는 매우 싫어하고 윤종찬의 <소름>이나 장재현의 <사바하>같은 영화에 열광하는데, 이런 장르에서 <지옥>은 오랜만에 재미있게 몰입할수 있었던 작품이다. 

2. 다만 넷플릭스 오리지날 시리즈를 볼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옥>도 예외가 아니다. 주제와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고 연출도 좋지만, '좀 길다'. 물론 주관적으로 길다. 1~3부까지 훌륭한데 4~6부는 정말 작품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면 2회 정도로 줄였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여기에 개인적인 취향으로, 묵시록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의 몇가지 뻔한 캐릭터 고구마 공식들(이를테면 스토리를 이끌어야 할 기자나 형사 캐릭터는 고독한 고집쟁이라서 남의 말을 안 듣고, 남들도 그의 말을 안 듣고, 늘 혼자 움직이는데다 항상 판단도 관객보다 한박자 늦어서 결국 곤경에 처한다는)을 매우 싫어하는 편인데, 굳이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안이함이 좀 아쉽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재난에 대해서는 과학계와 군, 경찰 등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결과는 별 차이 없다고 해도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의 수준에 비해 사회적인 대응이 너무 무기력하고 별 고민이 없다. "지구상에 없는 물질이랍니다" 만으로는 아무래도 아쉽다.



4. 개인적으로 전편을 통해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6부에서 이동욱(캐릭터 이름임)과 새진리회 최고간부들이 스피커폰을 켜고 대화하는 장면. 이런 장면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걸. 

5. 유아인이 교주 역을 맡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구나 아 이건 대박이구나 생각했겠지만, 역시 유아인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과연 이 역할을 누가 이보다 더 잘 소화할 수 있었을까 싶다. 

P.S. 글로벌하게 또 터진듯. 뭐랬어요. <오징어게임> 말고도 앞으로 줄줄이 많다니까요.

728x90

 

영어 제목이 Maid라니까 많은 사람들이 혹시 전도연 나오냐는 드립을 쳤다. 한국 제목은 <조용한 희망>. 사실 잘 지은 제목은 아니다. 

스무살 나이에 아기 엄마가 된 주인공. 알콜중독과 폭력성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한 남편에게서 아이를 떼놓기 위해 대책없이 집을 나온다. 기댈 곳?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자칭 예술가 엄마는 딱 봐도 사기꾼인 연하 남친에게 빨대를 꽂혀 살고 있다. 일찌감치 재혼한 아빠도 새엄마 눈치에 선뜻 뭘 어쩌지 못하는 상태. 주머니엔 잔돈 몇푼 뿐이고 일자리는 아예 가져본 적도 없다. 대체 이 주인공은 뭘 할 수 있을까. 좋은 길이건 나쁜 길이건, 선택지란게 있긴 할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고구마를 100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이 느껴지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건 그냥 시작이다. 과연 이 정도로 아무 대책이 없는 상태가 있을까 싶은데, 보다 보면 문득, 이 주인공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형편상 진학은 못했지만 대학 장학생으로 뽑힐만한 재능이 있고, 매력적인 외모도 갖고 있다. 낙천성과 의지는 캔디급이고, 신라면에 물을 부어 먹는 수준(이봐 그건 컵라면이 아니라 봉지라면이라고!!)의 식생활에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강인한 체력도 갖췄다. 마약은 쳐다도 안 본다. 

그러니 비슷하게 암담한 생활의 늪에 빠진 다른 많은 여성들에겐 이 드라마는 '주인공 혼자 잘나서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인생을 설계하는 판타지'로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드라마다 보니,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데, 주인공에게 저런 능력치들이 없었다면 과연 저런 호의를 제공받을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얄팍한 가난 포르노에 그치지 않는 것은, 시청자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과 애정이 굵은 명조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끔 생각한다. 대체 내가 낸 세금은, 그 많은 복지예산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많은 공무원들은 뭘 하길래 신문 기사엔 늘 안타까운 가난과 한숨이 실리는 걸까. 아버지 간병을 떠안았다가 빚만 지고 존속살해로 재판을 받고 있는 청년이 그 지경에 빠지도록 이 사회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바로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데 최적화된 영화였다면,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흔히 말하는 '사회 안전망'이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때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차분하고 설득력있는 접근을 보여준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지만 결코 복지 선진국은 아니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사회에서 누군가 인생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과연 누가 당신을 받쳐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충실한 조명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난국을 맞은 사람들을 찬찬히 보면 80~90%는 자업자득이라고. 대개 그런 이들은 실패가 유전자에 박혀 있고,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 손까지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도 한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코로나 사망자보다 자살자가 훨씬 많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시각이 있는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조용한 희망>은 그런 시각에 맞서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시스템도 세상 모든 루저를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특히 어떤 젊은이가, 조금만 도와주고 믿어주면 자기 힘으로 헤쳐 나올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도 그토록 힘들어한다면, 그것 하나 구제할 능력이 없다면 과연 이런 나라를 소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나. 별 것 아닌 당신의 도움 하나로 한 인생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 마다할텐가. 정말 당신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매년 매달 내는 세금이 너무너무 아까운 분들은 한번쯤 보셔도 좋을 드라마. 반면 내 아이들이 늘 남들보다 앞서가며 번듯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사회라는게 원래 밑에 깔아주는 애들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절대 보면 안 될 드라마. 어쨌든, 강추. 

