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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듄>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튼 꼭 극장에서 보시길.

1만몇년이라는 연도(서기인가?). 우주제국의 귀족들이 행성 하나씩을 자신의 영지로 갖추고 군림하는 시대. 명망있는 아트레이데스 공작 가문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환각제 '스파이스'의 산지 아라키스 행성을 관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가장 큰 강점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차분한 진지함'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이야기든, 스토리텔러가 이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빌뇌브의 영화들은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성실한 완벽주의에 끌려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눈을 팔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주를 무대로 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도 그런 성실성은 빛을 발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은 한스 짐머의 음악과 함께 가히 압도적이다(사실 스토리도 앞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유사해질 기미가 보인다). 우주전함은 광선포를 쏘고 있는데 전사들은 검(광선검 아님)으로 승부를 겨루고 있는 기이한 상황도, 빌뇌브의 손을 거치면 그럴싸한 긴장을 유발한다. 어느 순간 설득당하고 마는 진지한 친구 같달까. 



티모데 살라메의 여린 몸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남주를 연상시키는 듯 나름 성공적. 하지만 배우 중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레베카 퍼거슨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캐릭터의 약점이 퍼거슨 덕분에 보완되는 느낌이다. 퍼거슨의 캐스팅으로 인해 제시카-폴 간엔 모자간답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생긴 건 감독의 의도적인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개봉이 다소 늦었지만 그 시점에 이미 해외 개봉(미국 기준임)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제 관건은 빌뇌브가 몇 편까지 감독을 맡는냐 하는 문제.

이 영화가 '파트 1'이 된 것은 6권으로 된 시리즈 중 1권의 파트1이라는 뜻이다. 현재 빌뇌브는 1권을 2편으로 나눠 만들고, 2권을 3편으로 하는 트릴로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트릴로지가 성공하면 소설 3권 이후도 죽 시리즈로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과연 빌뇌브가 계속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마블 외에도 기다려 가며 볼만한 시리즈가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 그런데... 한 2023년에는 볼 수 있는건가. 

P.S. 워낙 방대한 원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일각에선 세계관을 공부하고 가야 하네 말들이 많던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이라면 관람에 아무 무리 없을 듯. 

P.S.2. 1984년작인 데이비드 린치의 <듄>(국내 비디오 출시명은 <사구>)은 왕년에 보기는 했으나 혀를 끌끌 차며 잠들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거대한 샌드웜 뿐. 문득 이 <사구>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서극의 <촉산>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기억도 난다.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은 멀리 하고 싶었던 기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