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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가 벌써 관객 100만을 넘어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워낙 기대작이었고 관심이 쏟아지던 터라 흥행 호조는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 '이끼'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는 이미 쓴 터라 이번엔 영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영화 속 인물들과 실제 인물들의 일치도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일치도 1위는 단연 박해일이겠지만, 물론 얼굴이나 분위기가 닮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캐스팅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일단 '이끼'에 대한 리뷰는 이쪽입니다.




'이끼'가 영화화된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독자들은 해국 역으로 박해일을 추천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던 듯 합니다. 박해일은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이지만, 한편으로는 반항기 풍기는 프로필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해국은 똑똑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이면서도, 세상을 손해 보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어찌 보면 너무 올곧아서 비뚤어져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남편과 사는 아내라면 가끔씩 소리를 지르는게 정상이겠죠. "제발 웬만한건 좀 대충 넘어가!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 났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박해일에겐 왠지 그런 캐릭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가장 논란이 심했던 것은 이장 역의 정재영. 이장 천용덕과 해국의 아버지 류목형 역으로는 30대 배우와 70대 배우를 각각 기용하는 방법과, 한 배우에게 노역과 젊은 역을 모두 연기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강우석 감독은 한 배우에게 모두 맡기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정재영이 선택됐습니다. 젊은 천용덕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판단과, 감독이 함께 일해서 신뢰할 수 있는 배우를 쓰겠다는 뜻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아무튼 앞의 글에서도 거론했다시피 정재영의 연기는 합격점 이상입니다. 다만 류목형이 '두려움이 당신을 구할 것'이라고 선언할 때 등의 디테일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이와 관련해 솔직히 가장 기대와 벗어났던 캐스팅은 류목형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어찌 보면 가장 신뢰하는 배우 중 하나인 허준호를 이 역할에 캐스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류해국이나 천용덕에 비해 훨씬 깊이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강우석 감독도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원작의 인물에 비해 영화 속의 류목형은 어느 정도 평범한 성직자의 느낌이었달까요. 류목형은 그저 자애로운 인물의 느낌이라기보다는, 광기 어린 교주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없이 포근하게 온갖 죄인들을 끌어안는 모습인 동시에, 말 한마디로 산전 수전 다 겪은 천용덕이 움찔하게 하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눈빛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신비로운 인물의 이미지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유선. 영화 속의 영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비극적인 여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선이라는 배우가 갖고 있는 '청승'의 극한이죠.

하지만 원작의 영지는 오히려 기이한 마을의 유일한 여자로서, 그 위치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이는, 묘하게 육감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캐릭터입니다. 그 마을의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분위기에 여족장처럼 잘 젖어 있는 모습이죠. 하지만 영화 속 유선은 매일 밤마다 눈물로 지샐 것은 같은 연약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원작과 달라서 효과적인 부분도 없습니다.




유해진, 김준배, 김상호가 연기한 마을 주민 3인방은 그림에서 튀어나온듯한 조화가 빛났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들 세 캐릭터가 얼마나 흉악하고 무서운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김상호가 연기한 성만은 원작 속에선 전율을 느끼게 하는 사이코패스지만 영화 속에선 그저 흔한 밀렵꾼으로 축소되어버리더군요. 아무튼 신체적인 강건함으로 상대를 위압하는 성규 역의 김준배는 매우 인상적인 호연을 펼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작과 가장 달라진 캐릭터로는 박검사를 들 수 있습니다. 유준상이 연기하는 박검사는 시종일관(?)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는 캐릭터입니다. 오버액션도 제일 많고, 어쩌면 원작 '이끼'의 박민욱 검사보다는 '공공의 적2'의 강철중 검사(설경구)와 훨씬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원작의 박검사는 류해국에 대한 원한과 막혀버린 출세길에 대한 좌절감으로 폭발하기 직전에 있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박검사는 해국 때문에 시골로 좌천된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듯한 묘한 냄새를 풍깁니다. 원작에서 '고민'의 요소가 어디론가 가출해버린 캐릭터가 된 것이죠.

물론 전후사정을 다 떼고, 그저 활기차고 정의로운 검사 캐릭터가 하나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유준상은 그 연기라면 제대로 멋지게 해 냈습니다.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작과의 비교인데, 캐릭터 하나의 성격이 변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캐릭터가 그대로인데 배우가 살리지 못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절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만화 원작과 영화 속 캐릭터의 일치나 불일치를 얘기하는 건 그냥 그걸로 끝나야 합니다. 그 일치와 불일치를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건 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원작 팬과 영화 관객이 모두 환호하면 좋겠지만, 원작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영화 관객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원작과 동떨어진 각색이라도 독자적인 생명을 갖는다는 건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원작에서 빼다 박은' 캐스팅이라고 반드시 베스트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캐스팅은 정말 정교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죠. 최근에 썼던 글 하나를 붙여 보겠습니다.


제목: 캐스팅

1938년 마거릿 미첼의 베스트셀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은 누가 남녀 주인공을 연기할 것인가에 몰렸다. 레트 버틀러 역을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 클라크 게이블이 한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여주인공 스칼릿 오하라 역은 달랐다. 캐서린 헵번, 메이 웨스트를 비롯한 30여 명의 톱스타와 그 몇 배나 되는 신인들이 물망에 올랐어도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셀즈닉은 '마법과도 같은 그 어떤 것'을 가진 여배우를 원했다.

여주인공 없이 촬영이 진행된 지 4개월이 지나서야 셀즈닉은 영국 출신의 비비언 리를 낙점했다. 여론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무명의 영국 배우가 '남부의 정신'을 대표하는 여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이유였다. 하지만 셀즈닉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완성된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39년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지금도 '너무나 완벽한 캐스팅이라 감히 리메이크할 수 없는 작품'의 대명사로 꼽힌다.

원작이 있는 영화치고 독자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감독이 고른 실제 배우의 일치 여부가 논란이 되지 않은 예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최근에는 '싱크로율(synchro率)'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실제 캐스팅된 배우가 원작의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기존 독자들의 지지가 높지만 그것이 반드시 최상의 캐스팅인 것은 아니다.


올해 한국 영화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원작인 윤태호의 동명 웹툰(인터넷 연재 만화)이 워낙 인기였던 탓에 제작 초기부터 싱크로율 논란에 시달렸다. 주인공 중 유해국 역의 박해일은 독자들로부터 '싱크로율 100%'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이장 역의 정재영은 '싱크로율 50% 미만'이란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지난 15일 영화가 공개되자 정재영에 대한 지지도는 급상승하고 있다.

최근 후임 총리와 청와대 비서진 인선이 화제다. 민심 속의 이미지와 싱크로율이 높은 캐스팅, 뭘 시켜도 잘 해낼 듯한 인기스타를 앞세우는 캐스팅에도 장점이 있지만, 처음에는 평이 엇갈려도 세월이 흐른 뒤 적역이었음이 입증되는 게 진정한 인선의 묘미다. 캐스팅 책임자의 안목과 의지가 더없이 중요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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