P.S. 웬만하면 이미 아시겠지만 엄마 역 앤디 맥도웰과 주인공 마거릿 퀄리는 실제 모녀간. <원스...>에 단역으로 나왔다. 살짝 미국 한효주의 느낌?

728x90

넷플릭스가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 쉽지 않을 거라는 의견을 말하자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2배속 기능이 없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적응이 빠른 넷플릭스는 어느새 1.5배속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얼마전 화제가 된 어떤 작품의 특정 회차에 대해 지인과 대화를 나눴다. "재미있던데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네. 2배속으로 보니 볼만하던데요."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요즘 이렇게 대답한다. '스킵이나 2배속 기능을 쓰지 못하게 하는 작품'.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오갈 때마다 결말에 대한 예측이 달라지는 작품, 그런 미묘하고도 스릴 넘치는 힘겨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감히 스킵해가며 볼 수 없는 작품을 보고 싶었다. 

최근 그런 작품 하나를 봤다. 영국 드라마 <라인 오브 듀티 Line of duty>. 흔히 내사 internal affairs 라고 불리는 조직이 이 드라마에선 반부패 Anti-corruption 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실제 영국 경찰에 있는 편제인지는 모르겠다. 이 부서의 역할은 일선 경찰들의 직무 수행중 탈법행위를 조사하고, 궁극적으로는 외부 세력과 결탁한 현직 경찰들을 적발하는 데 있다. 

적이 어디 있는지 알고 나서 공격해 격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진짜 문제는 도대체 어디를 때려야 하는가, 즉 적의 좌표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고문과 협박으로 털어놓게 할 수 있다면 조금 쉬워질 수도 있겠으나, 조사하는 자도 조사받는 대상도 경찰이라면 모든 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드러나 봤자 경찰 조직의 위신 추락이라는 이유로 수사 자체를 꺼리는 조직의 생리도 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인지를 뼛속 깊이 느끼게 해 준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재미없고 답답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법도 한데, 정말 놀라운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랬더라면 시즌 6까지 절대 가지 못했을 듯. 어지간한 내공의 작가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과물이다. 

가장 선명한 특징은 여배우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킬리 호스, 탠디 뉴튼, 지나 맥키, 폴리 워커 등 탄탄한 중년 연기자들이 극의 흐름을 쥐락펴락한다. 반면 잘생긴 남주도, 그럴듯한 러브라인도, 입이 떡 벌어지는 액션도 전혀 없지만 몰입감은 보장할수 있다. 

진심으로, '이런게 드라마다'.

728x90

원작 D.P, 개의 날

 

1. 6년 전. 드라마팀에 있던 시절. 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던 무렵이다. 김보통이란 작가의 '아만자'를 재미있게 봤는데 누군가 'D.P. 개의 날'이라는 작품도 좋다는 얘기를 했다.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2인조 헌병 이야기. 흥미진진. 이거 너무 재미있잖아! 

2. 원작을 사자고 제안했는데 전원 반대. 군대 얘기를 누가 보냐(아...). 칙칙하다(아닌데). 너무 어둡다(아닌데). 아무튼 좌절. 누군가 원작을 샀다는 소문을 들음. 

3. 6년 뒤. '이거봐! 내가 뭐랬어! 잘만 만들었고만!' 이라는 생각보다는 '하긴. 6년 전 환경이면 안 먹혔을지도 몰라. 방송에선 안 통했을지도. 16부작 얘깃거리는 안 나왔을지도...'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좋은 원작이 좋은 제작진을 만나는 건 드문 운이다. 얼마나 많은 좋은 원작들이 주인을 잘못 만나 얼마나 묻히고 있는지. 한준희 감독을 만난 건 '개의 날'의 행운이다.

4. 꼭 사서 만들어보고 싶던 웹툰이 '개의 날' 말고 세개 정도 더 있었다. 하나는 사려다 경쟁에 밀려 못 샀고(그러나 그 제작자는 드라마를 만들지 못했다), 다른 한편은 열심히 우겨 원작을 확보했지만 제작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결과를 보지 못했다. 기약도 없다. 

