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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보일, 다니엘 크레이그, 케네스 브라나, 사이먼 래틀, 폴 매카트니, 미스터 빈, 데이비드 베컴, 조안 K 롤링, 엘리자베스 2세, 메리 포핀스, 볼드모트...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는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섹스 피스톨스, 퀸, 유리스믹스, 프로디지....

 

런던 올림픽 개막의 충격이 하루 종일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니 산만하고 별 재미 없던데...'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행사를 즐겼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개막식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올림픽 개막식 치고 멋지지 않은 적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런던 개막식이 줄곧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지금까지의 개막식들이 보여줬던 틀을 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국만이 할 수 있었던' 걸 보여줬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의 개막식 가운데 최고를 치자면 저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을 꼽아왔습니다. 그리스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신화를 먼저 떠올리겠죠. 그 소재를 최대한 이용한 당시 개막식은 누가 봐도 예술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도 좋은 평을 받았지만 미적 완성도보다는 어쩐지 물량으로 밀어붙여 보는 이를 압도하려는 듯한 '세 과시'가 좀 거부감을 주더군요. 아무튼 아테네 개막식의 미적 완성도는 여전히 역대 최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역대 최고 물량의 개막공연, 어떤 의미였나. http://5card.tistory.com/115)

 

하지만 런던 개막식은 정말 새로웠습니다.

 

 

 

 

올림픽 개막식은 어떤 경우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내용으로 꾸며집니다. 특히나 세계 무대에 나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개발도상국들은 이 행사를 국가 홍보를 위한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가 오랜 나라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개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이 주 재료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대니 보일은 이런 관례를 한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영국은 흔히 '오래된 나라'임을 강조해 온 나라입니다.

 

 

 

 

런던 개막식은 약 18세기를 배경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케네스 브라나가 셰익스피어의 고전 '템페스트'의 구절을 읊긴 했지만 18세기 이전까지 약 2천년의 역사는 그냥 스킵해 버린 겁니다. 스톤 헨지도, 아서 왕도, 사자왕 리처드도, 마그나 카르타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항해 시대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영제국의 건설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 등 영국 역사의 전성기는 아예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pandamonium(지옥)이라는 이름으로 산업혁명과 혼란의 도래, 노동운동의 시작 등을 다뤘습니다.

 

(과거 - 잉글랜드의 화려한 역사 - 를 자꾸 강조해 봐야 '피정복지역'인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 사람들의 소외감만 강조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와 계관시인들의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이날 개막식에 등장한 사람은 '해리 포터'의 조안 K 롤링이었고, 피터 팬과 메리 포핀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동 복지와 전 세계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베겟머리에서 읽어 주는 책들이 바로 영국 작가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을 강조할 때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게 얼마나 많은데...." 라는 자세.

 

메리 포핀스가 볼드모트와 요괴들을 퇴치하는 것으로 끝난 이 세션의 제목이 바로 "second to the right and straight on till morning"이었습니다. 이 말은 '피터 팬'에서 피터 팬이 네버랜드의 위치를 설명할 때 하는 말이었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행사는 하나도 과장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어떤 어린이가 피터 팬과 해리 포터를 모를까요.

 

 

 

 

어쨌든 과감하게 '유구한 역사' 부분을 들어 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메운 요소들 중 두 가지에 방점이 찍힙니다. 바로 '대중문화가 주제였다'는 것과 '영국식 유머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다른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그 나라 출신의 유명 음악인이나 스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예 대중문화가 이렇게 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로 등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007,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왕을 호위하고 경기장으로 온다는, 그리고 여왕이 낙하산을 타고 경기장으로 들어온다는(물론 장난입니다만) 설정은 다소 엄숙하고 경건했던 지금까지의 개막식에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입니다.

 

 

 

 

이날 행사 가운데 유일하게 클래식적인 요소였다면 베를린 필의 마에스트로 사이먼 래틀이 등장했다는 점이지만, 그 래틀 경이 지휘한 곡 조차도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의 주제곡. 거기다 '미스터 빈' 로완 애킨슨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잠시도 심심할 틈을 주지 않도록 촘촘한 웃음을 줬습니다.

 

 

 

 

또 '영국이 20세기 대중문화의 물결을 주도했다'는 자랑화제의 음악 파트에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주제는 'SNS를 통한 사회의 변화'였지만, 그 과정에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주말 밤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맞춰 수십곡의 히트곡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곡들이 모두 MADE IN UK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이 잠시 흘러나오는 듯 하더니 곧이어 지난 세기 전 세계의 팝 차트를 장식해온 클래시, 섹스 피스톨스, 데이비드 보위, 퀸, 폴리스, 유리스믹스, 그리고 프로디지의 곡들이 영상과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야말로 영국의 일세를 풍미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대중음악사라고 해도 좋을 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록의 개척기는 물론이고 글램 록, 펑크, 뉴 웨이브, 테크노에서 브릿 팝까지 일세를 풍미한 장르들을 영국 뮤지션들이 개척하고 주도했다는 자신감이 넘쳐 흐르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같은 대 스타들에게도 결코 편중이란 없었다는 점입니다. 워낙 스타도 많고 히트곡도 많으니 그렇게 편식할 여유가 없다는 여유가 넘쳐 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니 보일의 출세작인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언더월드의 'Born Slippy'도 한 부분을 장식했습니다. 보일의 서명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낭비(?)는 마지막까지 이어졌습니다. '개막식에 폴 매카트니가 나온다'는 정보 때문에 그 지루한 200개국의 입장을 다 지켜봤건만, 정작 등장한 매카트니 옹은 'The End'와 'Hey Jude' 단 두곡만을, 그것도 The End는 일부분만 부르고 바로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물론 그 장면 자체는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트위터에 썼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가 세계에서 제일 큰 무대에서 세계에서 제일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를 부르고 바로 사라진'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매카트니 옹은 왜 꼭 Hey Jude의 후렴부분 떼창을 시킬 때(물론 시키지 않아도 이미 관객들은 '나 나나 나나나나'를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따로' '여자들만 따로' '한꺼번에 같이'를 시켜 보는 걸까요.^^

 

 

 

어떤 나라도 자기만의 독특한 올림픽 개막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 런던 올림픽도 누구를 연출자로 기용했느냐에 따라 수천가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니 보일(바로 윗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을 썼어도 이렇게 효과적으로 영국 대중문화의 막강함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은 개막식을 통해 '봐라.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데. 잘 몰랐지? 어때. 멋지지?'라는 자세를 견지한 반면, 이번 런던 개막식은 '응. 이게 우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지? 자, 이것도 우리 건데, 물론 그것도 알지? 우리 거라는 거 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아 놓으니 정말 대단하지?' 라는 거대한 자신감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현대'를 배경으로.

 

사실 폐막식까지 생각하면 아직도 뜯지 않은 선물 보따리가 잔뜩 있습니다. 이미 엘튼 존, 오아시스, 조지 마이클의 참여가 흘러나왔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도 한번쯤은 나와 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고, 뭐니 뭐니 해도 나라가 영국이다 보니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속에 나오는 'Land of hope and glory'를 수만명 관객들이 떼창하는 모습도 연출되지 않을까 싶고... 아무튼 다음 올림픽 개막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참 골치아플 듯 합니다. 폐막 행사도 참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웨버 옹은 "올해 올림픽 때문에 뮤지컬 흥행은 망했다"고 코멘트하신 내용만 나와 있군요. 아무리 웨스트엔드 흥행이 중요해도 국가적 대사에는 좀 참여해 주시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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