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아무 기대도 하지 않다가 반가운 얼굴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BC TV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나오시더군요. 한때 MBC 뿐만 아니라 한국 예능의 큰 흐름을 이끌었던 스타 PD였고, 최근에는 저술가로 변신하신 분입니다. 아프리카를 다녀 오신 경험을 쓰셨더군요.

사실 PD가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다는 것은 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현재 MBC 예능의 주력인 여운혁 CP 계열의 직계 선배이고, MBC 예능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는 점, 그리고 현재 예능 PD로 일선에 복귀를 앞두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무릎팍 도사'에 이 분이 출연한 것은 지나친 전관예우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건 방송을 보기 전 얘기고, 어제 이 분이 풀어 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만한 분이었다는 걸 수긍하게 될 겁니다. 특히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가 당시 온 국민에게 줬던 감동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라는 방송사는 드라마건 예능이건, PD를 스타로 만드는 데 있어 다른 방송사들보다 항상 한발 앞선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영희 PD는 90년대 중반의 MBC를 대표하는 예능 PD였죠. 그 위로는 송창의 주철환 은경표와 같은 거물들이 있었고, 이후에는 고재형 여운혁 김태호로 예능 스타 PD의 명성이 이어집니다.

이 분을 처음 뵈었을 때가 주철환 전 OBS 사장의 조연출일 때였으니 참 오래 전 일입니다. 그 무렵이 바로 이 분이 '몰래카메라'를 열심히 찍고 계실 때였죠. 방송에서도 이범학의 몰래카메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몰래카메라'라는 포맷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송창의 PD(현 tvN 대표)였지만, 이범학과 이경규가 등장한 '몰래카메라'는 주철환 PD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지휘봉을 넘겨 받은 첫 회의 기획이었습니다. '퀴즈 아카데미'를 연출하던 주 PD가 '일밤'으로 옮겨가면서 '퀴즈 아카데미'의 포맷을 오락 프로그램에 응용한 것이었죠.

이 얘기는 지난번에 상세히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이 예능 스타 PD의 계보에서 김영희 PD와 주철환 PD는 유독 밀접한 관계입니다. 바로 MBC 예능에 면면히 계승되는 '교양파'의 전범을 만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능도 생각하면서 봐야 한다' 혹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서도 뭔가 느끼고 생각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당의정 이론'의 대표자들이죠.

물론 엄밀히 말해 이런 이론을 주창한 사람은 주PD지만 이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구현한 사람은 김PD였던 겁니다. '남는 것이 있는 예능'은 이른바 '양심냉장고'와 '이경규가 간다', 그리고 신동엽의 '신장개업'과 '러브하우스', 또 '느낌표'의 '기적의 도서관'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사람들은 TV가 그저 웃기고 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세상만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공 뒤에는 김PD의 힘이 있었던 거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시 여의도 MBC 3층에 있던 예능국의 '일밤' 회의실에 가 보면 이 분은 깨 있는 모습보다 잠자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회의실 한켠에 아예 야전 침대가 있고, 거기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죠. 방송에서도 '예능국장이 되자 집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놨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미 평 PD일 때부터 회의실에는 침대가 있었습니다. "왜 매일 주무시느냐"는 농 섞인 질문에 "송기자, PD 해봐. 간이 상해"하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양심냉장고'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당시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습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 '잘하면 횡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래. 이게 원래 지켜야 하는 선이었지'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파고 든 것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뒤로도 이경규와 김PD는 수없이 많은 작은 영웅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 많은 주인공들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 앞에서 망설이는 할머니(네. 이 분이 바로 설정이죠)의 짐 보따리를 선뜻 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 한 국군 장병이었습니다.

얼굴도 늠름하게 잘 생겼던 이 장병은 "할머니를 보는 순간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쪽 빠진 멘트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선물을 받고 난 마지막 말까지도 "혼자 휴가 나와 미안한데, 동료 전우들에게도 한턱 내야 겠다"는 환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더군요. 장동건이 나온 들, 이영애가 나온 들 이보다 멋진 방송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김PD와 이경규의 실험은 "톱스타 없이도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전례를 확실하게 남겼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낳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극복한 건 아이디어에서 끝나지 않는 끈기와 뚝심의 힘이었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송에서도 일본 후지TV 연수 얘기가 나오던데, 이분이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 하신 얘기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10년 이상 전의 얘기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가니 우리와 큰 차이 없는 방송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인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됐다. 예능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데 PD가 10명, 스태프가 60명이 넘었다. 현지인들에게 '우리는 이런 걸 PD 2-3명이 한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면서 '아, 한국 PD는 슈퍼 PD다'라며 칭찬을 하더라.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 갔는데 선임 PD가 한마디 하는거야. '사실은 일본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더 높은 품질을 위해 급속도로 투입하는 인력이 많아진거다. 다 필요해서 늘렸다.' 그러니까 낮에는 예의상 그렇게 얘기했던 거지."

2009년, 한국 예능 프로그램도 2시간짜리 주말 버라이어티를 만드는 데 모두 합치면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투입됩니다. 하지만 예전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국장 아닌 김PD의 복귀 출사표는 마냥 반갑습니다. 뭐 늘 성공하는 프로그램만 만드신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한 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p.s. 혹시 이 글 보시게 되면 책 한권 보내주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