5. 마지막 한편은 사자고 했을 때 '개의 날' 때보다 더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번엔 "정말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냐"는 반문을 몇 차례나 들었다. 무책임한 어른들 때문에 엉뚱하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이들 이야기라서 한국 학원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열심히 주장했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검색해 보니 그새 누군가 사서 열심히 만들고 있고, 2022년 쯤에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잘 만들어주길. 

6. 모든 일은 천.지.인이 합쳐져야 이뤄지는 법. 이 작품은 지금이 제 때일까? 만약 2017~18년에 나왔다면 제작단계부터 관심이 뜨거웠을텐데.

...어쩌면 나는 너무 빨랐던 걸까? ㅎㅎㅎ

#아니 #깜냥이안됐던거지

728x90

아... 읽은 책도 없는데 어떻게 10권이나 꼽지, 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쓰다 보면 꼭 10권이 넘어가게 되더라는. 이상하게 작년에도 막상 써보니 13권이었는데 이번에도 써 보니 15권이네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이 리스트는 너무나 순수하게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겁니다. 제가 1년에 책을 50권 100권씩 읽는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권위 없습니다.

물론 제게 <올해의 책>이 무슨 책인지는 너무나들 잘 아실 것이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고 익사이팅한 책입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실 듯...

아무튼, 본격적인 리스트는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재와 미래 /이브 해롤드

2020년의 드라마로 단연 탑이었던 <이어즈 앤 이어즈>를 보신 분들에겐 트랜스휴먼이란 말이 낯설지 않으실 듯. 작가가 미치오 가쿠의 책을 읽었는지 육신의 제약을 딛고 하드디스크 안에 안주한 인간이 트렌드가 되는 근미래를 묘사했다. 개인적으로 2020년의 은근한 화두는 트랜스휴먼이었던 듯. 그 의미를 참 읽기 쉽게 풀이한 책으로, 이 책을 읽고 <이어즈 앤 이어즈>와 아마존 드라마 <업로드>를 보시면 개념 정리 끝. 상상력이 뭉클뭉클.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  /구정은 이지선

헬렌 켈러는 우리가 알던 그런 가엾은 장애인 소녀가 아니었다. 메건 마클은 그냥 왕실을 시끄럽게 만든 제2의 사라 퍼거슨이 아니었다. 그리고 산드라는 인간 여성이 아니었다. 앙겔라 메르켈이 아직도 독일인의 반성과 전체주의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지금껏 말하고 있는 것은 과거라는 것의 청산이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년에도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을 추천 리스트에 슬쩍 얹었는데, 구정은 작가의 시선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책값이라면 참 싸다.

 

 

 

위험한 생각들 /존 브록만 편

존 브록만이라는 놀라운 인맥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슈퍼 편집자(?)의 슈퍼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책. 100명의 석학들이 당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각자 그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문명의 발달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지성체들은 아주 시시한 일들에만 관심을 갖는 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멸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문명이 태어나 사라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내용으로 채워진 책. 어찌 보면 미친 책일 수도, 어찌 보면 책 100권을 읽는 느낌일 수도. 2007년 책이지만 아직 흥미롭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사실 한 저자의 책을 두 권 넣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개인적인 느낌으로 두 책은 결국 똑 같은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가 표면적으로 공부인(?)’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면 앞의 책은 그 구체적인 예로 공자와 논어를 들고 있다. 공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입체적 조명이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평생 잊을 수 없을 한 줄이 남았다. 道之不行, 已知之矣

 

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르 꼬르뷔지에 같은 대가들이 동양 건축의 요소를 원용했다, 이런 얘기는 여기저기서 듣곤 한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이 책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통찰은 아무래도 '액자의 비유'다. 동양 건축에서 자연은 건축의 일부가 되고, 안방에 누워서도 장지문을 열면 앞산 뒷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럼 처마는 액자의 역할을 하고, 처마 안쪽의 단청은 그 자연을 바라보는 액자의 장식 역할을 한다는 얘기. 이런 인사이트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비밀의 계절 /도나 타트

어느 대학도시. 도대체 현실에서 쓸모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리스 고전 문학에 심취해 고전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는 폐쇄적인 학생 동아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선 서로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오고 가고, 마침내 그 결과는 비극으로 이어지지만 아직 끝은 멀었다. 밀접한 사람들 사이의 애정과 갈등 묘사는 러셀 웨스트브룩의 드리블 솜씨를 연상시킨다. 긴 소설이지만 책장이 엄청나게 빨리 넘어가는 책.

 

요리본능 /리처드 랭엄

원제는 Catching Fire. 인류학자가 음식에 주목해 온 것은 마빈 해리스 이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랭엄은 매우 좁은 주제, 불의 사용에 초점을 맞춘다. 찰스 다윈도 언어를 제외하면 아마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했다지 않는가. 불로 익힌 음식을 먹은 것이 문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다들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냈을지에 대해 이렇게 깊이있게 추적한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참고로 침팬지도 구운 고기와 날고기 중에서 구운 고기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염감이 흘러 넘치지 않는가?

