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잘 싸웠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솔직히 말해 16강이 쉬운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얘기한 적 있지만 1986년 이후 지금까지 16강에 한번이라도 가본 나라는 40개국, 두번 16강에 오른 나라는 27개국뿐입니다.

우루과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한 16강전에서도 역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포를란을 봉쇄했고, 더 많이 뛰었고, 기대 이상으로 미드필드를 장악했습니다. 아르헨티나전 대패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상대 공격을 차단해나갔습니다.

종료 휘슬과 함께 경기장에 쓰러져버린 선수들의 아쉬움이야 뭐 더 이상 얘기할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말마따나 이번 대회는 희망의 대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중심에 이청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청용은 이번 대회 전이라고 무명 선수도 아니었습니다. 양박쌍용이라는 미디어의 호들갑이 대변해주듯, 이미 프리미어리거 이청용은 한국의 핵심 전력이었고, 큰 활약을 해줄 걸로 기대됐던 선수입니다.

한국 대표팀에서 최저 학력을 보유한 선수(중학교 중퇴^)지만 축구 지능은 탁월합니다. 승부욕도 뛰어납니다. 아르헨티나전에서도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고 상대 진영을 '쑤시고' 다니다가 결국 한골을 따낸 건, 선수들이 흔히 '구질구질하다'고 말하는 플레이이기도 하지만 그 시점의 한국으로서는 정말 절실한 한 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욕은 한국 축구의 힘이었습니다.

그런 근성이 바로 오늘날 볼턴 원더러스의 이청용을 만든 거란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이번 대회의 한국 축구가 희망만을 남긴 건 아닙니다. 일단 가장 큰 고민은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사라질 2002년 황금 세대의 퇴장입니다.

이번 대회 내내 한국 축구의 심장이었던 박지성은 4년 뒤 33세가 됩니다. 본인은 이미 은퇴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가장 믿음직한 선수였던 이영표 역시 이번 우루과이전이 국가대표로서의 은퇴 경기라고 말한 바 있죠. 이미 이운재와 안정환은 이번 대회 들어 주전 자리를 내주고 물러 앉았고, 차두리 역시 이번이 마지막 대회일 것이 분명합니다.



박지성 정도면 다시 한번 참가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본인의 뜻이 바뀌어야 할 것이고, 4대회 참가를 성사시킨다 해도 4년 뒤의 박지성에게 지금같은 폭발적인 활동능력과 기량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난세에 영웅이 나듯, 4년 사이에 누군가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해서 그 자리를 메워 주길 바라지만 사실 한국 축구의 환경상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엷은 선수층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대표팀 내에 존재하는 선수들간의 '레벨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4년 뒤라고 해서 저절로 박지성-이영표의 빈 자리를 메울 선수들이 등장할 거라는 건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이청용과 기성용, 박주영의 존재 의미는 각별합니다. 박주영에 대해선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이번 대회 내내 아쉬웠던 것은 박주영의 투톱 파트너입니다. 차라리 마지막 순간 제외된 이근호가 나았을 거란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공중볼의 키핑 능력에서는 지난 20년 사이 박주영보다 안정된 선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대회 들어 마지막 터치 한방이 아쉬웠지만, 오히려 박주영에게 공이 가기 전에 슈팅을 기피하던 다른 선수들을 봐선 그들에게 갈 수도 있었던 비난까지 박주영이 싸 안았다고 봐야 할 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몸싸움 능력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과거 청소년 대표 시절의 신영록 같은 스트라이커가 성장해 박주영과 짝을 이뤄 주길 바랍니다.



물론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문제라는 시각에는 당연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 역시 전체적인 한국 축구의 엷은 선수층의 문제라는 걸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어느 나라나 포텐셜이 뛰어난 선수는 수비보다는 공격수로 뛰기 마련이고, 결국 문제는 그렇게 재능있는 선수들로 공격 자원을 채우고 수비수까지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한국에 축구선수가 충분하냐는 문제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김주성이나 현재의 차두리처럼 공격 카드에서 수비수로 모습을 바꾼 선수들의 존재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곤 합니다. (사실 이런 면에선 수비형 미드펄더로 활동 영역을 축소한 2014년 박지성의 모습이 좀 기대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2014년의 한국은 이청용과 기성용, 박주영을 주축으로 새롭게 보강되는 선수들이 주축을 이룰 것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회 직전 빼어난 가능성을 보였던 이승렬이나 김보경의 좀 더 많은 출전시간이 아쉽습니다.

역시 여러번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축구가 '16강을 목표로 하는 팀'에서 '8강을 목표로 하는 팀', 혹은 '우승후보'까지 가기 위해선 아직 더 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1명의 박지성이 있는 팀에서 11명의 박지성이 있는 팀으로, 그리고 스쿼드 전원이 박지성인 팀으로 가는 길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이번 대회에 한국을 좌절시킨 수아레스의 두번째 골은 어떤 호언장담보다도 '월드 클래스'의 공포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골이었습니다. 이번대회에 본 골 중에는 북한-브라질 전에서 마이콘이 넣은 브라질의 첫골과 함께 '개인기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웅변하는 것 같은 골이더군요.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이 터뜨린 두번째 골이 한국 축구사에 남을 대단한 골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 위에서 말한 두 개의 골 같은 득점을 해낼 수 있는 선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14년, 2018년이라고 해서 나온다는 보장은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성원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런 천재와 영웅들을 갖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됐습니다. 아마도 이런 희망이야말로 2010년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수록, 22세에 이미 월드컵의 에이스로 떠오른 선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희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청용. 졌다고 부끄러워 마라. 고개를 들어라. 너의 월드컵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글이 마음에 드셨으면, 왼쪽 아래 손가락을 눌러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