 

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개인적으로 2020년의 소설. ‘플로리다라는 말 속에 깃든 낭만적인 태양, 긴 해변, 레게 뮤직과 모히또, 디즈니 월드 같은 이미지를 싹 날려 버릴 수 있는 단편집. 굉장히 좋았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그랬듯 플로리다는 어쩐지 낙원 같지만 한꺼풀 들추면 전혀 다른 곳이라는 비유로 쓰이는 느낌이다. 이 단편집 속의 플로리다는 파충류들이 또아리를 틀고, 태풍이 불고, 진흙과 모래 틈으로 발이 빠지고, 야생 표범이 밀림 속에서 눈을 빛내는 곳이다. 가장 치열한 삶의 공간이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뱀과 파충류 사이에서 감정을 잃고 성장한 한 소년 이야기, <둥근 지구, 그 가상의 공간에서 At the round earth's imagined corners> 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내용상으로는 잘 짜여진 책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하나의 주제를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풀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그런게 문제가 아니고, 참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해준책이다. 특히 이 나라의 공적처럼 된 중년 남자로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쉽게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책. ‘양복 옷 태가 망가질까봐 전화기는 비서가 휴대해야 하는사람, KTX를 타도 자기 자리 앞에는 아무 것도 두지 않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모시는 방법에 대한 인수인계 리스트가 두 페이지나 되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노동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책.

 

나쁜짓들의 역사 /로버트 에반스

재미와 교양? ‘인간은 어떻게 해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등의 소재를 설득력있게 풀어 주는 책. 이런 식의 사소한(혹은 사소하지 않은) 악덕들이 인류의 문명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고, 때로 결정적인 발전을 이루게 했다는 내용의 책. 물론 대부분의 문명은 이런 사소한 악행보다는 보다 많은 인간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착취하려는 본격적이고 거대한 악의에 의해 더 많이 발전했겠지만, 이런 식의 시선을 슬쩍 바라보는 것도 상당한 지적 포만감을 준다.

 

화이트호스 /강화길

2020년의 한국 소설. 2019년 박상영을 제외한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에게 많이 실망했던 터에 단편 <음복> 한 편을 읽고 이야, 이 작가는 진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단편집 <화이트 호스>를 읽고 나니 이 작가의 본진은 고딕 소설. 사실 몇몇 작품들은 그냥 배경만 한국으로 옮겼을 뿐 그냥 서구의 낡은 성을 배경으로 한 인물과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런 자신의 본진에서 나와 한국과 화해하려는 첫 본격적 시도가 <음복> 아니었을까. 단편집을 읽고 나니 이 작가의 다음 행보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갈라테아 2.2 /

1990년대의 시선으로 인공지능을 상상했던 결과들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나와 있다. 그걸 문학에 적용시켜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사실 이 소설의 리뷰를 썼다가 저장을 하지 않아 날려 먹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영화 ‘Her’의 원작 같은 느낌. 물론 이 속도로 인공지능을 교육하다간 어느 세월에 교육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고색창연하고 비장한 느낌에 스윽 빠져드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P.S. 마지막 대사는 고전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따 온 것.

 

일 잘 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말합니다 /박소연

요즘 기업에서는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다 얻어 걸린 책. 정말 기업내/조직내 커뮤니케이션이란 어떤 것인가를 간명하게 설명하는 책. 물론 현실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이 실려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읽어 두면 도움이 될 책. 특히 선배들이 내 말을 도무지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고민하는 젊은 사회인들이 읽으면 좋을 듯.

 

728x90

극장과 영화는 아마도 코로나 사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 중 하나. 개인적으로도 극장을 몇번이나 갔나 싶습니다. 이번에 꼽는 영화들도 거의 모두 방구석에서 본 것들이죠.

그런데 문제는 만인의 극장이 된 넷플릭스의 단편, 영화분야가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장편 시리즈 부문이 상대적으로 훨씬 낫고, ‘영화라고 할 수 있는 2시간 내외의 단편 작품들은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의 이름이 간판에 걸려 있어도 신뢰감이 뚝 떨어집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길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용 영화는 프로듀서건, 투자사건, 배급사건, 온갖 시누이들이 적절한 길이를 요구합니다. 아주 긴 영화의 경우 어떻게 해서든 그 길이를 줄이라는 요구를 해대죠. 아예 <인피니티 워><신과함께> 처럼 1,2부로 나누어 개봉을 하든가.

하지만 상대적으로 OTT는 시간에 너무 관대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상영시간표가 없는 플랫폼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작가(즉 감독)의 요구를 프로듀서들이 최대한 받아준다는 느낌. 그러다 보니 러닝타임은 한없이 길어지고, 아무리 집에서 본다 해도 관객의 인내심 가장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단의 호평을 한몸에 받았던 <로마><아이리시맨>도, 최근 호평이 있었던 <미드나이트 스카이>도 저렇게 길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아무튼 액션 대작 블록버스터가 없는 2020년은 참 우울했습니다. <매버릭>을 꽤 기대했는데 볼 수 없었고, 2020년 기대했던 작품 중 유일하게 개봉한 <테넷>이나 미국 평단이 극찬했던 <멩크>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취향 밖. 그리고 OTT로 직행한 액션 대작들은 어찌나 이렇게 죄다 함량 미달인지. 여러 모로 우울했습니다.

그래도 몇몇 작품들은 여전히 참 좋았습니다. 늘 그렇지만 기준은 <내가 2020년에 본 영화>. 가능한 한 최근 작품들 위주로 고르지만, 어쨌든 제작 연도는 일단 무시합니다.

 

작가미상 Never Look Away  Werk Ohne Autor

플로리안 폰 도너스마르크. <타인의 삶>의 감독. 2019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하나의 예술가가 태어나기 위해 그 시대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는 예술은 그 시대와 어떻게 호흡하고, 어떻게 그 시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 좀 늦긴 했지만 2020년 본 영화 중에는 단연 최고. 특히 태어나서 본 미술 소재의 영화 중에는 최고.

작가 미상, 역사는 어떻게 작가를 만들어내나 (joins.com)

 

작가 미상, 역사는 어떻게 작가를 만들어내나

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 <타인의 삶>으로 알려진 이 독일 감독의 2018년 작품. <작가 미상>은 독일어 원제인 , 즉 ‘작가 없는 작품’에서 직역

fivecard.joins.com

날씨의 아이 Weathering With You の子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와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된 소년. 지독한 장마 중에 봐서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신카이 마코토의 다른 영화에 비해 훨씬 선명한 메시지. 이것이 일본에서 새로운 세대(밀레니얼이라고 해야 할지,     MZ라고 해야 할지)를 바라보는 시선인가. 아니면 MZ가 기성 질서에 대해 내는 목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듬.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던 문제 해결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느낌.

날씨의 아이, 일본인도 달라졌다 (joins.com)

 

날씨의 아이, 일본인도 달라졌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날씨의 아이>를 선택했다. 어쩌면 

fivecard.joins.com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The Trial of the Chicago 7

<뉴스룸> 시리즈의 작가로 유명한 애런 소킨이 직접 연출까지 맡은 작품.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시카고에 모인 반전주의자들이 한 법정에서 나란히 선 상황을 그린 영화. 당시 반전 세력을 구성하던 대학생, 히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무장흑인세력인 블랙 팬서까지 다양한 이들이 말도 안 되는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이 때론 웃기고 때론 서글픔. 선명한 수작.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

다스 베이더 아니고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전기 영화. 그렇게만 보면 뻔할 것 같은데, 뻔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 자칫하면 연애도 잘 하고, 자식 농사도 잘 짓고, 남편 봉양도 잘 한 데다 경력도 관리해낸슈퍼우먼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비 고비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빠지지 않아 마음이 놓임. 아무래도 여성 감독 미미 레더의 역할인 듯도 하고 펠리시티 존스의 인생작.

 

브렉시트: 치열한 전쟁  Brexit

토비 헤인스라는 연출가를 주목하게 된 작품.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 공과를 가리는 드라마는 아마도 영국 미디어의 독보적 생산품인 듯. 특히 브렉시트라는 거대한 역사적 결과물을 만들어 낸 도미닉 커밍스라는 인물을 통해 세계적인 반 이성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를 보여줌. ‘현대를 이해하고 싶은 분들이 보셔야 할 작품.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잘생김을 포기하고 열연.

fivecard.joins.com/1415

 

브렉시트,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영화로 본다면

영국이라는 나라의 전통이겠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과감한 극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화 <브렉

fivecard.joins.com

 

 

미드소마  Midsommar

아리 애스터의 <유전>도 인상적이었지만 <미드소마>는 그 결정판. 북유럽의 민속(?) 행사를 관찰하러 간 대학생들에게 악몽이 찾아오는 이야기. 애스터에게는 공포의 구현을 위해 으슥한 지하실도, 컴컴한 밤도, 갑작스런 조명의 변화도 필요없는 듯. 그냥 백주 대낮에 일어나는 일들도 얼마나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수 있는지 보여는 작품. <작은 아씨들>을 보고 플로렌스 퓨에 대해 반감이 생긴 분들을 위한 치료제 역할도.

 

오피셜 시크릿   The Official Secret

이라크전 참전을 앞둔 미국과 영국 정부의 불법적인 움직임을 알게 된 감청요원 키이라 나이틀리. 과연 국익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놀랍도록 공감 가게 풀어냄. 소품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반한 정서 묘사가 아주 뛰어남. 개빈 후드 감독을 잘 모르는 분들은 반드시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보실 것. 어찌 보면 연극적인 소품이지만 놀라운 감동과 현실을 요약하는 통찰이 담긴 명작.

 

그레이하운드  Greyhound

이런 식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가 하고 포기할 때쯤 나타난 대작 전쟁 영화. 2차대전 초반, 독일 U보트들의 기습으로부터 수송선단을 지켜야 하는 구축함 함장 톰 행크스의 열연이 실감나는 전투와 맞물림. 개인적으로 잠수함 영화 마니아를 자처하는 터라 애정이 좀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박진감 넘치는 고전적 전쟁영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특히 강추. <U-571>같은 엉터리를 연상하시면 곤란.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 Rose Island

한 몽상가 엔지니어가 이탈리아 영해 바로 바깥에 가로 세로 20m 크기의 인공섬을 만들면서 시작되는 영토분쟁(?). 놀랍게도 실화 기반. 시대가 바로 세계적인 격동기였던 1968년이라는 데서 뭔가 슬슬 반체제의 냄새가 난다. 좀 더 톡 쏘는 맛을 살릴 수도 있었을 영화지만 이탈리아 영화라 그런지 어딘가 <인생은 아름다워>의 새로운 버전 같은 느낌도 그럴 듯. 넷플릭스로 볼 수 있음.

 

조조 래빗 Jojo Rabbit

연말에 이 영화 얘기를 하자니 사뭇 뒷북이긴 하지만 어쨌든 훌륭한 작품. 스칼렛 요한슨은 아카데미시 여우조연상을 받았어야 미땅하다고 생각. 소년의 눈으로 본 2차대전중의 독일에서 현실과 환상의 교차를 매혹적으로 그려낸 작품. 이 영화 이후 타이카 와이티티라는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유머감각을 보유한 연출자로 기억될 듯.

기본적으로 2019년을 대표하는 영화를 뽑으라면 <기생충>, <조조 래빗>, <포드 v 페라리>, <결혼 이야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정도를 꼽게 됨. <1917><아이리시맨>, <페인 앤 글로리>, <두 교황>, <나이브스 아웃>은 거기 비하면 아무래도 좀 처지는 느낌. <조커><작은 아씨들>은 만들어지지 않는게 나았을 것 같은 작품들. 그 중에선 역시 <기생충>의 진정한 경쟁 상대는 <조조 래빗>뿐이었다는 생각. (물론 개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괜찮은 영화가 없다 없다 했는데 그래도 10편은 금세 채워집니다. 그런데과연 내년에는 어찌 될지. 이 리스트의 영화 대부분이 2019년에서 이월된 작품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과연 2020년에 이월될 영화가 있을까 싶은

다 꼽고 나서 한국 영화를 한 편도 꼽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밥정

물론 본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편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겠으나 큰 영화 몇 개가 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결함들이 보여 탑10에 꼽기에는 다들 좀 아쉬운. 그 가운데서 <밥정>이 마음에 꽂힘. 방랑식객이 외딴 데 사는 할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밥을 해드리는 이야기. 그 배경에는 두 어머니에 얽힌 그의 사연이 있다. 박해령 감독. , 개인적으로는 <해치지 않아>도 괜찮았음.

 

그리고 2018~2020년 작품은 아니지만 어쨌든 번외로 추천.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시작으로 <데몰리션>, <와일드> 등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를 몰아보던 중 2011년 작이지만 공유하고 싶은 영화라 리스트에 슬쩍. 전생과 인연, 본능과 감각을 연결시킨 작품. 작중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DJ다 보니 음악도 인상적(물론 이 감독의 영화들은 대부분 OST가 인상적). 잠 못드는 겨울밤에 보시면 좋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

올해의 재개봉 러시 중 한편(본래 2004년작). 필자가 원천적으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광팬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는 단연 초강추작. 배 위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일생을 보내는 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야기.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토르나토레/모리코네 듀오는 피아니스트 이야기라는 소재를 만나 관객을 초토화시키는 화력을 과시. 그런데 이 영화는 대표적으로 관객의 평가가 높은 데 비해 평론가 평점은 낮은 작품(rotten tomato에서 9점대 vs 5점대). 이런 세상에서 평론가란 대체 무엇인가. 

 

P.S. 그리고 이런걸 써 올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보신 것 중에서 좋았던 것들도 추천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올해 방콕하시면서 많이들 보셨죠? 많은 추천 기대합니다.

그리고 작년 리스트도 첨부합니다.

개취로 뽑아본 2019년 10대 영화 (tistory.com)

 

개취로 뽑아본 2019년 10대 영화

아주 오랜만에 올해의 10대 영화를 꼽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기준은 개취구요, 대상은 '올해 본 영화 중 2018, 2019년에 제작된 영화'로 하겠습니다. 대상은 약 70~80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fivecard.joins.com

 

728x90

영국이라는 나라의 전통이겠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과감한 극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화 <브렉시트, 치열한 전쟁(원제는 그냥 'Brexit')>. 한국으로 치면 '역사적인 평가가 완성되지 않은 사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건드려도 될까. 명예훼손이나 사실 왜곡 시비로부터 제작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이다. 면전에서 사실상 욕설을 퍼붓고도 "Nothing personal"이라고 퉁칠 수 있는 문화랄까. 


영화 <브렉시트..>의 주인공인 도미닉 커밍스(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실제로 브렉시트의 심장으로 불리는 인물. 당시 'EU 탈퇴'라는 이슈를 놓고 수많은 주장으로 뒤섞여 있던 탈퇴파의 오합지졸들을 하나로 규합, 아무도 예상 못한 승리를 거둬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이 '승리'에 대한 공헌 덕분에 보수당의 압승과 보리스 존슨 총리 취임에까지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존슨의 최순실'이라고까지 불렸지만 몇가지 실수와 함께 스캔들이 생기자 존슨은 커밍스를 손절했다. 지난달 커밍스의 사임 소식은 국내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아주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토사구팽'이란 타이틀이 달려 있었다. 



[영화 이야기로 넘어와서] 커밍스의 대척점에는 크레이그 올리버(로이 키니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카메론 총리의 공보비서관. 존슨 내각에서 커밍스가 하던 것과 비슷한 역할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EU 잔류 운동의 홍보를 진두지휘한다. 그런데 이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1차적으로 커밍스는 정확한 캠페인의 정석을 따른다. 너저분한 주장과 다양한 탈퇴세력 메시지를 'vote leave'와 'Take back control', 단 두마디로 정리한다. 탁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커밍스가 집중 공략한 사람들이 누구로부터도 관심받지 못했던 소외계층과 저소득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 이들은 'Take control'을 했던 적이 없다. 그런 이들에게 'back'이라는 환상을 심어 준 것이 천재의 솜씨란 생각이 든다. 

여기 맞서는 올리버의 진영에는 훨씬 유능한 인력들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밍스 진영이 집요하게 SNS 등으로 퍼뜨리는 가짜 뉴스(예: "EU의 국경 개방때문에 터키인 7천만이 영국으로 유입될 것이다")에 공식적인 채널로 방어하는 올리버 진영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공세를 취하면 '지킬게 많은' 사람들은 버틸 재간이 없는 법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올리버가 탈퇴 지지층을 분석하기 위한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지켜보다가,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직접 그룹 속에 뛰어들어 '왜 EU에 잔류해야 하는지' 설득하려 시도하는 부분. 올리버의 언어, 올리버의 논리는 이들과 전혀 섞이지 않는다. 올리버를 비롯한 영국 정치의 엘리트들이 밑바닥 민심과 얼마나 유리되어 있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토비 헤인스 감독의 역량을 느끼게 한다. 

두번째는 커밍스와 올리버가 투표 직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 올리버는 커밍스에게 '영국 정치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아사리판으로 만드니 좋으냐'고 공격한다. 하지만 커밍스 역시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며 '너와 네 동료들은 너무 오래 권력에 익숙해진 탓에 사람들이 왜 변화를 원하는지 모른다'고 일축한다. 자신은 새로운 룰에 따른 게임을 하고 있다는. 그에겐 룰이 바뀐 걸 모르고 반칙을 주장하는 적들이 우습게 보일 뿐이다. (이런 대화가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적 허구겠지만 탁월하다.) 



물론 커밍스는 승리를 거뒀지만 그 승리가 과연 승리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선 답을 할 수 없었다. 과연 민중은 권력을 되찾았을까? 커밍스의 캠페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인 양극화는 조금이라도 해결됐을까? 지금 커밍스는 밖에서 보기에 그렇게 쉬워 보였던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가를 곱씹고 있는 건 아닐지. 

딱딱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감각적인 영상과 툭툭 터지는 영국식 유머 때문에 보기 힘들지 않다. 브렉시트에 이어 트럼프의 승리와 좌절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반 이성' 흐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왓챠에 있음. 알고 보니 2019년 초 이미 TV로 방송된 적도.)

 

728x90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날씨의 아이>를 선택했다. 어쩌면 며칠 전 한강을 건너다 본, 침수된 한강시민공원과 텅빈 올림픽대로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수도. 한번 보시기를 권함. 개인적으로, 보고 난 느낌은 <파이트 클럽>때와 매우 비슷하다.^^)

섬에서 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16세 소년 호다카는 우연히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18세(!) '날씨 소녀' 히나를 알게 되어 그 능력을 활용할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날씨 소녀에게는 능력의 댓가로 겪게 되는 어떤 운명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감성보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끝없이 내리는 비는 누가 봐도 일본의 쇠퇴를 상징하는 느낌. 이미 1980년대 정점을 찍었던 일본은 아직 당시의 호황과 번영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권력을 쥔 국가다. 그런 시대를 모르는 다음 세대는 그 후유증만 고스란히 떠 안았다. 심지어 그 다음, 지금의 청소년들은 그런 갈등조차도 남의 얘기다. 잃어버린 몇년 어쩌고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세상이었는데 어쩌라고. 그런 세상을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결국 히나는 자신의 '소명'을 다 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호다카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왜 그걸 우리가 감당해? 남들보다 뛰어나서? 할 수 있으니까? 천만에. 설령 나 하나 희생해서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해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럴 이유는 없지.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지? 남들이 나에게 대체 뭐길래?

이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결국 <날씨의 아이>는 우리 세대가 교육받을때 일제때 교육받은 선생님들이 늘 염불처럼 외웠던, 그리고 아직도 태극기 할배들이 '한국이 일본 발뒷꿈치도 못 따라가는 이유'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멸사봉공과 메이와쿠의 문화에 한마디로 빅엿을 날리는 얘기였던 거다. 



물론 에바 팬들은 이미 그런 정서의 애니메이션을 몇십년전에 봤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음습한 오다쿠 문화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게 뒤에 숨어서 아무도 못 알아듣게 혼자 중얼중얼하는 느낌이 아니라, 어른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웃으며 얘기하는 느낌이랄까. <날씨의 아이>는 두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 도쿄가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보여준다. 웃음이 나온다. 그래. 까짓거 그러면 어때.

<너의 이름은>이나 <초속 5cm>의 서정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작품. 결국 이 작품은 그들에겐 그들의 세상을 만들 권리가 있다, 라고 허락하듯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꼰대스러운 짓이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아직까지도 세상과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눈을 꼭 감은 채, 30여년 전 책에서 읽은 '도덕적 당위'가 불변인 줄 알고 있는 한국의 21세기 사대부들이 제발 봐야 할 영화일수도 있다.

다 떠나서 작화와 연출은 압도적. 음악 역시 많은 부분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시키는데, 연주곡에 비해 보컬이 들어간 곡들은 매우 실망스럽다. ...뭐 이건 개취라 어쩔수가.

728x90

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 <타인의 삶>으로 알려진 이 독일 감독의 2018년 작품. <작가 미상>은 독일어 원제인 <Werk ohne Autor>, 즉 ‘작가 없는 작품’에서 직역한 것. 영어 제목인 <Never look away>는 소년 쿠르트에게 이모 엘리자베트가 해 준 말에서 따 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작품.

2.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따라가고 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두각을 보이던 시점에 서독으로 망명했다는 점, 동독에서 그렸던 대형 벽화는 그가 탈출한 뒤 즉시 지워졌다는 점 등이 영화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의 가족사 디테일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3.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의 원혼이 된 사람들은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히틀러와 조언자들은 집시, 정신병자, 심신장애인, 심지어 소아마비 환자들까지도 우월한 순수 게르만 민족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세하거나 수용소에 가둬버렸다.


4.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군사법정에서 나치 부역자들을 심판했다. 처음에는 군 지휘자와 정치가들을 처단했고, 나중에는 위에서 말한 인종청소에 가담한 의사, 판사, 경찰 등을 피고인석에 세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냉전이 시작됐고, 미군 점령하의 서독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맡아야 했으므로 독일의 재무장과 생산력 회복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자발적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전범 심판은 ‘더 이상 생채기를 내지 말자’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1948년까지 집중적으로 펼쳐진 전범 재판의 피고인들은 상당수가 실형, 특히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61년 이전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상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주제)

5. 주인공 쿠르트는 어려서는 나치에 의해, 성장기에는 소련을 추종하는 동독 정부에 의해 ‘예술이란 국가와 사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피를 뿌리며 싸운 상대방이지만 의외로 똑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never look away)’ 는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6. 189분. 만만찮은 시간인데 어느 주말 새벽 1시쯤 보기 시작해서 4시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흐름이 빠르거나 대단한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일단 쿠르트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그걸로 끝. 3시간 순삭이다.

7. <타인의 삶>에 만족하신 분이면 무조건 봐야 할 영화.

 


<여기서부터는 아마도 스포일러.>

8. 영화는 한 세대를 휩쓴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한 예술가가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성공이 예견되는 엔딩은 일면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결코 할리우드적인 해피엔딩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지나간 시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굳이 지나간 세월의 묻혀진 진실을 파헤쳐서 새삼 또 무슨 상처를 내겠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은, 예술은 무엇을 위한 도구도 아니며 무엇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선 속 시원한 단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치 않게 그 유산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다음 세대에게 그 무게를 전가시키지 말자는 이야기일까. 이모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엔딩은 왠지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말하는 듯 느껴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